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추억3권-6. 독신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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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독신녀 아파트
그날 오후 다섯 시. 약속대로 마사오는 도서관 옆 작은 광장으로 갔다. 이미 묘우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사오를 보자마자 일어서서 정면으로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오가 다가갔다.
“집에 가서 괜찮았습니까?”
“응. 여덟 시에 잤어. 열 시간쯤 푹 잠을 잤지.”
“저도요.”
“오늘밤은 집에 돌아가야 돼.”
“그렇겠죠.”
“당신, 내 잡지 동인 만날 용기 있어?”
“예. 있습니다. 어젓밤 그 남자요?”
“아니야. 그 남자는 잡지 동인은 아니야.”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가. 저기 다방에서 기다리거든.”
두 사람은 문학부 옆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사람에게 당신과의 일을 모두 말했어. 그랬더니 당신과 만나고 싶대.”
문학 청년 중에서 무뢰한이 많다고 들었다. 더구나 그들은 때로 괴상한 논리를 전개시킨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주인공이 인기가 있고, 그 중에는 그런 주인공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조심해야 되겠군. 묘우미는 꽤 귀여워서 동인들이 손바닥 안의 진주를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감언으로 유혹한 것도 또 폭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니까 큰 염려는 없어.’
두 사람은 마사오도 몇 번인가 간 적이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구석 깊숙이 않아 책을 읽는 여학생 앞으로 갈 때까지도 만날 상대는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시루꼬, 왔어.”
묘우미가 그렇게 말을 하자 상대가 얼굴을 들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그스럼한 눈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묘우미가 그녀를 소개시켰다.
“같은 과의 시루꼬 재주꾼이야. 벌써 동인 잡지 평에서 몇 번이나 칭찬을 받았지.”
그리고 마사오에 대해선 점심시간에 말한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마사오와 시루꼬는 무덤덤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마사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전 마구 지껄여대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시루꼬는 웃지 않고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운이 좋았을뿐이에요.”
적의가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 어조로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순히 마사오는 끄덕였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왔다. 커피를 주문했다. 시루꼬가 묘우미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
“내 방에 가서 술을 좀 마실까?”
묘우미는 마사에게 의논했다.
“어떻게 할래?”
묘우미는 이상하게 어린애처럼 보였다.
‘시루꼬라는 애는 상당히 당차고 엄한 성격 같군. 묘우미가 쩔쩔매는 것 같아.’
“전 상관없습니다. 하숙입니까?”
“아파트. 버스로 십 분 거리죠.”
다방을 나온 세 사람은 버스를 타고 시루꼬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보통 아파트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여긴 독신 여자만 살아. 남자에겐 빌려주지 않아.”
그런 아파트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보기는 처음이었다. 현관 안팎이 다 깨끗이 정돈되고 복도에는 윤이 흘렀다.
시루꼬의 방은 이층이었다. 나무문에 문패가 붙여져 있었다. 책꽂이에 꽉 찬 책. 그 옆에도 높이 쌓여져 있있었다. 삼 년 동안의 실적치고는 대단한 양이었다. 안에 자그만 부엌이 있고 취사도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여자다운 장식품은 일체 없었다.
“자, 머뭇거리지 말고 이리 앉아.”
시루꼬는 방석을 꺼내 마사오에게 권했다.
“묘우미, 함께 시장 보러 가자. 술과 음식 추렴이야.”
묘우미는 일어섰다.
그저께 밤 그렇게 강한 개서을 발휘한 묘우미가 평범한 아가씨라고 생각될 정도로 시루꼬의 개성이 뚜렷했다. 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학교 생활을 보내면 성격도 남자 같아지는 모양이다.
두 여자가 사이좋게 나간 뒤 마사오는 상의를 벗고 누워서 책꽂이의 책을 죽 훑어보았다. 거의가 문학서였다. 역시 전후에 인기 있는 작가나 평론가의 작품이 많았다.
‘책값만도 대단하겠군. 그러고 보면 난 책을 사는 데 드는 지출이 너무 적은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저 두 사람이 오늘밤 날 어떻게 하려는 걸까?’
이윽고 여자들이 식료품을 잔뜩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즉시 술자리가 마련됐다. 밥상이 방 가운데에 놓여졌다. 세 사람은 빙 둘러앉아 정종으로 건배했다. 시루꼬는 곧바로 일어서서 요리를 했다. 묘우미가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마셔. 시루꼬는 내가 여자가 된 걸 축하해 주는 거야. 그런 자리에 당신도 있으면 좋잖아.”
“예.”
음식을 접시에 담아 밥상 위에 놓고 시루꼬도 앉았다.
“난 전부터 묘우미를 부추겼어. 술자리를 만든 적도 있었지. 그때마다 이애는 도망쳤어. 겁쟁이였어.”
“왜 부추겼는데요?”
“체험을 하지 않으면 어린애잖아. 그건 남자를 아는 게 아니라 자신 속의 여자를 아는 거지. 자신을 모르면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묘우미는 집안에 거역하지 않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구.”
“그러면 시루꼬 씨는 벌써 베테랑이라는 건가요?”
“어떻게 보여?”
도전적인 눈초리로 시루꼬는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루꼬는…….”
묘우미가 설명했다.
“여기로 이사오기 전, 일 년 정도 남자와 동거한 적이 있어. 동거 취소 결정을 내린게 올 봄이야.”
“상대는 같은 잡지의 동료입니까?”
“응.”
“왜 헤어졌습니까?”
“헤어졌다고는 하지 않았어. 함께 살기가 귀찮아졌을 뿐. 남자도 이불속에서 나오면 귀찮기만 하더군.”
이제까지는 몰랐던 여학생들의 세계에 자신이 발을 들여놨다는 사실을 마사오는 깨닫고 있었다.
똑같이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문학 소녀이면서도 묘우미는 시루꼬의 인생 경험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시루꼬는 세또나이 해안의 한 도시에서 큰 규모의 여관을 경영하는 지방의 유지의 딸로 태어났다. 여학교 시절은 품행이 방정한 우등생이었다. 문학부에 들어간 것도 여자가 들어갈 학과로서 무난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긴 했어도 특별히 그 길로 나아가려는 마음이나 창작 생활을 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부모도 그저 막연히 머리가 좋고 이제부터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 좋다는 생각으로 딸의 도쿄 진학을 허락했었다.
“내 첫 체험은 1학년 가을, 밤의 공원 잔디 위에서엿어. 상대는 같은 연구회에 있던 상급생. 좌익 투사로 그는 강한 어조에 우리들은 반했었어.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거든. 처녀성 존중 따위는 봉건제의 유물이라고, 그런 낡은 윤리관은 적극적으로 버려야 된다고 말했어. 여자는 더 자유로워져야 된다나. 내가 그 말에 공감했던 건 아니야. 허락한 건 성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어. 상상의 한계를 느껴서 빨리 현실을 알고 싶었어. 난 남자에게 호의는 갖고 있었지만 특별히 좋아한 것 아니었지.”
옆에서 묘우미가 마사오에게 속삭였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야. 나와 친구가 되기 전의 이야기야.”
마사오는 끄덕였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 나란히 앉아서 얘기하는 동안 키스하게 되고, 차츰 잔디 위에 눕게 되었어. 그의 손이 내 스커트 속으로 들어왔지. 본능적으로 거부했지만 상대는 끈질겼고, 나도 처음부터 얼마간은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점점 저하이 약해지고 이윽고 애무를 받게 되었어. 그는 이렇게 말했어. ‘넌 체험해야 될 나이야. 그리고 지금은 여자의 계절이고’하고 말이야. 처음부터 끝가지 이론적으로 설득했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겉발림이었어. 그러나 내가 그 말에 설득당한 건 결코 아니야. 내 자신이 경험하고 싶다는 바람과 그 잠재
의식을 방해하는 윤리관을 제거하기 위한 나 스스로의 결단이었지.”
“시루꼬가 회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선했어. 그의 감촉.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 좋았었어.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았어.”
묘우미가 마사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시루꼬는 스스로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날 벗기려 하기 시작했어. 그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건 결코 아니라는 걸 보이기 위해 내가 벗겠다고 말했지. 물론 그땐 이미 그의 남성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더.”
묘우미가 물었다.
“그곳에서?”
“응.”
“공원이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잖아.”
“길에서 꽤 떨어져 있어서 아무도 지나 다니지는 않았어.”
“그때도 너 혼자 살고 있었잖아? 왜 그런 장소에서?”
“상대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대로 어둠침침한 곳에서 상황을 진행시키는 편이 부담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응.”
“그는 나에게 덮쳐오고, 난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그때 이 사람이 이것으로 날 연인이라 여기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밤만이야. 내일부턴 지금까지와 똑같이 지내자고 다짐을 해두었지. 그는 알앗다고 대답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나를 밀어붙였지.”
“그때 넌 아직 상대의 몸을 확인하지 않았지?”
“응. 사실은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먼저 말할 수 없었어. 그 당시에는 건방진 것 같아도 순정파 처녀였거든.”
“그렇겠죠.”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정확한 장소를 비집고 들어왔어. 통증으로 나는 신음하면서 피했어. 그러나 달아날 수는 없었어. 그는 운동을 시작했고 난 단지 아프기만 했어. 애무받을 때와 달리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남자가 발기한 것이 이상했지. 난 그 몸의 무게가 괴로웠어. 어이없는 체험이었어. 많은 여자가 처음에는 ‘아니, 겨우 이런 거야?’하고 생각하잖아? 나도 그랬어.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몸단장을 하고 나도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곧 공원을 나왔어. 방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밝은 장소로 나와서 곧바로 헤어졌어. 그날 밤, 남자는 대단한게 아니라고 일기에 썼지.”
시루꼬는 마사오에게 얼굴을 바싹댔다.
“어때? 그 다음에 내가 남자를 좋아했을 것 같아?”
“글쎄요. 그러나 그 한 번만은 아니었겠죠.”
“그래. 너무나 어이없었고, 나로선 알 수 없는 일뿐이었어. 일주일쯤 뒤에 그 사람이 또 같은 장소로 날 불러냈어. 난 여관으로 가. 이런 장소는 싫다고 말했지. 그러자 돈은 없고 내 방엔 동거하는 녀석이 있으니 네 방으로 가자고 하기에 내방으로 데리고 가는 건 내가 싫어서 돈이 나에게도 있으니 여관으로 가자고 했지.”
“이번엔 침착하게 체험했습니까?”
“처음 봤어. 손으로 만졌지. 그가 내 몸안에 있는 것도 실감했어. 그것이 실질적인 체험이었지. 공원 잔디 위에서 사람 발소리에 신경쓰면서 잠깐 사이에 끝나 버린 것이 처음은 왠지 사기당한 것 같았어. 그래서 난 언제나 묘우미에게 첫 체험을 확실히 인식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두 사람만의 밀실로 들어가라고 늘 조언했지.”
“그래서 그제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겁니까?”
“아니. 달라. 그 두 번째가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었어. 다음 날 좀전에 그 다방에서 만나 이제 다시는 성관계는 맺지 말자고 통고했어.”
“왜?”
“이유는 많아. 첫째, 이것이 제일 큰 이유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즐겁지 않았다는 것. 둘째, 그 사람이 일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옆으로 돌아누워서 불쾌했어. 셋째, 왠지 그 사람이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어. 짐이 될 것 같았어. 여자는 몸을 허락하면 그 남자에게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난 반대였어. 귀찮아졌어. 그 사람이 가난한 학생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고.”
“상대방이 승낙했습니까?”
“응. 다만 내가 변했다고 말하더군. 그래서 그냥 그러고 싶다며 그것으로 끝이었어. 그 뒤에 몇 번 날 유혹했지만 난 거절하고 키스도 하지 않았어.”
시루꼬는 묘우미의 어깨를 쳤다.
“묘우미는 어때? 오늘밤 이 술자리를 이 사람과 절교 파티로 해. 뒤가 깨끗한 체험을 했을 뿐이야. 학부도 학년도 다르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
“글세.”
묘우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사오를 보았다.
“그렇게 할까?”
“어때?”
이번엔 시루꼬가 마사오의 잔을 채웠다.
“묘우미가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때?”
“간단합니다.”
마사오는 잔을 비웠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전 그날 밤만으로도 뜻밖의 멋진 밤이었으니까요. 욕심은 부리지 않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단념하겠습니다. 본래 묘우미 씨는 날 실험도구로서 이용했을 뿐이고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빠지진 않았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그러면 이대로 나가라고 하면 갈 수 있어?”
“가겠습니다.”
시루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나가. 이젠 없어도 돼. 그렇지만 아직 술이 남았으니까 삼십분 후에 말없이 나가 줘. 이 말을 하려고 내가 묘우미와 함께 당신을 보자고 앴어. 묘우미 혼자선 말을 못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마사오는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지금부터 삼십 분 동안 잘 마시겠습니다.”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시루꼬는 술을 더 가져오기 위해 일어섰다. 묘우미가 말했다.
“당신, 화나지 않았어?”
“예. 처음부터 한 약속이니까요. 시루꼬의 첫 남자와 똑같죠.”
“그 사람의 경우는 계속 만날 기회가 있었잖아? 나와 당신의 경우는 오늘 헤어지면 끝인데.”
“압니다. 그 남자의 경우는 나중에 또 가자고 하면 여자가 자기 말에 따를 거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예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 묘우미씨의 결론으 따르겠습니다.”
시루꼬가 돌아와 앉더니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구름』이 나온 다음 묘우미와도 친해졌고, 두 번째 남자를 체험앴어.”
시루꼬의 눈가가 붉어지며 묘우미를 보았다.
“이 말도 너에겐 처음이지? 넌 얌전한 애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지금은 말해도 되겠지.”
“그 사람이 후꾸이 씨 아냐?”
“아니야. 그 사람은 세 번째. 후꾸이 씨 전에 몇 번인가 고가와 씨와 관계가 있었어.”
“뭐?”
묘우미는 머리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 그 두 사람 친구잖아? 더구나 너와 후꾸이 씨가 동거할 때 고가와 씨가 가끔 자러 갔잖아?”
“응.”
“그러면 후꾸이 씨도 네가 고가와 씨와 먼저였다는 걸 알아?”
“물론이야. 처음에 내가 말했어.”
“그러면 너도 키우에라는 사람과 마찬가지구나.”
“키우에 씨는 하다다와 스즈끼를 번갈아 가며 교대로 관계를 갖잖아. 난 아니야. 더블 플레이를 한 건 한 번뿐이야. 고가와 씨에서 후꾸이 씨로 옮겼지.”
“전혀 몰랐어. 네가 곧바로 후꾸이 씨와 의기 투합했나 하고 생각했었어.”
“고가와 씨와의 사이는 비밀이었으니까 네가 몰랐던 게 당연하지. 그래서 난 고가와 씨가 너에게 프로포즈하기를 은근히 바랬었어.”
개성파 여자들의 이야기도 결국을 남자 문제가 되니 활기를 띠었다. 시루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고가와 씨는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어. 처음 여기에 키스를 받았고, 나도 했어. 섹스도 나쁘진 않다는 걸 알았어. 오르가즘도 처음 느꼈고.”
시루꼬는 자기의 아랫도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친구였고 놀이라고 처음부터 약속했었어.”
“어쨌든 성행위의 상대로서 고가와 씨에게 불람은 없었던 셈입니까?”
“그 당시 그 이상을 몰랐으니까 충분히 만족했어.”
“그런데 왜 또 후꾸이 씨와?”
“같은 이유야. 다른 섹스를 체험해 보고 싶었어. 남자도 그렇지?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갖고 싶지? 여자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난 고가와 씨에게 속박당하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
“물론 먼저 유혹한 건 후꾸이 씨고, 난 조금도 관계를 하고 싶다는 얼굴은 하지 않았어. 어느 날 밤, 나도 그도 취해서 그의 방에서 잤지.”
“그땐는 그럴 작정으로?”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었어. 상대방은 이미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고. 고가와 씨와의 일을 말했어. 그러자, ‘그런 건 지금의 너와 나에겐 관계없어’하고 딱 잘라 말하더라구. 그리고 그날, 그때까지 맛보지 못한 진한 기쁨을 알았어. 남자로서 후꾸이가 뛰어났던 게 아니라 적당한 기회와 신선한 기대가 상호 작용해서 그런 것 같아.”
“글쎄요?”
“그 다음에 고가와 씨와 잘 때, 후꾸이 씨의 일을 말했어. 친구인데도 후꾸이 씨가 말하지 않아서 놀란 것 같았어.”
“놀랍군요.”
“어쨌든 그날 보통 때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헤어지기로 했어.”
“누가 먼제 말을 꺼냈지?”
“나. 고가와 씨는 깨끗이 승낙했어. 그래서 자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회복되었어. 남자끼리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동거를 취소한 뒤 지금도 후꾸이 씨와는 서로 계속 관계를 갖고 있나요?”
“응.”
“그 외의 사람은?”
“없어. 나,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흥미를 가질 만큼 호색은 아냐. 남자는 한 사람으로 충분해.”
마사오는 시계를 보았다. 삼십 분이 지났다. 잔을 비우고 마사오는 정좌를 했다.
“그러면 약속대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얘기도 재미있었구요.”
시루꼬는 눈을 반짝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돌아갈 거야?”
“예.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이제 묘우미 일은 잊어. 내가 묘우미를 대신해서 말한 거니까.”
“물론 잊어야죠.”
마사오는 묘우미를 보았다. 일부러 친구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관계를 가진 뒤 끈질기게 여자를 따라 다니는 그런 남자는 아니야’하는 자존심이 마사오에겐 있었다. 달아나는 여자는 잡지 않는다.
시루꼬가 말했다.
“당신 멋지군. 더 애먹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 난 약속은 지킵니다.”
마사오는 일어섰다. 묘우미도 따라 일어섰다.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줄게.”
“안 돼.”
시루꼬가 손을 저었다.
“여기서 헤어져.”
그러가 갑자기 묘우미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배웅 나가는 정도는 괜찮잖아. 너무 멋대로 참견하지 마.”
시루꼬가 꺾였다.
“그래, 그러면 알아서 해.”
시루꼬가 마사오에게 자기의 과거를 말한 건, 여자는 남자에게 한두 번 몸을 허락해도 깨끗이 헤어질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를 것이다.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묘우미는 마사오의 팔을 잡았다.
“나도 이대로 같이 갈래.”
“예?”
“마사오는 놀랐다. 묘우미는 외투를 입고 나왔지만 가방은 시루꼬의 집에 두고온 상태였던 것이다.
“가방은요?”
“괜찮아. 월요일에 갖다 주겠지. 갖다 주지 않아도 별로 곤란할 건 없어.”
“시루꼬 씨가 기다리잖아요?”
“지금 여덟 시 반이지?”
“예.”
“아홉 시에 저 방에 아까 말한 후꾸이 씨와 고가와 씨가 오기로 되어있어.”
“예?”
“그래서 술과 음식을 준비한 거야. 당신을 대접하려는 건 아니었어.”
“놀랍군요.”
“그래서 여덟 시 반에 당신을 보내기로 미리 계획이 된 거야.”
“과연.”
“나도 오늘밤 저 방에서 자기로 되어 있어. 내 짝은 고가와 씨지. 전부터 시루꼬는 그걸 계획하고 있었어. 내가 남자를 체험하고 나니까 이야기가 급속하게 진전된 거지.”
“당신도 그걸 승낙한 셈?”
“응. 고가와 씨는 동료니까 하룻밤 부담 없이 즐기기에는 변하잖아. 그래도 그만두겠어. 도망치고 싶어.”
“왜 마음이 바뀌었죠? 다른 남자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갑자기 묘우미가 마사오에게 와락 안겨왔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얘기를 하면서 점점 확실해졌어. 저 사람들은 오랜 친구야. 당신은 오늘이 두 번째. 그렇지만 내 감정은 전혀 달라.”
“그러면 저 방으로 돌아가 확실하게 말하면 되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내 결론을 알릴 수 있잖아.”
“아니, 당신도 시루꼬 씨에게 나와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해요. 나도 말 할 테니까.”
“그래, 좋아.”
두 사람은 길을 되돌아갔다.
“슬슬 남자들이 올 거야.”
“고가와 씨는 잔뜩 기대하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당신이 체험한 걸 두 사람도 아나요?”
“시루꼬가 말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마음이 내켰을 거라고 기뻐하겠지.”
“그러면 당신에게 반한 건 아니군요.”
“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시루꼬의 방문은 곧 열렸다. 묘우미를 따라 마사오도 들어갔다. 시루꼬는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탁이었다. 둘이 다시 들어서는 걸 보더니 시루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묘우미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나, 이 사람과 돌아갈래. 좀더 사귀기로 했어.”
그대로 방 구석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시루꼬는 턱에 힘을 주며 묘우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곧 그 사람들이 올 텐데?”
“잘 말해 줘.”
“당신이 유혹했지?”
“아니, 마사오가 아니야.”
마사오의 옆에 붙어서며 묘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사오의 팔을 잡으며 젖가슴을 밀차시겼다.
“역시 이 사람은 남이 아니야. 이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팠어.”
“그런 애송이의 어디가 좋아?”
“난 너와 다른 것 같아.”
시루꼬는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변명해 줄 수가 없어.”
“내가 내 자신의 의지로 변심했으니까 넌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돼. 다음에 학교에서 만나면 내가 사과하겠어.”
시루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송이 주제에,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군 너희들의 관계는 억지야.”
“그래도 좋아.”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묘우미는 말했다.
“미안해. 이제 내 일은 걱정하지 마.”
“배신자!”
시루꼬가 그렇게 소리칠 때 묘우미는 문을 닫았다. 시루꼬가 문에다 책을 내던진 모양이었다. 문에 무언가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약속대로 마사오는 도서관 옆 작은 광장으로 갔다. 이미 묘우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사오를 보자마자 일어서서 정면으로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오가 다가갔다.
“집에 가서 괜찮았습니까?”
“응. 여덟 시에 잤어. 열 시간쯤 푹 잠을 잤지.”
“저도요.”
“오늘밤은 집에 돌아가야 돼.”
“그렇겠죠.”
“당신, 내 잡지 동인 만날 용기 있어?”
“예. 있습니다. 어젓밤 그 남자요?”
“아니야. 그 남자는 잡지 동인은 아니야.”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가. 저기 다방에서 기다리거든.”
두 사람은 문학부 옆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사람에게 당신과의 일을 모두 말했어. 그랬더니 당신과 만나고 싶대.”
문학 청년 중에서 무뢰한이 많다고 들었다. 더구나 그들은 때로 괴상한 논리를 전개시킨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주인공이 인기가 있고, 그 중에는 그런 주인공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조심해야 되겠군. 묘우미는 꽤 귀여워서 동인들이 손바닥 안의 진주를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감언으로 유혹한 것도 또 폭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니까 큰 염려는 없어.’
두 사람은 마사오도 몇 번인가 간 적이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구석 깊숙이 않아 책을 읽는 여학생 앞으로 갈 때까지도 만날 상대는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시루꼬, 왔어.”
묘우미가 그렇게 말을 하자 상대가 얼굴을 들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그스럼한 눈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묘우미가 그녀를 소개시켰다.
“같은 과의 시루꼬 재주꾼이야. 벌써 동인 잡지 평에서 몇 번이나 칭찬을 받았지.”
그리고 마사오에 대해선 점심시간에 말한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마사오와 시루꼬는 무덤덤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마사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전 마구 지껄여대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시루꼬는 웃지 않고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운이 좋았을뿐이에요.”
적의가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 어조로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순히 마사오는 끄덕였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왔다. 커피를 주문했다. 시루꼬가 묘우미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아직 말하지 않았어.”
“내 방에 가서 술을 좀 마실까?”
묘우미는 마사에게 의논했다.
“어떻게 할래?”
묘우미는 이상하게 어린애처럼 보였다.
‘시루꼬라는 애는 상당히 당차고 엄한 성격 같군. 묘우미가 쩔쩔매는 것 같아.’
“전 상관없습니다. 하숙입니까?”
“아파트. 버스로 십 분 거리죠.”
다방을 나온 세 사람은 버스를 타고 시루꼬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보통 아파트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여긴 독신 여자만 살아. 남자에겐 빌려주지 않아.”
그런 아파트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보기는 처음이었다. 현관 안팎이 다 깨끗이 정돈되고 복도에는 윤이 흘렀다.
시루꼬의 방은 이층이었다. 나무문에 문패가 붙여져 있었다. 책꽂이에 꽉 찬 책. 그 옆에도 높이 쌓여져 있있었다. 삼 년 동안의 실적치고는 대단한 양이었다. 안에 자그만 부엌이 있고 취사도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여자다운 장식품은 일체 없었다.
“자, 머뭇거리지 말고 이리 앉아.”
시루꼬는 방석을 꺼내 마사오에게 권했다.
“묘우미, 함께 시장 보러 가자. 술과 음식 추렴이야.”
묘우미는 일어섰다.
그저께 밤 그렇게 강한 개서을 발휘한 묘우미가 평범한 아가씨라고 생각될 정도로 시루꼬의 개성이 뚜렷했다. 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학교 생활을 보내면 성격도 남자 같아지는 모양이다.
두 여자가 사이좋게 나간 뒤 마사오는 상의를 벗고 누워서 책꽂이의 책을 죽 훑어보았다. 거의가 문학서였다. 역시 전후에 인기 있는 작가나 평론가의 작품이 많았다.
‘책값만도 대단하겠군. 그러고 보면 난 책을 사는 데 드는 지출이 너무 적은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저 두 사람이 오늘밤 날 어떻게 하려는 걸까?’
이윽고 여자들이 식료품을 잔뜩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즉시 술자리가 마련됐다. 밥상이 방 가운데에 놓여졌다. 세 사람은 빙 둘러앉아 정종으로 건배했다. 시루꼬는 곧바로 일어서서 요리를 했다. 묘우미가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마셔. 시루꼬는 내가 여자가 된 걸 축하해 주는 거야. 그런 자리에 당신도 있으면 좋잖아.”
“예.”
음식을 접시에 담아 밥상 위에 놓고 시루꼬도 앉았다.
“난 전부터 묘우미를 부추겼어. 술자리를 만든 적도 있었지. 그때마다 이애는 도망쳤어. 겁쟁이였어.”
“왜 부추겼는데요?”
“체험을 하지 않으면 어린애잖아. 그건 남자를 아는 게 아니라 자신 속의 여자를 아는 거지. 자신을 모르면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묘우미는 집안에 거역하지 않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구.”
“그러면 시루꼬 씨는 벌써 베테랑이라는 건가요?”
“어떻게 보여?”
도전적인 눈초리로 시루꼬는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루꼬는…….”
묘우미가 설명했다.
“여기로 이사오기 전, 일 년 정도 남자와 동거한 적이 있어. 동거 취소 결정을 내린게 올 봄이야.”
“상대는 같은 잡지의 동료입니까?”
“응.”
“왜 헤어졌습니까?”
“헤어졌다고는 하지 않았어. 함께 살기가 귀찮아졌을 뿐. 남자도 이불속에서 나오면 귀찮기만 하더군.”
이제까지는 몰랐던 여학생들의 세계에 자신이 발을 들여놨다는 사실을 마사오는 깨닫고 있었다.
똑같이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문학 소녀이면서도 묘우미는 시루꼬의 인생 경험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시루꼬는 세또나이 해안의 한 도시에서 큰 규모의 여관을 경영하는 지방의 유지의 딸로 태어났다. 여학교 시절은 품행이 방정한 우등생이었다. 문학부에 들어간 것도 여자가 들어갈 학과로서 무난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긴 했어도 특별히 그 길로 나아가려는 마음이나 창작 생활을 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부모도 그저 막연히 머리가 좋고 이제부터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 좋다는 생각으로 딸의 도쿄 진학을 허락했었다.
“내 첫 체험은 1학년 가을, 밤의 공원 잔디 위에서엿어. 상대는 같은 연구회에 있던 상급생. 좌익 투사로 그는 강한 어조에 우리들은 반했었어.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거든. 처녀성 존중 따위는 봉건제의 유물이라고, 그런 낡은 윤리관은 적극적으로 버려야 된다고 말했어. 여자는 더 자유로워져야 된다나. 내가 그 말에 공감했던 건 아니야. 허락한 건 성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어. 상상의 한계를 느껴서 빨리 현실을 알고 싶었어. 난 남자에게 호의는 갖고 있었지만 특별히 좋아한 것 아니었지.”
옆에서 묘우미가 마사오에게 속삭였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야. 나와 친구가 되기 전의 이야기야.”
마사오는 끄덕였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 나란히 앉아서 얘기하는 동안 키스하게 되고, 차츰 잔디 위에 눕게 되었어. 그의 손이 내 스커트 속으로 들어왔지. 본능적으로 거부했지만 상대는 끈질겼고, 나도 처음부터 얼마간은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점점 저하이 약해지고 이윽고 애무를 받게 되었어. 그는 이렇게 말했어. ‘넌 체험해야 될 나이야. 그리고 지금은 여자의 계절이고’하고 말이야. 처음부터 끝가지 이론적으로 설득했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겉발림이었어. 그러나 내가 그 말에 설득당한 건 결코 아니야. 내 자신이 경험하고 싶다는 바람과 그 잠재
의식을 방해하는 윤리관을 제거하기 위한 나 스스로의 결단이었지.”
“시루꼬가 회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선했어. 그의 감촉.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 좋았었어.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았어.”
묘우미가 마사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시루꼬는 스스로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날 벗기려 하기 시작했어. 그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건 결코 아니라는 걸 보이기 위해 내가 벗겠다고 말했지. 물론 그땐 이미 그의 남성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더.”
묘우미가 물었다.
“그곳에서?”
“응.”
“공원이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잖아.”
“길에서 꽤 떨어져 있어서 아무도 지나 다니지는 않았어.”
“그때도 너 혼자 살고 있었잖아? 왜 그런 장소에서?”
“상대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대로 어둠침침한 곳에서 상황을 진행시키는 편이 부담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응.”
“그는 나에게 덮쳐오고, 난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그때 이 사람이 이것으로 날 연인이라 여기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밤만이야. 내일부턴 지금까지와 똑같이 지내자고 다짐을 해두었지. 그는 알앗다고 대답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나를 밀어붙였지.”
“그때 넌 아직 상대의 몸을 확인하지 않았지?”
“응. 사실은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먼저 말할 수 없었어. 그 당시에는 건방진 것 같아도 순정파 처녀였거든.”
“그렇겠죠.”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정확한 장소를 비집고 들어왔어. 통증으로 나는 신음하면서 피했어. 그러나 달아날 수는 없었어. 그는 운동을 시작했고 난 단지 아프기만 했어. 애무받을 때와 달리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남자가 발기한 것이 이상했지. 난 그 몸의 무게가 괴로웠어. 어이없는 체험이었어. 많은 여자가 처음에는 ‘아니, 겨우 이런 거야?’하고 생각하잖아? 나도 그랬어. 그는 나에게서 떨어져 몸단장을 하고 나도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곧 공원을 나왔어. 방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밝은 장소로 나와서 곧바로 헤어졌어. 그날 밤, 남자는 대단한게 아니라고 일기에 썼지.”
시루꼬는 마사오에게 얼굴을 바싹댔다.
“어때? 그 다음에 내가 남자를 좋아했을 것 같아?”
“글쎄요. 그러나 그 한 번만은 아니었겠죠.”
“그래. 너무나 어이없었고, 나로선 알 수 없는 일뿐이었어. 일주일쯤 뒤에 그 사람이 또 같은 장소로 날 불러냈어. 난 여관으로 가. 이런 장소는 싫다고 말했지. 그러자 돈은 없고 내 방엔 동거하는 녀석이 있으니 네 방으로 가자고 하기에 내방으로 데리고 가는 건 내가 싫어서 돈이 나에게도 있으니 여관으로 가자고 했지.”
“이번엔 침착하게 체험했습니까?”
“처음 봤어. 손으로 만졌지. 그가 내 몸안에 있는 것도 실감했어. 그것이 실질적인 체험이었지. 공원 잔디 위에서 사람 발소리에 신경쓰면서 잠깐 사이에 끝나 버린 것이 처음은 왠지 사기당한 것 같았어. 그래서 난 언제나 묘우미에게 첫 체험을 확실히 인식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두 사람만의 밀실로 들어가라고 늘 조언했지.”
“그래서 그제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겁니까?”
“아니. 달라. 그 두 번째가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었어. 다음 날 좀전에 그 다방에서 만나 이제 다시는 성관계는 맺지 말자고 통고했어.”
“왜?”
“이유는 많아. 첫째, 이것이 제일 큰 이유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즐겁지 않았다는 것. 둘째, 그 사람이 일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옆으로 돌아누워서 불쾌했어. 셋째, 왠지 그 사람이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어. 짐이 될 것 같았어. 여자는 몸을 허락하면 그 남자에게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난 반대였어. 귀찮아졌어. 그 사람이 가난한 학생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고.”
“상대방이 승낙했습니까?”
“응. 다만 내가 변했다고 말하더군. 그래서 그냥 그러고 싶다며 그것으로 끝이었어. 그 뒤에 몇 번 날 유혹했지만 난 거절하고 키스도 하지 않았어.”
시루꼬는 묘우미의 어깨를 쳤다.
“묘우미는 어때? 오늘밤 이 술자리를 이 사람과 절교 파티로 해. 뒤가 깨끗한 체험을 했을 뿐이야. 학부도 학년도 다르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
“글세.”
묘우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사오를 보았다.
“그렇게 할까?”
“어때?”
이번엔 시루꼬가 마사오의 잔을 채웠다.
“묘우미가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때?”
“간단합니다.”
마사오는 잔을 비웠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전 그날 밤만으로도 뜻밖의 멋진 밤이었으니까요. 욕심은 부리지 않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단념하겠습니다. 본래 묘우미 씨는 날 실험도구로서 이용했을 뿐이고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빠지진 않았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그러면 이대로 나가라고 하면 갈 수 있어?”
“가겠습니다.”
시루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나가. 이젠 없어도 돼. 그렇지만 아직 술이 남았으니까 삼십분 후에 말없이 나가 줘. 이 말을 하려고 내가 묘우미와 함께 당신을 보자고 앴어. 묘우미 혼자선 말을 못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마사오는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지금부터 삼십 분 동안 잘 마시겠습니다.”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시루꼬는 술을 더 가져오기 위해 일어섰다. 묘우미가 말했다.
“당신, 화나지 않았어?”
“예. 처음부터 한 약속이니까요. 시루꼬의 첫 남자와 똑같죠.”
“그 사람의 경우는 계속 만날 기회가 있었잖아? 나와 당신의 경우는 오늘 헤어지면 끝인데.”
“압니다. 그 남자의 경우는 나중에 또 가자고 하면 여자가 자기 말에 따를 거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예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 묘우미씨의 결론으 따르겠습니다.”
시루꼬가 돌아와 앉더니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구름』이 나온 다음 묘우미와도 친해졌고, 두 번째 남자를 체험앴어.”
시루꼬의 눈가가 붉어지며 묘우미를 보았다.
“이 말도 너에겐 처음이지? 넌 얌전한 애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지금은 말해도 되겠지.”
“그 사람이 후꾸이 씨 아냐?”
“아니야. 그 사람은 세 번째. 후꾸이 씨 전에 몇 번인가 고가와 씨와 관계가 있었어.”
“뭐?”
묘우미는 머리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 그 두 사람 친구잖아? 더구나 너와 후꾸이 씨가 동거할 때 고가와 씨가 가끔 자러 갔잖아?”
“응.”
“그러면 후꾸이 씨도 네가 고가와 씨와 먼저였다는 걸 알아?”
“물론이야. 처음에 내가 말했어.”
“그러면 너도 키우에라는 사람과 마찬가지구나.”
“키우에 씨는 하다다와 스즈끼를 번갈아 가며 교대로 관계를 갖잖아. 난 아니야. 더블 플레이를 한 건 한 번뿐이야. 고가와 씨에서 후꾸이 씨로 옮겼지.”
“전혀 몰랐어. 네가 곧바로 후꾸이 씨와 의기 투합했나 하고 생각했었어.”
“고가와 씨와의 사이는 비밀이었으니까 네가 몰랐던 게 당연하지. 그래서 난 고가와 씨가 너에게 프로포즈하기를 은근히 바랬었어.”
개성파 여자들의 이야기도 결국을 남자 문제가 되니 활기를 띠었다. 시루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고가와 씨는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어. 처음 여기에 키스를 받았고, 나도 했어. 섹스도 나쁘진 않다는 걸 알았어. 오르가즘도 처음 느꼈고.”
시루꼬는 자기의 아랫도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친구였고 놀이라고 처음부터 약속했었어.”
“어쨌든 성행위의 상대로서 고가와 씨에게 불람은 없었던 셈입니까?”
“그 당시 그 이상을 몰랐으니까 충분히 만족했어.”
“그런데 왜 또 후꾸이 씨와?”
“같은 이유야. 다른 섹스를 체험해 보고 싶었어. 남자도 그렇지?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갖고 싶지? 여자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난 고가와 씨에게 속박당하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
“물론 먼저 유혹한 건 후꾸이 씨고, 난 조금도 관계를 하고 싶다는 얼굴은 하지 않았어. 어느 날 밤, 나도 그도 취해서 그의 방에서 잤지.”
“그땐는 그럴 작정으로?”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었어. 상대방은 이미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고. 고가와 씨와의 일을 말했어. 그러자, ‘그런 건 지금의 너와 나에겐 관계없어’하고 딱 잘라 말하더라구. 그리고 그날, 그때까지 맛보지 못한 진한 기쁨을 알았어. 남자로서 후꾸이가 뛰어났던 게 아니라 적당한 기회와 신선한 기대가 상호 작용해서 그런 것 같아.”
“글쎄요?”
“그 다음에 고가와 씨와 잘 때, 후꾸이 씨의 일을 말했어. 친구인데도 후꾸이 씨가 말하지 않아서 놀란 것 같았어.”
“놀랍군요.”
“어쨌든 그날 보통 때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헤어지기로 했어.”
“누가 먼제 말을 꺼냈지?”
“나. 고가와 씨는 깨끗이 승낙했어. 그래서 자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회복되었어. 남자끼리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동거를 취소한 뒤 지금도 후꾸이 씨와는 서로 계속 관계를 갖고 있나요?”
“응.”
“그 외의 사람은?”
“없어. 나,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흥미를 가질 만큼 호색은 아냐. 남자는 한 사람으로 충분해.”
마사오는 시계를 보았다. 삼십 분이 지났다. 잔을 비우고 마사오는 정좌를 했다.
“그러면 약속대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얘기도 재미있었구요.”
시루꼬는 눈을 반짝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돌아갈 거야?”
“예.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이제 묘우미 일은 잊어. 내가 묘우미를 대신해서 말한 거니까.”
“물론 잊어야죠.”
마사오는 묘우미를 보았다. 일부러 친구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관계를 가진 뒤 끈질기게 여자를 따라 다니는 그런 남자는 아니야’하는 자존심이 마사오에겐 있었다. 달아나는 여자는 잡지 않는다.
시루꼬가 말했다.
“당신 멋지군. 더 애먹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 난 약속은 지킵니다.”
마사오는 일어섰다. 묘우미도 따라 일어섰다.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줄게.”
“안 돼.”
시루꼬가 손을 저었다.
“여기서 헤어져.”
그러가 갑자기 묘우미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배웅 나가는 정도는 괜찮잖아. 너무 멋대로 참견하지 마.”
시루꼬가 꺾였다.
“그래, 그러면 알아서 해.”
시루꼬가 마사오에게 자기의 과거를 말한 건, 여자는 남자에게 한두 번 몸을 허락해도 깨끗이 헤어질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를 것이다.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묘우미는 마사오의 팔을 잡았다.
“나도 이대로 같이 갈래.”
“예?”
“마사오는 놀랐다. 묘우미는 외투를 입고 나왔지만 가방은 시루꼬의 집에 두고온 상태였던 것이다.
“가방은요?”
“괜찮아. 월요일에 갖다 주겠지. 갖다 주지 않아도 별로 곤란할 건 없어.”
“시루꼬 씨가 기다리잖아요?”
“지금 여덟 시 반이지?”
“예.”
“아홉 시에 저 방에 아까 말한 후꾸이 씨와 고가와 씨가 오기로 되어있어.”
“예?”
“그래서 술과 음식을 준비한 거야. 당신을 대접하려는 건 아니었어.”
“놀랍군요.”
“그래서 여덟 시 반에 당신을 보내기로 미리 계획이 된 거야.”
“과연.”
“나도 오늘밤 저 방에서 자기로 되어 있어. 내 짝은 고가와 씨지. 전부터 시루꼬는 그걸 계획하고 있었어. 내가 남자를 체험하고 나니까 이야기가 급속하게 진전된 거지.”
“당신도 그걸 승낙한 셈?”
“응. 고가와 씨는 동료니까 하룻밤 부담 없이 즐기기에는 변하잖아. 그래도 그만두겠어. 도망치고 싶어.”
“왜 마음이 바뀌었죠? 다른 남자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갑자기 묘우미가 마사오에게 와락 안겨왔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얘기를 하면서 점점 확실해졌어. 저 사람들은 오랜 친구야. 당신은 오늘이 두 번째. 그렇지만 내 감정은 전혀 달라.”
“그러면 저 방으로 돌아가 확실하게 말하면 되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내 결론을 알릴 수 있잖아.”
“아니, 당신도 시루꼬 씨에게 나와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해요. 나도 말 할 테니까.”
“그래, 좋아.”
두 사람은 길을 되돌아갔다.
“슬슬 남자들이 올 거야.”
“고가와 씨는 잔뜩 기대하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당신이 체험한 걸 두 사람도 아나요?”
“시루꼬가 말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마음이 내켰을 거라고 기뻐하겠지.”
“그러면 당신에게 반한 건 아니군요.”
“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시루꼬의 방문은 곧 열렸다. 묘우미를 따라 마사오도 들어갔다. 시루꼬는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탁이었다. 둘이 다시 들어서는 걸 보더니 시루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묘우미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나, 이 사람과 돌아갈래. 좀더 사귀기로 했어.”
그대로 방 구석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시루꼬는 턱에 힘을 주며 묘우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곧 그 사람들이 올 텐데?”
“잘 말해 줘.”
“당신이 유혹했지?”
“아니, 마사오가 아니야.”
마사오의 옆에 붙어서며 묘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사오의 팔을 잡으며 젖가슴을 밀차시겼다.
“역시 이 사람은 남이 아니야. 이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팠어.”
“그런 애송이의 어디가 좋아?”
“난 너와 다른 것 같아.”
시루꼬는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변명해 줄 수가 없어.”
“내가 내 자신의 의지로 변심했으니까 넌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돼. 다음에 학교에서 만나면 내가 사과하겠어.”
시루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송이 주제에,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군 너희들의 관계는 억지야.”
“그래도 좋아.”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묘우미는 말했다.
“미안해. 이제 내 일은 걱정하지 마.”
“배신자!”
시루꼬가 그렇게 소리칠 때 묘우미는 문을 닫았다. 시루꼬가 문에다 책을 내던진 모양이었다. 문에 무언가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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