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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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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300 회 작성일 24-02-20 09: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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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새벽 두 시에 판은 끝났다. 테이블 위의 칩들은 금발의 앵글로색슨 족 신사 앞에 쌓여 있었고 지배인은 칩을 헤아리고 나서 수표 한 장에 금액을 기재한 다음 승리자에게 건넸다.
희수가 먼발치에서나마 간절하게 응원을 보냈던 낚시꾼 사내는 마지막 판, 그 한판에 모든 칩을 걸어 승부했으나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 놓은 재킷을 어깨에 얹으며 돌아서는 그에게 희수는 다짜고짜 묻고 싶었다. 왜 마지막 판에 그처럼 무모한 배팅을 했느냐고.
그는 게임 도중에 시종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승률도 가장 높은 것 같았다. 적어도 막판 바로 전까지는 꽤 많은 칩을 따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그 한 판에 모든 걸 걸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그녀는 그에게 건넬 첫 인사로 적합한 언어를 찾고 있었다.
『또 만났네요.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나요, 우연이라고 하나요!』
『이 도시에 며칠 머무르다 보면 몇 번씩 다시 만나게 됩니다. 워낙 좁은 곳이니까.』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희수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그다지 대수로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술 한잔 사고 싶은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을 축이고 싶었거든요.』
카지노 입구에 오픈된 스탠드바로 가서 둘은 위스키를 시켰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계속 잠을 못 자셨을 텐데.』
『대신 오늘 밤 푹 잘 수 있겠죠.』
『숙소가 어디세요?』
『어제 댁이 차지했던 자리.』
『어머, 그럼 차에서 주무신단 말예요?』
『편안하지 않던가요?』
『야외라면 몰라도 여기까지 와서…….』
사내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술잔을 기울였다. 희수는 사내의 옆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위스키의 기운으로 촉촉해진 그의 입술이 웬지 슬퍼 보였다.
아아. 황량한 사람!
사내의 실체를 눈곱만큼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강한 연민을 느꼈다. 그가 조금만 더 친화력 있는 남자였다면 아마도 희수의 영혼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냥 무뚝뚝한 저 모습 그대로도 좋았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 사람 자체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그의 취미와 건조하기 짝이 없는 그의 표정, 그런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그의 의식, 그 황폐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 그게 희수의 유일한 취미였다.
『어젠 제가 신세를 졌으니까 오늘 갚을 기회를 주세요. 제가 재워 드려도 괜찮겠죠?』
그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다 휙 돌아보았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희수는 사내의 강렬한 시선을 슬쩍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호텔 값이 얼마나 하려구! 평일이니 방도 많을 테고.’
그녀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것은 혹시나 이 남자가 재워 준다는 표현을 오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스스로 달래기 위한 위로이기도 했다.
그는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벌떡 일어났다. 희수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응답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호텔은 헤글리 공원 쪽인데…….』
희수는 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가 운전하는 방향이 전혀 낯선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썸너 비치로 갑니다.』
‘왜 그 곳으로 가는 거죠? 저는 YMCA 호스텔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즉각 따지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모든 게 제멋대로 스타일인 사내에게 그런 항의가 통할 리 만무했고 통하지도 않는데 자꾸 따진다는 건 추태에 불과했다.
시내에서 십 분쯤 한적한 도로를 달려나오자 유리창 전면에 밤바다가 들어왔다. 크라이스처치의 동쪽 해안이었다. 해변에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에 흰 파도의 갈기가 선명했다. 바다와 접한 언덕에 그림 같은 별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썸너 비치.
차는 언덕을 지그재그로 기어올라 마루턱의 보랏빛 목조건물 앞에 섰다. 그가 말없이 차에서 내렸고 별장을 향해 들어갔다. 그녀는 이렇다 할 의사표시도 못 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얼떨결에 들어선 낯선 공간이었어도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전망은 압권이었다.

그날 밤.
희수는 확실하게 섹스를 경험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의 몸을 탐하고 닦으며 몰아세웠다. 그러나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다리를 펴 주셔야죠.』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성관계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사내가 무례하게 군 것도 아니었다.
화간(和姦), 법률적으로 정의하자면 그렇게 표현되지 않을까? 하지만 건강한 남녀의 충동적인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당치 않았다.
그 어떤 힘이 나를 이 곳까지 데려온 것일까?
뻐근한 하반신을 욕조에 담근 채 그녀는 아서스패스부터 비롯된 행로를 천천히 리와인드해 돌려 보았다.
분실해 버린 순결의 허망함 따위는 의식적으로 떨쳐 버렸다. 어차피 순결은 상징에 불과한 것이며, 상징의 값은 정하기 나름인 것이었다.







정오의 자유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여의도에서 마포 인터체인지를 돌아 난지도와 행주산성을 단숨에 지난 우윳빛 뉴그랜저는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시속 170km, 김일권은 새삼스럽게 안전벨트의 탄성을 확인해 보고 나서 운전하는 여자의 표정을 훔쳤다.
푸른빛이 짙은 선글라스와 오렌지빛 볼터치 화장만으로도 그녀의 강렬한 성격을 읽을 수 있었다. 운전석 시트와 페달을 잇고 있는 그녀의 각선미는 살구처럼 시었다. 오직 액셀러레이터밖에 밟을 줄 모르는 그녀의 오른발.
일권은 벌써 그녀의 기에 눌려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자유로만큼이나 그녀의 말도 거침이 없었다.
『저 앞에 보이는 도래지 부근에 쉴 만한 모텔이 있어요.』
쉴 만한 모텔이라?
일권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맞추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차의 속도와 모텔까지의 거리를 미루어 계산해 보니 사오 분, 그 사오 분 후면 두 사람은 모텔방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는 초조했다.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미처 예행연습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러는 사이에 차는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모텔 주차장에 박혔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모텔로 들어가 방을 얻었다. 방에 들어와서는 커튼을 쳤고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일권은 털썩 베드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맞은편 벽면 전체를 커버하고 있는 대형 거울에 참 나약한 사내 하나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향해 인상을 긁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사내도 제법 강인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야성적인 분위기도 있어 뵈는데.
그랬다. 사실 일권의 얼굴은 상당히 잘 생긴 편이었다. 귀밑으로 튼튼하게 각이 진 하악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느끼게 했고, 파르스름한 구레나룻 수염의 면도자국이 터프한 맛을 풍겼다.
그때 욕실문이 살짝 열렸다.
『같이 씻어요.』
여자의 당당한 목소리에 일권은 벌떡 일어섰다.
『아, 예……. 들어가겠습니다.』
그의 대답과 동시에 여자는 그 안에서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일권도 엉거주춤 탈의를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미세하지만 사각거리는 소리, 신축성이 강한 밴드 같은 게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소리.
그는 아찔해서 심호흡을 했다. 이젠 대책이 없었다. 설사 자신의 남성적인 외모와 실제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들킨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권은 주저 없이 욕실문을 비틀고 들어갔다. 원시인의 건강한 모습을 한 채.
욕조에는 르느와르의 나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온수의 촉감을 즐기는 중이었다.
러브호텔답게 욕조는 큼직했고 가장자리의 디자인이 산뜻했다.
그는 물을 틀어 온몸에 적셨다. 그리고는 비누칠을 했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시간을 벌면서 공략법을 구상할 심산이었다. 그는 팔뚝이며 가슴팍에 무성히 돋아난 체모의 숲에 거품을 일으켰다.
이럴 때 털이 많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러나 그는 시간을 벌지 못했다. 그가 미처 전의를 가다듬기도 전에 여자가 기습을 감행해 왔던 것이다. 그것도 무방비 상태의 뒤쪽에서.
그는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거울만 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욕조에 누워 있던 여자가 언제 빠져나왔는지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여자는 그의 손에서 비누를 빼앗아들고 천천히 그의 등을 문질렀다. 그리고 자신의 전면을 밀착시켰고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은 채 흐느적거렸다.
보디 마사지…….
그는 거울을 주시하며 장승처럼 버텼다. 하지만 더운물의 입자들이 피어올라 거울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거울을 닦았을 때 강렬한 여자의 눈빛이 반사됐다. 그의 등쪽에 파묻혀 있던 여자의 얼굴이 어깨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턱을 얹었고 머리의 무게중심을 그의 목덜미에 기대 실었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빤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을 통해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은 불꽃을 튀기지 못했다. 여자의 눈빛이 빨아들이는 가공스런 흡인력에 그의 눈빛은 단번에 소멸해 버렸으므로.
그 순간부터 그녀는 블랙홀이었다, 그는 별똥별이었고.

일권이 그의 아지트인 아현동 고갯마루의 카페로 돌아온 시각은 네 시 무렵이었다.
‘해우소’(解憂所).
세상의 모든 근심과 시름을 덜어 주는 장소라 하여 명명한 카페 이름이었지만 본뜻은 변소를 지칭하는 옛말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두어 시간 일찍 나타나 대청소를 시작했다.
카페라는 간판을 붙이긴 했어도 기껏해야 탁자 네 개에 멍석 하나 깔아 놓은 공간이라 청소할 건덕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문지르고 털고 훔쳤다.
일권은 심기일전 새로운 출발을 결심했을 때 늘 청소부터 시작했다. 오늘의 대청소가 유난히 부산스럽고 요란한 것은 그의 각오도 그만큼 새롭다는 것을 의미했다.
싱크대에 쌓인 접시와 찻잔 설거지까지 말끔히 끝내 놓고 일권은 멍석에 주저앉았다. 노동 뒤끝의 휴식은 노곤한 편안함이 있어 즐거운 거였다.
그는 멍석에 벌러덩 드러누워 몇 시간 전에 겪었던 섹스를 생각했다. 세 번에 걸친 그녀와의 전쟁에서 그는 입술 안쪽에 부상을 입었었다. 마지막 절정에서 그녀가 깨물었던 것 같았다.
그는 혀를 내밀어 오톨도톨 짓이겨진 상처를 핥았다. 그 혀끝으로부터 여자의 향기가 물씬 되살아났다.
노상미(盧相美). 스물여섯 살의 여자…….
그는 숙박계를 적을 때 어깨 너머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었다.
어떻게 스물여섯밖에 되지 않은 여자가 그처럼 능숙하고 요염하고 대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유부녀라 해도 그럴 순 없었다.
그는 세번째 정사 때의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여자의 몸 안에서는 주기적으로 경련이 일었었고, 그 진동은 형언할 수 없는 쾌감으로 그를 마비시켰었다.
복상사의 과정이 이런 것이구나.
그는 맥없이 사정을 하면서 그런 위기의식을 가졌었다.
사정을 하고 난 후 그는 탈진해서 길게 늘어졌다. 전신이 화염에 휩싸여 깡그리 연소되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한 줌의 재로 화해서 바람이라도 불면 산산이 부서져 벌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권은 다시 살고 싶은 의욕에 가슴이 설레었다. 황폐한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싹이 한줄기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상미라는 여자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를 소개해 준 희수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난감했다.
6년만의 섹스. 자유로의 섹스는 그에게 있어 정확히 6년만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평생의 이력으로 따진다면 딱 두번째였다. 스물여덟의 구릿빛 완강한 육체를 소유한 청년으로서 결코 자랑할 만한 이력은 못 되었지만, 대신 그 두 번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첫사랑, 아니 첫번째 섹스의 충격은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틀어 버린 고삐였다. 첫번째 섹스와 두번째 섹스 사이에 가로놓인 6년의 공백도 다 거기서 비롯된 절망의 세월이었다. 그 사이, 그는 무너지며 떠돌았고 사는 게 너무 아파 신음했다.
그러나 두번째 섹스는 달랐다. 어쩌면 그 길고 긴 공백을 일시에 메워 줄지도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더더구나 이후로 매주일마다 기록경신을 하게 될 것이었다.
매주 수요일 정오에 만나는 거예요.
헤어질 때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약속을 정했다. 그녀가 애프터를 청했다는 것은 그를 섹스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기뻤다. 6년만에 확인한 남자 구실이 기뻤고, 절친한 동료 희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기뻤으며, 무엇보다도 첫사랑의 악령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기뻤다.
되돌아보건대, 지난 6년의 방황은 얼마나 참혹한 시간들이었던가! 열네 번에 걸친 취직과 똑같은 횟수의 실직, 수천 매에 달하는 소설 습작과 그 원고지 분량만큼의 좌절, 어느 날 실종되어 버린 첫사랑 은비를 찾아 헤매었던 맹목의 나날들.
그토록 많은 세월을 거슬러 왔는데도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은비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 하나만 가슴에 뎅그러니 뒹굴고 있었을 뿐이었다. 희수를 비롯한 영상문학 동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권은 아직까지도 폐인의 모습으로 세상의 그늘 속을 배회하고 있으리라.
정희수, 나를 구원해 준 가브리엘.
일권은 희수의 존재를 떠올리며 훈기를 느꼈다.
은비와 상미처럼 직접적으로 성관계를 맺은 건 아니지만 희수는 언제부턴가 그의 영혼에 근접해 있는 유일무이한 여자였다. 이 카페를 차려 준 것도, 미혹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를 건져준 것도 그녀였다. 나이는 두 살 아래였지만 그녀는 모든 면에서 선배였다. 누나였고 엄마였고 천사였다.
그래서 그는 늘 안타까웠다. 희수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희수가 방송국 복도에 들어섰을 때 스튜디오의 알람시계는 새벽 네 시를 알리고 있었다.
복도 끝 자판기 앞 테이블에서 웅크리고 앉은 채 신문을 읽고 있던 일권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우와, 정희수! 이 새벽에 웬일이냐?』
『보나마나 일권 형 꼭두새벽부터 헤매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여행 잘 다녀왔어?』
『고생만 사서 하고 왔지, 뭐.』
『어쨌거나 잘 됐다. 오늘은 또 무슨 노가리를 풀어야 하나 막막했는데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희수가 비운 일주일 동안 대타로 새벽 방송 원고를 메우느라 매일 밤 녹슨 검(?)을 갈아 왔었다.
『설마 방송 펑크 내진 않았겠지?』
『흐흐, 아슬아슬했다. 밤을 꼬박 새워 준비했는데도 그놈의 두 시간 때우는 게 어찌나 힘이 드는지 정말 머릿속의 순두부가 다 마르더라.』
『어때요, 라디오 원고 써 보니까 새롭지 않던가요?』
『방송작가들 다시 보게 됐다. 솔직히 라디오 원고쯤이야 발가락으로도 써제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한 장 쓰기가 지옥이더구만. 이런 일을 매일 해낸다는 건 미친 짓이야.』
『맞아요. 광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 오늘 원고는 합작으로 쓸래요? 빨리 끝내고 콩나물 국밥 먹으러 가자구요. 일주일을 빵으로 연명하다 보니 속이 더부룩해 미치겠어요.』
『좋지, 신토불이라구. 그럴 땐 우리 음식으로 위 세척하는 게 최고야.』

아현동 뒷길에 형성된 재래시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인파로 북적거렸다.
동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지세 때문에 시장길은 비탈졌다. 대로변의 뒷골목에 닥지닥지 붙은 점포들이었지만 만리동 쪽 언덕 너머로 떠오른 아침 햇살이 비쳐 시장 풍경은 밝았다.
희수와 일권은 느릿느릿 고개를 오르며 찬거리를 골랐다. 일찌감치 오늘 분 원고를 써 놓고 ‘해우소’로 오는 길이었다.
콩나물을 사면서 한 줌만 더 달라고 요구하는 희수를 지켜보면서 일권은 빙그레 웃었다. 글쓰는 재주만 뛰어났지 세상물정이라곤 전혀 모를 줄 알았던 희수였는데 장 보는 솜씨를 보니까 여간 알뜰하고 당찬 게 아니었다.
그는 문득 그녀와 살림을 차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해우소로 들어와 콩나물을 다듬고 국밥을 끓이는 동안 그는 뿌듯한 상상으로 즐거웠다. 희수를 아침 햇살 찬란한 창가 좌석에 앉혀 두고 그녀를 위해 밥을 짓는다는 것, 또 그녀는 평온한 눈빛으로 자신만을 보고 있다는 것, 그 중 하나만도 과분한데 둘 전부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이 국밥은 그녀의 양식이 되리라. 그래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정신으로 화할 테지.
그의 즐거운 상상에 희수가 양념을 보탰다.
『우와, 형하고 같이 살면 환상이겠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요리를 잘 해?』
『군대서 중대장 따까리 하지 않았겠냐. 내가 모시던 양반 입맛이 워낙 까다로워서 훈련 때마다 별식 장만해 대느라 무진장 고생했지.』
희수는 한 수저씩 뜰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이지 그의 요리솜씨는 각별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리는 일권의 불운을 보다못해 그녀가 카페를 차려 준 것도 사실은 그의 손재주를 믿고 결행한 투자였다.
일권의 요리솜씨는 방송계 쪽에 정평이 나 있었다. 방송작가들의 회식이나 야유회 같은 곳에서 일권은 늘 주방장을 자처했고 코펠이나 후라이팬을 들었다 하면 그야말로 작품을 만들어 오곤 했다. 요리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는 이론에도 강했다. 세계 각국 요리의 재료와 특성, 요리에 어울리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요리 프로그램 담당 프로듀서들이 새로운 포맷의 작품을 기획할 때면 우선 김일권부터 찾을 정도였다.
『싱거우면 새우젓을 조금 넣어 봐.』
그가 국밥의 간을 보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간도 정확해. 내 입맛이 뭐 입맛인가, 형이 해주는 대로 먹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뭐.』
그 말에 일권은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맑디 맑은 사람.
희수는 그의 고른 치열을 보며 까닭없이 슬퍼졌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한 무대야. 저렇게 악의없이 맑은 사람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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