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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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뜻밖의 시작, 아르바이트
"창희 형…!"
얼레, 그건 뜻밖에도 형준이였다. 놀라 돌아보자 그가 내
어깨를 짚고 배시시 웃어보이는 중이었다.
"어… 너, 너구나."
자연히 다소 당혹스러운 만남이었다. 지난번 정란이와의 정
사 - 해프닝에 가깝지만 - 이후로 어쩐지 피해야 할 것만 같
은 게 다름 아닌 이 형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후배 녀석이 목매달고 쫓아다
닌다는 여자애를 한 발 먼저 건드린 사람, 그게 바로 나란 놈
아닌가.
하여 그 순간 나는 후닥닥 그의 주변부터 살펴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도 녀석은 오늘따라
정란이와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난감해 하는 나에게 형준이는 손가락으로
등뒤를 가리켜 보이고 있엇다. 다른 학생들도 있으니 밖에 나
가 얘기를 하자는 듯, 녀석이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버리자 나
로서도 우물쭈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복도로 나오면서도 나는 주변을 연신 흘끗거렸다. 여기 이
형준이도 문제였으나 문제의 그 아가씨 정란이를 마주치는
것 만큼은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여기요, 형."
엉거주춤 다가가자 녀석은 사뭇 반가운 척 굴고 있었다. 여
전히 빨간 브릿지 염색에 귀고리를 한 그의 모습에 나도 어
색하게나마 마주 웃음을 보여야 했다.
"어, 어쩐 일이니?"
"어쩐 일이긴요. 제가 그 동안 얼마나 형을 찾아다녔는데
요."
"나, 나를? 왜…?"
날 찾아 다녔다… 왜일까. 혹시 정란이와 관련된 얘기는 아
닐까. 나로서는 걱정인데도 형준이는 짐짓 보고 싶었다며 너
스레를 떨어댈 뿐이었다.
"그야 뭐 당연히 형 보고 싶어서죠. 하지만 오늘은 보고 싶
어하는 사람이 제가 아니에요. 어떤 여자 분 심부름이죠."
어떤 여자? 설마 정란이? 하지만 내 동그래진 눈을 눈치채
지 못한 듯 녀석이 꺼낸 말은 약간의 의외였다.
"학과 사무실에서 명희 선배님이 찾고 계세요. 제가 도서관
쪽으로 갈 거라구 했더니, 형 좀 찾아서 그리로 와달라구 전
하라던데요."
"명희 선배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명희 선배가 찾으리라는 것은 얼
마간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알았다 말하고는 아
예 가방을 챙겨 나갈 생각으로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한 마
디 더 나를 붙잡는 녀석이었다.
"근데요, 창희 형. 형 앞으로 맨날 이렇게 도서관에 나오실
거에요?"
"나? 그, 글쎄. 아마도 당분간은…"
"그러세요? 잘됐다. 이제 형 만나려면 여기에 와야겠네
요…!"
뭐라 얘기할 틈도 없었다. 그럼 갈게요. 다음에 뵈요. 형 -
녀석은 그 말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 참, 왜 이 친구가 그토록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인
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도서관을 나와 학과
사무실로 향하면서도 내 고개는 연신 갸우뚱거려졌다.
그나저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필경 명희 선배가 어제
일을 물어보리라, 학과 사무실에 당도한 나는 심호흡부터 가
다듬어야 했다.
"저 찾으셨다면서요… 명희 선배."
"응, 왔구나. 잠깐만…"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섰어도 명희 선배는 업무에 바쁜 듯
목례만 건네고 딴 일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의자
에 앉아 기다려야 했는데, 잠시 후 볼 일을 끝낸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어왔다.
"창희 너, 오늘 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니?"
"어… 예. 깜빡했어요. 근데 무슨 일로…?"
"으응, 내가 할 얘기가 좀 있어서."
할 얘기라. 나는 은근히 긴장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내가 상상하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지한테 전화 왔었어. 너 찾는 전화."
"네? 예지한테서요…?"
예지라니. 김예지, 작고 귀여운 인상과는 반대로 슬픈 첫경
험의 추억을 지녔던 그 아이. 그리고 내게 진정한 첫 순결을
주고 더 없이 가까운 친구로 남게 된 그녀.
하지만 제대 후 지금껏 아쉽게도 한 번 만나지를 못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날 찾았다는 소식은 간만의 반가움이었
다.
"너희 집으로도 전화했던 모양인데… 너 이사 갔다는 말 듣
고 이리 전화한 거래. 걔네 회사 번호 남겼으니까 나중에 전
화해봐."
회사 전화번호, 지난 번 명희 선배 얘기로는 어느 기업 기
획실 특채로 취직이 됐다 했으니 아마 그곳일 게다.
"그건 그렇고, 창희 너 예지가 왜 전화한 건지 아직 모르
지…? 뭐냐 하면 말이야, 예지네 회사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단다."
"아르바이트요?"
"그래. 걔가 있는 기획실 주관으로 무슨 사업을 한다는데,
거기에 대학생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대… 얘기 듣기로는 소
수만 뽑구 보수도 거의 인턴사원 수준이라던걸. 근데 아마 네
생각이 난 모양이야. 그래서 널 추천했다더라."
이런 걸 친구 잘 뒀다고 해야 하나.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오히려 떨떠름해질 나였다. 안 그래도 방 문제와 아르바이트
자리가 문제였건만 지금 그 두 가지가 연이어 해결되려 하고
있었다.
"뭐라더라… 일주일에 닷새, 하루에 여섯 시간일이구, 보수
는 기본 육십 만원에다가 평가가 좋으면 성과급이라고 했어.
자세한 건 예지랑 통화해서 알아보면 될 거야."
육십 만원 이상, 게다가 일주일에 육오 삼십, 서른 시간이
면 - 나는 저으기 입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시간당 적어도 오
천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였으므로 내 처지에는 상당한 거금
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왠만 하면 하지 그러니? 주말이나 남
는 시간에 도서관에 나와도 될 테구, 어차피 너도 정식 복학
은 안 했으니까 다음 학기까지 남아도는 몇 달 동안 등록금
같은 걸 벌어도 좋잖아? 게다가 흔한 자리도 아닌 것 같아.
예지가 우리 과한테만 특별히 연락한 거래. 그것도 단 두 사
람만."
명희 선배도 그런 내 어림짐작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선뜻 맞장구를 쳐주는 바람에 나도 얼핏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두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누구죠? 그 사람도 예지가 지목했나요?"
"응. 맞아, 지현이랑 너 두 사람이야."
"지, 지현이요?"
단 두 사람인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지현이라고? 그 말
에 나는 못내 떨떠름해졌다. 잘 나가다가 그 대목에서 그만
삐끗거리고 있었다.
주저감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보나마나 상당한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할진대, 과연 옛날 예지
와 맞물려 짝사랑을 거둬야 했던 그녀와 내 사이가 더 이상
서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실 지난 번 신입생 환영회 날 정란이와의 여관방 사건
직전에 마지막으로 묘하게 마주친 후 지현이를 다시 만난 적
이 없었다.
"그 아르바이트 할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구 예지가 추천
했으니 확실할한 거잖아."
"어… 예. 하, 할게요…"
명희 선배의 물음에 종내 나는 그런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제42화 사랑과 우정 사이
나는 엉겁결에 그러마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리 껄
끄러워도 남자인 내가 그 정도에 지현이를 피할 이유는 없다
는 판단이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예지에게 전화라도 할 생각에 얘기를
끝낸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제야 명
희 선배가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있었다.
"저기… 창희야."
"네?"
대답한 나를 왠지 모르게 그녀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
가 말하려는 표정이었지만, 미처 아까까지의 긴장을 상기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의아한 눈만 껌벅여댔다.
"저… 우리 언니, 아니 어제 일 말인데…"
비로소 퍼뜩 정신이 드는 나.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눈썹
을 가만히 찡그리던 명희 선배는 이내 고개를 저어보이고 있
었다.
"아, 아냐.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어쨌든 고마웠어, 어제."
어제 고마웠다 - 무슨 얘기인지 빤했어도 나로서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야 했다. 굳이 말해 그런 인사까지 받아야 할 것
같지는 않음에도 그녀는 그냥 씁스레한 미소일 뿐 말을 아끼
고 있었다.
언니 정희씨 이야기를 하려던 걸까. 그렇다면 어젯밤의 그
난처한 사건에 대해 두 자매끼리 뭔가 얘기가 됐거나 아니면
최소한 오해를 풀고 우리의 자초지종을 믿는다는 얘기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학과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여 추궁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
겼던 탓이었다.
어쨌건 간에 아파트에 돌아온 나는 우선 명희 선배가 가르
쳐준 번호로 전화부터 걸었다. 아직 퇴근 전이었는지, 실로
오랜만에 예지의 작고 차분한 목소리를 듣게 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홍보실 김예지입니다."
"어… 예지니? 나야, 창희."
"어머, 창희야…!"
예지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즉시 되돌아왔다. 나 역시 기
쁜 마음에 살짜기 미소가 지어졌다.
"뭐야, 왜 이제야 전화했어? 제대해도 연락 한 번 없구."
"미안미안. 뭐 이사도 하고 그러다가 그렇게 됐어."
"너무 오래만이다… 오늘 명희 언니한테 연락 받은 모양이
구나?"
"응. 어떻게 된 거니? 보통 자리가 아니던데."
"후후, 사실은 그 인력 모집 계획을 내가 담당하거든. 그래
서 창희 네 생각이 나서 슬쩍 끼워넣었어. 대충 얘기는 들었
지?"
"으응… 들었어."
"꼭 해봐. 다른 자리면 몰라도 이번 기회 참 좋아. 왠만한
인턴 사원보다 나을 거야."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우리의 첫 번째 화제는 그 아르바
이트에 관한 얘기였다. 저으기 궁금한 그녀의 근황은 내가 먼
저 물어야 했다.
"근데 퇴근시간 넘은 것 같은데… 아직 바쁜 거야?"
"약간은… 기획실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는 새에도 전화기 너머로 계속 업무를 보는지 간간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예지였다. 아직 학생 싱
분인 나로서는 그런 그녀가 적잖이 대견하게 여겨질 모습이
었다.
"참, 그걸 빼먹었네. 이번 금요일이 면접이야. 면접시험은
아니구,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모여 업무지시랑 상견례 비슷하
게 하는 건데… 올 거지?"
"응. 당연히 가야지."
"그럼 말야, 우리 그 날 얼굴 좀 보자. 마침 퇴근시간 무렵
이니까… 내가 월급 받는 기념으로 맛 있는 거 사줄게."
"좋아. 야아… 드디어 취직한 친구한테 얻어먹을 기회가 생
기네."
그럼 그 때 보자, 약속장소와 시간을 받아적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작은 의문 하나였다. 망설이던 나는 기어이 그 마
지막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근데 예지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얼마든지."
"있잖아, 두 사람이라면서 왜…?"
왜 지현이와 나여야 하니 - 나로서는 그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먼저 말을
꺼내는 예지였다.
"알아. 창희 너… 지현이 얘기 하려는 거지?"
"어…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일부러 그랬어. 실은 얼마 전에 지현이
만났었걸랑. 하지만 걔 눈치가 아직 창희 너하고 서먹한 것
같길래, 그냥 이런 걸 기회로 너희 둘 조금 편해졌으면 하
구… 알지만 두 사람 다 나한테는 둘도 없는 친구잖아. "
그렇구나. 역시나 예지의 사려 깊은 성격은 여전했다.
"그래… 하여튼 고마워. 그런 생각까지 해줘서."
"아니야. 대신 그 날 우리 만날 때엔 너한테 부담되지 않도
록 지현이한테는 연락 안할게."
나는 그녀의 설명에 보이지 않게 탄복했다. 새삼 반가움과
함께 예지와의 수 년 전 학창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기분
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화를 끊기 직전 그녀는 이렇게
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기억 나? 예전에 내가 희창이 문제 때문에 창희 너 힘들게
했을 때… 그 때는 네가 나서서 끝까지 도와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너희를 도와줄 차례인 것 같아."
그 날 잠을 청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마도 조
그만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다소 실없으나 행복한 그
상상은 이런 것이었다.
만약 예지와 나 - 만약 내게 선영이 누나가 없고, 그녀에게
희창이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결국 그럼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아주 깊은 연인 사이거나, 아니면 이
렇게 절친한 친구 사이거나.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두 번째가 된 것에 충분히 감사하
는 느낌이었다. 흔히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
람들이 있다지만, 그 말은 분명히 틀렸다.
친한 친구, 어찌 보면 동성(同性)보다 나은 친구 사이는 틀
림 없이 있다. 바로 그녀와 나처럼.
그것도 심지어 같이 잔 - 딱 한 번, 물론 예지와 내게는 그
것이 그저 그런 섹스의 의미가 절대 아니었다 - 사이라 해도
말이다.
* * *
금요일까지, 내게는 별달리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 덕
분에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갔다가 저녁에 꼬박
꼬박 일찍 들어오는 그 생활만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단지 기이한 것은 같이 살고 있는 정희와 명희 자매에 관
한 것이었다. 어차피 집안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종종 마주치
는 명희 선배였으나 그에 비해 언니 정희씨 쪽은 좀처럼 마
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신기하기마저 할 노릇이었다. 왜냐, 우연히
한두 번 마주친 정희씨의 모습이 너무나 색달랐기 때문이었
다. 일전의 그 이상야릇한 사건 이후로 뭔가 동생에게 단단히
주의라도 받은 것일까. 지나치게 얌전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
을 보이는 그녀였다.
그랬다. 다소 야시시한 정장 옷차림이란 점만 뺀다면 내가
본 것은 깔끔하게 스타킹까지 챙겨 신은 정희씨의 자태가 전
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거의 내게 말을 붙이지도 않고 있었
다.
제43화 예지와의 재회
그렇기에 며칠 간 학교 도서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
을 방안에 틀어박혀 지냈던 나로서는 정희씨에 대해 거의 신
경을 쓰지 않게 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그 이후로도 이따금씩 매우
늦게 귀가할 때가 있으며, 또 일찍 퇴근했다가도 데이트 따위
가 있는지 다시 성장(盛裝)을 하고 집을 나설 때가 있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도 정희씨는 지난 번 같은 소동을 재차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뭐랄까, 자세히 알 수야 없
어도 겉보기로 보아 말괄량이 아가씨에서 요조숙녀로 싹 바
뀌었다고나 할까.
기실 일전 이상야릇한 화장실 사건을 감안한다면 그런 모
습이란 나에게 생소하기까지 했다. 달리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정도로 얼마간
친숙해질 수도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날 때문에 창피해서 그러는 거겠지 - 그래서 나
는 나중엔 그렇게 생각해버려야 했다. 주사에 가까운 해프닝
이었으니 여자인 그녀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 며칠 사이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장차 내 공부에 대한 가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당장 깨달은
것은 아니나 달라 영어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
었다.
카튜사도 아닌 이상 당연한 노릇일 테지만 군대 말년 시절
영어 원서(原書) 정도를 가끔 접했을 뿐인 나는 회화나 발음
같은 실질적 감각에서 영 무디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바
이트를 시작하게 되면 별도의 노력, 가령 회화 학원 같은 것
이라도 필요할 성싶었다.
그러니 때마침 그 일자리가 생겨준 게 더욱 호기였다. 만만
치 않을 그 학원비라도 벌게 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금요일 오후에 나는 예지와 약속한대로 시내로 나갔다. 그
녀와 나는 일단 아르바이트 설명회 직전에 만날 예정이었다.
예지의 회사는 바로 S투자신탁이었다. S투자신탁, 국내 제
2금융권에서도 굴지라는 그 곳의 본사는 강남의 한 커다란
빌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 건물의 어마어마한 로비에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은 약속한 예지 이전에 왠지 모를 주눅이었다. 여동생
같기만 하던 그녀가 이런 곳에 다닌다니 - 물론 갓 제대한
신출내기 복학생이라 더 그랬겠지만 새삼 예지가 대단하게
여겨지는 나였다.
"창희야…!"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어색해 하는 나이건만 먼저 불러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엉겁결에 돌아보자 시야에는 웬 날씬하고
단정한 회색 투피스 차림의 아가씨 하나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이야… 예지야!"
아니면 우와, 쯤이었으리라.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를 감탄사
가 흘러나왔다. 얼핏 지나치면 못 알아볼 그 멋진 자태가 다
름 아닌 예지였다.
"그래도 일찍 왔네? 지현이는 아직 안 왔는데."
나는 그 말에 대꾸조차 못했다. 정말 너무나 달라진 예지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옛날처럼 작고 귀여운 인상은 여
전했어도 이렇게 청초한 화장에 정장치마마저 입고 있으니
그녀에게서는 정숙미와 세련미가 절로 더해져 있었다.
"뭐야… 뭘 그렇게 넋을 잃고 보니."
그녀도 내 벌어진 입을 알아차리고서 배시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내 어깨를 두드리는 작은 손, 그제야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릴 수 있었다.
"미, 미안. 너무 달라 보여서 말이야."
"왜…? 이상해 보여?"
"아, 아냐. 그럴 리가…! 예지 네가 정말 예뻐 보인다는 얘
기야…!"
정말이었다. 화들짝 손까지 내젓는데도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작게 혀를 내밀어보였다. 그럼 옛날엔 안 이뻤다는 얘기
네, 하는 뜻의 농담이었다.
"후후,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나도 사실 안 입던 치마까지
맨날 입으려니 처음엔 굉장히 어색했거든. 음… 그나저나 일
단 설명회는 2층이니까, 우리 올라가면서 얘기하자."
좀 더 친숙한 티를 내고팠으나 사람이 많은 로비인 까닭에
예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멎쩍은 내가
쫓아가자 그녀는 차근차근 오늘의 일정부터 설명해주기 시작
했다.
그녀의 말로는 오늘의 미팅이 아예 본격적인 업무 지시나
마찬가지이며, 뽑혀 온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나나 지현이 같
이 회사 내 직원에게서 추천 받은 케이스라 했다. 다만 그 계
획을 짠 것은 자신이 속한 기획실 소관이지만, 직접적 업무
관할은 다른 부서에서 맡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들어가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거야. 미안하지만 난 업무처
리할 것이 좀 남아 있어서 다시 사무실로 가야 해. 이따가
는… 그래, 지하에 내려가면 커피숖이 하나 있어. 설명회 끝
나면 그리로 내려가서 기다릴래?"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저녁을
사준다니 못 다한 회포는 거기서 풀면 될 터였다.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어느새 당당한 OL의 티가 나보이는 그녀는 스커트 아래
로 곧게 뻗은 종아리를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첫
데이트를 할 때처럼 통통하면서도 고운 그 종아리였다.
설명회가 있는 곳은 강당 비슷한 회의실이었다. 입구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름을 확인
하고는 종이 명찰을 나눠주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모인 사람은 대략 십여 명이었다. 모두 대학생
인 듯, 나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알아보고는 슬그머
니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야 했다.
지현이였다. 아까 예지가 말로는 아직 안 온 것 같다더니
의외로 그녀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해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색한 나는 일부러 그녀 옆에서 한두 자리를 띄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이내 회의실 문이 열리며 직원 두어 명이 우르르
들어와 앞쪽에 서고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여직원과 한 명
의 남자직원이었는데, 두 여자 중 한 사람은 곤색 치마의 유
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남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복장
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단에 올라와 인사를 건넨 것은 그 중의 유니폼을 입지
않은 나머지 한 여직원이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딱딱한 미소
를 짓고 있는 그 젊은 여자는 묘하게도 아래 위로 맵시 있게
통일된 검은색 정장에, 심지어 스타킹조차 윤기가 흐르는 커
피색을 신고 있었다.
제44화 새로운 여인들의 등장
"우선 업무 설명에 앞서서, 앞으로 여러분 임시직 직원들과
함께 할 분들을 소개시켜 드리죠. 먼저 부(副) 팀장 영업부
임연상 대리입니다."
임 연상 대리라는 호명에 고개를 숙인 것은 와이셔츠의 남
자 직원이었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의 그는 전형적
인 회사원 스타일이었으나 중키에 고개를 쳐든 폼이 다소 까
다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쪽은 여러분께 실무 지도를 할 고객 상담실의 한윤정
씨."
이름만 부르는 것을 보아 평직원인 한윤정이라는 아가씨가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쪽이었다. 나이가 어린지 앳되 보이는
얼굴에 살짝 주근깨가 섞인 그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
하자 마지막으로 검은 정장의 여자가 자기 소개를 하고 있었
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이 부서를 책임질 과장 박진숙이에
요."
과장이라? 저으기 놀라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 가운
데 가장 높은 직급, 그런데도 젊어보이는 그녀는 도무지 나이
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깔끔하기는 했어도 꽤 진한 화장에 날카로운
눈매와 콧매가 퍽 차가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꼭 어디 학교 여
선생님이 어울릴 것 같은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다음 주 중에 이틀간 실무 교육이 있으니… 오늘은
회사소개랑, 간단히 여러분이 맡을 일에 대한 설명을 하겠어
요."
박진숙 과장이라는 여자가 고개를 까닥거리자 옆에 선 임
대리라는 사내가 들고 있던 유인물을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
었다. 얼핏 보니 회사와 부서 소개, 그리고 조직표 등이 담긴
책자 하나와 임시직 고용 계약서라는 명칭이 붙은 서류 한
장이었다.
"거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년에 우리 S금융에서 단기 투
자 상품 하나를 내놓았어요. 근데 이게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
아서 일 년 만에 2만 구좌 가까이 신청이 됐죠. 그래서 이번
에 저희 회사 쪽에서는 이 상품을 전면 개발해 주력(主力)으
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서류가 전달된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설명은 비
교적 간단했다. 이 회사에서 개발한 단기 상품 하나가 인기를
끈 모양, 따라서 그 규모를 확대하기에 앞서 사후관리(事後管
理)겸 기존 상품의 문제점 등을 조사해 차기(次期)에 반영하
겠다는 것이 이 회사의 의지였다.
한 마디로 아르바이트생인 우리가 맡게 될 일은 일종의 전
화 설문조사 같은 내용이었다. 그 인상만큼이나 업무에 관해
철저할 듯한 박 과장은 첫 미팅부터 딱 부러지게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알아두셔야 할 건 이게 무작위 설문조사가 아니라는 점이
에요. 이미 저희 회사의 고객이신 분들을 상대로 하는 작업입
니다. 그래서 좀더 심혈을 기울일 목적으로 아무나 쓰는 임시
고용직이 아닌… 내부 추천으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거
예요."
그래서였군,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설명을 따르자면 끽해야 몇 주
짜리일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이 아르바이트는 상당히 장기
적인 일자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단히 계산해도 2만 명 가량을 십여 명이 상대해야 한다
는 논리였으니 하루에 이삼십 명을 쳐도 수개월 넘어 걸릴
일거리였다. 잘된 일인지 어쩐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냥 만족도 조사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일별 통계도 내야
하고, 주별 통계 서류도 제출하게 될 거예요. 따라서 앞으로
남학생 분들은 주로 통계처리, 여학생들은 직접조사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과급 문젠데, 물론 여러분에
게는 의무적인 할당량이 있어요. 그 할당량을 조기에 채우는
사람에 한해서는 최고 오십 퍼센트가 더 지급됩니다."
오십 퍼센트, 라는 대목에서 유달리 액센트를 넣는 박 과장
이었다. 마치 모종의 경쟁 심리라도 유발하겠다는 듯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임 대리가 진행해요."
남은 것이란 말에 갑자기 회의실의 불이 꺼졌다. 회사 소개
시간도 있다더니 무슨 슬라이드나 홍보 필름이라도 보여주려
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소동이 일어난 건 그 즈음이었다. 나를 포함해 잠자
코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들, 그런데 문득 그 앞에서 임 대
리와 한윤정씨가 뭐라 귀엣말을 해대며 우왕좌왕하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회사 소개 비디오, 그거 틀어야 하잖아?"
어둠 속에서 들린 목소리는 박 과장의 것이었다. 하지만 바
로 그게 문제인지 다시금 사무실 안이 환해지고 있었다. 스위
치를 올린 임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미처 가지고 오지 않았나본데요."
"뭐예요? 이봐, 한윤정씨!"
얼레, 그리 심각하지도 않은 상황인지라 멍하니 앞만 바라
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박 과장의 목소리가 지나치
다 싶게 한 톤 올라가고 있었다.
"한윤정씨 뭐하는 거야? 그런 것도 안 챙겨오면 어떡해?"
"저, 그, 그건 임 대리님이 맡아서 하시기로…"
"임 대리? 이것 봐. 그런 건 상급자가 할 일이 아니잖아…!
막내 직원이 뭐하는 거야?"
꽤나 앙칼진 목소리 -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도 수군거
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그 말에 앳되어 보이는
한윤정씨의 얼굴이 당장 붉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건 윗사람 핑계 대지 마. 고객 상담실에서 그렇게 배
웠어?"
그럼에도 박 과장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다그침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아까 소개로는 영업부 소속이라던 그녀에 비해 한윤정씨는
다른 부서에서 나온 여직원 같았다. 그러나 원 소속부서까지
들먹이며 질책을 하다니, 그것은 문외한인 내가 듣기에도 지
나친 언사임이 분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유… 됐어. 그만 둬."
당혹해진 그녀가 허둥거렸으나 반말마저 서슴지 않는 박
과장은 쯧쯧 혀를 차댈 따름이었다. 그 바람에 덩달아 썰렁해
지는 좌중, 그 앞에 선 한윤정씨는 입술을 깨물며 귀밑까지
빨개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정식직원 신분인데
아르바이트생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다니 약간은 안된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네요. 오늘은 그냥 이걸로 끝내기로 하죠, 여러분.
비디오야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다음 번 미팅은 월요일
오전 열 시입니다. 장소는 이곳 5층 영업 지원팀 사무실이에
요."
중요하지 않다며 왜 그리 유난을 떠는 걸까. 그 말과 동시
에 대뜸 자리에서 일어서는 박 과장이었다.
이어 임연상 대리가 아르바이트생들의 계약서를 회수해가
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의아함이 들었다. 그는 옆의 여
직원이 당한 질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에 어
쩐지 피식거리는 조소까지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희 형…!"
얼레, 그건 뜻밖에도 형준이였다. 놀라 돌아보자 그가 내
어깨를 짚고 배시시 웃어보이는 중이었다.
"어… 너, 너구나."
자연히 다소 당혹스러운 만남이었다. 지난번 정란이와의 정
사 - 해프닝에 가깝지만 - 이후로 어쩐지 피해야 할 것만 같
은 게 다름 아닌 이 형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후배 녀석이 목매달고 쫓아다
닌다는 여자애를 한 발 먼저 건드린 사람, 그게 바로 나란 놈
아닌가.
하여 그 순간 나는 후닥닥 그의 주변부터 살펴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도 녀석은 오늘따라
정란이와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난감해 하는 나에게 형준이는 손가락으로
등뒤를 가리켜 보이고 있엇다. 다른 학생들도 있으니 밖에 나
가 얘기를 하자는 듯, 녀석이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버리자 나
로서도 우물쭈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복도로 나오면서도 나는 주변을 연신 흘끗거렸다. 여기 이
형준이도 문제였으나 문제의 그 아가씨 정란이를 마주치는
것 만큼은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여기요, 형."
엉거주춤 다가가자 녀석은 사뭇 반가운 척 굴고 있었다. 여
전히 빨간 브릿지 염색에 귀고리를 한 그의 모습에 나도 어
색하게나마 마주 웃음을 보여야 했다.
"어, 어쩐 일이니?"
"어쩐 일이긴요. 제가 그 동안 얼마나 형을 찾아다녔는데
요."
"나, 나를? 왜…?"
날 찾아 다녔다… 왜일까. 혹시 정란이와 관련된 얘기는 아
닐까. 나로서는 걱정인데도 형준이는 짐짓 보고 싶었다며 너
스레를 떨어댈 뿐이었다.
"그야 뭐 당연히 형 보고 싶어서죠. 하지만 오늘은 보고 싶
어하는 사람이 제가 아니에요. 어떤 여자 분 심부름이죠."
어떤 여자? 설마 정란이? 하지만 내 동그래진 눈을 눈치채
지 못한 듯 녀석이 꺼낸 말은 약간의 의외였다.
"학과 사무실에서 명희 선배님이 찾고 계세요. 제가 도서관
쪽으로 갈 거라구 했더니, 형 좀 찾아서 그리로 와달라구 전
하라던데요."
"명희 선배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명희 선배가 찾으리라는 것은 얼
마간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알았다 말하고는 아
예 가방을 챙겨 나갈 생각으로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한 마
디 더 나를 붙잡는 녀석이었다.
"근데요, 창희 형. 형 앞으로 맨날 이렇게 도서관에 나오실
거에요?"
"나? 그, 글쎄. 아마도 당분간은…"
"그러세요? 잘됐다. 이제 형 만나려면 여기에 와야겠네
요…!"
뭐라 얘기할 틈도 없었다. 그럼 갈게요. 다음에 뵈요. 형 -
녀석은 그 말과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 참, 왜 이 친구가 그토록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인
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도서관을 나와 학과
사무실로 향하면서도 내 고개는 연신 갸우뚱거려졌다.
그나저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필경 명희 선배가 어제
일을 물어보리라, 학과 사무실에 당도한 나는 심호흡부터 가
다듬어야 했다.
"저 찾으셨다면서요… 명희 선배."
"응, 왔구나. 잠깐만…"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섰어도 명희 선배는 업무에 바쁜 듯
목례만 건네고 딴 일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의자
에 앉아 기다려야 했는데, 잠시 후 볼 일을 끝낸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어왔다.
"창희 너, 오늘 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니?"
"어… 예. 깜빡했어요. 근데 무슨 일로…?"
"으응, 내가 할 얘기가 좀 있어서."
할 얘기라. 나는 은근히 긴장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뜻밖에도 내가 상상하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지한테 전화 왔었어. 너 찾는 전화."
"네? 예지한테서요…?"
예지라니. 김예지, 작고 귀여운 인상과는 반대로 슬픈 첫경
험의 추억을 지녔던 그 아이. 그리고 내게 진정한 첫 순결을
주고 더 없이 가까운 친구로 남게 된 그녀.
하지만 제대 후 지금껏 아쉽게도 한 번 만나지를 못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날 찾았다는 소식은 간만의 반가움이었
다.
"너희 집으로도 전화했던 모양인데… 너 이사 갔다는 말 듣
고 이리 전화한 거래. 걔네 회사 번호 남겼으니까 나중에 전
화해봐."
회사 전화번호, 지난 번 명희 선배 얘기로는 어느 기업 기
획실 특채로 취직이 됐다 했으니 아마 그곳일 게다.
"그건 그렇고, 창희 너 예지가 왜 전화한 건지 아직 모르
지…? 뭐냐 하면 말이야, 예지네 회사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단다."
"아르바이트요?"
"그래. 걔가 있는 기획실 주관으로 무슨 사업을 한다는데,
거기에 대학생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대… 얘기 듣기로는 소
수만 뽑구 보수도 거의 인턴사원 수준이라던걸. 근데 아마 네
생각이 난 모양이야. 그래서 널 추천했다더라."
이런 걸 친구 잘 뒀다고 해야 하나.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오히려 떨떠름해질 나였다. 안 그래도 방 문제와 아르바이트
자리가 문제였건만 지금 그 두 가지가 연이어 해결되려 하고
있었다.
"뭐라더라… 일주일에 닷새, 하루에 여섯 시간일이구, 보수
는 기본 육십 만원에다가 평가가 좋으면 성과급이라고 했어.
자세한 건 예지랑 통화해서 알아보면 될 거야."
육십 만원 이상, 게다가 일주일에 육오 삼십, 서른 시간이
면 - 나는 저으기 입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시간당 적어도 오
천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였으므로 내 처지에는 상당한 거금
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왠만 하면 하지 그러니? 주말이나 남
는 시간에 도서관에 나와도 될 테구, 어차피 너도 정식 복학
은 안 했으니까 다음 학기까지 남아도는 몇 달 동안 등록금
같은 걸 벌어도 좋잖아? 게다가 흔한 자리도 아닌 것 같아.
예지가 우리 과한테만 특별히 연락한 거래. 그것도 단 두 사
람만."
명희 선배도 그런 내 어림짐작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선뜻 맞장구를 쳐주는 바람에 나도 얼핏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두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누구죠? 그 사람도 예지가 지목했나요?"
"응. 맞아, 지현이랑 너 두 사람이야."
"지, 지현이요?"
단 두 사람인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지현이라고? 그 말
에 나는 못내 떨떠름해졌다. 잘 나가다가 그 대목에서 그만
삐끗거리고 있었다.
주저감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보나마나 상당한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할진대, 과연 옛날 예지
와 맞물려 짝사랑을 거둬야 했던 그녀와 내 사이가 더 이상
서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실 지난 번 신입생 환영회 날 정란이와의 여관방 사건
직전에 마지막으로 묘하게 마주친 후 지현이를 다시 만난 적
이 없었다.
"그 아르바이트 할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구 예지가 추천
했으니 확실할한 거잖아."
"어… 예. 하, 할게요…"
명희 선배의 물음에 종내 나는 그런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제42화 사랑과 우정 사이
나는 엉겁결에 그러마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리 껄
끄러워도 남자인 내가 그 정도에 지현이를 피할 이유는 없다
는 판단이었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 예지에게 전화라도 할 생각에 얘기를
끝낸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제야 명
희 선배가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있었다.
"저기… 창희야."
"네?"
대답한 나를 왠지 모르게 그녀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
가 말하려는 표정이었지만, 미처 아까까지의 긴장을 상기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의아한 눈만 껌벅여댔다.
"저… 우리 언니, 아니 어제 일 말인데…"
비로소 퍼뜩 정신이 드는 나.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눈썹
을 가만히 찡그리던 명희 선배는 이내 고개를 저어보이고 있
었다.
"아, 아냐.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어쨌든 고마웠어, 어제."
어제 고마웠다 - 무슨 얘기인지 빤했어도 나로서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야 했다. 굳이 말해 그런 인사까지 받아야 할 것
같지는 않음에도 그녀는 그냥 씁스레한 미소일 뿐 말을 아끼
고 있었다.
언니 정희씨 이야기를 하려던 걸까. 그렇다면 어젯밤의 그
난처한 사건에 대해 두 자매끼리 뭔가 얘기가 됐거나 아니면
최소한 오해를 풀고 우리의 자초지종을 믿는다는 얘기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학과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여 추궁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
겼던 탓이었다.
어쨌건 간에 아파트에 돌아온 나는 우선 명희 선배가 가르
쳐준 번호로 전화부터 걸었다. 아직 퇴근 전이었는지, 실로
오랜만에 예지의 작고 차분한 목소리를 듣게 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홍보실 김예지입니다."
"어… 예지니? 나야, 창희."
"어머, 창희야…!"
예지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즉시 되돌아왔다. 나 역시 기
쁜 마음에 살짜기 미소가 지어졌다.
"뭐야, 왜 이제야 전화했어? 제대해도 연락 한 번 없구."
"미안미안. 뭐 이사도 하고 그러다가 그렇게 됐어."
"너무 오래만이다… 오늘 명희 언니한테 연락 받은 모양이
구나?"
"응. 어떻게 된 거니? 보통 자리가 아니던데."
"후후, 사실은 그 인력 모집 계획을 내가 담당하거든. 그래
서 창희 네 생각이 나서 슬쩍 끼워넣었어. 대충 얘기는 들었
지?"
"으응… 들었어."
"꼭 해봐. 다른 자리면 몰라도 이번 기회 참 좋아. 왠만한
인턴 사원보다 나을 거야."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우리의 첫 번째 화제는 그 아르바
이트에 관한 얘기였다. 저으기 궁금한 그녀의 근황은 내가 먼
저 물어야 했다.
"근데 퇴근시간 넘은 것 같은데… 아직 바쁜 거야?"
"약간은… 기획실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는 새에도 전화기 너머로 계속 업무를 보는지 간간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예지였다. 아직 학생 싱
분인 나로서는 그런 그녀가 적잖이 대견하게 여겨질 모습이
었다.
"참, 그걸 빼먹었네. 이번 금요일이 면접이야. 면접시험은
아니구, 아르바이트생들끼리 모여 업무지시랑 상견례 비슷하
게 하는 건데… 올 거지?"
"응. 당연히 가야지."
"그럼 말야, 우리 그 날 얼굴 좀 보자. 마침 퇴근시간 무렵
이니까… 내가 월급 받는 기념으로 맛 있는 거 사줄게."
"좋아. 야아… 드디어 취직한 친구한테 얻어먹을 기회가 생
기네."
그럼 그 때 보자, 약속장소와 시간을 받아적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작은 의문 하나였다. 망설이던 나는 기어이 그 마
지막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근데 예지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얼마든지."
"있잖아, 두 사람이라면서 왜…?"
왜 지현이와 나여야 하니 - 나로서는 그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먼저 말을
꺼내는 예지였다.
"알아. 창희 너… 지현이 얘기 하려는 거지?"
"어…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일부러 그랬어. 실은 얼마 전에 지현이
만났었걸랑. 하지만 걔 눈치가 아직 창희 너하고 서먹한 것
같길래, 그냥 이런 걸 기회로 너희 둘 조금 편해졌으면 하
구… 알지만 두 사람 다 나한테는 둘도 없는 친구잖아. "
그렇구나. 역시나 예지의 사려 깊은 성격은 여전했다.
"그래… 하여튼 고마워. 그런 생각까지 해줘서."
"아니야. 대신 그 날 우리 만날 때엔 너한테 부담되지 않도
록 지현이한테는 연락 안할게."
나는 그녀의 설명에 보이지 않게 탄복했다. 새삼 반가움과
함께 예지와의 수 년 전 학창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기분
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화를 끊기 직전 그녀는 이렇게
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기억 나? 예전에 내가 희창이 문제 때문에 창희 너 힘들게
했을 때… 그 때는 네가 나서서 끝까지 도와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너희를 도와줄 차례인 것 같아."
그 날 잠을 청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마도 조
그만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다소 실없으나 행복한 그
상상은 이런 것이었다.
만약 예지와 나 - 만약 내게 선영이 누나가 없고, 그녀에게
희창이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결국 그럼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아주 깊은 연인 사이거나, 아니면 이
렇게 절친한 친구 사이거나.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두 번째가 된 것에 충분히 감사하
는 느낌이었다. 흔히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사
람들이 있다지만, 그 말은 분명히 틀렸다.
친한 친구, 어찌 보면 동성(同性)보다 나은 친구 사이는 틀
림 없이 있다. 바로 그녀와 나처럼.
그것도 심지어 같이 잔 - 딱 한 번, 물론 예지와 내게는 그
것이 그저 그런 섹스의 의미가 절대 아니었다 - 사이라 해도
말이다.
* * *
금요일까지, 내게는 별달리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 덕
분에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도서관에 갔다가 저녁에 꼬박
꼬박 일찍 들어오는 그 생활만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단지 기이한 것은 같이 살고 있는 정희와 명희 자매에 관
한 것이었다. 어차피 집안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종종 마주치
는 명희 선배였으나 그에 비해 언니 정희씨 쪽은 좀처럼 마
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신기하기마저 할 노릇이었다. 왜냐, 우연히
한두 번 마주친 정희씨의 모습이 너무나 색달랐기 때문이었
다. 일전의 그 이상야릇한 사건 이후로 뭔가 동생에게 단단히
주의라도 받은 것일까. 지나치게 얌전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
을 보이는 그녀였다.
그랬다. 다소 야시시한 정장 옷차림이란 점만 뺀다면 내가
본 것은 깔끔하게 스타킹까지 챙겨 신은 정희씨의 자태가 전
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거의 내게 말을 붙이지도 않고 있었
다.
제43화 예지와의 재회
그렇기에 며칠 간 학교 도서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
을 방안에 틀어박혀 지냈던 나로서는 정희씨에 대해 거의 신
경을 쓰지 않게 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그 이후로도 이따금씩 매우
늦게 귀가할 때가 있으며, 또 일찍 퇴근했다가도 데이트 따위
가 있는지 다시 성장(盛裝)을 하고 집을 나설 때가 있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도 정희씨는 지난 번 같은 소동을 재차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뭐랄까, 자세히 알 수야 없
어도 겉보기로 보아 말괄량이 아가씨에서 요조숙녀로 싹 바
뀌었다고나 할까.
기실 일전 이상야릇한 화장실 사건을 감안한다면 그런 모
습이란 나에게 생소하기까지 했다. 달리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정도로 얼마간
친숙해질 수도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날 때문에 창피해서 그러는 거겠지 - 그래서 나
는 나중엔 그렇게 생각해버려야 했다. 주사에 가까운 해프닝
이었으니 여자인 그녀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 며칠 사이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장차 내 공부에 대한 가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당장 깨달은
것은 아니나 달라 영어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
었다.
카튜사도 아닌 이상 당연한 노릇일 테지만 군대 말년 시절
영어 원서(原書) 정도를 가끔 접했을 뿐인 나는 회화나 발음
같은 실질적 감각에서 영 무디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바
이트를 시작하게 되면 별도의 노력, 가령 회화 학원 같은 것
이라도 필요할 성싶었다.
그러니 때마침 그 일자리가 생겨준 게 더욱 호기였다. 만만
치 않을 그 학원비라도 벌게 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금요일 오후에 나는 예지와 약속한대로 시내로 나갔다. 그
녀와 나는 일단 아르바이트 설명회 직전에 만날 예정이었다.
예지의 회사는 바로 S투자신탁이었다. S투자신탁, 국내 제
2금융권에서도 굴지라는 그 곳의 본사는 강남의 한 커다란
빌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 건물의 어마어마한 로비에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은 약속한 예지 이전에 왠지 모를 주눅이었다. 여동생
같기만 하던 그녀가 이런 곳에 다닌다니 - 물론 갓 제대한
신출내기 복학생이라 더 그랬겠지만 새삼 예지가 대단하게
여겨지는 나였다.
"창희야…!"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어색해 하는 나이건만 먼저 불러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엉겁결에 돌아보자 시야에는 웬 날씬하고
단정한 회색 투피스 차림의 아가씨 하나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이야… 예지야!"
아니면 우와, 쯤이었으리라.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를 감탄사
가 흘러나왔다. 얼핏 지나치면 못 알아볼 그 멋진 자태가 다
름 아닌 예지였다.
"그래도 일찍 왔네? 지현이는 아직 안 왔는데."
나는 그 말에 대꾸조차 못했다. 정말 너무나 달라진 예지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옛날처럼 작고 귀여운 인상은 여
전했어도 이렇게 청초한 화장에 정장치마마저 입고 있으니
그녀에게서는 정숙미와 세련미가 절로 더해져 있었다.
"뭐야… 뭘 그렇게 넋을 잃고 보니."
그녀도 내 벌어진 입을 알아차리고서 배시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내 어깨를 두드리는 작은 손, 그제야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릴 수 있었다.
"미, 미안. 너무 달라 보여서 말이야."
"왜…? 이상해 보여?"
"아, 아냐. 그럴 리가…! 예지 네가 정말 예뻐 보인다는 얘
기야…!"
정말이었다. 화들짝 손까지 내젓는데도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작게 혀를 내밀어보였다. 그럼 옛날엔 안 이뻤다는 얘기
네, 하는 뜻의 농담이었다.
"후후,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나도 사실 안 입던 치마까지
맨날 입으려니 처음엔 굉장히 어색했거든. 음… 그나저나 일
단 설명회는 2층이니까, 우리 올라가면서 얘기하자."
좀 더 친숙한 티를 내고팠으나 사람이 많은 로비인 까닭에
예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멎쩍은 내가
쫓아가자 그녀는 차근차근 오늘의 일정부터 설명해주기 시작
했다.
그녀의 말로는 오늘의 미팅이 아예 본격적인 업무 지시나
마찬가지이며, 뽑혀 온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나나 지현이 같
이 회사 내 직원에게서 추천 받은 케이스라 했다. 다만 그 계
획을 짠 것은 자신이 속한 기획실 소관이지만, 직접적 업무
관할은 다른 부서에서 맡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들어가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거야. 미안하지만 난 업무처
리할 것이 좀 남아 있어서 다시 사무실로 가야 해. 이따가
는… 그래, 지하에 내려가면 커피숖이 하나 있어. 설명회 끝
나면 그리로 내려가서 기다릴래?"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저녁을
사준다니 못 다한 회포는 거기서 풀면 될 터였다.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어느새 당당한 OL의 티가 나보이는 그녀는 스커트 아래
로 곧게 뻗은 종아리를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 첫
데이트를 할 때처럼 통통하면서도 고운 그 종아리였다.
설명회가 있는 곳은 강당 비슷한 회의실이었다. 입구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름을 확인
하고는 종이 명찰을 나눠주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모인 사람은 대략 십여 명이었다. 모두 대학생
인 듯, 나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알아보고는 슬그머
니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야 했다.
지현이였다. 아까 예지가 말로는 아직 안 온 것 같다더니
의외로 그녀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해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색한 나는 일부러 그녀 옆에서 한두 자리를 띄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이내 회의실 문이 열리며 직원 두어 명이 우르르
들어와 앞쪽에 서고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여직원과 한 명
의 남자직원이었는데, 두 여자 중 한 사람은 곤색 치마의 유
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남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복장
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단에 올라와 인사를 건넨 것은 그 중의 유니폼을 입지
않은 나머지 한 여직원이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딱딱한 미소
를 짓고 있는 그 젊은 여자는 묘하게도 아래 위로 맵시 있게
통일된 검은색 정장에, 심지어 스타킹조차 윤기가 흐르는 커
피색을 신고 있었다.
제44화 새로운 여인들의 등장
"우선 업무 설명에 앞서서, 앞으로 여러분 임시직 직원들과
함께 할 분들을 소개시켜 드리죠. 먼저 부(副) 팀장 영업부
임연상 대리입니다."
임 연상 대리라는 호명에 고개를 숙인 것은 와이셔츠의 남
자 직원이었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의 그는 전형적
인 회사원 스타일이었으나 중키에 고개를 쳐든 폼이 다소 까
다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쪽은 여러분께 실무 지도를 할 고객 상담실의 한윤정
씨."
이름만 부르는 것을 보아 평직원인 한윤정이라는 아가씨가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쪽이었다. 나이가 어린지 앳되 보이는
얼굴에 살짝 주근깨가 섞인 그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
하자 마지막으로 검은 정장의 여자가 자기 소개를 하고 있었
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이 부서를 책임질 과장 박진숙이에
요."
과장이라? 저으기 놀라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 가운
데 가장 높은 직급, 그런데도 젊어보이는 그녀는 도무지 나이
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깔끔하기는 했어도 꽤 진한 화장에 날카로운
눈매와 콧매가 퍽 차가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꼭 어디 학교 여
선생님이 어울릴 것 같은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다음 주 중에 이틀간 실무 교육이 있으니… 오늘은
회사소개랑, 간단히 여러분이 맡을 일에 대한 설명을 하겠어
요."
박진숙 과장이라는 여자가 고개를 까닥거리자 옆에 선 임
대리라는 사내가 들고 있던 유인물을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
었다. 얼핏 보니 회사와 부서 소개, 그리고 조직표 등이 담긴
책자 하나와 임시직 고용 계약서라는 명칭이 붙은 서류 한
장이었다.
"거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년에 우리 S금융에서 단기 투
자 상품 하나를 내놓았어요. 근데 이게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
아서 일 년 만에 2만 구좌 가까이 신청이 됐죠. 그래서 이번
에 저희 회사 쪽에서는 이 상품을 전면 개발해 주력(主力)으
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서류가 전달된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설명은 비
교적 간단했다. 이 회사에서 개발한 단기 상품 하나가 인기를
끈 모양, 따라서 그 규모를 확대하기에 앞서 사후관리(事後管
理)겸 기존 상품의 문제점 등을 조사해 차기(次期)에 반영하
겠다는 것이 이 회사의 의지였다.
한 마디로 아르바이트생인 우리가 맡게 될 일은 일종의 전
화 설문조사 같은 내용이었다. 그 인상만큼이나 업무에 관해
철저할 듯한 박 과장은 첫 미팅부터 딱 부러지게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알아두셔야 할 건 이게 무작위 설문조사가 아니라는 점이
에요. 이미 저희 회사의 고객이신 분들을 상대로 하는 작업입
니다. 그래서 좀더 심혈을 기울일 목적으로 아무나 쓰는 임시
고용직이 아닌… 내부 추천으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거
예요."
그래서였군,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설명을 따르자면 끽해야 몇 주
짜리일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이 아르바이트는 상당히 장기
적인 일자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단히 계산해도 2만 명 가량을 십여 명이 상대해야 한다
는 논리였으니 하루에 이삼십 명을 쳐도 수개월 넘어 걸릴
일거리였다. 잘된 일인지 어쩐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냥 만족도 조사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일별 통계도 내야
하고, 주별 통계 서류도 제출하게 될 거예요. 따라서 앞으로
남학생 분들은 주로 통계처리, 여학생들은 직접조사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과급 문젠데, 물론 여러분에
게는 의무적인 할당량이 있어요. 그 할당량을 조기에 채우는
사람에 한해서는 최고 오십 퍼센트가 더 지급됩니다."
오십 퍼센트, 라는 대목에서 유달리 액센트를 넣는 박 과장
이었다. 마치 모종의 경쟁 심리라도 유발하겠다는 듯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임 대리가 진행해요."
남은 것이란 말에 갑자기 회의실의 불이 꺼졌다. 회사 소개
시간도 있다더니 무슨 슬라이드나 홍보 필름이라도 보여주려
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소동이 일어난 건 그 즈음이었다. 나를 포함해 잠자
코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들, 그런데 문득 그 앞에서 임 대
리와 한윤정씨가 뭐라 귀엣말을 해대며 우왕좌왕하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회사 소개 비디오, 그거 틀어야 하잖아?"
어둠 속에서 들린 목소리는 박 과장의 것이었다. 하지만 바
로 그게 문제인지 다시금 사무실 안이 환해지고 있었다. 스위
치를 올린 임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미처 가지고 오지 않았나본데요."
"뭐예요? 이봐, 한윤정씨!"
얼레, 그리 심각하지도 않은 상황인지라 멍하니 앞만 바라
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박 과장의 목소리가 지나치
다 싶게 한 톤 올라가고 있었다.
"한윤정씨 뭐하는 거야? 그런 것도 안 챙겨오면 어떡해?"
"저, 그, 그건 임 대리님이 맡아서 하시기로…"
"임 대리? 이것 봐. 그런 건 상급자가 할 일이 아니잖아…!
막내 직원이 뭐하는 거야?"
꽤나 앙칼진 목소리 -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도 수군거
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그 말에 앳되어 보이는
한윤정씨의 얼굴이 당장 붉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건 윗사람 핑계 대지 마. 고객 상담실에서 그렇게 배
웠어?"
그럼에도 박 과장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다그침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아까 소개로는 영업부 소속이라던 그녀에 비해 한윤정씨는
다른 부서에서 나온 여직원 같았다. 그러나 원 소속부서까지
들먹이며 질책을 하다니, 그것은 문외한인 내가 듣기에도 지
나친 언사임이 분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유… 됐어. 그만 둬."
당혹해진 그녀가 허둥거렸으나 반말마저 서슴지 않는 박
과장은 쯧쯧 혀를 차댈 따름이었다. 그 바람에 덩달아 썰렁해
지는 좌중, 그 앞에 선 한윤정씨는 입술을 깨물며 귀밑까지
빨개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정식직원 신분인데
아르바이트생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다니 약간은 안된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네요. 오늘은 그냥 이걸로 끝내기로 하죠, 여러분.
비디오야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다음 번 미팅은 월요일
오전 열 시입니다. 장소는 이곳 5층 영업 지원팀 사무실이에
요."
중요하지 않다며 왜 그리 유난을 떠는 걸까. 그 말과 동시
에 대뜸 자리에서 일어서는 박 과장이었다.
이어 임연상 대리가 아르바이트생들의 계약서를 회수해가
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의아함이 들었다. 그는 옆의 여
직원이 당한 질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에 어
쩐지 피식거리는 조소까지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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