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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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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745 회 작성일 24-02-20 09: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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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일권을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이었다. 그해 겨울, 출판사를 경영하는 국문과 동창 양유정이 희수의 오피스텔을 찾아와 원고지 4,000매를 쏟아 놓고 갔다.
말이 4,000매지, 바닥부터 쌓아 보니 책상 높이를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오죽했으면 건장한 출판사 직원이 원고를 나르고 나서 냉수 한 컵을 청했을까.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희수에게 유정은 대뜸 숙제를 안겼다.
『희수야, 이 원고 한번 읽어 줄래? 내일까지.』
『너 미쳤니? 내가 무슨 속독의 달인이라고 이 엄청난 원고를 하루만에 읽겠어.』
『급해서 그래. 그냥 대충대충 읽어도 괜찮아. 출판해도 가능성이 있는 건지만 확인해 줘.』
가뜩이나 연말연시 특집 프로그램 원고가 밀려 시간에 쫓기고 있는 희수에게 그 부탁은 분명히 무리였다.
그러나 희수는 원고의 첫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나서 관심을 갖게 됐다. 김일권. 텅 빈 원고지 아래 칸에 박힌 이름 석 자가 이상하게도 시선을 끄는 거였다.
『무슨 얘긴데?』
『읽어 봐! 지독한 사랑 얘기야.』
『픽션?』
『아니, 100% 고순도 체험담이야.』
『그럼 수기(手記)겠네? 』
『굳이 장르를 가른다면 그렇겠지. 근데 형식은 소설에 가까워.』
『재미있어?』
『재미있음 내가 후딱 읽어 버리지, 너한테 맡기겠니? 잘 안 읽히는 글인데 소재가 좀 특이하거든. 이 글을 쓴 사람이 실종된 첫사랑의 연인을 무려 6년 동안이나 찾아 헤매다녔다는 얘기야.』
『열부(烈夫)구나.』
『난 안 읽어 봐서 잘 모르겠어. 암튼 내일 저녁에 다시 올 테니까 결정을 내려 줘. 수고료는 통장으로 넣어 줄게.』
유정이 사라진 후, 희수는 대책 없이 원고 몇 장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도 희수는 유정의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유정은 똑부러진 친구였다. 매사에 합리적인 판단으로 대처했고 끊고 맺는 결단력이 분명해 줄곧 과 대표를 도맡았던 국문과의 잔 다르크였다.
유정은 성격에 걸맞게 졸업하자마자 출판사를 차렸다. 언제 출판사에 취직해 일을 배우고 큰뜻을 펼 수 있겠냐며 부모와 담판을 벌여 목돈을 끌어댄 거였다.
워낙 다부진 친구라 뭘 해도 잘할 줄은 알았지만, 사실 희수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은 유정이가 척박한 출판계에서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곤 했었다.
그러나 유정은 주위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첫번째 작품부터 히트를 날리더니 삼 년만에 월 매출액이 억대를 상회하는 출판 경영인으로 자리잡았다.
책장사만 잘 하는 게 아니었다. 유정은 친구를 챙기는 데도 시원시원했다. 국문과 전공을 살려 잘나가는 친구들을 모조리 자기네 출판사의 자문 위원단으로 묶어 매달 소정의 기획료를 지급했으며, 잘 안 풀리는 동창들은 직접 취직을 시키거나 비상금을 대출해 주는 등, 남자들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의리를 과시하곤 했다. 한 마디로 양유정은 J여대 국문과 88학번의 영원한 과 대표였고 여두목이었다.
그러나 희수가 빠듯한 스케줄 속에서도 4,000매 분량의 원고지를 밤새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유정과의 그런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일권이란 사내의 원고가 너무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희수는 유정의 말처럼 대충대충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도입부부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가 털어놓는 절절한 스토리에 빠져들고 말았다.

일권은 대학시절 같은 문예창작과 동기였던 여학생을 끔찍이 짝사랑했었다. 늘 개나리꽃 노란색 옷을 입고 다니는 여대생 고은비. 그녀는 일권뿐만 아니라 캠퍼스내 모든 남학생들의 연인이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문창과 남학생들의 문장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했다는 소문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그녀를 보면 그저 삶이란 게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와 헤어지면 마냥 술을 들이키고 싶었으며, 그녀에게 구애했다가 딱지를 맞으면 허무와 좌절, 절망과 죽음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남학생들이 그런 코스를 바통터치하며 실연의 나락으로 미끄럼을 탈 정도였으니 고은비는 확실한 캠퍼스의 여왕벌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죽하면 제자들의 작품이 한결같이 니힐리즘 경향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3학년 2학기 기말작품집을 엮으면서 교수들이 의아해했을까.
그처럼 한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강의실 분위기를 뒤흔들고, 장차 한국문단의 기둥이 될 엘리트들의 넋을 휘저어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김일권만큼은 졸업식날까지 은비에게 딱지를 맞은 적이 없었다. 은비가 일권만을 편애했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일권은 프로포즈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비는 그런 이유에서인지 가끔씩 그에게 각별한 눈빛을 보내곤 했었다. 그래도 일권은 동요하지 않았다. 졸업하는 그날까지 단 한 차례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행여 비슷한 농담조차도 삼갔다.
그러나 그것이 일권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멍청했을 뿐이었다. 사랑의 전제, 사랑의 절차, 사랑의 확인, 사랑의 본질, 사랑의 해석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그 역시 고은비를 끔찍이 사랑했다. 사랑의 수치와 밀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있다면, 그 질량의 부피를 기준으로 은비가 연인을 선택했다면 그는 누구 앞에서도 자신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기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일권은 다른 친구들처럼 숫기도 없었던 까닭에 늘 뒤켠에 서 있어야 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가슴 속에 묻고 말았을 사랑의 고백을 그는 졸업하고서야 던질 수 있었다.
일권이 첫 직장으로 들어간 건설회사의 사보 편집실에서 그는 우연찮게 은비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같은 과 3년 선배로 일찌감치 신춘문예에 당선돼 필명을 날리고 있던 시인 이봉영과 열애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그 몇 달 후에 두 연인이 결별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것도 단순히 헤어진 게 아니라 서로 마음에 대못질을 하고 찢어진 거라고 했다. 이봉영 시인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그가 그녀를 찼다는 게 정설이었다.
어찌된 상황이었든 이봉영이라는 사람은 실로 대단한 위인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여왕벌을 낚아채 로얄젤리를 탈취해 버린 강인한 수펄이었다.
그 후,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낸 은비는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늘 남자들에게 상처를 안겨 주었던 그녀였으나 스스로 상처 입는 데는 익숙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무척이나 꺼칠한 얼굴이었다. 진한 화장이 겉돌 만큼이나.
일권은 그날 처음으로 은비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은비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지금이라도 그녀만 좋다면 기꺼이 그녀만의 남자로 남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그는 사실 은비가 최악의 불행에 빠지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최악의 은비와 최상의 일권. 이런 등식에서야 비로소 동등한 입장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날 그는 은비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그녀가 서슴없이 자신의 전부를 헌납한 거였다. 서투른 정사였지만 은비의 은밀한 꽃잎을 가르고 그녀의 몸 속 깊은 곳까지 성기를 꽂았을 때 그는 새롭게 태어났다. 온 세상을 차지한 것 같은 충만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은비는 사라져 버렸다. 서울은 물론 한반도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일권은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가족들은 몇 주만에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그는 달랐다. 직장까지 팽개치고 아예 그 길로 나서 버렸다. 인신매매단의 소행이 아닌가 싶어 대도시의 사창가며 기지촌, 파시가 열리는 낙도의 항구에 이르기까지 발닿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여비는 전국 일주를 하는 틈틈이 현지 아르바이트로 충당했으며, 혹시 벌어질 불상사에 대비해서 혼자 호신술을 연습하곤 했었다.
그렇게 6년을 떠돌아다닌 사내, 그가 바로 김일권이었다.

식탁을 치우고 나서 일권은 녹차를 끓여 내왔다. 희수가 청한 것은 커피였는데 그는 해우소의 법을 따르라면서 녹차를 강권했다.
『콩나물 국밥에 커피는 걸맞지 않은 미각이야』
희수는 그의 명령에 다소곳이 복종하며 찻잔을 움켜쥐었다. 미각을 앞세운 건 핑계에 불과했고 그의 본심은 건강에 대한 배려에 있었다.
그녀는 찻잔의 온기를 고스란히 손바닥에 받아들이면서 그를 응시했다.
이제부터 둘은 할말이 많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상미와의 만남에 관한 보고를 들을 권리가 있었고, 자신이 뉴질랜드에서 겪은 일들을 털어놓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어색함이나 자존심. 비밀 따위의 장벽은 아예 없었다. 함께 보낸 2년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열어 보였다. 그가 쓴 소설을 그녀가 꼼꼼하게 읽고 난 순간 그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원고는 끝내 출판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둘은 그 원고를 계기로 양유정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전에 만났는데 오후를 넘기고 밤도 넘긴 다음 날 새벽에야 헤어질 수 있었다.
희수는 일권의 개인사에 관해 통효했다. 은비라는 여자를 빌미로 황금 같은 청춘을 덧없이 흘려 보낸 사내의 비경제적 시간 운용을 질책했다. 어찌나 날카로운 비수였던지 일권은 새벽녘에 눈물까지 비췄었다. 그때 희수도 같이 울었다. 그를 자극하기 위해 독설을 동원해 평론가 행세를 했지만 그가 겪은, 눈이 시리도록 쓸쓸한 사랑에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었던 거였다.
희수는 그날 이후로 일권의 스폰서이자 매니저로 다가갔다. 오랜 방랑으로 사회의 적응력을 잃어버린 사내에게 쇼크를 주지 않고 아주 천천히 교화시켜 나갔다. 방송국에 소개시켜 일거리를 얻어 주었고, 동인회에 가입시켜 이 사회가 결코 외로운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또 숙소가 없는 그에게 카페까지 차려 줄 정도로 그녀는 무조건의 시혜를 베풀었다. 그에게 바라는 건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가 더 이상 불운의 늪에서 질퍽거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여자하고 자유로를 갔다 왔어.』
희수가 묻기 전에 일권은 상미와의 미팅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잘 됐나요?』
그렇게 묻는 희수의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 여자가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만나자더군.』
『걔가 먼저 그랬어요?』
『응.』
『내가 형한테 실수한 건 아니겠죠? 』
『천만에, 희수 덕분에 난 지금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근데 내가 묻고 싶은 건 정말 그 여자가 그런 시간을 원했던 건지 분명히 알고 싶어.』
일권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희수가 누누이 사전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아직도 그 미팅의 동기가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일권은 그 동안 자신의 모든 통증을 희수에게 보여 주고 카운슬링을 받아 왔었다. 그 중에서도 성욕에 관한 호소가 제일 많았었다. 살아도 2년을 더 많이 살아 온 선배가 섹스에 대한 욕정과 갈망을 털어놓자니 부끄럽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녀는 늘 진지하게 그의 호소를 받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솔직히 고백했다. 말로라도 자신의 아교풀 같은 성욕을 덜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이라면 물질과 정신, 어느 쪽이든 서슴없이 원조했던 희수였지만 육체와 관련된 욕구만큼은 불가항력이었다.
『형, 그렇게 절실하면 나라도 가져가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일권이 만취해서 불맞은 멧돼지처럼 신음을 앓고 있을 때, 희수는 투명한 눈망울로 그렇게 말했었다.
『미쳤니? 아무리 내가 쓸개 없이 너한테 어리광을 부린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야?』
일권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 해우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맨발로 폭설의 아현동 고갯길을 질주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태어났다는 새벽녘에야 일권은 해우소로 돌아왔고 희수가 보는 앞에서 아기 예수처럼 웅크리고 잠이 들었었다.
그 정도로 아량이 넓은 희수가 난데없이 섹스 미팅을 들고 나왔으니 그가 오해한 건 당연했다.
독수공방 노총각의 청승을 보다못해 욕구해소의 시나리오를 기획한 것이리라. 어쩌면 큰돈을 지불하고 여자를 매수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일권의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미스터리였다.
『내가 형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요? 걘 대학동창이에요.』
『희수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와의 만남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래.』
『그건 현실이에요, 아주 생생한.』
『그럴까……? 그 여자하고 섹스를 했어. 사랑이나 예행연습도 없었는데도 섹스가 이뤄지더군. 그것도 무척이나 격렬하게 말야.』
『남자와 여자는 어떤 경우, 상대가 누구라 해도 섹스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있는 거 아녜요? 구조적으로.』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앞으로 그녀와 어떻게 해야 할까?』
『만나는 데까지 만나세요, 형이 내키면. 또 걔가 원하면.』
희수는 얘기를 나누다 말고 캔맥주 하나를 땄다. 섹스를 논하는 데는 녹차의 씁쓸한 뒷맛보다는 호프의 약간 지릿한 미각이 제격이라고 생각하며…….
『형 첫번째 여자 있잖아요.』
『은비?』
『그래요, 아직도 찾고 있어요?』
『……찾아야지.』
『만약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죠?』
『글쎄…….』
은비 문제는 그의 영원한 아킬레스건이었다.
정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애만 좋다면 함께 있어야겠지.』
『결혼?』
『어찌 됐든.』
『행복할 수 있을까요?』
『행복이 목적이 아니지.』
『그렇다면 의무?』
『복잡해. 어쩌면 은비를 찾느라 보낸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건지도 몰라.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든 결국엔 자기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몰라. 자신보다 타인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그 경우도 사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의 즐거움을, 자기의 정열을 만족시키기 위해 연출하는 거 아닐까?』
희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저 사내는 은비와의 사랑에 치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힘겨워하는 게 아닐까.
이제부턴 희수 차례였다.
『뉴질랜드에서 나도 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의 별장에서 섹스를 했어요.』
『희수가 섹스를?』
일권이 믿기 어렵다는 듯 반문했다. 처녀성의 상징과도 같은 희수가 남자와 관계했다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경험하겠지 생각하곤 있었는데, 참 쉽게 그 기회가 찾아왔어요.』
『외국인이었어, 상대가?』
『아뇨, 서울에서 온 낚시꾼이었어요.』
『그럼 혹시 유부남?』
『그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그냥 섹스만 했으니까.』
묘한 우연이었다. 일권이 상미와 나눴던 것 같은 섹스를 희수도 같은 때,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었다니.
일권이 캔맥주의 마개를 땄다.
『건배하자, 너의 여자됨을 축하하며!』
그녀도 맥주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형과 상미의 해방을 위하여!』
캔을 45도로 기울여 바닥까지 비운 뒤에 그녀는 정색하고 말했다.
『이제 형이 말해 줘요. 난 어떡해야 하죠?』
『그 남자에 대해서?』
『모르겠어요. 순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그 남자가 자꾸 의식을 지배하는 거 같아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모르겠어요. 그냥 꿈에도 나타나고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교란시키곤 하는 거예요.』
일권은 또다시 맥주를 꺼내와 건배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랑에 빠졌구나, 희수야. 네 눈이 그걸 증명하고 있어.』
그는 단숨에 캔 하나를 비워 버렸다.
그녀의 고백,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가슴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제부터 그는 그녀의 사랑을 위해, 그 사랑의 완성을 위해 뭔가 기여해야 했다.

『정 작가, 한동안 안 보이더니 많이 달라졌어. 이번 작품을 읽어 보니까 말야, 뭐랄까 짙은 향기가 느껴지거든. 사랑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 쓸 수 없는 향기.』
주말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팀장을 맡고 있는 박우섭 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희수를 보았다. 그 동안 어디 가서 열애를 하고 오지 않았느냐는 추궁의 눈빛이었다. 그가 늘 하는 농담의 인사였지만 희수는 비밀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글쎄요. 대본에 그런 냄새가 풍겼나 보죠? 될 수 있으면 감추려고 노력했는데.』
『아주 산뜻했어. 수정없이 바로 슈팅 들어가도 되겠던데? 연기자들이 난리야, 대본 완벽하다고.』
『다행이네요. 마무리 쪽이 잘 안 풀려서 걱정했는데 말예요.』
『이따 대본 독회가 있으니까 꼭 참가하라고! 신인들을 캐스팅 했기 때문에 맘이 안 놓여. 괜히 좋은 대본 망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

연기자들의 대본 독회를 지켜보면서 희수는 괜히 착잡해하고 있었다.
뉴질랜드 여행 이후 열흘 동안 틀어박혀 썼던 드라마 대본의 완성도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타이틀은 ‘동전과 우표’, 수색역 매표소에 근무하는 철도청 직원과 수색 우체국 아가씨와의 러브 스토리였다.

시대 배경은 80년대 초반.
남자가 5원짜리 동전을 가득 모은 돼지 저금통을 들고 우체국에 들어간다. 편지 쓰기가 취미인데 우표가 떨어져 할 수 없이 저금통을 털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가 5원짜리 동전을 카운터 유리 앞에 수북히 쌓아 놓고 우표를 달라고 말하니까 새침하게 생긴 아가씨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힌다.
그 표정에 열받은 남자가 한 마디 한다.
왜, 5원짜리 동전은 돈 아뉴?
샐쭉 토라진 아가씨는 역무원의 시선을 외면하고 동전을 세기 시작한다. 우표 몇 장 파는 데 몇 시간이 걸리는 거냐고 사내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무언의 항의를 한다.
잠시 후, 창구에는 엄청난 부피의 우표가 올려진다.
으잉, 웬 우표를 이렇게나 많이!
질겁해서 우표를 주시하는 사내의 눈에 액면가 5원짜리 우표들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날아오는 하이 톤의 목소리.
왜요, 5원짜리 우표는 우표 아닌가요?
남자는 졌다는 시늉으로 이마를 철썩 때리며 웃는다.
아가씨 이름이…… (이름표를 보며) 신현숙 씨?
센스가 대단하신데요. 제가 맛있는 커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퇴근 후에 수색역으로 들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남자의 제복을 훑어보며 맞장구 친다.
오병문 씨는 수색역에서 근무하시나 봐요?
네, 매표소에 있습니다.
어머, 그런데 왜 한 번도 뵌 기억이 없죠? 집이 가라뫼라서 맨날 기차로 출퇴근하는데.
어쨌든 그런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이 매일 역사와 우체국을 드나들며 사랑을 키워 나가는 얘기였다.

희수는 드라마 ‘동전과 우표’를 집필하면서 무던히 마음고생을 했었다. 역무원과 우체국 직원의 티없는 사랑 얘기는 잘도 만들어 냈으나 자꾸만 뉴질랜드의 추억이 비집고 들어와 훼방을 놓는 거였다.
수채화처럼 잔잔한 드라마의 흐름에 그녀는 섹스 문제를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굳이 섹스 장면을 삽입하지 않아도 우체국 여직원과 역무원의 사랑은 어차피 맺어질 터였지만, 희수는 두 남녀가 어떤 방식의 섹스를 하게 될까 몹시 궁금했다. 자기가 쓴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인데도 그들의 첫 섹스, 그리고 그 이후가 참으로 알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원고의 진행은 무척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두어 줄 써 놓고 잡념에 빠져 긴 의식의 여행을 다녀왔고, 그러다 지쳐 내일로, 또 내일로 미루는 바람에 열흘이나 걸린 것이었다.
그녀는 드라마의 라스트신에 사랑의 정열에 관한 대사를 남겼었다.
‘세상 모든 종류의 격한 정열 가운데서 여자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정열은 바로 사랑이다.’
보기와 다르게 매사 정열적인 우체국 여직원에게 역무원이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은 곧 희수의 말이기도 했다. 역무원은 희수가 창조해낸 인물이었으므로.
정열…….
희수는 그 대사처럼 정열을 발산하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여태껏 방송 일에 최선의 정열을 바쳐 승부해 왔었다. 그 정열이 오늘의 정희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뿐만이 아니라 사랑에서도 끝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 사랑의 실체가 눈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하복부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사내의 흔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기억은 간헐적으로 게릴라처럼 출몰하여 허벅지를 적셔 놓고 사라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손으로 그 곳을 자극했다. 뭔가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도 미끄러지고 마는 술래잡기의 자위행위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면 말 돌릴 것 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있었다. 설사 거부당할지라도 지금처럼 막연하게 애태우는 것보다 천번 만번 나을 것 같았다.
정열은 늘 그런 것. 정열을 만족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도 항상 정열의 횡포에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 그 횡포에 견디지 못하고 정열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력. 그 노력에도 견디지 못하는 것. 정열은 도대체 우리들로 하여금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어디까지, 뭘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마성이었다.

네번째 만났을 때, 여자는 비로소 이름을 밝혔다.
『상미라고 부르세요, 존칭은 쓰지 않아도 돼요.』
어째서 이름을 밝혔을까?
일권은 상미라는 여자의 작은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주까지 세 번의 관계를 맺으면서 두 사람은 처음의 계약 사항을 깨트린 적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묻지 말기.
불필요한 말은 아낄 것.
중개인 희수에게서 금기사항을 듣고 나서 일권은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꼭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계약의 조항은 상미가 정한 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계약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지난 세번째 정사 때, 그녀는 비교적 말을 많이 했다. 물론 불필요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계약 위반은 아니었다. 체위 변경에 관한 지시, 허리운동 강약의 조절에 관한 말들이었다.
이름을 밝힌 것말고도 변화는 또 있었다. 장소의 변경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를 과속하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원당 쪽으로 핸들을 돌렸고 서오능까지 달려와 멈췄다.
『조금 걸어야 되는데 괜찮죠?』
그녀는 양해가 아닌 명령을 내려 놓고 시트 밑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신었다. 그가 먼저 내려 매표소 쪽으로 몸을 돌리려 하자 그녀가 제지했다.
『그쪽이 아니에요. 절 따라오세요.』
그녀는 매트 가방을 일권에게 맡기고 앞장섰다. 서오능 외곽 논둑길을 따라 한참 걷다 헐렁한 철조망 틈새를 발견한 상미가 턱짓을 했다. 그리로 들어가자는 사인이었다.
어린애들처럼 철조망 개구멍을 빠져나온 둘은 작은 늪지대와 송림을 헤치고 서오능 뒷산을 타고 올랐다.
보기와 달리 산은 험했다. 오래도록 인적이 끊겨 길마다 잡초가 무성했으며 높은 쪽으로 오를수록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일권은 영문도 모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자를 뒤따랐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좀 잡아 주세요.』
스커트를 입고도 야무지게 산길을 오르던 상미가 현기증이 나는지 순간 소나무를 짚고 비틀했다. 고지의 8부 능선쯤 되는 곳이었다.
상미가 몸을 지탱한 소나무에는 붉은 글씨의 경고문이 매달려 있었다. 군사보호구역이므로 접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오능 동쪽 고지에 레이더 기지 비슷한 시설이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올라갈 건가요?』
『거의 다 왔어요.』
그녀가 크게 숨을 쉬고 나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지의 정상에 오르자 통일로와 골프장이 보였다.
일권은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두드렸다. 이상한 등반이었지만 어쨌거나 고지에 오른 기분 하나는 상쾌했다.
여기서 하자는 건가?
그는 문득 그녀의 의도가 궁금했다.
고지에서의 섹스라? 아무리 색다른 취향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였다. 그리고 아무리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산꼭대기라고 해도 사방팔방이 탁 트인 장소에서 섹스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들어가서 쉬기로 해요.』
상미가 매트 가방을 챙겨들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어딜 들어가자는 건가?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갸우뚱했다.
상미가 안내한 곳은 일권이 앉아 있던 바로 밑 벙커였다.
『아, 이런 곳에 벙커가 있다니!』
일권은 첨병처럼 어두운 벙커 안으로 먼저 들어서며 탄복했다.
서울 외곽의 요충지답게 벙커는 튼튼하고 넓었다. 기관총좌 구멍으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와 벙커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 직사각형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는 마를 대로 말라 푸석거리는 낙엽더미가 보료처럼 깔려 있었다. 사용한 지 꽤 오래 된 벙커인 듯했다.
상미가 매트를 펼쳐 깔자 먼지가 피어올랐고, 먼지구름이 햇살의 빛기둥으로 몰려가 아우성을 쳤다.
『오세요.』
그녀가 길게 누우며 명령했다.
그는 하인처럼 충실하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의 악취가 행여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으나 몸이 엉키고 나니 그런 건 다 기우였다. 오히려 정제되지 않은 체취야말로 섹스에서는 자극제요, 향신료와도 같은 거였다.
『입은 채로 하는 거예요.』
그가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려 하자 그녀가 허리를 틀었다.
『옷을 찢어도 좋고, 날 거칠게 다뤄도 괜찮아요.』
그는 그녀의 분부에 따라 야성을 폭발시켰다.
블라우스의 단추들이 톡톡 튕겨나갈 정도로 앞섶을 찢어 발겼고, 브래지어는 위로 밀쳐 올렸다. 가슴 위쪽으로 말려 올라간 브래지어는 더욱 반발하며 젖무덤을 압박했다. 그 밑으로 삐져나온 두 개의 젖무덤이 터져 버릴 듯 팽창했다.
그는 사납게 젖무덤을 베어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진저리를 쳤다. 치열 안으로 감금된 유두를 혀로 농락하며 그는 젖무덤 전체를 삼켜 버리려는 양 입을 벌렸다.
짭짤한 땀맛이 그를 더욱 흉폭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몸 어느 부분이라도 남김없이 핥고 싶었다.
『하, 학!』
그가 스커트 속으로 머리를 파묻고 도톰한 언덕을 한입 가득 베어 물자 그녀의 양손이 그의 뒷머리에 수갑처럼 채워졌다.
한참만에 그녀의 결박에서 벗어난 그는 발끈 분노한 기둥으로 방금까지 코를 묻고 있었던 언덕 밑 샘을 두들겼다. 그리고 팬티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십자포화를 날렸다.
『아아, 이름을 불러 줘요!』
그녀가 헐떡이며 간청했다.
『상미 씨…….』
『존칭은 빼구요. 그냥 막 부르란 말예요.』
『그래, 상미야.』
그는 해일처럼 다가설 때마다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도 덩달아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었다. 그럴수록 그가 부르는 이름은 안타까운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상미야상미야상미야상미야상미야상미야상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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