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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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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67 회 작성일 24-02-20 11: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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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가슴은 예뻤다. 반듯하게 서 있는데도 밑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두가 버선코처럼 곧추서 위를 향하고 있었다. 젖가슴의 곡선은 어깨와 무리 없이 연결돼 팔과 손가락까지 영향을 끼쳤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곡선의 조화.
찰칵…….
동선은 여자의 겨드랑이를 클로즈업해서 셔터를 눌렀다.
『됐어, 정말 최고였어. 은영이 손가락은 그냥 예쁜 게 아니야.몸 안쪽에서부터 신비한 매력의 줄기가 이어져 손끝까지 조화를 이루고 있거든.』
은영은 홀린 듯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의 반라를 깨닫고 가슴을 가렸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허리를 폈던 동선이 다시 피사체를 노려보았다.
『바로 그거야, 그대로 있어.』
그녀는 마네킹처럼 가슴을 가린 채 동작을 정지했다.
그가 렌즈를 비틀어 초점을 맞춘 후 몇 차례 더 셔터를 눌렀다.
『손가락을 활짝 펼쳐.』
가슴에 걸린 손가락이 단풍 이파리처럼 벌어졌다. 손바닥에 가리워진 가슴의 융기는 생고무 같은 탄력으로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선홍빛 유두가 노출되자 그는 한 발짝 다가와 렌즈를 바꿔 끼고 찍어 댔다.
원룸 오피스텔은 과학자의 연구실과 어딘가 흡사한 데가 있었다. 각종 카메라와 부속들이 즐비한 선반 끄트머리에 간이 암실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보는 데서 인화작업을 했다. 물 속에 잠긴 인화지에서 서서히 그림자의 입자들이 엉기기 시작했다. 흑백 필름이었지만 흑과 백 사이에는 수십 단계의 명도가 존재했다.
드라이어로 인화지의 습기를 말리고 나니 신비한 형상이 그 곳에 남아 있었다. 그가 사진 속의 곡선을 소중하게 만졌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그게 나예요?』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사진들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은영이가 감추고 있는 매력의 일부에 불과하지.』
『저한테도 몇 장 주실 수 있나요?』
『원한다면 다 가져가도 돼.』
『그럼 사진을 왜 찍으셨어요?』
『아무에게나 보여 주기 힘든 곳을 은영이는 내게 보여 주었어. 그 마음을 받은 것만으로도 족해. 그 아름다움을 나만의 렌즈를 통해 포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고.』
은영의 볼이 빨갛게 상기됐다. 다소 어려운 얘기였지만 사내의 본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사진을 내려놓고 와락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격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설육이 입 안으로 들어와 잇몸의 점막을 훑었다. 그녀는 설육을 삼켜 버릴 기세로 강하게 흡입했다.
그는 그녀를 그대로 안고서 암실을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 떨어질 때까지 그의 설육을 물고 놓지 않았다.
침대는 유리창가에 있었다. 오피스텔 유리창의 구조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통으로 된 판유리여서 침대에 누우면 한강과 강변로가 환하게 내려다보였다.
은영은 유리창을 통해 한강의 찬란한 야경을 보았다. 그 한강 위에 아담과 이브가 떠 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코팅된 유리라서 오피스텔 내부의 풍경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유리잔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과 가슴을 애무했다.
그가 몸 안으로 진입해 오자 그녀는 사지를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의 몸 속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전진했다. 그녀는 사내의 경주를 위해 최단 코스의 지름길을 열어 주었다. 무릎을 직각으로 세우고 최대한 벌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 있었다.
사랑에 열중하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몸짓이 유리창에 스크린처럼 비쳤다. 그녀는 유리창 속의 남녀가 자신들의 모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누고 있는 사랑의 순간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그림이었다.
이 사람과 만난 지 겨우 네 시간.
여덟 시 퇴근 무렵에 만나 식사하고 노래를 부르고 데려다 준다기에 그의 차를 탔었다.
그녀의 집은 망원동. 그는 시내를 빠져나와 강변로를 타더니 갑자기 마포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핸들을 꺾었다. 만나서 함께 해야 할 절차는 다 밟았지만 커피 한 잔을 빠트렸다는 거였다.
그를 따라 들어온 강변로의 오피스텔은 카페나 다름없었다. 아기자기하고 격조 있는 실내 가구와 소품의 인테리어가 아무리 생각해도 독신 남성이 기거하는 방 같지가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는데도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할로겐 램프의 빛줄기 하나로 밝혀진 원목 테이블에 앉아 모카 커피의 향을 음미하면서 그녀는 솔직히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혹시나 그가 과잉배려로 빨리 데리고 나갈까 봐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불순한 생각을 품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그 방의 분위기가 좋아 오래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이 신비한 남자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다.
깐깐한 부모님의 눈총이 맘에 걸리긴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인생은 오직 나의 것!
은영의 인생에서 오늘처럼 황홀하고 가슴 설레는 밤은 없었다. 난데없이 선물 받은 진주반지와 멋진 저녁, 그리고 짜릿했던 블루스와 차분한 커피 타임. 그 모든 게 예쁜 손을 가진 덕으로 돌리기엔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감동했던 것은 그의 찬사였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발견한 것 같군요.
만나는 순간 그가 던진 찬사 한마디는 두고두고 그녀를 뿌듯하게 했다.
늘 마음은 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강변했지만 몸은 세상의 변두리에서 배회하는 서글픈 아이러니. 그런데 그는 그 한마디로 그녀를 세상의 중심에 서게 만든 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준 게 없었다. 가능하다면 일방적인 시혜의 방정식을 동등한 공식으로 풀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동등하다고 밝혔다. 그녀의 아름다운 손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게 엄청난 혜택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커피 후엔 칵테일을 마셨던 것 같았다. 그 뒤에 그가 아름다운 손을 기념하고 싶다며 벽 한 모퉁이에 스크린을 내려 스튜디오 무대를 만들었다.
그녀는 커튼 뒤쪽에 숨어 있는 촬영장비들을 보고 그의 직업을 눈치챘다.
아, 사진작가였어. 그래서 독특하고 섬세한 심미안을 가졌던 거야.
은영은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러 각도에서 카메라를 들이댔고 손에서 뭔가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듯 촬영에 열중했다.
그녀도 더불어 몰두했다. 그가 손의 선, 팔의 선, 어깨의 선을 모두 요구하고도 부족한 듯 허전한 표정을 하자 그녀는 안타까웠다. 그가 절실히 찾는 미의 실체와 진수가 몸 어디에 숨어 있다면 기꺼이 끄집어내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상반신 누드까지 감행하게 된 거였다.
이런 걸 충동이라고 해야 하나?
만난 지 네 시간만에 정사까지 이르게 된 속도위반의 관계.
그의 레이스는 격렬했고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레이스를 함께 뛰며 몇 번이고 감격했다. 이 충동적인 사랑이 앞으로 어떤 화근을 불러올지라도 후회할 생각이 없었다. 조건 없이 많은 것을 베푼 이 남자에게 그녀 또한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그가 골인 지점에 다다랐을 때 문득 임신 여부에 대한 의문이 들긴 했다. 일주일 전에 생리를 마쳤으니까 지금은 배란기, 임신의 가능성이 가장 농후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런 의문들을 지워 버렸다. 기분 같아서는 영혼이라도 깨끗이 씻어 주고 싶은 판인데 그런 복잡한 계산은 뒤로 미뤄도 충분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감았다. 사내에게 가장 깊은 각도를 허용하는 신뢰와 헌신의 자세였다.

심리학에 의거하면 기억의 파지율은 1시간이 지나면 40%, 1일이 지나면 60%,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거의 소멸돼 20% 정도만이 잠재기억으로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은 그런 기억의 자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재분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살아 온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면 뇌의 용량이 한없이 커져 사람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이 낙천적인 성향을 보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권은 습작 소설 보따리를 펼쳐 4,000매에 달하는 원고를 읽고 있었다. 도시의 집시로 방랑하던 6년 세월이 농축된 원고들. 그 낱장의 행간마다에 은비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기억의 파지율로 보면 벌써 휘발되어야 했을 그 기억들이 왜 그렇게 생생하고 오래도록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권은 해우소에 기거하면서 오후 시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써 왔다. 희수의 중개로 방송쪽 일을 틈틈이 해야 했지만, 카페를 경영하면서부터는 소설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시대감각에 맞는 소설 한 편을 그럴듯하게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떤 소재를 가지고도 원고지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상상력도 중요한 거지만 글은 경험에서 생명력을 얻는 법! 일권의 경험이라는 건 은비를 찾아 헤매고 다녔던 게 대부분이었다. 결국 그는 묵혀 두었던 습작원고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오후 내내 그는 원고를 읽으며 목이 메었다. 은비가 더욱 절실히 보고 싶었고 젊은 날의 자신이 안타까워 기가 막혔다.
『영업하나요?』
네 시를 조금 넘었을 때 첫 손님이 들어왔다. 보통은 여섯 시를 넘어서야 손님들이 찾아오는데 조금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해우소는 영업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카페였다. 문만 열려 있으면 아무 때나 들어와 마시고 싶은 걸 주문하면 되는 곳이었다.
일권의 눈치를 살피고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앉으십시오.』
『제가 방해한 건 아니겠죠?』
『천만에요, 뭘 드릴까요?』
『커피말고 뭐든지 좋아요.』
『그럼 녹차로 끓일까요?』
『네.』
일권은 녹차물을 올려 놓고 돌아와 원고를 치웠다.
『혹시 제 얼굴 기억하세요?』
그가 녹차를 잔에 따를 때 여자가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유심히 그녀를 들여다보다 갸우뚱했다.
『글쎄요, 절 보신 적 있습니까?』
『전 댁을 알고 왔어요, 일부러.』
『그래요?』
『은비를 찾고 계신다면서요?』
『은비를 알고 계십니까?』
『아뇨, 혹시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온 거예요.』
『제가 은비를 찾아다닌다는 얘기는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저번 이봉영 씨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은비가 행방불명된 날부터 계속 찾아다니셨다구요?』
『그런 셈이죠.』
『그 사이에 성과가 있기는 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6년 전부터 그냥 막연하게 찾아다니셨던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은비를 만난 사람이겠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삼 년 전에 걔를 봤으니까요.』
일권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맞은편 좌석에 걸터앉았다.
『어디서 만났죠?』
『서울에서요.』
『그럼 서울에 있었단 말입니까?』
『그건 확실히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선배 언니 하나가 죽었어요. 그 언니 장례식 때 은비가 왔었죠, 성모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렸는데, 밤늦게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찾아와 분향을 하고 퍽이나 섧게 울더라구요. 우는 옆모습이 참 예쁘다 싶었는데 뜻밖에도 은비였어요.』
『말을 나눴습니까?』
『아뇨, 그럴 경황이 없었죠. 전 그때 주방을 담당하고 있었거든요.』
『은비를 전부터 잘 알았나요?』
『얼굴만 아는 사이였어요.』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그건 제가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이에요. 은비와 어떤 사이였죠?』
그녀가 거꾸로 물어오자 일권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연인이었나요?』
그녀가 구체적으로 물어왔다.
『……클래스메이트였습니다. 은비는 우리 동기들 모두 사랑했던 연인이었죠.』
『그럼 친구?』
『요즘 나온 노랫말처럼 친구와 연인의 중간쯤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 겁니다.』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일권은 그녀에게 명쾌한 답변을 못 한 것이 답답해서 설명을 보탰다.
『은비의 애인은 많았을 겁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일 거구요. 그러나 실종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사람은 나였습니다.』
『마지막 애인이라? 그래서 의무감을 느끼신 거로군요?』
『은비 어머니와도 잘 알구요. 지금도 가끔 찾아갑니다.』
『은비가 지금 어떤 곳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알면 벌써 찾았겠죠. 뜸들이지 마시고 알고 계시면 어서 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죄송해요. 제가 알고 있다는 얘기는 아녜요. 그날 우연히 은비를 수소문하고 다니는 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은비가 집을 나와 자취를 감춘 게 언젠데 아직도 걔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친구들한테 댁에 관해서 물어 보았어요. 그런데 친구들한테서 희한한 얘기를 들은 거죠. 6년 동안 전국을 누비면서 은비를 찾아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글쎄. 나는 삼 년 전에 은비를 분명히 봤는데 말예요. 그래서 그 말을 해주고 싶어 찾아온 거구요.』
『실례지만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일권이 직업을 묻자 이번엔 여자가 머뭇거렸다.
『지금은 그냥 주부예요. 한때 직장생활을 했었죠. 저한테 은비소식은 기대하지 마세요. 혹시 지금이라도 걔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으시다면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있긴 있어요. 삼 년 전에 사망한 그 선배 언니 주변을 수소문해 보세요. 그 언니가 은비와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으니까요.』
여자는 이야기를 끝내고 메모지에 연락처 하나를 적어 주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일권은 혼란스러웠다. 그렇잖아도 은비와의 화인(火印) 같은 사랑의 흔적을 읽고 있던 참에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서 이상한 말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거였다.
이상하다, 그 여자! 뭐 하는 여자며, 어떻게 은비를 알고 어떻게 이봉영의 출판기념회에 초대장을 받았을까? 또 어떻게 해우소까지 날 찾으러 왔던 것일까? 또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수지가 1차로 보내온 조형물의 밑그림을 슬라이드로 감상하고 난 동선과 연화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북쪽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후의 한남대교와 올림픽대로는 지독한 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때?』
『밑그림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아요.』
『썩 맘에 들진 않는다는 얘기군.』
『그런 뜻은 아녜요. 일단 그녀의 구상은 독창적이고 입체적이죠. 기존 작가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의욕이 눈에 들어와요. 때묻지 않은 실험정신도 느껴지고.』
『그럼 된 거 아닌가?』
『밑그림대로 형상화된다면 모가 나오거나 도가 나오겠죠.』
『모 아니면 도라? 윷판은 이미 펼쳐진 거니까 제대로 던질 수 있도록 연화가 도와 줘야 해.』
『악역이 되겠군요.』
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환경미술업계에서 브로커의 존재는 필요악이었고, 작가의 영혼을 담보하는 메피스토와도 같은 존재였다. 지극히 상업적인 성향의 작가들과 팀이 되었을 경우, 브로커는 건축주와의 사이에 끼어 작품의 완성도를 조율해야 했다.
준공검사를 맡기 위한 수단으로 브로커를 통해 작품을 의뢰한 건축주들의 안목은 기실 별게 아니었으나 그들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완성된 작품에 꼭 한 번쯤 클레임을 걸곤 했다.
오연화는 그런 건축주와 작가의 이견을 조율하는 데 천부적인 솜씨가 있었다. 그녀는 물주들의 취향과 작가들의 경향을 훤히 꿰뚫고 있었으며, 양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어법과 논리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인사동 미술관의 큐레이터 출신인지라 미술과 조각에 대한 안목도 출중했다.
동선이 동화조경연구소를 그녀에게 일임한 것도 다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논현동 언덕에 세워질 극장 프로젝트도 그녀가 있는 한 잘 굴러갈 거였다. 새내기 작가 하수지의 통통 튀는 실험정신에 오연화의 조율이 더해지면 의외로 걸작품이 빚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창 밖을 보던 연화가 의자를 당겨와 걸터앉았다.
『새로 옮긴 방 괜찮던가요?』
『아직 낯설어.』
『정을 붙이면 나아질 거예요. 어차피 세상이 전부 낯선 곳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겠지.』
그가 휘네스를 꺼내 물자 그녀는 기민하게 라이터 불을 켜 내밀었다.
『당분간 그 방은 혼자만 쓰세요.』
『…….』
그녀가 그의 표정을 훔쳤다. 혼자만 방을 쓰라는 말은 여자를 데려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화는 보지 않고도 간밤의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 사무실에도 당분간 나오지 마세요. 답답하면 다시 바깥 구경을 다녀오시고요.』
그녀의 말엔 어떤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
동선은 무응답으로 그녀의 충고를 선선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충고를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도시 속의 도망자가 되어 근근히 아지트를 전전하게 된 것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데서 비롯된 거였다.
『다시 말하자면 당분간은…… 외로움을 곁에 두셔야 해요.』
그녀는 외로움이란 말을 쓰면서 가슴이 아픈 듯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며칠 전 방송국 PD가 잠입했던 일도, 아직 세상의 이목이 그를 쫓고 있다는 경고도, 지금쯤 필요한 얘기였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당분간’이라는 말 속에 그 모든 의미를 실어 전했던 거였다. 그것이 동선을 위해 가장 알맞은 그녀의 화법이었다.

강변도로변의 재즈바, 쾨르츠.
방금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끝낸 세 명의 동창들은 포만감을 즐기려는 듯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맥주가 낫겠지?』
양유정은 어떤 자리에서건 리더 역할을 확실히 발휘했다.
『난 체리주스.』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웨이터의 등에 희수가 덧붙였다.
『어쭈, 겁없이 주스를 시켜?』
유정이 남자들처럼 인상을 긁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약속이 있어.』
『방송국?』
『아니, 어떤 남자.』
『남자? 어떤 남자라고 했니? 표현이 묘한데?』
듣고만 있던 상미가 담배를 꺼내 엄지손톱에 두드리며 말했다.
『놔둬라! 방년 스물여섯의 가을, 좋을 때 아니니!』
『후후, 발정기라 이거지?』
유정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출판한다는 애가 표현을 그렇게 하니, 점잖지 못하게시리!』
『어쭈, 희수 너 진짜구나. 정말 만나는 남자 있어?』
『좋을 대로 생각해. 뭐 나라고 뒹구는 재주 없는 줄 아니?』
『이거 미치겠네, 그럼 나는 뭐야?』
『넌 책하고 결혼했잖아.』
상미가 결정타를 날리자 유정은 졌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푹 꺾었다.
『야, 나도 좀 같이 뒹굴자. 나도 뒹구는 재주 있어. 내가 누군한테 이런 하소연을 하겠니. 나도 가을이면 아무도 몰래 몸서리를 앓는 여자라고.』
유정이 유리창에 이마를 쿵쿵 부딪치며 억울해했고 나머지 여자들은 깔깔 웃었다.
맥주가 나온 후에야 분위기는 진정됐다.
유정은 체리주스를 빨대로 곱게 빨고 있는 희수에게 계속 눈화살을 날리며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남자를 만날 거면 오히려 몇 잔 때리고 가는 게 나을걸. 남자들은 적당히 볼에 홍조를 띠고 입술에 단내를 풍기는 여자한테 뿅 간다고 하던데?』
『으이그, 너나 원없이 때려. 희수는 술 안 마셔도 볼이 발그스름하고 입술에서 향기가 나는 애니까.』
『와, 상미 너까지 날 괄시하면 어떡하니. 내 편을 들어 줘도 섭섭할 판에.』
가을과 짝짓기의 논쟁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던 유정이 창밖의 한강을 내려다보고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희수야, 그 남자 어디서 만나기로 했니?』
『여기서 가까워.』
『마포?』
『가든호텔 커피숍.』
『되게 무드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정한 거야. 여의도에서 가깝고 또 여기서도 금방 갈 수 있는 곳이니까.』
『하긴 마포에서 약속할 데가 거기말고 어디 있겠니. 하지만 내가 그 남자라면 널 밤섬으로 데려갈 텐데.』
『왜, 가을 철새 만나러?』
『미쳤니? 청둥오리는 베이징 덕에 가면 실컷 먹을 수 있는데.』
유정의 유머에 맥주를 가져온 웨이터까지 킬킬 웃었다.
『근데 왜 하필 밤섬이야, 이 밤에!』
『너 밤섬 얘기 모르니?』
『옛날에 사람들이 살았단 얘기?』
『그런 게 아니고 마포에 새우젓 배들이 들어오던 시절에 말야, 밤섬이 끝내주던 밀회장소였대. 삼강오륜이니 칠거지악이 시퍼렇게 지켜지던 조선 시대에도 밤섬만큼은 치외법권으로 인정을 해 줬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룻배를 타고 밤섬에 건너가서 섹스를 즐겼다는 거야?』
상미가 솔깃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지. 신분을 따지지 않고 그 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웠다는 거야. 대갓집 안방마님이건 정승댁 며느리건 저잣거리 아낙네건 할 것 없이 밤섬에선 그냥 원초적 여자로서 원초적 본능을 유감없이 해소할 수 있었대.』
『금시초문인데, 어디서 주워들은 학설이야?』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야화야화(野花夜話)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가져왔어. 들꽃들의 밤 이야기란 뜻인데, 조선조 여인네들의 성풍속도를 그린 장편소설이야. 그 안에 상상도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았어. 밤섬의 내력도 거기서 알게 된 거지.』
『출판하기로 했어? 제목이 좀 야하지만 내용만 단단하다면 꽤 팔릴 것 같은데.』
『지금 교정 보는 중이야.』
『출판사 이미지 날리는 거 아냐?』
『전혀! 고증도 충실하고 문장도 맛깔스러워서 외설하고는 거리가 멀어.』
『그건 그렇고, 그런 내력의 밤섬에 왜 나를 데려갈 생각을 했어?』
『멋지잖니! 고수부지에 황포돛배 떠 있잖아. 요즘 그냥 방치돼 있는 것 같던데, 몰래 올라타고 삐그덕삐그덕 노를 저어 밤섬으로 가는 데이트! 희수, 넌 내가 보기에 너무 이론적인 느낌이 들어. 넌 사랑에 빠져도 그놈의 감정을 요모조모 분석하다가 지치고 말 거야. 인정하지?』
『내가 그렇게 보였니?』
『안 봐도 뻔해. 너 학교 다닐 때 나랑 미팅 한두 번 했니! 그리고 미팅할 때마다 애프터 받아 준 적 있었어? 누구는 너무 잘 생겨서 싫고, 누구는 너무 심각해서 싫고, 누구는 너무 집요해서 싫고……. 그래서 너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걸 제대로 해 본 적이나 있어?』
『내가 언제 싫다는 표현을 썼니? 그저 상대의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
『그게 그거지. 사랑은 결코 분석되지 않는 거야.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아무리 예쁜 것도 흉칙해 보이기 십상이라고. 너 같은 애는 탐색할 시간을 주면 안 돼. 내가 남자라면 단칼에 너를 깰 수 있을 텐데 말야.』
유정의 말에 희수는 뜨끔했다. 표현은 거칠어도 언제나 사물의 본질과 세상사의 원리를 직시할 줄 아는 친구가 유정이었다.
맞는 말인지도 몰라.
희수는 잔을 기울여 얼음 하나를 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니 유정의 판단은 더욱 그럴 듯했다. 사랑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무한해도 그 세계로 선뜻 걸어가지 못했던 희수의 약점을 유정은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앞뒤 잴 겨를 없이 단칼에 깨 버리겠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거였다. 희수는 바로 그런 검법을 구사한 남자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쓰러져 버렸으므로. 『그 사람하고 뭐 할 거니?』
상미의 물음에 희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상미는 단순히 스케줄을 물은 거겠지만 희수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와의 스케줄은 만나기로 한 것밖에 없었다. 그 이후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소를 예측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형식은 어쨌거나 섹스로 귀결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상미의 질문에는 ‘섹스를 할 거야’라는 대답이 가장 성의있는 답변일 것이다.
적어도 상미와 희수 사이에 본심을 여과하는 필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친밀감으로 손가락을 꼽는다면 상미는 희수에게 있어 유정이보다 뒤축에 드는 친구였다. 그러나 상미와는 독특한 채널이 트여 있었다. 그 어떤 부끄러움이라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둘만의 것이었다.
상미는 희수 앞에서 숨기는 게 따로 없었다. 여고 시절에 겪은 성경험에서부터 섹스 파트너를 구해 달라는 부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밀을 희수와 나눠 가졌다. 마찬가지로 희수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희수의 비밀은 추상적인 욕망일 뿐이지 경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험을 해 보지 못했으므로. 그래서 언제나 받는 쪽은 희수였고 희수는 상미에게 부채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왜?』
『별일 없으면 안드로메다에 같이 갈까 싶어서.』
『같이?』
『일권 씨도 부르고.』
일권 씨라?
희수는 의외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
『이름을 알고 있네?』
희수가 묻는 것은 두 사람의 계약에 관한 문제였다.
『만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생각나면 아무 때나 만나기로 계약을 수정했어.』
『걱정된다.』
『걱정? 무슨 걱정을 해! 남편에 비하면 난 깔끔한 거야.』
『너말고 일권 형 말야.』
희수는 정말 걱정이 앞섰다. 상미야 어떻게 흘러가도 알아서 중심을 잡겠지만, 그 선배의 항해술은 믿을 수가 없는 거였다.
『어떻게 할래?』
『그 사람한테 양해를 구해 보지 뭐.』
『땡큐, 대신 내가 한턱 쓸게. 희수의 남자를 위하여.』
『나도 돈 있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차는 벌써 가든호텔 주차장까지 미끄러져 와 있었다.
동선은 라운지의 흡연석 코너에 앉아 필리피노 밴드의 라이브를 감상하고 있었다.
희수는 상미를 소개시킨 다음 안드로메다에 갈 의향을 물었다.
동선은 쾌히 승낙했다.
상미가 일권을 호출하겠다며 공중전화로 가려 하자 동선이 제지했다.
『아현동이면 바로 코앞인데 우리가 모시러 가면 되잖습니까.』
『누구 차로 가죠?』
『저는 차를 놓고 왔습니다.』
『그럼 제 차로 모두 함께 움직이죠.』
세 사람이 탄 그랜저가 주차장을 빠져나왔을 때 마포 귀빈로는 러시아워였다. 상미는 주저없이 차를 돌려 도화동 이면도로를 타고 강변과 신수동으로 크게 우회했다.
해우소에는 상미 대신 희수가 들어갔다.
다행히 손님은 한 테이블밖에 없었다.
『형, 빨리 옷 갈아입고 나랑 어디 좀 가요.』
『어디?』
『춤추러.』
『무슨 뜬금없는 춤이냐?』
『가끔 한 번씩 미치는 것도 약이 될 때가 있잖아요.』
『우리 둘이서?』
『밑에 상미가 와 있어요.』
『상미 씨가?』
일권이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놓칠 정도로 놀라워했다.
『빨리 손님들한테 양해 구하고 나와요.』
『구하고 말 것도 없어. 후배들이니까 가게 좀 봐 달라고 하면 되지만, 난 지금 무슨 영문인지 도통 모르겠다.』
『참, 옷은 있어요?』
『뭐 무도회 복장을 걸쳐야 되니?』
『없으면 까짓거 하나 사서 입자구요. 밑에 차를 세워 놨으니까 서둘러요.』
『나 참,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일권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희수는 상미와 함께 걸어오는 일권의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상미가 희수를 발견하고 V자를 그려 보였다. 그녀는 희수와 동선을 안드로메다에 먼저 들여보내 놓고 자신의 파트너를 감쪽같이 변신시켜 데려오는 중이었다.
일권은 확실한 신사로 변해 있었다. 갈색 싱글에 하얀 폴라셔츠. 수염은 미처 정리하지 못했지만 그런 대로 자연스런 맛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일권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한 표정이었다.
『형, 리차드 기어가 보면 깜박 죽겠는데, 정말 핸섬해요.』
『자꾸 그러면 나 도망간다!』
테이블에 술과 안주가 세팅되고 난 후 남자들은 정식으로 악수를 했다.
그리고 한동안 넷은 술만 마셨다. 실내를 쩡쩡 울리는 음악소리와 현란한 멀티비전의 영상 때문에 대화를 나눌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테이지로 나가자고 먼저 손짓한 사람은 상미였다. 그러자 동선이 스스럼없이 일어섰다. 희수와 일권은 주저하면서도 그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테이지 위에선 모두 다 똑같았다. 모든 사람이 너울너울 흔들어 대는 데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병신취급을 받는 법! 거기에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싸이키 조명이 있어 누구든 춤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목석처럼 굳어 있던 일권의 몸도 차츰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상미가 일권의 정면에서 맞불을 놓았다.
동선의 춤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했다. 별스런 기교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훤칠한 키 안정감있는 어깨, 세련된 옷차림 등의 요소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
희수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격렬히 움직였다. 이 공간과 시간에 취한 건 아니었다. 웬일인지 열심히 움직이고 싶었다.
혹시 그게 일권을 자극하기 위한 몸짓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동선보다는 일권과 상미의 존재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블루스 타임이 되어 자연스럽게 동선과 얽힌 상태에서도 그녀는 일권을 주시했다.
생각했던 대로 상미는 일권을 리드하고 있었다. 일권은 어기적거리면서도 성의껏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 일권에겐 결코 즐거울 리가 없었다.
『춤을 함께 출 땐 상대의 눈을 보는 게 매너예요.』
동선이 희수의 귀에 속삭였다.
『키가 안 맞는데 어떻게 마주 보죠?』
『그럼 내 목 뒤로 깍지를 끼워요.』
그가 희수의 양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희수는 시키는 대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의 양손이 가볍게 그녀의 골반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둘의 몸이 한층 밀착했고, 스텝의 박자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춤을 추는지 알아요?』
그가 나직이 물었다.
흑인영가풍의 블루스 곡은 시끄럽지 않아서 한결 대화가 용이했다.
『글쎄요.』
『상대를 느끼기 위해서죠.』
『…….』
희수는 그의 말에 별반 감흥이 들지 않았다. 기대보다 싱거운 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희수 씨를 말해 볼까요?』
『네.』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어요. 왜 저들을 의식하죠? 지금 이 곳은 희수 씨가 원하는 장소가 아니에요. 저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희수 씨가 바라던 건 아니었을 테구요.』
『제가 주책없이 친구를 데려와서 화나신 건가요?』
『천만에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희수 씨가 편한 게 저도 편한 거니까요. 그런데 지금 희수 씨는 불편해 보여요. 그러니까 같이 불편할 수밖에요.』
『그런 느낌을 드렸다면 용서하세요. 저 두 사람은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에요. 오늘은 그냥 이해해 주세요.』
희수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의 말대로 안드로메다에 오기로 맘먹었을 때부터 왠지 불편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블루스 곡이 끝나자 넷은 자리로 돌아왔다.
상미는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희수는 그때부터 더 좌불안석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내들에게 술을 강권하듯 따른 것도 불안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형, 자리 좀 바꿔요.』
희수는 상미가 오기 전에 일권과 좌석을 바꿨다.
상미가 돌아와 앉자마자 희수는 대뜸 그녀의 스커트 밑으로 손을 넣었다.
『맙소사, 너 혹시나 했더니!』
상미가 동요하지 않고 웃었다.
『역시나였어? 너도 갔다와. 스릴과 서스펜스 따로 얻을 필요 없거든.』
『미쳤구나, 너! 아무리 그렇더라도 때와 사람은 가려야지.』
『걱정 마. 일부러 너처럼 만지지 않고서는 눈치채지 못해. 이건 나 혼자 즐기는 자유라고.』
세상에, 노팬티의 자유라니!
희수는 또다시 사내들에게 술을 따랐다. 엉망으로 취하는 길만이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희수가 눈을 뜬 곳은 동선의 오피스텔이었다.
안드로메다에서 모범택시를 탄 것까진 가물가물 기억나는데 그 뒤로 필름이 끊긴 거였다.
그녀는 눈을 뜨고도 오랫동안 미이라처럼 누워 있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딜까?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실내를 살펴본 후 그녀는 안심했다.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유리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스며들어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이 방의 구조가 낯설지 않았다. 와 본 적은 없어도 이 방의 내음과 이 방의 어둠, 이 방의 느낌으로 이 방의 소유주를 알 수 있었다.
막 눈을 뜬 순간, 그녀는 깜박 착각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뉴질랜드의 썸너 별장으로 되돌아온 게 아닌가 어리둥절했었으니까.
몇 시나 됐을까?
그녀는 누운 채로 벽을 올려다보았다. 벽시계는 베토벤의 그로테스크한 데드마스크 석고상 옆에서 파르스름한 야광을 발하고 있었다.
04 : 25.
모범택시를 탔을 때가 자정 직후였으니까 무려 네 시간이 증발해 버린 거였다. 그녀가 과음으로 의식의 평균대에서 추락해 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
내가 분실한 시간을 누가 주워 갔을까?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을 추리하다가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이 곳은 분명히 그의 방이었으므로 그가 그녀를 데려온 거였고, 그렇다면 그만이 네 시간의 공백을 증언해 줄 유일한 목격자인 셈이었다.
물론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을 잃어버린 동안 멋대로 풀려 버린 육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그에게 들키지나 않았을까 하는 수치심 때문에 불안했던 거였다.
희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지러운 수면 속에서 가위눌릴 때 그녀는 늘 그런 방법으로 침착하게 빠져나오곤 했었다.
가까스로 살아난 손가락은 물고기떼처럼 지느러미를 흔들어 손목과 팔, 그리고 전신에 경보를 울렸다.
그제야 비로소 생기를 찾은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알몸으로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침대 시트가 목화의 보푸라기나 뭉게구름처럼 아늑하다 싶었더니, 맨 살결로 직접 느낀 촉감의 여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는 조심스레 하복부의 괄약근에 힘을 주어 보았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그가 섹스를 치렀다면 간과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벗기고 가진다는 것은 강간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무리 편한 파트너라 해도 정말 그랬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곳에선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손으로 쓸어 봤는데도 뽀송뽀송한 느낌 그대로였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옷은 벗겨진 순서대로 침대 옆 원목탁자 위에 개어져 있었다. 맨 위의 팬티마저도 네 겹으로 알뜰하게 접혀 있어 언뜻 보기엔 손수건 같기도 했다.
그가 최후의 속옷을 끌어내렸을 때 그 속옷이 가리고 있던 성역을 어렵지 않게 들여다보았으리라. 그리고 8자로 둘둘 말려 벗겨진 속옷을 흔들어 펴고 접었겠지.
여자의 성역을 보고 성역 가리개를 곱게 접는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갑자기 심란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 물어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방 안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어디 계세요?』 그녀는 나직하게 그를 부르고 나서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출입문 바로 안쪽 벽면에 여러 개의 스위치가 직렬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차례로 누르니까 방 안 곳곳에서 할로겐 램프의 불빛이 교차했다.
희수는 모든 스위치를 ON으로 올려 놓고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여전히 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쪽으로 가 바깥을 내다본 다음,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휘황찬란한 불빛으로부터 몸을 감춰야 했다.
40평은 너끈히 넘어갈 평수의 오피스텔은 넓으면서도 정교한 실내장식으로 인해 허허롭지 않았다. 그녀는 차근차근 방 안의 장식들을 관찰했다. 마지막으로 발길이 머문 곳은 방구석의 칸막이 앞이었다.
칸막이 시설 옆으로 카메라의 부속들이 질서정연하게 널려 있어서 그녀는 직감으로 그 곳이 암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칸막이를 열었다. 암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칸막이 커튼을 닫고 나오려다 말고 문득 돌아섰다. 붉은 램프 아래 설치된 서랍들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 서랍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여태껏 살아 오면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거나 남의 비밀을 함부로 엿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왜 갑자기 그 서랍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운명의 사주는 아니었을까.
그녀는 끝내 서랍을 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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