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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우연(雨緣)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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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764 회 작성일 24-02-25 06: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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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족발을 먹을 때만은 젓가락도 내팽개치고서, 맨손으로 새우젓과 된장에다 번갈아 찍어 입에 밀어 넣는 예지였다.


탐스러운 입술에다 립스틱 대신 기름기를 덕지덕지 바르고서, 고기의 향이 새는 것마저도 아깝다는 듯이 입을 옹골차게 다물고 한쪽 뺨이 불룩해져 꼭꼭 씹는 모습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침이 고일 정도였다.


평상시의 그 귀엽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가 않을 법한데도, 오히려 화장을 하고 꾸몄을 때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기만 한 신기한 아이였다.


게다가 의식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애살스러운 말투까지 합쳐지면, 과연 예지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싶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예지에게 있어서는 민지가 바로 그런 존재일 것이다.


가끔씩 둘이서 툭탁거릴 때면 굉장히 재미가 있었다.


통통 튀는 민지와 만사태평인 예지, 마치 예쁜 아기호랑이와 귀여운 새끼팬더가 한 우리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걸 보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 냠냠~ 삼초온~ 왜 안 먹어? 삼촌이 빨리 안 먹으면 나도 모르게 다 먹는단 말이야~ 응?”


“ 하하하~ 예지는 족발이 그렇게 맛있어?”


“ 헤헤헤~ 응~ 먹어도, 먹어도 안 질려~”


“ 그래, 그래...난 괜찮으니까 많이 먹어...”


 


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분명히 똑같은데도, 막상 느낌은 완전히 다른 때가 종종 있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아까 들어서는 순간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예지에게서 공허하고 쓸쓸한 냄새가 맡아졌었다.


그래서, 이렇게 야참에다 술까지 해가며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기분이 워낙 강하게 와 닿았던 탓인지, 언제나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저 모습이 왠지 끊어지기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같이 위태롭게만 보였다.


 


‘ ..설마...아까 그게..?’


 


아주머니의 눈에서 눈물 비슷한 게 언뜻 비쳤던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조금 전 옷을 갈아입을 때 무심결에 넘겼던 어깨의 젖은 자국이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그게 예지의 눈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한 건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저렇게 만면에다 미소를 머금고 행복하다는 기분을 맘껏 드러낸 예지를 보면서도, 가슴 한 모퉁이가 늦가을의 차가운 가랑비에 젖어 드는 것처럼 소슬해지고 있는 걸 거다.


그게 아니면 조만간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던, 그 동안 꽁꽁 얼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수아를 만나 녹아버린 여파인지, 자꾸만 감상에 쉽게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 이래선 안되지...맛있게 먹고 있는 예지를 봐서라도...’


 


겉으로야 고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늘 행복하기만 한 것 같지만, 머리가 영리한데다 감성도 굉장히 풍부해서 예술가적인 자질까지 보이는 아이였다.


특히, 나를 워낙 따라서인지 평소에도 내 감정은 아주 민감하게 읽어 내린다.


그런 눈치를 따로 보이진 않았어도, 내가 기분이 가라앉아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애교를 떨어서, 어느새 마음을 가볍게 해주곤 했었으니 아마 틀림이 없을 거다.


오히려 내가 멀쩡한 아이를 자칫 우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크~ 좋다~”


 


쓸데없는 생각들은 빨리 떨쳐버리자는 마음에 잔을 들어서 소주를 홀짝거렸다.


그리고는 일부러 추임새를 넣어보았다.


가슴언저리를 후끈하게 달구는 짜한 느낌이 온몸으로 짜르르 퍼져나간다.


허공을 맴도는 알코올 기운이 피부로까지 흡수가 되는 모양인지 약간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다.


 


“ 우우~ 치~ 건배도 안하고 혼자만 마셔? 나하고 마시자며?”


“ 하하하~ 미안해요~ 숙녀분...자~ 다시 건배~”


“ 헤헤헤~ 건배~”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서 툴툴대는 예지에게 잔을 내밀자 좋아라 하며 방실거린다.


그래, 이것이다.


내가 지금 예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 밖에 없었다.


가족의 정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주었던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저렇게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거다.


조만간 나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 건 뻔하지만, 그때까지라도 저 모습을 지켜줘야 한다.


 


 


“ 색~ 색~”


 


술 때문인지 숨결이 조금은 뜨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고요한 숨소리가 너무나 평화롭게 들려왔다.


말랑말랑한 살결과 따스한 온기, 그리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나른하게 졸음을 몰아온다.


거실바닥에 있던 얇은 이불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썰렁해 보이는 다리를 덮어주었다.


 


“ 으~응~”


 


이불이 다리를 스치는 게 간지러웠던지 움찔하면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덩치만 커다란 어린아이, 딱 그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 꿈 속에서도 족발을 먹고 있는 걸까?’


 


잠결에도 행복한 미소를 살며시 짓는 티없이 맑은 얼굴,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술자리를 정리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직은 잘 생각이 없는지 멀뚱멀뚱한 예지를 혼자 놔두고 방으로 들어오기가 조금 그랬다.


아무래도 처음 들어오면서 느꼈던 그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말동무가 돼주자 싶어, 거실바닥에서 소파에다 등을 기댄 예지의 곁에 나란히 앉자, 냉큼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한 5분이나 지났을까 싶을 때 이렇게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린 예지였다.


 


“ 냠냠~ 쩝~”


“ 훗~ 녀석....”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답답해 보여서 살며시 걷어주자 입맛을 다시며 또 빙그레 웃는다.


정말로 족발 먹는 꿈을 꾸나 보았다.


차라리 처음 봤을 당시처럼 예지가 지금도 초등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랬다면, 이렇게 헤어지지 않아도 될 텐데....’


 


마음이 싸해져 왔다.


예지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부터는 스스로 자제했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마치 아기의 조그마한 발바닥을 만지는 것처럼 너무나 보드랍게 말랑거렸다.


이번엔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동그스름한 이마를 조심스레 쓸어보자, 꿈결에도 내 손길이 좋은지 또다시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나 역시 덩달아 지어지는 미소, 하지만 왠지 가슴 속은 묵직해지기만 한다.


 


‘ 후~ 이러다가 밤을 새겠구나...그만 자야지...’


 


정말로 그걸 걱정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보다 천사같이 잠든 예지를 이렇게 계속 보고 있다가는, 왠지 이 집을 떠날 용기가 점점 사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 때문일 것이다.


 


“ 어디...”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집어 바닥에다 내렸다.


그리고, 예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한 팔로 안아 들고는 그 위에다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목으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턱을 스치는 가는 숨결이 약간 간지러우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 ...삼...초...온.....”


 


팔을 빼내려는 순간 예지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아예 팔뚝을 베고 누워버렸다.


게다가 중얼거리며 날 부르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내려다보자,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얼굴 옆에다 놓고 있었다.


 


“ ...족..발...냠냠...”


 


잠꼬대와 더불어 입맛까지 다시면서 빙그레 웃는 걸 보자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정말로 아까 둘이서 먹고 마시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 하하하~ 이 녀석, 족발이 그렇게도 좋은가?’


 


20살짜리 여자애가 피자도 아니고 족발이라니, 확실히 좀 특이하긴 했다.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자주 사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신경을 쓰겠지만 그래 봐야 몇 번 되지도 않는 기회밖에 없을 것이다.


 


‘ 어? 이 녀석이 언제? 휴~ 어쩔 수 없지...잠깐 이대로 눈을 붙일 밖에...’


 


벌써 새벽 3시가 넘었다.


최대한 자봐야 서너 시간뿐이었다.


몸을 빼내려고 보니 예지가 손으로 내 반팔 소매를 꼭 거머쥐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여름날씨라 춥지도 않기에 그냥 눈을 붙이기로 했다.


중학생 이후로 이렇게 팔베개를 해주는 건 처음이지만, 그전에는 낮잠을 자며 자주 그랬었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에다 얼마 남지 않은 한 지붕 생활이라는 생각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 녀석...자는 모습은 아직도 그대로네?’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까지 덮어주고는 내 쪽을 향한 예지의 얼굴을 보니 앳된 티가 역력했다.


바닥의 딱딱한 촉감이 등으로 서늘하게 올라왔지만 침대보다도 더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돌리느라 다시 흘러내린 예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서 눈을 감았다.


새근거리는 고요한 숨소리와 부드러운 숨결이 자장가처럼 느껴지면서 졸음을 몰고 왔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아마 6시쯤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30분 정도는 더 자도 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5분만 더’라는 마음을 먹었다가 허둥댄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차라리 일어나서 담배라도 한대 피우며 정신을 추스르는 나았다.


 


‘ 어..어..어? 이, 이건 뭐야?’


 


뒤늦게야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을 깨달았다.


양팔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이 무게감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양팔에다 족쇄를 채운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 헉~! 내가...아직도 잠이 덜 깼나?’


 


눈을 떴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다시 몇 번을 깜박거렸다.


역시 꿈은 아니었다.


내 오른팔을 베고 누운 예지야 당연했다,


하지만 왼쪽의 민지는 무슨 황당한 경우인지를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볼이라도 꼬집어 보고 싶지만 이 상태론 그나마도 불가능했다.


 


‘ 하~ 미치겠네? 이 녀석은 또 언제 들어온 거야?’


 


친구 생일잔치에 놀러 가 그 집에서 자고 온다고 예지로부터 들었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불편했던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혼자인 동생 때문에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쫓아왔을 게 분명했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긴 했지만, 이처럼 내 한쪽 팔을 베고 덜렁 잠들어버린 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 질투가 났을까? 아니면 부러웠던 건가?’


 


예지완 달리 이미 여자의 성징이 나타나는 사춘기로 접어든 이후에 만나서인지, 민지는 동생처럼 신체적 접촉을 그다지 즐겨 하진 않았었다.


문득, 우연히 엿들었던 아저씨 내외의 대화가 떠올랐다.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처음부터 민지는 내게 스스럼없이 달라붙는 동생이 부러웠었는지도 모른다.


 


‘ 이렇게 보니까 민지도 정말 예쁘구나...’


 


물론 예쁘장한 외모를 몰랐던 건 아니다.


단지, 가슴 속에 이런 식으로 잔잔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게 찜질을 해주던 날 잠깐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확실히 여자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지같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찰싹 달라붙은 게 아니라, 천정을 보고서 반듯하게 누운 민지의 옆 얼굴이 참으로 단아했다.


하기야 한참 피어나는 나이긴 했다.


한 듯 만 듯한 화장만으로도 투명한 피부가 뽀얗게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촉촉한 붉은 입술이라던가, 매끄럽게 빠진 턱 선, 그리고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귓불에서 돋아난 솜털 같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미인도 속에서 지금 막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 이런 아이가...날 좋아하다니....’


 


우선은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달콤하고 즐겁다.


나 역시 남자인데, 어리고 예쁜 여자가 자신을 사모한다면 자연스레 어깨가 으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건 고마움과 더불어 밀려드는 미안함이었다.


 


‘ 알게 모르게 날 많이 위했는데...’


 


예지가 즐거움으로 내게 위안을 주었다면, 아주머니 대신 이것저것 날 실제 챙긴 건 민지였다.


그런데도 예지에 비해서 많이 소홀했던 것만 같았다.


약간 새침한 성격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예지처럼 편하게 대해줄 수도 있었던 문제다.


다만 귀찮음에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막상 이런 상황에 부닥쳐서 보니, 어쩌면 오히려 그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정이 깊을수록 마음의 상처 또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미안한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근데...어쩌지? 지금 깨워야 하나?’


 


이렇게 내 팔을 베고 누운 게 처음인데도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민지를 깨우기가 난감했다.


그녀에겐 어린 시절의 짝사랑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애틋한 추억이 될 터였다.


이제는 더 자고 싶어서 5분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그래...딱 5분만 그냥 놔두자...미안하구나...민지야...’


 


이렇게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뺨이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민지의 길다란 속눈썹을 쳐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 숨결이 너무 강했는지 하늘하늘한 속눈썹이 살랑거리는 듯했다.


 


“ 으흡~ 민, 민지야?”


 


속눈썹이 흔들린 게 아니라 눈꺼풀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뜬 민지의 고개가 이리로 돌아와 쳐다보자 크게 당황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니 제 발이 저린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민지의 눈동자가 막 깨어났음에도 별빛처럼 초롱초롱해서 더 그랬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 삼촌...출근준비를 해야지?”


“ 으, 응...그래...”


“ 잠깐만....”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침착한 민지였다.


차분하게 일어서더니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 예지야~ 예지야~”


“ 우~웅~ 언..니?”


“ 방에 들어가서 자...삼촌 씻어야 하잖아?”


“ 으, 응...삼촌? 아! 삼초온~ 헤헤헤~ 고마워~~”


“ 어이쿠~ 하하하~ 녀석? 잘 잤어?”


 


민지가 흔들어 깨우자 부스스 눈을 뜨고서도 여전히 내 팔을 벤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와락 껴안는다.


뭉클하고 따스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긴장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이 티없이 맑은 애들은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는데, 나 혼자서 온갖 쇼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겸연쩍으면서도 고마웠다.


 


‘ 사랑해...얘들아...너희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 뭐해? 삼촌을 지각하게 만들래?”


“ 아, 아니야~ 삼촌~ 잘 다녀와. 미안~ 나 너무 졸려서...”


“ 후후후~ 빨리 들어가서 자...우리 예지는 미인이니까 원래 잠이 많은 게 당연한 거야...”


“ 앙~ 역시 삼촌이 최고야~ 10년 알지? 히히히~”


“ 하하하하~”


 


민지의 재촉에 예지가 벌떡 일어서더니 마지막으로 농담을 던져 나를 크게 웃도록 만들었다.


안방으로 사라진 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 내게로 고개를 돌린 민지의 눈이 저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그냥 웃음만 지어주고는 씻기 위해서 욕실로 향했다.


 


 


“ 이거 마시고 나가...”


“ 으, 응? 이건?”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위해 방을 나서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지가 컵을 내밀었다.


뻑뻑한 액체, 그건 저번에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셨던 아침식사 대용 영양식이었다.


냉장고에다 넣어둔 채 처음 며칠만 먹고서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머니께 대한 미안함과 민지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 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진철이 말했던 배우자 감으로는 민지가 어울린다던 게 아마 이런 걸 의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만 보고도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채는지, 하여간에 여자에 있어서는 귀신 같은 녀석이었다.


컵을 받아서 마시자 고소한 맛과 함께 걸죽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 고마워..민지야...저녁에 보자...”


“ 삼촌, 잠깐만...”


“ 응? 왜?”


 


빈 컵을 되돌려주고 돌아서려는데 민지가 불렀다.


 


“ 퇴근하고 바빠?”


 


수아한테야 가게를 닫을 때쯤이나 되야 가니 특별한 일은 없었다.


 


“ 아니, 왜?”


“ 으, 응...바쁘지 않으면 저녁이나 사달라고...오후에 삼촌 회사 근처로 나갈 일이 있거든..”


“ 하하하~ 그래? 그러면 전화를 해...맛있는 걸 사줄게...전에 약속한 것도 있잖아?”


“ 약속? 아~~ 그거...”


 


내 허리를 주물러주었을 때 내가 했던 약속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신세를 지웠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 알았지? 이만 간다...전화해...”


“ 응...삼촌...나중에 봐...”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정말로 간만에 보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시는 느낌이 들만큼 아름다웠다.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저런 얼굴을 자주 봤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던, 떠나는 그날까지 두 아이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돌아섰다.


 


 


점심을 시켜두고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민지였다.


내가 받기 편하게 일부러 이 시간을 택한 것 같았다.


 


“ 여보세요? 민지니?”


“ 응, 삼촌, 점심은?”


“ 으, 응...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야..그래, 몇 시에 볼까?”


“ 몇 시면 돼?”


“ 음~ 6시면 끝나지만 혹시 모르니까 6시 반으로 하자...어때?”


“ 응~ 좋아~”


“ 만나면 바로 식사를 해야 할 테니까, 지금 장소를 잡지 말고 6시쯤에 한번 더 전화를 해...알았지?”


“ 응...점심 잘 먹어~ 좀 있다 봐~ 삼촌~ 헤헤~”


“ 그래..너도...”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예지와 통화를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마지막 말에서는 애교가 넘쳤다.


잠깐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괜히 나중에 민지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저녁을 사달라는 민지의 아주 드문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민지한테 상처를 입힐 게 분명했다.


일단 오늘은 민지의 기대대로 즐겁게 해주는 일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 햐~ 이거 참~ 역시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일이 꼬이네?”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부서회의가 통보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이야 다반사이긴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때가 너무 안 좋았다.


민지의 들떴던 목소리가 떠올라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미안해..민지야...그래서 1시간만 늦춰야 할 것 같은데...”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고는 사과를 했다.


 


“ ...응...알았어..그렇게 해....”


 


처음 통화를 할 때부터 뭔가 예감이 있었던지 민지의 목소리에서 힘이 없었다.


 


“ 미안, 정말 미안해...어디 커피숍에라도 들어가서 기다릴래?”


“ 아니야...안 그래도 나도 조금 늦을 것 같아서 전화를 하려고 했었어...”


“ 그,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할까?”


“ 삼촌이 편한 대로 해...난 괜찮으니까...”


 


여전히 풀이 죽은 민지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무슨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7시 반에는 꼭 맞추어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아예 장소까지 약속을 해버렸다.


 


“ 어딘지 찾아올 수는 있겠어?”


“ 응...삼촌...여기서 멀지 않아..알았어...”


“ 그래...좀 있다 보자...”


“ 응...”


 


그렇게까지 약속을 했는데도 전혀 밝아지지 않는 민지에 내 마음 역시 착잡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민지의 마음을 꼭 풀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회의 도중에 빠져 나오는 최악의 사태는 없었다.


약속시간에 아직 여유는 있었지만, 어쩌면 내가 미안해할까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 한 장우로...두 사람 예약을 했었는데요?”


“ 네, 감사합니다...이리로 오세요...”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서 내실로 향했다.


 


“ 조금 있다 한 사람이 마저 오면 주문을 할게요...”


“ 네~ 알겠습니다...”


 


혹시나 했었지만 민지는 아직 오지를 않았다.


그제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물을 따라서 마시고는 가쁜 숨을 돌이켰다.


육식을 좋아하는 예지와는 반대로 회를 즐기는 민지였다.


그래서, 조금 비싸더라도 깔끔하게 잘하는 일식집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정말로 일이 있는 거라면 괜히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 어, 왔구나...많이 배고프지?”


“ 아니야...괜찮아, 삼촌...”


“ 그래...어디 보자...”


 


약속시간을 5분 정도 남겼을 때 민지가 들어서는 걸 보는 순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집에서 늘 보던 그 어린아이가 맞나 싶게 아주 성숙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찬찬히 훑어보자 화장은 물론 옷과 액세서리까지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였다.


예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미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아니,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아주 매력적인 여자의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그래서, 황급히 메뉴 판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주문을 시작했다.


 


“ 더 시키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민지야...”


“ 그 정도면 충분해...고마워, 삼촌...”


 


살포시 미소를 짓는 민지의 얼굴이 왠지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미안함이 더욱 커지면서도 그런 모습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꽤나 당혹스럽다.


얼른 화제를 바꿨다.


 


“ 참...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온 거야?”


 


사실 이 동네는 주로 직장인들이 드나들지 어린 대학생들이 올 일은 별로 없었다.


 


“ 으, 응...그냥...”


“ 하하~ 친구들과 만났었나 보구나...?”


 


물을 홀짝 마시고는 짧게만 대답해온다.


어떻게 해야 점심시간에 통화했을 때처럼 활짝 웃게 만들지 고민이 됐다.


그때 민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사실은 미팅이 있었어...”


“ 미, 미팅?”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민지의 말에 가슴 한쪽이 뜨끔한 건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그 부위가 화끈거리면서 곧 심장 전체가 싸하게 아파왔다.


 


‘ 내가 왜 이러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너무나 잘 알기에 문제인 것이다.


비록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비와 함께 다가왔다가 빗속에서 내게 절망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던 한 여자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가 내 손에다 쥐어준 종이를 펼쳐봤을 때 바로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


물론, 당시엔 그게 너무나 강해서 숨조차 쉬지 못했었다는 게 다르긴 하다.


결혼 청첩장, 그 새하얀 종이에 예쁘게 적힌 그녀의 이름 위에서 어떤 남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 속으로 휘몰아쳤던 감정 그건 배신감이었다.


그 다음에는 온몸을 불태울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이 뒤따랐다.


그런데, 지금 그게 내 심장을 은은하게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 응...원래 난 그냥 주선만 해주는 거였는데...친구 하나가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 그, 그랬구나....”


 


어쩔 수 없이 대타를 뛰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저 정성 어린 차림새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오로지 날 위한 거라는 의미가 된다.


왠지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 헉~!’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왜 이 말에 안심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저씨 내외께 죄송스러워하고, 민지에게 그렇게나 미안해하면서도 철저히 부정해왔었다.


이게 남자의 본능적인 이기심인지, 아니면 정말로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인지가 혼란스러웠다.


 


“ 삼촌....”


“ 으, 응? 왜?”


 


민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생각에서 빠져 나왔다.


아까부터 날 응시하고 있는 저 눈동자가 내 머리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 아무렇지도 않아?”


 


‘ 쿵~’ 가슴 속에서 바윗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마구 빨라지면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 내가 다른 남자...”


 


‘ 똑~ 똑~’


 


민지가 다음 말을 뱉는 도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손님~ 주문하신 식사가 나왔습니다...”


“ 네...들어오세요...”


 


다행이었다.


정말로 천만다행이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지금 상태론 그 순간 무슨 대답이 나갔을지 내 스스로도 모른다.


종업원이 상을 차리는 동안 머리 속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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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내일은 한번에 완결까지 9편을 다 올릴까 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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