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 천왕 31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장 魔谷으로 부터의 脫出
"여제(女帝), 호로마곡에 무슨 볼 일이 계십니까?"
호로마곡에 다가서자 한 명의 노인이 음침하게 말하며 실혼여제를
막아섰다.
-지살황(地煞皇)!
이것이 그 자의 이름이었다.
자부문의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네 명의 호법 중 둘째가
그 자였다. 그는 만겁마가의 마가삼태상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서운 고수자였다.
지살황은 호로마곡의 곡주(谷主)였다.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실혼여제와
뇌황이었다.
"죄수를 한 명...... 데리고 왔어요!"
실혼여제는 우울하게 말하며 막붕비를 지살황에게 넘겨 주었다.
"죄수입니까?"
지살황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붕비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지살황이건만 실혼여제 앞에서는 항상 몸이 굳어지곤 했다.
"그는...... 중죄인이예요. 영제(影帝)를 죽이고 빙마부에 난입하여
천년마녀를 파괴했어요."
"예엣?"
실혼여제의 말에 지살황의 안색이 흑빛이 되었다.
그도 천년마녀, 천마서시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실혼여제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연공 중이시라 우선 이 자를 이곳에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 그 분이 직접 심문하시도록 하세요."
"명을...... 받습니다!"
지살황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한...... 한데 이 자의 이름은......?"
지살황은 돌아가려는 실혼여제에게 급히 물었다.
"지옥...... 혈황(地獄血皇)이라더군요!"
자박! 자박!
실혼여제는 천천히 호로마곡에서 멀어지며 대답했다.
"지옥...... 혈황!"
지살황은 신음하며 그 이름을 되뇌였다. 이어 그는 급히 철책 안쪽을
향해 외쳤다.
"제일급의 중죄인이다. 특별실을 준비하랏!"
* * *
호로마곡 가장 안쪽에 자리한 동굴, 동굴 깊은 곳에는 햇빛 한 올
들지 않은 어두운 뇌옥이 있었다.
사면 벽이 온통 오금철의 쇠창살로 이루어진 밀실, 그곳은
중죄인들을 가두는 특별뇌옥이었다. 호로마곡 중에서도 최악의 뇌옥이
바로 이곳이었다.
"......!"
막붕비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 그는 지금 지살황 옆구리에 끼어
특별뇌옥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각 뇌옥마다에 몇 명씩 죄수들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때는 무림을 떨어울리던 거효대마(巨梟大魔)들......
지금 그들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허공을 무의미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막붕비는 한눈에 그들이 몽혼마약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단목뇌황----!
그는 마약과 미혼사법으로 그 거효대마들을 그렇게 마음까지 죽인
후에 그들을 살아 있는 강시로 만들어 써먹고 있는 것이다.
(없다!)
뇌옥 앞으로 지나가며 막붕비는 소리없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이 호로마곡에 들어온 것이다.
-혈관음 빙화정!
만겁마종 패무극의 양녀이며 장차 만겁마가의 여주인이 될 여인,
패무극은 무언 중에 그녀를 막붕비에게 부탁했었다.
막붕비는 그래서 혈관음을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로 인해 제왕성의 안주인인 비취여제가 불행해 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제 잊어야만 했다. 모든 죄는 단목뇌황에게 있는 것이다.
한데, 그 혈관음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철컹!
하나의 쇠창살 문이 요란하게 열려졌다.
"천면(千面)! 네 동무가 왔다."
쿵!
지살황은 거칠게 말하며 막붕비를 뇌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 자는 이내 몸을 돌려 뇌옥 밖으로 걸어 나갔다.
"......!"
막붕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뇌옥 안을 돌아보았다. 그 뇌옥
안에는 막붕비 말고도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한 명 괴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 자는 끔찍하게도
얼굴에서 가죽이 몽땅 벗겨진 인물이었다.
"켈켈...... 어서 오게! 그 동안 혼자 있어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네."
파면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이 웃는 것이지 썩어 문드러진 그 자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막붕비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선배는...... 고명이 어찌 되십니까?"
막붕비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혈관음을 무작정 찾기보다는 그 자에게 묻는 쪽이 빠른 것
같아서였다.
"핫하...... 노부가 누구냐고? 노부는...... 천면신투(千面神偸)라고
불리던 어르신네다."
파면인이 두 눈을 희번덕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막붕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천...... 면신투! 귀하가 환우십강 중의 바로 그......"
파면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캇캇...... 그렇다! 노부가 바로 밤의 제왕(帝王) 천면신투다!"
"......!"
막붕비는 해연히 놀라 자세히 그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다른
죄수들과 달리 그의 눈에는 몽혼마약에 중독된 증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파면인은 한 가지 불문지보를 갖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마약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께서는...... 어쩌다 이곳에 갇히게 되셨습니까?"
막붕비는 신음하며 물었다.
이에 천면신투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한놈 효웅에게 두 장의 인피면구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놈은
사례는 커녕 노부의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이곳에 가두는
것으로 보답했다."
막붕비의 눈이 번쩍 신광을 토했다.
"그 두 사람의 인피면구는 만겁마종 패무극과 자면천존 단목후의
것이 아닙니까?"
"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천면신투가 대경하여 놀라며 물었다.
-천면신투!
투도술과 역용술의 천재인 밤의 제왕!
그는 이십 년 전과 십 년 전에 각기 하나씩의 인피면구를 한 명
효웅에게 만들어 주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얼굴을 잃고 이곳에 갇힌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역용재간이 아직도 그
효웅에게 매우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피면구를 가져간 자는...... 뇌황(雷皇)이란 자가 아닙니까?"
막붕비가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천면신투는 부르르 몸을 떨며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말...... 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하면 노부의 자식들이 다친다!"
"......!"
막붕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천면신투의 자식들은 뇌황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자칫
천면신투가 비밀을 발설하면 그들은 그 즉시 해침을 당할 것이다.
천면신투는 보기와 달리 정(情)이 많은 사람이고 그것을 아는 뇌황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의 입을 봉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너 어린 아이는 무슨 죄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느냐?"
천면신투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한 명 여자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막붕비는 기회다 싶어 말했다.
"여자를 구하러 왔다고? 그럼 너는 네발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이냐? 이 지옥 같은 곳에......?"
천면신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막붕비를 보았다.
막붕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강호에서 혈관음 빙화정이라고 불렸습니다.
혈관음교의 제이교주였지요!"
"그 계집은...... 네 연인이냐?"
천면신투는 조심스럽게 막붕비를 보며 물었다.
막붕비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만 남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래?"
천면신투의 눈에 한 가닥 안도의 기색이 감돌았다.
"이곳에 갇힌 죄수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때로 무서운 흉성을
터뜨리곤 한다. 그들의 흉성을 제압하는 데는...... 색욕이 최고지!"
천면신투는 씁쓸하게 말했다.
막붕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천면신투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도...... 그녀를 안았습니까?"
막붕비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천면신투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에게는 그런 염복이 아직은 없었네."
"으음......!"
막붕비의 안색이 이지러졌다. 혈관음이 만겁마가에서 뇌황을 비롯한
다른 무리들에게 어떤 짓을 당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알고 있던 한 여인이 그같이 불행한 일을 또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막붕비가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묻자 천면신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맨 끝의 뇌옥에 다른 색노들과 함께 갇혀 있을 걸세."
막붕비는 벌떡 일어섰다.
우두둑......!
그 순간 막붕비의 몸에서 뼈마디가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막혀 있던
혈도가 풀렸다.
천마서시를 안아 양극마강이 또 한 단계 높아진 지금
그의 내공으로 막힌 혈도를 푸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로 걸어들어 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
콰득!
놀라는 천면신투를 뒤로 하고 막붕비는 쇠창살로 다가가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서 오금한철의 쇠창살은 수수깡같이 부러져
나갔다.
막붕비는 말없이 그 사이로 걸어나갔다.
마지막 뇌옥, 그곳에는 십여 명의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여인들, 그녀들은 색노(色奴)라고 불리는 여죄수들로
몽혼마약에 중독된 죄수들의 욕정을 풀 대상으로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 여인들 중 한 명 백발의 미녀가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주 기품있는 이십대 후반의 미인, 그녀는 바로 혈관음
빙화정이었다.
탐스럽고 풍만하던 그녀의 몸은 지금 초췌하기 이를 데 없게 변하여
보기에도 애처로왔다.
그녀의 마음은 죽은 지 오래고 몸도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문득 그녀는 하나의 그림자가 자신을 가로막아 섬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흐릿한 시선 속에 한 명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연민과 근심으로 가득한 얼굴...... 빙화정은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빙...... 소저! 이제 되었소."
청년은 연민의 한숨을 쉬며 빙화정을 꼬옥 끌어안았다.
빙화정은 멍한 표정으로 청년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까닭모를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배어흘러 청년의 옷깃을
적셨다.
그 가슴이 무척 넓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수혈이
짚여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뇌...... 황! 네 만행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루도록 해주겠다.)
막붕비는 빙화정을 안고 뇌옥 밖을 향해 걸어갔다.
천면신투의 뇌옥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추어섰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천면신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노부의 목숨보다 자식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네!"
"음!"
막붕비는 탄식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잘가게, 젊은 친구!)
천면신투는 사라지는 막붕비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누웠다.
곧 굉장한 소란이 벌어져 밤새 잠을 설치게 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은 조용할 때 잠을 자도록 하려고 그는 눈을
감았다.
* * *
밀실.
츠으...... 츠---- 읏!
흡혈마황검에서 일어나는 핏빛 마검기로 석실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석실의 중앙,
"으음......!"
단목뇌황----!
그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좌정해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열 겹의 핏빛 장막이 일고 있는데 그것은
십극천강이라는 것으로 천년내공을 지닌 자만이 발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잉...... 지잉!
뇌황은 흡혈마황검을 안고 있으며 그것에서는 끝없이 무서운 마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뇌황의
의지가 흡혈마황검의 마성에 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문득,
데---- 에엥!
멀리서 한 소리 섬뜩한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지 않으나 그 종소리에는 심장을 갈가리 후벼파는 듯한
공포스러운 마력이 실려 있었다.
번---- 쩍!
뇌황은 부르르 떨며 번쩍 눈을 떴다.
"악...... 마혈종의 증폭마음이다!"
뇌황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이미 피를 칠한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흡혈마황검의 마성은 이미 그의 대뇌에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악마혈종의 소리가 들리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뇌황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때였다.
"지...... 지존, 보고드립니다!"
석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천, 지,
현, 황 네 호법 중 세째인 현무노조의 음성이었다.
"호로마곡에...... 악마혈종을 지닌 자가 나타나 악마혈종으로 백여
명의 고수들을 격살하고 북방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현무노조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어라고! 호로마곡이 깨졌다고?"
콰직!
뇌황은 앉아 있던 석좌를 박살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악마혈종의 출현이 아니라 호로마곡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호로마곡에는 그를 파멸시킬 수 있는 정보를
가진 죄수가 둘이나 있었다.
천면신투와 혈관음 빙화정이 그들이었고 호로마곡이 깨졌음은 그
중죄인들의 신변이 외부로 유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뇌황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뇌황의 입에서 짐승 같은 폭갈이 터졌다.
콰득!
뇌황은 미친 듯이 흡혈마황검으로 석실의 석문을 그어 버렸다.
콰---- 쾅!
"크---- 악!"
석문이 박살나며 그 뒤에서 현무노조의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지---- 잉! 지---- 잉!
흡혈마황검은 허공을 격한 채 현무노조의 내공과 정혈을 빨아 먹으며
미친 듯한 울림을 울려 내었다.
"흐흐......!"
뚜벅!
뇌황은 흡혈마황검을 통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현무노조의 내공에
입맛을 다시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으으...... 지존! 당...... 당신이 나를......"
산산이 부서진 석문 뒤에서 한 명 노인이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피부가 검은 흑포의 노인!
그는 바로 현무노조였는데 급격히 몸이 마른 나뭇가지같이
말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흡혈마황검에 정혈을 빨리고 죽은 다른 시신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 이미 당신은...... 마인(魔人)이...... 되었군!"
툭......!
현무노조는 공포 서린 어조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캇캇...... 혈종지주! 곧 네놈도 이렇게 만들어 주마!"
현무노조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뇌황은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의
웃음에는 이미 인성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악마성황, 그의 저주는 천 오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한 명의 악귀를
만들어 낸 것이다.
* * *
-음양계(陰陽界)!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를 불문에서는 음양계라고 부른다. 한 번
건너면 다시 볼 수 없는 곳, 이승과 저승이 함께 공존한다고 하여
음양계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음양계가 십만대산에도 있었다.
십만대산의 북동쪽에 자리한 하나의 단애를 음양계라 부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대지(大地)의 갈라진 틈바귀!
그 아래에는 사시사철 짙은 운무와 독장이 뒤덮여 있어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경(二更) 무렵----!
"으---- 음! 역시 무리였는가?"
스---- 읏!
음양계의 단애를 따라 한 명의 청년이 달려왔다. 그 청년은 등에 한
명의 여인을 업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핏빛이 흐르는 종이 하나
들려 있었다.
청년은 바로 막붕비였다.
화드득!
막붕비는 창백한 안색으로 음양계 위에 몸을 세웠다.
그는 호로마곡을 빠져 나오면서 악마혈황탄의 수법으로 한 차례
악마혈종을 울려낸 상태였다.
악마혈종에서 일어난 증폭음강은 순간적으로 지살황을 비롯한
호로마곡의 일백 명 간수들을 즉사시켰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막붕비도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본래 악마혈종을 울리는 데는 막대한 내공이 소모된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미 탈진하여 쓰러졌을 것이다.
막붕비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양극마강의 영효 때문이었다.
-양심초극마공!
그것은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공까지도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막붕비는 반으로 나눈 내공으로 악마혈종을 울린 것이고, 지금 그의
몸에는 평소의 절반 밖에 안되는 내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단 위경은 벗어났다!"
막붕비는 심호흡을 하여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츠으...... 츠으......!
한밤중이건만 음양계의 저 아래에서 뭉클뭉클 독장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도대체 무어라고 부르는 곳이지?"
막붕비는 검미를 모으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흐흣! 궁금한가, 지옥혈황?"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막붕비의 귓전을 울렸다.
(뇌황!)
막붕비는 안색이 홱 변하며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
츠으...... 츠으......!
금방 혈관에서 솟구친 선혈같이 시뻘건 피무리가 음양계의 단애를
따라 다가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피무리 속에는 한 명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이글거리는 핏빛의 눈에 오른팔이 없는 독비괴인...... 그는 바로
뇌황이었다.
"마...... 인이 되었군!"
막붕비는 신음하며 비칠 물러섰다.
뇌황의 두 눈이 흡사 열화태세의 그것같이 핏빛의 광기(狂氣)로
번뜩이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크큽! 혈종지주가 네놈이었다니...... 놀랍구나!"
뇌황은 막붕비의 십장 앞에 서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는 핏빛의 눈으로 음양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여기는...... 음양계(陰陽界)라고 한다!"
"음...... 양계!"
막붕비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흐흐......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음양계라
하지!"
츠---- 읏!
뇌황은 핏빛 광기를 두 눈에서 흘리며 막붕비쪽을 보았다.
"이제...... 네놈을 저 아래로 보내 주마! 흐흐! 예쁜 계집과 함께
보내주는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지 마라!"
"으음......! 그대 뜻대로 될까? 본인의 손에 악마혈종이 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
막붕비는 악마혈종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캇! 치워라! 본좌는 이미 십극천강의 경지에 이르러 천년내공을
이루었다. 그 무엇도 본좌를 위협하지 못한다."
뇌황은 껄껄 웃었다.
막붕비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십극천강!
뇌황의 몸 주위로 각기 다른 열 가지 강기가 벽을 이루고 있음을 본
때문이다.
"흐흣! 혈관음! 그 계집의 몸은 옛날의 제 어미의 그것보다 배는
감촉이 좋았어! 지옥에 가서 데리고 살기에는 괜찮을 게다, 지옥혈황!"
뇌황은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관음을 희롱하는 그 말에 막붕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누가...... 지옥에 가게 될지 보자, 뇌황!"
막붕비는 폭갈을 지르며 모든 공력을 오른손에 모았다.
"악마...... 혈황탄----!"
그는 폭갈과 함께 전력을 다해 악마혈종을 두드렸다.
데---- 에엥!
밤하늘을 찢어 발기는 무서운 종소리가 작은 악마혈종으로부터
폭발하듯 솟구쳤다. 동시에,
"캇! 마황단천----!"
뇌황도 십극천강을 흡혈마황검에 실어 맹렬히 막붕비를 그어갔다.
콰드드득! 치치지직!
악마혈종의 증폭음강과 흡혈마황검의 악마검파(惡魔劍波)가 충돌하며
쇠가 갈리는 소성이 일어났다.
시퍼런 불꽃이 두 절대고수 사이에서 일어나 밤하늘로 비산했다.
꽈르릉!
막붕비가 딛고 있던 음양계의 단애가 쩍 갈라지며 까마득한 저
아래로 추락해 갔다.
"크---- 윽!"
그 중에서 막붕비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함께 떨어져 내렸다. 반푼의
내공으로 뇌황의 천년내공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웩---- 엑!"
쿵쿵......!
뇌황 단목뇌황도 오공에서 피를 뿌리며 십여 보 주르르 밀려났다.
악마혈종의 증폭음강----!
그것은 놀랍게도 뇌황의 십극천강을 박살내고 그의 내부를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악마혈종의 마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과연...... 무섭다! 그 놈의 내공이 나의 팔할만 되었어도 죽는
쪽은 나였을 것이다!"
뇌황은 신음하며 음양계를 내려다 보았다.
고오오......!
막붕비와 혈관음을 삼킨 음양계는 그저 꾸역꾸역 독장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 어쨌든 흡혈마황검의 단 하나 천적(天敵)인 악마혈종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상 이제 나 단목뇌황을 막을 것은 지상...... 에는
없게 되었다!"
뇌황은 단애 아래를 보며 득의의 음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이제 천하는 나 단목뇌황의 것이다. 하늘도......
땅도...... 크하하핫!"
우르르릉!
뇌황의 폭갈로 음양계 전체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반 년! 반 년이면 족하다! 핫하! 나는 하늘과...... 땅을 나의
사랑하는 려군(麗君)에게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푸핫핫!"
콰드드득!
광소와 함께 뇌황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고오오오!
핏빛 선풍이 일 천장을 치솟으며 뇌황의 모습은 까마득히 밤하늘로
사라졌다.
뇌황이 사라진 직후,
"아아! 한 걸음 늦고 말았구나!"
스---- 읏!
고통스런 여인의 신음소리와 함께 두 개의 왜영이 음양계 위에
내려섰다.
실혼여제 단목혜린----!
그리고 소복을 걸친 은발의 신비한 미녀가 그들이었다.
은발의 미녀는 마치 어린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의 웃음에는 전율스러운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은발미녀는 바로 부활한 천마서시였다.
"붕비----!"
실혼여제는 음양계를 내려다보며 오열했다. 그녀의 메말랐던 두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아! 한순간의 방심으로 당신을 잃다니......!"
실혼여제는 단애 위에 쓰러지며 오열했다.
간발의 차이로 그녀는 막붕비를 구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막붕비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막붕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연민이 아니라
애정이었음을......
"아버님을...... 시해한 것도 참을 수 있었어!"
콰득!
실혼여제는 입술을 악물며 돌바닥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청석덩어리가 모래같이 바스러졌다.
"어머니와 사통을 해도...... 나는 차마 당신을 벨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틀려!"
실혼여제는 경의에 찬 눈빛으로 교구를 일으켰다.
그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뭇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복수...... 하겠다! 나의 붕비를 해친 대가로...... 당신 뇌황을
가장 비참하게 죽여주마! 당신은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실혼여제는 바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은 어느 덧 본래의 차가운 회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의 마음은 오래 전에 돌같이 차가와져 있었다. 따뜻해질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를 잃은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스---- 윽!
그녀는 밤하늘로 신형을 띄웠다.
"내게 더 이상 잃어 버릴 무엇이 남았겠는가? 가자 서시(西施)----!"
피---- 잉!
실혼여제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일천 장 밖으로 날아갔다.
스---- 읏!
그 뒤를 천마서시는 소녀같이 배시시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두 개의
왜영은 순간적으로 까마득한 밤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화르르......!
한 차례 광풍이 스친 음양계 위로 스산한 밤바람만이 음산하게 스쳐
지나고 있었다.
* * *
쐐애애액----!
비단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전을 스쳐갔다.
막붕비와 그의 등에 업힌 혈관음 빙화정!
두 사람의 몸은 빛살같이 음양계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추악한 이 세상과도 영영 이별인가?)
혈관음은 막붕비의 어깨 너머로 까마득히 멀어지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며 뇌까렸다.
아찔한 추락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와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피는 막붕비가 흘린 것이었다.
막붕비는 뇌황의 흡혈마황검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상태였다.
흡혈마황검의 악마검강만큼 무서운 것은 천지간에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악마혈종의 증폭음강이었다.
막붕비는 그 무서운 악마검강에 가슴 부분을 휩쓸렸었다. 그것은
유리보갑을 종이 찢듯 찢어내며 막붕비의 가슴 부위 열 세 개의 요혈과
정맥을 갈가리 찢어버린 상태였다.
빙화정은 막붕비가 살아 있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생(生)과 사(死)의 문제는 빙화정에게 그리 큰 문제가
못되었다.
그녀의 마음은 만겁마가의 뇌옥에서 의모인 마모 여운상과 함께
뇌황에게 난행당할 때 이미 죽어 버렸었다.
고오오오----!
밑에서부터 불어 올라오는 역풍이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것은 바닥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죽는구나!)
빙화정은 눈을 꼬옥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업고 있는 막붕비의
목을 꼬옥 끌어 안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지옥혈황! 당신은 나를 구하려다 헛되이 저와 함께
죽는군요!)
빙화정은 막붕비의 등에서 한숨을 쉬었다. 자신 때문에 죽게된
막붕비에게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이 인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첨---- 벙! 콰아아----!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며 빙화정과 막붕비의 몸은 깊은 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호수----!)
빙화정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음양계의 단애 아래는 깊디깊은 호수였다. 두 사람은 그 호수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모면한 것이다. 하지만 수면에 떨어진
충격도 대단한 것이었다.
(흑......!)
전신이 바스러지는 듯한 아찔한 충격이 일며 빙화정은 막붕비의
등에서 퉁겨져 나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빙화정은 혼절한 막붕비의 몸이 호수 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안돼!)
팟!
빙화정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막붕비의 소맷자락을 잡아챘다.
(나는 죽더라도...... 이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된다!)
촤아아!
빙화정은 이를 악물고 막붕비와 함께 수면으로 떠올라갔다. 막붕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그녀의 몸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강한
생명력을 끌어낸 것이다.
촤르르......! 쏴아아!
이내 막붕비를 안은 빙화정은 수면으로 떠올랐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로 짙은 운무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운무 속으로
저편에 바위 같은 물체의 그림자가 언뜻 빙화정의 눈에 들어왔다.
빙화정은 천 근 같은 사지를 움직여 천천히 그 쪽으로 헤엄쳐 갔다.
건조한 모래 위로 올라섰을 때 빙화정의 숨은 턱에 닿아 있었다.
막붕비를 겨우 물 밖으로 끌어낸 빙화정은 할딱이며 모래 위에 벌렁
누웠다.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막붕비의 상세를
살폈다.
막붕비는 혼수상태였다. 그의 호흡은 가늘게 이어지고 있으나 기맥은
금시라도 끊어질 듯이 위태로왔다.
"휴......!"
빙화정은 쓸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을 물에서 꺼낸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막붕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설령 살리고 싶다 해도 내게는 영약은 고사하고 한 올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다.)
사르르......!
그녀는 고소를 지으며 다시 막붕비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막붕비의 옆에 교구를 바싹 붙였다.
(당신의 저승 길에 길동무를 해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예요!)
빙화정은 막붕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무어지?)
눈을 감으려던 그녀는 흠칫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츠으으----!
멀리 안개 속에서 신비한 두 줄기 빛무리가 일어나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붉고 흰 무지개 같은 서기, 그것은 안개에 가려 매우 흐릿했다. 만일
빙화정이 막붕비 쪽으로 돌아눕지 않았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츠으...... 츠으......!
그 두 줄기 서기는 볼수록 신비했다. 그것들은 흡사 살아 있는
물체같이 끝없이 움직이며 허공에서 뒤엉켰다. 그 모습은 백룡(白龍)과
적룡(赤龍) 한 쌍이 뒤엉켜 유희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
사박!
빙화정은 자기도 모르게 그 적백의 서기가 번져 나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엇인가 그녀를 부르는 듯한 착각이 그 순간 빙화정을
엄습한 때문이었다.
(동굴......!)
빙화정은 흠칫 멈추어섰다.
예의 적백의 서기는 석벽 아래 뚫린 하나의 동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데,
<음양동부(陰陽洞府).>
동굴 위에는 그 같은 네 자의 글이 대전체로 쓰여져 있었다.
빙화정은 꿈에도 음양계 아래에서 인간의 자취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지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스으...... 스으......!
그 사이에도 동굴 안에서는 예의 서기가 요동을 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양동부다! 참으로 끈질긴 인연이로구나. 음양계의 천장단애에서
떨어지고도 죽지 않고 옛 고인의 유적을 대하다니......!"
빙화정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음양동부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한 별반 눈에 띄는 물건도
크게 없었다.
맞은편 석벽, 한 폭의 정교한 봉황도(鳳凰圖)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마리의 암수가 뒤엉켜 있는 봉황도----!
그 조각은 깃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생동감이
넘치며 어떤 현기가 느껴졌다.
"......!"
그 봉황도를 보며 빙화정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한 눈에 봉황도의
암수 봉황이 교합을 하는 자세임을 알아본 때문이다.
봉황도의 앞, 두 개의 포단이 마주 놓여 있었다. 갈대 잎으로 싼
평범한 포단......
그것들은 누군가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모양으로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그리고,
츠으...... 츠으......
포단의 가운데에는 각기 하나씩의 구슬이 놓여 휘황한 서기를 뿌리고
있었다.
오른쪽 포단의 구슬에서는 타는 듯이 붉은 서기가, 왼쪽의
포단에서는 서릿발 같은 백색 서기가 노을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거위 알만한 적백(赤白)의 구슬들!
빙화정이 본 예의 서기들은 그 두 개의 구슬에서 번져 나온
것이었다. 한데, 두 포단 사이에는 몇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 권의 빛바랜 고경(古經), 잘 개인 붉은 빛의 남자 장포와, 눈같이
흰 빙잠사의 궁장, 그리고 한 장의 금판이 그것들이었다.
"......!"
빙화정은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금판과 두 권 고경을
집어들었다.
<빙하천년경(氷河千年經).>
<열화마경(熱火魔經).>
두 고경의 표지에는 그런 글들이 쓰여 있었다.
"빙하...... 천년경!"
빙화정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 강렬한 예감에 그녀는 급히
비급과 함께 있던 금판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천 년 이전에 잊혀진
글이 있었다.
<열화마종(熱火魔宗)과 그의 아내이며 좋은 친구였던
빙하여제(氷河女帝) 빙옥교(氷玉嬌)가올 후예를 위해 적는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열화마종----!
빙하여제----!
아아! 바로 그렇다!
그들은 저 잊혀진 천외의 초인들인 오패천 중의 두 사람이었다.
오패천 중에서도 가장 막강했다는 두 명의 초인들...... 그들은
놀랍게도 부부 사이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무했었다.
천 년 전----!
열화마종과 빙하여제는 사대천왕에게 애석하게 패하고 말았다. 그
패배는 두 초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 음양계인 절지에 동부를 짓고 함께 사대천왕을 깨뜨릴 무공
연마에 몰두했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좋은 친구로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각한 고민이었다. 열정은 결코 무공증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믿은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어느 달밝은 밤에 두 남녀는 거의
충동적으로 하나가 되어 부부관계를 맺게 되었다.
영육이 일치되는 순간, 두 사람은 이제껏 자신들을 괴롭히던 모든
번뇌가 일순간에 사라짐을 느꼈다.
사대천왕에 대한 복수심도...... 패권과 명예심에 대한 야심도......
모든 것이 안개같이 흩어지고 그들은 미몽에서 깨어나 크나큰 열락의
경지를 맛보게 되었다.
그들은 잃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을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두 부부는 아주 오랜 시간을 음양동부에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함께 우화등선하게 되었던 것이다.
포단 위의 구슬, 그것들은 바로 열화마종과 빙하여제가
우화등선하면서 그때까지 쌓았던 내공을 응집하여 남긴 내단이었다.
그것들에는 각기 십 갑자의 내공에 필적하는 무서운 잠력이 응결되어
있었다. 행복했던 두 부부는 천세 후에 막붕비와 빙화정이 이곳에 올
줄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의 내단을 남긴 것이었다.
그 내단 외에도 열화마종과 빙하여제는 세 가지를 더 남겼다.
자신들의 평생 심득이 기록된 두 권의 비급, 적룡제왕포(赤龍帝王袍)와
빙잠천의(氷蠶天衣)라는 두 벌의 의복, 그리고 석벽의 봉황도가
그것이었다.
봉황도(鳳凰圖)----!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한 가지 지고무상한 내공심법이었다.
-봉황환희무(鳳凰歡喜舞)!
부부사이에서만 수련이 가능한 초절정의 내공심결......!
그것은 막붕비가 익힌 양심초극마공과 아주 유사한 종류의
심법이었다. 틀린 점이라면 봉황환희무쪽이 좀더 정종(正宗)에
가까우며 그 성취가 빠르다는 차이 정도였다.
"여제(女帝), 호로마곡에 무슨 볼 일이 계십니까?"
호로마곡에 다가서자 한 명의 노인이 음침하게 말하며 실혼여제를
막아섰다.
-지살황(地煞皇)!
이것이 그 자의 이름이었다.
자부문의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네 명의 호법 중 둘째가
그 자였다. 그는 만겁마가의 마가삼태상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서운 고수자였다.
지살황은 호로마곡의 곡주(谷主)였다.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실혼여제와
뇌황이었다.
"죄수를 한 명...... 데리고 왔어요!"
실혼여제는 우울하게 말하며 막붕비를 지살황에게 넘겨 주었다.
"죄수입니까?"
지살황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붕비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지살황이건만 실혼여제 앞에서는 항상 몸이 굳어지곤 했다.
"그는...... 중죄인이예요. 영제(影帝)를 죽이고 빙마부에 난입하여
천년마녀를 파괴했어요."
"예엣?"
실혼여제의 말에 지살황의 안색이 흑빛이 되었다.
그도 천년마녀, 천마서시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실혼여제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연공 중이시라 우선 이 자를 이곳에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 그 분이 직접 심문하시도록 하세요."
"명을...... 받습니다!"
지살황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한...... 한데 이 자의 이름은......?"
지살황은 돌아가려는 실혼여제에게 급히 물었다.
"지옥...... 혈황(地獄血皇)이라더군요!"
자박! 자박!
실혼여제는 천천히 호로마곡에서 멀어지며 대답했다.
"지옥...... 혈황!"
지살황은 신음하며 그 이름을 되뇌였다. 이어 그는 급히 철책 안쪽을
향해 외쳤다.
"제일급의 중죄인이다. 특별실을 준비하랏!"
* * *
호로마곡 가장 안쪽에 자리한 동굴, 동굴 깊은 곳에는 햇빛 한 올
들지 않은 어두운 뇌옥이 있었다.
사면 벽이 온통 오금철의 쇠창살로 이루어진 밀실, 그곳은
중죄인들을 가두는 특별뇌옥이었다. 호로마곡 중에서도 최악의 뇌옥이
바로 이곳이었다.
"......!"
막붕비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 그는 지금 지살황 옆구리에 끼어
특별뇌옥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각 뇌옥마다에 몇 명씩 죄수들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때는 무림을 떨어울리던 거효대마(巨梟大魔)들......
지금 그들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허공을 무의미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막붕비는 한눈에 그들이 몽혼마약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단목뇌황----!
그는 마약과 미혼사법으로 그 거효대마들을 그렇게 마음까지 죽인
후에 그들을 살아 있는 강시로 만들어 써먹고 있는 것이다.
(없다!)
뇌옥 앞으로 지나가며 막붕비는 소리없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이 호로마곡에 들어온 것이다.
-혈관음 빙화정!
만겁마종 패무극의 양녀이며 장차 만겁마가의 여주인이 될 여인,
패무극은 무언 중에 그녀를 막붕비에게 부탁했었다.
막붕비는 그래서 혈관음을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로 인해 제왕성의 안주인인 비취여제가 불행해 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제 잊어야만 했다. 모든 죄는 단목뇌황에게 있는 것이다.
한데, 그 혈관음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철컹!
하나의 쇠창살 문이 요란하게 열려졌다.
"천면(千面)! 네 동무가 왔다."
쿵!
지살황은 거칠게 말하며 막붕비를 뇌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 자는 이내 몸을 돌려 뇌옥 밖으로 걸어 나갔다.
"......!"
막붕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뇌옥 안을 돌아보았다. 그 뇌옥
안에는 막붕비 말고도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한 명 괴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 자는 끔찍하게도
얼굴에서 가죽이 몽땅 벗겨진 인물이었다.
"켈켈...... 어서 오게! 그 동안 혼자 있어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네."
파면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이 웃는 것이지 썩어 문드러진 그 자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막붕비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선배는...... 고명이 어찌 되십니까?"
막붕비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혈관음을 무작정 찾기보다는 그 자에게 묻는 쪽이 빠른 것
같아서였다.
"핫하...... 노부가 누구냐고? 노부는...... 천면신투(千面神偸)라고
불리던 어르신네다."
파면인이 두 눈을 희번덕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막붕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천...... 면신투! 귀하가 환우십강 중의 바로 그......"
파면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캇캇...... 그렇다! 노부가 바로 밤의 제왕(帝王) 천면신투다!"
"......!"
막붕비는 해연히 놀라 자세히 그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다른
죄수들과 달리 그의 눈에는 몽혼마약에 중독된 증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파면인은 한 가지 불문지보를 갖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마약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께서는...... 어쩌다 이곳에 갇히게 되셨습니까?"
막붕비는 신음하며 물었다.
이에 천면신투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한놈 효웅에게 두 장의 인피면구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놈은
사례는 커녕 노부의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이곳에 가두는
것으로 보답했다."
막붕비의 눈이 번쩍 신광을 토했다.
"그 두 사람의 인피면구는 만겁마종 패무극과 자면천존 단목후의
것이 아닙니까?"
"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천면신투가 대경하여 놀라며 물었다.
-천면신투!
투도술과 역용술의 천재인 밤의 제왕!
그는 이십 년 전과 십 년 전에 각기 하나씩의 인피면구를 한 명
효웅에게 만들어 주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얼굴을 잃고 이곳에 갇힌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역용재간이 아직도 그
효웅에게 매우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피면구를 가져간 자는...... 뇌황(雷皇)이란 자가 아닙니까?"
막붕비가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천면신투는 부르르 몸을 떨며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말...... 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하면 노부의 자식들이 다친다!"
"......!"
막붕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천면신투의 자식들은 뇌황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자칫
천면신투가 비밀을 발설하면 그들은 그 즉시 해침을 당할 것이다.
천면신투는 보기와 달리 정(情)이 많은 사람이고 그것을 아는 뇌황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의 입을 봉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너 어린 아이는 무슨 죄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느냐?"
천면신투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한 명 여자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막붕비는 기회다 싶어 말했다.
"여자를 구하러 왔다고? 그럼 너는 네발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이냐? 이 지옥 같은 곳에......?"
천면신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막붕비를 보았다.
막붕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강호에서 혈관음 빙화정이라고 불렸습니다.
혈관음교의 제이교주였지요!"
"그 계집은...... 네 연인이냐?"
천면신투는 조심스럽게 막붕비를 보며 물었다.
막붕비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만 남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래?"
천면신투의 눈에 한 가닥 안도의 기색이 감돌았다.
"이곳에 갇힌 죄수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때로 무서운 흉성을
터뜨리곤 한다. 그들의 흉성을 제압하는 데는...... 색욕이 최고지!"
천면신투는 씁쓸하게 말했다.
막붕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천면신투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도...... 그녀를 안았습니까?"
막붕비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천면신투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에게는 그런 염복이 아직은 없었네."
"으음......!"
막붕비의 안색이 이지러졌다. 혈관음이 만겁마가에서 뇌황을 비롯한
다른 무리들에게 어떤 짓을 당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알고 있던 한 여인이 그같이 불행한 일을 또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막붕비가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묻자 천면신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맨 끝의 뇌옥에 다른 색노들과 함께 갇혀 있을 걸세."
막붕비는 벌떡 일어섰다.
우두둑......!
그 순간 막붕비의 몸에서 뼈마디가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막혀 있던
혈도가 풀렸다.
천마서시를 안아 양극마강이 또 한 단계 높아진 지금
그의 내공으로 막힌 혈도를 푸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로 걸어들어 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
콰득!
놀라는 천면신투를 뒤로 하고 막붕비는 쇠창살로 다가가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서 오금한철의 쇠창살은 수수깡같이 부러져
나갔다.
막붕비는 말없이 그 사이로 걸어나갔다.
마지막 뇌옥, 그곳에는 십여 명의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여인들, 그녀들은 색노(色奴)라고 불리는 여죄수들로
몽혼마약에 중독된 죄수들의 욕정을 풀 대상으로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 여인들 중 한 명 백발의 미녀가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주 기품있는 이십대 후반의 미인, 그녀는 바로 혈관음
빙화정이었다.
탐스럽고 풍만하던 그녀의 몸은 지금 초췌하기 이를 데 없게 변하여
보기에도 애처로왔다.
그녀의 마음은 죽은 지 오래고 몸도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문득 그녀는 하나의 그림자가 자신을 가로막아 섬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흐릿한 시선 속에 한 명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연민과 근심으로 가득한 얼굴...... 빙화정은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빙...... 소저! 이제 되었소."
청년은 연민의 한숨을 쉬며 빙화정을 꼬옥 끌어안았다.
빙화정은 멍한 표정으로 청년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까닭모를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배어흘러 청년의 옷깃을
적셨다.
그 가슴이 무척 넓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수혈이
짚여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뇌...... 황! 네 만행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루도록 해주겠다.)
막붕비는 빙화정을 안고 뇌옥 밖을 향해 걸어갔다.
천면신투의 뇌옥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추어섰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천면신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노부의 목숨보다 자식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네!"
"음!"
막붕비는 탄식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잘가게, 젊은 친구!)
천면신투는 사라지는 막붕비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누웠다.
곧 굉장한 소란이 벌어져 밤새 잠을 설치게 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은 조용할 때 잠을 자도록 하려고 그는 눈을
감았다.
* * *
밀실.
츠으...... 츠---- 읏!
흡혈마황검에서 일어나는 핏빛 마검기로 석실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석실의 중앙,
"으음......!"
단목뇌황----!
그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좌정해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열 겹의 핏빛 장막이 일고 있는데 그것은
십극천강이라는 것으로 천년내공을 지닌 자만이 발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잉...... 지잉!
뇌황은 흡혈마황검을 안고 있으며 그것에서는 끝없이 무서운 마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뇌황의
의지가 흡혈마황검의 마성에 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문득,
데---- 에엥!
멀리서 한 소리 섬뜩한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지 않으나 그 종소리에는 심장을 갈가리 후벼파는 듯한
공포스러운 마력이 실려 있었다.
번---- 쩍!
뇌황은 부르르 떨며 번쩍 눈을 떴다.
"악...... 마혈종의 증폭마음이다!"
뇌황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이미 피를 칠한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흡혈마황검의 마성은 이미 그의 대뇌에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악마혈종의 소리가 들리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뇌황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때였다.
"지...... 지존, 보고드립니다!"
석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천, 지,
현, 황 네 호법 중 세째인 현무노조의 음성이었다.
"호로마곡에...... 악마혈종을 지닌 자가 나타나 악마혈종으로 백여
명의 고수들을 격살하고 북방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현무노조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어라고! 호로마곡이 깨졌다고?"
콰직!
뇌황은 앉아 있던 석좌를 박살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악마혈종의 출현이 아니라 호로마곡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호로마곡에는 그를 파멸시킬 수 있는 정보를
가진 죄수가 둘이나 있었다.
천면신투와 혈관음 빙화정이 그들이었고 호로마곡이 깨졌음은 그
중죄인들의 신변이 외부로 유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뇌황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뇌황의 입에서 짐승 같은 폭갈이 터졌다.
콰득!
뇌황은 미친 듯이 흡혈마황검으로 석실의 석문을 그어 버렸다.
콰---- 쾅!
"크---- 악!"
석문이 박살나며 그 뒤에서 현무노조의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지---- 잉! 지---- 잉!
흡혈마황검은 허공을 격한 채 현무노조의 내공과 정혈을 빨아 먹으며
미친 듯한 울림을 울려 내었다.
"흐흐......!"
뚜벅!
뇌황은 흡혈마황검을 통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현무노조의 내공에
입맛을 다시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으으...... 지존! 당...... 당신이 나를......"
산산이 부서진 석문 뒤에서 한 명 노인이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피부가 검은 흑포의 노인!
그는 바로 현무노조였는데 급격히 몸이 마른 나뭇가지같이
말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흡혈마황검에 정혈을 빨리고 죽은 다른 시신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 이미 당신은...... 마인(魔人)이...... 되었군!"
툭......!
현무노조는 공포 서린 어조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캇캇...... 혈종지주! 곧 네놈도 이렇게 만들어 주마!"
현무노조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뇌황은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의
웃음에는 이미 인성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악마성황, 그의 저주는 천 오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한 명의 악귀를
만들어 낸 것이다.
* * *
-음양계(陰陽界)!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를 불문에서는 음양계라고 부른다. 한 번
건너면 다시 볼 수 없는 곳, 이승과 저승이 함께 공존한다고 하여
음양계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음양계가 십만대산에도 있었다.
십만대산의 북동쪽에 자리한 하나의 단애를 음양계라 부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대지(大地)의 갈라진 틈바귀!
그 아래에는 사시사철 짙은 운무와 독장이 뒤덮여 있어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경(二更) 무렵----!
"으---- 음! 역시 무리였는가?"
스---- 읏!
음양계의 단애를 따라 한 명의 청년이 달려왔다. 그 청년은 등에 한
명의 여인을 업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핏빛이 흐르는 종이 하나
들려 있었다.
청년은 바로 막붕비였다.
화드득!
막붕비는 창백한 안색으로 음양계 위에 몸을 세웠다.
그는 호로마곡을 빠져 나오면서 악마혈황탄의 수법으로 한 차례
악마혈종을 울려낸 상태였다.
악마혈종에서 일어난 증폭음강은 순간적으로 지살황을 비롯한
호로마곡의 일백 명 간수들을 즉사시켰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막붕비도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본래 악마혈종을 울리는 데는 막대한 내공이 소모된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미 탈진하여 쓰러졌을 것이다.
막붕비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양극마강의 영효 때문이었다.
-양심초극마공!
그것은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공까지도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막붕비는 반으로 나눈 내공으로 악마혈종을 울린 것이고, 지금 그의
몸에는 평소의 절반 밖에 안되는 내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단 위경은 벗어났다!"
막붕비는 심호흡을 하여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츠으...... 츠으......!
한밤중이건만 음양계의 저 아래에서 뭉클뭉클 독장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도대체 무어라고 부르는 곳이지?"
막붕비는 검미를 모으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흐흣! 궁금한가, 지옥혈황?"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막붕비의 귓전을 울렸다.
(뇌황!)
막붕비는 안색이 홱 변하며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
츠으...... 츠으......!
금방 혈관에서 솟구친 선혈같이 시뻘건 피무리가 음양계의 단애를
따라 다가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피무리 속에는 한 명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이글거리는 핏빛의 눈에 오른팔이 없는 독비괴인...... 그는 바로
뇌황이었다.
"마...... 인이 되었군!"
막붕비는 신음하며 비칠 물러섰다.
뇌황의 두 눈이 흡사 열화태세의 그것같이 핏빛의 광기(狂氣)로
번뜩이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크큽! 혈종지주가 네놈이었다니...... 놀랍구나!"
뇌황은 막붕비의 십장 앞에 서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는 핏빛의 눈으로 음양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여기는...... 음양계(陰陽界)라고 한다!"
"음...... 양계!"
막붕비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흐흐......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음양계라
하지!"
츠---- 읏!
뇌황은 핏빛 광기를 두 눈에서 흘리며 막붕비쪽을 보았다.
"이제...... 네놈을 저 아래로 보내 주마! 흐흐! 예쁜 계집과 함께
보내주는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지 마라!"
"으음......! 그대 뜻대로 될까? 본인의 손에 악마혈종이 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
막붕비는 악마혈종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캇! 치워라! 본좌는 이미 십극천강의 경지에 이르러 천년내공을
이루었다. 그 무엇도 본좌를 위협하지 못한다."
뇌황은 껄껄 웃었다.
막붕비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십극천강!
뇌황의 몸 주위로 각기 다른 열 가지 강기가 벽을 이루고 있음을 본
때문이다.
"흐흣! 혈관음! 그 계집의 몸은 옛날의 제 어미의 그것보다 배는
감촉이 좋았어! 지옥에 가서 데리고 살기에는 괜찮을 게다, 지옥혈황!"
뇌황은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혈관음을 희롱하는 그 말에 막붕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누가...... 지옥에 가게 될지 보자, 뇌황!"
막붕비는 폭갈을 지르며 모든 공력을 오른손에 모았다.
"악마...... 혈황탄----!"
그는 폭갈과 함께 전력을 다해 악마혈종을 두드렸다.
데---- 에엥!
밤하늘을 찢어 발기는 무서운 종소리가 작은 악마혈종으로부터
폭발하듯 솟구쳤다. 동시에,
"캇! 마황단천----!"
뇌황도 십극천강을 흡혈마황검에 실어 맹렬히 막붕비를 그어갔다.
콰드드득! 치치지직!
악마혈종의 증폭음강과 흡혈마황검의 악마검파(惡魔劍波)가 충돌하며
쇠가 갈리는 소성이 일어났다.
시퍼런 불꽃이 두 절대고수 사이에서 일어나 밤하늘로 비산했다.
꽈르릉!
막붕비가 딛고 있던 음양계의 단애가 쩍 갈라지며 까마득한 저
아래로 추락해 갔다.
"크---- 윽!"
그 중에서 막붕비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함께 떨어져 내렸다. 반푼의
내공으로 뇌황의 천년내공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웩---- 엑!"
쿵쿵......!
뇌황 단목뇌황도 오공에서 피를 뿌리며 십여 보 주르르 밀려났다.
악마혈종의 증폭음강----!
그것은 놀랍게도 뇌황의 십극천강을 박살내고 그의 내부를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악마혈종의 마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과연...... 무섭다! 그 놈의 내공이 나의 팔할만 되었어도 죽는
쪽은 나였을 것이다!"
뇌황은 신음하며 음양계를 내려다 보았다.
고오오......!
막붕비와 혈관음을 삼킨 음양계는 그저 꾸역꾸역 독장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 어쨌든 흡혈마황검의 단 하나 천적(天敵)인 악마혈종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상 이제 나 단목뇌황을 막을 것은 지상...... 에는
없게 되었다!"
뇌황은 단애 아래를 보며 득의의 음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이제 천하는 나 단목뇌황의 것이다. 하늘도......
땅도...... 크하하핫!"
우르르릉!
뇌황의 폭갈로 음양계 전체가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반 년! 반 년이면 족하다! 핫하! 나는 하늘과...... 땅을 나의
사랑하는 려군(麗君)에게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푸핫핫!"
콰드드득!
광소와 함께 뇌황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고오오오!
핏빛 선풍이 일 천장을 치솟으며 뇌황의 모습은 까마득히 밤하늘로
사라졌다.
뇌황이 사라진 직후,
"아아! 한 걸음 늦고 말았구나!"
스---- 읏!
고통스런 여인의 신음소리와 함께 두 개의 왜영이 음양계 위에
내려섰다.
실혼여제 단목혜린----!
그리고 소복을 걸친 은발의 신비한 미녀가 그들이었다.
은발의 미녀는 마치 어린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의 웃음에는 전율스러운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은발미녀는 바로 부활한 천마서시였다.
"붕비----!"
실혼여제는 음양계를 내려다보며 오열했다. 그녀의 메말랐던 두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아! 한순간의 방심으로 당신을 잃다니......!"
실혼여제는 단애 위에 쓰러지며 오열했다.
간발의 차이로 그녀는 막붕비를 구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막붕비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막붕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연민이 아니라
애정이었음을......
"아버님을...... 시해한 것도 참을 수 있었어!"
콰득!
실혼여제는 입술을 악물며 돌바닥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청석덩어리가 모래같이 바스러졌다.
"어머니와 사통을 해도...... 나는 차마 당신을 벨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틀려!"
실혼여제는 경의에 찬 눈빛으로 교구를 일으켰다.
그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뭇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복수...... 하겠다! 나의 붕비를 해친 대가로...... 당신 뇌황을
가장 비참하게 죽여주마! 당신은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실혼여제는 바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은 어느 덧 본래의 차가운 회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의 마음은 오래 전에 돌같이 차가와져 있었다. 따뜻해질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를 잃은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스---- 윽!
그녀는 밤하늘로 신형을 띄웠다.
"내게 더 이상 잃어 버릴 무엇이 남았겠는가? 가자 서시(西施)----!"
피---- 잉!
실혼여제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일천 장 밖으로 날아갔다.
스---- 읏!
그 뒤를 천마서시는 소녀같이 배시시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두 개의
왜영은 순간적으로 까마득한 밤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화르르......!
한 차례 광풍이 스친 음양계 위로 스산한 밤바람만이 음산하게 스쳐
지나고 있었다.
* * *
쐐애애액----!
비단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전을 스쳐갔다.
막붕비와 그의 등에 업힌 혈관음 빙화정!
두 사람의 몸은 빛살같이 음양계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추악한 이 세상과도 영영 이별인가?)
혈관음은 막붕비의 어깨 너머로 까마득히 멀어지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며 뇌까렸다.
아찔한 추락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와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피는 막붕비가 흘린 것이었다.
막붕비는 뇌황의 흡혈마황검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상태였다.
흡혈마황검의 악마검강만큼 무서운 것은 천지간에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악마혈종의 증폭음강이었다.
막붕비는 그 무서운 악마검강에 가슴 부분을 휩쓸렸었다. 그것은
유리보갑을 종이 찢듯 찢어내며 막붕비의 가슴 부위 열 세 개의 요혈과
정맥을 갈가리 찢어버린 상태였다.
빙화정은 막붕비가 살아 있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생(生)과 사(死)의 문제는 빙화정에게 그리 큰 문제가
못되었다.
그녀의 마음은 만겁마가의 뇌옥에서 의모인 마모 여운상과 함께
뇌황에게 난행당할 때 이미 죽어 버렸었다.
고오오오----!
밑에서부터 불어 올라오는 역풍이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것은 바닥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죽는구나!)
빙화정은 눈을 꼬옥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업고 있는 막붕비의
목을 꼬옥 끌어 안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지옥혈황! 당신은 나를 구하려다 헛되이 저와 함께
죽는군요!)
빙화정은 막붕비의 등에서 한숨을 쉬었다. 자신 때문에 죽게된
막붕비에게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이 인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첨---- 벙! 콰아아----!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며 빙화정과 막붕비의 몸은 깊은 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호수----!)
빙화정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음양계의 단애 아래는 깊디깊은 호수였다. 두 사람은 그 호수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모면한 것이다. 하지만 수면에 떨어진
충격도 대단한 것이었다.
(흑......!)
전신이 바스러지는 듯한 아찔한 충격이 일며 빙화정은 막붕비의
등에서 퉁겨져 나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빙화정은 혼절한 막붕비의 몸이 호수 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안돼!)
팟!
빙화정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막붕비의 소맷자락을 잡아챘다.
(나는 죽더라도...... 이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된다!)
촤아아!
빙화정은 이를 악물고 막붕비와 함께 수면으로 떠올라갔다. 막붕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그녀의 몸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강한
생명력을 끌어낸 것이다.
촤르르......! 쏴아아!
이내 막붕비를 안은 빙화정은 수면으로 떠올랐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로 짙은 운무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운무 속으로
저편에 바위 같은 물체의 그림자가 언뜻 빙화정의 눈에 들어왔다.
빙화정은 천 근 같은 사지를 움직여 천천히 그 쪽으로 헤엄쳐 갔다.
건조한 모래 위로 올라섰을 때 빙화정의 숨은 턱에 닿아 있었다.
막붕비를 겨우 물 밖으로 끌어낸 빙화정은 할딱이며 모래 위에 벌렁
누웠다.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막붕비의 상세를
살폈다.
막붕비는 혼수상태였다. 그의 호흡은 가늘게 이어지고 있으나 기맥은
금시라도 끊어질 듯이 위태로왔다.
"휴......!"
빙화정은 쓸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을 물에서 꺼낸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막붕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설령 살리고 싶다 해도 내게는 영약은 고사하고 한 올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다.)
사르르......!
그녀는 고소를 지으며 다시 막붕비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막붕비의 옆에 교구를 바싹 붙였다.
(당신의 저승 길에 길동무를 해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예요!)
빙화정은 막붕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무어지?)
눈을 감으려던 그녀는 흠칫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츠으으----!
멀리 안개 속에서 신비한 두 줄기 빛무리가 일어나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붉고 흰 무지개 같은 서기, 그것은 안개에 가려 매우 흐릿했다. 만일
빙화정이 막붕비 쪽으로 돌아눕지 않았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츠으...... 츠으......!
그 두 줄기 서기는 볼수록 신비했다. 그것들은 흡사 살아 있는
물체같이 끝없이 움직이며 허공에서 뒤엉켰다. 그 모습은 백룡(白龍)과
적룡(赤龍) 한 쌍이 뒤엉켜 유희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
사박!
빙화정은 자기도 모르게 그 적백의 서기가 번져 나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엇인가 그녀를 부르는 듯한 착각이 그 순간 빙화정을
엄습한 때문이었다.
(동굴......!)
빙화정은 흠칫 멈추어섰다.
예의 적백의 서기는 석벽 아래 뚫린 하나의 동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데,
<음양동부(陰陽洞府).>
동굴 위에는 그 같은 네 자의 글이 대전체로 쓰여져 있었다.
빙화정은 꿈에도 음양계 아래에서 인간의 자취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지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스으...... 스으......!
그 사이에도 동굴 안에서는 예의 서기가 요동을 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양동부다! 참으로 끈질긴 인연이로구나. 음양계의 천장단애에서
떨어지고도 죽지 않고 옛 고인의 유적을 대하다니......!"
빙화정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음양동부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한 별반 눈에 띄는 물건도
크게 없었다.
맞은편 석벽, 한 폭의 정교한 봉황도(鳳凰圖)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마리의 암수가 뒤엉켜 있는 봉황도----!
그 조각은 깃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생동감이
넘치며 어떤 현기가 느껴졌다.
"......!"
그 봉황도를 보며 빙화정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한 눈에 봉황도의
암수 봉황이 교합을 하는 자세임을 알아본 때문이다.
봉황도의 앞, 두 개의 포단이 마주 놓여 있었다. 갈대 잎으로 싼
평범한 포단......
그것들은 누군가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모양으로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그리고,
츠으...... 츠으......
포단의 가운데에는 각기 하나씩의 구슬이 놓여 휘황한 서기를 뿌리고
있었다.
오른쪽 포단의 구슬에서는 타는 듯이 붉은 서기가, 왼쪽의
포단에서는 서릿발 같은 백색 서기가 노을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거위 알만한 적백(赤白)의 구슬들!
빙화정이 본 예의 서기들은 그 두 개의 구슬에서 번져 나온
것이었다. 한데, 두 포단 사이에는 몇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 권의 빛바랜 고경(古經), 잘 개인 붉은 빛의 남자 장포와, 눈같이
흰 빙잠사의 궁장, 그리고 한 장의 금판이 그것들이었다.
"......!"
빙화정은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금판과 두 권 고경을
집어들었다.
<빙하천년경(氷河千年經).>
<열화마경(熱火魔經).>
두 고경의 표지에는 그런 글들이 쓰여 있었다.
"빙하...... 천년경!"
빙화정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 강렬한 예감에 그녀는 급히
비급과 함께 있던 금판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천 년 이전에 잊혀진
글이 있었다.
<열화마종(熱火魔宗)과 그의 아내이며 좋은 친구였던
빙하여제(氷河女帝) 빙옥교(氷玉嬌)가올 후예를 위해 적는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열화마종----!
빙하여제----!
아아! 바로 그렇다!
그들은 저 잊혀진 천외의 초인들인 오패천 중의 두 사람이었다.
오패천 중에서도 가장 막강했다는 두 명의 초인들...... 그들은
놀랍게도 부부 사이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무했었다.
천 년 전----!
열화마종과 빙하여제는 사대천왕에게 애석하게 패하고 말았다. 그
패배는 두 초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 음양계인 절지에 동부를 짓고 함께 사대천왕을 깨뜨릴 무공
연마에 몰두했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좋은 친구로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각한 고민이었다. 열정은 결코 무공증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믿은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어느 달밝은 밤에 두 남녀는 거의
충동적으로 하나가 되어 부부관계를 맺게 되었다.
영육이 일치되는 순간, 두 사람은 이제껏 자신들을 괴롭히던 모든
번뇌가 일순간에 사라짐을 느꼈다.
사대천왕에 대한 복수심도...... 패권과 명예심에 대한 야심도......
모든 것이 안개같이 흩어지고 그들은 미몽에서 깨어나 크나큰 열락의
경지를 맛보게 되었다.
그들은 잃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을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두 부부는 아주 오랜 시간을 음양동부에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함께 우화등선하게 되었던 것이다.
포단 위의 구슬, 그것들은 바로 열화마종과 빙하여제가
우화등선하면서 그때까지 쌓았던 내공을 응집하여 남긴 내단이었다.
그것들에는 각기 십 갑자의 내공에 필적하는 무서운 잠력이 응결되어
있었다. 행복했던 두 부부는 천세 후에 막붕비와 빙화정이 이곳에 올
줄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의 내단을 남긴 것이었다.
그 내단 외에도 열화마종과 빙하여제는 세 가지를 더 남겼다.
자신들의 평생 심득이 기록된 두 권의 비급, 적룡제왕포(赤龍帝王袍)와
빙잠천의(氷蠶天衣)라는 두 벌의 의복, 그리고 석벽의 봉황도가
그것이었다.
봉황도(鳳凰圖)----!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한 가지 지고무상한 내공심법이었다.
-봉황환희무(鳳凰歡喜舞)!
부부사이에서만 수련이 가능한 초절정의 내공심결......!
그것은 막붕비가 익힌 양심초극마공과 아주 유사한 종류의
심법이었다. 틀린 점이라면 봉황환희무쪽이 좀더 정종(正宗)에
가까우며 그 성취가 빠르다는 차이 정도였다.
추천98 비추천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