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귀천사] 제Ⅱ장 청순한 그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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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귀천사(色鬼天使)∮
제Ⅱ장 청순한 그녀 (2) - 김 현
**(원편집자 주) 본 글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이책>에 있으며, 관련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재편집자 주) 2001년 02월에 하이텔 XDOOR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난 것일까, 나는 날 듯이 뛰어가서 사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유도를 하듯 그를 바닥에 내다 꽂았다. 산뜻한 그림이었다. 영화로 치자면 노 NG 오케이 컷이라고 할 만했다.
나는 행여나 벌어질지도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내가 들고 있던 칼부터 챙겼다.
칼을 들고 휙 돌아서는데, 그 자식 동작도 빠르지, 어느새 저만치 줄행랑을 놓고 있었다.
눈썹이 휘날리게 도망치는 그를 나는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나미는 완전히 기가 질린 모습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예쁜 애들은 떨고 있어도 예쁘구만.
내가 앞으로 다가서자 그녀가 갑자기 악악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칼을 향해 있었다.
얘가 왜 이래?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잖아.
나는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뺨을 힘껏 한 대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고개가 꺾여 돌아가고 비명이 멎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 봐요, 정신 차려! 이제 끝났어!"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 대문이 열리면서 누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줌마였는데, 그녀의 어머니인 듯싶었다.
"나미야! 너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니?"
아줌마는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빚 주고 뺨 맞는 짝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저 계집애는 왜 저렇게 울고만 있는 거야?
자초지종을 설명해줘야 할 거 아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혔다.
나는 더럽게 뻘쭘한 상태로 남겨졌다. 황량한 바람 한 줄기가 발 밑을 훑고 지나갔다. 뭐가 이래?
"킬킬킬! 완전히 닭 쫓던 개 꼴이로구만. 처량하다, 처량해."
지니가 다가서며 느물거렸다. 나는 인상을 구기며 그에게 소리쳤다.
"쓰풀! 네가 알아서 다 한다고 그래놓고 이게 무슨 꼴이야? 스토리가 왜 이래?"
"좀 기다려 봐. 일단 사람이 진정을 해야 할 거 아냐?"
"기다린다고 무슨 수가 나냐? 아까 걔 엄마가 나 쳐다보는 눈빛 못 봤어? 날 무슨 송충이 보듯이 하더라구.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둘 걸 그랬나 봐. 에이, 씨이! 그만 포기할래. 내 주제에 무슨 탤런트씩이나… 가자!"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지니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니까 그러네. 이게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잖아. 인내심 좀 가져 봐."
"상황이 그렇지가 못 하대도 그러네. 이건 완전히 물 건너간 거라구. 보고도 몰라?"
그렇게 지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대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움찔해서 돌아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다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느 틈에 지니는 모습을 감추었다.
"저,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으시면 좀 들어오시겠어요?"
어라, 이게 웬 극적인 반전이란 말인가. 순간 지니가 말했던 전화위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빠르게 관통하고 있었다.
나는 군말없이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나미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그 쪽이 우리 애 목숨을 구해주셨다구요?
전 그것도 모르고, 은인을 강도로 오해할 뻔했지 뭐예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따님은 좀 괜찮은가요?"
"지금 제 방에서 샤워하고 있어요. 좀 있다 내려올 거예요."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나미를 기다렸다. 그녀의 어머니가 커피를 타 왔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는 집안을 훑어보았다.
집의 규모도 규모지만 집기나 가구 따위가 한 눈에 봐도 상당히 고급임을 알 수 있었다. 자칫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주나미가 내려온 건 10여 분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반바지에 박스 티를 입고 화장기가 가신 깔끔한 모습이었다.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그녀의 어머니가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인사도 못 드리고…"
그녀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이제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훨씬 더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일이 돼 가고 있는 건가.
"혹시 그냥 가버리셨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마침 계셔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동네에 사시는 분이세요?"
"아뇨,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때마침 눈에 띄어서 다행이었어요."
생각지도 않았던 거짓말이 술술 풀려 나왔다. 곧이곧대로 실토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은근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녀의 시선을 되받았다.
내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왔는지 알면 기절초풍할 테지. 이런 의협의 기사 같은 건 나랑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데 말야.
나는 낯이 좀 간지러웠다.
"혹시… 제가 누군지는 알고 계세요?"
순간 나는 번개처럼 짱구를 굴렸다. 긍정과 부정,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할 것인가.
나는 결국 후자 쪽을 택했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아, 그랬군요. 모르고 계셨군요."
실망인지 감탄인지 구분이 모호한 표정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한층 더 끈끈해지고 있었다.
나는 짐짓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여자 세상>이라는 드라마 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드라마 같은 건 잘 보지 않습니다. TV 같은 걸 볼 시간도 별로 없고…"
"네에… 실은 제가 거기에 출연해요. 제 이름은 주나미구요, 탤런트예요.
아직 신인이라서 잘 모르실 수도 있을 거예요. 전 그 쪽이 절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물론 나는 그녀의 신상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지만 연신 아, 그렇군요, 하는 소리를 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리얼한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
"탤런트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쩐지 상당한 미인이신 것같더라니….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셨군요?"
"네? 그게 무슨…?"
"아, 아까 그 사람 말입니다. 스토커,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내가 정곡을 찌른 듯했다.
"실은… 얼마 전부터 집으로 정체 불명의 전화가 걸려오고, 이상한 소포 같은 게 배달되고 있었어요.
오늘 웬 낯선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었다고 엄마가 얘기하더라구요."
지니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목구멍이 간질간질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상한 소포라면…?"
"말씀 드리기가 좀 뭣하지만, 제 얼굴에다 여자 나체를 합성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여자 속옷을 발기발기 찢은 뒤에 피 같은 걸 묻혀서 보낸 적도 있어요."
"끔찍하군요. 혹시 원한 같은 걸 산 적이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 정신병자의 소행이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점찍어 둔 애를 다른 놈이 먼저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자 묘한 질투심마저 일었다.
물론 어택의 방식은 다르긴 하지만.
"사실 저도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라서 너무너무 놀랐어요. 그 쪽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전화위복을 입은 쪽은 내가 아니라 그녀가 되는 셈인가.
어쨌든 나는 연예인의 고충 따위를 주접거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 때쯤에 난 그녀를 꼬드겨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 뭐야? 설마 어쭙잖은 연애 감정 따위를 느끼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네 본분에 충실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곧 죽어도 그 앨 가질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아 둬.
어디선가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신했다가 깨어나듯 이 나는 몸을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
하여간 산통 깨는 덴 귀신이라니까.
하지만 나는 어느 시점에서 찌르고 들어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만약 지니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시점에서 어쭙잖게 수작을 부렸다간 개쪽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 입을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미리 알아서 챙겨주면 좋겠지만 그에게선 아직까지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대충 전을 접으라는 소린가.
"도와주셔서 고맙고, 보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혼자 갈등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그녀가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묘했다. 말하자면 뭔가 일이 되어갈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지니가 드디어 발동을 건 걸까.
"괜찮습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요. 전 이만…."
나는 일단 상황을 관망하기 위해 슬쩍 발을 뺐다. 그러자 그녀가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대시를 해왔다.
"아뇨, 그러시면 제가 미안해서 안 되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릴게요."
"글쎄요, 별로 원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인 걸요.
제가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일종의 연막전술이었다.
물고기가 바늘을 목구멍 속으로 완전히 삼켜 넘길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수월하게 낚싯대를 걷어올릴 수 있는 법이다.
섣불리 낚아채다간 제풀에 놀라 도망가버릴지 모른다.
"저 그럼… 제 방 구경이라도 좀 하실래요?"
그녀가 바늘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하지만 겉으론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기는 나 같은 사람이 해야 되는 건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연예인들은 원래 사생활을 잘 공개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기자도 아닌데 뭐 어때요? 그럼 제 방으로 올라가 보실래요?"
나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괘념치 않기로 했다. 뭔 일이야 있으려고.
2층엔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그녀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방문을 열기 전에 그녀는 잠깐 머뭇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식으로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피워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 방에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건 이번에 처음이에요. 그래서 좀 떨려요.
좀 지저분할지 모르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구? 하지만 나는 짐짓 한 감동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려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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