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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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초인(超人)과 잠룡(潛龍)의 조우(遭遇)
고독검신(孤獨劒神) 황자등(黃子騰)!
무림제일최강자(武林第一最强者)!
천추패왕지존(千秋覇王至尊)!
불멸무적투혼한(不滅無敵鬪魂漢)!
한 인간에게 이토록 많은 경외지명(敬畏之名)이 부여되었던 예는 고금무림 역사상 전무했다.
십전무도자(十全武道者).
그렇다. 그는 완벽한 무인이었다. 고독검신 황자등은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일신상의 모든 행복과 권위도 거추장스런 옷을 벗듯 팽개쳐버렸다. 가정(家庭)과 사랑했던 아내일지라도 그의 마음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무도수행(武道修行) 삼십 년만에 그는 진정한 무인(武人)이 될 수 있었다.
일만 번의 대승부를 통해 불멸무적투혼한(不滅無敵鬪魂漢)이 되었고, 중원 십팔만 리도 좁다 여겨 환우의 모든 강자를 찾아 결투를 벌었다.
북해의 빙백천마존(氷魄天魔尊) 냉천(冷天)를 비롯하여 천축의 소뢰음사(小雷音寺)와 대뢰음사(大雷音寺)의 지존들인 변황쌍천대불(邊荒雙天大佛)과 독문(毒門)의 영원한 절대자로 숭앙받는 독황(毒皇) 사륭(嗣隆) 등등....
그야말로 무수한 강자들을 꺾으며 그는 환우제일최강자의 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초인(超人)은 포효했다.
――무림(武林)은 강자만이 존재할 수 있으리니, 강자존(强者存)의 철칙은 무림율법(武林律法)이다!
들었는가?
고독한 사자의 포효성을?
<강자존(强者存).>
강자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림의 율법이었다.
진정 강한 자만이 만인 위에 군림할지니, 중원최강자(中原最强者)인 고독검신 황자등은 초인(超人)의 신화(神話)를 탄생시킨 진정한 강자였다.
그렇지만 빛(光)이 있으면 어두운 그늘이 존재하듯, 그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슬픈이야기는 언제나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
여인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했다.
그녀의 눈앞엔 십여명의 관병들이 살기띤 모습으로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계집 같으니!"
"꼽추 병신새끼하고 붙어 살더니 정신이 훼까닥 한 모양이지? 감히 죄수를 따돌려?"
관병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점차 다가들었다.
관병들의 조장(組長)인 듯한 인물은 사십대 중반의 투박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가 문득 수하들을 제지했다.
"죄수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는 백타복의 아내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디 있느냐? 죄수들의 행방을 알려 준다면 죄과를 묻지 않겠다."
"저는....몰라요."
백타복의 아내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썅! 조장! 지금 뭐하는 겁니까? 죄수들을 잡지 못하면 우리가 어찌 되는줄 몰라서 지금 한가하게 계집하고 말장난이나 하자는 겁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관병 하나가 퉁명스럽게 항의하고 나섰다. 관병조장은 그런 수하를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왕국충(王國沖)!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저 여잔 죄가 없어. 백타복이 주동자지 마누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닥달한단 말인가?"
"이런 빌어먹을! 유조장(劉組長)이 왜 그 나이 먹도록 조장밖에 못해먹고 있는지 아시오? 그놈의 정직한 마음 때문이란걸 조장 빼고는 아마 개봉부 사람 전체가 알 거요."
왕국충이란 관병은 여전히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이죽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관병 열세명을 거느릴 수 있는 조장은 유홍비(劉洪飛)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다. 사실, 그 나이면 백 명 이상을 총괄하는 포두(抱頭) 자리에 있어야 정상이지만 유홍비는 진급이 거의 안되다가 지난 해에야 간신히 평조원에서 조장으로 승진한 위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능력이 모자란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승진이 늦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성품(性品) 탓이었다.
상관에게 아부를 하거나 뇌물을 상납할 정도로 비굴한 성품도 지니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도무지 생기는 것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못하고 사비(私費)를 털어서라도 나서는 정직함은 그를 항상 한직(閑職)에 있게 만들었다.
그나마, 딸이 혼기가 차자 부친의 위신 때문에 그의 부인이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약간의 패물을 팔아 상관의 집에 귀한 술이었던 호골주(虎骨酒) 한 동이를 사다 바친후에야 간신히 조장으로나마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조원(組員)들이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말단관병이 받는 녹봉이라고 해보아야 사실 별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간신히 제 입에 풀칠할 정도나 될 뿐, 여유 있게 생활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뒤로 돈을 받고 일을 봐주기가 예사로운 현상이 되었고, 나중엔 죄 있는 자들도 돈을 받고 눈감아준다거나, 심할 경우엔 죄진 사람 대신에 죄없는 선량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조장인 유홍비가 그짓을 못하니 조원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데야 상관의 권위가 설리는 사실상 만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런 불만이 오늘 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조장 혼자 깨지는거야 누가 뭐라겠소만, 죄인들을 잡아가지 못하면 우리까지 치도곤을 당해야 한단 말이오. 난 그렇게 못하오!"
왕국충의 항변은 강경했다.
그는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한 인물이었다.
나이는 스물 여덞밖엔 되지 않았으나, 홍등가(紅燈家)의 포주나 고리대금업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꼬리를 달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렇지만, 동료들에게 인기는 좋았다. 항시 앞장서 술집엘 가고, 국밥이라도 먹을라치면 계산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이 미안해서 낼라치면 그와 멱살을 쥐고 싸워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라나 어쩐다나.....
조원들의 분위기는 점차 왕국충에 동화되어 살벌하게 변해갔다.
"그래서? 죄없는 여자를 고문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유홍비는 살기를 감지하면서도 호통을 쳤다.
"왜 그렇게 저 계집을 감싸는거요? 혹시 꼽투 모르게 저 계집과 배꼽이라도 맞추었소이까? 하긴 꼽추 망나니의 마누라이기엔 아까운 미색이지."
왕국충은 느물거리며 유홍비의 어깨를 감싸며 귓전으로 입을 가져갔다.
"조장. 그저 물러나 있으면 됩니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하리다."
"네놈 감히......!"
호통을 치려던 유홍비의 말이 중간에서 끊어지며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옆구리에 싸늘하고 날카로운 비수의 예기(銳氣)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백정의 독종같은 마누라가 조장을 유혹하여 감춰두고 있던 비수로 찔러 순직(殉職)시키고, 남은 조원들이 조장의 복수를 하고, 도망간 죄수를 체포하여 금의환부(錦衣還府)한다는 소설(小說)을 꼭 출판(出版)시켜야만 하겠소?"
"......."
머뭇거림은 비수의 예리한 날이 한치 파고들면서 바뀌었다.
"난....모르는 일이네."
"그저 조장은 죄수들이 도망간 흔적이나 찾아 보시라는 말이외다."
어느새 물러나 웃고 있는 왕국충의 손엔 비수가 없었다.
이어 왕국충은 백타복의 부인을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순순히 불지 않으면 네년의 껍데기를 벗겨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아악!"
처절한 여인의 비명이 숲속을 울려퍼졌다.
"흐흐. 왕형이 몽둥이 찜질을 시작했군."
"왕형의 여자 다루는 솜씨는 정말 끝내주더군. 어떤 여자라도 왕형이 일단 한 번 올라타기만 하면 다음엔 누가 가도 수월하게 할 수 있거든."
"흐으.....! 오늘 또 한번 우리의 단합된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겠는걸?"
관병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욕정으로 물들이며 왕국충이 사라진 숲속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빌어쳐먹을 계집! 기왕 죽을거면 극락구경이나 해보고 뒈지지!"
왕국충의 노기띤 음성과 함께 그가 바지춤을 추여올리며 숲속에서 나왔다.
그는 신경질적인 말투로 유홍비를 쏘아보았다.
"계집은 자살했소. 내 책임은 아니오. 죽겠다는 계집을 무슨 수로 말려? 퉤! 재수 없는 계집 같으니!"
왕극충은 침을 뱉으며 조원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갔다.
유홍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나는 직업을 잘못 택했군."
그는 잠시 숲속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미안하오.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날이 올른지......"
유홍비는 혼자 개봉부로 향했다.
그날부로 사표를 집어던진 유홍비는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가 땅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는 풍문이 들려온 것은 후일담(後日談)이었다.
울창한 수림이었다.
"헉! 헉!"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림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던 백옥상은 일순 신형을 멈춰세웠다.
"흑!"
학질에라도 걸린듯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은 쓰러질 듯이 휘청였다. 찢어질 듯이 부릅떠지는 백옥상의 눈엔 지옥같은 영상이 번져가고 있었다.
"어머니……!"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그 보다 더욱 무미건조하게 흘러나오는 한 줄기 음성은 수림 전체의 정적 속에 무겁게 침잠되어갔다.
백옥상의 발 앞엔 한명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걸쳐진 마의(麻衣)는 갈가리 찢겨져 있고, 벌거벗겨진 백옥빛 나신은 아무렇게나 벌려진 채 나뭇잎 속에 뒹굴고 있었다.
피로 물들고 퍼렇게 멍든 얼굴, 참혹히 일그러진 젖무덤,
땀에 젖은 낡디낡은 치마가 찢겨진 사이로 들어난 허연 하체의 중심부는 열상(裂傷)에서 흘러나온 선혈과 희끄므레한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털썩!
백옥상은 하늘과 땅이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참히 난행당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는 여인은 바로 그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나이 어린 백옥상일지라도 자신을 낳아준 이 성스런 여인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P이 있었다.
"크흐흐흐....!"
상처 입은 야수의 통곡이 이렇게 처절한가?
한 줄기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누가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가?
설사, 신(神)이라 할지라도 이럴 수는 없었다.
백옥상은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는 두팔로 이미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모친의 알몸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침묵 속에 우주마저도 통째로 바스러 뜨릴 만큼 거대한 혈한(血恨)을 씹고 또 짓씹었다.
수림의 공지에는 하나의 돌무덤이 만들어졌다.
"……!"
또래의 소년이라도 가볍게 들어올릴 조그만 돌도 그에게는 천만근의 거암(巨岩)이었다.
유난히 심약한 체질 탓이었다.
십여 보도 채 뛰지 못했고, 걸어서도 일 리만 가면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고통 속의 나날들……
"헉! 헉!"
백옥상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져 한줌의 핏기조차 없었다.
이윽고, 돌무덤은 완성되고 백옥상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곤추세우며 석총(石塚)을 주시했다.
"어머니. 강해질 것입니다. 옥상은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것이며, 강해진 후에는, 무조건 천대만 받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복수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백옥상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초인(超人)과 잠룡(潛龍)의 조우(遭遇)
고독검신(孤獨劒神) 황자등(黃子騰)!
무림제일최강자(武林第一最强者)!
천추패왕지존(千秋覇王至尊)!
불멸무적투혼한(不滅無敵鬪魂漢)!
한 인간에게 이토록 많은 경외지명(敬畏之名)이 부여되었던 예는 고금무림 역사상 전무했다.
십전무도자(十全武道者).
그렇다. 그는 완벽한 무인이었다. 고독검신 황자등은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일신상의 모든 행복과 권위도 거추장스런 옷을 벗듯 팽개쳐버렸다. 가정(家庭)과 사랑했던 아내일지라도 그의 마음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무도수행(武道修行) 삼십 년만에 그는 진정한 무인(武人)이 될 수 있었다.
일만 번의 대승부를 통해 불멸무적투혼한(不滅無敵鬪魂漢)이 되었고, 중원 십팔만 리도 좁다 여겨 환우의 모든 강자를 찾아 결투를 벌었다.
북해의 빙백천마존(氷魄天魔尊) 냉천(冷天)를 비롯하여 천축의 소뢰음사(小雷音寺)와 대뢰음사(大雷音寺)의 지존들인 변황쌍천대불(邊荒雙天大佛)과 독문(毒門)의 영원한 절대자로 숭앙받는 독황(毒皇) 사륭(嗣隆) 등등....
그야말로 무수한 강자들을 꺾으며 그는 환우제일최강자의 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초인(超人)은 포효했다.
――무림(武林)은 강자만이 존재할 수 있으리니, 강자존(强者存)의 철칙은 무림율법(武林律法)이다!
들었는가?
고독한 사자의 포효성을?
<강자존(强者存).>
강자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림의 율법이었다.
진정 강한 자만이 만인 위에 군림할지니, 중원최강자(中原最强者)인 고독검신 황자등은 초인(超人)의 신화(神話)를 탄생시킨 진정한 강자였다.
그렇지만 빛(光)이 있으면 어두운 그늘이 존재하듯, 그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슬픈이야기는 언제나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
여인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했다.
그녀의 눈앞엔 십여명의 관병들이 살기띤 모습으로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계집 같으니!"
"꼽추 병신새끼하고 붙어 살더니 정신이 훼까닥 한 모양이지? 감히 죄수를 따돌려?"
관병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점차 다가들었다.
관병들의 조장(組長)인 듯한 인물은 사십대 중반의 투박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가 문득 수하들을 제지했다.
"죄수들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는 백타복의 아내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디 있느냐? 죄수들의 행방을 알려 준다면 죄과를 묻지 않겠다."
"저는....몰라요."
백타복의 아내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썅! 조장! 지금 뭐하는 겁니까? 죄수들을 잡지 못하면 우리가 어찌 되는줄 몰라서 지금 한가하게 계집하고 말장난이나 하자는 겁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관병 하나가 퉁명스럽게 항의하고 나섰다. 관병조장은 그런 수하를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왕국충(王國沖)!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저 여잔 죄가 없어. 백타복이 주동자지 마누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닥달한단 말인가?"
"이런 빌어먹을! 유조장(劉組長)이 왜 그 나이 먹도록 조장밖에 못해먹고 있는지 아시오? 그놈의 정직한 마음 때문이란걸 조장 빼고는 아마 개봉부 사람 전체가 알 거요."
왕국충이란 관병은 여전히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이죽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관병 열세명을 거느릴 수 있는 조장은 유홍비(劉洪飛)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다. 사실, 그 나이면 백 명 이상을 총괄하는 포두(抱頭) 자리에 있어야 정상이지만 유홍비는 진급이 거의 안되다가 지난 해에야 간신히 평조원에서 조장으로 승진한 위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능력이 모자란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승진이 늦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성품(性品) 탓이었다.
상관에게 아부를 하거나 뇌물을 상납할 정도로 비굴한 성품도 지니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도무지 생기는 것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못하고 사비(私費)를 털어서라도 나서는 정직함은 그를 항상 한직(閑職)에 있게 만들었다.
그나마, 딸이 혼기가 차자 부친의 위신 때문에 그의 부인이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약간의 패물을 팔아 상관의 집에 귀한 술이었던 호골주(虎骨酒) 한 동이를 사다 바친후에야 간신히 조장으로나마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조원(組員)들이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말단관병이 받는 녹봉이라고 해보아야 사실 별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간신히 제 입에 풀칠할 정도나 될 뿐, 여유 있게 생활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뒤로 돈을 받고 일을 봐주기가 예사로운 현상이 되었고, 나중엔 죄 있는 자들도 돈을 받고 눈감아준다거나, 심할 경우엔 죄진 사람 대신에 죄없는 선량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조장인 유홍비가 그짓을 못하니 조원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데야 상관의 권위가 설리는 사실상 만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런 불만이 오늘 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조장 혼자 깨지는거야 누가 뭐라겠소만, 죄인들을 잡아가지 못하면 우리까지 치도곤을 당해야 한단 말이오. 난 그렇게 못하오!"
왕국충의 항변은 강경했다.
그는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한 인물이었다.
나이는 스물 여덞밖엔 되지 않았으나, 홍등가(紅燈家)의 포주나 고리대금업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꼬리를 달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렇지만, 동료들에게 인기는 좋았다. 항시 앞장서 술집엘 가고, 국밥이라도 먹을라치면 계산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이 미안해서 낼라치면 그와 멱살을 쥐고 싸워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라나 어쩐다나.....
조원들의 분위기는 점차 왕국충에 동화되어 살벌하게 변해갔다.
"그래서? 죄없는 여자를 고문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유홍비는 살기를 감지하면서도 호통을 쳤다.
"왜 그렇게 저 계집을 감싸는거요? 혹시 꼽투 모르게 저 계집과 배꼽이라도 맞추었소이까? 하긴 꼽추 망나니의 마누라이기엔 아까운 미색이지."
왕국충은 느물거리며 유홍비의 어깨를 감싸며 귓전으로 입을 가져갔다.
"조장. 그저 물러나 있으면 됩니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하리다."
"네놈 감히......!"
호통을 치려던 유홍비의 말이 중간에서 끊어지며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옆구리에 싸늘하고 날카로운 비수의 예기(銳氣)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백정의 독종같은 마누라가 조장을 유혹하여 감춰두고 있던 비수로 찔러 순직(殉職)시키고, 남은 조원들이 조장의 복수를 하고, 도망간 죄수를 체포하여 금의환부(錦衣還府)한다는 소설(小說)을 꼭 출판(出版)시켜야만 하겠소?"
"......."
머뭇거림은 비수의 예리한 날이 한치 파고들면서 바뀌었다.
"난....모르는 일이네."
"그저 조장은 죄수들이 도망간 흔적이나 찾아 보시라는 말이외다."
어느새 물러나 웃고 있는 왕국충의 손엔 비수가 없었다.
이어 왕국충은 백타복의 부인을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순순히 불지 않으면 네년의 껍데기를 벗겨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아악!"
처절한 여인의 비명이 숲속을 울려퍼졌다.
"흐흐. 왕형이 몽둥이 찜질을 시작했군."
"왕형의 여자 다루는 솜씨는 정말 끝내주더군. 어떤 여자라도 왕형이 일단 한 번 올라타기만 하면 다음엔 누가 가도 수월하게 할 수 있거든."
"흐으.....! 오늘 또 한번 우리의 단합된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겠는걸?"
관병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욕정으로 물들이며 왕국충이 사라진 숲속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빌어쳐먹을 계집! 기왕 죽을거면 극락구경이나 해보고 뒈지지!"
왕국충의 노기띤 음성과 함께 그가 바지춤을 추여올리며 숲속에서 나왔다.
그는 신경질적인 말투로 유홍비를 쏘아보았다.
"계집은 자살했소. 내 책임은 아니오. 죽겠다는 계집을 무슨 수로 말려? 퉤! 재수 없는 계집 같으니!"
왕극충은 침을 뱉으며 조원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갔다.
유홍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나는 직업을 잘못 택했군."
그는 잠시 숲속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미안하오.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날이 올른지......"
유홍비는 혼자 개봉부로 향했다.
그날부로 사표를 집어던진 유홍비는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가 땅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는 풍문이 들려온 것은 후일담(後日談)이었다.
울창한 수림이었다.
"헉! 헉!"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림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던 백옥상은 일순 신형을 멈춰세웠다.
"흑!"
학질에라도 걸린듯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은 쓰러질 듯이 휘청였다. 찢어질 듯이 부릅떠지는 백옥상의 눈엔 지옥같은 영상이 번져가고 있었다.
"어머니……!"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그 보다 더욱 무미건조하게 흘러나오는 한 줄기 음성은 수림 전체의 정적 속에 무겁게 침잠되어갔다.
백옥상의 발 앞엔 한명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걸쳐진 마의(麻衣)는 갈가리 찢겨져 있고, 벌거벗겨진 백옥빛 나신은 아무렇게나 벌려진 채 나뭇잎 속에 뒹굴고 있었다.
피로 물들고 퍼렇게 멍든 얼굴, 참혹히 일그러진 젖무덤,
땀에 젖은 낡디낡은 치마가 찢겨진 사이로 들어난 허연 하체의 중심부는 열상(裂傷)에서 흘러나온 선혈과 희끄므레한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털썩!
백옥상은 하늘과 땅이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참히 난행당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는 여인은 바로 그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나이 어린 백옥상일지라도 자신을 낳아준 이 성스런 여인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P이 있었다.
"크흐흐흐....!"
상처 입은 야수의 통곡이 이렇게 처절한가?
한 줄기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누가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가?
설사, 신(神)이라 할지라도 이럴 수는 없었다.
백옥상은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는 두팔로 이미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모친의 알몸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침묵 속에 우주마저도 통째로 바스러 뜨릴 만큼 거대한 혈한(血恨)을 씹고 또 짓씹었다.
수림의 공지에는 하나의 돌무덤이 만들어졌다.
"……!"
또래의 소년이라도 가볍게 들어올릴 조그만 돌도 그에게는 천만근의 거암(巨岩)이었다.
유난히 심약한 체질 탓이었다.
십여 보도 채 뛰지 못했고, 걸어서도 일 리만 가면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고통 속의 나날들……
"헉! 헉!"
백옥상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져 한줌의 핏기조차 없었다.
이윽고, 돌무덤은 완성되고 백옥상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곤추세우며 석총(石塚)을 주시했다.
"어머니. 강해질 것입니다. 옥상은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것이며, 강해진 후에는, 무조건 천대만 받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복수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백옥상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추천79 비추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