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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펌]내 남자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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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708 회 작성일 24-02-26 01: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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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HJ그룹 정 희준사장은 이번 출장에 파트너로 N군을 대동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사업상이었지만


본 기자가 취재한 결과 두 사람은 연인사이로 밝혀졌다. 두 사람의 만남은 몇 년째 이어진 것으로 알


려졌고, 출장을 갈 때마다 한방을 사용하며 같이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정 사장은 7년 전에


결혼했지만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공식석상에서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부인 한세련씨


는 정 사장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HJ그룹 비


서실측에서는 사실무근이라 표명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 여파가 어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난 뭐지?"


결혼 7년째인 세련은 주변사람들의 부러움과 질투심을 한 몸에 받으며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외롭고 희미해지는 존재감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일반적인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멀


었었다. 1년이면 200일 이상 출장을 다니는 남편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부재보다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힘들었다. 거리를 지나갈 때나 쇼윈도로 가족끼리 식사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때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 허전함은 남편도 채워주지 못했다.


두 사람은 평범한 부부들과는 달랐다. 청혼을 받고 신혼여행지에서 달콤한 허니문을 기대했던 그녀


는 고통과 함께 남편의 철저한 무관심에 부딪혀야 했다. 남편은 의무적일뿐 짧은 애정표현도 허용하


지 않았었다.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어도 여자인지


라 사랑받고 싶고, 관심을 끌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희들은 언제 아이를 가질거니?"


"아직 소식 없니?"


양가부모들은 그런 두 사람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에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여지없이 다그치듯 물어


왔다. 그 자리를 모면하기위해 곤욕스러운 것은 그녀였다. 워낙 말수가 적은 남편에게 설명을 기대하


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원. 벌써 7년이야."


양가부모들의 관심은 숨통을 조여 왔기에 되도록 모임에 나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하는 사람도 가고 덩그러니 혼자 있는 집은 적


막했다. 남편이 출장간지 열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듯 전화 한통 안 해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도 지쳐버렸다. 취미생활을 즐기고 몸매를 가꾼다고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소일거리를 했지만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다.


신혼 때는 남편의 출장이 자유를 주는 것 같아 친구들과 놀고 쇼핑도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젠 그것


도 시들해졌다.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너만 바라봐주니까 복에 겨워서 그래. 나이 한창이겠다. 몸매도 잘빠졌겠다.


군침 흘릴만하지. 하기야 이런 예쁜 마누라 혼자 있으니 신랑이 불안할거야."


친구들은 만날 때 마다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런 이야기도 한두 번이었기


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심코 신문을 펼쳐들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


지 않아서 접을까하다가 눈길을 끄는 사진 때문에 활짝 펼쳤다.


"무슨 좋은 일인가?"


무심한 남편이어도 궁금했기에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한줄 한줄 읽을 때 마다 머리부터 피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HJ그룹 정 희준사장은 이번 출장에 파트너로 N군을 대동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사업상이었지만


본 기자가 취재한 결과 두 사람은 연인사이로 밝혀졌다. 두 사람의 만남은 몇 년째 이어진 것으로 알


려졌고...]


세련은 믿기지 않는 기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안에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몇 번이


고 훑어보았지만 똑같았다. 가십이라는 것이 사실보다는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지만 사실을 알지 못


하는 상황이기에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기사가 나가고 집의 전화가 쉼 없이 울려댔다. 허황된 보도에 흔들리면 안 되었지만 기자들의 사실을


확인하고자하는 집념에 일상생활이 안 되었기에 코드를 뽑아야 했다. 비서실에서 조치를 취한 것인


지 기사가 나간 하루만 집 앞이 소란스러웠을 뿐 지금은 그나마 조용했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혼생활 7년보다 더 길었다.


기사가 나가고 이틀 후에야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옷 세탁은 비서시켜서 하라고 했소."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심한 행동과 피곤함을 호소하며 침대에 눕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다


. 기사가 사실이라면 저런 행동은 가식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야기 좀 해요."


"내일 이야기해. 피곤해."


세련은 기사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피곤하다며 잠을 청하려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어 올


랐다. 참는 것도 한계에 다다라 날카로워진 신경이 두둑하고 끊어질 것 같았다.


"오늘 꼭 이야기해야 돼요. 내일 이란 절대 없어요."


세련의 단호한 말에 남편이 미간을 모으고 일어나 앉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남


편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죠?"


세련의 손에 들려있는 신문을 내려다보는 남편은 어깨만 으쓱 거릴 뿐이었다. 남편의 무표정으로는


사실을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게 뭐?"


"사실이에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남편의 애매한 대답은 세련의 화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신문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려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난 진실만을 원해요."


세련의 결심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남편은 침대에서 일어나 미니바bar로 향했다.


"한잔 들겠소?"


"아니요."


남편은 와인을 잔에 따라 음미하듯 향을 맡고 천천히 마셨다. 바bar에 기대있는 남편은 훤칠한 키에


쭉 뻗은 몸매, 다부져 보이는 근육들에 이목구비도 뚜렷해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사실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쪽으로 빠지려는 생각들을 그러모았다. 바bar에 딸려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며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말 안 해 줄건 가요?"


"신문 기사는 사실이요."


뜸을 들이다 듣는 대답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배적이었었다.


그런데 그것을 뒤엎는 남편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세련은 마음의 상처를 보이지 않기 위해 신


문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 그럼 나하고 왜 결혼 했어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소. 난 여렸을 때부터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나와 같은 그런 감정을 가진 남자들과 어울렸소. 이런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게


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소."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심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충격을 받으신 부모님이 결혼을 서두르신 거요. 그 당시 부모님을 납득 시킬 그런 여자가 필요했고,


차를 몰고 가다가 당신을 보고 한눈에 부모님이 원하시는 여자란 것을 알겠더군."


남편의 말은 길가다가 결혼할 여자로 그녀를 주웠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녀란 말인가,


아무리 부모가 중요하지만 한 여자의 인생을 산산 조각낼 권리가 남편에게 주어졌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청혼을 했다고요?"


"그래, 당신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사람이었지. 그래서 당신한테 결혼해 달라고 한 거요. 만약


당신이 승낙을 안했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겠지. 다행히 당신이 승낙을 했고, 부모님도 당신


을 만나고 만족하셨소."


세련의 등줄기로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그럼 신혼여행 때는 왜 그랬죠?"


"그때는 당신이 눈치 챌까봐 그랬소. 한번은 그런 행위를 해 줘야 누군가 물어보면 당신이 표현을 할


테니까. 그땐 정말 죽고 싶었지. 한 번도 여자의 몸에 스스로 들어간 적이 없었거든."


세련은 남편의 말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주, 죽고 싶었다고? 내가 전염병에라도 걸렸었나 보죠?"


"그 소리가 아니잖소. 난 그때 만나는 사람이 있었소. 그 사람은 나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떠나 버렸지


. 도저히 당신 몸을 가질 수 없었소. 같은 침대에 누워도 느껴지지가 않는 사람과 어떻게 같이 있겠소


?"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신혼 가구를 구입 할 때 침대만큼은 남편의 고집대로 싱글로 장만했었다. 어


린 마음에 그녀를 배려하는 남편에게 고마워 두 말하지 않고 따랐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


은 완전한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나에게 미안하지도 않던가요?"


세련의 물음에 남편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을 깍지 끼고 바라보았다.


"당신한테는 항상 미안했소.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당신에게 집중하려고 노력도 했고, 하지만 재정


적인 면이나 다른 것은 풍족하게 해주고 있잖소."


자신이 한 행동들을 정당화하듯 내뱉는 남편이 낯선 타인처럼 보였다. 7년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


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부부란 침실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


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세련은 그것이 메말라 있었다. 재정적인 풍족함은 겉만 화려할 뿐이었다.


"지금 그걸로 모두 이해하라고 말하는 건가요?"


"상황이 어쩔 수 없잖소. 난 당신이 필요하오.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겠소? 당신이 정 원한다면 애인


을 만들라고. 단 매스컴에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이오. 이번 기사도 조심한다고 했


는데 매스컴이 떠들어대서 법정 대응까지 할 거요. 아내가 있는 사람한테 말도 안 돼는 기사를 실었


다는 이유로 말이오. 그럼 당신이 법정에 불려 갈수도 있소. 난 평생 당신이 몰랐으면 했는데 일이 이


렇게 돼서 미안하오."


세련은 잘못들은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차지하기위해 노력한 지난


세월들이 억울했다. 몸을 가꾸며 다른 여자들보다 조금이라도 예쁘면 돌아봐줄까, 가정적이면 돌아


봐 줄까하며 보낸 세월들에 화가 났다.


"그게 지금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남편이라는 인간이 아내한테 애인을 만들라고 하는 상황


이 당신 상식에선 통할지 몰라도 내 상식에선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상황 이예요. 어떻게 그걸 평생 모


르면서 지냈으면 했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올 수가 있어요?"


세련은 지금까지 매력이 없어서 남편이 곁에 안 온다면 자책까지 했었다. 그런 그녀를 남편은 처참하


게 짓밟고 있었다.


"내,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혹시 어딘가 부족해서 당신이 날 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얼마나 괴로


워했는데 그런 날 당신은 무참히 짓밟았어. 이건 말도 안 돼.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당신이 나


한테."


세련은 비참함이 온몸을 적시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감당하


기엔 힘겨웠다.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여자한테는 전혀 흥분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


오. 남녀관계를 떠나서 처음엔 부모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혼했지만 지금 당신이 내 옆에 없는 것


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해. 이건 진심이요."


세련은 남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데 사랑한다니 이치에 맞는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믿어 달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랑이 어떤 것인 줄 알기나 해요?"


세련의 포효에 남편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거부하는 손을 잡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 남편이었기에 더 보기 싫었다.


"세련아 제발 그러지마. 당신은 나한테 없어서는 안 돼는 존재요. 내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데 기사


나 다른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요?"


남편은 본인의 말에 어패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를 세간의 방패막이로 삼기위해 몸부


림치는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예전의 세련이라면 이런 남편의 말을 무조건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처절한 외로움을 겪으며 지내온 세월 때문에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외톨이처럼


홀로 놓아두고 욕망만을 찾아 돌아다닌 남편은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싫어. 당신이 싫고 미워. 화가나. 지금 아무 말도 듣기 싫고, 보기 싫어."


소리를 지르며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세련의 몸부림을 몸으로 막아보려고 끌어안는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


"싫어. 저리가. 꼴도 보기 싫어. 놔. 놔주란 말이야."


남편이 잘못했다고 하는 말도 듣기 싫었다. 냉정하면서 무뚝뚝한 던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


고는 상상도 안됐다.


"세련아 당신이 이렇게 화내니까 마음이 아파. 그러지마 응? 세련아 제발."


세련은 남편의 몸에 손이 닫는 곳은 주먹을 쥐고 마구 때렸다. 너무 억울하고 원통했다. 언젠가는 쳐


다봐 주겠지 그런 마음으로 해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런 남편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세련은 목이 터져라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울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분을 토해냈다. 눈물이 말라


버렸다고 생각들 때 남편이 세련을 안아 올리려했다. 예전에 그런 행동들을 얼마나 바랐는데 이제 와


서 이러는 남편이 싫었다. 생각지도 않게 안아줄 때는 가슴이 설레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었다. 남편의 방패막이도 집안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품도 되기 싫었다. 세련은 남편을 밀어내며 차가


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 나가서 자요.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요."


세련은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향했다. 등을 보이고 누워 다른 말을 허락하지 않았


다. 남편은 한참을 망설이는 것 같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눈물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란 생각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시트를 입에 물고 울어야 했다. 초라한 모습


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새벽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세련이 눈뜬 시각은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출근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남편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에 주춤했지만 무시해


버렸다. 내린지 얼마 안 된 커피를 잔에 부어 틈틈이 작업하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외로움을 느낄 때


면 종이위에 낙서하듯 글을 쓰는 게 좋아 그녀만의 공간을 만들었었다. 이곳이 피난처가 될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외로움을 달래며 지내왔던 곳에서 결혼생활을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지내는 것은 두 사람에게 무의미했다.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남편인 희준과 대면해야


했지만 마지막 남은 용기를 그러모은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기대었다. 모


든 면에서 해결책은 이혼이었다.


"빨리 말하면 덜 힘들지 않을까?"


세련은 눈을 뜨고 빈 커피 잔을 들고 응접실로 나갔다. 희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생각을 읽을 수 없었지만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어떻게 라니?"


희준의 무심함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흘려 넘겼다.


"말 번복하기 싫어요. 우리 이혼해요."


희준에겐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다. 어제는 홧김에 원망하는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다. 당연히 그것으


로 끝일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 받아주었었다. 하지만 지금 세련의 얼굴은 평상시의 모습도 아니고 어


제의 흥분한 모습도 아니었다. 근접할 수 없는 냉정함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세련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궁금했다. 아마 자신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세련을 결혼하고 처음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린나이에 그와 결혼해서 피


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에게 사랑받지도 못하고 지냈다는 게 미안했다. 사랑을 먹고 사는 게 여


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힘든 상황에서 피어나는 꽃이었다.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한 것


이다. 그런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게 뇌리를 스쳤다.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요."


"아니 생각할 것도 없어요. 더 일찍 이런 결정을 내렸었더라면 서로가 덜 힘들었을 텐데 말 이예요.


이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우리 감정싸움 같은 것 하지 말아요. 나도 당신 마음알고, 당신도 내 마


음을 알거라 믿어요. 이곳 당신이 쓰겠다고 하면 내가 나갈게요.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천천히 처음


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자리 잡을 동안만 도와줘요. 못해본 공부를 하려면 이곳에서는 좀 힘들겠죠?


기사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으니 외국으로 나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요. 서류 같은


것은 내가 모르니까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줘요. 그 후에 난 조용히 떠날게요."


세련은 자신이 언제 이런 구체적인 것까지 염두에 두었었는지 신기했다. 아마 기사를 보면서 결론을


내렸었는지도 몰랐다.


"이건 아닌 것 같소. 난 당신이 필요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집안의 그림자로 지냈었어요. 명목상의 아내는 지금까지 충분했잖아요. 이혼


하자는 말이 갑작스러워서 착각하는 거예요. 당신 입으로도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한테는 아


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혔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러는 것은 억지일 뿐이에요. 만약 당


신한테 신문에 같이 있던 남자와 헤어지라고 하면 그럴 수 있나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 잘


알아요."


세련의 물음에 얼굴이 굳어지는 희준을 보자 실소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항시 무표정이던 희준이 처


음으로 미약하지만 감정을 들어낸 것이다.


"긴장할 것 없어요. 그럴 마음도 없으니까. 이젠 정말 미련 없어요. 아마 작년에 이런 일이 터졌다고


한다면 많이 망설였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버거워요. 이렇게 지내다가 동맥을 끊을 것


같았거든요. 어찌 보면 나한테는 좋은 계기가 된지도 모르겠네요."


세련은 속내를 드러내자 마음이 편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준을 남겨두


고 침실로 향했다. 시간만 끈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오늘 서류에 사인해요. 당신 유능한 변호사 있잖아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이 나라를


떠났으면 해요.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싫고요."


이젠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실로 들어가 서랍에서 도장을 찾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며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었다.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지 잠이 몰려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희준은 충격에서 벗어나자 아픔이 몰려왔다. 세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놓아주고 싶지는 않


았지만 거리를 두고 시간을 갖는다면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이 되살아나지 않을까하는 바람이었다.


아픔에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수화기를 들었다.


"나요. 아내가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서류도 빠르게 준비해 주시오. 부족한 것 없이 살 곳도


마련해주고. 이틀이면 되겠소?"


급하게 요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세련이 말한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보겠습니다.]


"부탁하오. 아내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계속 막았었는데 이젠 도저히 못 참겠다는군. 그러


니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부탁하겠소."


[알겠습니다. 마무리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수고하시오."


희준은 전화를 끊고 세련이 들어간 침실로 눈길을 돌렸다. 안에 그의 어린 아내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멍청한가, 자신이 힘들 때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응원해주었었다. 그런


아내를 철저하게 배신한 것이다. 조금만 다가갔더라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친 몸을


일으켜 조용히 침실 문을 열었다. 세련은 곤히 잠들어있었다. 처음엔 명목상의 아내로 있었지만 세월


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에는 언제부터인가 세련의 자리는 커져가고 있었다. 그 만을 바라보던 아내가


독립을 선언하며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늘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잘못으로 소중한 새를 날려 보낸 것이다.


"당신의 날갯짓에 내가 이렇게 아플 줄 몰랐소."


그를 위해 7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준 아내 세련!


그의 손짓하나에 말 한마디에 행복에 겨워 얼굴 붉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무심함으로 흘려


보냈었다. 아플 때 보듬어주고, 다독여주고,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라도


했었다면 하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손끝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사랑이


피어났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변호사는 희준이 요구한 것보다 며칠 늦게 서류를 가지고 방문했다. 힘들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접


고 세련에게 서류를 주었다.


"고마워요. 이혼서류는 어찌 된 거죠?"


"당신에게 시간을 주려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우선 짐부터 챙겨야 할 것 같네요."


세련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집안에 같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았고, 완벽한 타인처럼 못


본척했다. 그 모습을 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드디어 세련의 출국 날이 되었다. 짐을 서둘러 옮기려는 아내에게 서운함마저 들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주지."


"택시 부르면 돼요."


"그럴 수는 없소."


희준은 세련이 단호하게 거절할까 두려워 짐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마지못해 올라타는 세련을 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공항에서 매정하게 떠나버리는 세련을 잡지 않기 위해 바지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못했다. 그녀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났다.


"이혼 수속도 최대한 빨리 해줘요. 만약 내가 필요하다면 들어왔다 갈게요. 그러니 서류준비해서 깨


끗하게 처리해 주길 기다릴게요. 항시 바쁜 당신이 직접 알릴 필요는 없어요. 비서를 통하거나 그것


이 껄끄러우면 변호사를 통해 연락주세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곱씹으며 저 멀리 날아간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우두커니


서있었다.


"기사에 난 그 남자와 헤어질 수 있어요?"


희준은 세련의 말이 생각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잇새로 흘러나오려는 오열을 집어 삼켜야 했다. 집


으로 돌아오면서도 텅비어버린 마음과 아내가 떠난 집을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돌리고 싶었


다.


희준의 생활은 세련이 떠나자 처참하게 변해버렸다. 항시 냉정하게 일을 처리해 왔었고 모든 감정은


배제했었기에 일에는 지장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아내의 빈자리가 눈에 더 크게


보였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파트너가 옆에 오는 것도 싫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를 반겨주는 세련의 온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텅 빈 공간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세련이 사용했던 침대로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니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


금이나마 위안을 받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건가? 난 이렇게 그리운데."


그녀가 프랑스로 떠난 지 2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지 않으면 소식을 알 길


이 없었다. 그곳으로 간 후로 연락한번하지 않는 그녀가 매정했다. 자신의 지친 몸과 마음은 갈 곳을


잃어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젠장!"


희준은 사무실에서 결재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되는 불면증


과 싸워가며 지내기란 쉽지 않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들여다보고 있을 수 없어 서류를


덮어버렸다. 뻑뻑한 눈이 아파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음이 심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


다.


"세련!"


희준의 심란한 마음은 세련의 영향이 컸다. 정기적으로 사진과 함께 보고서가 올라왔다. 오늘도 예외


는 아니었다.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있는 세련의 사진에 가슴이 설&47132다. 하지만 주변을 채우고


있는 남자들에 한순간의 설렘이 질투로 변질 돼 버렸다. 질투라는 생소한 감정이주는 파장은 대단했


다. 세련은 한 번도 사진에서처럼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준적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지금도 사


진속의 미소가 떠올랐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노크소리와 함께 기사에 실렸던 파트너인 혁준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일관계로 만나 파트너


로 진전되어 벌써 5년이 되었다. 혁준은 유능한 국제 변호사였다. 두 사람의 규칙은 부담을 주거나


서로의 사생활과 일에 간섭하는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혁준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 참견하려고 했고, 요구 사항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이봐 왜 만나주지도 않는 거야?"


"바빴어. 더 잘 알 텐데."


희준의 퉁명스런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어깨를 안는 혁준 때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혁준은 자신에게 한 번도 싸늘하게 대한 적이 없는 희준이 멀리하려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감지 할 수


있었다. 2년을 그렇게 소원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자신이 먼저 희준을 흥분시키면 손길을 거


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었다. 그런 희준이었는데 신문기사가 나간후로는 몸을 사리는 것인지 자신의


손길에도 흥분하지 않았고, 섹스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매번 핑계를 대서라도 벗어나려하고 있었


다. 그렇다고 희준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을 생각해도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많


은 파트너들 중에서 희준만이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욕심이 났다.


"바쁜 건 언제나 바빴어. 언제는 안 바쁜 적이 있었나? 그런데 이상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내가 만


족시켜주지 않은 거야?"


희준은 혁준의 말에 짜증이 났다. 이젠 두 사람의 관계도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세련이 떠난 뒤로


혁준은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었다. 여자를 싫어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증오했다는


것이 맞았다. 그것을 계기로 엉뚱한 세계에 발을 내디뎠고, 아내까지 떠나보냈다. 하지만 더 이상 아


무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세련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연락하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 단호하게 일어났다. 회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혼자 있고 싶었다. 뒤에서 분


노를 억누르고 부르는 혁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는 혁준은 가버리고 없었다.


희준은 혁준이 다녀가고 개운하지가 않았다. 생각해보면 혁준의 말도 타당했다. 여태껏 이렇게 흔들


렸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 심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멍하니 웨딩사진을 올려다보며 와인 잔


을 기울였다. 덩그러니 혼자인 이 느낌이 싫어 처음엔 혁준과 지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련이 떠나고 그도 죽은 것인지 무력감과 함께 공허함만이 남아 온몸과 정신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고 오늘은 웨딩사진과 함께 프랑스에서 보내온 사진


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히고 갑갑해져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세련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너무 보고 싶다."


보고 싶은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인지 와인 잔이 깨지며 파편들이 손에 상처를 냈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세련이 사용했던 소파를 지저분하게


만들 것 같아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손에서 파편을 꺼내는데도 무감각했다. 세련에 대한 그리움의


골이 깊어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세련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늦은 밤을 보냈다.


혁준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관계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배신하겠다는 의사가 분명


한 희준에게 화가 났다. 사무실에 들어와서도 화를 삭이지 못하고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모두 쓸어


버렸다.


"와당탕!"


요란한 소리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놀란 입을 못 다물고 우두커니 서있는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희준의 아내 세련을 연상시켰다. 간간히 모임에 갔을 때 먼발치에서 본 것이 전부였지만


분명 닮아 있었다. 비서에게 가해질 일들을 상상하니 온몸이 저릿함과 함께 흥분되기 시작하며 비틀


어진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먹이를 겨냥한 눈빛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떨고 있는 비서의 손목을 낚아


채며 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누군가 자신이 할 일을 방해하면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았다. 사무실 안


에 긴장감이 번지며 섬뜩하리만치 전율이 흘러내렸다.


"왜...으..."


비서의 비명 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지 못하게 넥타이로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비서가 두려움에


떨면 떨수록 아드레날린이 용솟음 쳤다. 자신이 모든 것을 쓸어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책상에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여자를 내리찍듯이 눌렀다. 여자의 손을 뒤로 비


틀어 전화선으로 묶어버리고 치마를 들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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