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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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애정비사 2번째 이야기 3권은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가지고 계신분 있으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종내 그런저런 연유로 인해 도서관에 앉았어도 책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차라리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졸지에
나만 한심해진 기분이었다.
딱히 정란이를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여자애를 떠
올릴 때면 신입생 환영회 날의 그 난처했던 정사 - 다른 이
들의 이목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성욕을 밝혀대던 - 가 떠
올라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남들은 굴러들어온 횡재라
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영 탐탁지 않았던 게 사실었으니 말이
다.
어쨌든 정란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타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그녀는 단짝 형준이도 없이
단 혼자였다.
"이제 나가요, 창희 오빠."
그녀에게선 간단하게 그 말만이 나왔다. 다음 일은 마치정
해진 수순처럼 착착 맞춰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얼떨떨히 동행한 곳은 정문 쪽이 아닌 후문께의 한적
한 까페였다. 새로 개업했는지 손님조차 드물었는데, 창가를
따라 나란히 앉는 자리가 마련된 그곳에 정란이는 선선히 자
리를 잡고 있었다.
약간은 예상 외였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잡을 줄 알았으나 그녀는 볼 테면 보란 듯 척하니 다
리마저 꼬아대고 있었다.
"혀, 형준이는 어쩌구…?"
"걔요? 집에 가라고 했어요."
마치 형준이가 반드시 자기 명령에 따르리란 듯 자신만만
한 어투였다. 머쓱해진 나는 주문한 음료수가 나오자 분위기
를 바꾸기 위해 짐짓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할 말… 오빠한테 할 말이 뭐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물음에 문득 날카롭게 돌
아보는 정란이였다. 뜨악할 만큼 눈썹을 찡그린 표정, 이어
튀어나온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머리카락이 즉각 곤두서고
말았다.
"창희 오빠, 오빠 일요일날 다른 여자들하고 같이 잤죠?"
뭐라구? 떡 벌어진 내 턱이 덜커덕 바닥에 구르는 것 같았
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황당하여 눈만 휘둥그래
졌다. 일요일이라니 어느 일요일, 그러자 정란이는 실로 꼼짝
못할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저 이번 주, 아니 지난 주 일요일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
갔었어요. 거기서 애들이랑 심심해서 나이트에 갔었죠. 강변
에 있는 호텔 나이트로요."
나이트 클럽? 그제야 어렴풋 감이 잡힌 내 이마 위로 서늘
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머리 속으로 당장 아찔한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현옥이와 현선이…!
"전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죠. 거기는 강남에서도 잘 나간
다는 애들만 찾는 곳인데, 창희 오빠 같은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이럴 수가. 하기야 나도 대충 분위기 짐작은 했었다. 외모
만 보아도 괜찮은 집 자식이란 티가 팍팍 풍기는 정란이였으
니 초등학교 동창회 따위도 그런 곳에서 치룰 만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힐난이 틀림 없어보이는 정란
이의 말투였다. 아니나 다르랴 정란이의 시비(是非)는 나와
함께 있던 그 두 아가씨에 대해 집중되고 있었다.
"아주 잘 노는 기집애들 둘이랑 같이 있으시던데요? 모델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빵빵한 애들이랑."
나는 아프게 무릎을 쳐댔다. 행여 현옥이나 현선이와 함께
있는 광경을 아는 이에게 들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한 노릇이었다.
그 대목에서 정란이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마저 쳐대고 있
었다. 한 마디로 꽤나 삐진 듯한 인상, 나로서는 그 질투의
반응이 상당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두 여자하고 번갈아 블루스 추는 것도 봤어요. 부
킹이라도 했나보죠? 그리고 걔들 데리고 딴 데로 나갔죠…?"
아마도 그녀는 내가 그 두 여자와 일행이었음은 못 본 것
같았다.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그 직후 러브호텔까지 동행한
걸 얘기하자면 가뜩이나 골치가 욱신거려야 하지만, 대체 그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길래 이렇게 추궁해대나.
"오빠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심지어 쏘아보던 시선까지 외면하는 정란이였다. 누가 보아
도 이건 영락없이 연인 사이에 다투는 모습이었다.
"걔들하고 같이 잤죠? 누구랑 잤어요? 얼굴 예쁜 애요? 몸
매 잘 빠졌던 애요?"
아뿔사. 그녀는 아주 단단히 착각 - 실상은 그게 진실이기
는 해도 - 하고 있었다. 뜨악한 나는 어설프게 변명하려 들었
다.
"아, 아냐, 임마! 걔들은 그냥 치, 친구야…!"
"친구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도 여잔데 척보면 보통 사
이가 아니란 거 다 알아요. 그렇게 주물럭대며 춤 추다가 같
이 나가놓구, 그런 사이가 친구라고요?"
할 말이 없다. 정란이의 말이 하나 틀린 것 없기 때문이었
다. 애초부터 같이 자라고 소개받은 현선이, 그런데 그 한 사
람도 아니고 주선자 격인 현옥이까지 둘 다 한꺼번에 건드렸
지 않은가. 그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은 사실이었
다.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보세요…!"
"어휴… 아, 아니라니까. 걔들은 진짜 치, 친구…"
당연히 혀가 꼬여야 했다. 뭐라 말하리오. 정확히 해두자면
친구 사이란 그녀들 둘일 뿐 나와 그녀들이 아니었다. 나는
엄연히 소개팅이란 명목으로 어울렸지 않은가.
소개팅을 했다고 밝히기도 뭐하고, 몽땅 친구라 우기기도
뭐했다. 그저 식은땀만 비질거리는데도 정란이의 추궁은 멈추
지 않고 있었다.
"누가 지금 친구 사이 물어요? 전 오빠가 그 여자애들이랑
잤는지 안 잤는지, 그걸 묻는 거라구요!"
"그게 그, 그러니까…"
이것 참, 거짓말 못하는 성격에 딱 잡아뗄 만한 방도는 도
무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말만 더듬던 내 혀로는 간신히
그녀가 이러는 이유만을 묻는 게 가능했다.
"하, 하지만 정란아. 내가… 내가 그 여자들이랑 잤는지 안
잤는지 너한테 그게…"
너한테 뭐가 중요하냐,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
게 물어야 옳으리라. 그러나 순간 돌아본 정란이의 시선에 나
는 즉각 뜨끔거리고 말았다. 그녀는 흰 동자까지 드러내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째려보는 중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무, 무슨 얘기야?"
"오빠 저한테 뭐라고 그러셨어요? 애인 얘기까지 들려주면
서 자기 성욕은 자기가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
았나요? 근데 오빠는 어떻게 그런 날라리 같은 기집애들하고
같이 잘 수 있어요?"
어휴, 입술만 깨물었다. 비로소 그녀가 내는 신경질이 어떤
연유 탓인지 짐작되고 있었다.
응당 양심에 가책 받을 이야기였다. 변명한다면야 얼마든
변명하겠으나 장황히 자초지종을 털어놓지도 못하거니와 털
어놓는다 해도 믿어줄 리는 만무였다.
"제 따귀까지 때리며 참으라고 했었죠? 전 솔직히 말할 수
있어요. 저 그 때 오빠 얘기 듣고, 지금까지 아무하고도 같이
안 잤어요. 성욕이 생겨도 참았다구요…!"
재차 눈이 휘둥그래졌다. 성욕이란 노골적 단어까지 서슴없
이 동원해대는 정란이였다. 그렇게까지 듣고 나니 이미 진작
에 말문을 잃어버려야 하는 나란 놈이었다.
섬찟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녀와 똑바로
눈길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내 충고만 상기하며 조신하게
굴었다는 그녀이건만, 정작 그랬어야 할 나는 정반대의 일만
저지르고 다닌 셈이었다.
좌우간 그때였다. 둘 데 없는 시선만 창 밖으로 굴려대던
나는 순간 묘한 상황을 발견하고 있었다.
바깥 거리로 지나다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
차피 대형 유리창을 마주한 정란이와 나의 자리, 기이하게도
그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우리 쪽을 꼬박꼬박 흘끔거리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정란이를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하도 유심히 눈총을 받는지라 처음엔 그녀나 내가 아는 사
람들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시선의 방향을 살핀 나는 순식간
에 질색을 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겠는가. 바로 정란이의 하반신이었
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고 있었다. 훤히 뚫린 창밖을 향해
앉은 정란이는 전혀 다리를 오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니 도리어 십여 센티 이상 떡하니 무릎 사이를 벌려대고 있
었다.
길가보다 높게 놓여 있는 의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그리 키
가 큰 편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으랴. 유리창을 통해 마치 보
란 듯 그 허벅지 사이가 들여다보일 게 뻔했다. 그리고 허벅
지 중간께에도 못 미치는 그녀의 짧은치마는 결코 그 앞을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 장정란…! 다리 좀 오무려. 바깥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
아!"
나는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 허둥거렸다. 그럼에도 흘끗 자
신을 돌아본 정란이는 막무가내였다.
"칫, 왜요? 저한테 또 훈계하시는 거에요?"
"이, 임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돌아앉아라, 응? 아니면
저기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던가…! 일부러 다른 사람들 눈요
기 시켜주는 거냐?"
그랬다. 조신하지 못한 실수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도발인지
조차 분간이 안 되었다. 다른 경우 같으면 버럭 화라도 낼 일
이었지만, 지금껏 나도 모를 미안함에 시달렸던지라 내 목소
리는 어느새 애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볼 테면 보라 그래요, 자…!"
흐익, 찰라 나는 소스라치기까지 해야 했다. 정란이는 아예
볼 테면 봐라라는 투로 한 번 더 그 아슬아슬한 허벅지 사이
를 쫙 벌려대기까지 하고 있었다.
지난 번 신입생 환영회 날이 떠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스타킹 한 겹 신지 않은 치마 속, 고로 그녀가 벌인 행동은
스스로 팬티만 달랑 가려진 사타구니를 정면으로 내보이는
것과 하등 진배가 없었다. 흡사 노출증 환자 같은 짓거리였
다.
"너, 너 자꾸 이러면…!"
내 입장에서는 화를 내야 마땅하나 미처 그럴 새도 없었다.
직후 그녀도 심했다 생각했는지 어느 유명한 영화 장면처럼
다리를 높게 꼬고 있었다.
허벅지가 절반 이상 드러날 게 분명한 포즈였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란이는 자기가
한 행동이 내게 충분히 위협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양
연달아 나를 질타해댔다.
"오빠도 우습네요? 오빠는 아무하고나 할 것 다 하면서 제
가 아무한테나 치마 속 내보이는 건 싫으신가 보죠?"
"너, 너 이 녀석…!"
"그래요, 전 오빠를 믿었어요. 제가 처음부터 그랬었죠? 오
빠처럼 마음 맞는 사람 만나기도 어렵구, 그래서 오빠에게는
제 성욕이나 성감대도 툭 터놓을 수 있었다구요."
뭐라 한 마디 반발하려던 나는 끝내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제법 진지한 투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그녀였다.
"전 정말 그랬어요. 오빠 생각이 나서 형준이더러도 여러
번 찾아보라고 시켰지만… 그럴 때마다 오빠가 피하는 걸 보
고 저도 참았단 말이에요."
형준이? 나는 그제야 얘기 좀 하자며 나를 찾아다니던 녀
석을 상기해냈다.
어휴, 한심한 자식. 애꿎게 그를 원망해야 했다. 뭔가 어렴
풋하게 앞뒤가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다녔
다니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 만큼 정란이에게 홀딱 반
해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저, 정란아. 그렇지 않아.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나는
말야, 그 날… 정말 걔들이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야. 먼저
그 여자애들이 나한테…"
먼저 나한테 같이 자자고 그랬다구,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짜낸 변명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이내 제지 당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빠가 먼저 그런 게 아니라구요?"
"그, 그래."
"그럼 오빠 그 날 그 여자애들이랑 자기는 잤네요?"
젠장, 결국 그런 말이 되나. 유도심문에 당한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단호한 음성과 눈초리가
돌아오고 있었다. 내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숨 끝에 내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시인의 표현이었
다. 그러자 금세 흥, 하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그러면서… 실망이에요, 오빠."
실망이라. 반면에 나는 망신이었다. 급기야 한참 나이 어린
후배 여자애에게 민망한 개인적 성생활까지 들키고 만 판국
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도망치고픈 시정일 따름이었다.
어디서도 구원의 손길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찔한 그
무렵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구세주가 나타나고 있었다. 고개를 막 떨구자
마자 예기치 못한 벨 소리가 나를 화들짝 놀래키고 있었다.
삐리리릭, 가방 속에서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창희니? 난데…"
허겁지겁 받아든 그 전화는 누구이건 간에 반가운 목소리
였다.
건너편의 음성은 다름 아닌 명희 선배였다. 웬일인지 그녀
가 퍽 급하게도 나를 찾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 있니? 누구랑 같이 있는 거야?"
"저, 저요? 지금 정란… 아니 호, 혼자 있어요. 왜 그러세
요?"
"그래? 있잖아, 조금 전에 선영이네 부모님이 전화하셨어."
선영이 누나 부모님? 어제 귀국하셨다더니 벌써? 얼핏 손
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명희 선배는 어느덧 퇴근해 집에 들어
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정란이의 찌푸린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바싹 목소리를 낮추어야 했다.
"여, 여기 도착하신 거래요?"
"그러신가봐. 그래서 얘긴데 그 분들이…"
"아, 아녀요.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해주세요. 저 지금 들어
갈 거거든요…!"
그럼 그럴래, 명희 선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기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핑계로라도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할 성싶었다.
"며, 명희 선배야… 알지? 오빠가 그 선배 집에서 자취하는
거."
괜시리 호들갑스런 설명까지 덧붙였지만 정란이는 고개조
차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반문해대는 그녀였다.
"창희 오빠 핸드폰 언제부터 갖고 계셨어요?"
"어… 아, 아직 이삼 주도 안됐어."
마치 핸드폰이 있었으면서도 왜 자신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떨떠름하게 둘러대자 정란이는 문득 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여 꺼내고 있었다. 조그만 다이어리였
다. 그곳에 뭔가를 적은 그녀가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았다.
"미, 미안해. 나 지금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요. 그럼 대신 오빠 핸드폰 번호나 불러줘요."
그걸 꼭 알고 싶니 - 맘이야 그랬어도 도저히 거절할 분위
기가 아니었다. 나는 체념하듯 번호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 * *
잘 가라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도망치듯 카페를 나선 나
는 후닥닥 집으로 돌아왔다. 뭔가 족쇄라도 채워지듯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그보다 선영이 누나 부모님이 나를 찾으셨다는
자체가 훨씬 중대한 일이었다.
"빨리도 왔네? 아까 누구랑 같이 있는 것 아녔어?"
"아, 아니에요. 혼자… 혼자 있었어요."
들어서는 내게 대뜸 물어오는 명희 선배였으나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했다. 정란이, 적어도 그녀가 알기에 정란이는 형
준이와 CC(캠퍼스 커플)였으니 당연히 나와는 전혀 관련 없
는 단순한 여자 후배로 남아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 그나저나 아까 무슨 얘기하시려던 거였죠? 선영이 누
나 부모님이 왜…?"
"별 건 아니야. 왜 엊그제 얘기했었잖니. 이제 귀국하셨으니
까 너하고 좀 만나고 싶으시대."
그런가. 별 것 아닌 수도 있고, 반대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명희 선배 쯤이야 딸의 가장 친한 친구라지만 내게
있어서 그 분들은 사랑하는 애인의 부모였다. 그것도 자주 뵙
지도 못한지라 그만큼 익숙치않은.
"전화번호를 하나 남기셨어. 이번에 아주 들어오신 거라구,
조만간 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들어 가신다던데."
어차피 이번 학기가 끝나고 여름이면 완전히 돌아올 선영
이 누나였으므로 별반 신기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건네준 메
모지를 받아든 나는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뭔지는 몰라도 나와 만나시겠다니 긴한 얘기를 하시리라는
짐작이 들고 있었다. 마른침이 꼴깍였다. 목소리만일지라도
실로 몇 달만에 다시 뵙기에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네, 여보세요…?"
제일 처음 들려온 목소리는 밝은 중년 부인이었다. 바로 선
영이 누나의 어머니, 다소 엄한 인상의 아버님에 비해 그간
자애로운 인상으로 기억되는 분이셨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창희입니다."
"어머, 창희 학생? 오랜만이에요…!"
"예, 어머님. 그간 건강하셨지요?"
"호호, 그럼요… 어때요, 학교는 잘 다니고 있지? 복학은 했
수?"
"아닙니다. 복학은 아직… 다음 학기에 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잠깐만요. 우리 바깥양반이 좀 바꿔달라네요."
어디든 그렇겠지만 여자 애인의 아버지란 언제나 남자 쪽
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상대인 법이다. 나는 들리지 않게 헛기
침을 해댔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나는 건너편 목소리가 바뀌자 한 번 더 훅, 숨을 들이마셨
다. 일단은 의례적인 인사말이 맨 먼저였다.
"창희 군인가? 오랜만일세."
"예. 귀국하시는 데 나가 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예정보다 좀 빨라져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아
직 복학도 안 했다구?"
"예, 이것저것 공부를 좀 해보려고…"
"음… 그래? 어쨌거나 그렇다면 자네 요새 바쁘지는 않은
가?"
"아닙니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습니다."
"잘되었군. 그럼 며칠 후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않겠나?"
저녁이라. 물론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선영이 누나도 없는 마당에 독대를 청하신다… 나로
서는 적잖이 긴장될 이야기였다.
"뭐 창희 군이 달리 부담 가질 건 없고… 우리 안사람이랑
얘기해서 어디 시내 쪽에서 좀 만나도록 하지."
창희 군. 애초에 다소 단도직입적인 분인 줄은 알았지만 아
버님은 묘하게도 굳이 내게 딱딱한 호칭을 붙이고 계셨다.
"뭐라고 말씀들 하시니?"
선영이 누나 부모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오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은 응당 명희 선배였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마치 안 되면 엿듣기라도 할 양 귀가 쫑긋
한 인상이었고, 나는 별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여
야 했다.
"뭐 그냥… 저녁식사나 같이 하시자는 얘기였어요."
"그래…?"
그래… 명희 선배의 혼잣말은 묘하게도 꼬리를 끌고 있었
다. 자칫 근심이라도 담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냐. 걱정은 무슨… 그 분들이 선영이도 아직 없는데
귀국하자마자 널 만나시겠다고 하길래."
그런가. 그 말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어도 실상은 내가 궁금해지는 문제였
다. 아무리 외동딸의 애인이고, 또 오랜 기간의 외유 끝에 보
게 되는 사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만남을 서두른다는 것은
저으기 의아할 일이었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모르는 나로서는 괜시리 찜찜한 기분이
었다.
* * *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뵙기로 한 약속은 금요일이었지만,
나는 그 무렵까지도 별반 복잡한 사정은 아니었다.
회사 - 그렇게 부르기는 좀 뭣해도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S
금융 - 에서는 며칠간 일상적인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속한
곳은 통계 파트였기에 상담 파트가 직접 자료를 넘겨줘야만
일감이 생기는 입장이었고, 그 자료라는 것은 며칠 더 흘러야
쌓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나로서는 차차 일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
만 그 한가로운 와중에 적잖이 관심이 쏠리는 한 사람이 있
을 따름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미스 한이었다. 아직은 바쁘지 않은
통계팀에 비해 상담팀 쪽은 박진숙 과장의 독려를 받아야 했
는데, 그래서인지 한윤정씨와 마주칠 기회는 그다지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식권이 나오는 회사 식당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그
녀였어도 번번이 어색한 노릇이었다. 애써 피하는 건지 뭔지,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던가 아니면 아주 간단히 목례
를 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하여 나중에는 내가 먼저 머쓱해지고 말았다. 어찌 보면 당
연했다. 나야 그 불미스럽던 팬티 훔쳐보기가 송구해서라도
신경이 쓰였지만 미스 한에게 있어 나란 놈은 자신이 치마속,
아니 입고 있던 팬티까지 홀랑 내보인 남자 아닌가. 그러니
모종의 거부감이 없으리라고는 장담 못할 터였다.
게다가 한윤정씨가 기억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정말
로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알록달록한 꽃무늬 팬티가 연
상되는 탓에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기어이 남자의 심리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녀가 오늘은 무슨 팬티를 입었을까, 그때 앙증맞던 하얀 색
꽃무늬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까봐 골치가 아픈 지경이었
다.
좌우간 금요일 오후에는 긴장된 마음으로 퇴근을 해야 했
다. 아무래도 양복을 입고 가야지 않겠니 - 그 날 아침 명희
선배가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티셔츠와 면바지 중
에서 제일 새것으로만 갖춰 입고 나왔다. 가지고 있는 양복도
별로 없거니와 공연히 눈총을 받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창희야… 너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헌데 그런 내 심정을 들킨 것은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서였
다. 막 일어서던 옆자리에서 물어온 목소리, 바로 지현이였다.
돌아보니 그녀가 가방을 챙기다 말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
고 있었다.
"나? 나 말이야?"
"응. 시간 좀 있니?"
"어… 그, 그게… 왜?"
나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쉽사리 그렇다고
말하기가 주저되고 있었다.
선영이 누나에게 있어서는 잠시나마 연적(戀敵)이 되었을지
도 모르는 그녀였다. 그런 여자애 앞에서 쓸데 없는 이야기까
지 하기는 왠지 싫었다.
"저… 오늘 금요일이잖아. 내일은 토요일이구. 이번 주 아르
바이트도 끝났는데 괜찮으면 오늘 나랑…"
"그, 근데 나 이따가 약속 있는데…"
오늘 나랑, 공교롭게스리 그 뒷말을 듣기도 전에 대답이 튀
어나왔다. 그러자 일순 지현이의 표정이 딱 멈춰지고 있었다.
"약속… 있어?"
"으응. 미, 미안해."
진짜로 미안했다. 분위기로 보아 내게 약속이 없다면 자기
와 따로 뭔가를 함께 하자는 눈치일 것 같았다.
결국 지현이로서는 정면에서 제안을 거절당한 꼴이었다. 졸
지에 멋쩍어진 그녀의 얼굴은 누구와 약속이 있느냐 묻고 싶
은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그마저 물을 수 없다는 걸 잘 아
는지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펼 뿐이었다.
"무슨… 무슨 일 있어, 지현아?"
"아, 아냐. 나중에 얘기할게."
내가 괜한 관심을 보였어도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지 그
녀는 잠자코 나보다도 앞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인사를 건네도 그저 머쓱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
덕이는 뒷모습이었다.
문득 옛날과 달리 예쁘장하게 커트된 그녀의 머리결이 눈
에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거지? 그녀가 나를 잔뜩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 중 깨끗한 것들을 골라 입고 나왔다 하더라도,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음식점에 들어서며 나
는 당장 양복을 입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시내에서 가까운 한 대형 중식(中式) 레스토랑
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떨떠름히 놀랄 수밖에 없
었다.
거의 호텔 로비만큼이나 큰 그 곳 입구에선 멀쑥한 턱시도
를 입은 웨이터들과 짧은치마 차림의 웨이트레스들이 늘어서
있다가 일제히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혀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예약이 있으십니까?"
예약이라.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당혹스러운
눈을 껌벅였다. 레스토랑은커녕 일개 중국집 수준으로만 생각
했던 것부터 실수인 때문이었다.
"저… 그, 그게 아마도…"
"손님을 찾으십니까? 예약이 없으시다면 일반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물어오는 사람은 중년의 나이로 보아 캡틴이나 지배인인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들어 다른 여직원을 부르려는 제스츄어
를 취하자 나로서는 엉겁결에 그렇다고 시인을 해야만 했다.
"아, 아닌데요.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여기서 찾아보시죠."
두꺼운 방문록 따위를 한 권 펼쳐보이고 있는 그였다. 아마
도 예약 손님 명단인 듯,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도 얼떨떨해지
고 말았다.
수십 명은 족히 넘음직한 이름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었
다. 순간 어떤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선영이 누나의 아버님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또는 어머님 이
름으로 되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분들의 성함
부터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헐. 이건 실수가 아니라 도의상의 문제였다. 자기 애인
의 부모님 함자조차 모르고 있다니, 만약 우리 아버지라도 아
셨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힘겹게 식은땀을 비질거리던 나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아
는 이름을 하나 찾아냈다. 박선영, 선영이 누나의 이름이 적
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내 짐작을 확인시켜줄 가족모임
이라는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여, 여기 있군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여기 손님 좀 안내해 드리세요.
가족실 3번 룸으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손님 이쪽입니다, 곁에 선 웨이
트레스가 앞장을 서고 있었다.
한 마디로 무릎을 칠 노릇이었다. 감사하게도 어른들이 선
영이 누나의 이름을 써주셨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볼 뻔한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당장 그 분들의 이름부터 달달 외워야 할
성싶었다. 나잇살이나 먹어놓고도 이런 예의상 절차를 미리
계산해두지 못한 것은 아무리 봐도 완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애인의 부모님을 모시는 자리 - 그나마 내가 마련하지도 못
한 자리 - 가 어때야 한다는 것 따위는 분명 배워뒀어야 할
것이었다.
어쨌든 안내 받은 룸 앞에서 나는 깊게 쉼호흡을 했다. 실
로 오랜만에 뵙는 분들, 마땅히 적지 않은 긴장이 들고 있었
다.
"음… 왔군. 오래만일세."
웨이트레스가 노크와 함께 열어준 문 안에는 선영이 누나
의 부모님들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셨다. 들어서자마자
나는 최대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송구하게도 먼저 일어서
시며 악수를 청해오시는 아버님이었다.
"아유, 오랜만이에요. 창희 학생."
"안녕하셨습니까? 두 분 모두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근엄한 얼굴의 아버님과는 반대로 선영이 누나의 어머님은
화사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인상이었다. 인사를 드리는 목소리
가 그닥 떨리지 않는 것만이 내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자, 앉지. 반주로 맥주 한 잔하겠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호화롭게 꾸몄어도 작은 룸 안, 거기에 응당 어려울 수밖에
없는 어른들 - 나는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 가득 어색함만이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창희 학생 군대 제대했다더니 아주 늠름해졌네
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맞아… 그렇구먼. 자네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전방에서 수색대대에 있었습니다."
"그래. 남자는 그런 데에서 군대 생활을 해야지."
묘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님이었지만 어쩐지 그
리 믿음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만의 착각일까. 따
지고 보면 같은 남자로서 얼마간 자랑삼을 노릇임에도 그 분
의 눈초리는 썩 탐탁치않게 나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희창이 양복이라도 빌려입고 올 걸. 재차 후회가 들어야 했
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도 알리지 않았다는 게 상기되고
있었다.
좌우간 미리 음식을 주문해 놓으셨는지 그 동안 음식접시
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맥주도 몇 병 날라져 왔고, 아버님은
손수 그 병을 따 술을 따라주고 계셨다.
"자, 한 잔 받게."
잔을 받고 마주 따라드리는 내 손 끝이 바르르 떨렸다. 기
실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들께 받는 술잔은 이번이 처음인 셈
이었다. 그런 내 긴장을 아는지 어머님이 몸소 화제를 이끌고
계셨다.
"참, 명희한테 들으니 창희 학생 요즘 어디 인턴사원으로
나간다면서요?"
"인턴 사원… 그,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단순한 아르바이
트입니다."
"아르바이트? 정식 직원은 아니구?"
정식 직원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 신분이다… 그 말은 되
물으신 것은 아버님 쪽이었다. 그렇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슬그머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 분의 눈썹이 작게 찡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달라
곤혹스럽기 그지 없는 물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자네 학교 마치려면 얼마나 남았다고 했던가…?"
"예, 아직… 아직 1년 반이나 2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렇군… 그럼 창희 군은 졸업하면 무슨 계획을 갖고 있
지?"
졸업 후의 계획? 나는 일순 당황하여 말문을 잃었다.
정녕 내가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보았던가. 그 질문의 의도
란 뻔했다. 당신의 딸,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은 딸의 상대자
로서 나를 가늠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즉 배우자감으로서 말
이다.
혹시 가지고 계신분 있으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종내 그런저런 연유로 인해 도서관에 앉았어도 책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차라리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졸지에
나만 한심해진 기분이었다.
딱히 정란이를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여자애를 떠
올릴 때면 신입생 환영회 날의 그 난처했던 정사 - 다른 이
들의 이목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성욕을 밝혀대던 - 가 떠
올라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남들은 굴러들어온 횡재라
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영 탐탁지 않았던 게 사실었으니 말이
다.
어쨌든 정란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타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그녀는 단짝 형준이도 없이
단 혼자였다.
"이제 나가요, 창희 오빠."
그녀에게선 간단하게 그 말만이 나왔다. 다음 일은 마치정
해진 수순처럼 착착 맞춰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얼떨떨히 동행한 곳은 정문 쪽이 아닌 후문께의 한적
한 까페였다. 새로 개업했는지 손님조차 드물었는데, 창가를
따라 나란히 앉는 자리가 마련된 그곳에 정란이는 선선히 자
리를 잡고 있었다.
약간은 예상 외였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잡을 줄 알았으나 그녀는 볼 테면 보란 듯 척하니 다
리마저 꼬아대고 있었다.
"혀, 형준이는 어쩌구…?"
"걔요? 집에 가라고 했어요."
마치 형준이가 반드시 자기 명령에 따르리란 듯 자신만만
한 어투였다. 머쓱해진 나는 주문한 음료수가 나오자 분위기
를 바꾸기 위해 짐짓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할 말… 오빠한테 할 말이 뭐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물음에 문득 날카롭게 돌
아보는 정란이였다. 뜨악할 만큼 눈썹을 찡그린 표정, 이어
튀어나온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머리카락이 즉각 곤두서고
말았다.
"창희 오빠, 오빠 일요일날 다른 여자들하고 같이 잤죠?"
뭐라구? 떡 벌어진 내 턱이 덜커덕 바닥에 구르는 것 같았
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황당하여 눈만 휘둥그래
졌다. 일요일이라니 어느 일요일, 그러자 정란이는 실로 꼼짝
못할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저 이번 주, 아니 지난 주 일요일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
갔었어요. 거기서 애들이랑 심심해서 나이트에 갔었죠. 강변
에 있는 호텔 나이트로요."
나이트 클럽? 그제야 어렴풋 감이 잡힌 내 이마 위로 서늘
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머리 속으로 당장 아찔한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현옥이와 현선이…!
"전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죠. 거기는 강남에서도 잘 나간
다는 애들만 찾는 곳인데, 창희 오빠 같은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이럴 수가. 하기야 나도 대충 분위기 짐작은 했었다. 외모
만 보아도 괜찮은 집 자식이란 티가 팍팍 풍기는 정란이였으
니 초등학교 동창회 따위도 그런 곳에서 치룰 만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힐난이 틀림 없어보이는 정란
이의 말투였다. 아니나 다르랴 정란이의 시비(是非)는 나와
함께 있던 그 두 아가씨에 대해 집중되고 있었다.
"아주 잘 노는 기집애들 둘이랑 같이 있으시던데요? 모델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빵빵한 애들이랑."
나는 아프게 무릎을 쳐댔다. 행여 현옥이나 현선이와 함께
있는 광경을 아는 이에게 들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한 노릇이었다.
그 대목에서 정란이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마저 쳐대고 있
었다. 한 마디로 꽤나 삐진 듯한 인상, 나로서는 그 질투의
반응이 상당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두 여자하고 번갈아 블루스 추는 것도 봤어요. 부
킹이라도 했나보죠? 그리고 걔들 데리고 딴 데로 나갔죠…?"
아마도 그녀는 내가 그 두 여자와 일행이었음은 못 본 것
같았다.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그 직후 러브호텔까지 동행한
걸 얘기하자면 가뜩이나 골치가 욱신거려야 하지만, 대체 그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길래 이렇게 추궁해대나.
"오빠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심지어 쏘아보던 시선까지 외면하는 정란이였다. 누가 보아
도 이건 영락없이 연인 사이에 다투는 모습이었다.
"걔들하고 같이 잤죠? 누구랑 잤어요? 얼굴 예쁜 애요? 몸
매 잘 빠졌던 애요?"
아뿔사. 그녀는 아주 단단히 착각 - 실상은 그게 진실이기
는 해도 - 하고 있었다. 뜨악한 나는 어설프게 변명하려 들었
다.
"아, 아냐, 임마! 걔들은 그냥 치, 친구야…!"
"친구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도 여잔데 척보면 보통 사
이가 아니란 거 다 알아요. 그렇게 주물럭대며 춤 추다가 같
이 나가놓구, 그런 사이가 친구라고요?"
할 말이 없다. 정란이의 말이 하나 틀린 것 없기 때문이었
다. 애초부터 같이 자라고 소개받은 현선이, 그런데 그 한 사
람도 아니고 주선자 격인 현옥이까지 둘 다 한꺼번에 건드렸
지 않은가. 그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은 사실이었
다.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보세요…!"
"어휴… 아, 아니라니까. 걔들은 진짜 치, 친구…"
당연히 혀가 꼬여야 했다. 뭐라 말하리오. 정확히 해두자면
친구 사이란 그녀들 둘일 뿐 나와 그녀들이 아니었다. 나는
엄연히 소개팅이란 명목으로 어울렸지 않은가.
소개팅을 했다고 밝히기도 뭐하고, 몽땅 친구라 우기기도
뭐했다. 그저 식은땀만 비질거리는데도 정란이의 추궁은 멈추
지 않고 있었다.
"누가 지금 친구 사이 물어요? 전 오빠가 그 여자애들이랑
잤는지 안 잤는지, 그걸 묻는 거라구요!"
"그게 그, 그러니까…"
이것 참, 거짓말 못하는 성격에 딱 잡아뗄 만한 방도는 도
무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말만 더듬던 내 혀로는 간신히
그녀가 이러는 이유만을 묻는 게 가능했다.
"하, 하지만 정란아. 내가… 내가 그 여자들이랑 잤는지 안
잤는지 너한테 그게…"
너한테 뭐가 중요하냐,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
게 물어야 옳으리라. 그러나 순간 돌아본 정란이의 시선에 나
는 즉각 뜨끔거리고 말았다. 그녀는 흰 동자까지 드러내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째려보는 중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무, 무슨 얘기야?"
"오빠 저한테 뭐라고 그러셨어요? 애인 얘기까지 들려주면
서 자기 성욕은 자기가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
았나요? 근데 오빠는 어떻게 그런 날라리 같은 기집애들하고
같이 잘 수 있어요?"
어휴, 입술만 깨물었다. 비로소 그녀가 내는 신경질이 어떤
연유 탓인지 짐작되고 있었다.
응당 양심에 가책 받을 이야기였다. 변명한다면야 얼마든
변명하겠으나 장황히 자초지종을 털어놓지도 못하거니와 털
어놓는다 해도 믿어줄 리는 만무였다.
"제 따귀까지 때리며 참으라고 했었죠? 전 솔직히 말할 수
있어요. 저 그 때 오빠 얘기 듣고, 지금까지 아무하고도 같이
안 잤어요. 성욕이 생겨도 참았다구요…!"
재차 눈이 휘둥그래졌다. 성욕이란 노골적 단어까지 서슴없
이 동원해대는 정란이였다. 그렇게까지 듣고 나니 이미 진작
에 말문을 잃어버려야 하는 나란 놈이었다.
섬찟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녀와 똑바로
눈길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내 충고만 상기하며 조신하게
굴었다는 그녀이건만, 정작 그랬어야 할 나는 정반대의 일만
저지르고 다닌 셈이었다.
좌우간 그때였다. 둘 데 없는 시선만 창 밖으로 굴려대던
나는 순간 묘한 상황을 발견하고 있었다.
바깥 거리로 지나다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
차피 대형 유리창을 마주한 정란이와 나의 자리, 기이하게도
그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우리 쪽을 꼬박꼬박 흘끔거리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정란이를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하도 유심히 눈총을 받는지라 처음엔 그녀나 내가 아는 사
람들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시선의 방향을 살핀 나는 순식간
에 질색을 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었겠는가. 바로 정란이의 하반신이었
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고 있었다. 훤히 뚫린 창밖을 향해
앉은 정란이는 전혀 다리를 오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니 도리어 십여 센티 이상 떡하니 무릎 사이를 벌려대고 있
었다.
길가보다 높게 놓여 있는 의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그리 키
가 큰 편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으랴. 유리창을 통해 마치 보
란 듯 그 허벅지 사이가 들여다보일 게 뻔했다. 그리고 허벅
지 중간께에도 못 미치는 그녀의 짧은치마는 결코 그 앞을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 장정란…! 다리 좀 오무려. 바깥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
아!"
나는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 허둥거렸다. 그럼에도 흘끗 자
신을 돌아본 정란이는 막무가내였다.
"칫, 왜요? 저한테 또 훈계하시는 거에요?"
"이, 임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돌아앉아라, 응? 아니면
저기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던가…! 일부러 다른 사람들 눈요
기 시켜주는 거냐?"
그랬다. 조신하지 못한 실수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도발인지
조차 분간이 안 되었다. 다른 경우 같으면 버럭 화라도 낼 일
이었지만, 지금껏 나도 모를 미안함에 시달렸던지라 내 목소
리는 어느새 애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볼 테면 보라 그래요, 자…!"
흐익, 찰라 나는 소스라치기까지 해야 했다. 정란이는 아예
볼 테면 봐라라는 투로 한 번 더 그 아슬아슬한 허벅지 사이
를 쫙 벌려대기까지 하고 있었다.
지난 번 신입생 환영회 날이 떠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스타킹 한 겹 신지 않은 치마 속, 고로 그녀가 벌인 행동은
스스로 팬티만 달랑 가려진 사타구니를 정면으로 내보이는
것과 하등 진배가 없었다. 흡사 노출증 환자 같은 짓거리였
다.
"너, 너 자꾸 이러면…!"
내 입장에서는 화를 내야 마땅하나 미처 그럴 새도 없었다.
직후 그녀도 심했다 생각했는지 어느 유명한 영화 장면처럼
다리를 높게 꼬고 있었다.
허벅지가 절반 이상 드러날 게 분명한 포즈였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란이는 자기가
한 행동이 내게 충분히 위협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양
연달아 나를 질타해댔다.
"오빠도 우습네요? 오빠는 아무하고나 할 것 다 하면서 제
가 아무한테나 치마 속 내보이는 건 싫으신가 보죠?"
"너, 너 이 녀석…!"
"그래요, 전 오빠를 믿었어요. 제가 처음부터 그랬었죠? 오
빠처럼 마음 맞는 사람 만나기도 어렵구, 그래서 오빠에게는
제 성욕이나 성감대도 툭 터놓을 수 있었다구요."
뭐라 한 마디 반발하려던 나는 끝내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제법 진지한 투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그녀였다.
"전 정말 그랬어요. 오빠 생각이 나서 형준이더러도 여러
번 찾아보라고 시켰지만… 그럴 때마다 오빠가 피하는 걸 보
고 저도 참았단 말이에요."
형준이? 나는 그제야 얘기 좀 하자며 나를 찾아다니던 녀
석을 상기해냈다.
어휴, 한심한 자식. 애꿎게 그를 원망해야 했다. 뭔가 어렴
풋하게 앞뒤가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다녔
다니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 만큼 정란이에게 홀딱 반
해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저, 정란아. 그렇지 않아.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나는
말야, 그 날… 정말 걔들이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야. 먼저
그 여자애들이 나한테…"
먼저 나한테 같이 자자고 그랬다구,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짜낸 변명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이내 제지 당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빠가 먼저 그런 게 아니라구요?"
"그, 그래."
"그럼 오빠 그 날 그 여자애들이랑 자기는 잤네요?"
젠장, 결국 그런 말이 되나. 유도심문에 당한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단호한 음성과 눈초리가
돌아오고 있었다. 내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숨 끝에 내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시인의 표현이었
다. 그러자 금세 흥, 하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그러면서… 실망이에요, 오빠."
실망이라. 반면에 나는 망신이었다. 급기야 한참 나이 어린
후배 여자애에게 민망한 개인적 성생활까지 들키고 만 판국
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도망치고픈 시정일 따름이었다.
어디서도 구원의 손길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찔한 그
무렵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구세주가 나타나고 있었다. 고개를 막 떨구자
마자 예기치 못한 벨 소리가 나를 화들짝 놀래키고 있었다.
삐리리릭, 가방 속에서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창희니? 난데…"
허겁지겁 받아든 그 전화는 누구이건 간에 반가운 목소리
였다.
건너편의 음성은 다름 아닌 명희 선배였다. 웬일인지 그녀
가 퍽 급하게도 나를 찾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 있니? 누구랑 같이 있는 거야?"
"저, 저요? 지금 정란… 아니 호, 혼자 있어요. 왜 그러세
요?"
"그래? 있잖아, 조금 전에 선영이네 부모님이 전화하셨어."
선영이 누나 부모님? 어제 귀국하셨다더니 벌써? 얼핏 손
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명희 선배는 어느덧 퇴근해 집에 들어
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정란이의 찌푸린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바싹 목소리를 낮추어야 했다.
"여, 여기 도착하신 거래요?"
"그러신가봐. 그래서 얘긴데 그 분들이…"
"아, 아녀요.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해주세요. 저 지금 들어
갈 거거든요…!"
그럼 그럴래, 명희 선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기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핑계로라도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할 성싶었다.
"며, 명희 선배야… 알지? 오빠가 그 선배 집에서 자취하는
거."
괜시리 호들갑스런 설명까지 덧붙였지만 정란이는 고개조
차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반문해대는 그녀였다.
"창희 오빠 핸드폰 언제부터 갖고 계셨어요?"
"어… 아, 아직 이삼 주도 안됐어."
마치 핸드폰이 있었으면서도 왜 자신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떨떠름하게 둘러대자 정란이는 문득 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여 꺼내고 있었다. 조그만 다이어리였
다. 그곳에 뭔가를 적은 그녀가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았다.
"미, 미안해. 나 지금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요. 그럼 대신 오빠 핸드폰 번호나 불러줘요."
그걸 꼭 알고 싶니 - 맘이야 그랬어도 도저히 거절할 분위
기가 아니었다. 나는 체념하듯 번호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 * *
잘 가라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도망치듯 카페를 나선 나
는 후닥닥 집으로 돌아왔다. 뭔가 족쇄라도 채워지듯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그보다 선영이 누나 부모님이 나를 찾으셨다는
자체가 훨씬 중대한 일이었다.
"빨리도 왔네? 아까 누구랑 같이 있는 것 아녔어?"
"아, 아니에요. 혼자… 혼자 있었어요."
들어서는 내게 대뜸 물어오는 명희 선배였으나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했다. 정란이, 적어도 그녀가 알기에 정란이는 형
준이와 CC(캠퍼스 커플)였으니 당연히 나와는 전혀 관련 없
는 단순한 여자 후배로 남아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 그나저나 아까 무슨 얘기하시려던 거였죠? 선영이 누
나 부모님이 왜…?"
"별 건 아니야. 왜 엊그제 얘기했었잖니. 이제 귀국하셨으니
까 너하고 좀 만나고 싶으시대."
그런가. 별 것 아닌 수도 있고, 반대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명희 선배 쯤이야 딸의 가장 친한 친구라지만 내게
있어서 그 분들은 사랑하는 애인의 부모였다. 그것도 자주 뵙
지도 못한지라 그만큼 익숙치않은.
"전화번호를 하나 남기셨어. 이번에 아주 들어오신 거라구,
조만간 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들어 가신다던데."
어차피 이번 학기가 끝나고 여름이면 완전히 돌아올 선영
이 누나였으므로 별반 신기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건네준 메
모지를 받아든 나는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뭔지는 몰라도 나와 만나시겠다니 긴한 얘기를 하시리라는
짐작이 들고 있었다. 마른침이 꼴깍였다. 목소리만일지라도
실로 몇 달만에 다시 뵙기에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네, 여보세요…?"
제일 처음 들려온 목소리는 밝은 중년 부인이었다. 바로 선
영이 누나의 어머니, 다소 엄한 인상의 아버님에 비해 그간
자애로운 인상으로 기억되는 분이셨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창희입니다."
"어머, 창희 학생? 오랜만이에요…!"
"예, 어머님. 그간 건강하셨지요?"
"호호, 그럼요… 어때요, 학교는 잘 다니고 있지? 복학은 했
수?"
"아닙니다. 복학은 아직… 다음 학기에 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잠깐만요. 우리 바깥양반이 좀 바꿔달라네요."
어디든 그렇겠지만 여자 애인의 아버지란 언제나 남자 쪽
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상대인 법이다. 나는 들리지 않게 헛기
침을 해댔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나는 건너편 목소리가 바뀌자 한 번 더 훅, 숨을 들이마셨
다. 일단은 의례적인 인사말이 맨 먼저였다.
"창희 군인가? 오랜만일세."
"예. 귀국하시는 데 나가 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예정보다 좀 빨라져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아
직 복학도 안 했다구?"
"예, 이것저것 공부를 좀 해보려고…"
"음… 그래? 어쨌거나 그렇다면 자네 요새 바쁘지는 않은
가?"
"아닙니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습니다."
"잘되었군. 그럼 며칠 후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않겠나?"
저녁이라. 물론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선영이 누나도 없는 마당에 독대를 청하신다… 나로
서는 적잖이 긴장될 이야기였다.
"뭐 창희 군이 달리 부담 가질 건 없고… 우리 안사람이랑
얘기해서 어디 시내 쪽에서 좀 만나도록 하지."
창희 군. 애초에 다소 단도직입적인 분인 줄은 알았지만 아
버님은 묘하게도 굳이 내게 딱딱한 호칭을 붙이고 계셨다.
"뭐라고 말씀들 하시니?"
선영이 누나 부모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오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은 응당 명희 선배였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마치 안 되면 엿듣기라도 할 양 귀가 쫑긋
한 인상이었고, 나는 별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여
야 했다.
"뭐 그냥… 저녁식사나 같이 하시자는 얘기였어요."
"그래…?"
그래… 명희 선배의 혼잣말은 묘하게도 꼬리를 끌고 있었
다. 자칫 근심이라도 담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냐. 걱정은 무슨… 그 분들이 선영이도 아직 없는데
귀국하자마자 널 만나시겠다고 하길래."
그런가. 그 말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어도 실상은 내가 궁금해지는 문제였
다. 아무리 외동딸의 애인이고, 또 오랜 기간의 외유 끝에 보
게 되는 사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만남을 서두른다는 것은
저으기 의아할 일이었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모르는 나로서는 괜시리 찜찜한 기분이
었다.
* * *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뵙기로 한 약속은 금요일이었지만,
나는 그 무렵까지도 별반 복잡한 사정은 아니었다.
회사 - 그렇게 부르기는 좀 뭣해도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S
금융 - 에서는 며칠간 일상적인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속한
곳은 통계 파트였기에 상담 파트가 직접 자료를 넘겨줘야만
일감이 생기는 입장이었고, 그 자료라는 것은 며칠 더 흘러야
쌓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나로서는 차차 일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
만 그 한가로운 와중에 적잖이 관심이 쏠리는 한 사람이 있
을 따름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미스 한이었다. 아직은 바쁘지 않은
통계팀에 비해 상담팀 쪽은 박진숙 과장의 독려를 받아야 했
는데, 그래서인지 한윤정씨와 마주칠 기회는 그다지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식권이 나오는 회사 식당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그
녀였어도 번번이 어색한 노릇이었다. 애써 피하는 건지 뭔지,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던가 아니면 아주 간단히 목례
를 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하여 나중에는 내가 먼저 머쓱해지고 말았다. 어찌 보면 당
연했다. 나야 그 불미스럽던 팬티 훔쳐보기가 송구해서라도
신경이 쓰였지만 미스 한에게 있어 나란 놈은 자신이 치마속,
아니 입고 있던 팬티까지 홀랑 내보인 남자 아닌가. 그러니
모종의 거부감이 없으리라고는 장담 못할 터였다.
게다가 한윤정씨가 기억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정말
로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알록달록한 꽃무늬 팬티가 연
상되는 탓에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기어이 남자의 심리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녀가 오늘은 무슨 팬티를 입었을까, 그때 앙증맞던 하얀 색
꽃무늬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까봐 골치가 아픈 지경이었
다.
좌우간 금요일 오후에는 긴장된 마음으로 퇴근을 해야 했
다. 아무래도 양복을 입고 가야지 않겠니 - 그 날 아침 명희
선배가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티셔츠와 면바지 중
에서 제일 새것으로만 갖춰 입고 나왔다. 가지고 있는 양복도
별로 없거니와 공연히 눈총을 받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창희야… 너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헌데 그런 내 심정을 들킨 것은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서였
다. 막 일어서던 옆자리에서 물어온 목소리, 바로 지현이였다.
돌아보니 그녀가 가방을 챙기다 말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
고 있었다.
"나? 나 말이야?"
"응. 시간 좀 있니?"
"어… 그, 그게… 왜?"
나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쉽사리 그렇다고
말하기가 주저되고 있었다.
선영이 누나에게 있어서는 잠시나마 연적(戀敵)이 되었을지
도 모르는 그녀였다. 그런 여자애 앞에서 쓸데 없는 이야기까
지 하기는 왠지 싫었다.
"저… 오늘 금요일이잖아. 내일은 토요일이구. 이번 주 아르
바이트도 끝났는데 괜찮으면 오늘 나랑…"
"그, 근데 나 이따가 약속 있는데…"
오늘 나랑, 공교롭게스리 그 뒷말을 듣기도 전에 대답이 튀
어나왔다. 그러자 일순 지현이의 표정이 딱 멈춰지고 있었다.
"약속… 있어?"
"으응. 미, 미안해."
진짜로 미안했다. 분위기로 보아 내게 약속이 없다면 자기
와 따로 뭔가를 함께 하자는 눈치일 것 같았다.
결국 지현이로서는 정면에서 제안을 거절당한 꼴이었다. 졸
지에 멋쩍어진 그녀의 얼굴은 누구와 약속이 있느냐 묻고 싶
은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그마저 물을 수 없다는 걸 잘 아
는지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펼 뿐이었다.
"무슨… 무슨 일 있어, 지현아?"
"아, 아냐. 나중에 얘기할게."
내가 괜한 관심을 보였어도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지 그
녀는 잠자코 나보다도 앞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인사를 건네도 그저 머쓱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
덕이는 뒷모습이었다.
문득 옛날과 달리 예쁘장하게 커트된 그녀의 머리결이 눈
에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거지? 그녀가 나를 잔뜩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 중 깨끗한 것들을 골라 입고 나왔다 하더라도,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음식점에 들어서며 나
는 당장 양복을 입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시내에서 가까운 한 대형 중식(中式) 레스토랑
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떨떠름히 놀랄 수밖에 없
었다.
거의 호텔 로비만큼이나 큰 그 곳 입구에선 멀쑥한 턱시도
를 입은 웨이터들과 짧은치마 차림의 웨이트레스들이 늘어서
있다가 일제히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혀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예약이 있으십니까?"
예약이라.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당혹스러운
눈을 껌벅였다. 레스토랑은커녕 일개 중국집 수준으로만 생각
했던 것부터 실수인 때문이었다.
"저… 그, 그게 아마도…"
"손님을 찾으십니까? 예약이 없으시다면 일반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물어오는 사람은 중년의 나이로 보아 캡틴이나 지배인인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들어 다른 여직원을 부르려는 제스츄어
를 취하자 나로서는 엉겁결에 그렇다고 시인을 해야만 했다.
"아, 아닌데요.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여기서 찾아보시죠."
두꺼운 방문록 따위를 한 권 펼쳐보이고 있는 그였다. 아마
도 예약 손님 명단인 듯,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도 얼떨떨해지
고 말았다.
수십 명은 족히 넘음직한 이름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었
다. 순간 어떤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선영이 누나의 아버님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또는 어머님 이
름으로 되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분들의 성함
부터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헐. 이건 실수가 아니라 도의상의 문제였다. 자기 애인
의 부모님 함자조차 모르고 있다니, 만약 우리 아버지라도 아
셨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힘겹게 식은땀을 비질거리던 나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아
는 이름을 하나 찾아냈다. 박선영, 선영이 누나의 이름이 적
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내 짐작을 확인시켜줄 가족모임
이라는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여, 여기 있군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여기 손님 좀 안내해 드리세요.
가족실 3번 룸으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손님 이쪽입니다, 곁에 선 웨이
트레스가 앞장을 서고 있었다.
한 마디로 무릎을 칠 노릇이었다. 감사하게도 어른들이 선
영이 누나의 이름을 써주셨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볼 뻔한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당장 그 분들의 이름부터 달달 외워야 할
성싶었다. 나잇살이나 먹어놓고도 이런 예의상 절차를 미리
계산해두지 못한 것은 아무리 봐도 완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애인의 부모님을 모시는 자리 - 그나마 내가 마련하지도 못
한 자리 - 가 어때야 한다는 것 따위는 분명 배워뒀어야 할
것이었다.
어쨌든 안내 받은 룸 앞에서 나는 깊게 쉼호흡을 했다. 실
로 오랜만에 뵙는 분들, 마땅히 적지 않은 긴장이 들고 있었
다.
"음… 왔군. 오래만일세."
웨이트레스가 노크와 함께 열어준 문 안에는 선영이 누나
의 부모님들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셨다. 들어서자마자
나는 최대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송구하게도 먼저 일어서
시며 악수를 청해오시는 아버님이었다.
"아유, 오랜만이에요. 창희 학생."
"안녕하셨습니까? 두 분 모두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근엄한 얼굴의 아버님과는 반대로 선영이 누나의 어머님은
화사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인상이었다. 인사를 드리는 목소리
가 그닥 떨리지 않는 것만이 내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자, 앉지. 반주로 맥주 한 잔하겠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호화롭게 꾸몄어도 작은 룸 안, 거기에 응당 어려울 수밖에
없는 어른들 - 나는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 가득 어색함만이 가득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창희 학생 군대 제대했다더니 아주 늠름해졌네
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맞아… 그렇구먼. 자네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전방에서 수색대대에 있었습니다."
"그래. 남자는 그런 데에서 군대 생활을 해야지."
묘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님이었지만 어쩐지 그
리 믿음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만의 착각일까. 따
지고 보면 같은 남자로서 얼마간 자랑삼을 노릇임에도 그 분
의 눈초리는 썩 탐탁치않게 나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희창이 양복이라도 빌려입고 올 걸. 재차 후회가 들어야 했
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도 알리지 않았다는 게 상기되고
있었다.
좌우간 미리 음식을 주문해 놓으셨는지 그 동안 음식접시
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맥주도 몇 병 날라져 왔고, 아버님은
손수 그 병을 따 술을 따라주고 계셨다.
"자, 한 잔 받게."
잔을 받고 마주 따라드리는 내 손 끝이 바르르 떨렸다. 기
실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들께 받는 술잔은 이번이 처음인 셈
이었다. 그런 내 긴장을 아는지 어머님이 몸소 화제를 이끌고
계셨다.
"참, 명희한테 들으니 창희 학생 요즘 어디 인턴사원으로
나간다면서요?"
"인턴 사원… 그,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단순한 아르바이
트입니다."
"아르바이트? 정식 직원은 아니구?"
정식 직원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 신분이다… 그 말은 되
물으신 것은 아버님 쪽이었다. 그렇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슬그머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 분의 눈썹이 작게 찡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달라
곤혹스럽기 그지 없는 물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자네 학교 마치려면 얼마나 남았다고 했던가…?"
"예, 아직… 아직 1년 반이나 2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렇군… 그럼 창희 군은 졸업하면 무슨 계획을 갖고 있
지?"
졸업 후의 계획? 나는 일순 당황하여 말문을 잃었다.
정녕 내가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보았던가. 그 질문의 의도
란 뻔했다. 당신의 딸, 선영이 누나의 부모님은 딸의 상대자
로서 나를 가늠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즉 배우자감으로서 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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