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그네 <2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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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 시작과 갈등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소리.
준후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는 것이 얼마나 오랜간만의 일인지 실감할수 있었다.작은 동산 속에 있던,자신이 자랐던 그 고아원에서는 늘 그렇게 산새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다.그는 살짝 눈을 비비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기..’
그대로였다.어제 은채와 왔던 그 자그마한 통나무 집.한차례 비가 내리더니,아침은 더더욱 싱그럽고 맑았다.창밖으로 보이는 통나무 집의 처마에서 부터 물이 쪼르르 떨어지며 너무나 고요한 아침의 정취에 더욱더 한몫하고 있었다.
‘앉아서 계속 잔건가?’
준후는 문득 자신의 어깨에 무언인가가 올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마치 솜처럼 부드러운 머리결이 자신의 목과 볼을 간지럽힌다.준후는 살짝 어깨를 내려 은채가 더 편하게 기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는 장작이 모두 타버려 재만 남아있는 벽난로의 앞.준후는 손은 그런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꼭 끌어안은 그대로의 상태였다.
준후는 숨마져 참은채로 자신의 옆에 있는 은채를 바라보았다.마치 베이비 파우더처럼 너무나 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긴 속눈썹은 언제나 준후를 설레게 했던 고운 두 눈망울을 살포시 덮은채로 그녀가 호흡할때마다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그리 높지도,낮지도 않은 콧날을 타고 내려오면,핑크빛 그녀의 입술이 곱게 앙다물어져 있었다.
준후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이렇게 바라보는게 좋았기 때문이었다.앉아서 선잠이 든 탓에 허리고 엉덩이고 안쑤신곳이 없었지만,준후는 잘 훈련받은 첩보원처럼 절대 미동도 하지 않고 시선으로만 그녀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오른손에 잡히는 가녀린 은채의 어깨.준후는 실감할수 있었다.어제 은채와의 대화는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늘 가깝고도 멀리 있던 은채의 모습.산위에 떠있는 구름처럼,그녀는 보이지만 만질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이제는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당당하게 세상의 시선과 맞설 약속을 한 그녀.준후는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다짐했다.그녀를 위해서라면,그 어떤 손가락질과 비난으로 부터 그녀의 앞에서 막아줄수 있다고.
“...일어났어?...”
준후는 아차싶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준후가 움직여서 그녀가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은채가 앉아서 깊은 잠에 빠질만큼 허술한 여자가 아닌 탓이다.
“더 자.괜찮아.”
“으응.싫어.일어날래.”
은채는 살짝 눈을 비비더니,자신이 준후의 품에 쏙 안겨있는것을 인지하고는 부끄럽게 웃었다.늘 감정표현에 인색한 준후마져도 그때만큼은 그저 은채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은채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그의 품에 반쯤 안겨있던 상태그대로 몸을 움츠렸다.아침공기가 추운지 살짝 무릎을 감싸쥐는 그녀.새벽이슬을 맞은 작은 새처럼,그녀는 너무나 가냘퍼 보인다.
“괜찮을까?우리..”
“아직 자신이 없어?”
준후의 되물음에 은채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준후는 알수 있었다.그녀는 무서워하고 있었다.꿀이 발라진 칼.처음엔 달콤할지 모르나 분명 심장을 후벼파는 그 어떤 일들이 그들의 앞날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은채는 너무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내가..욕먹으면 되잖아.”
“그런게 아니야.”
“그럼 그런말 하지마.그럴필요 없잖아.”
은채는 준후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준후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입술이 아닌 이마에 해주는 그의 입맞춤을 음미라도 하듯,은채는 살짝 눈을 감기도 했다.
“아빠 회사는?가봐야 하잖아.”
“나중에 갈래.기회야 많은데 뭘.”
“그치만 아빠가 나랑 같이 보낸건 그거 때문이잖아.안그랬으면 나 혼자 다녀와도 되는 건데.”
“바보야.계속 그렇게 사람말 일일이 다 따르면서 빡빡하게 살거야?”
“그치만 그게 편하잖아.어기면 무섭기도 하고..”
“그럼,세상살면서 가장 크게 일탈한게 언젠데?”
“일탈?”
준후의 말에 은채는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질문을 한 준후도 별달리 기대를 하지 않은 부분이었다.은채와 일탈?아마 세상에서 가장 안어울리는 조합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친구들하고 당일치기 놀러간적 있어.”
“그게 다야?1박2일도 아니고?”
“친구들이랑 외박한적은 한번도 없는데?”
“푸하..답답하네.”
“재미없지?나..”
준후는 귀엽게 웃는 은채의 머리결을 쓰다듬어 주었다.그는 무언가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이내 은채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남자친구가 생겼을때 가장 해보고 싶었던게 뭐야?”
“해보고 싶은거?음..글쎄..”
“생각해봐.어서.”
은채는 준후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이내 입을 열었다.
“공연하는거 보고싶었어.”
“공연?”
“응.음악공연..콘서트 같은거.”
“와..진짜 시시하다.”
“뭔가 대단한게 있을줄 알았어?”
준후는 그녀를 안고있던 팔을 내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은채는 갑자기 준후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며 일어나자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그래 갑자기?”
“빨리 씻어.”
“응?”
“빨리 씻으라고.출발해야 하니까.”
“집으로?”
은채의 물음에 준후는 씩 하고 웃었다.좀처럼 그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은채는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서 웃었다.
“오늘하루...나랑 일탈하자.소원들어줄게.”
‘치!그 인간 뭐야..’
민지는 투덜 거리면서도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화장은 꼭했고,옷도 신경써서 입고온 그녀였다.
‘그거 데이트 신청인가?’
민지는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그렇게 관심없는 척 하더니..역시나 준후는 자신에게 관심이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민지는 왠지 승리자가 된 기분에 고운 입술사이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근데 데이트 신청해놓고 늦는 매너는 뭐람.’
민지는 다시금 맘에 안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다.여태까지 남자를 기다리게 한적은 많아도 기다려본적은 단 한번도 없는 그녀였다.휴일에 다짜고자 나오라고 하더니만,그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여어 최민지.”
“흥!왜 이제 와...어라?”
당연히 준후일줄만 알았던 민지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그곳에는 준후가 아닌 동아리의 선배,동기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왠일이에요?”
“뭐?왠일이라니?너 준후가 불러서 나오지 않았어?”
“에?”
기타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그의 말에 민지는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그제서야 민지는 자신의 앞에 있는 동아리의 맴버들을 바라보았다.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기파트를 맡은 이들뿐이다.
“어쨌든 빨리 들어가자.준후녀석 오기전에.”
“오기 전에라뇨?그리고 어딜 들어가요?”
“너..준후한테 아무말도 못들었어?저기 가는거잖아 저기.”
민지는 반사적으로 선배가 가리킨 곳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문이 닫혀있는 자그마한 소극장.그녀는 겨우겨우 표정관리를 하며 다시 되물었다.
“준후가...우리를 다 집합시킨 거에요?”
“푸하하.후배가 선배를 집합시키겠냐.준후가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연습한 곡들 맞춰 보자고 하더라.게다가 그녀석 저런곳도 섭외해 놨던데?”
“연..습요?”
민지는 맥이 탁 풀리는게 느껴졌다.괜시리 우쭐하던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얼굴도 붉어진다.
“그..그런건 동방에서 해도 되잖아요!”
“아따..왜 화를 내고 그래?준후가 오늘 음악쪽에 영향력있는 사람을 데려온다고 했다니까.”
“영..향력있는 사람?”
“그래.너도 준후 실력 봐서 알잖아?그정도 재능있는 아이가 음악계에 아는사람 하나 없겠냐?야..혹시 알아?우리도 잘 보여서 데뷔할지 모르는거 아냐.”
물론 그 영향력있는 사람이란 은채였고,맴버들이 준후의 ‘뻥’을 눈치 챘을리가 없었다.또한 준후가 대학에 오기전 연습하던 연습실 맴버들중 한명이 하는 소극장이라서 바로 빌릴수 있는 것이었지만,그들은 그저 준후의 영향력이 대단해서 바로 소극장을 섭외한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야야.어서 들어가자.”
“자..잠깐..”
민지는 선배들에게 거의 끌려가다 싶이 소극장으로 들어갔다.그닥 넓지는 않지만 갖춰질것은 그럭저럭 다 갖춰진 작은 공간.학교내에서의 공연이 전부였던 그들은 신이나서는 악기 셋팅을 시작했다.
“야 최민지!뭐해!어서 와서 마이크 음량 맞춰봐.”
“알았다구요!”
민지는 괜시리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빽 하고 질러버렸다.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게 느껴졌다.그냥 이유없이,준후가 미워졌다.
“야..쟤 오늘따라 왜저러냐?”
“냅둬..그날인가 보지 뭐..큭큭!”
옆에서 수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민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는 연신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여..여기가 어디야?”
“쉿!그냥 들어와보면 안다니까.”
한참이나 악기조율과 음향셋팅에 여념이 없을때,한쪽에서 남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맴버들 전원은 급속도로 긴장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출입구쪽을 일제히 바라보았다.오직 한명 민지의 표정만이 공격적이었을뿐,
“강준후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조명이 비추는 무대의 반대편에는 준후와 어떤여자가 같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준후는 연신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말만 했으며,옆에 있는 여자는 아직도 무슨일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헉..”
준후의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맴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입을 쩍하고 벌렸다.많이 꾸미지도 않았고,화장기도 별로 없는 얼굴이지만 너무나 청초한 미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입가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미소는 약 1분간 남성들의 혼을 잠시 빼놓기에 충분했다.
‘뭐..뭐야.애인인가?’
그 와중에 당황한 것은 민지였다.준후의 모습만 보였을때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던 그녀지만,그의 옆에 있는 은채의 얼굴을 보자 크게 당황해 버린 것이었다.
‘이쁘잖아..’
민지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왠지 기분이 묘해지며,준후와 은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볼뿐이었다.
“정말 말 안해줄꺼야?”
“소원 이뤄준다고 했잖아.잠시만 기다려봐.”
“뭐?”
“여기서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 된다니까.”
준후는 연신 궁금해 하는 은채의 어깨를 지긋이 눌러 억지로 객석에 앉히고는,아직도 은채의 등장에 넋이 나가있는 맴버들이 있는 무대위로 올라갔다.
“빨리 시작하죠.”
“야..시작은 시작인데..이거 어케 된 상황이냐?저 여자분이 정말로 그렇게 영향력있는 분이야?”
준후는 얼빠진 선배의 말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은채가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당연하죠.한경건설 사장님 딸이라니까요.”
“뭐어?”
“쉿.들리겠어요.암튼 그만큼 재력있는 분이니까 최선을 다해야 한다구요.”
“와..세상에 생긴것도 완전 천산데..짱이다.”
민지는 준후와 눈이 마주치자 괜시리 고개를 훽하고 돌려버린다.준후는 얼른 피아노로 가서 앉았다.맴버들은 긴장을 했는지 분주히 마지막 셋팅을 하기 시작했다.준후는 객석에 앉아 있는 은채를 보며 살짝 웃어주었고,그녀역시 환한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야..최민지..준비 됐으니까 멘트해..”
멘트는 어디까지나 마이크를 쥔 보컬의 몫이다.그녀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옆에서 속삭이는 선배의 말에 마지못해 마이크를 살짝 감싸쥐었다.
“첫곡은...꿈꾸는 아이입니다.1학년 강준후 군이 쓴 곡입니다.”
은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준후를 바라보았고,곧이어 잔잔한 선율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민지는 마이크에 천천히 입을 갖다대었다.왠진 모르지만,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을수 없다는 가사의 ‘꿈꾸는 아이’가,오늘따라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어 버리는 듯한 기분은 왜인지,정작 그녀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긴장탓에 약간은 들쑥날쑥했던 연주도,곧이어 안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자그마한 소극장을 민지의 음색이 가득 채웠다.
-너는 꿈처럼...잡을수 없는 향기처럼...-
가사를 들으며 미소를 짓던 은채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준후가 썼다고 했던 이 곡. 자신의 이름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노랫말에 나오는 것은 자신과 준후의 이야기가 틀림없었다.해질녘의 놀이터와,그네. 그리고 은채가 좋아하는 향수의 향기까지도 은연중에 가사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준후에게로 머물렀다.음악은 잘 모르는 은채지만, 준후가 그 음악을 만들때 어떤 심정이었는가를, 은채는 느낄수 있었다.
‘걱정마.니가 쓴 노래가사처럼.난 사라지지 않을게.’
은채는 이 순간만큼은,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네온사인이 밝히는 밤거리.고급스런 룸살롱의 입구에서,검은 정장을 입은 거대한 체구의 사내와,약간 외소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큰형님 뵈러 왔냐?”
“아..뭐..제가 뵈러 왔겠습니까.저희 기주형님께서 오신거죠.”
“크크.하기야 그렇지.니들이 큰형님 뵐 짬이 되는것도 아니고.”
짧은 머리의 사내는 낄낄거리며 웃으면서,자신의 앞에 있는 외소한 사내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근데 니네 형님이 왠일로 큰형님을 뵈러 온거냐?요새 잘나가서 코빼기도 안보여주던 분이?”
다분이 기주를 밑으로 내려보는 듯한 말투.기주의 부하인 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저 살짝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그래도 보스를 모시는 자가 자신보다 위일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기주형님도 자주 오고 싶어 하시는데...일이 좀 바빠서 그런거 같습니다.”
그의 말에 보스의 부하인 덩치는 금새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긴 니미 개뿔이 바뻐.막말로 니들이야 말로 꿀빠는 것들이지. 노른자 상권에 들어앉아가지고 취미로 도박장 관리나 하고...안그냐?엉?”
“말씀이 좀 심하신거 같습니다 형님.”
그의 말에 덩치가 큰 사내의 미간이 꿈틀했다.순식간에 그의 주먹이 앞에 있는 기주의 부하의 면상으로 직격했다.
“어쭈루?막어?한 철구 이 새끼가 돌았나..”
“기주형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죠.저를 욕하는것은 괜찮습니다만,제가 모시는 분을 욕하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자신의 주먹을 막은채로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사내를 보며,그는 어이가 없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곤란?곤란하면 십새야..어떻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한참전에 기주가 들어간 룸싸롱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팔을 막아낸 기주의 부하는 품안에서 날카로운 칼을 빼들었다.
“끄억!”
“바로 이렇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몸안을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허물어졌다.안에서의 소란이 일종의 신호였는듯,차안에 타고 있던 몇몇의 인원들이 신속하게 내렸다. 눈 앞의 사내를 찌른,철구라 불린 기주의 부하는,냉정한 얼굴로 뒤에 도열한 사내들에게 말했다.
“안에서 신호가 왔다.이 새끼 치워버리고,이 근처 출입 완전히 차단해.”
“너 이 개새끼...키워준 주인을 무는거냐?”
보스는 눈앞에 있는 기주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다.하지만 정작 기주는 냉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의 좌우에는 족히 열댓명은 되보이는 사내들이 축 늘어져 뻗어 있었다.모두 기주와 같은 중간보스들이었지만,어느새 갑자기 나타난 기주가 그들을 싸그리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야..너 이새끼..”
보스는 그제서야 기주의 눈빛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가 다분히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중간보스들과 함께 거나하게 술을 마시던 중,갑자기 기주패거리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결과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대로였다.방심하고 있던 이들은 몸도 제대로 갸누지 못하고는 기주의 부하들이 찌른 칼에 픽픽 쓰러져 버렸다.그제서야 보스는 알수 있었다.기주가 나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진행한 것이다라는 것을.술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은 당황하긴 커녕 약속이나 한듯 일사 분란하게 밖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술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지,계속해서 다리가 비틀거린다.
“한가지만 묻겠다.”
기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보스는 앞에 있는 양주병을 움켜쥐고는,룸의 구석에 등을 대고 가만히 기주를 노려보았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놈들은 너 말고 더 있나?”
“무슨 개소리냐?”
“내가...태어난 그 프로젝트 말이다.”
보스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것일까..하는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다만,자신이 그 프로젝트에 관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알고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었다.
“너 이새끼..그걸 어떻게...”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한경건설 강주현 회장.그리고 너.이렇게 둘뿐인가?”
“크크크.그게 알고 싶은거냐?”
“빨리 말해라.”
“이런짓하고도 네놈이 무사할거 같아?”
“무사하지 않더라도,니 목은 따고 볼거니까 걱정말고.묻는말에나 대답해.”
밖에서는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보스는 직감적으로,자신의 부하들이 당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더 있다면..어쩔거냐?”
“대답은 뻔하지.”
“이해가 안되는 녀석이군.넌 그 프로젝트 때문에 세상의 빛을 봤다.그런데 그걸 왜 원수로 생각하는 거지?너에겐 은인일 텐데?”
기주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양주병을 움켜쥔채 자신을 겨눠보는 그를 보며,기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의 빛?내가 본건 세상의 어둠뿐이다.개같이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다. 은인?개소리 지껄이지 마라.생명으로 장난치는 너같은 새끼들..쓰레기보다 가치없는 것들이니까.”
“박기주 이 개자식이!”
순간,보스는 눈앞이 번쩍 하는것이 느껴졌다.순식간에 기주가 테이블을 발판삼아 자신의 몸쪽으로 날아든 것이었다.최후의 호신수단으로 들었던 그의 양주병은 바닥으로 땡그랑 하고 떨어졌다.그에게 몸을 날린 기주는 그의 복부에 긴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어..어..으..으윽..”
그는 몸을 파르르 떨며 허물어지듯 주저 앉았다.날카로운 금속은 그의 몸속으로 점점 파고들었고,기주의 하얀 와이셔츠는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형님.빨리 마무리하지 않으면...다른쪽에서 냄새맡고 올지도 모릅니다.”
기주는 뒤에 서있는 부하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불신어린 눈으로 천천히 굳어져 가는 자신의 보스를 보며,그는 살짝 몸을 돌렸다.
“흔적들은 싸그리 지워.”
“알겠습니다.”
기주는 천천히,엉망진창이 된 살롱의 복도를 걸어나갔다.약속이나 한듯 그 많던 웨이터와 종업원들은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거사를 위해 그가 철저히 준비를 해둔 이들로 오늘 하루만 영업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차에타서 시트에 깊숙히 기대는 기주를 보며,운전석에 있는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기주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그에게 중얼거렸다.
“한경건설..강회장의 집으로.”
마지막 곡이 끝나고,공연장은 은채 혼자서 치는 박수로 가득 메워졌다.연주를 한 이들은 준후와 은채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보았고,민지는 노래가 끝나고도 뚱한 표정 그대로였다.
“오늘은 이걸로 됐어요.아무 추후에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야..진짜냐?”
준후의 말에 선배들은 악기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는 준후에게 속삭였다.
“그럼요.갑자기 불러내서 죄송하긴 한데..일단 나중에 연락이 오면 말씀드릴게요.”
“그..그래 알았어.”
“저 먼저 가겠습니다.”
준후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만 객석에 있는 은채에게 달려갔다.민지는 천천히 그런 준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저 멀리 객석에서 은채는 연주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해야한다고 하고 있었고,준후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한사코 그녀를 잡아끌고 있었다.
‘설마...’
민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는 은채를 끌고가다 시피 해서 나가는 준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자신에게는 늘 뚱한 표정만을 짓는 그가,은채의 앞에서는 밝게 웃고 있었다.게다가 은채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모습.그녀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맴버들이 신나서 수근거리는 와중에서도,그녀는 괜시리 투정어린 표정을 지으며,그가 나갈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왜..왜자꾸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거지.’
“맘에 들었어?”
“응..고마워 정말로.생애 최고의 날이었어.”
“겨우 이딴걸로?”
준후는 싱긋 웃는 은채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따뜻해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어느새 달빛이 비추는 밤이 되어 있었고,준후는 힘을 주어 하얀 은채의 손을 잡아주었다.아직은 당당하게 손을 잡는 것이 어색해서 일까,은채는 그때마다 살짝살짝 놀라고 있었다.
“아냐.이딴거라니.정말 최고였어.그리고..니가 음악에 재능이 있는줄은 몰랐어.”
“재능..글쎄.”
준후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어?”
“말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왠지 말을 못했어.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다 들었는걸 뭐.아까 그 꿈꾸는 아이라는 곡에 다 나와 있던걸.”
준후는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은채가 공연을 원해서 자작곡을 들려주긴 했지만,그 곡에는 은채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노골적으로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채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준후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음악이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제는 나한테 다 말해 줄거지?”
은채의 말에 준후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와 동시에 천천히,은채가 잡고 있던 준후의 손을 놓기 시작했다.
“집에 다왔잖아.”
준후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늘 꼼꼼한 자신답지 않은 실수였다.그녀와 걷는것이 꿈만 같아서,집앞을 비추는 가로등에 올때까지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이제는 ‘조심스럽게 시작한 연인’에서 ‘누나와 동생’사이로 잠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좋다.우리는 헤어지면서 아쉬워할 필요가 없잖아.”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의 말.준후는 그녀를 가슴가득 끌어안고 싶은것을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는 은채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활발하고 명랑했다.기다렸다는 듯이 은수의 방문이 열리더니,점점 야해지는 복장을 한 그녀가 쪼르르 뛰어나온다.
“언니!”
“응..밥은 먹었어?”
늘 다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주는 은채를 보며 싱긋 웃던 은수는 이윽고 뒤따라 들어온 준후를 빤히 바라보았다.왠지 모르게 그녀의 시선이 거슬린 그는 말없이 2층으로 스윽 올라가 버렸다.
‘정리를 해야할까..아니면..’
준후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용기를 내어 은채를 붙잡고 나니,은수가 걸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은수에게 쉽게 은채와의 일을 꺼낼수 없었다. 은수는 은채와의 관계를 깰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비밀’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또다른 비밀을 낳았고,그 시점에 은채라는 신기루를 잡아버린 까닭이다.
‘복잡하다..생각하기도 싫어.’
이미 자신은 너무 많이 선을 넘어버렸다.그리고 다시는 그 선너머의 반대편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사실을 준후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쉴새없는 마음속의 저울질은 은채에게로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었다.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상황에서도,은채라는 존재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그 무언가였다.
“들어왔어?”
문득 옷을 갈아입으려고 티셔츠를 벗었을때.문을 살짝 두드리고 들어온것은 다름아닌 은하였다.항상 먼저 자신의 방에 찾아온적이 없는 그녀였기에,준후는 살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앉아도 되니?”
“좋을데로.”
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고,은하는 살짝 그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늘상 집에서 있을때처럼,고급스런 원피스 차림의 그녀.머리를 간결하게 묶어 올려 더욱 더 섹시한 목선이 준후의 시선을 간지럽혔지만,오늘은 평소처럼 그녀를 향한 욕정이 솟구치지 않았다.
“은채랑...잘다녀왔어?”
“그냥..뭐 그렇지.”
준후는 티셔츠를 벗은채로 서서,은하를 내려다 보았다.언제부터인가,자신이 은하를 내려보는 이 광경이 익숙해져 버린것은 왜일까.몇분간의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어색함을 참다못한 준후가 욕실로 향하려 할때,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봤어.너랑 은채가 손잡고 오는..거.”
준후는 그대로 멈춰서서,살짝 뒤를 돌아 은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애꿎은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됐네.이야기 하기 민망했는데 봐버렸다면야.너..어차피 은수와의 일도 알고 있잖아.”
은하는 아무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준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은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해해.남자가..어떻게 한여자한테 만족하겠어.”
“뭐어?”
은하의 성격과 가치관을 염두에 두고도,그녀가 뱉은 말은 준후에게 있어서도 전혀 의외의 계산밖 상황이었다.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준후에게 은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상관없어.니가 말하지 말라면,아무한테도 말안하고 비밀지킬게.”
“너..어쩌다 그렇게 변했어?”
“왜?나는 변하면 안돼?변해서..내가 싫어?”
무언가의 간절함이 담긴 듯한 은하의 표정.준후는 가슴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져 왔다.상황은 준후가 예상한것 보다 훨씬 복잡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냥...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세번째라도 좋으니까...그냥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조금씩 떨리는 은하의 어깨.준후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서서,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형님.어떻게 할까요?”
운전석의 사내가 조심스레 기주에게 물었다.준후의 집이 보이는 작은 골목.그리고 거기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 안에서 기주는 벌써 세가피째의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까 그여자는 분명..’
기주는 그녀가 준후의 둘째누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준후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그리고 기주는 보았다.준후가 잠시나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내리지 못했다.
“강회장차가 없는 것으로 봐선...오늘은 없는듯 하군.”
기주는 괜시리 합리화를 시켜버렸다.그의 말에 운전석에 있던 사내가 천천히 차의 시동을 걸었다.
‘나중에...나중에 해도..괜찮겠지.’
기주는 살짝 눈을 감았다.사늘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그의 시선이 준후가 있는 거대한 주택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은...그냥 돌아가도록 하자.”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소리.
준후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는 것이 얼마나 오랜간만의 일인지 실감할수 있었다.작은 동산 속에 있던,자신이 자랐던 그 고아원에서는 늘 그렇게 산새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다.그는 살짝 눈을 비비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기..’
그대로였다.어제 은채와 왔던 그 자그마한 통나무 집.한차례 비가 내리더니,아침은 더더욱 싱그럽고 맑았다.창밖으로 보이는 통나무 집의 처마에서 부터 물이 쪼르르 떨어지며 너무나 고요한 아침의 정취에 더욱더 한몫하고 있었다.
‘앉아서 계속 잔건가?’
준후는 문득 자신의 어깨에 무언인가가 올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마치 솜처럼 부드러운 머리결이 자신의 목과 볼을 간지럽힌다.준후는 살짝 어깨를 내려 은채가 더 편하게 기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는 장작이 모두 타버려 재만 남아있는 벽난로의 앞.준후는 손은 그런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꼭 끌어안은 그대로의 상태였다.
준후는 숨마져 참은채로 자신의 옆에 있는 은채를 바라보았다.마치 베이비 파우더처럼 너무나 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긴 속눈썹은 언제나 준후를 설레게 했던 고운 두 눈망울을 살포시 덮은채로 그녀가 호흡할때마다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그리 높지도,낮지도 않은 콧날을 타고 내려오면,핑크빛 그녀의 입술이 곱게 앙다물어져 있었다.
준후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이렇게 바라보는게 좋았기 때문이었다.앉아서 선잠이 든 탓에 허리고 엉덩이고 안쑤신곳이 없었지만,준후는 잘 훈련받은 첩보원처럼 절대 미동도 하지 않고 시선으로만 그녀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오른손에 잡히는 가녀린 은채의 어깨.준후는 실감할수 있었다.어제 은채와의 대화는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늘 가깝고도 멀리 있던 은채의 모습.산위에 떠있는 구름처럼,그녀는 보이지만 만질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이제는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당당하게 세상의 시선과 맞설 약속을 한 그녀.준후는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다짐했다.그녀를 위해서라면,그 어떤 손가락질과 비난으로 부터 그녀의 앞에서 막아줄수 있다고.
“...일어났어?...”
준후는 아차싶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준후가 움직여서 그녀가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은채가 앉아서 깊은 잠에 빠질만큼 허술한 여자가 아닌 탓이다.
“더 자.괜찮아.”
“으응.싫어.일어날래.”
은채는 살짝 눈을 비비더니,자신이 준후의 품에 쏙 안겨있는것을 인지하고는 부끄럽게 웃었다.늘 감정표현에 인색한 준후마져도 그때만큼은 그저 은채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은채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그의 품에 반쯤 안겨있던 상태그대로 몸을 움츠렸다.아침공기가 추운지 살짝 무릎을 감싸쥐는 그녀.새벽이슬을 맞은 작은 새처럼,그녀는 너무나 가냘퍼 보인다.
“괜찮을까?우리..”
“아직 자신이 없어?”
준후의 되물음에 은채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준후는 알수 있었다.그녀는 무서워하고 있었다.꿀이 발라진 칼.처음엔 달콤할지 모르나 분명 심장을 후벼파는 그 어떤 일들이 그들의 앞날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은채는 너무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내가..욕먹으면 되잖아.”
“그런게 아니야.”
“그럼 그런말 하지마.그럴필요 없잖아.”
은채는 준후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준후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입술이 아닌 이마에 해주는 그의 입맞춤을 음미라도 하듯,은채는 살짝 눈을 감기도 했다.
“아빠 회사는?가봐야 하잖아.”
“나중에 갈래.기회야 많은데 뭘.”
“그치만 아빠가 나랑 같이 보낸건 그거 때문이잖아.안그랬으면 나 혼자 다녀와도 되는 건데.”
“바보야.계속 그렇게 사람말 일일이 다 따르면서 빡빡하게 살거야?”
“그치만 그게 편하잖아.어기면 무섭기도 하고..”
“그럼,세상살면서 가장 크게 일탈한게 언젠데?”
“일탈?”
준후의 말에 은채는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질문을 한 준후도 별달리 기대를 하지 않은 부분이었다.은채와 일탈?아마 세상에서 가장 안어울리는 조합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친구들하고 당일치기 놀러간적 있어.”
“그게 다야?1박2일도 아니고?”
“친구들이랑 외박한적은 한번도 없는데?”
“푸하..답답하네.”
“재미없지?나..”
준후는 귀엽게 웃는 은채의 머리결을 쓰다듬어 주었다.그는 무언가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이내 은채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남자친구가 생겼을때 가장 해보고 싶었던게 뭐야?”
“해보고 싶은거?음..글쎄..”
“생각해봐.어서.”
은채는 준후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이내 입을 열었다.
“공연하는거 보고싶었어.”
“공연?”
“응.음악공연..콘서트 같은거.”
“와..진짜 시시하다.”
“뭔가 대단한게 있을줄 알았어?”
준후는 그녀를 안고있던 팔을 내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은채는 갑자기 준후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며 일어나자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그래 갑자기?”
“빨리 씻어.”
“응?”
“빨리 씻으라고.출발해야 하니까.”
“집으로?”
은채의 물음에 준후는 씩 하고 웃었다.좀처럼 그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은채는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서 웃었다.
“오늘하루...나랑 일탈하자.소원들어줄게.”
‘치!그 인간 뭐야..’
민지는 투덜 거리면서도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화장은 꼭했고,옷도 신경써서 입고온 그녀였다.
‘그거 데이트 신청인가?’
민지는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그렇게 관심없는 척 하더니..역시나 준후는 자신에게 관심이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민지는 왠지 승리자가 된 기분에 고운 입술사이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근데 데이트 신청해놓고 늦는 매너는 뭐람.’
민지는 다시금 맘에 안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다.여태까지 남자를 기다리게 한적은 많아도 기다려본적은 단 한번도 없는 그녀였다.휴일에 다짜고자 나오라고 하더니만,그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여어 최민지.”
“흥!왜 이제 와...어라?”
당연히 준후일줄만 알았던 민지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그곳에는 준후가 아닌 동아리의 선배,동기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왠일이에요?”
“뭐?왠일이라니?너 준후가 불러서 나오지 않았어?”
“에?”
기타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그의 말에 민지는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그제서야 민지는 자신의 앞에 있는 동아리의 맴버들을 바라보았다.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기파트를 맡은 이들뿐이다.
“어쨌든 빨리 들어가자.준후녀석 오기전에.”
“오기 전에라뇨?그리고 어딜 들어가요?”
“너..준후한테 아무말도 못들었어?저기 가는거잖아 저기.”
민지는 반사적으로 선배가 가리킨 곳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문이 닫혀있는 자그마한 소극장.그녀는 겨우겨우 표정관리를 하며 다시 되물었다.
“준후가...우리를 다 집합시킨 거에요?”
“푸하하.후배가 선배를 집합시키겠냐.준후가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연습한 곡들 맞춰 보자고 하더라.게다가 그녀석 저런곳도 섭외해 놨던데?”
“연..습요?”
민지는 맥이 탁 풀리는게 느껴졌다.괜시리 우쭐하던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얼굴도 붉어진다.
“그..그런건 동방에서 해도 되잖아요!”
“아따..왜 화를 내고 그래?준후가 오늘 음악쪽에 영향력있는 사람을 데려온다고 했다니까.”
“영..향력있는 사람?”
“그래.너도 준후 실력 봐서 알잖아?그정도 재능있는 아이가 음악계에 아는사람 하나 없겠냐?야..혹시 알아?우리도 잘 보여서 데뷔할지 모르는거 아냐.”
물론 그 영향력있는 사람이란 은채였고,맴버들이 준후의 ‘뻥’을 눈치 챘을리가 없었다.또한 준후가 대학에 오기전 연습하던 연습실 맴버들중 한명이 하는 소극장이라서 바로 빌릴수 있는 것이었지만,그들은 그저 준후의 영향력이 대단해서 바로 소극장을 섭외한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야야.어서 들어가자.”
“자..잠깐..”
민지는 선배들에게 거의 끌려가다 싶이 소극장으로 들어갔다.그닥 넓지는 않지만 갖춰질것은 그럭저럭 다 갖춰진 작은 공간.학교내에서의 공연이 전부였던 그들은 신이나서는 악기 셋팅을 시작했다.
“야 최민지!뭐해!어서 와서 마이크 음량 맞춰봐.”
“알았다구요!”
민지는 괜시리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빽 하고 질러버렸다.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게 느껴졌다.그냥 이유없이,준후가 미워졌다.
“야..쟤 오늘따라 왜저러냐?”
“냅둬..그날인가 보지 뭐..큭큭!”
옆에서 수근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민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는 연신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여..여기가 어디야?”
“쉿!그냥 들어와보면 안다니까.”
한참이나 악기조율과 음향셋팅에 여념이 없을때,한쪽에서 남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맴버들 전원은 급속도로 긴장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출입구쪽을 일제히 바라보았다.오직 한명 민지의 표정만이 공격적이었을뿐,
“강준후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조명이 비추는 무대의 반대편에는 준후와 어떤여자가 같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준후는 연신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말만 했으며,옆에 있는 여자는 아직도 무슨일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헉..”
준후의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맴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입을 쩍하고 벌렸다.많이 꾸미지도 않았고,화장기도 별로 없는 얼굴이지만 너무나 청초한 미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입가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미소는 약 1분간 남성들의 혼을 잠시 빼놓기에 충분했다.
‘뭐..뭐야.애인인가?’
그 와중에 당황한 것은 민지였다.준후의 모습만 보였을때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던 그녀지만,그의 옆에 있는 은채의 얼굴을 보자 크게 당황해 버린 것이었다.
‘이쁘잖아..’
민지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왠지 기분이 묘해지며,준후와 은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볼뿐이었다.
“정말 말 안해줄꺼야?”
“소원 이뤄준다고 했잖아.잠시만 기다려봐.”
“뭐?”
“여기서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 된다니까.”
준후는 연신 궁금해 하는 은채의 어깨를 지긋이 눌러 억지로 객석에 앉히고는,아직도 은채의 등장에 넋이 나가있는 맴버들이 있는 무대위로 올라갔다.
“빨리 시작하죠.”
“야..시작은 시작인데..이거 어케 된 상황이냐?저 여자분이 정말로 그렇게 영향력있는 분이야?”
준후는 얼빠진 선배의 말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은채가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당연하죠.한경건설 사장님 딸이라니까요.”
“뭐어?”
“쉿.들리겠어요.암튼 그만큼 재력있는 분이니까 최선을 다해야 한다구요.”
“와..세상에 생긴것도 완전 천산데..짱이다.”
민지는 준후와 눈이 마주치자 괜시리 고개를 훽하고 돌려버린다.준후는 얼른 피아노로 가서 앉았다.맴버들은 긴장을 했는지 분주히 마지막 셋팅을 하기 시작했다.준후는 객석에 앉아 있는 은채를 보며 살짝 웃어주었고,그녀역시 환한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야..최민지..준비 됐으니까 멘트해..”
멘트는 어디까지나 마이크를 쥔 보컬의 몫이다.그녀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옆에서 속삭이는 선배의 말에 마지못해 마이크를 살짝 감싸쥐었다.
“첫곡은...꿈꾸는 아이입니다.1학년 강준후 군이 쓴 곡입니다.”
은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준후를 바라보았고,곧이어 잔잔한 선율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민지는 마이크에 천천히 입을 갖다대었다.왠진 모르지만,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을수 없다는 가사의 ‘꿈꾸는 아이’가,오늘따라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어 버리는 듯한 기분은 왜인지,정작 그녀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긴장탓에 약간은 들쑥날쑥했던 연주도,곧이어 안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자그마한 소극장을 민지의 음색이 가득 채웠다.
-너는 꿈처럼...잡을수 없는 향기처럼...-
가사를 들으며 미소를 짓던 은채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준후가 썼다고 했던 이 곡. 자신의 이름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노랫말에 나오는 것은 자신과 준후의 이야기가 틀림없었다.해질녘의 놀이터와,그네. 그리고 은채가 좋아하는 향수의 향기까지도 은연중에 가사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준후에게로 머물렀다.음악은 잘 모르는 은채지만, 준후가 그 음악을 만들때 어떤 심정이었는가를, 은채는 느낄수 있었다.
‘걱정마.니가 쓴 노래가사처럼.난 사라지지 않을게.’
은채는 이 순간만큼은,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네온사인이 밝히는 밤거리.고급스런 룸살롱의 입구에서,검은 정장을 입은 거대한 체구의 사내와,약간 외소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큰형님 뵈러 왔냐?”
“아..뭐..제가 뵈러 왔겠습니까.저희 기주형님께서 오신거죠.”
“크크.하기야 그렇지.니들이 큰형님 뵐 짬이 되는것도 아니고.”
짧은 머리의 사내는 낄낄거리며 웃으면서,자신의 앞에 있는 외소한 사내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근데 니네 형님이 왠일로 큰형님을 뵈러 온거냐?요새 잘나가서 코빼기도 안보여주던 분이?”
다분이 기주를 밑으로 내려보는 듯한 말투.기주의 부하인 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저 살짝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그래도 보스를 모시는 자가 자신보다 위일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기주형님도 자주 오고 싶어 하시는데...일이 좀 바빠서 그런거 같습니다.”
그의 말에 보스의 부하인 덩치는 금새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긴 니미 개뿔이 바뻐.막말로 니들이야 말로 꿀빠는 것들이지. 노른자 상권에 들어앉아가지고 취미로 도박장 관리나 하고...안그냐?엉?”
“말씀이 좀 심하신거 같습니다 형님.”
그의 말에 덩치가 큰 사내의 미간이 꿈틀했다.순식간에 그의 주먹이 앞에 있는 기주의 부하의 면상으로 직격했다.
“어쭈루?막어?한 철구 이 새끼가 돌았나..”
“기주형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죠.저를 욕하는것은 괜찮습니다만,제가 모시는 분을 욕하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자신의 주먹을 막은채로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사내를 보며,그는 어이가 없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곤란?곤란하면 십새야..어떻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한참전에 기주가 들어간 룸싸롱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팔을 막아낸 기주의 부하는 품안에서 날카로운 칼을 빼들었다.
“끄억!”
“바로 이렇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몸안을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허물어졌다.안에서의 소란이 일종의 신호였는듯,차안에 타고 있던 몇몇의 인원들이 신속하게 내렸다. 눈 앞의 사내를 찌른,철구라 불린 기주의 부하는,냉정한 얼굴로 뒤에 도열한 사내들에게 말했다.
“안에서 신호가 왔다.이 새끼 치워버리고,이 근처 출입 완전히 차단해.”
“너 이 개새끼...키워준 주인을 무는거냐?”
보스는 눈앞에 있는 기주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다.하지만 정작 기주는 냉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의 좌우에는 족히 열댓명은 되보이는 사내들이 축 늘어져 뻗어 있었다.모두 기주와 같은 중간보스들이었지만,어느새 갑자기 나타난 기주가 그들을 싸그리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야..너 이새끼..”
보스는 그제서야 기주의 눈빛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가 다분히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중간보스들과 함께 거나하게 술을 마시던 중,갑자기 기주패거리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결과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대로였다.방심하고 있던 이들은 몸도 제대로 갸누지 못하고는 기주의 부하들이 찌른 칼에 픽픽 쓰러져 버렸다.그제서야 보스는 알수 있었다.기주가 나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진행한 것이다라는 것을.술시중을 들던 아가씨들은 당황하긴 커녕 약속이나 한듯 일사 분란하게 밖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술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지,계속해서 다리가 비틀거린다.
“한가지만 묻겠다.”
기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보스는 앞에 있는 양주병을 움켜쥐고는,룸의 구석에 등을 대고 가만히 기주를 노려보았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놈들은 너 말고 더 있나?”
“무슨 개소리냐?”
“내가...태어난 그 프로젝트 말이다.”
보스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것일까..하는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다만,자신이 그 프로젝트에 관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알고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었다.
“너 이새끼..그걸 어떻게...”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한경건설 강주현 회장.그리고 너.이렇게 둘뿐인가?”
“크크크.그게 알고 싶은거냐?”
“빨리 말해라.”
“이런짓하고도 네놈이 무사할거 같아?”
“무사하지 않더라도,니 목은 따고 볼거니까 걱정말고.묻는말에나 대답해.”
밖에서는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보스는 직감적으로,자신의 부하들이 당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더 있다면..어쩔거냐?”
“대답은 뻔하지.”
“이해가 안되는 녀석이군.넌 그 프로젝트 때문에 세상의 빛을 봤다.그런데 그걸 왜 원수로 생각하는 거지?너에겐 은인일 텐데?”
기주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양주병을 움켜쥔채 자신을 겨눠보는 그를 보며,기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의 빛?내가 본건 세상의 어둠뿐이다.개같이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다. 은인?개소리 지껄이지 마라.생명으로 장난치는 너같은 새끼들..쓰레기보다 가치없는 것들이니까.”
“박기주 이 개자식이!”
순간,보스는 눈앞이 번쩍 하는것이 느껴졌다.순식간에 기주가 테이블을 발판삼아 자신의 몸쪽으로 날아든 것이었다.최후의 호신수단으로 들었던 그의 양주병은 바닥으로 땡그랑 하고 떨어졌다.그에게 몸을 날린 기주는 그의 복부에 긴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어..어..으..으윽..”
그는 몸을 파르르 떨며 허물어지듯 주저 앉았다.날카로운 금속은 그의 몸속으로 점점 파고들었고,기주의 하얀 와이셔츠는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형님.빨리 마무리하지 않으면...다른쪽에서 냄새맡고 올지도 모릅니다.”
기주는 뒤에 서있는 부하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불신어린 눈으로 천천히 굳어져 가는 자신의 보스를 보며,그는 살짝 몸을 돌렸다.
“흔적들은 싸그리 지워.”
“알겠습니다.”
기주는 천천히,엉망진창이 된 살롱의 복도를 걸어나갔다.약속이나 한듯 그 많던 웨이터와 종업원들은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거사를 위해 그가 철저히 준비를 해둔 이들로 오늘 하루만 영업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차에타서 시트에 깊숙히 기대는 기주를 보며,운전석에 있는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기주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그에게 중얼거렸다.
“한경건설..강회장의 집으로.”
마지막 곡이 끝나고,공연장은 은채 혼자서 치는 박수로 가득 메워졌다.연주를 한 이들은 준후와 은채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보았고,민지는 노래가 끝나고도 뚱한 표정 그대로였다.
“오늘은 이걸로 됐어요.아무 추후에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야..진짜냐?”
준후의 말에 선배들은 악기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는 준후에게 속삭였다.
“그럼요.갑자기 불러내서 죄송하긴 한데..일단 나중에 연락이 오면 말씀드릴게요.”
“그..그래 알았어.”
“저 먼저 가겠습니다.”
준후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만 객석에 있는 은채에게 달려갔다.민지는 천천히 그런 준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저 멀리 객석에서 은채는 연주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해야한다고 하고 있었고,준후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한사코 그녀를 잡아끌고 있었다.
‘설마...’
민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는 은채를 끌고가다 시피 해서 나가는 준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자신에게는 늘 뚱한 표정만을 짓는 그가,은채의 앞에서는 밝게 웃고 있었다.게다가 은채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모습.그녀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맴버들이 신나서 수근거리는 와중에서도,그녀는 괜시리 투정어린 표정을 지으며,그가 나갈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왜..왜자꾸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거지.’
“맘에 들었어?”
“응..고마워 정말로.생애 최고의 날이었어.”
“겨우 이딴걸로?”
준후는 싱긋 웃는 은채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따뜻해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어느새 달빛이 비추는 밤이 되어 있었고,준후는 힘을 주어 하얀 은채의 손을 잡아주었다.아직은 당당하게 손을 잡는 것이 어색해서 일까,은채는 그때마다 살짝살짝 놀라고 있었다.
“아냐.이딴거라니.정말 최고였어.그리고..니가 음악에 재능이 있는줄은 몰랐어.”
“재능..글쎄.”
준후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어?”
“말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왠지 말을 못했어.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다 들었는걸 뭐.아까 그 꿈꾸는 아이라는 곡에 다 나와 있던걸.”
준후는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은채가 공연을 원해서 자작곡을 들려주긴 했지만,그 곡에는 은채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노골적으로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채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준후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음악이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제는 나한테 다 말해 줄거지?”
은채의 말에 준후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와 동시에 천천히,은채가 잡고 있던 준후의 손을 놓기 시작했다.
“집에 다왔잖아.”
준후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늘 꼼꼼한 자신답지 않은 실수였다.그녀와 걷는것이 꿈만 같아서,집앞을 비추는 가로등에 올때까지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이제는 ‘조심스럽게 시작한 연인’에서 ‘누나와 동생’사이로 잠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좋다.우리는 헤어지면서 아쉬워할 필요가 없잖아.”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의 말.준후는 그녀를 가슴가득 끌어안고 싶은것을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는 은채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활발하고 명랑했다.기다렸다는 듯이 은수의 방문이 열리더니,점점 야해지는 복장을 한 그녀가 쪼르르 뛰어나온다.
“언니!”
“응..밥은 먹었어?”
늘 다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주는 은채를 보며 싱긋 웃던 은수는 이윽고 뒤따라 들어온 준후를 빤히 바라보았다.왠지 모르게 그녀의 시선이 거슬린 그는 말없이 2층으로 스윽 올라가 버렸다.
‘정리를 해야할까..아니면..’
준후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용기를 내어 은채를 붙잡고 나니,은수가 걸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은수에게 쉽게 은채와의 일을 꺼낼수 없었다. 은수는 은채와의 관계를 깰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비밀’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또다른 비밀을 낳았고,그 시점에 은채라는 신기루를 잡아버린 까닭이다.
‘복잡하다..생각하기도 싫어.’
이미 자신은 너무 많이 선을 넘어버렸다.그리고 다시는 그 선너머의 반대편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사실을 준후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쉴새없는 마음속의 저울질은 은채에게로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었다.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상황에서도,은채라는 존재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그 무언가였다.
“들어왔어?”
문득 옷을 갈아입으려고 티셔츠를 벗었을때.문을 살짝 두드리고 들어온것은 다름아닌 은하였다.항상 먼저 자신의 방에 찾아온적이 없는 그녀였기에,준후는 살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앉아도 되니?”
“좋을데로.”
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고,은하는 살짝 그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늘상 집에서 있을때처럼,고급스런 원피스 차림의 그녀.머리를 간결하게 묶어 올려 더욱 더 섹시한 목선이 준후의 시선을 간지럽혔지만,오늘은 평소처럼 그녀를 향한 욕정이 솟구치지 않았다.
“은채랑...잘다녀왔어?”
“그냥..뭐 그렇지.”
준후는 티셔츠를 벗은채로 서서,은하를 내려다 보았다.언제부터인가,자신이 은하를 내려보는 이 광경이 익숙해져 버린것은 왜일까.몇분간의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어색함을 참다못한 준후가 욕실로 향하려 할때,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봤어.너랑 은채가 손잡고 오는..거.”
준후는 그대로 멈춰서서,살짝 뒤를 돌아 은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애꿎은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됐네.이야기 하기 민망했는데 봐버렸다면야.너..어차피 은수와의 일도 알고 있잖아.”
은하는 아무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준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은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해해.남자가..어떻게 한여자한테 만족하겠어.”
“뭐어?”
은하의 성격과 가치관을 염두에 두고도,그녀가 뱉은 말은 준후에게 있어서도 전혀 의외의 계산밖 상황이었다.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준후에게 은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상관없어.니가 말하지 말라면,아무한테도 말안하고 비밀지킬게.”
“너..어쩌다 그렇게 변했어?”
“왜?나는 변하면 안돼?변해서..내가 싫어?”
무언가의 간절함이 담긴 듯한 은하의 표정.준후는 가슴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져 왔다.상황은 준후가 예상한것 보다 훨씬 복잡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냥...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세번째라도 좋으니까...그냥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조금씩 떨리는 은하의 어깨.준후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서서,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형님.어떻게 할까요?”
운전석의 사내가 조심스레 기주에게 물었다.준후의 집이 보이는 작은 골목.그리고 거기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 안에서 기주는 벌써 세가피째의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까 그여자는 분명..’
기주는 그녀가 준후의 둘째누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준후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그리고 기주는 보았다.준후가 잠시나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내리지 못했다.
“강회장차가 없는 것으로 봐선...오늘은 없는듯 하군.”
기주는 괜시리 합리화를 시켜버렸다.그의 말에 운전석에 있던 사내가 천천히 차의 시동을 걸었다.
‘나중에...나중에 해도..괜찮겠지.’
기주는 살짝 눈을 감았다.사늘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그의 시선이 준후가 있는 거대한 주택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은...그냥 돌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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