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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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안 받네. 어디야?」
슬그머니 주위 눈치를 살피며 휴대 전화를 쥐고 일어났다. 주기적으로 울리는 진동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분 단위로 번갈아 가며 오는 전화와 문자는 받을 때까지 하겠다는 발신인의 의지가 느껴졌다. 약간 질리는 기분으로 휴대 전화를 들고 중도를 빠져나왔다.
휴게실로 들어가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 여덟 통에 마지막 문자는 30분 전에 온 것이었다. 발신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정지헌
변변한 애칭 없이 달랑 뜬 이름.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변명거리를 고르는데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무음으로 해 놔서 몰랐어.”
- 집이야?
“아니, 도서관. 내일 한 과목 남았어.”
- 나 지금 서울이야.
“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어?”
- 하루 일찍 도착했어. 지금 나올래? 잠깐 얼굴만 보고 갈게.
집요하게 울린 전화와 달리 그는 산뜻하게 물어 왔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았다. 지금 시각이 10시 반. 11시쯤 만나면 자정 전에 들어올 수 있으려나.
그가 정말 얼굴만 보려고 이 밤에 달려오리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 내일 시험이 민사소송(민사소송법)이었던가? 이번에 범위가 꽤 넓지, 아마.
길어지는 침묵에 그가 슬쩍 말을 보탰다. 일부러 알면서 떠보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민하는 순간마다 그는 눈앞에 당근을 흔들며 사람을 조종하려 들었다.
“오래는 안 돼.”
- 도착하면 전화할게.
미리 선을 긋는 말에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끊어진 통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나가려 했건만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새가 탐탁지 않다.
마지막 만남은 여행 가기 전날이니, 날짜로 따지면 한 삼사일 된 것 같다.
만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거절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든다. 거절했더라도 워낙 깔끔한 성격이니 두 번 권하진 않았겠지.
그런데 왜 자꾸 기분이 애매한지 모르겠다. 영 찜찜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니 다은이었다.
“아냐.”
생각을 지우고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네 자리에 가도 없길래. 자, 여기.”
다은이 복사한 서브 노트를 건네주었다. 시험을 앞두고 서로 주제를 나눠 서브 노트로 정리하고, 정리한 노트를 돌려 보며 시간을 절약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눈대중으로 쫘르륵 넘겼다.
“복삿집 문 닫지 않았어? 어디서 했어?”
“학과 사무실.”
“주제 몇 개 찍은 거야? 스무 개?”
“아니, 스물다섯 개. 너무 많나?”
다은이 살짝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 외울 거 아니잖아. A급 다섯 개는 완벽히 외우고, B급 열 개는 목차만 완벽히, 나머지는 그냥 여러 번 읽어서 눈에 바르면 되지.”
“말이 쉽지. 당장 시험이 내일 9시인데. 난 A급만 보고 나머지는 목차만 외우고 들어가려고. 어차피 법전 주니까 안 되면 소설 써야지, 뭐.”
다은이 죽는소리를 하며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이어서 무심코 식혜 버튼을 눌렀다.
“어, 그거.”
배출구로 나온 건 포도 음료수였다. 다은이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포도 싫어하는데. 이거 식혜 누르면 포도 나오는데 깜박했다.”
“이거 상현 선배가 관리하지 않아? 그 선배는 고치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왜 안 고치는지 모르겠다. 이리 줘.”
포도 음료수를 가져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투입구에 넣었다. 그러곤 포도 버튼을 눌러서 배출구로 나온 식혜 음료수를 다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귀엽게 웃은 다은이 스스럼없이 내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는 어색하게 팔을 내어 주었다. 이런 다은의 부드럽고 말랑한 기질은 내게 없는 미덕이다. 건조하고 삭막한 내 어디를 보고 그는 흥미를 느꼈을까.
우리는 음료수를 들고 휴게실 밖으로 나와 정자 벤치에 앉았다.
정자 아래로 벚꽃길이 기다랗게 이어졌고, 가로등 아래 하얗게 만개한 벚꽃은 절경이었다.
벚꽃길은 낮에 보는 광경도 근사했지만, 야경이 훨씬 멋졌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달콤한 꽃향기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3학년, 낭만을 즐길 여유는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공부하다가 잠깐씩 열기에 휩싸인 도서관을 탈출해 눈앞의 풍경을 보며 가쁜 숨을 돌릴 뿐이다.
“시험이랑 병행하니까 힘들어 죽겠다. 선배들은 어차피 공부하는 거, 학교 시험 따로 사시 따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쉽냐?”
“최대한 양쪽 공부 스케줄을 맞춰야지.”
캔을 입에 가져가며 덤덤히 말했다.
“난 아직도 기본법1)에서 헤매고 있다고. 후사법2)이랑 왔다 갔다 하려니까 죽겠어. 안되면 학교 시험을 버려야지 뭐 별수 있나.”
나는 둘 다 버릴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였다.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당장 다음 학기 등록조차 불투명했다.
“참, 과외는 할 만해?”
다은이 물어 왔다.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다은이 소개해 주는 과외가 요긴했다.
학벌만으로 고액 과외를 쉽게 할 수 있는 건 다 옛말로, 요새 학부모들은 다들 학벌이 좋아서 다 깐깐하게 과외 선생을 골랐다.
주요 과목이 아닌 학과는 별 메리트도 없다. 과외 자리 자체가 워낙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인맥이 좋은 다은의 신세를 졌다. 나는 음료수를 한 모금 넘기고 인상을 찡그렸다.
“과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명 더 소개해 줄 수 없을까?”
“왜, 더 필요해?”
“이번 시험만 끝나면 학생 하나가 유학 갈 것 같아.”
“글쎄, 한번 알아보기는 할게. 근데 너 과외하면서 시험 준비할 수 있겠어? 아무리 유예생이라지만 1년 금방 간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과 특성상 휴학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나 역시 반복되는 휴학 복학으로 졸업이 많이 미뤄졌다.
“해 봐야지.”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울렸다. 눈으로 양해를 구하고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기숙사 건물 뒤에 도착했어.」
잠깐 얼굴만 보러 왔다면서 인적이 드문 기숙사 건물 근처에 주차해 놓은 의도가 명백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기대감이 고조되면서 한편으로 난감했다. 매번 이번에는 그만두자고 말해야지, 다짐하면서 그가 부르면 거절하는 법 없이 나갔다.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도 지각하면 잘릴까 걱정하는 직장인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결국, 스스로가 아쉬우니 그만두지 못하는 거다.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서브 노트를 챙겼다.
“왜, 들어가게?”
다은이 일어서는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아니. 같이 교양 듣는 친구가 줄 게 있다고 잠깐 나오래.”
“경제학의 이해?”
“…어.”
“요새 그 친구 자주 만나네. 전에도 같이 밥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의아한 물음을 태연스레 넘겼다.
“타 과끼리 뭉쳐야지. 다 경영대라 팀플에 끼워 주지도 않아.”
“경영대가 특히 그렇더라. 그러게 나랑 같이 부동산의 이해나 듣자니까.”
부동산의 이해는 법대 개설 과목이라 점수 따기 쉽다고 법대생들에게 특히 인기 있었다.
나는 교양 과목에서까지 지겨운 얼굴들을 보고 싶진 않아서 과감히 패스했다. 주로 생활에 필요한 임대차보호법을 배우는 모양인데 전공과목만으로 질려서 딱히 끌리지도 않았다.
“쉬다 들어가.”
천천히 중도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기숙사 공터에는 익숙한 승용차가 주차해 있다.
참 으슥한 곳에도 차를 대 놨다. 그러고 보면 캠퍼스 구석구석 인적 드문 곳은 다 꿰고 있는 것 같다.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밝힌다는 게 그에 대한 나의 평가다. 하긴 그런 거로 치면 나도 떳떳할 건 없지만.
조소하며 차 문을 열었다. 남자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약간 피곤이 묻어났다. 늘 말끔한 옷차림도 조금 흐트러져 있다.
“공항에서 바로 온 거야?”
“어.”
짧게 대답한 그는 느슨히 이완해 있던 몸을 곧추세워 내 쪽으로 틀었다.
“저녁 먹었어?”
“그냥 간단히.”
“간단히 뭐, 학식?”
“아니. 다은이가 무슨 양고기 들어간 샌드위치를 사 왔어.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데.”
“아, 거기. 인기 많던데. 너무 비려서 난 별로더라.”
사실은 나도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공통점을 열거하며 굳이 친밀감을 쌓고 싶지 않았다.
“터키에서 먹었던 케밥이 정말 맛있었는데. 시험 끝나면 언제 한번 같이 여행 가자.”
중얼거린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질이는 숨결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을 피했다.
글쎄다. 그때까지 널 만나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예의상 인사를 끝내고 내 위로 몸을 수그리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의자 등받이에 한 손을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은 차 문을 짚으며 점점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비틀며 내게 몸을 밀착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위로 졌다.
워워. 나는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리며 진정시켰다.
“뭐가 이렇게 급해.”
“시간 별로 없다며.”
막아 내는 손을 움켜잡고 그는 조급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웅얼거리는 항의는 그의 입에 막혀 소리로 나오지 못했다. 입으로 파고든 그의 혀는 거칠게 움직였다.
나는 입을 벌리고 수동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기만 했다. 그러면 그는 조바심을 내며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 반응이 보고 싶어 처음에는 일부러 소극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다. 겉으론 점잖은 체하면서 내가 조금만 뒤로 빼면 조급하게 달려드는 꼴이 재미있었다.
눈을 감고 미적지근하게 굴자 그가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영 마뜩잖다.
“장난해? 혀 넣어. 최대한 깊숙이.”
단호히 명령을 내리고 덜컹 소리와 함께 의자를 뒤로 젖혔다.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 위로 그의 몸이 짓눌러 온다.
원하시는 대로.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에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주문대로 최대한 깊숙이.
그는 그제야 만족한 듯 탐욕스럽게 내 혀를 빨기 시작했다. 좁은 차 안에서 더는 피할 공간이 없다.
“흐읍… 읏.”
서로의 흐트러진 숨이 뒤엉키고 참다못한 그가 몸을 바짝 밀착시키며 치마 속으로 파고든다.
세상에 남은 여자는 나 하나뿐인 것처럼 안달하고 달려드는 그가 싫지는 않다.
때로 원초적인 시간은 긴장을 풀어 주고 복잡한 생각을 잊게 해 주니까, 가끔은 이렇게 즐기면서 머리 식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여자가 밤에 술 먹고 전화하면 백 퍼야, 백 퍼. 에라, 차려 준 밥상도 발로 찬 놈! 줘도 못 먹는 놈!”
왁자지껄 흥겨운 분위기 속에 술에 취한 거친 음성이 주점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어서 남자를 허락하는 여자의 치마 길이에 대한 음담패설로 이어졌다.
주위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이 나왔다. 오히려 그들은 남 들으란 듯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다.
주점 입구에 서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떠드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학과 동기와 선배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도 있었다. 눈길이 가는 얼굴이었지만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나이 먹고 저러고 놀고 싶을까. 대화 수준이 유치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도저히 대학생들 같지 않다. 나는 경멸의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 오래 기다렸지? 여기.”
멀리서 뛰어온 같은 과 동기 여자애가 숨을 헐떡이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주었다. 그저 얼굴만 눈에 익은 동기는 우연히 타 과 교양에서 만난 후로 종종 인사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교수님이 수업용으로 지정한 책이 도서관에서 전부 대출 중이라 내가 구한 책으로 돌려 보는 중이었다.
“괜찮아. 나 이제 가도 되지?”
돌아서는 나를 여자애가 붙잡고 머뭇거렸다.
“저기, 너도 잠깐 와서 인사하고 갈래? 오랜만에 복학하는 선배들하고 동기들이 꽤 많이 모였는데, 너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다들 관심 있는 것 같더라고.”
“…….”
빌린 책을 받으러 오게 한 게 미안한 모양이다. 여자애가 합석을 권했다.
주점 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복학생 무리는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질펀한 음담패설을 이어 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생전 여자라고는 구경도 못 한 놈들처럼 환장해서 섹스 타령을 하는 게 한심하다.
나이 어린 신입생이면 객기라 쳐도 나이 먹을 대로 먹은 고학번이 저러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아직 시험 안 끝났어.”
“아 참, 그렇지. 미안.”
여자애가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애하고 인사는 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사이다.
처음 내민 손을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그럼 시험 끝나고 같이 밥 먹을래?”
“어, 진짜? 나야 좋지. 책도 빌려줬으니까 내가 살게.”
생각보다 훨씬 좋아하는 모습에 거절하는 마음이 편했다. 나는 내친김에 바로 약속 시각을 정했다.
“다음 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난 공강이거든. 넌 괜찮아?”
“응, 난 괜찮아.”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응, 책 고마웠어.”
여자애하고 헤어지고 도서관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안녕하세요. 느낌이 너무 좋으셔서 그런데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독한 술 냄새가 훅훅 코를 찔렀다.
쟤 내가 한번 꼬셔 볼까.
주점에서부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에 ‘제발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걸음을 빨리했는데, 결국 접근해 왔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그쪽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저 이런 거 진짜 처음인데, 저 지금 정말 쪽팔리거든요. 근데 정말 용기 낸 거예요. 너무 제 이상형이셔서 번호 안 물어보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하아. 나는 눈에 띄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번호 알려 주시고 정 싫으면 나중에 연락 안 받으셔도 돼요.”
지겹다. 다들 어디서 배워 갖고 오는 걸까. 왜 남자들은 다들 똑같은 말로 접근하는 걸까. 하다못해 멘트에 다양성이라도 있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접
근하는 멘트까지 찍어 낸 듯 똑같다.
이쯤 되면 창의성 있는 놈이 나타나면 커피 한 잔 정도는 같이 마셔 줄 용의가 생길 정도다.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남자는 연거푸 강조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라고 하면 일단 이상한 놈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나는 무표정으로 응대했다.
“저 남자 친구 있어요.”
“아, 저도 여자 친구 있어요. 사귀자는 게 아니라요, 그냥 연락하고 지내자구요.”
남자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최소한의 예의도 지킬 필요를 더는 못 느꼈다. 경험상 저런 부류는 말을 섞을수록 더 엉겨 붙는다.
나는 ‘도를 아십니까’를 만난 것처럼 싹 무시하고 제 갈 길만 재촉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원색적인 욕이 날아왔다.
“아, 씨발.”
이어서 ‘캬악, 퉷!’ 침 뱉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들으란 듯 목청 높인 소리가 날아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별 이쁘지도 않은 게 존나 튕겨.”
“내가 그랬잖아. 가까이서 보면 별로라고.”
“나도 알아. 별로인 거. 근데 난 뭐 얼굴 보는 남자 아니니까.”
“저런 년들은 이쁘다 이쁘다 소리 들으면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안다니까. 눈이 아주 머리 꼭대기에 있어 가지고. 돈 많은 놈 만나면 쉽게 벌려 줄 거면서.”
꽉 움켜쥔 주먹 위로 동그란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위로 조금씩 경련이 일었다. 반응을 보이는 내 모습에 그들은 더욱 원색적인 조롱을 퍼부으며 낄낄거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이어 갔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다.
매너 있는 척, 예의 바른 척, 자기가 먼저 접근해 놓고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수틀리면 바로 태세 돌변해서 밑바닥 쓰레기 본성 드러내는 거.
욕을 먹어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손바닥 뒤집듯 남의 밑바닥을 자주 본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너는 남자들에게 너무 불친절해. 여자들한테만 친절하더라.”
다은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근데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여대 갈걸.”
저절로 한 맺힌 후회가 흘러나왔다. 대학에 입학하고 계속 해 오는 후회였다. 아마 졸업할 때까지 이러고 살지 싶다.
정지헌을 처음 본 건 그날이었다. 축제 주점에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복학생 무리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당연히 첫인상이 최악이었다.
그다음 만남은 다음 학기 수업 시간이었다.
브랜드 이름은 모르지만, 그는 한눈에 봐도 값비싼 옷을 입고 강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교수님이 칠판에 적은 문제를 갑을병정무 도표를 그려서 깔끔히 정리했다.
얽히고설킨 사실 관계에 학생들 머릿속도 얽히고, 교과서를 뒤적이며 더듬더듬 쟁점을 쥐어 짜내고 있을 때였다.
매끈하게 사건을 풀어내는 그를 학생들은 입만 벌리고 구경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쟁점과 근거였다.
조곤조곤 설명을 끝낸 그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나쳐 자리로 돌아갔다.
“민소, 형소(형사소송법), 자배법(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다 나오네. 에라이, 저걸 어떻게 풀어.”
“왜 아주 기본법, 후사법 다 섞어서 문제 내시지.”
교수님은 학생들 수준을 너무 높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 기죽이는 게 목적이신가? 적당히 어려워야 도전 의식이 자극되지!
남자들은 펜을 집어 던지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쪽에서 여자애들이 수군거렸다.
“지헌이 복학했나 보네. 그동안 영 심심했는데 이제 학교 올 맛이 나네.”
“그치? 자유분방하게 생긴 애들만 보느라 정신이 괴로웠는데 이제 눈 정화 좀 하겠어.”
뒷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잘생긴 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정지헌을 바라보았다.
뭐, 키 크고 팔다리 길쭉한 게 비율이 좋긴 하네. 외모도 호감형이라 확실히 고만고만한 남자애들 틈에서 튀긴 했다. 아래위로 훑어보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고, 정지헌이 슬쩍 입가를 말아 올렸다.
설마 나보고 웃는 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정지헌을 보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정지헌의 시선도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너 맞다고, 확인처럼 입꼬리를 늘여 웃었다.
그 웃음이 거슬렸다. 기분 나쁜 추파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정지헌을 쏘아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왜, 그 경영학과에 미스코리아 나갔던 애 있잖아. 오은성인가? 지헌 선배랑 사귀지 않았어?”
“그게 언제 적이야. 꽤 됐지, 아마? 지금은 미대 주은이 만나지 않아?”
“근데 누가 찬 거야?”
“여자가 찼을 거 같아. 선배가 바람피워서.”
“선배가? 오은성도 지헌 선배랑 헤어지고 바로 야구 선수랑 사귀었잖아. 여자가 먼저 바람피운 거 아냐? 주변에 연예인들도 많겠다, 헛바람 들 만하지.”
이어서 그가 사는 동네, 시시콜콜한 과거 그의 행적까지 화제로 올랐다. 듣고 싶지 않아도 가까운 자리 탓에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덕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 과거 연애사까지 줄줄이 꿰뚫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칠판에 그가 풀어놓은 케이스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내가 전과를 했다지만 그래도 같이 배우는 처지인데 흠잡을 데 없는 논리 구성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부터였다.
도서관에서, 학교 식당에서, 학원에서, 우리는 수없이 서로를 마주치며 눈에 익혔다. 그러나 서로를 의식하기만 할 뿐 대화는 없던 나날이었다.
시험을 얼마 앞둔 도서관에서 승아 언니가 그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같이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가 궁금했지만, 주점에서 섹스 타령하는 무리 속에 있던 첫인상이 더 강렬했다. 더불어 그날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근했던 남자들의 기억까지 더해져 정지헌은 강한 불쾌감으로 남아 있었다.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내는 나를 그는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의 적의를 귀엽게 보는 느낌.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나 너보다 나이 많아. 누나라고 그래.”
그래서 유치하게 굴었다. 빠른 연생으로 재수해서 따지고 보면 누나인 것도 아니었다. 나의 도발을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넘겼다.
이후 이상하다 싶을 만큼 그는 내가 가는 동선에 자주 나타났다. 학교 내에서야 그렇다 치고 심지어 행정 고시 같은 타 시험 과목 학원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인기 강사는 몇 안 되고 여기저기 학원에 흩어져 있는 인기 강사들로 시간표를 짜다 보면, 기본 강의 같은 경우 불가피하게 타 시험 강의를 수강하는 경우야 흔했다.
“첫 수업이라 판서 노트를 미처 넉넉하게 준비 못 했어요. 옆 사람하고 같이 좀 보세요.”
여기가 무슨 초등학교도 아니고. 다들 초면인 성인인데 뭘 같이 보라는 거야.
저 강사는 강의 후기 보면 맨날 저렇게 준비 부족으로 욕먹으면서 바뀌는 게 없다. 그래도 실력이 있으니 아쉬운 건 학생들이지.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옆자리에서 쓱 프린트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다가 얼굴을 굳혔다. 아는 얼굴이었다.
축제 주점에서 본 무리. 그리고 수업 시간에 보는 이로 하여금 좌절감이 느껴질 정도로 매끈하게 문제를 풀던 남자.
경멸과 질투와 경탄 그리고 프린트를 보여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애매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프린트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적의를 보인 상대에게 도움을 받는 기분이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차라리 프린트 없이 수업을 듣는 게 나을 뻔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다시 눈이 마주칠까 수업 내내 프린트에만 시선을 두었다.
조그만 프린트를 가운데 놓고 붙어 앉은 탓에 서로의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그의 숨소리와 볼펜을 쥔 커다란 손, 벌어진 어깨, 턱을 괴고 집중하다가 문득 빠른 속도로 휘갈기는 유려한 글씨체 같은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편한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필기하려고 팔꿈치를 움직일 때마다 서로의 몸이 스쳤고 그는 눈으로 양해를 구하며 미안한 듯이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벌어진 어깨를 접을 수도 없고, 그도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최대한 접촉하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신경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잘못이 있다면 빌어먹게 좁은 책상 탓이지. 돈을 쓸어 모았으면 시설에 투자를 좀 해라. 닭장 속 닭처럼 좁은 공간에 학생들 몰아넣지 말고.
속으로 염불 외듯이 욕하는 동안 불편한 수업이 끝났다.
“프린트 보여 줘서 고마워. 덕분에 수업 잘 들었어. 다음에 시간 되면 내가 밥 한번 살게.”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네고 가방을 챙기는데 지헌이 냉큼 물었다.
“다음 언제?”
“글쎄….”
말끝을 흐렸다.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 한번 밥 먹자’는 말은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많이 쓰는 인사말 아니던가.
눈치 없이 다이어리 위에 볼펜을 갖다 대며 바로 약속을 정할 듯한 눈빛으로 나를 재촉하는 그가 답답했다. 솔직히 우리가 밥 먹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시험 끝나고?”
애매하게 흐리는 말에 지헌이 스케줄러 위, 특정 날짜를 볼펜으로 콕 가리켰다.
“시험, 화요일에 끝나지?”
“…….”
차라리 음료수 사겠다고 할 걸 그랬다. 그만 습관처럼 말을 뱉어 버린 내가 원망스럽다. 저렇게 반색할 줄은 몰랐다. 눈치 없는 스타일처럼은 안 보였는데.
그러나 후회는 늦다.
“아니… 수요일.”
결국,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괜히 말 한번 잘못해서. 그렇다고 인제 와서 무르는 것도 사람 우스워 보였다.
“그럼 수요일 저녁 어때?”
“…그래.”
약속 날, 정지헌은 비싼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갔다. 학교 앞 흔한 밥집을 생각한 나는 당황했다.
홀 안을 통틀어 청바지에 진흙 묻은 스니커즈를 신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메뉴판도 어려웠고 분위기가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정지헌은 시종일관 매너 있고 여유 있는 태도로 나를 이끌었다. 그런 곳이 익숙지 않은 나는 그에게 의지했다.
정지헌은 고분고분한 내가 마음에 든 듯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스터디 정보를 내게 술술 읊어 주었다.
뭔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많이 달랐다. 차갑고 이성적이고 빈틈없어 보였는데 조금 기분 맞춰 준다고 정보를 줄줄이 풀어놓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스터디 내에서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극비로 취급하는 알짜배기 정보들을 저렇게 막 얘기해도 되나? 하여간 인맥 넓고 정보 많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대단한 놈이었다.
중간에 짜증 나게 굴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지,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와야지, 정지헌한테 일이 생겨서 갑자기 약속이나 취소되라, 하고 집을 나설 때 했던 악담이 무색하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스터디 그룹은 철저히 기브 앤 테이크를 기반으로 한 관계이다. 스터디에 들고 싶으면 나도 서브 노트와 자료를 제공해야 했다. 돈과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치마 두른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친목 위주의 스터디라면 모를까, 진짜 제대로 된 스터디 그룹들은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 무임승차자는 넣어 주지 않는다.
그게 딱히 서운하거나 서럽지는 않았다. 정보만 쏙쏙 빼 가는 무임승차자는 누구나 싫을 테니까. 늘 그랬듯이 나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과연 노력만으로 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정지헌은 계산까지 깔끔히 끝마쳐 놓았다. 나는 예의상 지갑 꺼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통장 잔액을 탈탈 털어도 오늘 나온 음식값에는 턱도 없었다.
예의상 허세라도 부릴 수 없다. 네 마음대로 비싼 곳에 데려왔으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마음도 있었고.
“잘 먹었어. 내가 사 준다고 했는데 번번이 도움만 받아서 미안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자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도와줄게.”
덤덤하게 말하는 내게 지헌이 웃어 보였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보아하니 법대생은 우리 둘뿐인 거 같더라. 행정법은 나도 좀 어려워. 우리 둘이서 잘해 보자.”
그 뒤 우리는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축제 주점에서의 기억 때문에 정지헌을 경계했는데 그는 점점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둘만 법대생이고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결속력을 높여 주었다. 상황이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었다.
페이지도 알려 주고, 자리도 맡아 주고, 바뀐 공지 사항도 알려 주고, 케이스 시험 범위도 가르쳐 주고, 여러모로 아는 사이로 두는 게 유리했다.
서로 윈윈하는 거라고 속 편하게 생각했다. 그런 느슨해진 마음을 정지헌도 알아챘던 것 같다.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이후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자꾸 옆자리에 앉으며 친한 척했다.
밥 한 번 먹은 게 별건가. 왜 남자들은 조금만 틈을 주면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는 걸까. 왜 자꾸 사람을 냉정하고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한 개를 주면 거기에 만족 못 하고 다섯 개, 열 개를 바란다.
“남자가 옆에 앉는 거 싫어. 자리도 좁은데 덩치 커서 불편해. 냄새도 안 좋고.”
돌려 말해도 못 알아듣는 눈치이기에 대놓고 돌직구를 날렸다.
돈에 눈이 먼 학원은 닭장 속 닭처럼 좁은 강의실에 학생들을 최대한 몰아넣었다. 두꺼운 법서에 외투까지 있는 날에는 몸을 옴짝달싹하기 힘들었다. 불이라도 나면 우리 다 대피하지 못하고 타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남자가 옆에 앉으면 더 숨이 막혔다. 종일 남자들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괴로워하다가 집에 갔다.
“안 붙어 앉을게. 이렇게 떨어지면 괜찮지? 그리고 나 향수도 뿌렸어. 좀 봐줘. 책을 안 가져왔어.”
그는 갖가지 변명을 갖다 붙이며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그러곤 다음 날부터 매일 학원 오기 전에 샤워를 하는지 젖은 머리로 들어왔다.
사실 정지헌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아침에 늦어서 뛰어왔는지 땀을 닦는데도 이상하게 향기가 좋았다.
그런데 나는 괜히 시비를 걸었다.
절대적으로 남자가 다수인 환경에서 여자는 존재 자체로 시선을 모은다. 나는 늘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었다. 정지헌 이전에도 아득바득 여자 옆에 앉겠다는 남자들은 여럿 있었다.
그들은 수업이 끝난 후 식당이나 버스까지 쫓아와서 두리번거리는 척 나를 찾고 쓱 내 옆에 앉곤 했다. 나는 옆자리에 책을 놔두거나 친구 자리를 맡아 놨다고 핑계 대면서 그런 남자들을 쫓아냈다.
그러니 내 옆자리를 사수하는 정지헌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넌 좀 다를 줄 알았더니 너도 결국 시시한 놈들하고 마찬가지구나 싶었고, 축제 때 첫인상까지 더해서 탐탁지 않은 마음에 갖가지 트집을 잡았다.
“신경에 거슬리니까 작게 움직이고 조용히 숨 쉬어.”
그러면 정지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추는 시늉을 했다.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치사하게 굴고 구박한 적도 많은데, 내 까칠함을 정지헌은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참 반죽도 좋다.
정지헌하고 대화를 계속할수록 말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내 쪽에서 제풀에 지쳐 그만두었다.
남자들 저렇게 말 섞을수록 엉겨 붙고 스리슬쩍 넘어가는 거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정지헌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깔끔한 애가 구박했다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강의 시간 전에 무조건 젖은 머리로 들어오는 걸 보면 그래도 애는 착한 것 같아서 모질게 대하려다가도 마음이 약해졌다.
민폐 끼치는 타입도 아니고, 다른 남자들처럼 질척하게 접근하지도 않고, 공부도 잘해서 알고 지내는 게 이득이니까.
나도 모르게 경계를 허물게 되었다.
“오늘 시험, 오픈 북이지?”
정지헌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침에 씻고 바로 나온 듯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지헌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를 펼쳤다. 그러곤 목차를 빠르게 적어 가며 복습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수업 내용을 허겁지겁 소화시키기도 벅찬데, 지헌은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꺼내는 아웃풋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지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자극도 되고 경쟁심도 생긴다.
나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피부와 높은 콧대 그리고 크고 시원하게 옆으로 그어진 눈이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 언뜻 차가움이 스친다.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생각해 보면 딱히 화를 낸 적도 없는데 편하게 대하다가도 아차, 싶어서 눈치를 보게 된다.
본인도 그런 사실을 잘 아는지 자주 웃고 말투도 다정하다. 그런 꾸며 낸 모습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데 왜 내 눈에는 웃어도 차가워 보이는 걸까.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 내게 접근한 남자들은 모두 내게 바닥을 보여 줬다. 여자한테 잘 보이기 위해 성질 죽이고 매너 있는 척 꾸며 내는 모습들. 숱하게 보아 왔다.
너라고 뭐가 다를까. 넌 언제쯤 내게 바닥을 보여 줄 거니.
나는 회의 어린 눈으로 지헌을 보았다.
“너도 볼래?”
쳐다보는 시선을 오해했는지 지헌이 싱긋 웃으며 서브 노트를 내밀었다.
보통 학생들은 자신의 피땀이 들어간 서브 노트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오픈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공부한 것의 정수이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다.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합격생의 서브 노트는 암암리에 돈 주고 거래되기도 했다. 서브 노트에 대한 철통 보안은 비단 학생들뿐만 아니라 연수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헌은 늘 아무렇지 않게 서브 노트를 오픈했다. 그리고 생색내는 것도 없다. 생긴 건 싸가지 없게 생겼는데 의외로 저런 면은 인간적이다.
“그래, 줘 봐.”
나는 얻어 보는 주제에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네가 먼저 보여 주겠다고 한 거니까. 너는 쿨해서 서브 노트에 민감하지 않으니까.
나 좋을 대로 편하게 생각하며 지헌이 베푼 호의를 당당히 받았다. 그리고 서브 노트를 가져와 눈으로 탐욕스럽게 훑으며 지헌이 분류한 A급 문제와 그 논리 구성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흡수했다.
사실 학생이 만든 서브 노트란 잘 쓰인 수험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비슷비슷한 수준인데, 지헌이 만든 서브 노트는 다른 학생들과 차별화되었다. 문제 제기는 날카롭고 결론은 풍부했다. 목차도 고심해서 구성한 티가 났다.
그 말인즉슨, 비슷한 수천 장의 답안지들 틈에서 지헌의 답안지는 교수님들 눈에 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근데 이 판례 있잖아.”
집중해서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지헌이 내 밀크 티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입 대고 마시는 부위에 정확히 입을 대면서.
순간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거 내 건데.”
“어?”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넣고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그가 먹던 음료수가 있었다. 책상이 좁다 보니 잠깐 한눈판 사이에 내 것을 마셔 버린 모양이었다.
“미안. 몰랐어.”
“…….”
“어쩌지? 다 먹었는데.”
“…….”
“새로 뽑아 줄게.”
미안한 얼굴로 말하는데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건 화가 난 내 기분 탓일까. 밀크 티가 아까운 게 아니라 내가 입 대고 마시던 것을 네가 마셔서 더러운 거야. 아무리 나라도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평소 청결에 예민한 편은 아니다. 다은이와 음료수를 돌려 마신 적도 있다. 그런데 다은이는 친한 사이이고 정지헌은 타인이다. 그렇다고 저런 말을 돌직구로 던지지는 못할 정도의 미약한 친분이 생길락 말락 하는 사이.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겠고, 나는 서브 노트를 탁 덮고 그의 자리로 거칠게 미는 것으로 짜증 나는 심경을 대신했다.
“됐어.”
거기에 아랑곳없이 지헌은 보란 듯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고 나를 보았다.
“근데 이거 맛있다. 입에 잘 맞네.”
“…….”
“조금 더 먹고 싶어.”
나직이 웃으며 말하는데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알고 지내면 여러모로 이득이니까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자고 좋게 마음먹다가도 정지헌은 한 번씩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내가 쳐 놓은 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사람 신경을 살짝씩 건드렸다.
그래도 애는 착하고, 또 차갑게 생긴 것과 달리 인간적인 구석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나에게 잘 대해 주는데, 화를 내면 나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찜찜한 마음을 구석에 밀어 두었다.
“복사집, 지금 문 닫았겠지? 이정우 교수님 행소 자료 복사한다는 게 깜박했어.”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음 주 월요일 시험인 개정된 행정소송법 자료를 미리 복삿집에서 복사해 놔야 했는데 깜박했다.
주말에 열 시간이 넘는 보충 수업을 마치고 난 직후였다. 초반 느릿느릿 나가는 진도를 보며 과연 이 두꺼운 책 진도를 다 뺄 수 있으려나 걱정스러웠다. 어쩌려고 저렇게 진도를 늦게 빼지 불안했는데, 역시나 강사는 막판에 매주 열 시간이 넘는 보충으로 진도를 휘몰아쳤다.
학생들 모두 피곤한 얼굴로 묵묵히 가방을 챙겼다. 욕할 기운도 없다. 빨리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고 싶었다.
지헌은 손목시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닫았지.”
“큰일 났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이 밤에 또 자료 구하려고 뛰어다닐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넋 놓고 있는 내게 지헌이 귀가 번쩍 뜨일 소리를 했다.
“나 자료 있는데.”
“어, 진짜? 나 좀 빌려줘.”
지헌은 대수롭지 않게 가방을 뒤적이다가 아, 하고 작게 깨달은 소리를 내며 난감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집에 있다.”
“그럼 내일 줘.”
“주말에 나 본가 가는데….”
“아….”
“그럼 지금 집에 같이 들렀다 갈래?”
아무 사심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 긴 시간 수업으로 지헌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묻어났다. 아쉬운 건 나였다. 자료 달라는 것도 미안한데 일정 있다는 사람에게 내일 달라고 우기는 건 정말 아니었다.
100회가 넘는 긴 강의 일정과 매주 케이스 시험 그리고 강도 높은 보충 수업을 정신없이 소화하면서 우리 사이에는 어느새 동지애 비슷한 게 생겨났다.
“그래.”
그래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피스텔 가로등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정지헌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나는 턱짓으로 건물을 가리키며 선을 그었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 올라갔다 와.”
“그래, 마음대로 해.”
지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외지에 있는 학교 탓에 정문 근처에 있는 고급 오피스텔은 인기가 좋았다. 여유가 있는 집 부모들은 공부하기 편하라고 자식을 이곳에 자취시켰다.
거기 주차장에 있는 차는 모두 외제 차더라, 동기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브랜드는 잘 모르지만, 평소 지헌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을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학식에서 천 원 차이 나는 메뉴 사이에서의 고민. 장학금에 목숨 걸고, 학점 망해서 울고 있는 내 앞에서 재수강하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친구를 볼 때 내 심정.
정지헌은 평생 이런 삶은 모르겠지.
씁쓸한 마음으로 생각을 이어 가는데 툭툭,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빗방울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솨아아. 수분을 잔뜩 머금은 공기는 곧 시원하게 빗줄기를 쏟아 냈다. 가방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는데 휴대 전화가 울렸다.
- 어떤 자료인지 모르겠어. 자료가 많은데… 잠깐 올라올래?
늦은 밤이라 지헌의 목소리가 유독 낮고 짙게 들렸다. 평상시에도 중저음의 목소리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얘랑 자면 어떨까.
왜인지 모르겠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가 당황스러웠다. 이성적으로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은 상대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지헌은 질문을 던지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응, 알았어.”
뭐에 홀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승낙했다. 지헌의 목소리가 단숨에 돌아왔다.
- 기다려. 문 열어 줄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당 층수에 내리자 지헌이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과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 냈다. 지헌은 수건을 건네주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비가 많이 오네.”
“응. 잠깐 사이에 쏟아지더라. 타이밍 맞게 도착해서 다행이야.”
“들어와.”
지헌이 옆으로 비켜서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집 안에 들어서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장에 주르륵 세워 놓은 전공책들, 현관 입구에 세워 놓은 자전거,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풀어 놓은 시계와 지갑.
그냥 평범한 남자 방이었다. 그러나 편하게 흐트러진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물건이 조금 흐트러져 있다 뿐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헌은 아직 외출복 차림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내게 줄 자료 먼저 찾아본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서 있는 내게 지헌이 탁자 위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거기 자료 쌓아 뒀어. 섞여 있어서 난 뭔지 잘 모르겠더라. 네가 한번 찾아봐.”
그러고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편하게 물었다.
“콜라 마실래? 아니면 가볍게 맥주 한잔 어때?”
“아니야. 콜라 줘.”
그는 내 앞에 콜라를 갖다 주고, 그의 몫으로 가져온 맥주 캔을 따서 쭉 들이켜며 눈으로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자료가 이것저것 다 섞여 있어. 행소 자료가 뭔지 난 잘 모르겠더라.”
그는 내 앞에 앉아 과목별로 찾기 쉽게 프린트를 분류해 주었다. 2인용 탁자는 둘이 앉으니 상체가 가깝게 밀착되었다. 아침에 씻은 샴푸 냄새가 아직 남아 있어 좋은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미안.”
넋 놓고 있다가 자료를 정리하는 손이 스쳤다. 그는 무심히 중얼거리며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혀 긴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낮게 눈을 내리깔고 자료를 정리하는 지헌의 손을 응시했다.
우아하면서 적당히 강인해 보이는 비율이 잘 갖춰진 손은 평생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하얬다. 그러나 제법 큼직하고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와 마냥 곱다는 느낌보다는 남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응?”
재미있다는 듯 웃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정신 차려 보니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키 크고 어깨 넓고… 진짜 얘랑 자 보면 어떨까?
위험한 생각이었다. 비도 오고 느슨해진 마음 탓이다. 이러다 진짜 사고 치겠어.
“늦었다. 집에 가야겠어.”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일어서는데 지헌이 입술을 겹쳐 왔다.
“뭐야….”
가슴을 밀어내자 도망 못 가게 뒤통수를 잡고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부드럽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흐으… 응.”
벌어진 입술 틈으로 지헌의 혀가 들어왔다. 지헌의 혀는 거침없이 내 혀를 휘감고 진하게 뒤엉켰다.
젖은 점막을 능숙하게 문지르고 츱츱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혀를 빨아들였다. 정사를 연상시키는 거침없는 키스였다. 이런 건 깊은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 아니었나.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지헌이 내 몸 위로 같이 엎어졌다. 허벅지가 내 가랑이를 가르고 자연스럽게 몸이 겹쳐졌다. 허벅지에 발기한 성기가 느껴졌다.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야… 잠깐.”
간신히 지헌을 밀어내고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지헌은 내 말을 무시하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안달 나서 내게 달려드는 몸짓이었다.
“그만하라고.”
분명한 의도를 담아 지헌의 가슴팍을 밀어내었다. 고개를 든 지헌은 채 해소되지 못한 욕망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까닥하면 선을 넘을 뻔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키스를 이렇게 잘해.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맥주 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남자와 이런 시간을 보낸 건 꽤 오랜만이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잠시 캔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들었다.
“이만 가 볼게.”
“차 끊겼어.”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뒤를 보았다. 지헌은 나를 보며 놀리듯이 웃었다. 채우지 못한 갈증을 어느새 씻어 내고 다시금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자유자재로 선을 넘나드는 모습이 보통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말 안 해 줬어?”
“내가 태워다 주려고.”
“그럼 태워 줘.”
“글쎄? 마음이 변했는데. 어쩌지?”
“그럼 택시비 내놔.”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지헌이 저벅저벅 내게 다가왔다. 경계하며 살짝 뒷걸음질 치자 내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늦었잖아. 오늘 같이 있을래? 이대로 헤어지기 싫어.”
쇄골을 더듬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뭐인 줄 알아?”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기운 빼는 애들이 제일 싫어.”
“…….”
“너도 나 열 번 찍을 거니?”
“아니.”
고개를 든 그가 느긋하게 웃었다.
“넌 이미 나한테 넘어왔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더럽게 눈치 빠른 놈.
도로 탁자로 돌아와 편하게 앉았다. 비도 오고 이 밤에 다시 집까지 가는 것도 피곤했다. 그리고 편하게 흐트러진 정지헌 방도 나쁘지 않았다.
큰 베개 하나 껴안고 바닥에 뒹굴거리고 싶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오은성이 어쩌고 친구들이 옆에서 수업 시간에 떠들던 정지헌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떠올랐다.
“근데 너 여자 친구 있지 않아?”
“없어.”
채 말이 끝나기 전에 나오는 딱 부러지는 대답.
뻥치시네. 고정적인 여자 친구가 없는 거지, 짧게 만나는 여자는 계속 있었겠지. 저렇게 신뢰감 있는 얼굴로 없다고 하면 다른 여자들은 다 속아 넘어갔나 보지?
굳이 따지진 않았다. 남의 사생활이야 내가 무슨 상관이야. 와서 깽판 칠 여자만 없으면 됐지.
“배고프다. 뭐 먹을 거 없어?”
“씻고 나와. 치킨 시켜 줄게.”
지헌이 씩 웃으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선을 넘고 같이 밤을 보내고. 이런 일이 꽤 익숙해 보였다. 머뭇거리거나 쑥스러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한 명이라도 능숙하면 다행이지. 나는 속 편하게 생각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부러 화장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같이 밤을 보내기로 작정해 놓고 경계하는 것도 좀 우스웠다.
낯선 곳에서 옷을 벗고 샤워하는 기분은 이상했다.
내가 어쩌다 정지헌 집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사람 일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까지 쟨 그냥 웃으면 재수 없고 안 웃으면 싸가지 없는 애였는데.
샤워가 끝나 갈 무렵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샤워 헤드를 잠그고 귀를 기울였다.
“화장실 앞에 갈아입을 옷 놔뒀어.”
“…….”
쏴, 샤워 헤드를 다시 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장실 앞에는 무슨 조기 축구회 단체복 같은 옷이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왔는지, 등판에 쓰여 있는 글씨를 자세히 보니 체육 대회 때 단체로 맞춘 과티와 운동복 바지였다. 과 행사에는 참여한 적이 없어서 이런 걸 맞춘 줄도 몰랐다.
이 상황에 이런 걸 입어야 하나, 작게 탄식하며 티셔츠 구멍에 머리를 꿰어 넣었다.
운동복 바지를 입기 전에는 벗어 놓은 속옷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입자니 영 찝찝하고 안 입자니 허전하고. 잠시 갈등하다가 맨몸에 바지를 꿰어 입고 팬티는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속옷 없이 맨살에 느껴지는 바지가 허전했다. 다 입고 거울에 비춰 보니 치솟던 성욕도 식을 만큼 디자인이 구렸다. 혼자 어이없어서 고개를 젓다가 거실로 나왔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헌이 테이블을 세팅하며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수건을 목에 걸고 소파에 앉았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괜히 민망해서 타박했다.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체육 대회 때 남은 단체복인데 가끔 애들이 자고 갈 때가 있어서 몇 벌 갖춰 둔 거야. 근데 너 참 대단하다.”
“뭐가.”
“그렇게 구린 걸 입고도 살아남네.”
나는 바삭한 치킨에 시선을 뺏겨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라는 거야, 이런 건 갖다 버려. 아 참, 서랍장 안에 있는 칫솔 꺼내 썼어.”
“잘했어. 늘 시켜 먹던 곳이 있는데 문 닫았네. 처음 시켜 본 곳인데 맛이 괜찮을까 모르겠어. 아니면 다른 거로 시킬 걸 그랬나?”
“치킨에 귀천이 어디 있어. 다 맛있어.”
심드렁하게 말하며 닭 다리를 건네받았다.
“그게 뭐야. 귀천은 직업에 없는 거 아냐?”
지헌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밤늦은 시간이라 마음이 느슨해져서 그런가. 눈매를 접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조금 잘생겨 보였다.
낮에 봤으면 얄짤없을 텐데.
나는 빤히 지헌을 보다가 닭 다리를 베어 물었다. 지헌은 내가 먹는 것을 확인하고 치킨을 입에 가져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
돌아서면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가벼운 이야기들. 학식, 교수님, 시험 이야기. 공통점이 없기에 화제는 곧 떨어졌다. 서로 어색한 게 당연했다.
우리는 성공적 강의 완수라는 공동 목표를 가진 비즈니스 관계일 뿐, 학원에서 어떠한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그가 승아 언니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둘 사이에 유일한 공통 인맥. 그마저도 소재가 떨어지자 TV 소음만 울렸다.
곧 정규 방송이 끝나고 TV를 끄니 사위가 적막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는 이 숨 막히고 어색한 분위기.
이다음은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의 문제일 뿐. 같이 밤을 보낼 거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긴 하지만 내가 먼저 신호탄을 쏘기는 싫었다. 나는 애꿎은 물티슈만 뽑아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느릿느릿 닦고 또 닦았다.
“네가 침대에서 자.”
미적거리는 나를 보며 돌연 침묵을 깨고 지헌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난 지헌은 소파에 이불을 넓게 펼쳤다. 아까는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더니 지금은 이렇게 정중할 수가 없다.
“…….”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대로 걸어갔다. 침구에는 은은하게 지헌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샴푸 냄새인 줄 알았는데 지헌의 체취인 모양이었다.
빳빳하게 풀 먹인 침구 속을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정갈하고 깨끗한 분위기는 누군가의 지속적인 손길이 미쳤음을 의미했다.
엄마일까? 아니면 주기적으로 도우미가 드나들 수도 있고. 집에서 애지중지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보이니까.
“불 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샤워를 하고 편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지헌이 내 쪽을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탁, 거실 불을 끄자 고요가 내려앉았다.
시야가 가려지니 청각과 시각이 더 예민했다. 뒤척일 때마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 작게 내쉬는 그의 한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