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의 하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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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준비
늘 정숙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요조숙녀여야 한다. 더군다나 남편과 다 성장한 아들, 그리고 조카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난 아직 여자의 본능이 살아있고 그것을 억누르는데 버겁다. 폭발 직전의 스트레스,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일단 모두를 보낸 오전 시간, 난 또 다른 나로의 변신을 꾀한다. 거들과 맥스 팬티를 벗어 던지고, 롱 치마 역시 한쪽에 구겨 놓는다.
2단 옷장 안쪽의 옷들 사이로 나만의 세계가 있다.
White, 오늘은 하얘지고 싶다. 정숙하게 보이는 바보스러운 하얀색.
조심스레 작은 상자를 연다. 몰래 숨겨 모은 팬티들, 시스 록 느낌의 맥스 미니를 꺼낸다.
손바닥만 한 팬티를 가만히 손 위에 올려놓는다. 앞뒤로 겹쳤음에도 손의 살들이 비쳐서 겉으로 드러난다. 하얀 반투명 맥스 미니, 초미니보단 덜 하지만 충분하다.
옆에 있는, 역시 흰색의 티팬티가 눈에 들어오지만, 오늘은 아니다. 어제 새벽에 세정을 한 나는 그냥 흰색의 팬티를 입는다.
두 개의 엉덩이를 세로로 반만 가려주는 팬티가 엉덩이에 달라붙어 압박한다. 델타 모양의 앞부분 역시, 손질하지 않았으면 음모가 보였을 정도로 작아서 더욱 옥죄인다.
살짝 떨린다.
브래지어 역시 같은 색상과 같은 소재의 것으로 고른다.
유두와 젖무덤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방안에 살짝 불어온 삭풍에 유두가 파르르 떨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뒤쪽에 길게 줄이 하나로 간 이태리산 투명 스타킹으로 몸을 감싼다. 발끝부터 서서히 올리며 몸과 하나 되게 한다. 엉덩이 부분을 끌어올려 덮자, 팬티의 압박이 한층 더한다.
이제 긴팔의 쫄티를 입는다. 터틀로 골랐다. 가벼운 시스룩 브래지어이기에 브래지어 보다는 그 안의 모습이 오히려 강조된다.
치마는 무얼 입을까? 청치마? 노출은 어쩔지 몰라도 착용감의 만족이 덜하다. 역시 면 스판덱스다. 흰색 면 스판덱스를 골랐다. 이건 길다. 무릎길이.
오늘 난 더 짧고 더 강렬한 걸 원한다. 무릎에서 15센티의 스판덱스 스커트를 입는다. 지퍼도 없다. 다만 타이트하기에 스판이 큰 몫을 담당한다.
액세서리와 화장은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 목걸이 하나와 립스틱, 그리고 가벼운 볼 터치로 마무리한다.
전신 거울에 비춘다.
재킷을 걸쳐야만 가려질 듯한 상체의 노출, 도드라진 엉덩이는 어쩔 수가 없다. 오리 엉덩이처럼 튀어나왔기에 가벼운 면 스커트에선 팬티 라인은 감출 수 없다. 감추기도 싫다.
가벼운 향수를 뿌리면서 자동차 키 지갑을 백에 넣는다. 그러나 난 집에서 벗어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를 탄다.
그리 세월의 짐으로 힘겨워 보이지 않는 운전사.
뒷좌석 가운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다리가 살짝 벌어진다. 절대 노골적이지 않고 그 모습이 되레 자연스럽다.
간혹 짧은 스커트를 입고 그 속이 보일까 염려되는지 연신 스커트 자락을 쓸어내리고 당기는 여자들을 보면 오히려 왜 그럴까, 차라리 입지 말지 하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민망해진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그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
가까운 압구정역을 지나 신사역에 내리기로 했지만, 역삼역까지 갔다.
택시로 무작정 어딜 간다는 건 사실상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던 차에, 근방이 2호선 역삼역이었다.
택시 기사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려 스커트 속을 슬쩍 본다.
아무 의미 없는 눈길로 비스듬히 기대어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가 룸미러를 아래로 조절해서 날 보는 걸 알았었기에 당연히 내릴 때 그럴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낯선 남자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난 동요조차 없었다.
남루한 느낌. 그건 내가 정말 벗어나고픈 생활의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난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것이다.
택시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뒤로 하고 난 총총히 지하철 계단으로 몸을 미끄러트린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 공기부터 다르다. 향기로운 비누 냄새와 보디로션 냄새, 그리고 저마다 사연을 안고 있는 향수가 뒤섞여서 혼탁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것은 바로 남자들의 땀 냄새.
여름이라 그런지 더 심한 것 같다. 몇 주 전보다 더 심한 걸 보니 말이다. 하긴 그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도 그 이유를 더 하고 있어 살짝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만원 지하철을, 푸쉬맨들에게 떠밀려 사방을 사람들로 가두어지고 난 뒤에,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간신히 떠올랐지만 정작 생각나는 게 없었다.
부천에 있는 친구 순영이. 일찌감치 이혼해서 혼자 된 후, 술을 파는 작은 카페를 하고 있었다.
늘 나의 자잘한 고민 같은 내 삶을 모두 제 일인 것처럼 들어주고 화가 나서 술을 연거푸 마시고, 남편과의 문제를 들을 때면 기어이 가게 문을 닫고 둘이 술을 마시던 여고 시절의 순임이가 떠올랐다.
이른 시간이어서 집에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핸드폰을 꺼 놓은 것을 알면서도 간혹 가게에서 자기도 하는 애니까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앉을 자리가 쉽게 발견되지도 않았다. 한 정거장이 지나 운이 좋게도 내 앞의 청년이 일어났다. 왜 그리 고마운지.
지하철의 잔잔한 움직임과 덜컹거림은 아침잠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서인지 눈이 감긴다.
서서히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다리를 벌리고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두 다리 사이에 들어오는 또 다른 다리. 치한이다. 31살 정도 된 셀러리맨.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품은 나에게 순영은 배부른 사모님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면 일갈했다. 그러나 얼마나 피곤했기에 숨통을 조금이라도 튈 수 있는 공간으로 밀려왔겠는가.
나는 벌어진 다리를 성급히 오므린다. 옆 사람이 봤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두 다리 사이에 힘을 더한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본 얼굴.
그에게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 그에게서는 그저 삶의 찌든, 벗겨도 쉽게 벗겨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리를 더 벌려서 그에게 따스함을 전하고 싶다.
동료에게 우쭐거리며 오늘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자신있어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괜히 장난기도 생기고, 왠지 아까 택시 운전사와는 달리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다리를 살짝 더 벌려 그의 허벅지와 종아리 무릎을 내 몸으로 받는다.
둔탁하게 떨어지는 그의 육체. 그러나 연민 이상이 아니어서이지 아무런 감흥이 없다. 난 일어나 그를 앉혔다.
다음이 신도림이다. 부천에 가기 위해 갈아타야 하는 신도림. 그러나 난 일어선 채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벌리고 앉은 다리 사이에 내 허벅지를 가져 댄다. 꿈틀거리는 그의 그곳을 느끼면서 난 미소를 지은 체 내릴 수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은 이미 오래전에 날 여인이 아닌, 그저 환자로 보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십 명씩, 완전히 벗은 두 다리 사이를 벌리고 그 안의 질까지 그에게 맡기는 여인들을 보면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그에게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내 몸은 어떨까 생각해도 그럴 듯싶었다.
신도림에서 갈아타야 했다. 층계를 내려가는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는 내게 어떤 묘한 긴장감을 주어 온몸에 힘을 주고 마치 미스코리아나 슈퍼 모델 같은 자세를 요구한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가슴을 펴며 걷는 모습. 그러나 계단은 언제나 이런 옷차림을 입고 오를 땐 더더욱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감춰야 한다는 생각과 살짝 보여지고픈 욕망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고, 그 갈등 속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오르게 된다. 어설픈 손동작으로 치마의 뒷자락을 잡지도 못하고, 노출이 심할 듯싶을 때만 핸드백으로 살짝 그 위치를 가리게 내 방법이다.
푸시맨이 간신히 집어넣어야 할 정도였다. 신도림역은 항상 만원이다. 거의 마지막일 거로 생각하며 푸쉬맨의 손길에 밀려 전동차 안에 들어갔지만, 내 뒤로도 더 들어왔고, 또 그만큼 서로 밀착되는 1호선.
두 손에 백을 쥐고 가슴으로 모았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지만 아무래도 소매치기가 더 거슬리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치여 끙끙거리는 신음이 들린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이 일을 매일같이 겪는 사람들이 못내 안쓰러웠다.
전화가 왔다. 간신히 백에서 꺼내 보니 남편이었다.
받고 싶지 않았다. 진동으로 해놓는 버릇 덕에 도로 백에 넣고는 다시 가슴께로 모으는 순간,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