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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젖과 꿀이 흐르는 숲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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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00 회 작성일 24-03-04 14:0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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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잎 반점


백무건설의 거두(巨頭)가 쓰러지고 보름이 지났다.


폐에 생긴 악성종양이 너무 늦게 발견되었고 위치도 안 좋았다. 

80세에 이른 노인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다.

측근들은 쉬쉬하고 있으나 올해 80세가 넘은 노인인 백진모 회장의 건강 회복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각종 찌라시가 돌며 백무건설의 주식이 폭락했다. 

백 회장의 유일한 혈육인 우림은 학교도 휴학 중이라 집에만 틀어박혔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폐렴기가 있어 면회도 쉽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주어지는 면회를 다녀오고 나면 우림은 언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까 불안해하며 핸드폰을 흘긋거렸다.


“백우림.”


노크도 없이 문을 난폭하게 열고 들어와 사납게 으르렁대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문을 등지고 누워 있던 우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맥없이 늘어져 있던 우림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삐쩍 곯아 비실대는 게 걸핏하면 굶어? 네가 제정신…….”


우림은 팔을 뻗어 화가 번쩍 난 얼굴로 폭언을 쏟아 내려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흐…… 왜 이제, 흑, 와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흐아아앙!”


서러운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며 우림은 태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셔츠 너머로 뜨거운 체온과 그가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우림은 그곳에 얼굴을 푹 파묻고 끅끅 소리를 눌러 울었다.


“놔.”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냉랭한 말투에 놀라 겁을 먹었을 테지만 우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툼한 가슴팍을 꽉 끌어안고 셔츠 자락을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태오도 태오였다. 

이를 으드득 갈며 우림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정작 거세게 밀어내지는 않았다. 

몇 번 밀어내려는 시늉을 하다가 그의 힘을 못 이긴 우림이 비틀거리자 몸을 잡아 주고 꼴사납게 주춤대었다.


용기 있는 누군가가 태오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그는 힘없는 꼬맹이에게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제가 쓰레기 같으냐고 소리치겠지만, 그게 쓰레기의 기준이라면 태오는 쓰레기가 맞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넘어지든 말든 툭 밀쳐 내고 지나갔을 터였다. 

비록 태오는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길지 몰라도 사실이 그랬다.


우림은 눈물로 옷을 다 적실 것처럼 울다가 조금 지난 뒤에야 진정했다.

진하게 젖어 있는 태오의 셔츠를 본 우림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죄, 죄송해요, 이사님.”


이사님.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에 태오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하지만 어릴 적처럼 ‘오빠’라고 부르면 서너 배쯤 더 험상궂은 얼굴을 했기에 우림은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됐어.”


6월 말에 가까워지는데 에어컨도 안 틀었는지 방이 더웠다. 

태오는 신경질이 확 올랐다. 

그는 이마를 답답하게 가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우림을 바라봤다.


“……?”


일순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가슴, 그러니까 우림의 젖꼭지가 있어야 할 부분의 옷이 둥그렇게 젖어 있었다. 

데칼코마니라도 한 것처럼 포개면 딱 맞게 양쪽 다 동일했다.


삐쩍 말랐으면서 희한하게 가슴만 -태오는 이 부분이 정말 짜증 났다- 컸다. 

잘 먹지도 않는 게 영양분을 저기 다 썼나 싶을 정도로 탐스러워서 눈물이 저기에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림은 조금 전까지 태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의 옷자락이 다 흡수한 후였다.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저렇게 요상한 꼴로 젖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태오를 따라 제 가슴께를 바라본 우림이 엄청나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우림이 손으로 가슴을 더듬으며 가리자 얇은 잠옷이 달라붙으며 부푼 가슴 둔덕이 눈에 보였다.


“야, 너, 그…….”


태오는 시선을 피하며 답지 않게 더듬거렸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젖이 나온 건데 여자의 몸이 왜 젖을 흘리더라, 멍청하게 생각할 때였다.


“제, 제가 병이 있대요…….”


“병?”


“유즙 분비증이라고…… 어, 얼마 전부터, 갑자기……. 약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 했는데, 흐으……. 계속 아프기만 하고…….”


우림은 겨우 멈추었던 울음을 다시 토해 내며 더듬더듬 말했다. 

태오는 얼빠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지금이라도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불안하고, 무서워요……. 이 문제 말고도…….”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눈물로 젖은 손이 태오의 손끝을 붙잡았다. 

야멸차게 쳐 내지 않았을 뿐 맞잡아 주지도 않았건만, 그것으로 안심이 된 우림은 간지러운 숨을 폭 쏟아 내었다.


“누가, 내 몸에 몰래 문신을 그려 놓은 것 같아…….”


“뭐?”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말에 태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림은 입술을 깨물며 길게 내려온 머리칼을 넘겨 오른쪽 목덜미를 내보였다.


분홍빛 물감을 묻힌 붓이 잘못 눌러 칠한 자국 같았다. 

자세히 보니 꽃잎을 그려 놓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다 그리지 않았는지 꽃잎은 세 장밖에 되지 않아 무슨 꽃을 그린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섬찟했다. 태오의 손톱이 조금만 길었어도 그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뚝뚝 흘렀을지 몰랐다. 

그는 상처 입은 괴물처럼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우림의 목덜미를 노려봤다.


꽃잎의 색은 지나치게 옅어 금방 사라질 것 같았고 우림의 하얀 피부와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 불길했다. 그 자국이 그대로 녹아 우림까지 데려갈 것 같았다. 

어디 사는 변태인지 실력이 대단했다.


어릴 때부터 우림의 주변에는 쓰레기가 자주 꼬였다. 

우림이 싫어해도 경호원을 붙여 놓고 명품으로 휘감아 잘사는 애 티를 뚝뚝 내게 해 두지 않으면 별 좆 같은 것들이 다 꼬였다.


사고도 잦았다. 

멀쩡히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은 차가 들이박으려 들고, 옥상에서 벽돌이 떨어지고, 최신 전자 기기가 배터리 과열로 터졌다.


태오가 본 것만 해도 몇 번인지 몰랐다. 유난히 감이 좋은 태오가 번번이 우림을 구해 내지 않았다면 죽었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나. 느낌이 안 좋았다.


“자세히 말해 봐. 너 이거 언제부터 이랬어.”


태오는 침대 위의 이불을 확 걷어 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림의 어깨에 둘러 주고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날부터요. 처음에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일주일마다 하나씩 더 늘어나서 세 개가 되었어요.”


우림은 점점 개수가 늘어나는 이 꽃잎을 거울로 볼 때면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되는 괴물을 본 것처럼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왜 자신은 이런 짓을 당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속도 울렁거렸다.


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매번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누가 죽어라, 죽어라 저주하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꽃잎 자국이 생기면서부터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다가오는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고 혹시나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사람이 미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이사님, 저…… 굿이라도 받아야 할까요?”


태오는 싸늘한 눈길로 일갈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고 내려와. 밥 먹게. ……어디 사는 씹새끼인지는 금방 찾아낼 테니까.”


조금쯤 한심해하는 기색까지 품은 단호한 대처에 우림이 살짝 웃었다. 태오가 가까이 있으면 우림은 이상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그가 자신을 구해 줄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네, 이사님.”


한결 편안해진 안색으로 수줍게 웃는 얼굴을 본 태오는 주먹을 꽉 쥐고 우림의 방을 나왔다. 

그는 집 안에 상주하는 경호원에게 다가가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여기 CCTV 싹 다 걷어 와. 하나도 빼놓지 말고.”


감시당하는 줄 알면 우림이 오해하거나 스트레스받을까 봐 백 회장은 우림의 방 앞에 초소형 CCTV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우림의 방 내부에는 없었으나 그 정도만 해도 범인을 일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잡으면…… 죽인다.’


어둡게 가라앉은 안광이 살기로 번들번들했다.


* * *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백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백 회장의 최측근, 사태오 이사는 급하게 귀국하여 병실을 찾았다.


“DNR이라고 한다지……. 호흡기 같은 걸 거추장스럽게 달고 사느니 그냥 편히 가게 해 다오.”


DNR(do not resuscitate). 심정지가 와도 심폐 소생술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태오는 미심쩍은 얼굴로 백 회장을 바라보며 벌써 뇌까지 암세포가 번졌나 의심했다. 

눈치가 귀신같은 노괴는 다 안다는 것처럼 눈썹을 들추었다.


“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내 젊은 날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오는 죽을 때가 되어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저 노괴도 별수 없는 인간이구나 했다.


“웬 늙은 거지 하나가 문 앞에 있기에 썩 쫓아내려다가…… 그날따라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그래서 먹을 것을 줬었다.”


태오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말든 백 회장도 꿋꿋하게 제 이야기를 읊었다.


“그 노파가 음식을 받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러더구나.”


거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호령하던 노인의 눈가가 푹 꺼져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생선 같았으나 독기로 똘똘 뭉쳐 있던 두 눈만은 여전했다.


“안면에 반안살(攀鞍殺)이 그득하여 크게 될 터이나 사는 동안 자(子)와 손(孫)이 참척(慘慽)할 운명이라 호상은 못 누리겠소, 하고 말이다.”


“…….”


“내 아직 그 일을 잊지 못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다.”


목이 멘 목소리에 가래가 드글드글 끓었다.


사실이라면 참 기묘한 일이었다.

참척(慘慽).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어 그 극심한 고통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뜻했다.


백 회장에게는 자식이 넷이나 있었다. 

그러나 장남은 자살하여 죽었고 장녀는 물에 빠져 죽었고 차남은 납치되어 죽었으며 마지막 남았던 막내아들은 사고사 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막내아들이 남기고 떠난 손녀뿐이었다.


“회장님답지 않으셨군요.”


태오는 딱 한 마디만 했다. 백 회장은 귀신이니 무당이니 하는 것들을 썩 잘 믿었지만 태오는 아니었다. 그는 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었다.


“그랬지.”


백 회장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 얼른 죽어야 막내 볼 낯이 있을 것 같구나…….”


백 회장은 태오를 쳐다보지 않고 바르게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후회가 짙게 밴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듯 뿌옇다.


태오는 자신이 본 누구보다도 독했던 노인네가 고작 그런 일로 연명 치료를 중단하려 든다는 걸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인네가 저렇게 떠나면 뒤에 남은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배알이 뒤틀리고 속이 뒤집혔다.


“나 죽을 때까지, 아니, 나 죽어서도…… 우리 우림이를, 잘 보살펴 다오……. 내 마지막 부탁이다.”


백 회장이 유일하게 남은 혈육의 이름을 꺼내 들자 태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다 죽어 가더니만 어디서 힘이 났는지 백 회장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로 두툼한 봉투를 내밀고 있었다.


백무건설 회장 권한대행 임명서와 주식 증여 서류.

그것이 이 거래의 대가라는 것처럼 손에 쥔 봉투가 아주 무거웠다.


태오는 저 음흉한 노인네가 처음부터 이걸 노렸다는 걸 깨달았다. 

장남을 자기 입맛대로 키우다가 잃은 백 회장은 그 후로는 어느 자식에게도 회사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 회장의 핏줄이 아닌 태오는 원치 않은 기대를 받아야 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백 회장의 후원을 받았다. 

단순히 고아 하나를 후원하는 것치고는 대단히 시끌벅적했다. 

단지 태오가 백 회장의 유일한 가족인 우림을 구해 주어 은혜를 갚았기 때문이라면, 후계자 다루듯 이 정도론 안 된다며 혹독히 몰아세울 이유가 없었다.


‘좆같이 뺑뺑이를 돌리더니.’


백 회장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다. 늙은 자신이 더는 우림을 지켜 줄 수 없는 때가 올 테니 태오를 안배해 둔 거였다.


태오는 남의 체스판의 기물이 되는 걸 혐오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백 회장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대가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기 때문은 아니었다. 타고나길 까탈스러운 성정은 그런 것에 꺾이지 않을 만큼 지랄 맞았다.

여우 같은 백 회장은 태오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본새 사납게 굴지만 태오는 우림에게 약했다.


백 회장의 손녀 백우림은 예뻤다. 이목구비의 조화가 오밀조밀하여 사랑스럽고 계속 보아도 지루하지 않아 관심을 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몸짓에는 우아함이 배어 나와 품위가 있었고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이게 다 가뜩이나 요망쩍게 태어나 힘든 애한테 무용 따위를 배우도록 권한 백 회장 탓이었다. 

태오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백 회장을 증오했다.


그러나 백우림은 온실 속 화초였다. 

온실의 주인이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득시글 꼬인 벌레 떼에 뜯겨 잎과 줄기가 다 상해서 결코 온실 밖으로는 내보낼 수 없는 화초였다.


태오는 손에 중요한 서류를 쥐고도, 저딴 게 미인박명(美人薄命)인가, 하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그렇게 불안하면 짝이라도 일찍 맺어 두시지 그랬습니까.”


태오의 빈정거림에 백 회장은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만날 우(遇), 수풀 림(林). 그래서 우림이를 네게 맡기는 거다, 태오야.”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그 말이 땅에 내려앉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 * *


우림은 앞에 앉은 태오를 흘긋 바라봤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참 신기했다. 그렇게나 미칠 것 같았는데 다 꾀병이었던 것처럼 숨이 편안해졌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답잖게 쳐다보지 말고 그거나 먹어.”


“배부른데…….”


수저로 반쯤 먹은 죽 그릇을 휘저으며 속삭이자 태오가 대번 눈을 사납게 치떴다. 

그는 뭐라고 쏟아 낼 것처럼 씩씩대다가 커다란 손으로 젓가락질하여 정갈하게 놓인 반찬을 우림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먹어.”


그러면 우림은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챙겨 준 걸 먹으라고 빵빵하게 부풀었던 위가 조금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림은 옅게 웃으며 죽을 먹었다. 

태오는 말없이 다시 작은 반찬 하나를 집어 우림의 수저 위에 올려 주었고 그러면 우림은 또 한 입 먹었다.


“아……!”


그러던 중 우림이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웅크렸다. 

몸 안에서 열꽃이 피어났다. 

가슴께로 퍼진 열감은 삽시간에 불꽃을 태웠다. 

부드럽고 말캉거리던 둔덕이 단단하게 굳었다. 

연한 살이 돌덩이처럼 딱딱해지는 일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의자를 내팽개치며 일어난 태오가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웅크린 우림의 얼굴이 식은땀에 젖었다.


“전문 병원 다녀왔다더니 다 돌팔이 새끼들 아니야!”


그 잠깐 사이 우림의 병원 방문 기록을 확인해 보았던 태오는 벌컥 성을 냈다.


건강검진 결과 이상은 없었다.

호르몬 수치도 정상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약만 먹으면 호전될 거라는 게 전문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보름째 꼬박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목덜미의 꽃잎 반점이 세 장으로 늘어난 오늘은 특히나 더 증상이 심했다.

우림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다른 돌팔이라도 만나 보는 것 외에 뾰족한 수도 없었다. 태오는 우림을 안아 들었다.


“아! 아…… 아파……!”


상당히 조심했는데도 우림은 통증을 느꼈다.


“바, 방에…… 유축기 있어요…….”


“뭐?”


그걸로 뭐 어쩌라고. 태오는 차갑게 쏴붙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험상궂게 눈을 부라렸다.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하염없이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우림은 색색거리며 모든 걸 맡기듯 태오의 품에 기댔다.


속으로는 수백 번 욕을 쏴붙였으나 실제 태오의 입술은 꽉 닫혀 있었다. 

얼굴은 차갑고 서늘했지만 계단을 올라 우림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방문을 쾅 열어젖히고 발로 쾅 닫았다.

기분 탓인지 몽글몽글한 젖내가 올라오는 침대에 우림을 내려놓은 태오가 딱딱하게 말했다.


“어디.”


“저쪽, 두 번째 칸 서랍에…….”


우림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것도 힘에 부쳤다. 

우윽. 헛구역질이 올라온 우림은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눈물로 축축한 눈망울에 태오의 등이 담겼다. 

거구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크림색의 동글동글한 유축기를 극도로 혐오스럽게 노려본 태오가 성큼 걸어왔다.


“혼자 못 하겠어요…….”


우림은 힘없이 속삭였다.


“사람 불러 줘?”


“싫어요. 창피해…….”


“그럼 뭐 어쩌자고. 다른 생각 하지 마. 이건 그냥 의료 행위야. 전문적으로 마사지하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우림은 태오가 누구를 불러 주려는 건지 상상해 봤다.


산후조리원에나 있을 마사지사를 부르려고 할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살림을 도와주는 김 집사님을 부를지도 모른다. 

애가 셋이나 있는 중년의 부인이니 경험이 많을 터였다.

하지만 우림은 둘 다 싫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이사님…….”


우림은 끙끙거리며 태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림의 손 쪽에 유축기를 내려놓은 태오는 당장이라도 방을 나서려고 했다.


“알았어. 사람 보내 줄 테니까 놔.”


“누구요?”


“김 집사님.”


그럴 줄 알았다며 우림은 픽 웃었다.


“의료 행위라면서요. 응급처치는 최초 발견자가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넌 대체 날 얼마나 편하게 생각하는 거냐.”


그럴 리가. 우림은 속으로 반박했다. 

그를 편하게 생각했으면 몇 마디가 어려워 길고 긴 시간을 돌아왔을 리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지 않을 테고 주저하며 끙끙거리지 않았겠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잘 나불거리는 걸 보니 멀쩡하네. 그럴 힘 있으면 혼자 해.”


아무 말 못 하고 입술을 깨무는 우림의 손을 태오가 차갑게 쳐 냈다. 우림은 허겁지겁 다시 그를 붙잡았다.


“나 아파요. 엄살 아니에요. 진짜 아파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내면과 외면의 고통으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이사님……. 이사님, 도와주세요. 제발…….”


우림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매가리 없이 옷자락을 흔들었다. 하얗고 나풀나풀한 손짓은 멀쩡한 사람까지 돌아 버리게 하는 끼가 있었다.


“이게 또 사람을 좆같이 가지고 놀지……!”


험하게 말하는 순간 그 즉시 후회하면서도 태오는 으르렁거리며 우림의 옷자락을 획 들쳤다.

그만. 멈추라고, 이 개새끼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성이 소리쳤으나 모르겠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 으, 아파, 살살…….”


“제정신 똑바로 박혔으면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


우림은 말간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먼저 도와 달라고 말한 건 자신인데 이제 와 말릴 이유가 있을까?


“맨날 나만 이 지랄이지…….”


태오는 욕을 씹으며 우림의 티셔츠를 벗기고 속옷을 풀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빠르게 끝낼 셈인지 주저 없이 단호했다.


우림은 아름다웠다. 

가냘픈 몸 어디서 이런 게 나왔는지 수컷의 시선을 빼앗는 자태가 탐스러웠다. 

그것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태오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예쁜 빛깔의 젖꼭지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흡입기를 가슴에 붙였다.


직관적인 디자인을 가진 유축기는 사용이 어렵지 않았다. 

끼우고 전원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우선 가장 약한 1단계부터 해 봤다.

지이잉. 진동이 퍼지며 투명한 흡착기가 젖을 움켜쥐었다. 말캉한 살이 눌리며 젖꼭지가 튕기듯 일어섰다.


“아윽! 이사님, 아앗! 아……!”


“입 다물어.”


“아, 아파…… 아파아아……!”


우림은 새하얗게 질려 헛구역질까지 했다. 얼른 끝내 버리겠다며 이를 갈던 태오도 그 꼴을 보고는 더 강행하지 못했다.


“엿 같은! 물건을 뭐 이따위로 만들었어? 제조사가 어디야!”


태오는 애꿎은 곳에 화풀이하며 유축기를 내동댕이쳤다.

거칠게 내쳤으나 포근한 이불 위로 떨어진 유축기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몇 방울 떨어진 젖이 투명한 병을 희뿌옇게 적셨다.


“못 하겠어……. 너무 아파, 으흑…… 차라리 입으로 빨아 주세요…….”


“뭐?”


“아빠들이 그렇게 한다던데…….”


“이 씹……! 내가 네 아빠니? 어?”


우림도 제 요구가 뻔뻔하게 들리리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윽박지르고 있는 태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도 소심하게 가슴을 쥐어 앞으로 내미는 행동은 의미가 분명했다. 네가 빨아서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이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다……. 넌 내 복장 뒤집으려고 태어난 년이야.”


이것도 최대한 순화한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썅년이라고 불러도 부족했다.


“이사님…….”


우림이 가슴을 다시 내밀었다. 희끄무레한 젖이 질척하게 붙은 젖꼭지가 단내를 풍기며 흔들렸다.


“지금 할 테니까 재촉하지 마.”


씨발. 씨발. 태오는 소리 없이 되뇌며 자세를 고민했다.


그는 두툼한 베개를 허벅지에 깔고 그 위에 우림을 앉혔다. 높이가 딱 맞았다. 새하얀 가슴이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으응…….”


우림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차갑고 건조한 인상에 일조하는 새까만 눈썹과 답지 않게 아래로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는 눈매가 보였다.

속눈썹이 이렇게 오밀조밀 예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매끄러운 라인을 가진 높은 콧대 아래로 젖을 문 입술이 보였다. 

조금 말랐던 입술은 젖으로 축축이 젖어 갔다. 

그의 입술을 적시는 단내에 배덕감이 불꽃처럼 피어났다.


얼음처럼 차갑게만 보이는 남자였지만 안은 무척 뜨거웠다. 

차지고 습윤한 혀가 젖꼭지 아래를 감싸고 뜨거운 입술이 위를 덮었다. 뜨끈한 열기에 젖 뭉침이 풀리며 달콤한 한숨이 녹아내렸다.


“하으, 응…….”


태오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우선 살살 빨아 보기만 했다. 

아픈 애한테 엄한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인내하고 있었으나 소리를 감추려는 기색마저 안 보이니 열이 확 돋았다.


“소리 내지 마.”


그는 날카롭게 경고하곤 다시 젖을 물었다. 

입술로 살짝씩 깨물었다가 놓는 것이 애무인지 치료인지 스스로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파할까 봐 걱정이 된 탓이다.


“읏, 더 세게……. 응, 더…….”


그런 마음도 모르고 우림은 요망쩍은 소리나 내며 요구했다. 아파서 새파랗게 질려 있던 게 언제냐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이 그를 홀리려 들었다.


“백우림. 입 다물어.”


그는 위협을 느낀 맹수처럼 살벌하게 으르렁거렸으나 우림은 딱히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파, 흣…… 손으로, 풀어 주세요…….”


그가 물고 있는 오른쪽은 괜찮은데 방치당하는 중인 왼쪽 가슴이 시렸다.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아서 그의 손을 가져와 붙였다. 

커다란 손이 움찔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간지럽고 아릿했다. 

어쩐지 애가 타 우림은 끙끙거리며 속삭였다.


“조금 더, 세게…… 만져 줘…….”


꽈악. 곰처럼 커다란 손아귀가 젖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틈으로 살덩이가 꼬집히며 젖꼭지에서 즙이 팍 튀어나왔다.


“아흐응!”


우림은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조금 벌렸다. 쾌락에 가까운 해방감이 오싹했다. 

소름이 돋아 일어선 솜털을 달래듯 뜨거운 손아귀가 젖을 줄줄 짰다.


“앗, 흐……. 좋아, 으, 좋아요, 이, 이쪽도…… 하응!”


가느다란 팔이 태오의 목덜미를 꽉 껴안았다. 

말캉하게 풀려 젖을 줄줄 흘리고 있는 가슴에 얼굴이 처박힌 태오가 가슴골로 흐르는 젖을 핥으며 쏴붙였다.


“알았으니까 좀 놔.”


시각적인 자극과 정신적인 충족, 아니, 이런 걸 다 떠나서 육체의 쾌감이 말도 안 되게 좋았다. 

가슴이 이렇게 예민한 부위였나 의아할 정도로 느꼈다. 

우림은 자극적인 감각을 좇으며 가슴을 자꾸 태오의 얼굴에 붙여 비볐다.


“응, 하으…… 이사, 흐, 이사니임…….”


색을 쓰는 목소리가 요망스러워서 기어코 사람을 돌게 했다. 태오는 제 목을 끌어안는 우림의 손을 쳐 내고 그녀를 침대에 확 눕혀 버렸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두 손목을 모아 한 손으로 붙잡고 넥타이를 풀어 묶어 버렸다.


우림은 커다란 눈을 둥글게 뜨고 태오를 올려다봤다. 

창문 너머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젖으로 젖은 가슴이 번드르르 빛났다. 가

슴이 세차게 콩닥거려 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우림은 내려다보는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확 붉혔다.


“푸, 풀어 줘요!”


“다 끝나고. 말로 해서 들었으면 이 꼴은 안 당했을 거다.”


이게 그나마 낫네. 저 꼴을 안 당했으면 더한 꼴을 당했겠지.


태오는 입꼬리를 틀어 우림을 비죽 비웃으며 하던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제법 짜내었다고 젖가슴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는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끌어모아 짜내며 입술로 압력을 주어 빨았다. 

막혔을 때만 조금씩 빨았는데 금세 입 안 가득 젖이 찼다.


“애새끼 먹을 분량만 나오면 되지 좆같이 많네.”


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젖을 꿀꺽꿀꺽 삼켰다.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목 넘김이었다. 우림은 젖을 삼키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하으…… 맛있어요?”


분주하게 젖을 짜내던 태오가 우뚝 멈추어 우림을 사납게 노려봤다.


“내가 너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


“그냥 궁금, 으…… 웁?”


억센 손아귀가 입을 콱 틀어막았다.


별 짓거리를 다 당하며 컸으면 사람 무서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연갈색의 눈망울은 말갛기만 했다. 

저 눈이 항상 그를 충동질했다. 더러운 욕구를 싸 갈겨 주면 어떨까, 섬뜩한 상상이 들었다.


차고 냉소적인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고요히 우림을 내려다보았다. 

겁을 먹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우림은 약간 수줍어하기만 했다. 동그란 귓바퀴가 예쁘게 물들었다.


흘긋. 그 꼴을 확인한 태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차라리 보지 말자는 것처럼 우림을 외면한 그는 다시 바쁘게 젖을 짰다. 몇 번 했다고 입놀림이 제법 능숙해졌다.


“우응, 흐…… 하으, 으……!”


우림은 가슴이 빨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고, 그가 젖꼭지를 뱉어 내면 아쉬움에 탄성을 흘렸다. 아까부터 엉덩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문득 우림은 태오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 * *


13년 전. 우림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의 일이었다.


“우림 아가씨, 그네 계속 탈 거죠?”


말을 건 사람은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바쁜 할아버지 대신 우림과 놀아 주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자주 바뀌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우림은 사람을 잘 따르는 순한 아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럼 잠깐만요. 날이 쌀쌀해서 카디건만 가지고 나올게요.”


선생님은 우림을 혼자 두었다. 우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실수였다. 

그래도 별다른 일이 없다면 문제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우림은 먼저 사고를 치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어? 고양이……!”


그네가 하늘 높이 떴을 때 우림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내려오지 못하고 우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혼자 나가면 혼나는데…….”


우림은 후다닥 그네를 내려왔으나 섣불리 나가지는 못하고 주춤거렸다.


미야옹. 미야옹.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구슬펐다. 바람이 세게 불어 고양이의 몸이 휘청거렸다. 

나무는 집 근처에 있었다. 높은 담장을 넘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고민하던 우림은 문을 열고 나갔다.


“금방 구해 줄게.”


정원사가 쓰던 사다리가 근처에 있어서 그걸 썼다. 사다리를 나무에 잘 걸쳐 놓은 우림이 나무에 막 올라섰을 때였다.


“앗!”


고양이는 우림의 도움을 받는 대신 사다리를 이용해 폴짝 뛰어내렸다.


거세게 분 바람에 사다리가 크게 흔들렸다. 

우림은 고양이가 다칠까 봐 움찔했으나 고양이는 땅에 잘 착지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모습이 날렵했다.

어쨌거나 고양이가 사다리를 이용했으니 헛일을 한 건 아니었다. 우림은 그만 내려가자고 생각했다.


휘이잉! 다시 몰아친 바람에 사다리가 흔들리더니 뒤로 퍽 넘어가 버렸다.


“아, 안 돼……!”


짧은 아이의 팔로는 사다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소낙비로 변했다. 저택 안에서는 우림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있어요!”


세차게 쏟아붓는 비에 도움을 구하는 우림의 목소리가 묻혔다. 

나뭇잎이 비를 막아 주고 있었지만 물방울은 계속 떨어졌다.

옷은 젖고 바람은 거셌다. 우림은 한기에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사다리가 돌아왔다.


“……?”


우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아이 혼자 참기에는 무서운 시간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도움에 연한 색의 눈망울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안에 입은 흰 티와 단추를 다 풀어 놓은 교복 셔츠가 바람에 펄럭였다.


「사태오」


유도 선수 출신인 어느 경호원만큼이나 체격이 좋았는데 굵다란 목 위에 달린 얼굴은 잘생겨서 청춘 드라마에서 막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눈썹 뼈와 콧대의 음영이 깊고 짙었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물기에 젖은 얼굴은 청소년답지 않게 퇴폐적이라 아이에게는 자극이 과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훔쳐본 것처럼 우림의 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오는 그런 우림을 무심히 흘겼다. 따스한 말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지는 않고 사다리를 잡아 주고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우림은 나무에 앉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배꼽 인사라도 하는지 허리가 뚝 꺾였는데 아슬아슬한 높이 때문에 아찔해 보였다. 

그래도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가 질 나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우림의 몸이 퍽 떠밀렸다.


“으앗!”


휘청거리던 우림이 추락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태오는 우산을 팽개치며 두 팔을 뻗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그의 팔이 우림을 가두었다.

태오의 반사 신경이 나빴거나 그가 우림을 잘 살펴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추락했을 것이다.


“너…….”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뒤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태오의 눈에는 무언가가 우림을 민 것처럼 보였다.


‘미끄러졌겠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윽…….”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우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태오를 올려다보며 히끅거렸다. 

아이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자 태오는 조금 난감해했다. 

소년에게 우는 애를 달래 본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


나무 아래에 우림을 내려놓은 태오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우림 아가씨!”


저택의 문이 열리고 우림을 찾아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우림을 둘러쌌다. 

우림은 제 몸을 살펴보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어른들에게 정신없이 대답해 주다가 태오가 사라진 걸 뒤늦게 깨달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훌쩍 떠난 그는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래도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사태오……. 태오, 오빠…….”


쏟아지는 소낙비가 우림의 속삭임을 숨겨 주었다.


우림이 태오를 다시 만난 건 그날 이후 한 달도 안 되어서였다.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고맙다고 말해야지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도 우림은 엉엉 울고 있었다.


“믿어. 난 너한테 나쁜 짓 안 해.”


피로 흠뻑 젖은 교복을 입은 태오의 첫마디가 그거였다. 고통으로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고 다정했다.


“울지 마……. 경찰, 하아…… 불렀으니까, 눈 감고 잠깐만 있어.”


태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 태오의 아래에는 커다란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미, 미안, 하읍, 헉……!”


열한 살의 우림은 정신적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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