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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회전그네 <2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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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444 회 작성일 24-02-25 03: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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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부-끝을 알수 없는 운명.



널부러진 술병들. 기주는 다시한번 비어있는 잔에 술을 채웠다.그는 꽤나 취해있는듯, 언제나 맵시있던 정장의 깃도 꽤나 헝클어져 있었다.

“형님 너무 많이 드시면...”

철구는 조심스레 기주에게 말했지만,그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는 또다시 양주병을 비웠다.

널찍한 룸안에는,오직 기주와 철구 두사람만 있을 뿐이었다.기주의 부하들 역시 무사히 성공한 쿠테타의 댓가로써 어디선가 거나하게 취해있을터였다.

“그만 일어나시죠.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됐어.오늘은 그냥 마시자.”

늘 날카로웠던 기주의 눈빛이,오늘은 왠일인지 너무나 처량해 보였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잘 알것 같은 철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기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기주는 화가났다. 어찌보면,그가 참아도 될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그것을 모른척하기에는 기주가 본 고아들의 어두운단면이 너무나도 많았다.손목을 긋고 싶었던 적역시 수십번 있었다.자신을 버린 부모를 저주했고,시간이 지나고는 세상을 저주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보니,자신은 저주할 부모조차 존재하지 않는 시험관 아기였다.그것도 개인의 보잘것없는 목적하나때문에 만들어진.

‘생각해보자.준이는 이 프로젝트의 희생양인가 아니면 축복인가?’

기주는 그렇게 되뇌여보았다.어찌보면 준후에게는 축복에 겨운 프로젝트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기주는 고개를 저었다.좀처럼 남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준후.축복이라고 하기엔,어린 준후가 지은 마음의 짐의 무게는 너무나 무겁다.

“곧 세상이 떠들썩해 질 겁니다 형님.”

“그렇겠지.대기업의 총수가 살해당한채 발견될 테니까.”

“형님.한동안 피해계십시오. 혹여나 일이 틀어지면 제가 빵에 들어가겠습니다.호텔에서도 저희 기록이 있을테니..수사는 반드시 들어올테니까요.”

“철구야.”

“네.”

기주는 천천히 자신을 따라와준 사내를 바라보았다.기주가 아주 어렸을적에 이 세계에 발을 들였을때부터 같이했던 동료이자 부하를.

“올해 나이가 몇이지?”

“스물 아홉입니다.”

“나같이 어린놈을 형으로 모시는것이 억울하지 않냐?”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이 바닥에 나이가 어딨습니까.게다가...형님의 나이가 공식적이지는 않잖습니까.”

기주는 피식하고 웃었다.하기사,출생 성분없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자가 몇이나 될까?게다가 그 프로젝트는 몇년여에 걸쳐 지속되었으니,자신이 언제 탄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를것이다. 프로젝트가 해산되고 나서,연구자료역시 한줌재로 불태워졌을테니까.

“아냐.내가 들어간다.내가 간동안 밑에 애들은 너에게 맡길거니까.”

“형님..그건..”

“철구야. 강회장도 강회장이지만, 이 바닥에서 황제라고 불렸던 사람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나를 가만히 내버려둘까?아마 지금보다 열배는 더 큰 파장이 있을거다.조용히 들어가서 피신하고 있는게 나아.”

“사람이 죽었습니다.무기징역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넌?그래서 니가 무기징역을 다 살겠다는 거냐?그럼 니 마누라랑 자식은 어쩌고?”

철구는 기주의 물음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딱히 반박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기주는 담배불을 비벼껐다.

“살아있는 동안..가장이라는 책임은 다해라.너만 바라보고 사는 니 애들 아빠없는 자식 만들지 말라고.”

기주의 말에 철구는 할말을 잃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기주의 머릿속으로,마지막 까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던 강회장의 얼굴이 눈에 스쳤다.

‘우스운 일이다.내가 생각했던 응징은 다른 고아를 낳게 했으니까.’

기주는 화가 났다.반 인륜적인 행동을 취했던 강회장을 자신이 죽였지만,결론적으로는 강회장의 자식들은 고아가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돌고 돌아서 어차피 자신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세상의 이치.어린 기주는 그것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잘들어라 철구야.난 몸을 사리지 않을거야.”

“자수하신단 말씀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완벽한 자수는 아니겠지만.”

철구는 그 말이 무슨뜻이냐고 끝까지 캐묻지 않았다.극도로 말을 아끼는 자신의 상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쪼르르르.

기주는 천천히 술잔에 술을 부었다.철저하게 혼자만 남아있던 세상에서 자신의 옆에 있었던 단 한사람. 자살을 하려 할때마다 자신을 붙잡아주었던 단 한명의 친구.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기주는 천천히 쇼파에 몸을 묻었다.

‘그래..이제는 내가 준후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때일지도.’






폭풍전야.

아니,어쩌면 폭풍이 휩쓸고 갔다는 표현이 더욱더 정확할지 모른다.준후에게 있어서 요 며칠 집안의 분위기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나...임신했어.-

은하가 남긴 마지막 말 한마디는,준후의 입을 굳게 다물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떻게 임신이 되었을까?하는 의문따윈 이미 저만치로 사라져버렸다.은하와 준후의 관계는,은수가 알기 전까지만 따져도 손가락으로 꼽을수 없을만큼 잦았다.임신이란 개념을 준후가 신경쓸리가 없었을 뿐더러,은하역시 간간히 있었던 질내사정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거의 초토화상태로 바뀌었다.은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은채역시 준후와의 관계를 모두에게 알릴수 없었기에 행동이 어색해졌다.게다가,며칠째 행방불명이 된 미진과, 평소와는 다르게 일체 연락이 없는 강회장까지도...

처음엔 그저 바쁜가 보다 하고 넘겼던 넷이지만,드디어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강회장의 회사 본사에서 그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거북한 집의 분위기가 싫었던 준후는 밖에 있는 놀이터의 그네에 털썩 주저 앉았다.마음 한구석에서는 은채가 곧 나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는 계속해서 대문쪽을 흘끔흘끔 뒤를 돌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준후는 속이 복잡해져 왔다.이제 은채와의 가슴떨리는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을줄 알았던 그는 적잖이 실망해버렸다.은하의 임신을 귀찮은 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본이 아니게 그녀에게 미안해 해야할 일이 점점 늘어나는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내 행동은...정말 많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런것은 그 누구도 가르쳐 준적이 없기에,준후는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늘 혼자 스스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했던 그로써는,이제서야 은수와 은하를 대할때의 자신의 감정이 사뭇 잘못 되었던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은수..은하..’

준후는 마음속으로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였다.

은수.

언제나 밝고 명랑하고...깜찍한 집안의 막내였고,예전부터 준후를 잘따랐던 귀염둥이였다.귀엽고 깜찍한 외모.마치 자신이 준후의 아내라도 되는양 늘 준후에게 신경을 썼던 아이였다.

이번엔 은하의 모습이 떠올랐다.늘 도도하고,어떤때는 표독스럽기까지했던 장녀이자,잘나가는 디자이너.그런 그녀가 어느새부터 준후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는 아이가 되었고,몇번이고 준후앞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눈물을 보이는 아이가 되었다.

‘걔들은 나한테 뭘까?’

분명 준후는 은채를 사랑했다. 하지만 은수와 은하에게 조금의 감정도 없다고 자신할수 없었다.’동정표’따위가 아닌,은채와 약간 다르게 사랑하는것 뿐일지도 몰랐다.

준후는 인정해야 했다.사랑의 정도와,사랑하는 마음의 방식은 많이 다를지라도,자신은 은수와 은하역시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그래서 은채를 사랑하면서 그녀들에게 미안함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준후는 그제서야 최근들어 자신이 겪었던 많은 여자들을 한번씩 돌아볼수 밖에 없었다. 기주의 직원이었던 정아를 시작으로,미진과 은영,그리고 강회장의 세 자매들.

‘사랑’이라는 것을 못받고 자라났기에,그는 애정결핍을 다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었다.너무나,너무나 어렸기에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복잡해..정말 복잡하다.’

가슴이 미어지게 답답해져 왔다.준후는 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은영의 번호를 찾았다.그녀라면,그녀라면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는 가식따윈 벗고 편하게 이야기 할수 있을것만 같았다.하지만 준후는 곧 고개를 저었다.너무 늦은시간.그녀를 불러내서 좋을것은 없을것만 같았다.


-그럼..그 아이는 어떻게 할건데?-

-어떻게 하다니?당연히 낳을거야.그럼 니가 날 바라봐 줄지도 모르니까-


준후는 은하와 나눴던 그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머릿속을 무언가가 옥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그냥..그냥 세명을 다 내가 품고 갈순 없을까?’

준후는 마음속에 들어오는 뻔뻔한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이상했다.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나니, 지금 강회장이 행방불명이 된것이 왜 속이 편해지는 걸까? 자신도 어쩔수 없이 나쁜놈인 모양이라며,준후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운명이라는 것은,사소한 하나의 요소에 의해 많이 뒤바뀌는 것임을,준후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은채,은수,은하중 누구를 선택해도, 결론적으로는 세 자매를 모두 선택하고 책임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또각..또각..

문득 생각에 잠겨있던 준후의 귓가에,불규칙적인 구두소리가 들려왔다.가로등 불빛을 그대로 시야에 받고 있는 준후의 눈가엔 들어오지 않았지만,그것은 분명 비틀거리는 듯한 소리였다.잠시 눈을 찡그리고 그쪽을 보았던 준후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금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디야아..어디있어!”

비틀거리는 걸음의 주인공은,무언가가 불만인지 의미를 알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었다.너무나 고운 여자의 음성이었지만,준후는 그저 밤늦게 귀가하는 취객이거니 하는 마음에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고,그녀는 준후가 앉아있는 놀이터를 지나 계속해서 언덕을 올랐다.

“강준후 이 나쁜새끼..어디 사냐고오!”

준후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자신이 앉아있는 곳을 지나쳐 가는 한 여인.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그녀는 꽤 키가 큰 여자였다. 티셔츠에 청바지만을 입고 있었지만,몸매가 잘빠진 탓에 그것은 너무나 맵시있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하지만 술이 좀 취한듯,그녀는 높은 구두를 신은채로 연신 비틀거린다.

‘최민지?’

놀이터 밖으로 나와,어느덧 그녀의 뒤에 서게된 준후는 그녀의 뒷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상하게도 앞모습보다는 뒷태가 더 익숙한 그녀.그녀는 뒤에 준후가 있는것도 모른채로,계속해서 준후의 집을 찾는듯 두리번 거린다.

“야아!강준후!나와아아!”

준후는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보컬을 해서 그런지 성량이 남다른 민지의 목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 울렸기 때문이었다.저 상황이라면 집안에 있는 세자매가 듣지 못할리 없었다.

“너 뭐하는 거냐?”

한번 더 소리를 지르려고 했었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던 민지가 고개를 뒤로 훽 하고 돌렸다.그녀의 크고 까만 눈망울에 편한복장의 준후가 투영되었다.

“어라라?너 어디서 튀어나왔냐?끅!”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준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민지를 노려보았다.몸에 딱붙는 복장.노출이 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야해보일 지경이었다.이제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짙은 스모키화장. 은하의 첫인상처럼 섹시한 인상의 하얀 얼굴.그리고 머리를 잘랐는지 길이가 살짝 짧아진 그녀의 머리결.

“너..잘사나보다?이런데 살고..”

“말 돌리지 마.지금 너 뭐하는 거냐?”

“동방에 니 주소 있길래 찾아왔다!왜!어쩔래!”

“왜 찾아왔는데?”

준후의 물음에 민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민지는 터벅터벅..그러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준후에게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의 근처까지 올때까지,준후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쁜놈...”

“뭐?”

민지는 알수 없는 외마디 말을 남기더니,이윽고 핸드백으로 준후의 어깨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준후는 어리둥절 하면서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나쁜놈!이 나쁜놈아아아!으아아앙!”

준후는 그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얘는 또 왜이래..’

준후는 코를 찔러오는 술냄새에,그녀가 인사불성이 될때까지 마셨음을 유추할수 있었다.그녀는 길쭉한 다리를 쭉 뻗고 주저 앉은채로,연신 준후를 향해 흐느꼈다.

‘술만 마시면 왜이러는건지..집안에서 보기전에 다른곳으로 데려가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준후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민지는 여전히 울먹거리며 준후의 팔을 뿌리쳤다.

“놔!이 나쁜놈아!”

“도대체 내가 왜 나쁜놈이라는 거야?”

“나쁜놈...맨날 나한테만 까칠하게 대하고..나쁜놈..”

“추태부리지 말고 일어나!”

준후는 강압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일어나서도 민지는 몇번이고 준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때려대었다.

“니가 뭔데 날 이렇게 자존심 상하게 만들어?니가 뭔데 이 나쁜 자식아!”

“두서없이 말하지마.뭐가 자존심 상했다는 거야.”

“왜..그여자앞에서 처럼 나한테는 잘해주지 않는거야?왜!”

준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의도를 도무지 알수 없는 민지의 외침이지만,그녀가 우는 모습이 낮이 익었기 때문이었다.사랑을 갈구하며 눈물을 보였던 은하의 모습.민지가 우는 모습은 은하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보였다.

준후는 한참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화장이 번지기 시작했지만,아랑곳않고 계속해서 흐느끼는 민지의 모습. 여장부라 불리는 동방에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준후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저쪽에 보이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다가,다시금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휴...따라와.여기서 이러지 말고.”





은채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너무나 이상해진 집안 분위기.거기에 준후는 언제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아빠는..그리고 미진이 언니는?’

은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행방이 묘연해진 두사람.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언제나 처럼...그냥 전화기를 꺼두신걸까?’

사실 강회장이 며칠이고 연락이 없는것은 이 집안에서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늘상 바쁜 경영자인 강회장은 집에 오는 빈도가 한달에 두세번일 뿐이었고,안주인 역할은 모두 은채가 도맡아 했으니까. 하지만 회사에서까지 강회장의 행방을 모르는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불안해...너무 불안해.’

은채는 자신의 고운 손을 무릎에 둔 채로,걱정되는 표정으로 전화기의 다이얼을 눌렀지만,강회장의 전화기는 꺼져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은채양.절대 회장님이 행방이 묘연하다는거..주변에 알리면 안되요.아직 확실치 않은데 긁어 부스럼 만들어 좋을거 없어요.-

강회장의 비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은채는 안심하려 애썼다.강회장 정도라면 단순한 기업가의 레벨이 아니었으므로,그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는것은 당장 회사에도 타격을 입을 요소가 되었다.

‘밝게..긍정적으로 생각하자.준후가 내게 했던 말처럼.’

은채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언제나..자신을 지켜주겠다던 자신의 연인의 약속을 굳게 믿으면서.

“강은수.”

생각에 잠겨있던 은채의 귓가로,은수를 부르는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지나자,은수의 방이 열리며 약간 상기된 표정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고,은채는 다시 2층에 서있는 은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니랑 잠깐 나가자.”

“왜?”

“할말이 있어.”

“나가기 싫어.”

그녀의 대답에 은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평소처럼 그녀는 은수에게 화를내지 않았다.은수역시 은하의 말에 그렇게 부정한 적이 없었기에,은채는 살짝 놀라 평소와는 너무 다른 둘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면 되니까...잠깐나와.은채 너는 집에 있고.”

은채는 언니인 은하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의 동생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하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며 한참이나 은채의 시선을 바라보았고, 은수는 그런 은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울의 밤은 어둡고, 또 밝았다.

어두운 밤속에서 환한 네온사인.그리고 그 속에서 술기운에 흔들리는 도시.환락과 퇴폐,풍요와 빈곤이 공존하는 이 도시는 그렇게 비틀거린다.

준후는 자신의 품에서 눈을 감은채 비틀거리는 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민지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졸지에 소주를 몇잔 마시게 된 그. 처음엔 안그래도 취해있는 민지가 걸려 퉁명스럽게 거절했지만,왠지 술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나왔을때에,민지는 준후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했다.

“나후회안해..그러니까..”

준후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무엇을 원하는지 알수 있었다.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런 표정. 늘상 은하에게서 보아왔던 표정.

민지는 준후와 술을 마시면서도,울다가 웃다를 반복했다.천성적인 주사는 어디가지 않는지,그때 동아리 단합대회보다 더욱더 심한것만 같았다.

준후는 민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부축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었지만,그녀의 허리는 은하처럼 잘록했다.군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키도 컸지만 몸매도 시원시원했다.

“사랑하는 여자야?그여자.”

공연장에 왔었던 은채를 가리키는 듯한 민지의 물음에,평소라면 대답을 안해줬을 준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어쩌면 준후는 간절하게 자신의 답답함을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 모른다.단지 공교롭게도 그 대상이 민지일뿐.

“나쁜놈..나도 너 좋아한단 말이야..나쁜놈..”

민지는 오늘만해도 몇번이고 준후에게 그 말을 했지만,준후는 그 답지 않게 그녀의 말을 모두 받아주었다.

“니가 그렇게 잘났어?왜그렇게 도도하게 굴어..나쁜새끼.”

“미안하다.”

준후는 중얼거리듯 그렇게 내뱉어 버렸다.민지는 고개를 들어 준후의 표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다시금 본래 가려던 목적지로 준후를 이끌었다.

“막나가는걸로 보여.하지마.”

“후회안한다고 했잖아.나 비참하게 만들지 마.”

반짝반짝 빛나는 모텔의 간판.민지는 많이 취했보였지만,준후는 그녀의 눈망울에서 진심을 읽어낼수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난 오히려 널 같이 자는 여자로 인식해버리고 말거야.”

“차라리 그게 나아..퉁명스러운 것보다..그게 낫단 말이야.”

준후는 그녀의 말에 아무말없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따랐다.

어찌보면 연민도,동정도 아니었다.그냥 넘쳐나는 성욕?그건 더더욱 아닐지도 몰랐다.

준후는 더이상 합리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답답한 것이 있다면,이렇게라도 날리고 싶었다.취중고백을 한...민지의 마음을 이용하는 한이 있더라도.오늘만큼은,그녀가 성은영대신의 역할을 하는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3층 302호실입니다.편히 쉬세요.”

민지는 아까모습과는 다르게,키를 받아든 준후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비틀거리면서도,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많이 취한듯 보였지만, 하고싶은 말을 준후에게 모두 한 뒤라서 일까? 둘 사이에는 어색함대신 정적이 자리했다.

“먼저 씻을게.”

준후는 그녀가 침대에 주저 앉는 것을 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옷을 벗고,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린다. 먼저 씻는다면,민지가 술김에 잠이 들게 될지도 모르니까.그러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묘하게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가 잠들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뜨거운 물을 한참이나 맞고 있자,욕실은 금새 뿌연 수증기로 가득해졌다.머릿속에 복잡하게 들어오는 고민들.차라리..차라리 이대로 강회장이 영원히 행방불명 되었으면 좋겠다고...그것이 안된다면...오늘 민지와 밤을 보냄으로써 잠시나마 복잡함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고...준후는 그 답지 않게 그런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끼이익.

몸을 닦고있던 준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분명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였다.그리고 뿌연 수증기 속에서,살색의 실루엣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같이..씻자.”

아까와는 달리,취한 목소리도 아니었다.오히려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준후의 침묵을 yes로 받아들인 것일까.민지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준후에게 접근했다.

천천히 수증기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알몸을,준후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물에 번진 화장은 어느틈에 깨끗이 지워져,하얀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역시나 큰 키. 전체적인 몸은 은하와 닮은듯했지만,그녀보다는 훨씬 볼륨이 있어 보였다.새하얀 살결이 군살하나 없이 쭉 뻗어 있는 듯한 모습. 동아리내에서도 은밀하게 회자되는 민지의 몸매를,준후는 똑똑히 바라볼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말없이 준후의 앞에와서 섰다.자연스레 뜨거운 물은 민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손을 뻗어 준후의 가슴을 어루만졌다.취기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진실성에 준후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어색하게 대치해있던 둘의 균형은, 준후가 민지의 허리를 감싸안음으로써 깨어져 버렸다.

민지의 몸이 더욱더 준후의 곁으로 바싹 밀착했다.준후의 손이 부드럽게,그녀의 라인을 타고 내려갔다.도드라지게 움푹 파인 허리라인에서 부터 볼록한 엉덩이.그의 손길을 느끼며,민지는 더더욱 준후의 쪽으로 몸을 붙였다.그녀의 풍만한 가슴감촉이 조금의 여과도 없이 준후의 가슴에 밀착되며 일그러졌다.

“흑...”

준후는 마치 그녀의 몸을 검사라도 하는듯이 샅샅히 훑어가기 시작했다.마치 탐색전을 하듯 제한된 움직임만 보이던 준후의 손길이,이제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그의 두손이 민지의 가슴을 모아쥐듯 움켜쥐었고,민지는 뜨거운물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하아..”

그의 손길을 느끼며,민지의 손은 준후의 중심으로 향했다.이미 그녀의 몸을 보고 빳빳하게 반응해버린 그의 기둥을 살며시 움켜쥐었다.그리고 마치 약속한것처럼,준후의 입술이 민지의 입술을 덮어갔다.

어찌보면,그것은 우발적 상황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어색한 전개일수도 있었다.술에취한 민지가 이전에도 준후의 앞에서도 벗었던 적은 있지만,둘이 지금 같은 모텔에 들어올정도의 사건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사실을 무시라도 하듯,서로가 지금 원하는 주파수대를 조절하며 맞춰가고 있었다.

“하아..침대로..”

준후가 그녀의 꽃잎사이를 손으로 움켜쥐었을때,잔뜩 흥분한 민지가 몸도 가누지 못하며 준후에게 매달렸다.준후는 대답대신 샤워기를 껐고,둘을 때리듯 쏟아지던 물줄기가 멎었다.

모텔의 내부는 제법 로맨틱했다.넓직한 침대에 은은한 붉은 조명만이 침대 머리곁을 비추었다.가지런히 정리된 이불이,곧 두사람에 의해 헝클어졌다.

“흑..”

젖은 몸을 닦고오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액체가 준후의 손가락을 적셨다.민지는 정말 능숙한 여자처럼,준후의 불기둥을 움켜쥔채로 그의 몸위로 올라탔다.술기운 탓일까.그녀는 부끄러움따윈 없었다.마치 오랫동안 서로 섹스를 나눴던 사이처럼 매우 자연스럽게,그녀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준후의 얼굴쪽으로 살며시 들이밀었다.

쪽..쪽..

준후는 잘익은 석류마냥 살짝 벌어져있는 민지의 꽃잎을 집어 삼키듯 입술로 비벼대었다.우아한 곡선을 가진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는가 싶더니,이내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준후의 달아오른 기둥을 감싸듯 집어삼켰다.

“하아..하아..”

“흑..흠..”

서로의 것을 입에 가득 물고 있는탓에,둘의 입가에서는 쾌감섞인 탄성대신에,거친 호흡만이 자리했다. 보기만해도 절로 호기가 동할것만 같은 민지의 몸.옷 안에 감춰져있던 그녀의 알몸은 생각이상으로 야했다.마치 복숭아 같은 엉덩이 밑으로 천천히 젖어들고 있는 그녀의 음핵. 동아리내의 모든 남자들이 상상만 해봤을 뿐이었던 그녀의 몸을, 준후는 마음껏 만지고,혀로 유린했다.

“하앙..”

서로의 애무가 끝날시점,그녀는 능숙하게 준후의 몸위로 미끄러졌고,잔뜩 발기한 그의 중심부는 스르르 빨려들어가듯 그녀의 몸안으로 안착했다.따뜻한 점막이 귀두를 감싸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준후의 불기둥은 그녀의 몸안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뒤였다.

“아..”

준후는 손을 뻗어 갈팡질팡 흔들리는 민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앉아있지만 군살하나 찾을수 없는 민지의 허리.은하 이상으로 철저한 몸매관리를 한것만 같았다.경험이 없어 수동적인 은채나 은수와는 달리,민지는 요염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준후의 위에서 방아를 찧었다.

찰싹..찰싹..

오늘이 처음.그것도 예상치 못한 하룻밤이었지만,준후는 마치 그녀와 오랜시간 즐겼던 것처럼 궁합이 잘맞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가 경험이 많은 여자일수도 있겠지만,그런것과는 조금 달랐다.굳이 이런말 저런말 하지 않아도,너무나 쿵짝이 잘맞는 그런 느낌이었다.

“흑..흐응...준후야..”

민지는 준후의 이름을 부르며 허리를 움직였다.그녀의 몸에서 더욱 더 많은 애액이 나오며 준후의 몸을 적신다.준후는 문득 은하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평소보다 약간 부드러웠을뿐인데도,너무나 행복했다는 그녀의 바보같은 말이.

“민지야..니꺼..너무 좋다.”

준후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민지의 움직임은 더더욱 격렬해졌다.여장부인 민지역시 사랑받고 싶어하는 한명의 여자일 뿐일거라는 생각에서,준후는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칭찬해 주었다.지금 이순간만큼은, 까칠한 강준후를 조금이라도 벗기 위해서.

한참이나 요분질하던 민지의 몸이 내려왔고,둘만의 눈빛교환으로 인해 자연스레 체위는 변화했다.민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준후의 앞에 웅크리며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그녀가 배를 침대에 붙인채로 살짝 엉덩이를 올리자,마치 잘익은 과일과도 같은 그녀의 하얀 신체가 준후의 눈을 간지럽혔다.

“흑...”

자신의 손에 의해 일그러지는 그녀의 뽀얀 엉덩이.그리고 아까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촉촉한 그녀의 속살에 닿는 순간 준후는 이성의 끈을 놓으며 욕망에 몸을 실었다. 급작스럽게 이뤄진 만남과 스킨쉽.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둘의 서로를 탐닉하는 소리는 모텔의 작은 객실을 가득 매웠다.

“흑..아아..앙..”

준후는 알고 있었다.비록 처음왔을땐 많이 취해 있었던 그녀지만,술기운따윈 어느정도 날아갔으리라는 것을.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중요한것은 민지도 준후도,각자 다른 의미로 서로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흑!”

은하와 은영의 몸의 장점만을 섞은듯한 민지의 몸.그녀의 몸은 유연하게 활처럼 휘었고,준후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런 실수는 두번다시 할수 없어.’

저만치 멀어져 있던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고,그는 얼른 그녀의 몸에서 잔뜩 발기된 기둥을 끄집어 내었다.그와 동시에 엉덩이를 올리고 있던 민지는 허물어지듯 침대위로 쓰러졌고,그런 그녀의 몸위로 하얀 무언가가 궤적을 그리며 뿌려진다.

“하아..하아..”

민지가 준후의 몸을 끌어당겼고,준후는 거부하지 않았다.유독 말이 없어진 둘. 준후는 그녀의 키스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은하나,은수에게서 찾아볼수 있었던 열정과 비슷한 것을.





까앙!

젊은이들중에, 이렇게 늦은 밤거리를 혼자 걸으며 깡통을 발로 힘껏 차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보통 생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준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불만이라기 보다 답답함이 더 컸으리라.

‘강회장이 은하의 임신을 안다면.’

한마디로 준후는 모든것을 잃는 것이었다.은채역시 충격을 받을 것이고,강회장 역시 준후를 계속 아들로 두려 하지 않을지 모른다.

준후는 잘 알고 있었다.자신과 강회장의 관계는 부자지간이 아닌 일련의 계약 관계였다.강회장은 준후에게 부와 가정을 제공했고,반대로 준후는 강회장에게 가업을 이을 아들을 제공하는 관계였던 것이다.하지만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있어 계약 파기에 이를 수 있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곧 계약이 성립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술기운에 잠들어버린 민지를 보고 나오면서,준후는 많은 결심을 해야만 했다.이것은 어느 여자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지금 계약 파기에 이를 행동을 해버린 준후로써는,단 한개의 선택권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든...세 명 모두를..’

준후는 은채를 놓치기 싫었다.그렇다고 은수와 은하를 나몰라라 할수도 없었다.그것이 곧 은채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될테니까.

그는 많은 고민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모든걸 잃게 된다면, 차라리 모두를 취할 방법을 찾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문제를 푸는것이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라?’

집으로 향하던 준후는 발길을 멈췄다. 저멀리 누군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리고..그 낯익은 실루엣들은 준후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두명의 여자라는 것을 잘 알게 해주는 그들.가로등빛에 의지했을 뿐이지만,그들의 실루엣은 남자들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 아이들이 어째서 같이..’

늦은밤. 민지와 뜻하지 않은 만남을 하고 돌아오던 준후의 눈망울에, 종래와는 달리 나란히 사이좋게 걸어 들어가는 은수와 은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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