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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회전그네 <2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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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28 회 작성일 24-02-25 02: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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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은채의 데이트 신청.


“야야.쟤가 그 소문의 그 녀석이냐?”

“어.그럴껄.”

“머리가 그렇게 좋다면서?입학식날 대표로 뭐 선서 같은거 하더만.”

“야야.말도 마라.거기다가 한경건설 아들이란다.”

“진짜?저거 완전 엄친아네..”

주변에서 수근대는 인원이 꽤 있었지만,준후는 귓가에 꼽은 이어폰탓에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된 대학교의 교정.준후를 보고는 수근수근 대는 캠퍼스의 풍경이었다.

은수와의 일이 있은 후,준후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대학에 합격했으니 그야말로 자유였고,게다가 은수와 은하를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든탓에 하루하루 밤역시 즐거웠다.흠이 있다면, 은하와 할때는 은수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은것 뿐이었다.

-이제 오빠 바빠지는거야?-

은수는 늘 그렇게 투덜대곤 했다.이상하게도,은수는 처음으로 섹스를 하고나자 마치 준후를 애인처럼 대했다.준후의 눈에도,은수는 완전히 자신에게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은하와 은수간에는 묘한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저기..강준후 맞니?”

준후는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 이어폰을 뽑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세요?”

준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눈 앞에는 준후보다 살짝 키가 작은 남자 한명이 서있었다.대놓고 준후에게 하대를 하는 것을 보니 선배인 듯했고,준후가 알아채기전에 몇번이고 부르며 따라왔던 모양인지 약간은 숨을 헐떡대고 있었다.

“아..나는 경음악 동아리 회장인데..강준후 맞지?”

“네..그런데요.”

준후의 대답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는 듯 준후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반가워!나는 3학년 이승재라고 하는데..혹시 우리 동아리 들어올 생각없어?”

“동아리요?”

“어 좀 갑작스러울수도 있겠지만,사실 나 너 음악쪽에 꿈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걸 어떻게?”

“너 고등학교때부터 다니던 연습실에 내 친구가 있거든.”

준후는 그제서야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승재라고 밝힌 그는 준후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동아리의 홍보 전단지를 내밀었다.

“니 적성에 맞을거야.작곡쪽이 꿈이라면서?우리는 서로 자작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발표하기도 하고 그래.관심있으면 꼭 들어와라.응?”

준후는 꽤나 구미가 당긴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전단지를 바라보았다.그는 준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쪽에 있는 동아리 건물알지?거기 3층에서 가장 큰 방이 우리 동방이야.언제든지 들려! 너에 대해선 애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그럼 간다!”

“에..?”

준후는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선배를 보며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별 이상한 녀석이네.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하지만 흥미가 있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었다.준후는 저도 모르게 전단지를 가방에 쑤셔넣고는 후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응?뭐야..’

왠지 단지 하교길이라서가 아니라,후문이 굉장이 소란스럽다는것을 느낀 준후는 고개를 갸웃했다.지나가면서 한번 더 볼걸!하는 아쉬움이 가득찬 멘트를 날리는 학생들부터,괜히 안보는 척하며 힐끔거리는 학생들까지. 뭔가 후문에 굉장한 구경거리가 있는듯한 눈치였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갔던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 지는 것을 느꼈다.후문이 소란스러웠던 탓은 청순한 한 여성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여성은 준후도 아주 잘 아는 여자였다.

‘강은채.’

그녀가 왠일인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후문에 서있었다.너무나 하얀 얼굴과 턱선이 보이도록 묶어 올린 머리.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이 나가게 하는 그녀의 깨끗한 이목구비는, 그녀가 늘상 즐겨입는 하늘하늘한 스커트와 어울려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한 느낌마져 자아내었다.

주변에서는 그녀를 보며 넋을 잃는 남성들과,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의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정작 은채는 자신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약간은 어색한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열심히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준후는 그녀의 모습만을 바라보는 사내들을 한번씩 노려본후 은채를 향해 걸었다.이상스럽게도 준후의 가슴은 조금씩 두근거렸다.

“준후야!”

그의 모습이 보이자 은채는 싱긋 웃으며 준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준후를 향해 옮겨졌다.

“여긴 무슨일이야?친구 만나러 왔어?”

준후의 퉁명스런 말에 은채는 싱긋 웃어보였다.주변은 술렁이기 시작했지만,준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은채를 바라보았다.

“아니.다른 사람 만나러 왔어.”

“아 그래?”

“누구냐고 안물어봐?”

“누군데?”

“신입생 강준후씨.”

“뭐?”

준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은채는 살짝 웃으며 준후의 팔을 잡아 끌었다.아쉬움과 부러움이 섞인 남자들의 시선을 뒤로 한채,준후는 은채에게 이끌려 후문을 나와버렸다.

“갑자기 쌩뚱맞게?”

“나는 뭐 내 동생 학교에 오지도 못하니?”

“그런건 아니지만..”

사실 준후는 기분이 좋았다.다만 그녀의 앞에서 대놓고 웃지 않았을 뿐이었다.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은채는 준후의 발과 맞춰 걸었고,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하면서 코로 전해져 오는 은채의 향기에 준후의 심장은 더욱더 빨리 뛰었다.

“준후 너 밥 먹었어?”

“아니.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인걸 뭐.”

“누나도 안먹었어.우리 맛있는거 먹자.”

“집에 가는게 아니고?”

“밖에서 먹는것도 괜찮잖아.왜 누나가 창피해?”

“쳇.멋대로 말하기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준후의 말에도,그의 성격을 잘 아는 은채는 그저 웃기만 했다.준후는 똑바로 은채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괜시리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너네 학교,우리 학교랑 가깝잖아.내가 맛있는 곳 아니까 같이가자.준후 너 파스타 좋아하지?”

“좋을대로.아무거나 괜찮지 뭐.”

향긋한 봄향기가 나는 대학가보다,은채가 옆에 있음으로써 나는 향기가 더 짙은것만 같았다.주변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척 하며 은채와 준후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약간 불쾌하기도 했지만,준후는 왠지 은채와 함께 있을때 자신을 바라봐 주는것이 싫지 않았다.

“어디더라...음..”

은채는 고운 입술을 만지작 거리며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준후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지.길치가 어디가냐.”

“아니야! 나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준후는 잘 알고 있었다.수학이나 과학쪽에는 밝은 주제에,이상하게도 길눈이 심하게 어두운 은채.고등학교때도 종종 길을 잃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기억하고 있다는 은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듯,둘은 곧 좁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파스타집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준후야 뭐 먹을래?누나가 사줄게.”

“아무거나 사줘.”

“음..그럼 커플셋트 먹자.이거 주세요.”

은채는 주문을 하고는 살짝 묶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준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새학기는 어때?대학생활 재밌어?”

“뭐가 재밌냐.어차피 그냥 학교일 뿐인데 뭘.”

“동아리도 들고 그러면 재밌잖아.무뚝뚝하기는.”

준후는 괜시리 물잔만 들이켰다.입시,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때에 느껴지던 한파는 어느새 물러가고,3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가게의 창문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그 모습이 더욱 은채를 빛나게 하는 듯했다.

준후는 새삼 많은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대학에 합격하고,졸업을 하고,그리고 집안에서의 비밀은 점점 늘어만 갔다.은수는 점점 대담해져 한밤에 몰래 준후의 방에 들어오기도 했다.마치 은하가 들리라는듯이 달려드는 은수덕에 준후는 몇번이고 주의를 주기도 했었다. 이 모든 일이 3개월 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왠지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근데..요새 은수랑 무슨일 있어?”

갑작스런 은채의 질문에 준후는 마시던 물을 뿜으려는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무슨일..이라니?”

“그냥..은수가 널 대하는게 요새 너무 이상한거 같아서.”

은채는 물잔을 만지작 거리며 중얼거렸다.늘상 은수를 신경쓰는 그녀.당연히 그녀가 보기에는 은수와 준후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충분히 감지할수 있을 것이었다.게다가 늘 준후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은하도 이제 매일 집에 오다시피 하며 준후에게 별 말을 하지 않으니,당연 은채로써는 잘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질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분탓이겠지 뭐.”

준후는 그런식으로 대충 둘러 대답해 버렸고,은채가 뭐라고 하려는 틈에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배고팠는데 잘됐다.잘 먹을게.”

뭐라고 다시 물어보려던 은채는,이내 배가 고팠는지 마늘빵을 복스럽게 베어무는 준후를 보며 이내 다시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식사를 하고도,준후는 연신 의아한 눈으로 은채를 바라보며 걸었다.그저 밥만 먹고 집에 갈줄 알았는데,이상하게도 이번엔 은채가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준후가 그것이 싫을리 없었지만,지금까지 은채가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기에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두명이요.”

은채는 매표소에서 계산을 하더니 준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우리 운 진짜 좋아.오자마자 바로 영화가 있잖아.그것도 자리도 좋고..그치?”

“근데 갑자기 무슨 영화야?”

“왜?보기 싫어?”

“내가 언제 싫댔냐.갑자기 그러니까 그렇지.”

“그냥..다들 남자친구랑 영화보고 그러는거 부럽더라.근데 난 준후가 있으니까.그걸로 만족해야지.”

“뭐야.꿩대신 닭이냐.”

은채는 하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준후는 문득 예전 은채가 그네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이뤄질수 없다고 했던 그 말.이상하게 왼쪽가슴이 쓰려오는 준후였다.

‘나를 봐달라고 하기엔,난 너무 더러운 놈이 되어 있는건가.’

한번도 은하,은수와 몸을 섞으면서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본적 없는 준후였다.하지만 그 상태로 은채의 눈을 바라보기는 너무나 괴로웠다.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설레였지만,자신은 그런 그녀의 동생과 언니를 모두 범한 남자였다.

-너..술취해서 나 끌어안고 키스했어..-

준후는 문득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옆에서 은채의 반짝이는 입술이 보인다.입술을 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지금 바로 옆에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은채.생각 같아서는 그녀의 가냘픈 허리에 팔을 두르고,질릴때까지 입을 맞추고 싶었다.준후는 새삼 인정해야 했다.지금의 이 감정.생애 처음으로 은채를 봤을때부터,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이 느낌.

‘나...진짜 강은채를 좋아하고 있구나..’



둘은 사이좋게 나란히 앉았다.평일의 극장은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이거 예전부터 보고싶었던 영화였어.”

은채는 행여나 주변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소근거리며 준후에게 말했다.소근거리며 말했으니,당연히 준후의 얼굴 가까이까지 은채가 살며시 다가와 이야기를 했기에 준후는 더욱 떨렸지만 이내 퉁명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흔한 로멘틱 코메디 영환데 뭘.”

“아냐.이거 되게 슬프데.”

“급히 들어와서 팝콘도 없고..”

“누나가 사올까?”

“됐네요.영화 시작한다.”

준후의 말에 은채는 얼른 화면쪽으로 눈을 돌렸다.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 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살짝 곁눈질로 은채를 보니 그녀는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즐거워 보이네..’

그러고 보니,은채는 잘 웃긴 했지만 이렇게 즐거워 하는것을 보인 적이 별로 없었다.늘 과제에 치여 살았고,집 안에서는 강회장이 없으니 늘 엄마 역할을 도맡아 했다.살림이야 미진이 알아서 하지만,강회장은 은수의 학교문제나 교육문제는 은채에게 떠 맡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밖에서의 은채는 그냥 평범한 학생일지 모르지만,집안에서의 은채는 밖에서 일을하는 강회장과 은하를 챙기고,준후와 은수의 교육을 책임지는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영화는 늘상 시즌마다 나오는 전형적인 미국식 로멘틱 코메디였다.늘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실수 연발, 그리고 꼭 오해를 사서 여주인공과 멀어졌다가 결국엔 진심이 통해 사랑을 얻는 스토리였다.

‘나 역시 저기에 나오는 녀석이랑 다를바가 없지.’

준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정작 자신이 바라보는 것은 은채이지만,늘 그는 퉁명스럽게 은채를 대했기 때문이었다.그뿐만 아니라, 은채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맴돌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져 들어온다.영화는 계속해서 흘러가지만,준후는 조금도 영화에 집중할수 없었다.바로 옆에 있지만 손조차 잡을수 없는 은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이 준후를 조금씩 압박해 왔다.아이러니하게도, 은수와 은하와의 관계는 전혀 문제될것이 없었지만,은채와는 왠지 넘어설수 없는 묘한 장벽이 느껴진다.왜 일까.몇번을 생각하고 고찰해봐도 그것은 자꾸 도달할수 없는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준후는 갑자기 극장이 환해 지는것을 알수 있었다.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영화가 끝나버린 것이었다.살짝 눈을 돌린 준후는 눈을 크게 떴다.

“왜울어?”

은채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준후가 보자 민망했는지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안울어.”

“안울긴 뭘 안우냐.코메디 보면서 우는게 말이 돼?”

“그치만 마지막에 여자애가 주인공 받아주는 장면이 너무 찡했단 말야.”

준후는 한참이나 어이없는 눈으로 은채를 바라봤다.청순한 눈망울이 울어서 그런지 약간은 빨개져 있었다.준후는 정말로 오랜만에,그렇게 은채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준후야.”

“응?”

“넌 운전면허 안따니?”

“갑자기 그건 왜?”

“아빠가 너 대학가면 차 사주신다고 했었잖아.너 차있으면 누나도 데려다 줄수 있고..괜찮지 않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작은 정류장.어색하게 서있을때 은채가 꺼낸 말이었다.

“글쎄.별 필요성은 못느끼는데.그러는 넌 왜 면허도 있으면서 차 안몰아?”

“또 너라고 한다 누나한테..난 장롱면허라 무섭단 말이야.”

“하긴 차 있으면 뭐하냐.길치라서 집앞 마트도 못몰고 갈텐데.”

“너 혼나!”

은채는 괜시리 귀여운 두 눈을 치켜떴다.본인은 무섭게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준후에게 있어서는 꼭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버스왔다.”

준후를 쥐어 박으려던 시늉을 하던 은채는 이내 눈을 흘기며 버스에 올라탈수 밖에 없었다.사람이 그닥 많지 않은 버스.준후는 습관처럼 맨 뒷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고,은채역시 열심히 준후의 뒤를 따라가 앉았다.

“저녁이 되니까 진짜 시원하다.그치?”

준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늘따라 은채는 너무나 밝아보인다는 것을 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근데..자주 안놀러다녀?친구들이랑?”

“나?”

“응.”

은채는 갑작스런 준후의 말에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은채의 친구들이라면,준후도 몇명 알고 있긴 했다.다만 그녀가 밤 늦게 까지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고,친구들을 집에 부르는 일도 없었기에 자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글쎄.다들 대학생이고 바쁘고 하니까..볼일이 없는거 아닐까?나도 그렇고.”

“맨날 집에서 공부만 하니까 그렇지.”

“그럼 어떡하니?성적 잘 따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여지없이 들려오는 교과서적인 은채의 대답에 준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잘 웃지 않는 그지만, 오늘은 은채와 함께 있으면서 자주 웃는거 같았다.은채가 그간 보여주지 않았던 신나하는 표정을 지었듯이 말이다.

“좀 놀러다니고 그래.꼭 집안에 있으란 법이 있는것도 아니고,성적도 좋으면서 뭘 맨날 공부하냐.강은하..아니 큰누나 처럼 좀 즐기면서 살아도 되잖...”

말을 잇던 준후는 어깨에 느껴지는 감촉에 살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향긋한 샴푸내음이 확 하고 느껴졌다.약간은 적막속에 준후가 입을 열었을때,그녀는 피곤한지 준후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준후는 미친듯이 두근거리는게 느껴졌다.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탓에 은채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하얀 살결과 꼭 감겨있는 긴 속눈썹,그리고 콧날은 준후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그녀가 기댄 탓에, 전혀 야하지 않았던 은채의 하늘하늘한 브라우스는 앞으로 살짝 기울여져,그녀의 뽀얀 가슴 윗부분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다.준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훽 하고 돌려버렸다.

‘젠장.내가 왜이러는거야.’

이제 버스안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10분만 지나면 은채도 준후도 내려야 하지만,왠지 준후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그답지 않은 생각마져 하고 있었다.잠이 든탓에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진 은채의 하얀 손.준후는 살짝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어보았다.

너무나 부드러운 느낌.준후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려왔다.왜 일까.은하,은수와는 거의 매일 돌아가며 찐하게 스킨쉽을 할 정도인데도 이렇게 떨린적이 없었다.

“..자?..”

준후는 혼잣말처럼 물었지만,은채는 쎄근거리며 선잠이 들어 있는듯 아무런 반응이 없다.너무나 고운 그녀의 손.준후는 은채의 손을 쥐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믿을지 모르지만..손이 너무 잡고 싶었어.”

버스가 네온사인이 가득한 길을 달렸고,준후의 심장도 어디론가 달리는 것만 같았다.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은채.준후는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난 그러면 안되겠지?난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이렇게 니가 잠들었을때 잡을 수밖에 없을거야.어찌보면 그게 내 운명이지.”

준후는 자신이 우스웠다.음악을 할때를 제외하곤 이렇게 감성적이었던 적이 없는 자신이었다.하지만 이렇게라도, 자고있는 은채에게 말을 하니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좋아해서 미안해.니가 꿈꾸는 좋은 남동생이 못될거 같아.그럼 이렇게 좋아하면 안되는 거니까.그래서 미안해.”

차가 밀리는 곳을 빠져나오자,버스는 시원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준후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은채의 고운 손을 쥐었다.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준후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은채의 감겨있는 눈가사이로. 아주 작은 이슬이 맺혀있다는 사실을.






“자 그럼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죠?레포트 과제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수의 말과는 달리, 강의실내에서 경제학 개론의 수업을 이해한 자는 거의 없어 보였다.경영학이라는 사회과학 과목에서는 거의 필수로 따라붙는 경제학 수업.그들은 마치 오뉴월 개마냥 책상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준후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여실히 얼굴에 드러내면서도 교수가 내는 레포트의 과제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정말 더럽게 재미없는 학문이구나.’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수업시간에도 자신의 머리를 가득 매우는 악상들.어째서 일까.강회장이 그토록 들어가라고 했던 경영학과에는 자신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그 어떤 조그마한 것도 그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1박2일의 오리엔테이션을 가지 않았던 준후인지라,모두 삼삼오오 모여서 강의실을 떠나도 그는 혼자서 남은 책들을 챙겨 넣었다.

‘어라..?’

문득 준후는 가방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손을 뻗어 꺼내보니,그것은 잔뜩 구겨져 있는 동아리의 전단지였다.

‘아 그러고 보니..이걸 잊고 있었네.’

왠지 모르게 요 며칠 멍해있었던 그는 그제서야 며칠전에 승재라는 사내가 말을 걸었던 것이 생각났다.

‘여기 애들의 수준은 어떨까?’

내노라 하는 명문대학.언뜻 생각해도 공부만 죽어라 했을것 같은 그들이 자신의 성에 찰 정도의 음악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왔지만,준후는 어느샌가 동아리건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내가 좋아하는것을 즐길수 있으면 그만이지.’

사실 고등학교때 즐겨 갔던 연습실의 맴버도 그닥 뛰어난 아이들은 아니었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준후만의 생각이었지만.

싱그러운 캠퍼스.저마다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준후는 그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동아리 건물에 들어서자,복도에서 춤연습을 하고 있는 동아리를 비롯,한 복도에 몇십개의 써클룸이 위치해 있었다.

‘3층이라고 했지?’

준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승재는 경음악동아리가 3층에서 가장 큰 방이라고 했었다.건물 구조상,가장 큰 방은 계단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것 같았다.

-세상은 온통 너 뿐이야..-

준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첫번째 방에서 울리는 여자의 노랫소리. 그리고 그 첫 번째 방이 바로 승재가 말했던 그 방이었다.

‘제법인데..’

준후는 별거 아닌것들만 잔뜩 있겠거니 하던 그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어큐스틱 기타의 연주와 함께 들려오는 여자의 음색은 상당히 깔끔하고 고왔다.고음처리가 좋다라는 것보다는 목소리가 너무나 분위기 있었다.준후는 동아리방의 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들려오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감상했다.섹시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은근히 반주에 녹아드는 듯한 목소리.준후는 문앞에서 진지하게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잠시후 연주가 멈추며 남자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온다.휘파람을 부는 이도 있고,시끄럽게 떠드는 이도 있다.준후는 그 환호성이 잠잠해 질때까지 묵묵히 기다린 뒤 동아리방의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천천히 철문이 열렸다.승재가 말했던 대로,동아리 방치고는 꽤 넓은 편이었고,한쪽에는 어큐스틱 기타를 비롯해 몇개의 악기가 놓여 있었다.삼삼오오 모여 대낮부터 동방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듯,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맥주캔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어!강준후다!”

준후는 자신을 알아보는 승재의 목소리에 꾸벅 인사를 했다.다들 준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듯,그들은 흥미어린 표정으로 준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준후는 방금 노래를 불렀던 여자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이지만,그녀는 꽤나 키가 큰 늘씬한 미인이었다,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고 있는 그녀.

“들어올 결심을 했나보네?”

승재가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도,준후는 대답하지 못했다.뒤를 돌아 있던 그녀가,몸을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키에 짙은 스모키 화장.하얀 브라우스와 딱붙는 청바지로 보이는 매혹적인 몸의 굴곡.마치 강은하의 다른 버전을 보는듯한 미녀가 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게다가,그녀는 준후에게 꽤나 낮이 익는 얼굴이었다.

‘수능 시험볼때의... 그여자잖아?’

틀림없었다.아슬아슬한 치마를 입고 나타나서는,과감하게도 치마를 들춰 컨닝을 했던 그 여인.잠시나마 준후의 관심을 끌었던 그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냐 이것들아!신입부원 강준후 오셨다.”

승재의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반가워.2학년 이진욱이야.”

“와..니가 강준후야?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너..악기 전파트를 다 연주할줄 안다며?홍대에서 세션도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준후는 물밀듯이 들어오는 질문공세를 약간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하나같이 죄다 남자인 신기한 동아리였다.물론 여자도 간간히 있었지만,거의 남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극악의 얼굴을 가진 이도 있었다.

“네.경영학과 1학년 강준후입니다.잘부탁드려요.”

준후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고,모두들 박수까지 치며 환영을 했다.대낮부터 맥주를 마셔서 일까?그들은 약간 흥분한 듯했다.

“뭐해?민지너도 인사해. “

준후는 그제서야 그녀의 이름이 민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몹시 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으로 준후쪽으로 돌아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최민지.관광학과 1학년이야.나이는 보통 1학년들보다 두살 많고.잘부탁해.”

“경영학과 강준후야.”

준후는 평상시처럼 인사를 했지만,이윽고 민지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뭐야.나 말놓으란 말은 안했는데?”

민지의 말에 주변은 킥킥 거리는 소리들로 가득찼다.준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어째서 말을 놓지 않으면 안되는데?같은 1학년인데.”

“나이가 많으니까.기본적인 도덕개념이 없구나 너?”

“도덕개념을 따질때는 아니지.뭘 하다가 2년늦게 왔는진 모르지만 학교를 늦게 온게 뭐가 자랑이라고 대우를 받으려고 하지?”

“뭐..뭐?”

민지는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다는 듯 준후를 바라보았다.주변에서는 ‘천하의 최민지에게 강적이 나타났구나’하며 낄낄 거린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능을 친것도 아닌거 같은데..”

“너..말다했어?그럼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건데?나이도 어린게 까불고 있어.”

“그래봐야 두살 차이일 뿐이지.요새 수능에는 치마속에 컨닝페이퍼 넣어갖고 오는것도 허용이 되는 모양이지?당당하게 온것도 아니고.그러면서 누나 대우받고 싶다면 니가 말한 도덕개념이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와.”

민지는 그저 입을 쩍 벌리며 황당하다는 듯이 준후를 바라볼 뿐이었고,주변에는 준후의 치마속 컨닝페이퍼 발언에 술렁거렸다.

“자자자!왜들이래!우리도 실력있는 신입부원이 왔는데!아 민지까지 둘이나 있잖아.얼른 가서 환영회 한번 하자.준후도 괜찮지?”

준후는 얼른 주선하며 나오는 승재의 말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민지는 잘록한 허리에 두 손을 올린채로,분함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준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외모 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강은하랑 비슷하구만.’

준후는 피식 웃어버렸다.처음에 저랬던 은하가,지금은 자신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당돌한 민지의 말에 기분이 상당히 나쁘긴 했지만 그는 왠지 피식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자자.다들 다음 수업 없지?학교앞 퓨즈호프에서 한잔빨아야지!”

다들 음악하는 사람들 아니랄까봐 술이 그렇게 좋은 것일까,모두들 환호하며 얼른 웃옷을 챙겨입었다.

자신을 향해 분한듯 씩씩거리는 민지의 시선을 느끼며,준후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뭔진 모르지만...오기를 잘했네. 재밌어 지겠어.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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