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오너 시즌 2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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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전세계에 알수 없는 무차별 폭격이 심화를 거듭해지는 가운데,인명피해는 나날이 늘
어가고 있습니다.각 단체의 조사속에서도,아직 원인규명이 되지 않아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화면속 앵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보다못한 윌리엄스가 티비를 꺼버렸기 때문이었다.
"보시는 대로 입니다.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지요."
같은 장소,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옛날에는 축제와도 같던 윌리엄스의 저택에 위치한 대회의장은 금새 숙연해 졌다.특히나 중간중간 자리를 비운 오너들의 빈자리에 분위기는 더욱더 무거웠다.오너들의 부재란 바로,크룬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이자리에 안계신 다른 모든 오너분들에게도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준은 윌리엄스의 가식어린 묵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어 버렸다.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무인도에서
자신의 살해를 주도했던 자가 윌리엄스인것은 분명해 보이지만,지금은 내분을 일으킬 타이밍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의 시선을 느꼈는지,윌리엄스 역시 준쪽을 바라보며 알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한쪽에서 서양인 오너 한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준역시 잘알고 있는 인물이었다.지난번 대회의에서 크리
스틴이라는 실버 나이트를 내세워 세라에게 도전했던 버나드라는 사람이었다.
"우선,팀을 짜서 움직여야 합니다."
"팀?"
"그렇습니다.일단 크룬들은 영국으로 몰려오고 있지요.아시다 시피 마나가 가장 충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뭉쳐서 온다면,우리역시 뭉쳐서 방어해야 합니다.다행히 차원의 문은 50년에 한번씩 열수 있다고 하니,
이번에 들이닥친 무리들만 막아낸다면,우리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부여되겠지요."
윌리엄스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단 두사람,차우와 준만이 뚱한 표정으로 투덜댈 뿐.
"모두들 잘 아시겠지만,저희에게는 비상시의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역시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차우와 준만이 "그게 뭔데?"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바로 오너협회장인 제가,전쟁시에 전두 지휘를 하도록 규약한 강령입니다."
준은 말도 안돼!라며 소리칠 뻔한것을 겨우 참아내었다.속이 시커먼 윌리엄스가 지휘자라니,모두 그의 명령에
따라 죽을수도 있다는 말이었다.마법사이니 당연히 머리는 좋겠지만,준은 자신을 해하려던 이에게 자신의 목숨
을 맡기기는 추호도 싫었다. 허나 분위기는 모두 수긍하는 쪽으로 흘러갔고,무엇보다 차우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준역시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더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바로 조를 편성하겠습니다."
윌리엄스가 리모컨을 누르자,실내 조명이 꺼지며 대형 스크린이 내려왔고,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처럼
화면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좌중들은 살짝 놀라기 시작했다.자신들의 사진,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페어리들의 정보가 너무나 상세하게 명
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전사한 오너들의 경우에는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우선,지금 오너들의 숫자는 기존의 3분의 1. 대략 30퍼센트 정도로 감소하였습니다.또한 예상되는 크룬의 숫
자역시 공교롭게도,지금의 오너와 페어리의 숫자와 일치합니다.무슨 뜻인지 알고 계신가요?"
"두당 한마리씩.....이라는 거군."
윌리엄스의 질문에 차우가 중얼거렸고,그를 보던 윌리엄스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우씨의 말대로 입니다.1인1킬.두당 배정된 크룬의 숫자는 그러합니다.허나,걔중에는 자신의 개체수를 임의
로 늘리는 능력을 가진자도 있고,소환술을 쓰는 자도 있으니,확실히 장담은 할수 없지요."
좌중은 금새 술렁이기 시작했다.생각외로 크룬의 숫자가 너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계속되는
전투로 그들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지금은 크룬들을 찾아다니며 공격하는것은 무리입니다.왜냐하면 크룬들은 비행마법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저희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죠.즉,그들이 도발이 일어나면 우리가 나가서 막아야 되는 형상으로 전투가 진행
된다는 뜻입니다."
준역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윌리엄스의 말대로라면,전투형 페어리가 아닌 리미역시 한명은 꼭 맡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었다.각종 무기를 연성하고 있는 리미이긴 하지만,세라나 유나,노아에 비해 타격력이 떨
어지니 약간의 위험성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제가 짠 포메이션 입니다."
윌리엄스의 말에 따라 화면이 바뀌었다.좌중들의 표정은 제각각으로 바뀌었고,특히 준의 표정은 기묘하게 바뀌
었다.
우선 제 1조는 J와 버나드였다.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2조의 인원이 약간은 묘했다.그것은 바로 2조의 인원이
차우와 준,그리고 사라케인 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속보이는 자식."
차우는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었다.J와 버나드는 친 윌리엄스파였고,반대로 2조는 반 윌리엄스 파인 자신과
준,사라케인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감시하던것이 들킨 모양이군."
사실 차우는 준보다도 일찍 윌리엄스의 검은 속을 알고 있었다.때문에 겉으로는 윌리엄스에게 고분고분 따라주
면서도 쉴새없이 그를 감시해 온것이었다.하지만,준,사라와 같은 조에 배정된 것을 보니,윌리엄스역시 차우가
자신을 미심쩍게 보는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지만,문제는 지휘관인 윌리엄스가 강적들을 상대할때 2조를 보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윌리엄스 쪽에서는 기막히게 손안대고 코푸는 격이 된다는 말이었다.만약 2조가 전멸한다면,윌리엄스
는 눈엣가시들을 한번에 처리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설사 전멸하지 않는다 해도 그만큼의 크룬들을 잡을수 있기
때문이다.
준역시 비스무레하게 나마 느끼고 있었다.대회의때 윌리엄스를 경계하라고 조언해준것이 바로 사라케인이 아니
던가.그녀의 금발머리 사이로 묘하게 떨리는 눈이 준과 마주쳤다.
"휴....저 자식 정말 끝까지 사람 속 뒤집히게 하는군."
허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규약과 협약에 따른 지휘관을 무시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연이어 윌리엄스가
속한 3조,그리고 다른 조들의 편성이 끝나고,임시 대회의는 종결되었다.
"모두,최대한의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지금 상황에선 웃긴 말이지만,페어리와의 잠자리를 갖는것도 좋은 전
력 보강의 기회가 되겠지요.비상시에는 제가 마법으로 경보음을 발동시키겠습니다.그리고 비상 스크롤은 홀에
있으니,모두 비상시에는 그것들을 챙길수 있도록 신경써 주시기 바랍니다.회의 마칩니다."
조명이 켜지고,오너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둘 회의실을 나섰다.오너계의 단짝 답게,준과 차우는 서로
가까이서 걸으며 투덜거렸다.
"형님.느꼈어요?저 구린내 풀풀나는 조편성."
"어.정말이야."
준은 동감한다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차우는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며 볼멘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2조는 죽음의 조가 되겠군요. 반 윌리엄스파로 모였으니,걍 뒤지러 가라 이거죠 뭐.우리에게는 강적들만
배정될걸요?"
준역시 고개를 끄덕였지만,예전처럼 두렵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자신이 강해진것도 있지만,무엇보다 자신의
페어리들은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준이었기 때문이었다.
"2조...뭔가 공통점이 보이네요."
뒤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준과 차우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그때처럼 드레스 차림이 아닌,가벼운 하
드레더를 걸친 사라케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오랜만이군요."
"그러네요 준씨.그리고 차우씨도."
차우는 살짝 목례를 했지만,별 관심없다는 표정이었다.사라역시 차우쪽은 바라보지 않고,준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강해졌다고 들었어요.준씨."
"과찬의 말씀을.사라케인씨야 말로 몰라보겠는데요."
그녀의 전신에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그리고 그녀의 옆구리에 있는 조그만 레이피어(찌르기를 주로하는 검)이
차여져 있는것을 본 준이 말했다.그의 말에 사라케인은 살짝 웃으며 기지개를 펴보였고,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우리 푹 쉬자구요.이제 생사를 함께할 전우인데다가...윌리엄스가 주는 적들이 결코 녹록하지 않을것 같으니
말이죠."
"네.편안한 휴식 되시길."
준은 정중하게 말을 하고는 지난번과 똑같은,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사라케인 역시 목례를 하고는 층계위로 총
총히 사라져버렸다.
"어라?넌 안가?"
"가면 뭐하게요.심심한데."
준은 차우가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자신을 졸졸 쫒아오는것이 느껴져 중얼거렸고,차우는 고개를 으쓱해 보이
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페어리들과의 뜨거운 휴식을 제가 방해할까봐 그런겁니까?"
"..........말을 말자 자식아."
차우는 씩 웃으며 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마자 침대위에 있던 네명의 페어리들이 일제히 일어
섰다.
"어라?너희들....내 방에서 뭐해?"
페어리들의 방과 오너의 방은 분리되어 있기에,자신의 방에 모여있는 세라,노아,유나와 리미를 보며 준은 의아
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저희들에게도 전달사항이 있을까 해서..."
리미의 말에 준은 과연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어느새 차우의 페어리들역시 차우의 뒤에 위치해 있었
다.
"흠...그러니까 말이지.."
준은 없는 말솜씨를 겨우겨우 짜내서,대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차우는 이때다 싶어 자신의 페어리
들에게도 준의 말을 듣게 했다.실로 놀라운 묻어가기가 아닐수 없었다.
"어라?근데 세라...너 안색이 왜 안좋아?"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을 전달한 준은 이상하게도 창백한 세라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데?뭔가 엄청 피곤해 보여."
"그냥...피로가 조금 쌓인거 뿐입니다."
준은 반사적으로 리미를 바라보았고,준 부대의 의무관을 맡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체술을
쓰는 블랙나이트이다 보니,전투와 장거리 워프에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거 아냐?"
준의 말에 유나와 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신도 피곤하다며 칭얼대었지만,이내 세라를 바라보는 준의 걱정
어린 표정에 모두 입술을 내밀며 무언의 질투를 보내왔다.
"흠....운기조식은 했나요 세라양?"
차우의 질문에 세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여전했다.차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이내 준의 어깨를 톡톡하고 쳤다.
"일단 심신을 릴렉스시켜야 할거 같네요."
"어떻게?"
"소소가 그쪽으로 약간의 재주가 있긴한데.."
"응?"
준은 반사적으로 차우의 뒤에 서있는,차이나풍의 옷에 위로 땋아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한 미녀에
게 시선이 갔다.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차우의 옆을 지키는 다크 포이즈너,소소였다.
"어떤...식으로?"
"아시다 시피 소소는 독공을 쓰지요.하지만 모든 독이 인체에 유해한것은 아닙니다.해독약역시 독으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알기쉽게 설명해 줄래?"
"그러니까,심신을 릴렉스 시키는 독공역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최면향이라고도 하지요."
"최면향?"
"저는...정말 괜찮습니다."
세라는 참다못해 둘의 대화에 끼어들며 손사레를 쳤다.
"아니야.너 정말 피곤해보여.전투에서 피로는 최대의 적이라고 니가 나에게 말한적도 있잖아?"
준의 말에 세라는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고,하얀 원피스를 입은 유나는 은발머리를 살짝 손으로
꼬으며 세라와 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우.그거 지금 해줄수 있어?"
"언제든지 오케이 입니다."
"부탁할게."
준의 말에 차우는 소소를 바라보았고,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작은 향수병을 하나 꺼내들었
다.작은 유리병에 담긴,짙푸른 에메랄드 빛 액체였다.
"여기...누워주세요."
소소의 말에 세라는 쭈뼛거리면서도 침대에 누웠다.소소는 다른 인물들이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뒤로 물러
서게 한후,코르크 마게를 열어 세라의 코 밑으로 살짝 흔들었다.그와 동시에,거짓말 처럼 세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깊은 무의식 상태로 빠져 있습니다."
소소의 보고에,준과 차우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고,준의 페어리들은 일순간 잠들어 버린 세라를 신기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응?근데 중간 중간 세라의 몸이 꿈틀대는건 왜그런거야?"
세라의 몸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준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블랙나이트 이기 때문에,아마 최면상태에서도 머릿속에는 수많은 전투가 오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세라는 주인님의 비급을 받았기 때문에,쉴새없이 수많은 구결들을 암기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죠."
소소는 무표정한 표정과는 달리,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와...세라표정이 평온해 졌어!"
노아의 외침에 리미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노아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유나
의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저 아이는....자는 동안에도 무술뿐이라니...블랙나이트는 다 그런건가."
준의 중얼거림에,차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는 제 3자인 차우가 봐도,정말 기사 본연의 모습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바로 그때,준의 눈이 커졌다.세라의 몸의 떨림이 격렬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한동안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준은 더더욱 당황했다.
"왜..왜저러는거야?"
차우역시 얼빵한 표정으로 소소를 바라보았고,소소역시 급격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저도 잘..."
급기야 세라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고,그녀의 몸의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다른 페어리들
역시 술렁이는 분위기로 바뀌었고,항상 침착한 리미 역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아냐...그럴리가..."
차우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가 고개를 저었다.마나를 운용하지 않는 최면상태에서 주화입마가 올리가 없었다.
게다가 반응역시 주화입마때처럼 혈맥이 요동치는 정도가 아니었다.다만,악몽을 꾸는 아이같은 모습일 뿐이었
다.
"소소...!"
차우의 외침에 그녀는 재빨리 세라의 곁으로 다가갔고,몇번의 수인을 맺었다.독향수를 쓰더라도,자신의 마법으
로 효능을 컨트롤 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건...."
"왜..왜그래?"
눈을 감고 있던 소소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고,준은 걱정되는 얼굴로 소소를 다그쳤다.소소는 잠시 망설이더
니,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가....최면상태에서 예전의 기억을....끄집어 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뭐...?"
소소의 말에 잠자코 있던 유나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그녀 뿐만이 아니라 차우와 준역시 놀라운 표정으로 소소
를 바라보았다.
"예전의......기억?"
페어리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마법에 의해 기억이 삭제되어있다는 것은 준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그렇기
에 더더욱 놀라운 것이었다.최면상태에서 무공의 구결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명상에 빠져있는 그 동안,세라는
삭제된 기억의 단편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당황하는 준을 보며 소소는 걱정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세라쪽으로 몸을 돌렸다.
"최면상태이니,괜히 기억을 끄집어 내서 정신적 데미지를 입지 않도록 해야합니다.옆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해
야지요."
"안정?"
"네.최면상태에서는...대화를 하는것만으로도 안정으로 이끌수 있습니다.모두...조용히 해주십시오."
소소는 수인을 맺어 최면향을 세라의 온몸에 퍼지게 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
했다.
"세라...지금...어떤 기억을 끄집어 낸 거죠?"
소소의 질문에,세라의 반짝이는 입술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세라와
소소를 바라보았다.
"예전....프로센에서.....예전의....기억..."
최면에 걸렸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소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아 주었
다. 마찬가지로 예전기억이 지워진 유나와 노아역시 침을 꼴깍하고 삼키며,평소 그녀들 답지 않게 세라의 모습
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어떤...기억인가요?"
"나는...나는..."
"진정해요 세라.당신은 블랙나이트니까요.그렇죠?"
"나는...블랙나이트. 주군을 지키는....수호자..."
"맞아요.세라는 블랙나이트에요. 그런데 어떤 기억이 세라를 힘들게 하는지...저에게 말해줄수 있나요?"
소소의 말은 나긋나긋했고,세라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말에 안정을 찾았다.
"저는......프로센의 어느 시골에서...."
"계속해요.듣고 있어요."
"숙부님과 함께....."
준도,차우도, 그리고 그들의 페어리인 유나,노아,리미,샤이역시 세라의 말을 경청했다.드문드문 겨우겨우 말을
잇던 세라는 조금씩 안정을 찾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고,좌중은 세라의 이야기에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계로 보낼 인재들을 구해오라-
프로센 궁중기사단장인 카터는 황명을 받고 전국각지를 누비고 있었다.중후한 수염이 멋드러진 그는,프로센이
자랑하는 수호 기사단의 단장이었고,왕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였다.
마족 크룬의 횡포는 막았지만,그들은 이계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후에 제 2의 프로센이 될지도 모를 이계
를 지켜야 하였기에,그들은 페어리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그 페어리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한 인재를 구해 오라
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인재라는 것이 어디 이마에 "인재"라고 써놓고 다니겠는가. 카터는 블랙 나이트가 될
페어리,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페어리가 될 인물을 찾는데 전국 방방 곡곡을 누벼야 했다.게다가 그 인재는 반
드시 소녀여야 한다는 제법 까다로운 조건마저 붙어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 들이란..."
카터는 실질적으로 그 안을 제안한 궁중마법사를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지금 프로센을 막아내는데 바쁜
이 시점에,이계까지 신경써야할 이유를 그는 도저히 납득할수 없었다.허나 별수 있겠는가.상부,그것도 황제의
명이니 따를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장님.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부하의 말에 카터는 별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고,즉각 야영준비를 명령했다.오늘로써 10일째. 카터일행은
"검에 소질이 있는 소녀"를 찾아 다니는 강행군을 계속했기에 꽤나 지쳐 있었다. 실력있는 기사들로만 구성된
일행이지만,역시나 무리는 무리였다.
"이 도시도...헛탕인가."
카터는 생애 처음으로 황제의 명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그는 품안에 갈무리해둔 잎담배를 꺼내어 씹으며
기지개를 켰다.
"응....?"
부하들이 야영준비를 하는것을 보던 카터는 문득 이상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그것은 그가 위치한 반대편 숲
속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
카터는 노련한 기사답게 몸을 낮추고 빠르게 풀숲으로 진입했다.그리고 이상스런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빼었다.
"저건...."
문득 이상한 기운의 정체를 본 카터는 자기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쥐었다. 돌도끼를 들고 있는 8마리의 트롤들
이 한명의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봐도 위험한 상황이었다.그 소녀는 너무나 가냘퍼 보였고,
반대로 트롤은 당장이라도 껌씹듯이 저 소녀를 집어 삼킬수 있는 무서운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아...아니!"
당장 뛰쳐나가 소녀를 구해주려던 가터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한것을 참아내었다.소녀는 작은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트롤들과 대처해 있었다.허나 그것은 그닥 놀랄 일이 아니었다. 놀라운 점은, 그 소녀가
나무 막대기 하나로 부리는 동작에 있었다.
트롤들이 괴성을 지르며 허접하지만 꽤나 무시무시한 돌도끼를 휘두르며 소녀를 덮쳤지만,소녀는 작은 상처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그녀의 막대기가 트롤들의 팔을 툭툭 치며 돌도끼의 공격경로를 모두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마....맙소사..."
터커는 입을 쩍하고 벌렸다.지금 저 소녀가 보여주는것은 마나를 느끼기전의 단계이기 때문이었다.일반적인
기사라면 10년이상 검을 잡아야 이루는 단계였다.즉,저 소녀는 트롤들의 공격을 한수 앞서 읽고,그것을 모두
느낄줄 안다는 뜻이었다.
터커는 소름이 돋았다.본디 소드마스터라 하면,자신처럼 중후한 중년이 되어서야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그리
고 지금 저 소녀의 경지는 자신이 10살때 검을 잡고,서른살이 되어서야 이루었던 경지였다.
"처...천재...."
터커는 몸서리가 처질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저정도의 재능이라면,체계적인 기사수업을 받게 되었을때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그 소녀는 10살이 체 되어보이지 않는 앳된 모습이었
다.잘만하면 20대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전무후무한 검후로 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크르르르!"
트롤들은 소녀한명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제풀에 지쳐 우르르 이동해 버렸다.게다가,소녀의 눈빛에는
살기마저 깃들어 있어,그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얘야."
터커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불렀고,소녀는 흠칫 놀라 터커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자신에게 올 동
안,터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뭐니?"
"누구세요?"
"아저씨는 황궁 기사단장이란다."
"기사..?"
터커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소녀는 조금씩 그 모습에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타이라...."
"타이라?남자아이 같은 이름이구나...검을 배운적 있니?"
"아니요."
터커는 예상한 일이지만 역시나 흠칫 놀라며, 소녀의 눈높이 맞춰 쪼그려 앉았다.
"너...검을 배워보지 않을래?황궁에서 말이야."
"검?"
"그래.검을 잡으면,명예로운 기사의 칭호를 받을수 있단다.아저씨에게...검을 배우지 않을래?"
터커는 타이라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물드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너희 집이 어디니?"
"저기 저쪽이요."
"부모님을 만날수 있을까?"
"부모님은 없어요.숙부님하고 살고 있는데..."
"그래?그럼 숙부님을 좀 보고 싶은데...안내해 줄래?"
타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왠지 오늘 처음 본 이 수염난 아저씨가 싫지 않았다.오히려,좋아질
것 같은 친근한 느낌마져 들어왔다.
"그래서요?그게...세라의 원래 이름인가요?"
소소의 질문에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준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처음 검을 잡게 된 계기를 이야기할
때의 세라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세라는 괴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
다.
"왜 그런가요?"
"황궁에...황궁에 가고부터...."
"이야기 해 볼래요?"
타이라는 터커를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처음에 반대하던 그녀의 숙부도,터커가 제시한 많은 황금에 금새 수
긍해 버린 것이었다.게다가 고아인 타이라를 속시원하게 처분할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유혹도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타이라가 생각한 것처럼 기사가 되는것은 멋있는 일이 아니었다.타이라 처럼 각지에서 모인 소녀들은 모두
매일 지독한 훈련에 시달려야만 했다.게다가 연습생끼리의 잡담역시 허용되지 않았고, 훈련이 끝나면 모두 각자
격리 되었다.타이라는 자신의 이름대신 "22호"라는 예명으로 불렸고,다른 연습생들역시 각자의 고유번호가 곧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같이 고생을 하다보니 그들과 꽤나 친해지게 된 것이었다. 그들중에서도 타이라는 월등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재능없는 자는 평생을 연마해도 느낄수 없는 마나를 감지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군계
일학마냥,타이라의 존재는 부각되기 시작했고,그러한 훈련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료가 있어 행복했던 타이라의 일상은 어느날 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했다.그 날. 그들을 가르치던 교관
이 모든 연습생들을 불러모아, 시험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수고했다.이제....최종시험을 치른다.이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기사의 칭호를 받으며,명예로운 기사도
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연습생들은 웅성거리지 않고,자신의 교관만을 바라보았다.허나,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타이라를 비롯한
그들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너희들중에 세명을 뽑는 시험이다.그것은 바로....너희들끼리의 전투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삼인이다."
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세라의 말이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다.세라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정해요 세라..."
"흑...흑.."
이번에는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세라의 우는 모습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세라는 강한
정신력을 지는 여전사가 아니었던가.
"소소.이제 그만해."
준은 그녀가 아픈기억을 끄집어 내며 슬퍼하는것에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왔다.그의 말에 소소는 잠시 고개를 끄
덕이고는 수인을 맺었고,세라는 거짓말 처럼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완벽하게 잠든것은 아닙니다.강제적으로 수면을 취하게 했을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그를 바라보던 차우는 그에게 살짝 귀뜸을 해주었다.
"오너인 형님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세라양을 달래주세요."
이번만큼은 유나와 노아도,어른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차우 일행역시 조용히 방을 나갔고,방안에는 준과 세
라만이 남았다.
"세라...."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준은 마음이 찡해져서는 세라의 고운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과거는 ....모두 잊어.고통스러운 거라면 기억해 내지마.중요한건....지금 현재야.너는 지금...니가 누군지
잘 알고 있잖아...그렇지?"
준은 눈물이 날것같은 느낌을 참으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그녀의 손
을 움켜쥔 준의 귓가에 아름다운 음성이 울렸다.
"네.....지금은....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블랙나이트 세라입니다..."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전세계에 알수 없는 무차별 폭격이 심화를 거듭해지는 가운데,인명피해는 나날이 늘
어가고 있습니다.각 단체의 조사속에서도,아직 원인규명이 되지 않아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화면속 앵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보다못한 윌리엄스가 티비를 꺼버렸기 때문이었다.
"보시는 대로 입니다.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지요."
같은 장소,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옛날에는 축제와도 같던 윌리엄스의 저택에 위치한 대회의장은 금새 숙연해 졌다.특히나 중간중간 자리를 비운 오너들의 빈자리에 분위기는 더욱더 무거웠다.오너들의 부재란 바로,크룬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이자리에 안계신 다른 모든 오너분들에게도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준은 윌리엄스의 가식어린 묵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어 버렸다.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무인도에서
자신의 살해를 주도했던 자가 윌리엄스인것은 분명해 보이지만,지금은 내분을 일으킬 타이밍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의 시선을 느꼈는지,윌리엄스 역시 준쪽을 바라보며 알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한쪽에서 서양인 오너 한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준역시 잘알고 있는 인물이었다.지난번 대회의에서 크리
스틴이라는 실버 나이트를 내세워 세라에게 도전했던 버나드라는 사람이었다.
"우선,팀을 짜서 움직여야 합니다."
"팀?"
"그렇습니다.일단 크룬들은 영국으로 몰려오고 있지요.아시다 시피 마나가 가장 충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뭉쳐서 온다면,우리역시 뭉쳐서 방어해야 합니다.다행히 차원의 문은 50년에 한번씩 열수 있다고 하니,
이번에 들이닥친 무리들만 막아낸다면,우리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부여되겠지요."
윌리엄스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단 두사람,차우와 준만이 뚱한 표정으로 투덜댈 뿐.
"모두들 잘 아시겠지만,저희에게는 비상시의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역시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차우와 준만이 "그게 뭔데?"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바로 오너협회장인 제가,전쟁시에 전두 지휘를 하도록 규약한 강령입니다."
준은 말도 안돼!라며 소리칠 뻔한것을 겨우 참아내었다.속이 시커먼 윌리엄스가 지휘자라니,모두 그의 명령에
따라 죽을수도 있다는 말이었다.마법사이니 당연히 머리는 좋겠지만,준은 자신을 해하려던 이에게 자신의 목숨
을 맡기기는 추호도 싫었다. 허나 분위기는 모두 수긍하는 쪽으로 흘러갔고,무엇보다 차우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준역시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더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바로 조를 편성하겠습니다."
윌리엄스가 리모컨을 누르자,실내 조명이 꺼지며 대형 스크린이 내려왔고,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처럼
화면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좌중들은 살짝 놀라기 시작했다.자신들의 사진,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페어리들의 정보가 너무나 상세하게 명
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전사한 오너들의 경우에는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우선,지금 오너들의 숫자는 기존의 3분의 1. 대략 30퍼센트 정도로 감소하였습니다.또한 예상되는 크룬의 숫
자역시 공교롭게도,지금의 오너와 페어리의 숫자와 일치합니다.무슨 뜻인지 알고 계신가요?"
"두당 한마리씩.....이라는 거군."
윌리엄스의 질문에 차우가 중얼거렸고,그를 보던 윌리엄스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우씨의 말대로 입니다.1인1킬.두당 배정된 크룬의 숫자는 그러합니다.허나,걔중에는 자신의 개체수를 임의
로 늘리는 능력을 가진자도 있고,소환술을 쓰는 자도 있으니,확실히 장담은 할수 없지요."
좌중은 금새 술렁이기 시작했다.생각외로 크룬의 숫자가 너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계속되는
전투로 그들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지금은 크룬들을 찾아다니며 공격하는것은 무리입니다.왜냐하면 크룬들은 비행마법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저희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죠.즉,그들이 도발이 일어나면 우리가 나가서 막아야 되는 형상으로 전투가 진행
된다는 뜻입니다."
준역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윌리엄스의 말대로라면,전투형 페어리가 아닌 리미역시 한명은 꼭 맡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었다.각종 무기를 연성하고 있는 리미이긴 하지만,세라나 유나,노아에 비해 타격력이 떨
어지니 약간의 위험성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제가 짠 포메이션 입니다."
윌리엄스의 말에 따라 화면이 바뀌었다.좌중들의 표정은 제각각으로 바뀌었고,특히 준의 표정은 기묘하게 바뀌
었다.
우선 제 1조는 J와 버나드였다.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2조의 인원이 약간은 묘했다.그것은 바로 2조의 인원이
차우와 준,그리고 사라케인 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속보이는 자식."
차우는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었다.J와 버나드는 친 윌리엄스파였고,반대로 2조는 반 윌리엄스 파인 자신과
준,사라케인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감시하던것이 들킨 모양이군."
사실 차우는 준보다도 일찍 윌리엄스의 검은 속을 알고 있었다.때문에 겉으로는 윌리엄스에게 고분고분 따라주
면서도 쉴새없이 그를 감시해 온것이었다.하지만,준,사라와 같은 조에 배정된 것을 보니,윌리엄스역시 차우가
자신을 미심쩍게 보는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지만,문제는 지휘관인 윌리엄스가 강적들을 상대할때 2조를 보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윌리엄스 쪽에서는 기막히게 손안대고 코푸는 격이 된다는 말이었다.만약 2조가 전멸한다면,윌리엄스
는 눈엣가시들을 한번에 처리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설사 전멸하지 않는다 해도 그만큼의 크룬들을 잡을수 있기
때문이다.
준역시 비스무레하게 나마 느끼고 있었다.대회의때 윌리엄스를 경계하라고 조언해준것이 바로 사라케인이 아니
던가.그녀의 금발머리 사이로 묘하게 떨리는 눈이 준과 마주쳤다.
"휴....저 자식 정말 끝까지 사람 속 뒤집히게 하는군."
허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규약과 협약에 따른 지휘관을 무시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연이어 윌리엄스가
속한 3조,그리고 다른 조들의 편성이 끝나고,임시 대회의는 종결되었다.
"모두,최대한의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지금 상황에선 웃긴 말이지만,페어리와의 잠자리를 갖는것도 좋은 전
력 보강의 기회가 되겠지요.비상시에는 제가 마법으로 경보음을 발동시키겠습니다.그리고 비상 스크롤은 홀에
있으니,모두 비상시에는 그것들을 챙길수 있도록 신경써 주시기 바랍니다.회의 마칩니다."
조명이 켜지고,오너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둘 회의실을 나섰다.오너계의 단짝 답게,준과 차우는 서로
가까이서 걸으며 투덜거렸다.
"형님.느꼈어요?저 구린내 풀풀나는 조편성."
"어.정말이야."
준은 동감한다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차우는 볼을 빠방하게 부풀리며 볼멘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2조는 죽음의 조가 되겠군요. 반 윌리엄스파로 모였으니,걍 뒤지러 가라 이거죠 뭐.우리에게는 강적들만
배정될걸요?"
준역시 고개를 끄덕였지만,예전처럼 두렵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자신이 강해진것도 있지만,무엇보다 자신의
페어리들은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준이었기 때문이었다.
"2조...뭔가 공통점이 보이네요."
뒤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준과 차우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그때처럼 드레스 차림이 아닌,가벼운 하
드레더를 걸친 사라케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오랜만이군요."
"그러네요 준씨.그리고 차우씨도."
차우는 살짝 목례를 했지만,별 관심없다는 표정이었다.사라역시 차우쪽은 바라보지 않고,준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강해졌다고 들었어요.준씨."
"과찬의 말씀을.사라케인씨야 말로 몰라보겠는데요."
그녀의 전신에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그리고 그녀의 옆구리에 있는 조그만 레이피어(찌르기를 주로하는 검)이
차여져 있는것을 본 준이 말했다.그의 말에 사라케인은 살짝 웃으며 기지개를 펴보였고,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우리 푹 쉬자구요.이제 생사를 함께할 전우인데다가...윌리엄스가 주는 적들이 결코 녹록하지 않을것 같으니
말이죠."
"네.편안한 휴식 되시길."
준은 정중하게 말을 하고는 지난번과 똑같은,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사라케인 역시 목례를 하고는 층계위로 총
총히 사라져버렸다.
"어라?넌 안가?"
"가면 뭐하게요.심심한데."
준은 차우가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자신을 졸졸 쫒아오는것이 느껴져 중얼거렸고,차우는 고개를 으쓱해 보이
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페어리들과의 뜨거운 휴식을 제가 방해할까봐 그런겁니까?"
"..........말을 말자 자식아."
차우는 씩 웃으며 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마자 침대위에 있던 네명의 페어리들이 일제히 일어
섰다.
"어라?너희들....내 방에서 뭐해?"
페어리들의 방과 오너의 방은 분리되어 있기에,자신의 방에 모여있는 세라,노아,유나와 리미를 보며 준은 의아
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저희들에게도 전달사항이 있을까 해서..."
리미의 말에 준은 과연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어느새 차우의 페어리들역시 차우의 뒤에 위치해 있었
다.
"흠...그러니까 말이지.."
준은 없는 말솜씨를 겨우겨우 짜내서,대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차우는 이때다 싶어 자신의 페어리
들에게도 준의 말을 듣게 했다.실로 놀라운 묻어가기가 아닐수 없었다.
"어라?근데 세라...너 안색이 왜 안좋아?"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을 전달한 준은 이상하게도 창백한 세라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데?뭔가 엄청 피곤해 보여."
"그냥...피로가 조금 쌓인거 뿐입니다."
준은 반사적으로 리미를 바라보았고,준 부대의 의무관을 맡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체술을
쓰는 블랙나이트이다 보니,전투와 장거리 워프에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거 아냐?"
준의 말에 유나와 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신도 피곤하다며 칭얼대었지만,이내 세라를 바라보는 준의 걱정
어린 표정에 모두 입술을 내밀며 무언의 질투를 보내왔다.
"흠....운기조식은 했나요 세라양?"
차우의 질문에 세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여전했다.차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이내 준의 어깨를 톡톡하고 쳤다.
"일단 심신을 릴렉스시켜야 할거 같네요."
"어떻게?"
"소소가 그쪽으로 약간의 재주가 있긴한데.."
"응?"
준은 반사적으로 차우의 뒤에 서있는,차이나풍의 옷에 위로 땋아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한 미녀에
게 시선이 갔다.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차우의 옆을 지키는 다크 포이즈너,소소였다.
"어떤...식으로?"
"아시다 시피 소소는 독공을 쓰지요.하지만 모든 독이 인체에 유해한것은 아닙니다.해독약역시 독으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알기쉽게 설명해 줄래?"
"그러니까,심신을 릴렉스 시키는 독공역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최면향이라고도 하지요."
"최면향?"
"저는...정말 괜찮습니다."
세라는 참다못해 둘의 대화에 끼어들며 손사레를 쳤다.
"아니야.너 정말 피곤해보여.전투에서 피로는 최대의 적이라고 니가 나에게 말한적도 있잖아?"
준의 말에 세라는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고,하얀 원피스를 입은 유나는 은발머리를 살짝 손으로
꼬으며 세라와 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우.그거 지금 해줄수 있어?"
"언제든지 오케이 입니다."
"부탁할게."
준의 말에 차우는 소소를 바라보았고,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작은 향수병을 하나 꺼내들었
다.작은 유리병에 담긴,짙푸른 에메랄드 빛 액체였다.
"여기...누워주세요."
소소의 말에 세라는 쭈뼛거리면서도 침대에 누웠다.소소는 다른 인물들이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뒤로 물러
서게 한후,코르크 마게를 열어 세라의 코 밑으로 살짝 흔들었다.그와 동시에,거짓말 처럼 세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깊은 무의식 상태로 빠져 있습니다."
소소의 보고에,준과 차우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고,준의 페어리들은 일순간 잠들어 버린 세라를 신기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응?근데 중간 중간 세라의 몸이 꿈틀대는건 왜그런거야?"
세라의 몸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준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블랙나이트 이기 때문에,아마 최면상태에서도 머릿속에는 수많은 전투가 오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세라는 주인님의 비급을 받았기 때문에,쉴새없이 수많은 구결들을 암기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죠."
소소는 무표정한 표정과는 달리,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와...세라표정이 평온해 졌어!"
노아의 외침에 리미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노아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유나
의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저 아이는....자는 동안에도 무술뿐이라니...블랙나이트는 다 그런건가."
준의 중얼거림에,차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는 제 3자인 차우가 봐도,정말 기사 본연의 모습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바로 그때,준의 눈이 커졌다.세라의 몸의 떨림이 격렬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한동안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준은 더더욱 당황했다.
"왜..왜저러는거야?"
차우역시 얼빵한 표정으로 소소를 바라보았고,소소역시 급격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저도 잘..."
급기야 세라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고,그녀의 몸의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다른 페어리들
역시 술렁이는 분위기로 바뀌었고,항상 침착한 리미 역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아냐...그럴리가..."
차우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가 고개를 저었다.마나를 운용하지 않는 최면상태에서 주화입마가 올리가 없었다.
게다가 반응역시 주화입마때처럼 혈맥이 요동치는 정도가 아니었다.다만,악몽을 꾸는 아이같은 모습일 뿐이었
다.
"소소...!"
차우의 외침에 그녀는 재빨리 세라의 곁으로 다가갔고,몇번의 수인을 맺었다.독향수를 쓰더라도,자신의 마법으
로 효능을 컨트롤 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건...."
"왜..왜그래?"
눈을 감고 있던 소소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고,준은 걱정되는 얼굴로 소소를 다그쳤다.소소는 잠시 망설이더
니,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가....최면상태에서 예전의 기억을....끄집어 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뭐...?"
소소의 말에 잠자코 있던 유나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그녀 뿐만이 아니라 차우와 준역시 놀라운 표정으로 소소
를 바라보았다.
"예전의......기억?"
페어리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마법에 의해 기억이 삭제되어있다는 것은 준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그렇기
에 더더욱 놀라운 것이었다.최면상태에서 무공의 구결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명상에 빠져있는 그 동안,세라는
삭제된 기억의 단편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당황하는 준을 보며 소소는 걱정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세라쪽으로 몸을 돌렸다.
"최면상태이니,괜히 기억을 끄집어 내서 정신적 데미지를 입지 않도록 해야합니다.옆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해
야지요."
"안정?"
"네.최면상태에서는...대화를 하는것만으로도 안정으로 이끌수 있습니다.모두...조용히 해주십시오."
소소는 수인을 맺어 최면향을 세라의 온몸에 퍼지게 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
했다.
"세라...지금...어떤 기억을 끄집어 낸 거죠?"
소소의 질문에,세라의 반짝이는 입술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세라와
소소를 바라보았다.
"예전....프로센에서.....예전의....기억..."
최면에 걸렸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소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아 주었
다. 마찬가지로 예전기억이 지워진 유나와 노아역시 침을 꼴깍하고 삼키며,평소 그녀들 답지 않게 세라의 모습
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어떤...기억인가요?"
"나는...나는..."
"진정해요 세라.당신은 블랙나이트니까요.그렇죠?"
"나는...블랙나이트. 주군을 지키는....수호자..."
"맞아요.세라는 블랙나이트에요. 그런데 어떤 기억이 세라를 힘들게 하는지...저에게 말해줄수 있나요?"
소소의 말은 나긋나긋했고,세라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말에 안정을 찾았다.
"저는......프로센의 어느 시골에서...."
"계속해요.듣고 있어요."
"숙부님과 함께....."
준도,차우도, 그리고 그들의 페어리인 유나,노아,리미,샤이역시 세라의 말을 경청했다.드문드문 겨우겨우 말을
잇던 세라는 조금씩 안정을 찾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고,좌중은 세라의 이야기에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계로 보낼 인재들을 구해오라-
프로센 궁중기사단장인 카터는 황명을 받고 전국각지를 누비고 있었다.중후한 수염이 멋드러진 그는,프로센이
자랑하는 수호 기사단의 단장이었고,왕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였다.
마족 크룬의 횡포는 막았지만,그들은 이계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후에 제 2의 프로센이 될지도 모를 이계
를 지켜야 하였기에,그들은 페어리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그 페어리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한 인재를 구해 오라
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인재라는 것이 어디 이마에 "인재"라고 써놓고 다니겠는가. 카터는 블랙 나이트가 될
페어리,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페어리가 될 인물을 찾는데 전국 방방 곡곡을 누벼야 했다.게다가 그 인재는 반
드시 소녀여야 한다는 제법 까다로운 조건마저 붙어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 들이란..."
카터는 실질적으로 그 안을 제안한 궁중마법사를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지금 프로센을 막아내는데 바쁜
이 시점에,이계까지 신경써야할 이유를 그는 도저히 납득할수 없었다.허나 별수 있겠는가.상부,그것도 황제의
명이니 따를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장님.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부하의 말에 카터는 별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고,즉각 야영준비를 명령했다.오늘로써 10일째. 카터일행은
"검에 소질이 있는 소녀"를 찾아 다니는 강행군을 계속했기에 꽤나 지쳐 있었다. 실력있는 기사들로만 구성된
일행이지만,역시나 무리는 무리였다.
"이 도시도...헛탕인가."
카터는 생애 처음으로 황제의 명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그는 품안에 갈무리해둔 잎담배를 꺼내어 씹으며
기지개를 켰다.
"응....?"
부하들이 야영준비를 하는것을 보던 카터는 문득 이상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그것은 그가 위치한 반대편 숲
속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
카터는 노련한 기사답게 몸을 낮추고 빠르게 풀숲으로 진입했다.그리고 이상스런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빼었다.
"저건...."
문득 이상한 기운의 정체를 본 카터는 자기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쥐었다. 돌도끼를 들고 있는 8마리의 트롤들
이 한명의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봐도 위험한 상황이었다.그 소녀는 너무나 가냘퍼 보였고,
반대로 트롤은 당장이라도 껌씹듯이 저 소녀를 집어 삼킬수 있는 무서운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아...아니!"
당장 뛰쳐나가 소녀를 구해주려던 가터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한것을 참아내었다.소녀는 작은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트롤들과 대처해 있었다.허나 그것은 그닥 놀랄 일이 아니었다. 놀라운 점은, 그 소녀가
나무 막대기 하나로 부리는 동작에 있었다.
트롤들이 괴성을 지르며 허접하지만 꽤나 무시무시한 돌도끼를 휘두르며 소녀를 덮쳤지만,소녀는 작은 상처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그녀의 막대기가 트롤들의 팔을 툭툭 치며 돌도끼의 공격경로를 모두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마....맙소사..."
터커는 입을 쩍하고 벌렸다.지금 저 소녀가 보여주는것은 마나를 느끼기전의 단계이기 때문이었다.일반적인
기사라면 10년이상 검을 잡아야 이루는 단계였다.즉,저 소녀는 트롤들의 공격을 한수 앞서 읽고,그것을 모두
느낄줄 안다는 뜻이었다.
터커는 소름이 돋았다.본디 소드마스터라 하면,자신처럼 중후한 중년이 되어서야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그리
고 지금 저 소녀의 경지는 자신이 10살때 검을 잡고,서른살이 되어서야 이루었던 경지였다.
"처...천재...."
터커는 몸서리가 처질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저정도의 재능이라면,체계적인 기사수업을 받게 되었을때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그 소녀는 10살이 체 되어보이지 않는 앳된 모습이었
다.잘만하면 20대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전무후무한 검후로 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크르르르!"
트롤들은 소녀한명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제풀에 지쳐 우르르 이동해 버렸다.게다가,소녀의 눈빛에는
살기마저 깃들어 있어,그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얘야."
터커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불렀고,소녀는 흠칫 놀라 터커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자신에게 올 동
안,터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뭐니?"
"누구세요?"
"아저씨는 황궁 기사단장이란다."
"기사..?"
터커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소녀는 조금씩 그 모습에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타이라...."
"타이라?남자아이 같은 이름이구나...검을 배운적 있니?"
"아니요."
터커는 예상한 일이지만 역시나 흠칫 놀라며, 소녀의 눈높이 맞춰 쪼그려 앉았다.
"너...검을 배워보지 않을래?황궁에서 말이야."
"검?"
"그래.검을 잡으면,명예로운 기사의 칭호를 받을수 있단다.아저씨에게...검을 배우지 않을래?"
터커는 타이라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물드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너희 집이 어디니?"
"저기 저쪽이요."
"부모님을 만날수 있을까?"
"부모님은 없어요.숙부님하고 살고 있는데..."
"그래?그럼 숙부님을 좀 보고 싶은데...안내해 줄래?"
타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왠지 오늘 처음 본 이 수염난 아저씨가 싫지 않았다.오히려,좋아질
것 같은 친근한 느낌마져 들어왔다.
"그래서요?그게...세라의 원래 이름인가요?"
소소의 질문에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준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처음 검을 잡게 된 계기를 이야기할
때의 세라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세라는 괴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
다.
"왜 그런가요?"
"황궁에...황궁에 가고부터...."
"이야기 해 볼래요?"
타이라는 터커를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처음에 반대하던 그녀의 숙부도,터커가 제시한 많은 황금에 금새 수
긍해 버린 것이었다.게다가 고아인 타이라를 속시원하게 처분할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유혹도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타이라가 생각한 것처럼 기사가 되는것은 멋있는 일이 아니었다.타이라 처럼 각지에서 모인 소녀들은 모두
매일 지독한 훈련에 시달려야만 했다.게다가 연습생끼리의 잡담역시 허용되지 않았고, 훈련이 끝나면 모두 각자
격리 되었다.타이라는 자신의 이름대신 "22호"라는 예명으로 불렸고,다른 연습생들역시 각자의 고유번호가 곧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같이 고생을 하다보니 그들과 꽤나 친해지게 된 것이었다. 그들중에서도 타이라는 월등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재능없는 자는 평생을 연마해도 느낄수 없는 마나를 감지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군계
일학마냥,타이라의 존재는 부각되기 시작했고,그러한 훈련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료가 있어 행복했던 타이라의 일상은 어느날 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했다.그 날. 그들을 가르치던 교관
이 모든 연습생들을 불러모아, 시험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수고했다.이제....최종시험을 치른다.이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기사의 칭호를 받으며,명예로운 기사도
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연습생들은 웅성거리지 않고,자신의 교관만을 바라보았다.허나,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타이라를 비롯한
그들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너희들중에 세명을 뽑는 시험이다.그것은 바로....너희들끼리의 전투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삼인이다."
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세라의 말이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다.세라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정해요 세라..."
"흑...흑.."
이번에는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세라의 우는 모습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세라는 강한
정신력을 지는 여전사가 아니었던가.
"소소.이제 그만해."
준은 그녀가 아픈기억을 끄집어 내며 슬퍼하는것에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왔다.그의 말에 소소는 잠시 고개를 끄
덕이고는 수인을 맺었고,세라는 거짓말 처럼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완벽하게 잠든것은 아닙니다.강제적으로 수면을 취하게 했을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그를 바라보던 차우는 그에게 살짝 귀뜸을 해주었다.
"오너인 형님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세라양을 달래주세요."
이번만큼은 유나와 노아도,어른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차우 일행역시 조용히 방을 나갔고,방안에는 준과 세
라만이 남았다.
"세라...."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준은 마음이 찡해져서는 세라의 고운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과거는 ....모두 잊어.고통스러운 거라면 기억해 내지마.중요한건....지금 현재야.너는 지금...니가 누군지
잘 알고 있잖아...그렇지?"
준은 눈물이 날것같은 느낌을 참으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그녀의 손
을 움켜쥔 준의 귓가에 아름다운 음성이 울렸다.
"네.....지금은....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블랙나이트 세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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