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雨緣) (2)
페이지 정보
본문
내리 다섯 곡을, 그것도, 높고 빠른 노래들만 골라서 부르는 수아를 그냥 바라만 바라보았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캔맥주를 홀짝거리는 중에도 간간히 탬버린을 쳐주는 걸 잊지는 않았다.
냉방기가 제법 강하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장마철의 눅눅한 실내공기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아의 저 오목한 등판으로 흠뻑 젖어서 달라붙은 옷과
이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이 과연 더위 탓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걸까?’
자꾸만 가슴 깊이 맺혔던 설움을 눈물 대신에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득, 어린 시절 1년에 단 한번 정월대보름날이면 어김없이,
동네사람들의 윷놀이 판에서 신이라도 내린 듯,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명을 돋우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냘프면서도 좁다라한 엄마의 등뒤로 올올이 피어나던 선명한 아지랑이,
그때 그것을 볼 때마다 느끼곤 했던 아득한 현기증이 지금 이 순간에 왜 기억이 났을까?
갑자기 가슴이 죄어오면서 숨이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 오빠, 장우 오빠~ 괜찮으세요?”
어깨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래 소리가 끊어진 걸 이제서야 알아챌 정도로 감상에 빠져들다니,
아직도 난 어른이 되려면 까마득하게 먼 모양이었다.
“ 어? 미안...잠깐 졸았나 봐...하..하...”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수아가 보이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땀으로 젖어 찰싹 달라붙은 천이 그 속의 부드러운 굴곡을 완연히 보여주었다거나,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던져주는 처연함 때문이 아니었다.
맑은 눈동자에 서린 저 다정한 눈빛이 문제였다.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저게 내 심장의 한가운데다 벌겋게 화인을 찍고 말았다.
뜨거웠다.
아주, 너무나 뜨거워서 비명을 지를뻔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이런 흔들림을 수아가 눈치를 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 더 부를래?”
“ 치~ 나 혼자만 부르게 하고...”
“ 하하하...내가 워낙 음치라서 말이야...
그래도 수아가 너무 잘 불러서 듣기만 해도 정말로 좋았는데..?”
“ 아이~ 참? 비행기는 그만 태우고 이젠 나가요...”
“ 왜? 더 놀지 않고?”
“ 저도 이젠 목이 아파요...호호호~”
“ 그래...그러면 나중에 또 놀러 오든지...”
이건 정말로 안 좋은 징조였다.
서로 편해진 말투만이 아니라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손까지 거머쥐게 된다.
일어서면서 잡는 자신의 손을 수아 역시 피하지 않고 따스한 미소만 지었다.
이상하게도 눈을 마주치는 것보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게 더 편안했다.
뼈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작은 손이 쏙 들어와서는 꼼지락거리며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이러면 이럴수록 힘들어질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기로 결정한 날이라는 어설픈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말았다.
“ 집이 어디야? 내가 바래다줄게...어서 가자...많이 늦었어...”
아스팔트를 파헤칠 것처럼 거세게 길바닥을 두들기던 빗줄기는,
그런 의도가 실패하자 심술이라도 났는지 거꾸로 튀어 올라오면서 무르팍까지 적셨다.
이 지긋지긋하게 쏟아지는 장마비가 지금은 오히려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그건, 하늘하늘한 여체가 전해주는 온기를 자연스럽게 만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아까 노래방으로 올 때와는 이미 마음가짐을 달리해서인지,
온몸을 감싸듯이 달라붙어오는 부드러움과 뭉클함 그리고 향긋한 체취가,
이제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품 안에서 사라질 것만 같아 되려 두렵기까지 했다.
‘ 그래, 조금만 더...바래다 줄 때까지만이라도...이 정도는 욕심을 내도 되겠지?’
어차피 신기루였다.
깨고 나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달콤하면서도 두근거리는 꿈일 뿐이다.
“ ..저....”
“ 응? 왜?”
노래방 앞의 인도에 선 채로 주춤거리기만 하며 좀처럼 발걸음을 옮기지 않던 수아가 입을 열었다.
“ ..좀 멀어요...”
“ 어딘데 그래? 그러면 같이 택시를 타고 갔다가, 내가 내려주고 차를 되돌려서 오면 되겠네?”
“ 아, 아니에요...그러지 마세요...오빠...”
오한이라도 느끼는지 부르르 떨면서 품으로 더욱더 파고들던 수아가 흠칫하자,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보며 떠올렸던 연약한 새끼고양이가 다시 생각났다.
자신도 모르게 더 바짝 강하게 당겨 안았다.
그리고 그때, 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가락이 슬쩍 미끄러지면서,
무심결에 젖가슴 언저리를 툭 건드리자 두 사람의 몸이 딱 굳고는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수많은 상념과 욕망들이 쏟아지는 유성우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얼마나 멀길래 그래? 말해봐...”
“ ..그게...”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파묻힐 듯이 너무나 부드럽게 말랑거리는 살덩어리에서 천천히 손끝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면서 침묵을 깨자,
둘 사이에서 흐르던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야릇한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 과천이에요...”
“ 하~~~”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을 움츠리는 수아에 또 한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 하하하...괜찮아.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거든? 솔직히 그렇게까지 멀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
“ 미안해요...오빠”
“ 네가 왜 미안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붙든 내 잘못이지...
안되겠다. 이왕 늦은 거 일단은 저기 가서 따뜻한 국물에 오뎅이라도 좀 먹자. 많이 춥지?”
“ 으응~ 약간이요. 헤헤~”
오늘따라 실수만 연발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었다.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꼭 껴안은 채로 온기를 나누고는 있다지만 아랫도리는 물론 허리언저리까지 다 젖은 지금,
윤기가 흐르는 새빨간 빛깔로 자신을 유혹하던 수아의 입술이 연보라 빛으로 질려있었다.
그러고서도 멀쩡한 척 억지로 미소를 짓는 수아의 모습이 또 한번 가슴 속을 가득 메운다.
뜨거운 국물이 담긴 종이컵을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입으로 ‘호~ 호~’ 불어가면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마시는 모습이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 수아야.”
“ 네, 오빠.”
어느 순간인가부터 이름은 빼고 그냥 오빠라고만 부른다.
그게 딱히 언제부터였던가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이름 단 두 글자가 빠졌을 뿐인데도,
우산 아래서 종이 한 장이 들어갈 틈도 없이 찰싹 달라붙었던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수아의 향기가 훨씬 더 생생하게만 느껴진다.
“ 괜히 어색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 오빠.”
“ 으, 응?”
수아가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둘이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가졌던 시간 중에서 처음으로 생긴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건, 그런 뜻밖의 반응보다는 왠지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단호함 때문이었다.
“ 그러지 말아요.”
“ 뭐....를?”
가슴이 뜨끔했다.
‘ 딱히 음흉한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그건 바로 눈 때문이었다.
너무나 크고 맑아서 내 모습이 몽땅 비쳐 보이는 것만 같은,
흑과 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슬픈 기색을 가득 담은 채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겨울의 새벽 별처럼 반짝거리며 생기가 넘쳐났던 게,
지금 저렇게 처연한 눈빛을 띤 건 모두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다.
“ 저를 데려다 준다거나 택시비를 주려는 거....아니에요?”
“ 그, 그게 수아야~”
“ 오빠...”
“ 그, 그래.”
비에 젖은 새끼고양이처럼 잘게 떨면서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애잔함으로 심장을 적셔오던 그 여리고 자그마한 수아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글이글 불타는 노여움이나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난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슬픈 빛을 띠긴 했지만 오히려 따스하고 다정한 마음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두툼한 팔뚝과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자꾸만 움츠러들고 있었다.
“ 그러면, 오빠가 그렇게까지 하면....”
“ 수..아야...”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 그렇게 속삭이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때, 본능 속의 무엇인가가 자신의 귓가에다 그래선 안 된다고 소곤거렸다.
“ 전...슬플 거에요, 아니, 비..참해서..울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 알았어, 수아야. 알았으니까 어서 먹어. 어때? 이제는 좀 덜 추워?”
“ ....네, 오빠...고마워...요...흑~”
“ 수아야....”
자신의 본능이 알려준 조언대로 했건만 결국엔 울리고 말았다.
이제는 식어버려 김도 나지 않는 수아의 두 손에 잡힌 종이컵으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가게 앞의 차양 막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굵은 빗소리보다도,
저 작은 종이컵 속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찰랑거림이 더 크게 귓전을 때려왔다.
가슴이 저민다.
수아의 숨죽인 흐느낌이 스며들어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 아줌마, 이것 2인분만 싸주세요. 뜨뜻한 국물도 좀 넉넉하게 주시고요.”
“ 오..빠..”
“ 일단 나가자, 수아야. 식은 건 그만 내려놓고...”
“ 네? 네...”
수아가 자신의 눈물과 섞인 멀건 국물을 담은 종이컵이 부끄러운지,
슬며시 휴지통에다 버리고 돌아서서 눈가를 찍어내는 걸 가만히 보다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흠칫했던 수아가 몸에 힘을 빼고서 살며시 기대어온다.
가느다란 뼈가 만져지는 가녀린 여체가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순간,
저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는 잊었던, 아니, 잊었다고만 생각했던,
오래된 시계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걸 희미하게 느꼈다.
“ 정말 꼭 그렇게 하고 싶어?”
“ ..미안해요, 오빠...”
“ 휴~ 아니야. 일단 같이 들어가보자.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되겠어.
그리고 이것도 먹어서 해치워야지? 안 그래? 후후~”
“ 아! 맞아...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시커먼 공간이 확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수아가 불을 켜자 그제서야 실내에서 온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개업하기 며칠 전부터 새벽에는 가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야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쩌면, 그 동안 수아는 어둡고 썰렁한 실내에 홀로 앉아서,
문틈으로 보이는 내 방 창문의 빨간 담뱃불에서 따스함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는 내 그림자를 지켜보면서 지독한 고독을 달랬을 것이다.
‘ 그랬으니 내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겠지...’
컴컴한 공간에 혼자만이 있다는 게 느껴질 때의 그 절절한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신이었다.
혼자라는 것, 외롭다는 느낌, 그건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두렵다.
“ 오빠, 어서 먹어요.”
“ 그래, 너도.”
“ 네.”
주방으로 가서 덥혀온 어묵을 테이블에다 내려놓고서 맞은 편에 앉은 수아의 얼굴은,
아까의 그 진득하던 슬픔이 마치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해맑게 빛나고 있었다.
어묵 하나를 작은 입으로 상큼 베어 문 다음에,
이제는 제 빛을 완전히 되찾은 새빨간 입술을 앙다물고서,
예쁘게 오물오물 씹는 모습에서 행복한 감정까지 전해져 왔다.
콧등에다 작은 주름을 잡은 채 한 손에는 어묵꼬치를 든,
그런 수아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운 장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저 모습이 왜 갑자기 내 눈자위를 뻑뻑하게 만드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몸이 힘든데도 수아가 아침에 버스가 다닐 때까지 기다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꼭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마음가짐 때문이란 걸 물론 잘 알고는 있었다.
어쩌면, 수아의 통장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찍혀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머리에서 겉돌기만 할 뿐, 지금 내 가슴 속은 저 밖의 장대비처럼 장마가 지고 있었다.
“ 수아야.”
“ 네, 오빠.”
다 먹고 나자 찻잔을 사이에다 두고서 다시 마주앉았다.
“ 이러지 말고 내 방으로 가자.”
“ 네?”
수아의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그 순간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눈앞이 아찔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런 말을 던져놓고서 주춤거리다가는 자칫 아주 큰 오해가 생길지도 몰랐다.
“ 차라리 네가 내 방에서 자. 난 여기서 잠깐 눈을 붙일 테니까.”
“ 오, 오빠?”
“ 몇 시간만 지나면 움직일 수가 있잖아? 나야 오늘 쉬는 날이니까 낮에 자면 되고.”
커다래진 눈을 단 한번도 깜빡이지를 않고서 쳐다보기만 한다.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마치, 망친 중간고사 성적표를 부모님 앞에다 슬쩍 밀어놓고는 무릎을 꿇고 앉은 것만 같았다.
문득 안경알에 수아의 눈이 가려져있는 게 아니라,
저 둥글고 큼지막한 눈동자 속에 안경이 숨어있는 것만 같다는,
그런 우스운 생각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입 안이 바짝바짝 타며 목구멍이 깔깔했다.
다시 한번 침을 삼켜보려 해도 이제는 그마저도 말라버렸는지 입 천정에 혀가 달라붙는 느낌만 들었다.
“ 휴~~~ 오빠..”
“ 그, 그래. 꿀꺽~”
수아가 긴 한숨과 함께 크게 떠졌던 눈을 안경 안쪽으로 다시 집어넣자마자,
신기하게도 어디서 샘솟았는지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면서 맥이 탁 풀렸다.
“ 오빤...정말로 좋은 사람 같아요...”
“ 하...하...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왠지 온몸으로 뭔가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스멀거림과 함께 쑥스러운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 그리고, 굉장히 나쁜 사람이에요..”
“ 수, 수아야?”
많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서 새콤달콤하게 피어 오르던 환희가,
한 순간에 싸늘하게 식으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숨기려고 했건만 자꾸만 수아에게 끌리는 자신의 속마음을 결국엔 들켜버린 모양이다.
“ 흑~ 왜 자꾸 나를 울려요? 흑~ 흑~”
“ 수...아야?”
“ 흑흑흑~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는 거에요? 흑흑~ 고마워서..너무 고마워서...흑~”
“ 수아야....휴~ 그래,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자리를 옆으로 옮겨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수아의 어깨를 안아주자,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다 놓더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오면서 흐느꼈다.
똑같은 눈물인데도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다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오는 물기가 너무나 푸근하고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심지어,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고 있는 밖의 빗소리마저 지금은 자장가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 훌쩍~ 훌쩍~”
“ 그래, 이제는 다 운 거야? 후후후~”
울음소리가 잦아들면서 등을 안았던 손으로 느껴지던 파도도 잔잔해져 갔다.
수아는 부끄러웠던지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론 나 역시 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영원히 계속 됐으면 하고 바랬다.
“ 보지 말아요...흉하니까...”
“ 수아...야...”
“ 훌쩍~ 네?”
품에서 살며시 몸을 빼내는 수아의 부드러운 살결과 따스한 체온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코끝을 언뜻 맴도는 한여름의 풀 내음과 비슷한 향기가 싱그럽기만 하다.
그때 가늘면서도 활처럼 휜 새하얀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 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과 함께 멍하니 바라보며 이름만 불렀다.
안경을 벗어버린 덕분에 드디어 직접 마주치게 된 그 눈동자가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물기가 서려 불빛이 반사되면서 약간 푸르스름한 느낌마저 주는 투명한 그것은,
지금까지 유리알 너머로 보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사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바닷가를 마침내 도착했을 때,
맑고 투명한 물빛에 넋이 빠져서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어버리는 심정이 이런 것이리라.
언제 잡았던지 수아의 팔에 놓인 손이 떨리면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다.
“ 오..빠..?”
“ ..미안해, 미안....”
홀린 것처럼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미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두려운 듯 한계까지 커진 수아의 깊은 눈빛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살짝 벌어진 촉촉한 입술의 붉은 빛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을 아른거리게 만들었다.
새근거리면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숨결에서는 사과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맑은 호수가로,
길게 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 오..빠..흐읍~~”
자신을 부르며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저 붉은 꽃잎에다 입술을 갖다 댔다.
젤리같이 말랑거리면서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그 순간 수아의 눈이 사르르 감기면서 기다란 아래위의 속눈썹이 만나고는 나란히 정열을 했다.
홍시의 속살처럼 너무나 연약하면서도 달싹한 살결을 입술로 비비다가 혀끝을 내밀어 살짝 핥아보았다.
그러자, 수아의 몸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더니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목을 감아오면서 입술이 열렸다.
“ 흐응~ 응~”
혓바닥을 스치는 매끄럽고 단단한 이빨을 지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안으로 진입하자,
수아의 비음과 함께 말캉거리는 보드라운 살덩이가 수줍게 맞아주었다.
부끄럼쟁이 새색시이런가, 아니면 장난꾸러기 요정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던 수아의 혀가 태도를 돌변해 자꾸만 도망을 다녔다.
잡힐 듯 말 듯 피해 다니다가 내가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멈추면,
금새 돌아서서 장난스럽게 그 혀끝으로 톡톡 건드려오며 도발을 한다.
그나마 수아의 혀 밑에서 솟아난 달콤한 타액이 타는 듯한 갈증을 달래주었다.
그때였다.
꽃밭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춤을 추던 수아의 혀가 마침내 붙잡히자,
갑자기 와락 덤벼들어서는 똬리를 틀더니 칭칭 감으며 조여왔다.
그 혀를 단단히 붙들고는 내 입 속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수아가 목을 더욱 강하게 안으면서 몸을 바짝 붙였다.
연약한 입술피부가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세차게 비비고 빠는 동안,
미지근한 타액이 벌컥대고 쉴새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두 손으로 목을 감아온 수아의 허리에 놓인 손바닥 아래서,
사각거리는 얇은 치마 안에 숨은 보드라운 살결들이 따스하게 물결쳤다.
혀를 더욱 강하게 빨아들이면서 그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보자,
마치 물을 잔뜩 먹은 한여름 능수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하게 휜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봉긋한 젖가슴이,
가슴팍에 달라붙어 눌리면서 그 뭉클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아찔하게 전해준다.
“ 하아~ 하아~”
“ 후~ 수아야...”
입술에다 번들번들하게 타액을 묻힌 채로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수아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지금 이 순간에 너무나 아름답게 빛났다.
워낙 크고 맑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빛나는 영향도 크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활짝 핀 꽃처럼 생기가 넘치는 표정이 눈을 부시게 했다.
또다시 포옹과 함께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나지막하게 수아를 불렀다.
그러자, 언뜻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조용히 바라본다.
“ ...너 혹시 다른 사람..”
“ 오빠...”
“ 으, 응?”
어쩌면 사귀는 남자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먼 곳에서 출퇴근을 하는데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자신과 둘이 있는 동안에도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걸 못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가까이에 없다면 나와 사귀지 않겠냐고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수아가 갑자기 먼저 말꼬리를 잘랐다.
“ 가요...오빠 방으로..”
“ 어~? 그럴래? 그러자, 많이 피곤하지?”
혀끝까지 나왔던 말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은데도 저런다는 건 둘 중에 하나의 의미였다.
내 추측이 틀렸던지, 아니면, 완곡한 거절의 뜻이다.
조금 전까지 수아의 반응으로 봐서는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만약에 거절이라면 부담이 된다든지, 남자로서의 끌림이 아닌 그냥 인간적인 호감일 것이다.
‘ 그렇다면 방금 전 키스는 단지 고마움의 표시였을까?’
어쨌던 수아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자칫 이대로 영영 다가설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자신 속에 있던 녹슨 시계바늘이 이미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동안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꺼낼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시계였다.
“ 미안해...이렇게 몰래 숨듯이 들어오게 해서...”
“ 호호~ 아니에요. 주인집 딸들한테 들키면 곤란하다면서요?”
“ 으, 응...삼촌 조카처럼 지내. 내가 이 집에 워낙 오래 있었거든..”
왠지 변명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다.
주인집의 두 딸과는 8살과 10살 터울에다 내가 공부까지 가르쳤었다.
이제는 둘 다 어엿한 여대생이었지만 여전히 날 삼촌이라 부르면서 무척이나 따른다.
주인 아저씨 내외도 그런 자신을 워낙 믿었던지,
일 때문에 수원에서 따로 살면서 과년한 두 딸만 여기다 덜렁 두고도,
가끔 주말에나 한번씩 올라올 뿐 전혀 걱정을 안 했다.
아니, 은근히 농담처럼 아저씨가 자신에게 사위 운운을 하는 것하며,
큰 녀석이 한번씩 오빠라 부르는 걸 눈을 부라리면 삐죽거리는 게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워낙 꼬맹이 때부터 봐서인지 전혀 여자로 보이지를 않아 별로 신경을 쓰진 않았다.
하기야, 그 두 녀석도 종종 자다 깨서는 덥다며 거실에서 속옷바람으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출근을 위해 씻으러 방을 나서다가 기겁을 하게 만드는 정도였으니 피차일반이었다.
어쨌던 오늘도 혹시나 거실에서 잠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먼저 올라와 확인을 하고서도 그래도 모른다 싶어,
수아와 둘이 뒤꿈치를 들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방으로 왔었던 것이다.
“ 일단 씻고 자...내가 아침에 이 녀석들이 깨기 전에 다시 올게...그때 나가면 될 거야...
내 방을 함부로 들어오지는 않는 애들이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잠그고 자면 돼...”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빨아둔 반바지와 면 티를 내주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수아가 팔을 잡았다.
“ 오빠..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에 있어요...”
“ 수, 수아야...?”
어쩌면 이 말을 무척이나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기색을 숨기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려졌다.
“ 오빠는 제가 가게서 그냥 자겠다고 하면 끝까지 같이 있어주려고 할 거죠?”
“ 그, 그거야...그렇지만...”
“ 오빠가 여기에 있지 않을 거면 저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둘 다 가게에 있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여기? 후후후~”
수아가 장난스럽게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을 맺었다.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덩달아 미소가 지어진다.
“ 하~ 그래..알았으니까 먼저 씻고 와...”
“ 네, 오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는 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이 모든 게 시작된 지난 밤에도 이렇게 앉아있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그런데, 문득 어색한 촉감에 밑을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 밤 그때와는 달리 바지앞자락을 밀어낸 잔뜩 부푼 성기가 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