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프콘 1부] 한중전쟁 - 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데프콘 1부] 한중전쟁 - 1

페이지 정보

조회 5,734 회 작성일 24-02-18 07:49 댓글 0

본문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안녕하세요.. 요즘 다시 읽고 있는 데프콘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않네요..

요즘같이 정치가 개판일 때 읽으면 정말 통쾌합니다...

모두 즐독하세요.

--------------
1999. 7. 16 15:00 대전, 정보사단

1997년, 한반도에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자 한국군은 그동안의 대(對)
북한 정보업무 편중에 대한 반성에서 국제군사정보를 담당할 새로운 기
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연구단계에 불과한
정보군단을 모델로, 정보사령부와 기타 잡다한 정보업무 담당부서를 통
합하여 정보사단을 창설하게 되었고, 이 사단은 국제정보와 한반도 주
변의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대통령 직속 부대가 되었다. 이는 한국군이
그동안 동족상잔에 대비한 군대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국민
의 군대로 재탄생되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정보
사단은 유성의 3군본부와 달리 교통이 편리한 대전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지에 파견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이 끝나자 대전에 있는 정보사단에서는 통일참모본부와 각
군에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는 회의가 있었다. 각 여단장급들과 고위 국
실장, 그리고 주로 정치학자나 군사학자인 민간인 고문들이 참가했다.
정보사단장인 이 재영 중장의 사회로 열띤 회의가 벌써 두 시간째 지속
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의 원인은 해안지역에 대한 부의 편재로 인한 내륙지방 인
민의 불만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인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속된 국영기
업의 파산으로 인한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반발, 게다가 등 소평 사후의
권력투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 중장이 단말기의 한쪽면에 부관이 정리해 준 내용을 읽어갔다. 이
회의는 화상으로 각 군 본부와 정보참모본부, 심지어 남북의 고위 정책
담당자들과 정보관련기구에도 연결되어 그로서는 자신을 내세울 절호의
기회였다.이 중장은 계속 회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장의 권한을 남
용하면서 회의에 직접 간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왜 광동성과 복건성의 군산(軍産)연합이 북경과 상하이
의 기존 권력집단에 대해 승리했는지에 대한 토의를 하겠습니다. 먼저,
중국전문가이신 신 은정 교수께서 말씀해 주십시요."
이 중장이 신 교수를 힐끗 보았다. 중국내전의 발발을 예상하여 유명
해진 신 교수는, 그러나 아무리 봐도 똑똑해 보이진 않았다. 얼굴에 가
득한 주근깨, 여자답지 않게 큰 키, 두터운 안경의 그녀는 주근깨를 가
리기 위한 수단인지 화장도 진하게 하고 있었다. 37세의 노처녀인 젊은
교수가 세미나에 참가한 학자처럼 정리된 원고를 읽어나갔다.
"사단장께서 정리하신 대로 중국의 인민들은 화합이 깨지고 파편화되
었습니다. 개방화 정책으로 인한 초기의 산업화는 중국인민들에게 먹을
거리와 입을거리를 마련해줘서 좋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
나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농민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인
민해방군의 각급부대들은 군사훈련이 아닌 경제활동에 내몰렸으며 이에
대한 군부의 불만이 컸습니다. 95년도에 군의 기업활동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업활동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군인들도 많았지만 어쨋든 각급 군부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확고
한 지배력이 흔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각 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은 경제개방을 전후하여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하여 작년 겨울부터의 북
경의 권력투쟁을 기화로 지방정부들이 독립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티
벳이나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먼저 독립 움직임을
보였다는게 이상하죠.
이들 지방들을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상당한 수준의 산
업화가 진전되어 부의 축적이 있었다. 둘째, 이는 중국 개방화 정책의
혜택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한 배분이었다. 세째, 군부와 지방정부, 그
리고 신흥 중산층간의 강한 유착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 신 교수.그건 내전의 원인아닙니까? 광동성과 복건성 연합이 이
번 내전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군사적 요인을
뺀다면..."
이 중장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젊은 여교수에게서 강의 듣는
듯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력이 우월해서 그런거 아
니냐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신 교수는 안경 너머로 이 중장을 흘
끗 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첫 반란은 상하이와 인접한 저장(절강)성과 장쑤(강소)성에서 일어
났습니다. 두 지방 역시 연안지역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경제개발이 되
어 부의 축적이 있었다는거죠. 이는 동시에 부의 배분이 불평등해서 이
지역 인민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까지는 지방 군부의 가
담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산한 국영기업의 폐쇄를 막으려는 노동자들
의 소요사태를 북경군구에서 온 진압군들이 과잉진압하면서 사태를 악
화시켰습니다. 분노한 노동자, 농민, 실업자들의 폭동이 이어지고 급기
야 공장파괴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자 그 지방 군벌과 산업자본들의 우려
를 자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민병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신 교수의 강의는 길어질듯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신 교수의 발언을
막지 못했다. 1995년 등소평이 유언으로 남긴 것은 군부, 지방, 소수민
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위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군부나 지방세력,
또는 중국 내의 소수민족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여 중국이 통일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세력이었다.중앙의 공산당 정부는 군부에 대
한 통제권을 쥐는데 신경을 썼고, 미국정부의 중국정책은 중국내 소수
민족의 인권, 특히 티베트민족의 독립에 관심이 있었다.그리고 다른 중
국전문가들은 홍콩이나 대만과의 갈등을 예상했으나, 지방별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갈등의 심화는 신 교수가 처음으로 예리하게 지적했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자 자본과 인재의 유출이 어느 정도 있
었지만 중국정부의 배려로 자유가 보장되자 떠났던 자본과 인재가 되돌
아와 홍콩과, 인접한 광동성은 더욱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대만의
대자본이 투입된 복건성을 제치고 광동성은 중국 경제혁명의 견인차가
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홍콩은 1국 2체제 아래 정치체계가 다르면서도 홍콩과 광동성
의 이익이 합치하자 두 지역은 급속도로 가까와졌다. 홍콩 이양전부터
긴밀하던 경제관계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단계였는데 이양 후 홍콩
의 자본가들과 광동의 당, 군 간부들과의 관계가 밀착되었다.짧은 시간
에 많은 정략결혼이 이뤄졌고,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커질수록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갔다.
광동성과 복건성은 각자의 배후 자본인 홍콩과 대만의 분업체계처럼
분업화되면서 관계가 긴밀해져갔다. 복건성이 공업제품을 생산하면 광
동성이 이를 국제시장에 판매하는 식의 분업체계였다. 두 지역 주민들
은 경제적 분업체계의 형성과정부터 인구의 이동이 잦아지며 유대감이
강해져서 두 지역은 거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
광동성과 복건성은 군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성의 고위 당,군 간
부들은 밀착되어갔다. 광동은 광주대군구, 복건은 남경대군구였으나 이
지역 고위 군관계자들은 뇌물이나 경제적 압력 등 갖은 방법으로 인사
이동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아 두 지역만 오갈 수 있었다.
두 지역이 밀착하고 폐쇄성이 강해지자 중앙정부에서 통제권을 유지
하기 위해 뒤늦게 압력을 가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을 빚어냈다. 먼저
경제적 통제장치로 세금의 차등부과를 실시했으나 외국자본의 급속이탈
과 경제침체로 중앙정부의 권위만 추락했으며 인민들로부터 중앙정부는
경제개혁의 걸림돌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고위 군관계자들을 대거 변방
으로 인사이동 조치를 취했으나 광동성과 복건성의 군부가 운영하는 기
업들이 부도사태가 속출하여 다시 군 장성들을 변방에서 불러와야했다.
광동과 복건의 군 장성들은 이미 이 지역 주요 경제인으로 깊숙히 뿌리
내린 것이다.
중앙정부가 이들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자 이 지역의 당,군,경제인
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결합하여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광동과 복
건의 주변 지역인 강서, 호남, 호북, 안휘, 절강성, 귀주, 해남성 등으
로부터 해마다 수 십 만명의 주민이 일자리와 자본주의적 기회를 찾아
두 지역으로 몰려갔으며 이 지역들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 즉, 경제
적 식민지로 전락하여 산업이 재편되고, 두 지역으로부터 경제적 영향
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자본주의화하면서 남부연안이 급격히 발전하자 이 지역에서는 화폐가
치의 변동이 심한 인민폐보다는 미국 달러와 홍콩달러가 기준화폐로 부
상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80년대부터 광동성의 극히 일부지역에
서만 유통되던 홍콩달러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광동-복건성의 경제
적 역할이 커지자 남부중국의 기준화폐로서의 역할을 맡게된 것이다.전
국적으로 통용되어야할 인민폐나 각 성의 화폐는 이들 지역에서는 유통
력을 상실하였다.
언어도 북경어가 점차 쇠하고 광동어가 세력을 뻗기 시작했다. 경제
계에서는 이미 광동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광동어를 모르면 아예 경제계
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남부중국의 학교에서는 이제 북경어
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반대로 북경과 상하이의 대학생들은 광동
어 배우기에 혈안이 되었다. 광동어는 출세와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남부중국의 지배권은 군사계에도 영역을 넓혀갔다. 그동안 중국의 제
1의 적은 구 소련이어서 대부분의 군사력이 러시아국경에 밀집해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도 차츰 약화되자 러시아국경의 지상군
이 감축되고 상대적으로 중요해진 남부중국의 방어를 위해 이 지역 해
군과 공군이 증강되었다. 또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부중국에 비
해 장비와 인원에서 크게 뒤지던 남부중국의 지상병력은 경제인들과 군
영기업들의 협조로 각 집단군마다 하나씩의 기갑사단을 갖추게 되었고
그 질적 수준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화되었
다. 그리고 중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병력의 증강이 이루어졌
다.
이제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게되었다. 남부중국은 중앙정부 도움없
이도 경제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과 사실 중앙정부가 남부중국으로부
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중앙정부는 남부중국 각 성의
눈치를 보게되었다. 특히 광동성장과 복건성장의 정치적 영향력은 중앙
에도 미치게 될 정도였으며 두 성장(省長)은 중국의 최고권력기구인 정
치국에서도 일곱자리밖에 없는 상무위원직에 오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또한 국회의장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장과 전인대의 주요 전
문위원회의 위원장은 광동어에 능통한 남부중국인들이 차지하는 것으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전통적으로 정계와 재계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던 북부중국인들 사
이에 위기감이 번지기 시작했다.정치계에서까지 남부중국인들에게 밀리
고 광동-복건성이 주도하는 지역별 분업화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적응이
느린 북부중국의 국영기업들이 부도사태로 쓰러져갔다. 북경과 상하이
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났으며, 모처럼 창업된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이 부
도로 도피하거나 자살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남부중국이 경제성장의 단
맛을 즐기는 사이에 북부중국은 도태의 쓰라림을 맛봐야했던 것이다.
북부중국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격은 절강성 호주(湖州)에서 있었
던 파산한 국영기업체 노동자들의 소요사태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었
다. 절강성은 대만과 접했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흥을 이룬 복
건성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상하이와 인접하여 중앙정부의 간섭
을 많이 받았다.그리하여 남부중국의 경제적 성공의 대열에서는 탈락하
고 북부중국인들로부터는 질시를 받는, 묘한 완충적 지역이었다. 이 지
역 인민들은 광동성과 복건성의 부에 대한 부러움과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하고 소요가 확산되어 국
영공장과 외국인 합작공장을 파괴하자, 남경군구 소속의 지방 군사력인
인민무장경찰이 치안유지를 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북경군
구의 예비대 성격인 제남군구의 병력을 파견하여 파업노동자들을 무자
비하게 학살하였다. 중앙정부의 감정적인 대응과 남부중국에 대한 군사
적인 시위의 성격을 띤 이 사태는 그러나 절강성과 안휘성 등 중립적인
지역들이 대거 남부중국에 가담케하는 결과를 나았고, 중국인들은 전체
중국의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남부중국의 광동성과
복건성에 기대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아니, 북부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민심을 얻는데까지
실패했습니다."
신 교수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남부중국은, 아니, 모든 중국인들은 북경과 상하이 출신인 고위 당
관료들의 권위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개방화 초기에는 이들의 주도하
에 성공적으로 경제개혁을 이루어냈지만 아직도 개방의 속도 문제로 다
투고 있는 등 어느 정도 개방화가 이루어지고 나자 개방의 주역들이 오
히려 개방의 장애물이 되어버릴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져버렸습니다."
신 교수의 주도하에 토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결국 결론은 경제력에
서 훨씬 우월한 남부중국이 당시 중국정부를 탐탁치 않게 본 미국과 유
럽의 지원을 업고, 그리고 돈이 궁한 러시아로부터 최첨단 무기를 대량
구입하여 막강한 북경-상하이 연합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전 중의 핵전쟁 발발 가능성은 상호 파멸과 사용한 측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우려하여 핵폭탄의 사용이 자제되어 다행이라는 결론이었다.

"다음 전쟁을 예상한다면, 아무래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것이 되
겠죠. 아니, 그 전에 베트남과 필리핀이 될까요?"
좌중에서 놀라움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1999년의 상황에서 중국이 대
만이나 베트남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중국과 대만은 밀월관계 아닙니까? 물론 남사군도 문제
도 있고 자유왕래가 당분간 막히긴 했지만 내전이 끝났으니 곧 원상회
복될 것이오. 그리고 중국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대만의 자본과 마
케팅으로 세계 경제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역할이 어느 정도인데.. 설
마 중국이 경제위기의 부담을 지고 대만을 공격하려 하겠소?"
이 재영 중장이 놀라서 물어보았다. 신 교수의 주장은 정보사단의 최
근 평가와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대만과 중국은 최근 경제적
으로 밀접히 결합하였고 긴장상태가 해소되어 구태여 침공할 필요는 전
혀 없으며, 또한 경제를 중요시하는 광동-복건 연합이 정치적 주도권을
쥔 마당에 전후 복구에 힘써야할 중국이 대만에 눈돌릴 여유가 전혀 없
다는 것이 정보사단과 외무부 및 안전기획부 등 정보업무 담당부서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중국 공산당의 개혁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경제발전 후에 보수주의자
들로 몰린 것처럼 대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만의 보수적 정치
체계가 보다 자유로운 복건과 대만간 인적, 물적 유통을 막고 있습니다.
대만이야 생존을 위해서 그랬다지만 내전 동안에 중앙정부의 압력에 굴
복하여 남부중국인들에 대한 자본동결과 출국통제는 광동-복건성 지도
층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다시 교류가 재개되긴 했지만 경제뿐만 아니
라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대만과는 아무래도 충
돌이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중화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아실겁니다. 한족(漢族)은 수없이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도 수천년
간을 그들의 땅에 살아왔습니다. 그 거대한 땅덩이와 함께 말입니다."
신 교수가 잠시 쉬고 유리잔의 물을 마셨다. 당연히 생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물을 더럽히고 그 대가로 비싼 물을 사서 마시니 얼
마나 비경제적인 동물인가 생각했다. 오늘 아침엔 집에 생수가 배달되
지 않았다. 지하수원이 오염되어 생수공장이 폐쇄되는 일은 비일비재했
다. 이젠 다른 생수를 주문해야겠다고 신 교수는 생각했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남사군도때문이가요?"
나영찬 대령이 호기심에 가득차 물었다.신 교수가 소리가 난 쪽을 보
니 중년의 군인들 사이로 신사같이 말쑥한 젊은 대령이 보였다.저 나이
에 이 정도 계급이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일 것이라고 신 교수는 생각했
다.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신 교수가 짧게 대답했다. 중국은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영토에 대
한 집착이 매우 강했다. 수천년간 농경민족이어서인지 땅에 대한 애착
은 비정상적일 정도였는데, 산업화가 진행되어 바다의 중요성이 커지자
드넓은 남중국해(남지나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남사군도는 고
대부터 중국의 어부들이 어로활동을 해왔다는 후한지(後漢誌)의 기록을
근거로 강력하게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핀과 베트남 등의 주변국들은 이에 반발하여 중국과 분쟁
중이며, 해상교통로의 유사시 봉쇄를 우려한 자원수입국인 한국과 일본
은 은근히 중국의 남사군도 영유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 해로는 두
나라의 사활을 쥐고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주변의 중소국가끼리 분할하
거나 공동영유하는 방안을 유엔에서 지지해왔다. 이들 두 나라는 중국
의 독점적인 남사군도 영유를 방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무역량 등 당
장의 이익을 본다면 당연히 중국을 지지해야하지만 중국이 더 강해졌을
때 만약 중국과 분쟁이 생긴다면 남사군도는 한국과 일본의 목에 겨눈
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자원 말인가요? 막대한 석유매장량... 중국 경제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죠."
나 대령의 말에 신 교수가 빙긋이 웃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신
교수가 자리를 같이한 고급장교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한국간에 분쟁이
발생한다면 남사군도의 전략적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아니, 한국과
일본간의 분쟁에서도요."
젊은 정치학 교수의 단순한 가정이었지만 군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심
상치 않은 이야기였다. 이웃나라란 항상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고 언제
나 제 1의 가상적국이기 때문이었다. 우호적인 관계일 때도 이웃나라에
파견되는 대사는 정치적으로 장관급 이상이었으며 정보관계 종사자들의
숫자도 다른나라에 파견되는 주재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 상례였다.옛부
터 전쟁은 항상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략으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며 실제로 그래왔다.
"해군의 자료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해군출신인 표 인준 중령이 먼저 대답을 했다. 해군의 역할의 하나가
무역로와 해상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므로 해군에서는 항상 해상수송로
의 안전점검을 하고 있었다.
"남사군도가 중국에 의해 봉쇄된다면 한국이나 일본은 호주를 우회하
여 석유류를 수송해야합니다. 이 경우 운송기간은 호주 남부 해상의 복
잡한 해로를 감안하면 1개월 이상 늦춰집니다. 전략비축분이 3개월치이
므로 큰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전시에는 석유
류의 소비가 급증하는 것이 상례이고, 에너지 저장시설에 대한 적의 공
격까지 감안한다면,그리고 해상운송수단의 부족을 감안한다면 1개월 내
에 비축분은 소모가 되어버립니다. 전략비축분이 3개월치라는 것은 언
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현물시장에서의 구입이나 미국이나 멕시코같은 곳에서 수입한다면?"
이 재영 중장이 입이 바싹 타서 물었다. 멀리 떨어진 남사군도의 전
략적 중요성을 이 중장이나 다른 육군출신의 고위장교들은 별로 인식하
지 못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싱가포르 석유 선물시장은 만약 중국이 남사군
도 주변해상을 봉쇄한다면 시장 자체가 붕괴되어버립니다. 미국은 풍부
한 부존자원에도 불구하고 유독 석유만은 전략적으로 수입해왔습니다.
알래스카의 풍부한 원유를 1995년에야 수출을 허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원유를 거의 수출하지 않습니다. 멕시코는 정치적 불안
정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는 너무 멀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브루나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산유국들로부터의 원유수입은 남지나해를 통과해야 합니다."
표 중령의 설명에 이 중장이 허탈해지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얼굴
이 붉어지며 호통을 쳤다.
"그럼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우리나라는 무조건 중
국의 요구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단 말이오?"
"중국의 입장에서 미래의 가장 큰 경쟁상대는 한국과 일본입니다. 지
리적 위치와 산업구조, 또는 인구와 경제력 등 국력에 있어서 말입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도 크지만 중국에는 아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
러나,"
신 교수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했다. 좌중은 신 교수가 또다른 예언
을 하지 않나 걱정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다음 차례는 필리핀과 베트남인데 필리핀
은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기 쉽죠. 아마 중국 입장에서 베트남과는 일전
을 각오해야할 것입니다. 베트남을 먼저 치고 나중에 대만을 공격할 수
도 있겠죠. 어쨋든 그 다음은 우리나라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언제일지
모르지만..."
결국 신 교수가 예언을 하고 말았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던 중국
의 내전을 예상한 신 교수, 이번엔 더 가능성이 없는 중국의 한국 침공
을 예언했다.이 재영 중장을 필두로 모든 군인과 정치학자들이 들고 일
어나 신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그들도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
지 못했다. 신 교수가 중국의 내전을 예상했을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상가라고 비판을 받았으나 결국 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이번 예언은 틀리길 바라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었다. 이
중장이 갑자기 책상을 치며 물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럼 왜? 왜 중국이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는겁니까? 이유는 뭐죠? 내
전 때의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행동? 군사적 위협? 경제적 라이벌이
라서? 도대체 뭡니까?"
신 교수가 이 중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계 사회주의라는 중국의 50년간의 목표, 그리고 우리나라가 통일
이 되었기 때문이죠."


추천83 비추천 52
관련글
  •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즌2 [1부]
  • 유흥가 견문록 [11부]
  • 유흥가 견문록 [1부]
  • [열람중] [데프콘 1부] 한중전쟁 - 1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5)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4)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3)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2)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1)
  • [연작 1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도... (10)
  • 실시간 핫 잇슈
  • 굶주린 그녀 - 단편
  • 고모와의 아름다운 기억 5 (퍼온야설)
  • 모녀 강간 - 단편
  • 단둘이 외숙모와
  • 아줌마사장 수발든썰 - 하편
  • 그녀들의 섹슈얼 판타지
  • 엄마와 커텐 2
  • 아버지와 나 1
  • 와이프의 3섬 이야기. - 2부
  • 명기인 그 여고생과의 황홀한 ... - 하편
  • Copyright © www.hambora.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