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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마면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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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008 회 작성일 24-02-17 14: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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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면신협(魔面神俠) 와룡강

제1장 악인성(惡人城)의 저주(詛呪)

백 년 전,
서장(西藏)의 황막한 오지 자달목분지(紫達木盆地)에 하나의 성(城)이 세
워졌다.
무림인들은 그 성을 일컬어 악인성(惡人城)이라 불렀다.
악인들의 성..... 악인성(惡人城)!
이 악인성을 세운 자들은 십대악인(十大惡人)이라 불리는, 천하를 통틀어
가장 사악하다고 낙인찍힌 열 명의 악인들이었다.
천하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 모든 악인들,
어떤 이유로든지 세상에서 배척당하고 주살당할 운명에 처한 악인이라 낙
인찍힌 자들....
그들이 토벌(討伐)과 말살(抹殺)의 손길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도피처가 바로 악인성이었다.

지난 백년의 세월동안 정파(正派) 백도(白道)의 융성(隆盛), 강대(强大)
함은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전 시대부터 천하를 혼돈과 파괴로 물들였던 모든 사악한 세력과 무
리들과 사악한 사상들은 막강한 정파백도의 철퇴 아래 참담한 패배를 당하
고 덧없이 허물어져 갔다.
악(惡)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들은 가차없이 심판의 검을 받았으며
몰살의 철추에 격타당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신주팔황(神州八荒), 그 어디에도 사마(邪魔)가 발을 붙일 곳은 전무했으
니....
둥지를 잃은 새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사마의 모든 악인들은 삶의 길을 찾아 꾸역꾸역 악인성으로 몰려
들어갔다.
오직 그들은 살기 위해 악인성으로 몰려들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나오지 못한다 하여 불귀역(不歸域)이라 불리는 악인성이었건만.
그러나 악인들은 눈앞에 닥친 죽음과 파멸의 공포로부터 도피하고자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악인성의 마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무려 십수만을 헤아리는 악인들이 속속 악인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십수만의 악인들 중 그 누구도 다시 무림으로 돌아온 자는 없
었다고 전한다. 단 한 사람도....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역천(逆天)의 대지!
이것이 악인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어느덧 악인성은 환우제일금지(環宇第一禁地)로 화해갔다. 아무도 악인성
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악인성의 십수만 악인들을 이끄는 십대악인(十大惡人).....
환우를 통틀어 가장 사악하다는 십 인의 마인들이 무엇인가 획책하고 있
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악인성에서 어떤 일이 도모
되고 있는지 그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만큼 악인성은 철저한 비밀과 신비로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어제부터인가 확인되지 않은 몇몇 소문들만은 강호에 은밀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소문들은 비록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 그대로 소문에 불과했지만 그
내용은 가히 놀랍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공포와 전율마저 느끼게 하는 소문들은 이러했다.

-열 명의 가장 사악한 악마의 종자(種子)들이 악인성에 의해 길러지고 있
다!
그들을 일컬어 악마의 초인(惡魔超人)이라고 한다.
열 명의 악마초인들은 십지(十地)에 분산되어 지옥의 훈련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준비되어 왔고, 인성(人性)이 완전히 말살된
악귀(惡鬼)들로 성장하였다.
달리 악마전사(惡魔戰士)로 불리는 그들은 대정천하에 도전할 사마의 가
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악마초인들은 곧 악인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십대
악인들에게서 악마의 절기들을 전수받아 완전한 악마의 살인병기로 태어나
게 될 것이다.
악마초인들이 악마전사로 완성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천하가 그들에 의
해 파멸당하고 말 것이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급기야 눈덩이같이 커져 구주팔황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그 소문은 점점 악마초인이라 불리는 열 명의 악종들의 존재가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는 쪽으로 발전하여 갔다.
소문의 여파는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십지(十地)에서 악인성의 지시를 받는 사마의 무리들이 서서히 준동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은밀했으나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
고 있는 정파의 예리한 이목에 걸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한 곳을 향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그곳은 예상했던대
로 악인성이었다.
지금껏 숨을 죽이고 숨어있던 사파의 가장 강한 강자들이 열 개의 방향에
서 거의 동시에 악인성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감지된 것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소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악마초인은 실재했으며, 그들은 최후의
수련을 위해 악인성으로 호송되고 있는 것이었다.
천하무림의 정세는 날로 흉흉해져 갔다. 악마초인들의 출현은 커다란 충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은 폭풍을 만난 듯이 경동되었고 혼란은 점점 가
중되어 갔다.
그리고 그 혼란은 마침내 이십여 년 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명의 거인
(巨人)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그 거인의 이름은 전황(戰皇) 북리황(北里皇)이었다.
전쟁의 신(戰神)이라 불리는 절대자!
그는 정파무림의 총맹주였고 환우최강의 조직인 철혈전막(鐵血戰幕)의 주
인이었다.
단연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꼽히는 그는 삼십 년 전, 단신으로 몸
을 일으켜 일 년 만에 환우제일이라는 절대의 권좌에 등극했으며 자신의 초
종자들을 모아 철혈전막이라는 사상최강의 결사를 조직하였다.
진정 막강하고 위대한 거인(巨人)인 그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까
지 추앙받고 있었다.
이십 년 전,
전황 북리황은 환우에 더 이상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한탄하며 십만대산
(十萬大山)에 자리한 철혈전막의 총본영인 철혈막부(鐵血幕府)로 은신하였
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침내 이십 년의 침묵을 깨고 움직인 것이었다. 그는
천하가 태평하기를 원하는 인물이었다. 그 누구도 난세(亂世)를 조장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이십 년의 침묵을 깨고 십만대산에서 나온 그는 자신의 상징인 철혈번(鐵
血幡)을 내려 정파최강의 명숙들인 십대전신(十大戰神)들을 소집하였다.
십대전신은 악인성을 세운 십대악인과 대비되는 정파의 기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총방주인 전황 북리황의 명을 받고 급급히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회합 후 이내 십지(十地)로 분산되어 흩어졌으며 철혈
전막 막하의 강력한 철혈저사(鐵血戰士)들은 십대전신의 뒤를 따랐다.
과연 십대전신들은 전황 북리황에게서 어떤 지시를 받았을까?
누구도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풍운(風
雲)이 임박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있었다.
악마의 초인들....십지에서 은밀히 길러진 그 악마의 종자들로 인하여 백
년의 무림평화는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사상 유래없었던
대난세(大亂世)가 이제 시작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강호를 뒤덮을 거대한 피바람은 서서히 회오리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악마초인(惡魔超人)이 발단이 된 악인성(惡人城)과 철혈전막(鐵血戰幕)의
대결전(大決戰)이 임박한 천하무림의 정세는 더할 수 없이 흉흉했다.
사도(邪道)와 마도(魔道), 그리고 녹림(綠林)등 지난 백 년 간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정파의 세력에 짓눌려 음지로 스며들었던 수많은 사도 제파가
곳곳에서 일어나 혈풍을 일으켰다.
짓눌린 자의 울분이 일제히 봇물터지듯 터져버리자 그야말로 무림천하는
혼돈과 공포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마침내 백 년의 무림평화는 금간 거울처럼 사람들의 가슴에서 여지없이
깨어지며 갈수록 팽팽해지는 긴장감만 고조시키고 있었다.
전란과 살겁, 그리고 평화와 안정, 아니면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폭풍전야
의 적막이나 고요.....
그런 한정된 모습으로 돌고 도는 무림의 형국은 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속으로 빠져들었다. 백 년 만의 평화와 안정이 물러나고 기세등등하게
자리매김하려는 듯 찾아온 흉흉한 살겁의 조짐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각자 다르듯이, 무림을 모르는 일반인들
에게는 그저 평범하고 어제와 같이 변함없는 일상의 반복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희미하게나마 느끼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밖에 있는 천외천(天外
天)이라 해야할까?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은 이렇듯 이면적인, 그러나 나름대로 치열하게
운명이라는 수레로 얽혀 돌아가고 있었다.


산서성(山西省)의 북단에 위치한 새북(塞北)과 중원을 가르는 험산(險山)
이 있다.
바로 음산(陰山)이었다.
그 거칠고도 험준한 산령으로 인해 유사이래 중원과 변경민족들사이에 가
로놓인 천연 장벽의 역할을 해온 음산!
그 음산의 서쪽에 자리한 구유평(九幽平)은 황혼무렵의 타는 듯 붉은 석
양에 젖어 피빛으로 뒤척이며 몸살을 앓고 있었다.
두두두두......
문득 황혼에 물든 구유평으로 일단의 행렬이 나타났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행렬은 다섯 대의 마차와 이십여 기의 기
마(騎馬)로 이루어진 표국의 행렬이었다.
선두에 선 다섯 대의 표차는 아주 견고해 보였는데 그 표차들 위에는 갈
기를 세우고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새겨진 깃발이 꽂혀 있었다. 아마도 그
깃발은 표차들이 속해있는 표국을 상징하는 표기인 듯 했다.
표기에는 철사표행(鐵獅 行)이라는 네 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 갈기를 세운 사자의 표기는 바로 낙양(落陽)에 본점을 둔 철사표
행이라는 표국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철사표행은 구주를 통틀어 열 번째 안에 드는 유수한 표국 중의 하나로
철사표행의 표기가 이곳 음산역(陰山域)까지 나타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
이 아니었다.
표행의 선두에는 한 명의 청년이 준마 위에 우뚝 올라앉아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이십여 세 가량 되었을까? 탄탄한 체구에 선이 굵은 호방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눈썹이 아주 짙어 선명하고 강인한 느낌을 풍겼고 입은
한일 자로 굳게 다물려 있다.
그는 몸에 잘 맞는 흑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강인하고 호방한 분위기
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결코 미남(美男)이라 불릴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호담해 보이
는 그의 인상은 매우 강렬한 것이어서 누구나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할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철담(鐵膽) 용사추(龍獅追).

이것이 청년표사의 이름이었다.
나이 이십이 채 아니되어 철사표행의 십이대표두(十二大杓頭)중 한명으로
부상한 기린아가 바로 그였다.
"이곳 구유평만 지나면 표주인 신풍목장(神風牧場)의 영역이다."
따각...따각!
용사추는 마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채 중얼거렸다. 그는 먹물같이 검은
눈썹을 모으며 구유평의 저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곳 음산만 무사히 통과하면 이번 표행도 무사히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시선을 힐끗 동편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음산의 스산한 험봉들이 자
욱한 안개에 휘감긴 채 마치 유령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언뜻, 용사추의 눈가로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음산마궁(陰山魔宮)에 표행첩(杓行帖)을 보냈는데 왜 응답이 없는 것일
까?)
그는 검미를 찌푸렸다.
통상, 표행시에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행로 연변에 자리한 문파들에게 약
간의 예물(禮物)과 표행첩이라는 통지를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특별한 일
이 없는 한 제문파는 이에 상응하는 응답을 하게 된다.
음산에는 음산마궁(陰山魔宮)이라는 마도계열의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음산마궁은 비록 지금은 정파의 강성한 세력에 눌려 크게 위축되어 있으
나 백 년 그 이전만 해도 마도서열 십 위 안에 들던 강파였다. 당연한 일이
지만 용사추는 일찌감치 음산마궁에 표행첩을 보냈었다.
그런데 음산마궁 쪽에서는 응답은 고사하고 표행첩을 전했던 표사마저 돌
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용사추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별일은 없으리라. 아무리 음산마궁이라 해도 본 표
국의 표기를 건드릴 용기는 없을 테니까.)
그는 가슴을 펴며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렸다. 이내 그의 입가에는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표행에서 돌아가면 운영(雲瓔)에게 청혼을 하리라!)
철담(鐵膽)이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뺨이 홍조로 물들었다. 그
의 망막으로 한 명의 아리따운 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철접(鐵蝶) 나운영(羅雲瓔)!
바로 철사표행의 총수인 사면천왕(獅面天王) 나열(羅列)의 고명딸이었다.
그녀는 우락부락하게만 생긴 사면천왕 나열에게서 어떻게 저런 딸이 생겨
났을까 싶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낙양일미(洛陽一美)라고 불릴 정도이니 그
빼어난 미모는 짐작할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나운영은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철접(鐵蝶)이라 불릴만큼 드세고
거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내도 그녀에게 접근할 엄
두 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인지라 사면천왕은 딸을 시집보낼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암사자 나운영!
그녀는 사내들을 눈 아래로 낮춰보고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녀의 마음에
흡족한 사내를 찾지 못해서일까?
어쨋든 그녀는 근처에 사내가 얼씬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여장
부였다.
하지만 용사추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런 나운영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
다. 사내라면 콧방귀를 날리는 나운영이건만 그녀 역시 용사추에게만은 함
부로 대하지 못했다.
용사추가 괄괄한 성격이지만 그의 눈에는 그 자체가 그저 사랑스럽고 매
력적으로 느껴지는 나운영에 대한 상념에 젖어있을 때 였다.
"행.....행수(行首)님!"
문득 한소리 경직된 음성이 용사추의 달콤한 상념을 깨뜨렸다.
십여 장 전면에 앞서가던 쟁자수(錚者手)가 멈추어 선 채 긴장된 눈빛으
로 용사추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쟁자수는 은퇴할 날이 멀지 않은 노표사였다. 비록 길잡이인 쟁자수에
불과하나 보통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담대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노표사가 긴장된 눈빛을 보이자 용사추는 흠칫했다.
"멈춰랏!"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용사추는 이내 손을 들어 행렬을 세웠다. 그리고 빠
르게 말을 몰아 노표사에게로 다가갔다.
".........!"
노표사는 다가서는 용사추에게 말없이 전면을 가리켰다.
(저것은....!)
전면을 바라보던 용사추의 눈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 중간쯤에 하나의 해골(骸骨)이 음산한 모습으
로 놓여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해골이라 해도 지나는 길을 막고 놓여있다면 기분나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철사표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해골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해골과는 달랐다.
그 해골은 크기가 겨우 주먹만한 데다가 섬뜩하게도 금방이라도 피가 뚝
뚝 떨어질 듯 시뻘건 피빛의 해골이었다.
"사망....혈촉!"
용사추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눈에 그 피
빛 고루의 내력을 알아본 것이다.

__사망혈촉(死亡血壻)!

그것은 한 명의 전대거마(前代巨魔)의 표기로 알려져 있었다.
본래, 음산마궁에는 음산오마(陰山五魔)라는 다섯 명의 거마(巨魔)가 있
었다. 그들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자들로서 사망혈촉은 바
로 그 음산오마 중 셋째인 사망혈마(死亡血魔)의 신물이었던 것이다.

(음산오마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용사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음산오마는 용사추로서는 상대해볼 엄두 조차 못낼 거마들이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그들중 한명의 표기가 돌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용사추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사망혈마의 표기가 우리를 노린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용사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윽고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며 돌아섰다.
그는 지나쳐 오면서 멀지 않은 곳에 언뜻 세 갈래의 길을 보았던 것을 기
억해냈다.
"돌아서 간다!"
그는 표행의 행렬을 향해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외쳤다.

얼마나 갔을까? 용사추는 멈칫하며 말을 세웠다.
그곳은 세 갈래길 중에서 두 번째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 위에도 또 다른 장애가 가로막고 있었다.
손(手)!
그것은 하나의 손이었다. 금방 잘라낸 듯 아직도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는 새하얗고 고운 여인의 손이 팔꿈치에서부터 잘려져 길 복판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음산오마 중의 한 명이 주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용사추의 짙은 검미가 미미하게 떨렸다.
"적....수마타(赤手魔駝)! 그 자까지.....!"
그는 무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길 중앙에 떨어져 있는 잘려진 여인의 손. 그것 역시 한명 거마의 표기였
다.
음산오마 중 둘째로 가장 잔혹하다고 알려진 적수마타는 그 소수(素手)를
자신의 표기로 삼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꼽추였다. 그 때문에 사랑하던 아내에게조차 배신당하는
쓰라림을 겪어야만 했다. 배신의 좌절은 엄청난 증오심을 불러왔고 그 증오
심에 적수마타는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찢어죽였다고 한다.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후 그는 완전히 인성을 상실한 듯 더할 수
없이 잔혹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 자신의 표기를 여인의 팔을 잘라 쓸 정
도가 되었으니 그 잔혹함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적수마타의 표기가 길을 돌려 표행을 재촉하고자 한 용사추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용사추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음산오마는....우리를 노리고 있다!)
그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앞을 가로막은 두 번의 경고가 이미 심
상치 않은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
"........!"
다른 표사들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할 수 없이 침중한 안색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용사추의 명을 기다리
고 있었다.
용사추는 검미를 모으며 내심 신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길(吉)보다 흉(兇)이 많을 것 같군.)
그는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표
사들을 향해 묵중한 어조로 외쳤다.
"세 번째 길로 돌아간다!"

두 번째로 방향을 바꾼 행렬이었지만 용사추는 이번에도 다시 말을 멈춰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렬이 지나고 있는 곳은 세 번째 길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신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
다. 행렬이 지나는 길 중앙에 한 명의 인물이 표표히 서 있지 않은가!
그 인물은 여인이었다. 긴 흑발을 발 끝까지 치렁치렁하게 드리운 괴여
인. 일신에는 새하얀 소복을 걸쳤으며 그것은 삼단같은 흑발과 선명한 대조
를 이루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덮여 여인의 용모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한 쌍의 메마른 눈빛이 마치 비수의 칼
날처럼 섬연하게 번득이고 있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여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참으로 기이했다.
지극히 음울하고 퇴폐적인 그늘이 그녀의 전신에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무채색의 빛깔에 가까웠고 마치 겨울 낙엽처럼 덧없이 바스
러질 것 같은 허무함의 실체라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았다.
용사추는 그런 기이한 느낌의 여인을 바로보며 언뜻 그 여인에게서 빛바
래고 퇴색한 꽃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괴여인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말에서 내려왔다.
"본인은 철사표행의 용사추라고 하오! 소저의 방명은 어찌되시는지요?"
그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용...사....추!"
여인은 나지막하게 용사추의 이름을 뇌까렸다. 지극히 공허하면서도 묘한
여운이 감도는 음성이었다.
스윽!
그와 함께 여인은 문득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용사
추는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할 하나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백짓장같이 새하얀 피부, 그 위에 흡사 그려놓은 듯 정교하고 미려한 얼
굴이 용사추의 망막속으로 소스라치는 충격으로 뛰어들었다. 아름다왔다.
너무도 완벽하여 차라리 처연하도록 아름답고 인상적인 용모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죽어 있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그녀의 얼굴
에서 생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흡사 죽어버린 꽃(死花)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 여인의 모습은 용사추에게 충격적인 느낌을 던져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미세한 동작 하나에도 허무함이 묻어나는 여인.
겨울 들녘의 마지막 황혼빛에 바래어가는 들꽃처럼 쓸쓸함이 온 몸으로
흘러내리는 그 여인의 모습은 용사추가 평생토록 잊지못할 강한 인상을 심
어주었다.

"본녀는....십전앙화(十全殃花) 우담혜(遇膽惠)!"
괴여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공중에 떠도는 바람처럼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었다.
"십전앙화 우담혜?"
용사추는 짙은 검미를 꿈틀하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인물
중에는 그런 이름을 지닌 무림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의아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괴여인 십전앙화 우담혜가 메마
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악인성(惡人城) 호법총사(護法總師)의 이름으로 그대가 호송하는 뇌왕신
병(雷王神兵)을 접수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용사추는 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소....소저가 악인성(惡人城)의 호법총사란 말이오?"
그는 놀라움에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인성의 이름이야말로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십전앙화 우담혜는 자칭 그 악인성의 총호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용사추는 놀라움과 함께 혼란스러워지는 심정을 급급히 가다듬었다. 이윽
고 그는 검미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우소저! 뵙게 되어 영광이오만....본인이 뇌왕신병(雷王神兵)을 호송하
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구료!"
그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크____아악!"
"아악!"
돌연 처참한 비명과 함께 요란한 굉음이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그 속에
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말울음소리도 함께 섞여있었다.
"..........!"
용사추는 흠칫 놀라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으로 어디선가 나타
난 두 명의 괴인이 무차별로 동료 표사들을 격살하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혈포를 걸친 비쩍 마른 괴인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양 손이 섬
뜩한 피빛으로 물든 괴악한 인상의 곱추노인이었다. 생김새 만으로도 압도
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괴인들이었다.
퍼____ 펑!
"크____아악!"
"아아악!"
두 괴인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일 때마다 표사들과 마부들은 무참하게 머
리가 으깨지고 가슴이 박살난 채 죽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쾌속하고 잔혹한
손속이었다.
용사추의 짙은 검미가 꿈틀 치켜올라갔다.
그는 한눈에 괴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사망혈마....적수마타!)
느닷없이 나타나 표사들을 공격하는 두 괴인은 다름아닌 음산오마중 사망
혈타와 적수마타였다. 방금전 그들은 자신의 표기를 남겨 일차 경고를 했던
바 있었다.
용사추의 두 눈이 분노로 끓어올랐다.
"멈춰!"
그는 사나운 외침을 토하며 마상에 앉은 채 그대로 날아올라 사망혈마와
적수마타 쪽으로 날아갔다. 그런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찬 패검( 劍)
을 뽑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패검은 채 검갑(劍甲)에서 뽑혀지지도 못했다.
스____읏!
십전앙화 우담혜의 공허한 봉목이 섬연하게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녀의 새
하얀 소수가 한 차례 흔들리며 한줄기 음유한 역도(力道)가 용사추의 가슴
에 작렬했던 것이다.
퍼____억!
"크억!"
용사추의 입에서 피화살이 뿜어지며 그의 탄탄한 체구는 허공에서 삼사
장을 퉁겨올랐다가 모질게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둔중한 굉음과 함께 지면
에 처박혀 버린 그의 왼쪽 가슴에는 선연한 피빛을 띤 장미(血薔薇) 형상의
장인(掌印)이 찍혀져 있었다.

도살(屠殺)은... 너무도 빨리 끝났다.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표사
들도, 마부들도...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말들까지도...
대지(大地)는 삽시에 역겨운 선혈로 검붉게 물들었다.
"카캇! 여기 있습니다, 총사!"
사망혈마는 괴악한 괴소를 토하며 한 대의 표차를 박살내었다. 그는 득의
의 안색으로 우담혜를 돌아보았다.
후두둑......
사망혈마의 손속에 새하얀 은덩어리들이 피빛 노을속으로 부서져 흩어졌
고 흩어지는 은표더미 속에서 하나의 길쭉한 물건이 피낭에 싸인 채 드러났
다.
그것은 한 자루 강궁(强弓)이었다.
길이는 다섯 자. 전체가 검붉은 광휘로 번뜩였으며 궁신(弓身)에는 두 마
리의 용(龍)이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신물(神物)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신궁(神弓)! 시위가 메어
지지 않은 그것은 언뜻 보아 한 자루 기형장도같아 보였다.
사망혈마는 그 강궁을 집어들며 희열과 득의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뇌정패왕궁(雷霆覇王弓)이 틀림없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총사!"
그는 기대에 찬 음성으로 말하며 공손한 태도로 강궁을 우담혜에게 바쳐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두 눈은 애석함과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적수마타 역시 뇌정패왕궁이라 불린 신궁을 탐욕어린 눈길로 노려보며 음
험한 조소를 흘렸다.
"클클! 돌대가리 정파놈들. 새북(塞北) 악마초인을 제거할 수 있는 뇌왕
신병을 이따위 표객나부랑이들에게 호송시키다니....!"
그들의 손에 들어온 신궁. 그것의 이름은 뇌정패왕궁(雷霆覇王弓)이었다.
천지지간에서 가장 무섭다는 일곱가지의 병기, 즉 환우칠중병(環宇七重
兵)중 하나인 그것은 어린 아이라도 손에 들면 무적(無敵)이 된다고 할만큼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런만큼 사망혈마와 적수마타가 그것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지극
히 당연한 일이었다.
뇌정패왕궁은 본시 한 명의 악마초인을 제거하는데 쓰이기 위해 새북으로
운반되던 것이었다. 악인성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 호송을 평범한 일개표국
인 철사표행에 맡긴 것이었다. 그런데 그같은 계획은 십전앙화 우담혜라는
악인성의 여제자에게 여지없이 간파당해 피력되고 만 것이다.
다른 표사들은 물론이었고 용사추 조차 꿈에도 자기들이 운송하는 은표속
에 문제의 그 뇌정패왕궁이 감추어져 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뇌정패왕궁이군요."
스____윽!
우담혜는 뇌정패왕궁을 한차례 살펴보고는 무심한 눈길로 다시 피갑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만...이곳에서 이탈하도록 해요. 이들을 암중 호위하던 철혈전막의 골
칫덩이들이 그대 형제들의 저지를 뚫고 달려올 테니...!"
그녀는 여전히 공허함이 깃든 눈길로 사망혈마와 적수마타를 돌아보며 말
했다.
"옛!"
"캇! 가세, 셋째!"
사망혈마와 적수마타는 아쉬운 눈빛으로 입맛을 다셨으나 이내 우담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들은 우담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뒤 이
내 허공으로 떠올랐다.
"........!"
우담혜는 메마른 눈길로 흘깃 한쪽에 쓰러져 있는 용사추를 돌아보았다.
용사추는 죽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우담혜의 공허한
봉목에 문득 한가닥 파문이 일었다.
"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
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교구는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라 사라져 갔다.
마치 공허하게 감돌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십전앙화 우담혜가 사라진 직후,
"으음.....늦었군!"
"이.....이런!"
문득 분노와 탄식이 서린 음성이 들리며 구유평의 남쪽에서 두 줄기 인영
이 벼락같이 폭사되어 왔다. 장내에 나타난 이 인(二人)은 모두 초로의 인
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악전고투를 겪은듯 전신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용사추와 같은 표사차림의 복장에 다섯 자가 넘는 장도(長
刀)를 든 흡사 사자를 연상케 하는 용모의 노인이었다. 그의 당당한 체구와
호방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은 매우 호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다른 한 명의 노인은 털모자를 눌러 쓴 피의노인이었다. 다소 왜소한 체
구의 인물로 눈빛이 아주 예리해 보였다. 그는 오른손에 검고 굵은 철편(鐵
鞭)을 둘둘 말아쥐고 있었다.
"십전앙화! 그 악독한 계집이 직접 손을 쓸 줄이야!"
사면(獅面)의 노인은 낭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분노와 회한이
서린 시선으로 처참하게 죽어 넘어져 있는 표사들의 시신을 돌아보며 신음
성을 흘렸다.
노인의 이름은 사면천왕(獅面天王) 나열(羅列)이었다.
철사표행의 총표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평범한 철사표행의 총표두로
알려진 그였으나 실상 그에게는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신분이 있었
다.

<철혈삼십육천강(鐵血三十六天 )!>

바로 이것이었다. 저 철혈전막(鐵血戰幕)의 철혈전사 중의 일 인이 사면
천왕 나열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그것도 철혈전막에서도 최강의 전사단(戰
士團)이라는 철혈삼십육천강의 일 인이었던 것이다.

-새북신풍황(塞北神風皇) 단천악(斷天岳).

사면천왕 나열과 함께 있는 피의노인의 이름이었다.
그 역시 철혈삼십육천강의 일인이었다. 그는 새북 제일목장인 신풍대목장
(神風大牧場)의 주인임과 동시에 새북제일고수자인 강자 중의 강자였다.

사면천왕 나열과 새북신풍황 단천악.
그들 두 사람은 용사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암중호위해 왔었다.
그런데, 음산 근역에서 그들 이 인과 그들의 수하 고수들은 십전앙화가 안
배한 함정에 빠져 지금껏 음산마궁과 악전고투를 벌여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음산오마 중 삼마(三魔)를 베고서야 함정에서 빠져나왔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다.
"뇌정패왕궁이 악인성에게 넘어갔으니 큰일이구료!"
새북신풍황 단천악은 한숨을 쉬며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그
참혹한 장면에 그의 안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십대전신(十大戰神)중 만검노조(萬劍老祖) 검(劍)
노선배께서 태행산(太行山)의 악마초인을 제거하고 벽력대제 화(火) 노선배
를 도우시러 음산 근역까지 다가와 계시다는 점이오!"
사면천왕 나열이 침울한 표정으로 단천악의 말을 받았다.
단천악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십대전신 중 두 분의 힘으로라면 무엇인들 못하시겠소? 새북의
악마초인도 결국 제거되고 말것이오!"
그는 사면천왕 나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귀표국의 형제들의 일은.....유감이오!"
"고맙소, 단형."
나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쓰러져있는 용사추에게로 다가갔다.
용사추는 가슴에 장미 모양의 장인이 찍힌 채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
런 용사추를 바라보는 나열의 두 눈이 괴로움으로 이지러졌다.
단천악이 옆으로 다가서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마교(魔敎)의 전설적인 마공 천마십예(天魔十藝)중 장미혈인
(薔薇血人)이오. 순간적으로 심장이 부서져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
오!"
"으음.....!"
나열은 괴로운 안색으로 침음성을 발했다.
단천악은 두 눈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십전앙화 그 어린 아이가 십대악인들도 연마하지 못한 마교의 천마십예
(天魔十藝)를 익혔다니....실상 그 어린 마녀(魔女)는 열 명의 악마초인보
다 더한 골칫덩이가 될것이오!"
그는 예기치 못한 변수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
나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단천악의 말에 동감하는 바였
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십전앙화 우담혜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천악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죽은 듯이 누워있는 용사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고통과 속죄의 빛으로 이따금씩 떨리곤 했
다.
"사추! 노부를 용서해라!"
그는 괴로운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스____윽!
탄식성과 함께 그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
단천악도 애석하다는 시선을 용사추에게 던진 뒤 사면천왕 나열의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내 북쪽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그곳은 십전앙화
우담혜가 사라져간 곳이었다.

나열과 단천악이 사라진 직후,
"쿡.....쿡! 그랬단 말이지 후훗!"
문득,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가 장내를 울
렸다. 모두가 죽음의 먼 길을 떠나버린 장내는 암울한 침묵의 늪에 빠져있
었다. 그 죽음보다 깊은 침묵속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차라리 공허한 메
아리와 같이 덧없게 느껴졌다.
용사추(龍獅追), 빈 껍질만 남은 듯한 허탈한 웃음을 웃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그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는 두 눈을 멍하니 뜬 채 저물어가는 음산
의 거친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둘투둘 웃고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죽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 십전앙화 우담혜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
에 내공진력의 태반을 회수해 버렸고 그 덕분에 장미혈인은 그의 내부를 다
치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만, 피빛 장미의 형상이 그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새겨지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며 나열과 단천악의 대화를 모두 들
었던 것이다.

"쿡쿡! 우리를.....이용했단 말이지? 그 위대한 무림정의를 위해
서.....?"
용사추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툴툴 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비록 심장을 다치지는 않았으나 장미혈인이
준 타격은 그의 전신 관절이 바스러지는 듯한 지독한 통증을 유발시키고 있
었다.
"쿡.....쿡!"
용사추는 힘겹게 일어나 앉은 채 주위에 죽어 넘어져 있는 동료들의 시신
을 돌아보며 공허하게 웃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형제
같은 표사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무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살아남기는커녕 시체 조차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머리가 수박같이 뽀개져 허연 뇌수를 흘리는 자,
가슴이 으깨져 죽은 친구, 복부가 찢겨 내장을 사방에 흘리며 죽은
자......
그들은 모두 용사추의 다정한 형제들이며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방금전까
지 온정을 나누던 다정한 그들이 지금은 그저 무참하게도 고깃덩어리가 되
어 그의 눈앞에 널려있는 것이었다.
용사추는 그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감당해 내기가 힘들었다.
"무림정의라....! 후훗! 그 고상한 것 때문에 우리들이 영문도 모르고 학
살당했단 말이지? 쿡....쿡!"
자꾸만 그의 입술 사이로 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가슴 저 밑바
닥에 고여있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배신의 쓰디 쓴 앙금이
공허한 웃음으로 산화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용사추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위태위태하게 일어섰다.
"형제들! 억울해 하지 말게. 형제들의 빚은.....내가.....나 용사추가 잊
지않고 받아낼 테니.....후훗! 반드시......!"
어느새 그의 가슴에 새로운 삶의 목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꼭 해야만 할 일이 생긴 것이다.
터벅.....터벅.....
그는 공허하게 툴툴 웃으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
길 때 마다 전신 관절이 내려앉는 듯한 지독한 통증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
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겨 장내에서 멀어져 갔
다.
철담 용사추___!
무쇠의 심장을 지녔다는 젊은 기린아.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힘겹게 비틀
거리고 있었다. 음산에서의 황혼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
준 것이었다.
"후후! 잊지.....않겠소이다. 그대들의 이름을.....!"
용사추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십전앙화, 음산...오마, 새북신풍황 단천악, 그리고 후훗... 사면천왕
나으리... 잊지 않겠소이다. 그대들의 이름을... 결코...!"
그의 모습은 이내 구유평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쏴아아.......!
장대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음산(陰山)의 밤이 폭우속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추악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리려는 듯 폭우는 거침없이 쏟아
져 내렸다.
음산의 북서단.
쏟아지는 폭우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
도 쓰러질 듯 낡고 황폐한 토지묘였다.
토지묘 안.
"대단한 기세로 퍼부어 대는군!"
한 명의 청년이 토담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강직
한 인상을 지닌 청년은 바로 용사추였다.
그는 갑자기 쏟아진 폭우속에서 때마침 우연히 이곳 토지묘를 발견하여
잠시 비를 피하고 있던 중이었다.
십전앙화 우담혜가 살수를 쓰지 않은 탓에 그의 상세는 견딜만한 정도로
많이 좋아져 있었다. 아직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런대로 몸을 지탱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
용사추는 토담벽에 기대 앉은 채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
고 있었다.
번_____쩍! 꽈르릉......!
이따금 굉음과 함께 시퍼런 뇌전이 일어 암천을 쩍쩍 갈라 놓기도 했다.
그 때마다 새파란 섬광으로 사위가 대낮같이 환해지곤 했다.
콰____콰쾅!
다시 한 번 가공할 낙뢰가 일더니 요란한 벽력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
데 바로 그 때였다.
쐐애액_____!
한 줄기 인영이 폭우속을 뚫고 서쪽에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용사추는 흠칫하며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뇌전의 새파란 섬광이
사라졌으나 용사추의 눈에는 예의 인영이 허공을 가로질러 오는 것이 선연
하게 보였다.
"크___윽!"
예의 인영은 토지묘 앞으로 날아들다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으으....이....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그 인영은 회의에 찬 괴로운 신음을 발하며 빗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
다. 그제서야 그 인영의 모습이 용사추의 눈에 제대로 보였다.
그런데, 그 인물의 얼굴을 보던 용사추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 했다.
(헛!)
그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어둠속에 있는 인영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은 너무 끔찍하여 사람의 형상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상 속의
아수라(阿修羅)의 모습이 이러할까?
용사추는 이렇듯 흉칙하고 무서운 인간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두 눈, 사악한 미소를 띄운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
그러나 용사추는 이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흉칙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얼굴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가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 자는 본래 얼굴이 악귀 형상이 아니라 얼굴 위에 아수라 형상을 한 무
쇠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수라철면(修羅鐵面)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빛만큼은 섬칫한 아
수라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만큼 수라철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자의 눈빛은 음험하고 독랄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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