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과 꿀이 흐르는 숲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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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꽃잎
병원에서 퇴원한 미정은 환자복을 벗고 화려하게 꾸몄다.
젊은 남녀로 붐비는 홍대 거리에 완벽히 녹아든 그녀는 조명이 화려한 바(Bar)로 들어갔다.
“미정아! 여기!”
미정의 친구 두 명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미정은 로고가 잘 보이도록 가방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 이거 이번 시즌 신상 아니야? 품절이라 VIP도 못 구한다던데 언제 샀어?”
“담당 셀러님이 잘 챙겨 주셨지 뭐. 책자로 미리 보고 킵해 둔 거라 이렇게 인기 있는 줄도 몰랐어.”
“아, 완전 부럽다……. 플미만 2백만 원 붙었더라.”
사실 중고XX에서 2백 아니고 3백이나 더 주고 산 건데.
미정은 얼굴이 구겨지려는 걸 참으며 웃었다.
힘들게 구했지만 괜찮았다. 조심히 들고 깨끗한 상태로 되팔면 비슷한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미정이 너 안색이 왜 그래?”
“내 얼굴? 왜?”
“창백한 것 같아서…….”
“다이어트를 너무 빡세게 했나?”
“지금도 말랐는데 뭔 다이어트야!”
친구의 말은 완전히 빈말이었다. 미정은 지금 부기 때문에 전보다 훨씬 통통해 보였다.
미정은 키가 크고 뼈대가 튼튼해서 조금만 살이 붙어도 체격이 훨씬 커 보였다.
문득 선이 곱고 예쁜 우림의 몸이 떠올랐다.
비율이 사기라서 뭘 입어도 예뻤다. 미정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술을 들이켰다.
‘얼굴도 가슴도 다 뜯어고쳤겠지. 나도 그년만큼 돈이 많았으면 이 고생은 안 했어!’
연예인들이 성형외과에 돈을 싸 들고 바쳐도 우림처럼 자연스러운 미인이 될 수는 없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미정은 우림이 성형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속으로 부득부득 우겼다.
“오늘 미정이가 쏘는 거야?”
친구의 말에 미정의 생각이 뚝 끊겼다.
“당연하지. 마음껏 시켜!”
시키란다고 진짜 시켰다.
밸도 없는 년들이라고 친구들을 욕하며 미정은 빠르게 오늘의 술값을 계산해 봤다.
카드 한도가 아슬아슬해서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미정이 부자라고 믿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쪽팔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미정은 핸드폰으로 카드 한도를 확인하며 애써 웃었다.
미정은 원래도 꾸미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치를 시작하게 된 건 해외 유명 의류 브랜드의 판매 사원이 된 후부터였다.
미정은 원래 백화점 말고 지하상가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로 옷을 샀다.
그러나 상품 홍보를 위해서는 일하는 브랜드의 옷을 자주 입어야 했고 지출이 늘었다.
인기 많은 브랜드의 신상을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리니 미정의 별스타그램도 팔로워가 늘었다.
인터넷 세상에서 미정은 백화점 판매 사원이 아니라 특정 브랜드를 몹시 좋아하는 은수저가 되어 있었다.
미정은 일찍 출근하여 몰래 신상 옷을 입기도 하고 재고를 빼돌려 입어 본 뒤 매장에 되돌려 놓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사귄 친구들을 만날 때는 진짜 부자가 된 것 같아서 즐거웠다.
미정의 수법은 점점 교활해졌고 씀씀이도 늘었다. 스무 살 때부터 모은 돈은 다 써 버렸고 카드도 돌려막고 있었다.
‘목걸이만 팔았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미정은 진심으로 우림이 증오스러웠다.
값비싼 귀금속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거 하나 가져갔다고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알아보니 선처를 받는다고 해도 벌금은 각오해야 한다고 해서 더욱 분했다.
‘착한 척 위선 떨 때마다 역겨워서 토가 쏠렸는데……. 그럼 그렇지, 여우 같은 년. 경찰까지 불러서 사람을 이렇게 난감하게 해야 돼?’
더 화가 나는 건 내일 우림에게 직접 사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선처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림은 미정의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려 배려한 것이었으나 삐뚤어진 미정에게 우림의 마음이 닿을 리 없었다.
미정은 술에 취해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며 전화를 걸었다.
「김병호」
이름부터 구리고 병신 같은 호구 놈이었다.
얼굴은 윤석보다 별로였지만 몸은 꽤 괜찮았고 전에 떠보니 모아 둔 돈도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약한 편이라 불쌍한 척을 좀 하면 넘어올 것 같았다. 급한 카드값을 막으려면 병호가 필요했다.
-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 주세요.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수신 차단 안내 문구가 들렸다. 몇 번 비슷한 일을 겪은 미정은 이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병신 새끼가 지금 나 차단한 거야……?”
미정은 술에 취해 병호에게 욕이 섞인 문자를 잔뜩 보내다가 요즘 힘들어서 그렇다며 사과 문자를 다시 보냈다.
[걸레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지랄이네.ㅋㅋ 나한테 한번 박아 보고 싶어서 좆 세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병신아?]
[병호 씨 정말 죄송해요. 친구가 제 핸드폰으로 장난을 쳤나 봐요. 가뜩이나 요즘 힘든데 저를 괴롭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날 이후 미정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미정을 차단한 병호는 두 메시지 모두 확인할 수 없었다.
미정은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 핸드폰을 보고 씩씩거렸다.
“씨발, 진짜 돈 없는데!”
미정은 이를 득득 갈면서도 가방은 곱게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 제습지를 넣어 모양을 잡고 파우치로 겉을 감싼 다음에 낡은 원룸 방 한쪽을 차지한 검은색 상자 안에 넣었다.
“애가 바로 떨어져서 다행이지.”
중절 수술하면 돈이 좀 든다고 해서 며칠 미루고 있었다. 1층 창문에서 떨어져서 유산된 걸 알았을 때 미정은 생각했다.
‘돈 굳었네.’
미정은 무심하게 지난 일을 떠올리며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그래도 몇 달 품고 있었으니 양육비는 받아야겠지?”
윤석에게 전화를 거는 미정의 위로 형태 없는 연기가 떠돌았다.
킥. 킥킥.
맞은편 거울이 음산히 웃는 원귀(冤鬼)를 업은 미정을 담고 있었다.
* * *
주방 보조인 해연은 오늘 아침 몸이 무척 안 좋았다.
끙끙거리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직장에 도착했을 때는 식은땀이 너무 나서 조퇴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저택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게 바로 덕질 힐링인가?’
해연은 오래 지낸 직장에 만족하고 있었다.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주는 예쁜 고용주를 해연은 좋아했다.
덕질하듯 우림을 몰래 살펴보는 건 해연의 은밀한 취미였다.
동료들의 수다를 한 귀로 흘려듣고 있던 해연의 귀에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전에 미정 씨가 그러더라고. 이사님이랑 아가씨 말이야. 오빠 동생처럼 자란 건데 좀 이상하지 않냐고. 회장님이 이사님 양자 삼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더라.”
미정이 우림의 목걸이를 훔쳤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들 중에 없었다. 우림이 김 집사에게 입단속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미정에 대한 동정 여론이 우세한 지금, 사람들은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가……?”
일하는 사람들끼리 떠드는 소리였지만 해연은 웃어넘기고 싶지 않았다.
“뭐가 이상해? 두 분이 친남매인 것도 아닌데. 미정 씨 말대로라면 소꿉친구끼리 사귀면 다 이상한 거야? 알콩달콩 예쁘게 연애해서 보고 있으면 내 기분까지 좋아지더라.”
해연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고용주를 욕하다가 걸려서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은 웃으며 해연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나도 연애하고 싶어.”
“이사님 은근히 로맨틱하시잖아. 아가씨랑 잘되고 나서부터는 퇴근도 일찍 일찍 하시고!”
“이사님이 아가씨 끌어안을 때 나까지 다 설레더라.”
우림에게 사과하러 찾아온 미정은 그 이야기를 몰래 숨어서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병호에 이어 윤석과도 어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얄미운 우림이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배가 아팠다.
‘돈만 빼면 내가 그년보다 못한 게 뭐야?’
운 좋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돈으로 태오를 꼬신 게 분명했다.
백 회장의 혈육도 아닌 태오가 회장의 후계자가 된 것도 수상했다.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눈길도 안 주던 태오가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 이유가 없었다.
태오를 처음 봤을 때 미정은 헛된 상상을 했다.
그는 무리를 이끄는 알파 늑대처럼 강한 수컷이었고 특유의 분위기는 페로몬이 흐르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모든 일에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면 어떨까. 미정도 여러 번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수작을 부릴 수는 없었다. 태오는 너무 무섭고도 먼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백우림이었다면…….’
미정은 무심코 소망했다.
“백우림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까?”
원귀는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정은 그 순간 처음으로 원귀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정은 귀신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될래…….”
미정은 손각시의 유혹에 넘어갔다. 손각시가 열어 놓은 장식장에서 목걸이를 훔쳐 냈던 순간처럼 거리낌 없이 우림의 삶을 훔치자고 생각했다.
손각시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미정의 목덜미를 휘감아 조이기 시작했다.
* * *
“아가씨, 강미정 씨 오셨어요.”
우림은 미정이 왔다는 소식에 방에서 나왔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병가를 낸 사람이 넷이나 있었다. 김 집사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김 집사가 자리를 비운 탓인지 아래층은 어수선했다. 소란의 중심에는 미정이 서 있었다.
“될래……. 내가, 될 거야…….”
아기를 잃은 창문 앞에 선 미정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충격이 큰 사람을 배려 없이 집으로 불렀구나 싶어 우림의 안색이 나빠졌다.
목걸이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림은 미정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미정 씨.”
“될 거야. 내가 ……이 되려면…….”
“미정 씨, 괜찮아요?”
미정은 흐릿한 동공을 들어 우림을 바라봤다.
푸드덕! 새까만 까마귀 떼가 요란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림이 창문으로 하늘을 본 순간 미정은 손을 뻗어 우림을 퍽 밀쳐 버렸다.
“아읏!”
창문을 갈아 끼울 때 날카로운 부자재가 떨어졌는지 따끔한 통증과 함께 손바닥이 베였다.
상처에 비해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뚝뚝 떨어진 선혈은 불길하게도 사산한 아이의 피 무덤과 같은 자리에 떨어졌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미정은 우림의 다친 손을 꽉 붙잡았다. 날카로운 손톱에 후벼 파인 상처가 얼음에 찔린 듯 시렸다.
우림은 지끈거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며 미정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미정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당장 아가씨 손 놔줘요!”
주방 보조, 해연이 소란을 듣고 거실로 나오며 멀리서 소리쳤다. 경호원들도 거실로 뛰어왔다.
호원이 우림을 미정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때였다.
푹! 미정의 입술이 칼에 베여 찢어졌다. 새빨간 피가 우림의 뺨에 튀었다.
우림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피의 궤적을 좇았다.
푹! 푹! 푹! 푹! 푹!
사람의 살을 찢고 난도질한 칼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모두 미정의 피였다. 미정을 찌른 사람은 경호원들과 함께 정원에서 거실로 들어온 윤석이었다.
그가 미정의 배를 난도질해 놓을 때마다 솟구친 붉은 피가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튀었다.
“경호팀 전부 본채 거실로 모여! 신윤석 씨가 강미정 씨를 살해했다. 칼을 들고 있어.”
빠르게 다가온 경호팀장, 도훈은 우림을 감싸며 무전기 인이어에 대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치직! 치지직! 끼이이익!
그런데 고장 난 라디오처럼 뚝뚝 끊기던 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윽……!”
도훈은 귀에서 인이어를 빼내며 당황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우림을 보호하고 있는 게 도훈 하나였다. 다른 경호원들은 전부 뭔가에 홀린 듯 윤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훈의 눈이 기묘하게 적막한 거실을 불안스레 훑었다.
경호원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대부분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식한 순간 굳어 있던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키며 뼈를 으드득 꺾었다.
“으아아아!”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우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인간들을 본 도훈이 우림을 계단 쪽으로 밀었다.
“올라가세요!”
우림은 도훈의 손에 떠밀려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갔다.
찰나의 순간 윤석이 미정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는 게 보였다. 불길을 등진 윤석의 시뻘건 눈동자가 우림을 한껏 담았다.
허억. 허억. 허억.
연쇄살인마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킥. 킥킥.”
우림은 손각시의 웃음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왔다.
도훈이 우림을 뒤따라 들어오고 주방 보조 해연이 아슬아슬하게 합류했다.
쿵! 쿵! 쿵!
문밖에 있을 사람들이 미친 듯 우림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것처럼 덜컹거렸다.
“저, 저 사람들, 다 왜 저래요?”
해연이 뒷걸음질로 주춤 물러나며 속삭였다. 그러나 우림과 도훈은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상황은 여전히 긴박했다.
“막을 거 가져와요! 빨리!”
도훈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문 앞에 쌓으며 소리쳤고 우림과 해연은 힘을 모아 주변의 잡다한 가구를 옮겨 문을 막았다.
대충 문을 막아 놓은 우림은 황급히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
핸드폰 화면 오른쪽 상단에 믿을 수 없는 표시가 떠 있었다.
“통화권 이탈이라고……?”
긴급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우림이 두 사람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도훈과 해연은 바로 믿지 못하고 각자의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뭐, 이런…….”
도훈은 다급히 2층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잠금쇠는 모두 풀려 있었다. 하지만 우림이 지내는 2층 창문은 모두 방범창이었다.
도훈은 욕을 하며 -우림은 그가 욕을 쓰는 모습을 오늘 처음 봤다- 방범창을 살펴봤다. 드라이버만 있으면 안쪽에서는 떼어 낼 수 있는 구조였다.
“혹시, 드라이버 있습니까?”
그는 제발 있다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우림을 쳐다보았다.
소처럼 축축한 눈망울에 대고 이런 말을 하게 된 우림의 입장도 참 난처했다.
“커터칼은 있어요…….”
“저 머리핀 있는데, 이걸로는 안 될까요?”
우림은 커터칼을 가져오고 해연은 영화에서 본 것을 떠올리며 쪼끄만 실핀을 꺼내 보여 줬다.
“…….”
문밖은 여전히 쿵쾅거렸으나 세 사람 사이는 불길한 침묵이 휘감았다.
솨아아아아.
“이게 무슨 소리죠?”
“불이 났으니 1층엔 스프링클러가 터졌을 겁니다. 타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니 다행이네요.”
“저, 저 사람들이 우릴 죽이려고 한다는 거예요?”
“전파방해까지 해 뒀는데 소꿉놀이나 하자고 이 짓을 벌이지는 않았겠죠.”
도훈은 테러 같은 경우를 상상하고 말한 것이지만, 우림은 이게 귀신의 짓이라는 걸 알았다.
우림 역시 귀신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으나 미정이 죽을 때 터진 붉은 피가 몹시 불길했다는 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훈과 해연은 얼굴과 몸이 깨끗했다. 셋 중 미정의 피가 묻은 건 우림뿐이었다.
“…….”
우림은 옷소매로 미정의 피를 닦아 냈다. 붉었던 피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이 피가 문제가 되어 사람들이 변한 거라면 우림이 멀쩡한 이유는 뭘까?
쿵!
엄청난 소리와 함께 가구로 막아 놓은 문이 도끼에 찍혔다.
날카로운 나무 대가 퍽 꺾여 터지며 구멍이 뚫렸다.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떠밀며 문 뒤로 숨은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곧 문이 뚫릴 것이다.
“대충 3 대 10 정도 될 것 같은데, 경호팀장님 정도면 한번 해 볼 만하지 않아요?”
“3 대 10이 아니라 1 대 10이겠죠. 높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1 대 10은 무리입니다.”
“왜, 영화에서 보면…….”
“그건 영화고.”
해연의 말을 딱 잘라 끊는 말투가 차가웠다. 남녀의 핑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끼에 찍힌 문고리가 심하게 덜렁거렸다.
“그래요. 해 봅시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도훈은 의자 하나를 집어 들며 한숨을 내뱉었다. 뒤에 잘 붙어 있으라는 그의 신호에 우림과 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악!”
“목소리는 나도 크다! 으아아아아!”
그는 엄청난 복식호흡으로 눈이 빨갛게 변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혼자서 이겨 내고 달려갔다.
엄청난 힘에 의자가 가벼운 방망이처럼 휘둘리며 사람들을 빠르게 쳐 냈다.
“……!”
쓰러진 누군가가 도훈을 따라 달려가는 우림의 발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오싹한 소름이 올라왔다.
우림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 손길을 쳐 냈다. 무기를 든 사람은 없어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우림에게 자꾸 들러붙고 손을 내밀었다. 우림은 손이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면서도 도훈을 놓치지 않고 내려갔다.
“경호팀장님, 힘센 킹콩 같아요!”
해연은 조금 실례되는 말을 하며 그를 응원했다.
한바탕 전투를 치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도훈이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1층 거실로 돌아온 세 사람은 흠칫 굳고 말았다.
입술이 양쪽으로 찢어지고 살갗이 불에 타 그슬렸으나, 분명 미정이었다.
난도질당해 줄줄 흘러내린 내장이 꺼멓게 탄 채 복부에 눌어붙어 있었다.
언뜻 보면 불룩한 배가 임신한 사람 같았다.
미정은 배를 감싼 채 창가에 전시되어 있었다. 밝게 들어오는 햇살이 그 기괴한 모습을 밝게 비추었다.
“우욱!”
“멈추지 말고 계속 가요!”
도훈이 헛구역질하는 해연의 등을 떠밀며 우림의 팔뚝을 붙잡아 당겼다. 뒤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윤석 씨는 어디 있지?’
아까부터 윤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림은 불안스레 주위를 둘러봤으나 세 사람은 무사히 현관 앞에 도착했다.
도훈이 현관문을 벌컥 여는 그 순간, 윤석이 나타났다.
문밖에 서 있던 윤석은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도훈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졌다.
미정의 피로 물든 칼은 도훈의 피까지 머금으며 더 붉어졌다.
“으, 아악!”
도훈은 악을 쓰며 윤석을 붙잡아 밀었다.
도훈의 체격이 훨씬 좋았는데 윤석은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도훈과 힘 싸움을 하는 윤석의 팔뚝에서 새빨간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부상을 입은 도훈이 윤석에게 밀리고 있었다.
“어서…… 가요!”
해연이 우림의 손을 붙잡고 현관을 나서려고 했다.
“어?”
우림을 붙잡은 해연의 손이 툭 떨어져 나가며 해연의 몸이 정원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림은 현관문 안쪽으로 밀렸다.
손을 내밀었으나 무언가에 가로막혀 우림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옷소매에 묻은 까만 피가 잿더미처럼 불길했다.
윤석은 도훈을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문이 닫히고 있었다.
“나갈 수가 없어요…….”
새파랗게 질린 우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굳은 도훈과 해연을 보며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쿵.
문을 닫은 윤석이 얼어붙은 우림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가 우림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돌렸다.
“…….”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목덜미가 섬찟하며 식은땀이 났다.
그 잠깐 동안 어떻게 저렇게 까맣게 탔나 싶은 미정의 시체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던 미정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새빨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까 다친 손바닥이 화끈거리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난 네가 부러워…….”
쓰러진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미정은 망가진 마리오네트처럼 비틀비틀 걸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우림은 털썩 주저앉을 뻔했으나 윤석이 우림의 어깨를 꽉 쥐어 넘어지지 못하게 막았다.
“오, 오지 마……. 싫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기괴한 상황에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출되며 배 속이 차갑게 식었다.
우림은 윤석을 밀어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윤석은 꼼짝도 안 했다.
어느새 미정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난 네가 되고 싶어. 네 몸을 내게 줘…….”
미정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우림을 끌어안았다. 차갑고 딱딱한 시체의 몸이었다. 솜털이 바짝 돋아난 목덜미로 귀신의 숨결이 내려앉았다.
“네 몸을 내게 주지 않으면 널 죽일 거야.”
서늘한 칼이 목덜미에 닿았다. 귀신에 홀린 윤석의 것이었다. 앞도 뒤도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선택해.”
거스러미가 하얗게 일어난 차디찬 손가락이 우림의 목덜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2주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은 마지막 꽃잎 반점에 귀신의 손이 닿았다.
검은 연기가 일어나 우림의 눈을 가렸다. 검은 연기가 눈 속을 파고들었다. 눈알이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하지만 우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림은 언제나 살고 싶었다.
우림은 눈을 부릅떴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보였다.
* * *
귀(鬼)는 이름을 잊었다.
시집을 못 가고 죽었기에 그녀는 손각시였다. 이승을 떠도는 수많은 손각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손각시들과 다른 점이 두 가지나 있었다.
그녀에게는 서방이 있었다.
서방은 주인댁의 양자였다. 그녀는 서방의 노예였다. 작은 주인은 그녀를 간하여 서방이 되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석 달도 품지 못하여 한 줌의 핏덩이로 세상에 나온 아기였다.
서방은 채 부풀지도 않은 임산부의 배를 발로 걷어차 아기를 세상 밖으로 강제로 끄집어냈다.
노예 계집을 임신시켰다는 걸 알면 양아버지에게 들켜 혼쭐이 날까 봐 그렇게 한다고 했다.
“아가…… 내 아가…….”
그녀는 흙에 묻은 핏덩어리를 보며 울었다. 노예가 아니었더라면 아이를 잃지 않았을 텐데. 출신이 비천하여 제 아기도 지키지 못했다고 그녀는 자책했다.
서방은 몸이 풀리지도 않은 그녀를 다시 간하였다. 흐르는 피를 보며, 서방은 되려 그녀가 더는 임신하지 않겠다며 좋아했다.
서방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노예 계집이 한때 서방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방의 아내는 서방을 유혹한 음란한 노예의 입술을 칼로 찢어 놓았다.
흉하게 변한 얼굴을 본 서방은 다시는 노예를 찾지 않았다.
노예는 창고에 틀어박혀 곡기를 끊고 아이를 그리워했다.
그 창고에서는 매일 우는 소리가 났다.
서방과 아내는 찝찝하다며 노예를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질러 버렸다.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열기를 실은 바람에 목구멍이 바짝 탔다. 불길이 점점 번져 피부가 끓고 수포가 터졌다. 몸이 활활 타 잿더미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불타 죽는 고통, 버림받은 괴로움, 독살스러운 질투, 망가진 영혼의 분노, 아이를 잃은 지독한 슬픔…….
이 다섯 가지가 모여 그녀를 만들었다.
원귀(冤鬼)로 다시 태어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건 복수였다.
그녀는 서방을 찾아가 간살했다. 배가 둥그렇게 부풀어 있던 서방의 아내를 배 속 아기와 함께 찢어 죽였다.
방조한 일꾼들과 더러운 피가 흐르는 그 집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 후 원귀는 수백 년을 떠돌았다. 구천도 이승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다.
* * *
“허억! 허억……!”
우림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다른 이의 삶이 직접 겪었던 것처럼 아팠다.
그건 손각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미정의 몸을 차지한 귀신은 눈물짓는 우림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줄줄 흘렸다.
“복숭아꽃. 당신 아이의 태몽이었어요…….”
우림은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더는 목덜미에 남은 꽃잎이 불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꽃은 음란한 것도 불길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 꽃잎을 태오가 없애지 못한 건 이것이 불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복숭아꽃의 꽃잎은 모두 다섯 장이다.
꽃잎 한 장 한 장이 손각시가 겪은 고통, 괴로움, 질투, 분노, 슬픔을 뜻하고 있었다.
꽃잎 다섯 장이 모이면 손각시의 술(術)은 완벽해졌다.
우림은 꼼짝없이 몸을 빼앗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림에게 남은 건 꽃잎 한 장뿐이었다. 수백 년이 흘러서도 잊지 못한, 아이를 잃은 어미의 슬픔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신, 해연 씨와 도훈 씨를 살려 보냈죠?”
문을 부술 때는 도끼가 있었다. 그러나 귀신에게 조종당한 사람들은 손만 뻗어 올 뿐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칼을 들고 있던 윤석 또한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도훈을 밖으로 내보냈다.
손각시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림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 집에서 일하는 인간들을 얼추 파악했을 시간이었다.
해연과 도훈이 피를 맞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미정의 유산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 병호를 내보낸 것과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줘 출근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손각시는 처음부터 그들을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 했다. 정말 사악한 원귀라면 그랬을까?
“네 몸을 줘. 나는 네가 부러워…….”
원귀가 수백 년간 쌓은 사악한 감정으로 연 귀문이 태오에 의해 닫히고 있었다.
아직 우림의 몸 안에 새기지 못했던 꽃잎 두 장만큼의 귀력은 인간들을 홀리는 걸로 다 써 버렸다.
이제 그녀에게는 가장 작고 아픈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첫 꽃잎이자 마지막 꽃잎이었다.
원귀에게 남은 감정은 슬픔뿐이었다. 원한을 잃은 귀신은 약해졌다.
우림의 지적이 귀신을 깨닫게 했다. 강력한 원귀였던 손각시는 순식간에 힘을 잃어 갔다.
“설령 내 몸을 차지한다고 해도 당신은 기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우림은 귀신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귀신이 있다면 윤회와 저승도 있지 않을까?
“이 꽃잎을 가져가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요.”
첫 꽃잎이 생긴 날 모유가 나왔다. 아기에게 젖 한번 물려 보고 싶었던 원귀의 마음이었다.
“당신의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미정의 몸을 차지한 귀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구슬프게 적셨다.
“으으…….”
귀신에 홀린 사람들 중 유일하게 서 있던 윤석이 신음하며 머리를 붙잡았다. 윤석을 홀려 놓은 귀신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뭐야! 저게 뭐야……!”
윤석은 미정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그는 엉덩이 걸음으로 멀어지며 소리쳤다.
“내가 안 죽였어! 안 죽였다고!”
윤석은 미정을 찔러 죽이고 불까지 태웠던 기억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는 우림과 눈이 마주치고 굳었다.
“봐, 봤어. 당신, 봤지? 내가 미정이 저년 죽이는 거 봤잖아!”
윤석은 우림을 향해 외치며 바닥을 미친 듯이 더듬거렸다. 칼을 쥔 그가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손각시는 윤석에게서 서방을 보았다.
슬피 울던 손각시의 피눈물이 뚝 멎었다.
수백 년 묵은 원한이 소름 끼치는 살기를 토해 냈다.
검은 머리카락이 떠올라 나부끼고 겨울이 내려앉은 것처럼 오한이 일었다.
“으윽, 뭐, 뭐야! 넌 죽었을 텐데…….”
섬뜩함을 느낀 윤석이 손각시를 돌아봤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미정의 얼굴을 본 붉은 눈의 윤석이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달려갔다.
“왜 계속 쫓아오는 거야! 너 때문에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죽어! 죽으라고!”
윤석은 칼을 높이 들어 미정의 몸을 찔렀다.
푹! 살갗이 다 탄 시체의 몸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뚝뚝 떨어져 검은 연기로 변하는 피를 윤석이 다 뒤집어썼다.
“안 돼요!”
우림은 큰 소리로 외치며 테이블에 있던 화병을 집어 윤석의 머리를 쳤다.
“돌아가요……. 당장 돌아가!”
윤석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쥔 칼이 우림에게 향하는 순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손각시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윤석의 어깨에 업혀 있었다. 기다란 머리칼이 뱀처럼 조여들며 윤석의 숨구멍을 막았다.
“안 돼……. 그거 아니잖아. 그거 아니잖아요…….”
우림은 손각시의 삶을 엿봤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손각시가 된 것처럼 감정이 생생했다.
귀신이 얼마나 제 아이를 그리워하는지 알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땅에서 태어나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그 말을 그녀에게도 평범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각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기엔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수백 년 쌓은 업이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돌아갈게…….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손각시는 윤석과 함께 활활 타올랐다. 검게 불타는 불꽃 속에서 생전 아름다웠던 얼굴이 보였다.
아이처럼 생긋 미소 짓는 손각시에게로 마지막 꽃잎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