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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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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44 회 작성일 24-02-20 13: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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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클럽 타란툴라.
입구에 대형 거미와 거미줄을 네온으로 장식해 놓은 클럽의 분위기는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일권은 입구에서 스테이지로 연결되는 붉은 카펫의 회랑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고 있었다. 극장도 아닌 술집에서 줄을 서 보긴 처음이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면서도 대열 속의 선남선녀들은 희희낙락 즐거워했다.
줄이 짧아지면서 일권은 왜 입장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는지 알 수 있었다. 회랑 끝에는 간이 검문소 같은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나이 지긋한 지배인이 정중하게 한사람 한사람의 손을 부여잡으며 새끼손가락에 뭔가를 붙여 주고 있었다.
일권도 차례가 되어서 앞사람의 행동을 눈여겨 봐 두었다가 똑같이 따라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턱시도 차림의 지배인이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손님께서는 꿀벌이 어울리겠군요. 꼭 여왕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일권의 새끼손가락 손톱에 스티커 한 장을 붙여 주었다.
『이게 뭡니까?』
『타란툴라에 처음 오셨나요?』
『그렇습니다만.』
『그걸 붙이시고 편안히 즐겨 보십시오. 그럼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지배인이 정중한 손짓으로 일권을 밀었다. 일권은 영문을 모른 채 뒷사람에 떠밀려 홀로 들어갔다.
스테이지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드라이아이스의 연막이 자욱한 상태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빛줄기가 사방에서 발사돼 군중을 관통하곤 했다.
일권은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웨이터가 세 번이나 달려와 주문을 청했지만 그는 계속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여기서는 새끼손가락을 항상 길게 세운 채 놀아야 해요. 술을 마실 때도,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마찬가지죠. 새끼손가락이 타란툴라의 신분증이거든요.』
누군가가 옆에서 말하는 소리에 일권은 고개를 들었다. 장화란의 동생 화숙이 일권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요. 여기가 대한민국 땅 맞는 겁니까?』
『한국 땅에서도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곳이죠. 어때요, 와 본 소감이?』
『입구에서부터 얼이 빠져 버렸어요. 이 스티커를 붙이는 이유가 뭡니까?』
『학교 다니실 때 미팅 안 해보셨어요? 일종의 짝맞추기 스티커예요. 처음엔 손톱에 문신을 새겼었어요. 워낙 사람들이 많이 밀려서 간편한 스티커로 대체한 거죠.』
『어떻게 짝을 맞추는 거죠?』
『같은 곤충 그림끼리 파트너가 되는 거예요.』
『그럼 스티커 무늬가 전부 달라야 하겠군요.』
『물론이죠. 곤충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 예외가 있긴 해요. 벌이나 개미 스티커는 좀 까다로워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암수의 사랑이 불평등하거든요. 여왕 한 마리에 여러 마리의 수컷들이 경쟁을 하잖아요.』
『그럼 여기서도?』
『그래요, 벌이나 개미 스티커를 받은 남자들은 고생 좀 하게 되죠. 여왕벌, 여왕개미 스티커는 하나씩밖에 없으니까요.』
『같은 술값 내고 그런 불공평한 스티커를 받을 사람이 있나요?』
『천만에요. 자신만만한 남자들은 오히려 그런 스티커를 선호하죠. 여왕벌이나 여왕개미는 특별하니까 말예요. 스티커 배부하는 지배인 있잖아요, 관상을 볼 줄 아는 역술가 출신이에요. 기막히게 커플들을 잘 맺어 줘요. 성격과 용모, 궁합까지 한눈에 들여다보고 짝을 만들어 준대요.』
『누가 누군지 어떻게 기억하고요?』
『사람의 얼굴을 전부 외운대요. 자기가 누구한테 어떤 스티커를 나눠 줬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가 막힌다는 거예요. 아마 곤충의 특성과 사람의 관상을 결부하는 노하우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저 아저씨는 딱 두 명의 특별한 여자에게만 여왕벌과 여왕개미 스티커를 선사해요. 당연히 용모와 성격이 군계일학인 미인이 뽑히게 돼죠. 그 여왕들은 많은 수컷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고를 권리가 있어요. 그러면 그 테이블 술값은 공짜구요.』
『기막힌 상술이군요.』
『가만히 저 남녀들을 보세요. 한결같이 손가락을 세워 들고 자기 짝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저기 홀 중앙에 잔뜩 모여서 춤추는 남자들 보이죠? 수캐미들일 거예요. 그 가운데서 춤추는 여자가 여왕개미고요.』
일권은 화숙의 설명을 들으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은비를 찾아다니면서 참 요지경 같은 유흥가 풍속도를 많이 겪어 보았지만 이런 해괴한 곳은 금시초문이었다.
스테이지의 춤추는 곤충(?)들을 주시하던 일권은 문득 화숙을 돌아보았다.
『저 춤추는 여자가 여왕벌일 수도 있지 않아요?』
『여왕개미예요.』
『그럼 여왕벌은 어디 있을까요?』
『그건 갑자기 왜 묻죠?』
『이상하잖아요. 여왕이 두 명이라면서 저 여자를 여왕개미라고 어떻게 단정하죠?』
『후후, 보기보다 예민하시군요. 혹시 수펄 스티커를 받으신 거 아녜요?』
일권은 손가락을 그녀 앞에 내밀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서 애타게 여왕벌을 찾고 계셨던가 보죠?』
『그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후훗, 여왕벌은 당신 앞에 있어요. 그러니까 저 여자가 여왕개미인 게 확실하죠.』
화숙이 새끼손가락을 일권의 코 앞에 내밀어 보였다. 기다란 손톱에는 큼직한 여왕벌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여왕벌 테이블에 합석한 기분이?』
화숙은 애교 넘치는 얼굴로 일권을 보았다. 어리둥절하던 일권도 그녀의 재치에 이마를 찰싹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여왕벌 테이블에만 선사되는 VIP 메뉴가 차려졌다.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며 주문을 보채던 웨이터의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여왕벌에 대한 타란툴라의 법은 확실했다.
『사실은 스티커 지배인을 매수했어요. 잘 아는 아저씨거든요. 타란툴라에서는 엄격하게 스티커 관리를 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이런 부정행위가 성공할 수 없죠. 그나마 내 얼굴이 이 정도였으니까 아저씨도 눈감아 준 거라고요.』
그녀가 술을 따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일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타란툴라를 가득 메운 여자들 중에서 그녀만큼 매력 있는 여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길 자주 오나 보죠?』
『어쩌다 한 번씩 와요. 쉬는 날이면 적적하기도 하고 해서.』
그녀 입으로 말하진 않았어도 일권은 그녀의 직업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언니 장화란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화숙은 구태여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여기 오면 철저히 즐기기만 해요. 우리 업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여기서 푸는 거죠. 그러다 보면 세월이 그럭저럭 잘 넘어가고요.』
이번엔 일권이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아직 젊은 나이에 세월을 넘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자를 마음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걔를 왜 찾는데? 이 바닥 떠난 지가 언제라고.』
턱시도를 벗고 점퍼를 입은 지배인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아구찜 속에 든 미더덕을 씹으면서 그는 과장되게 낯을 찌푸렸다.
『그 중에 혹시 고은비 언니 기억하세요? 이름 외우는 데 귀신이잖아요.』
화숙은 자꾸 그의 입에 젓가락을 옮기면서 애교를 떨었다. 스티커 지배인의 퇴근시간을 기다려 아구찜집으로 납치하다시피 끌고온 것도 화숙이었다.
『그년들 이름을 어떻게 다 외워! 죄다 가명 투성이인데. 고은비? 근데 걔는 알 것도 같다.』
『좀 도와 주세요. 아저씨는 장미촌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잖아요.』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하지만 행방은 나도 몰라. 알았으면 진작 너한테 말해 줬지. 니가 한두 번 걔네들 찾았었냐?』
지배인은 무뚝뚝하게 화숙의 말을 받아넘겼다.
『내가 화란 언니하고 같이 일했던 언니들을 찾는 거하고 이분이 사람 찾는 거하곤 차원이 달라요. 이분은 은비 언니 약혼자라고요.』
『뭐, 약혼자라고?』
화숙이 일권을 소개하자 지배인은 새삼스럽게 실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그의 반응을 훔쳐본 화숙이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저씨가 은비 언니가 어딨는지 알 순 없겠죠. 그냥 가능성만이라도 말씀해 보세요. 아저씨 말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볼 테니까 말예요.』
『은비가 이 바닥 떠난 지가 언젠데, 이제사 걔를 찾겠다고 나타나?』
『이런 곳에 있는지조차 몰랐었대요. 알았으면 당장 왔겠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찾아다니셨대요.』
『어딜 찾아다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허깨비만 쫓아다녔구먼.』
그가 일권을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고 나서 다시 아구찜을 먹기 시작했다. 일권은 그의 빈정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나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면목 없습니다.』
『정말 결혼을 약속했나?』
『……네.』
일권은 그의 형형한 눈빛에 질려 자신없는 대답을 했다. 역술가 출신답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사람의 흉중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길을 일권은 정면으로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애써 위로했다. 지배인이 거듭 약혼의 진위를 묻는 걸로 미루어 그렇게 대답해야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은비가 사라져 버린 마당에 약혼자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은비의 어머님이 임파선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꼭 은비를 찾고 싶습니다.』
『약혼자인 게 분명하군. 거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어째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고생을 시켰나?』
『죄송합니다.』
『이 바닥에 들어온 여자들 하나도 죄 없어. 남자들이 그렇게 만든 거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사정이 안됐군.』
지배인의 눈에 동정의 빛이 감돌자 화숙이 잽싸게 소주를 따랐다.
『제 잔 받으세요. 아저씨께서 사정 봐 주시면 톡톡히 신세 같아 드릴게요.』
『뭘루 갚을래?』
『아저씨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그러자 지배인이 푸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니 언니 빼다 박았구나. 하지만 화숙이 넌 내 뜻을 들어줄 수 없을 거야. 내가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고 해도 처제를 품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처제?
일권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럼 저 양반이 죽은 장화란의 남편이란 말인가?
그러나 지배인의 말을 받아치는 화숙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피이, 아저씨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지셨어요. 천하가 알아 주는 색마께서.』
『임마, 외부 손님 앞에서 말 조심해. 막 달린 주둥아리래두 말은 가려서 해야지.』
『암튼 뜸들이지 말고 좀 도와 주세요. 내가 안 되면 새로 들어온 영계라도 상납해 드릴 테니까 말예요.』
『관둬라 관둬. 인간 최무송이 그깟 영계에 쓸개 내줄 줄 알았더냐? 근데 그것부터 좀 알고 넘어가자. 화숙이 너 뭣 때문에 이 양반 일에 발벗고 나선 거냐?』
『제발 이거 저거 따지지 좀 마세요. 아무려면 어때서 그래요?』
『이놈아, 아까 스티커 조작을 부탁할 때부터 궁금했던 참이야. 니가 여왕벌이고 이 사람이 수펄이니,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그런 사이면 뭐 하려고 약혼자를 찾아다니겠어요?』
『내가 누구냐, 대 타란툴라의 문지기 아니냐. 척 보면 남녀의 궁합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실 거예요? 나도 화류계의 꽃이지만 형부하고 엉뚱한 오해를 받고 싶진 않다고요. 이분은 은비 언니의 반쪽이고, 그렇다면 이분은 제 형부가 되는 셈이잖아요.』
『그런가?』
화숙의 누누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지배인은 자꾸만 둘의 관계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아무리 살펴봐도 궁합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거였다.
『자리를 옮기자. 니 언니한테 진 빚도 있고 하니 내 아는 데까지 말해 주지.』

지배인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신사동 뒷골목의 후미진 여관 건물이었다. 그는 여관의 5층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화숙은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대 타란툴라의 백작이 이런 데서 살고 있단 말예요?』
『뭐가 어때서 그러냐? 난 편하기만 하고 좋은데.』
『말도 안 돼요. 그 동안 돈 벌어서 다 어디에 쓰신 거죠?』
『애인이 많았잖니.』
『사랑을 돈으로 하나요?』
『그러게 말이다. 자꾸 돈이 들더라.』
『우리집으로 오세요. 그래도 난 집 한 채는 갖고 있어요. 건넌방 하나 내줄 테니까 당장 이사 와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허나 걱정 말거라. 내 이렇게 살아도 우리 마누라와 자식들은 분당 넉넉한 평수의 아파트에 모셔 놓고 있으니까. 뭣들 하고 있어, 어서들 앉아! 내가 재미있는 걸 보여 줄 테니.』
지배인은 그들을 앉힌 다음 침대 밑 라면박스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채널을 4번으로 맞춰 놓고 기다려라. 카운터에 내려가서 이 걸 돌릴 테니까.』
그가 방을 나간 뒤, 한참 후에 TV화면에서 치지직 소리가 나더니 해괴한 장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녀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포르노 필름이었다.
『어머, 웬 포르노를! 아저씬 참 짓궂으셔.』
화숙이 민망한 얼굴로 일권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민망한 건 마찬가지였다. 빈 방에 남녀 둘이 앉아서 포르노 화면을 지켜보는 건 고역이었다.
『이해하세요, 괴팍하긴 해도 인정이 많은 분이죠. 화란 언니가 친오빠처럼 의지했던 분이에요.』
화숙은 의도적으로 TV를 외면한 채 일권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 필터에서 지배인의 칼칼한 음성이 터졌다.
- 한눈 팔지 말고 똑똑히 화면을 봐. 니가 찾는 언니들 나오는지 말야.
『뭐라고요?』
- 난 여기서 테이프 돌아갈 때까지 감시해야 하니까 둘이 찬찬히 보고 있어. 끊는다!
화숙이 황급히 수화기를 놓고 TV 앞에 꿇어앉았다.
『잠깐만요.』
그녀는 뚫어지게 화면을 보더니 쩌억 입을 벌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주희 언니가.』
그녀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탄식을 터뜨렸다.
화면은 쉬지 않고 섹스의 연속이었다. 끝날 때까지 세 명의 여자가 등장했는데, 화숙은 그녀들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화면 속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눈이 풀려 있었다. 필시 촬영 때 약물 같은 것에 의해 제정신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갔을 때, 그녀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알아보겠더냐?』
지배인이 테이프를 들고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죠? 언니들이 어쩌다 저 지경까지 된 거예요?』
『진정하고 들어라. 차근차근 얘길 할 테니.』
지배인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천장에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나서 소설 같은 이야기의 매듭을 풀어나갔다.

포장마차의 영업이 끝날 때까지 화숙은 세 병의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체질이 원망스럽다며 마지막 병은 나발을 불기도 했다.
일권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녀가 만취해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란툴라의 백작이 들려 준 이야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한때 이 나라 최고의 미녀들은 모두 룸살롱에 모여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향락산업이 번창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심야영업제한을 법으로 명시하면서부터 잘나가던 룸살롱들은 치명타를 맞게 되었고, 그 여파로 미희들 역시 직장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재미 좋던 시절, 이 땅의 여성 열 명 중 한 명꼴로 향락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올 만큼 많은 여성들이 이 바닥에 몰려왔었는데 갑자기 수요가 줄어들자 공급과잉현상이 일어난 거였다.
그런 연유로 미희들의 몸값은 하락했다. 짧은 영업시간 동안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미희들은 꼼짝없이 빈손으로 아침을 맞아야 했다. 자정 무렵이면 삐끼들을 동원해 숏타임의 사랑을 팔아 일당을 버는 축들도 많았다. 그 시기에 많은 룸살롱들이 업종을 바꾸었으며, 많은 미희들 역시 룸살롱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업소로 전직을 했다.
그러나 강남 유흥가 일대의 호스테스들 중에서 의식 있고(?) 자존심 강한 몇몇 그룹은 은밀하게 뜻을 뭉쳐 위기를 공동대처할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수시로 만나 업주들의 횡포를 체크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싼값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스테스의 신분이야 기실 별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끼리 똘똘 뭉치고 보니까 은근히 파워라는 게 생겼다. 그들은 아예 노동조합을 만들어 버릴까 의논하기도 했었다.
그들의 리더가 바로 장화란이었다. 화란은 한 업소의 마담으로 있으면서 많은 후배들을 거느렸다.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후배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그녀의 신분도 상승했다.
업주도 그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그녀가 거느리는 사단도 사라져 버릴 것이므로.
그러나 잘 나가는 길엔 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었다. 장화란의 돌출행동을 눈여겨 보던 업주들이 제동을 걸기 시작한 거였다.
업주들의 방해공작으로 많은 후배들이 변절해 돌아섰다. 아무리 의자매를 맺은 사이라 해도 의리보다는 생존을 쫓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뿌리 없이 떠도는 인생들인데 의리라는 건 공허한 추상명사에 불과할 뿐인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몇몇은 끝까지 화란을 믿고 따랐다. 화란은 업주들의 공세에 굴하지 않고 한번 세운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깨들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악에 바친 그녀는 대로에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란은 은퇴를 선언했다. 많은 후배들이 경악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그녀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은퇴식 말미에 그녀가 덧붙인 말은 후배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우리도 업주가 되는 거야. 무슨 돈을 끌어서라도 가게를 얻을 테니까 생각 있는 애들은 동참해. 까짓거 한 평짜리 룸 하나면 어떠냐. 망할 때 폭삭 망하더라도 우리끼리 해보는 거야. 개업식 해놓고 한 달 동안 바겐세일 기간을 만들자고. 우리 가게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무조건 벌려 주는 거야. 우리가 돈이 있니, 빽이 있니. 경쟁력이라곤 몸뚱이밖에 없잖아. 저질러 보자고.
장화란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무서운 추진력으로 뛰어다니며 기어이 업소를 만들어냈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자금의 출처를 알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여러 사람이 주식회사 형태로 자본금을 투자했다는 건 확실했다. 타란툴라의 백작도 거금 천만 원을 투자한 물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작의 증언에 의하면, 장화란의 고객들 중 몇몇 재력가들이 무이자로 목돈을 빌려 줬다는 소문이 그 당시에 떠돌아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당당히 업주가 되었고 화끈한 서비스로 룸살롱 업계를 흔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상하게 손님은 들끓는데 수지가 맞지 않았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문을 닫아야 했다.
그렇게 장화란의 전성기가 막을 내리나 싶었는데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정체 불명의 재력가가 그녀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준 거였다. 대출조건이 아주 까다로운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잔뜩 빚을 지고 있던 화란은 앞뒤 재보지도 않고 선뜻 또 한 차례 일을 벌였다.
그게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두 번째 가게를 내면서 그녀는 제딴엔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데리고 있던 후배들에게 당분간 같이 굶자는 양해를 구했고, 주방의 나무젓가락 하나를 사는 데도 전자계산기를 튕겨 가며 알뜰하게 챙겼다.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수지를 맞추긴 했지만 번 돈은 몽땅 물주의 몫이었다. 사채이자라는 게 참 더럽고 치사한 거였다.
또 몇 달이 흘렀을 때, 화란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뜯기는 게 호스테스 시절보다 더 참혹한 착취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몇 달인가 이자를 연체하자 물주의 해결사들이 몰려와 가게를 몰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실의에 빠진 화란을 위해 후배들이 보증을 섰다. 자신들의 몸을 담보로 상환 유예기간을 늘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각서를 받고도 못 믿어 공증까지 의뢰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향락산업 신디게이트의 음모였다는 걸 그녀들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국 화란은 깨끗이 도산했다. 가게를 몰수당한 것은 물론이고 보증각서를 작성한 여덟 명의 자매들을 고스란히 바치고 말았다. 그들에게 끌려간 여덟 명의 행방은 그날 이후로 오리무중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장화란도 스스로 한많은 생을 접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고 탄식하던 화숙이 포장마차를 벗어나자마자 풀썩 고꾸라졌다.
『우리 언니 어때요? 끝내주는 여자 아녜요? 그렇게 험한 길을 걸어 왔으면서도 동생한테는 내색 한 번 안 했죠. 자기가 무슨 유관순 언니라고! 난 언니한테 불만 많았어요. 언니가 절대 눈도 돌리지 말라던 이 세계에 발붙인 것도 다 그때문이에요. 나도 언니하고 똑같은 길을 걸을 거예요. 이렇게 살다가 죽어서 언니 만나면 꼭 한 마디 해줄 거예요. 날 혼자 남겨 두고 떠났으면서 내가 제대로 살기를 기대했느냐고 말예요.』
일권은 그녀를 들쳐업고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길게 늘어진 여체는 무거웠지만,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땅끝까지도 이렇게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화숙이 눈을 뜬 건 이튿날 열 시 무렵이었다.
일권이 애써 콩나물 해장국을 끓여 왔는데도 한 술도 입에 대지 못했다.
『밤새 여기 계셨나 보죠?』
그녀가 누운 채로 머릿결을 매만지며 물었다.
『허락 없이 동침을 했습니다.』
『허락은 무슨……. 근데 제가 흉한 꼴을 보이진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뇨, 저도 곯아떨어졌으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죄송해요. 전 정말 주량이 무제한이거든요. 근데 어젯밤은 어떻게 필름이 끊겼는지 기억이 안 나요.』
『때론 그렇게 취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요.』
『그나저나 백작 아저씨 추측대로라면 은비 언니는 일본에 있다고 봐야겠죠?』
『그런 것 같은데……참 막막하네요.』
타란툴라 백작은 장화란의 일대기를 들려 주고 나서 자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추가했었다.

난 화란이한테 빚이 많아. 한때 같은 업소에 있었는데 걔가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주곤 했지. 내가 궁할 때면 물어 보지도 않고 은행 현금카드를 쥐여 주곤 했어.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이 방에서 자고 간 적도 많았지. 그러면서도 조건을 단 적은 없었어. 내 평생을 화류계에 바쳤지만 화란이 같은 아이는 전무후무할 거야. 그랬으니 나도 걔가 사업한다고 설칠 때 쌈짓돈을 서슴없이 내놓을 수밖에. 그런데 기가 막힌 건 말이다. 이년이 글쎄 파산한 날, 나를 부르더니 통장 하나를 주는 거야, 글쎄! 다 못 갚는 걸 양해해 달라면서 오백만 원이 든 통장을 주더라니까. 그러면서 끌려간 애들 수소문을 부탁하더라.
그래서 여기저기 쑤셔 보니까 끔찍한 소문이 들리더라구. 화란이한테 뒷돈을 대 주었던 물주라는 놈이 완전히 걔들을 주물러 버린 거야. 히로뽕 맞혀서 포르노 찍고 일본 브로커한테 팔아넘겼다는 설이 유력했어. 저 테이프를 구하고 나서 소문이 맞다는 걸 알았지.
내가 화숙이 너한테 이런 얘기 털어놓는 게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른 체할 수만도 없잖냐? 저 친구가 꼭 은비를 찾아야겠다는데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도 없고.

『괜히 도와 드린다는 게 더 실망만 안겨 줬는지 모르겠군요.』
화숙은 의기소침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화숙 씨가 충격이 더 컸을 텐데요.』
『저야 늘 그 속에 살고 있으니까 더 이상 충격 받을 감정도 없어요. 하지만 아저씬 은비 언니한테도 실망을 했을 텐데…….』
은비라는 이름이 나오자 일권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숙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도 은비 언니 포기하지 않으실 건가요? 언니는 댁의 생각과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이쯤 해서 포기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 편하지 않을까요? 이제 와서 언니가 과거의 약혼자에게 미련을 갖고 있을 턱도 없고요.』
『만나야죠. 은비가 설령 나를 잊었다고 해도 나는 은비를 만나고 말 겁니다. 난 6년 동안 은비한테 영혼을 투자했어요. 그게 억울해서라도 꼭 찾아갈 겁니다.』
『제 눈이 정확했군요. 첨 봤을 때부터 아저씬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화숙 씨도 계속 도와 주셔야 합니다. 백작 어르신한테 좀더 구체적인 루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어떤 조직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됐다면 틀림없이 루트가 있을 겁니다. 참, 그리고 또 확인할 게 더 있습니다. 화란 씨 장례식 때 은비가 영안실에 왔다는데 기억하십니까?』
『전 못 봤어요. 근데 부의금 봉투가 들어와 있더라구요. 아마 일부러 절 피했을 거예요.』
『언니 장례식과 은비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중요해요. 어떤 게 먼저죠?』
『일본에 건너간 게 먼저죠. 언니도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몰라요. 단순히 빚 때문에 자살할 언니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언니가 숨을 거뒀을 때 일본에 있던 은비가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고 봐도 좋겠죠?』
『당연히 그랬겠죠.』
『그렇다면 의외로 은비의 행동반경이 넓다는 얘기 아닙니까? 조직에 의해 갇혀 있다면 자기 마음대로 운신하기가 용이하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군요!』
『은비의 입장이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그런 걸 보면 반드시 꽉 막혀 있는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 은비가 바람이 아닌 이상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었다면 흔적도 남겼을 테고요. 나는 은비를 찾을 거란 확신이 듭니다. 화숙 씨 덕분에 희망이 생겼어요. 어쩌면 벌써 절반쯤은 은비한테 다가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겠어요.』
화숙이 팔을 뻗쳐 그의 손을 쥐었다. 그는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몇 번 쓰다듬은 뒤 시트 속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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