닉네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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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요즘 세상은 인터넷 시대입니다.
주변 사람을 둘러봐도 모든 정보를 인터넷에서 얻고 있으며,
모든 취미생활도 인터넷을 통해 이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분을 이루는 배경도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나 역시 요즘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학교 동창 등의 전통적인 친구가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니 정말 인터넷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충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채팅에서 만난 여자, 동호회에서 만난 아줌마와
뼈가 살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끈적한 얘기가 나와야 이곳 분위기에 적합하겠지만
불행히도 이 글에는 떡치는 얘기는 단 한글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떡치는 얘기는커녕 단 한명의 여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경방에 들어와 질퍽하게 떡치는 애기를 읽고 싶었던 분에게는
심심한 유감을 표하며, 얼른 다른 글로 이동하여
즐거운 떡생활에 도움이 되는 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리지만 이 글에는 단 한명의 여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트랜스 젠더라던가 혹은 취향이 독특하여
남자가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는 내용이라도 있을까 기대하시는 분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면목없습니다만 요즘 분위기에 많이 등장하는 봉사명령 수행을 위한
건전한 글이라고 받아주시고, 떡치는 것도 가끔 머리를 식혀가며 해야 건강에 좋다고
억지로라도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 *
이러한 인터넷 시대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새로운 문화가 하나 또 있으니
바로 닉네임입니다.
거의 인터넷 시대에서는 이름 만큼 중요한 식별 도구로 쓰입니다.
누군가 호칭을 할 떄도 닉네임을 부르는 일이 더 많아진 것이 바로 인터넷 세상입니다.
내가 자주 가는 커뮤니티도 있고 동호회도 있습니다.
3군데가 가장 적극적인데, 축구 좋아하는 모임, 바둑 좋아하는 모임,
그리고 비장의 무기인 국내 최정예부대, 퇴폐관광 동호회가 있습니다.
굳이 3곳을 다 밝힌 이유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이 3가지 모임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한가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여자 회원이 한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이글을 읽으면서 혹시 여자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신 분이 계시다면 가차없이 백 스페이스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진짜 없습니다.
어느 날, 내가 자주 가는 동호회의 회원 한분이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 자주 안나가지만 그런 일은 나가서 조문이라도 해야 합니다.
면식있는 회원에게 연락하고 장례식장 앞에서 회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영안실로 갔다가 상당히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근데, 산꼭대기님 원래 이름이 뭐야???"
"......?"
그렇습니다.
달랑 닉네임만 알고 있는데 막상 영안실은 실명으로만 표시되어 있어
초상집을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해서야 이름을 알게 되었고 빈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조금은 따로 걷어서 봉투에 담았습니다.
겉봉엔 <국제민간교류협회>라고 썼습니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간판이며 암호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장 앞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 도착했을 때
안내를 맡은 청년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너댓명이 와서 거기서 꼬리를 내리고 이상하게 머뭇거리다 가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펜을 들고 이름을 적으려다 보니까....
평범하게 김ㅎㅇ, 이ㄹㄴ, 송ㅎㄱ 식의 이름을 쓰면
상주인 회원이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늘 부르던 호칭으로 적어야 누가 다녀갔는지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있게 닉네임으로 썼습니다.
일산마루
뒤에 있던 회원도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닉네임을 썼습니다.
아무개
이 회원의 닉네임은 아무개입니다.
데스크에서 안내를 하던 젊은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다른 회원이 닉네임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회원의 닉네임은 거북이왕자였습니다.
거북이
안내를 하던 청년은 이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민망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우리 일행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뒤에 있는, 아직 이름을 적지 못한 사람을 다그쳐 빨리 쓰라 했더니
이 회원은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회원의 닉네임은 에헤라 디야였습니다.
빨리 쓰라고 다그쳤지만 차마 펜을 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아, 빨리 쓰고 갑시다, 쪽팔려 죽겠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에헤라디야 라고 쓰겠습니까?"
"그래도 얼른 가자니깐!!!"
결국 에헤라디야는 다른 회원들보다 작은 글씨로 (약 16포인트) 조그맣게
에헤라디야 라고 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회원이 자리를 박차고 영안실을 뛰쳐나갔습니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모두 큰소리로 그를 불렀습니다.
"저승사자님! 어디 가세요?"
"......"
주변이 썰렁해졌습니다.
결국 우리 일행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 * *
이후 닉네임 말고 실제 이름을 알아두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핸드폰에 입력된 이름을 보면 이런 식입니다.
거북이 강성신, 저승 홍인표, 에헤라 김만수.......
지금 세상은 정말 닉네임시대입니다.
글을 마치는 일산마루의 한마디 -
좆그늘님, 동호회 모임의 초상집엔 가지 마세요.
일산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