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즐거움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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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눈 속 깊숙이
클레르몽페랑에서 하루, 리용에서 이틀, 그르노블에서 이틀, 그러고나서 파리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서 남서부 지방으로 내려간다. 타르브에서 하루, 포에서 이틀, 툴루즈에서 이틀 일을 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또 지방으로 내려간다... 정말 지겹다.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다. 견딜 수가 없다.
힘들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릴까? 아니면 노조에 가서 하소연을 할까? 하지만 고용 계약서 상에 합의 서명한 일 아닌가, 그러면 잠자코 있어야지.
난 피로해지면 피로해질수록 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플리퍼라 불리는 전자구슬 게임은 보고만 있어도 어지럽고, 하루종일 쌓인 피로를 풀며 밤시간을 즐겁게 보낼만한 프로그램이 딱히 없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를 보는 게 고작이다.
가을의 어느 화요일날 몽뤼송에 갔다. 날씨가 다른 곳 보다 훨씬 더 싸늘했다.
호텔 로비에서 서커스 광고를 보았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류의 공연은 이젠 시골에서밖에 즐길 수가 없다.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빨려들 듯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은 계란 속처럼 꽉 차 있었다. 한없이 계속되던 공굴리기, 줄타기, 곡예, 마술이 마침내 끝나고, 장내방송에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시작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이 힌두 터반을 둘러 위장을 하고 최면술을 펴는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길게 늘어지는 독특한 억양의 말투는 기억에 생생했다.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최면술사의 등장에 신비감을 더했고, 모든 조명이 결막염이 걸리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로 지쳐있는 최면술사의 눈으로 집중되었다. 잠시 후, 우스꽝스런 모습의 최면술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최면에 걸려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간청했다.
관객들은 주저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난데없이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자, 모두들 환호를 터뜨리며 무대 위로 올라간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목을 길게 뽑았다.
최면술이 전혀 위험한 요법이 아님을 역설한 후, 최면술사는 용기있는 지원자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는 사전 의례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물이 될 지원자의 불안해하는 눈 속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최면을 걸기 위해 내뱉은 주문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최면술사는 목청을 돋구어 최면에 걸리는 역을 맡은 사람에게 날씨가 몹시 덥다고 말했다.
피최면자는 곧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고, 더 이상 넘지 말아야 할 선에서 멈췄다. 그러자 극장 안은 관객들이 터뜨린 웃음으로 가득찼다. 최면술사는 자신의 제물을 옷걸이로 만들어 넥타이와 웃옷을 벗어 걸어두고 두번째 경솔한 제물을 찾아 나섰다. 두번째 제물 또한 어김없이 최면의 늪에 빠져들었다.
늘상 해오던 인기 레퍼토리가 계속 이어졌다. 작은 개 한 마리가 무대로 나와 조금 전에 옷걸이로 변한 사람을 가로등으로 여기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고, 새장 속의 새는 새장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상상의 술 시음회도 벌어지고... 관객들은 객석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법석을 떨었다.
최면술사가 동물들의 재롱을 그만두게 하자 달아오르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최면술사는 두 명의 불쌍한 제물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고 부탁하고 프로그램을 끝냈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두 사람의 최면이 풀렸고, 최면에서 깨어난 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늙은 최면술사는 관중들의 박수 갈채에 답하기 위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점심때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최면술사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무대화장을 지운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맙소사, 저렇게 추할 수가! 정말 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술을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는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테이블을 향해 갔다. 그의 출현에 감동한 종업원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어젯밤의 불쾌했던 심사가 다시 되살아났다. 형편없는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그런 어정쩡한 나의 태도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최면술사는 십분쯤 전부터 내 테이블 쪽으로 불손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실 때, 그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내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다시 화가 치밀었고, 나는 그에게 쌀쌀맞게 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웬일인가! 한동안 쌀쌀맞게 굴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우선 그가 이 죽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러고나서 어젯밤 공연에 갔다고 고백하고, 그의 프로그램이 이젠 너무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넌즈시 얘기했다. 그가 사용한 가는 철선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에는 너무 굵었음을 지적하고, 공모자들과 어떤 식으로 짜 맞추는지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기극에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도 표시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최면술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가 말을 마치고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음이 흘리며, 더 조리있게 평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을 삼켰다.
나는 그를 화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독설을 교묘하게 견뎌내었고, 그것이 나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의 도발을 받아들이는 그의 침착함에 흥분이 극도에 달한 나는 체계적으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조롭고 즐기는 기색의 목소리로 말을 받았을 때, 나의 신경들은 비참하게 허물어졌다. 그의 주름살 잡힌 입의 움직임만 눈에 들어 올 뿐, 그가 뱉어 내는 단어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피로하기 때문일 거야.
낮잠을 다 자다니! 저녁나절까지 나른해지기 때문에 좀처럼 낮잠을 자지 않던 내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침대 꼬락서니는 또 무어람! 엉망진창이잖아!
옷은 또 어떻게 벗어 두었나! 여기저기 땅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쳐 놓지 않았나!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장님께 말씀드려야지.
진정으로 내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28. 소파 위의 비둘기
나이 서른에, 그녀는 두 번 이혼했고, 세 명의 애인을 갈아치웠으며, 직장을 네 번 옮겼다. 그녀의 청순하고 귀여운 얼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남자들도 그녀가 자기 주장을 펴기 시작하면 도망 가버리거나 차버리기가 일쑤였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주로 영감을 얻은 그녀의 인생경험은 자신의 닫힌 세계 속에서 사랑의 달콤함을 찾아보다 절망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녀는 다가오는 현실에 자신의 허황한 꿈을 접목시켜 보려고 안달만 하다가, 그 긴 세월을 다 허비했다.
같이 살았던 남자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순진함에 어떤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매사에 과격하고 단호한 의사를 제시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가 멍청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때때로 교활한 여우로 표변하여 재주를 부릴 줄도 알았다. 남자의 관심이 약해지면,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행동을 조심했다. 지각없는 언사까지 고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소와 애교로 다정함의 강도를 높여 파국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계략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또다른 꾀를 부렸다. 보헤미안 처녀에서 빈틈없는 살림꾼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설거지 걸이를 싱크대에 나뒹굴게 내버려 두는 일이 없고, 마른 빨래는 즉각 다림질을 했다. 얼마나 씻고, 닦고, 문지르고, 광내고 하던지 집안 구석구석 어느 한 곳 번쩍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 저녁, 기분이 울적해져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멀어져가는 배은망덕한 남자에게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결별의 순간이 와, 이혼 중재 판사 앞에 설 때면, 그녀는 나무랄데 없는 주부였고, 착실한 아내였다. 그런 여자를 버리고 가는 남자만 죽일 놈이 되었다.
직장에서의 행동도 별 차이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상사들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다가 급기야
독단으로 특권을 행사하고 전혀 거리낌없이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녀는 해고를 당해도 도대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버림만 받았다고 화를 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직업 재교육 덕택으로, 경리일을 미련없이 그만두고 향수 판매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녀는 새 직장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자신했다. 우선 좋은 것은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등뒤에서 감시하고 명령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선전 실기 사원으로 고용된 그녀는 향수에 절은 가방을 들고 프랑스 전역을 순례하면서 냄새로 남자를 사로잡기 원하는 여자들에게 향수 사용법을 가르쳤다.
물론 일은 힘들었다.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했고, 하루 여덟 시간씩 서 있어야 했으며, 실비 식사에, 불편한 싸구려 호텔 이용 등등, 피곤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서른 다섯이라는 나이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한 올씩 생기기 시작하는 흰머리가 신호였다. 백마를 탄 왕자를 찾아헤메다,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세 번 애인에게 버림을 받았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될 수 없었다.
온갖 기묘한 일이 다 벌어지는 수도 파리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그녀는 큰일을 한 번 저질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월요일인 어느 봄날이었다. 파리의 카페들은 길가에 의자와 테이블을 내놓고 있었다. 그녀는 번화가의 한 노천 카페에서, 버드나무로 짠 의자에 다리를 꼬고 깊숙히 눌러 앉아 젖은 입술로 커피를 마셨다.
십오분쯤 지났을까, 비둘기가 한 마리 나타났다. 물들인 듯한 짙은 갈색 머리에 오십대의 일그러진 체형을 한 외국 남자였다. 그녀는 옆 테이블에 앉은 그 남자를 몰래 훔쳐 보았다. 근사한 캐시미어 양복을 입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무게가 꽤 나가 보이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결혼 반지는 아니었다.
그가 갸르송을 불러
차를 주문했다. 그 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는 무심결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떨구고 빈잔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마드무와젤께서도 커피를 한 잔 더 하실 의향이 있으신 거죠?"
"그래, 두 잔."
그가 돌아서 가고 있는 갸르송의 뒤꼭지에다 대고 외쳤다.
일은 참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남자가 좋은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과 함께 시작한 대화 속에 그녀가 부담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계속 서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미리암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일이 있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운명이 바뀌고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려는 순간에!
그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미리암은 이십초 정도 뜸을 들이다, 바로 그날 저녁으로 약속을 정하고 보도 위로 활기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속으로는 일이 빨리 결정된 것을 한없이 기뻐하면서.
그는 최고급 레스토랑 푸케츠를 약속장소로 정했다. 만남의 장소로는 그저 그만 아닌가?
오후 내내, 미리암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국인처럼 보이는 그 남자를 영화에서처럼 멋지게 유혹할 계략만 머리 속에 가득했다.
향수 매장을 빠져 나오기 전에, 그녀는 검푸른 색조로 야하게 화장을 했다. 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짙은 향수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튼, 화장은 그녀의 전문분야였다. 보통 남자라면 녹아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입맞춤을 하며 우아하게 그녀를 맞았다.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진한 향수 냄새 때문에 그가 재채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변덕스런 날씨 때문이라고 둘러댔고, 그 덕분에
대화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아페리티프를 마시는 동안 니콜라가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녀는 실망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대사관의 무슨 무슨 참사관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직명이었다.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녀야 하는 고달픈 외교관 생활에 대해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지방을 돌아 다니는 게 고작인 그녀로서는 내세울 것이 없었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니콜라는 능란한 말솜씨로 쉬임없이 이야기했다. 위스키를 두 잔째 비웠을 때, 시간은 이미 한 시간 반이 흘러가 있었고, 그제서야 그는 그녀의 배고픔을 걱정했다. 그녀는 패션모델들처럼 각선미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는 먹지 않는다고 교태를 부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미리암의 직업에 대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걸까? 혹시 무슨 오해라도...? 다행히도 그가 그녀의 직업을 물어왔다. 그녀가 대답 중에 외로움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그가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외로움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 보아하니 마드무와젤도 외로움과 무관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말이 틀리는가? 그녀가 동의를 하듯 눈을 깜빡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렸다.
"감히 여쭙습니다. 이곳은 너무 침울한 느낌이 듭니다. 좀더 안락한 장소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는지요. 예를 들면... 철갑상어 알젖에 곁들여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곳, 그래요... 물론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억지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죠르주 생크가에 제 숙소가 있습니다. 넓은 방에 없는 게 없습니다. 단지 여인의 향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요. 제 의도를 곡해하진 마세요. 그냥 잠시 들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파리라는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감미로운 우정을 꿈속에서나마 그려보고 싶어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승낙해
주세요, 제발, 저의 제안이 그랬던 것처럼 간단명료하게."
이렇게 빨리! 바로 승낙을 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그가 참을성 없이 제안을 거두어 들인다면?
"니콜라,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당신의 제안, 받아 들이겠어요. 하지만 저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진 마세요... 내일 아침, 초췌한 모습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야간 경비원이 그를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니콜라는 특급호텔에 빈번히 드나드는 사람답게 정중한 말투로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그녀에게 권했다. 니콜라가 고국, 그리스에 자신 소유의 배가 몇 척 있다고 얘기하자, 그의 재력에 매혹된 그녀는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입 속에 안주로 내놓은 땅콩을 기계적으로 계속 쑤셔 넣었다. 그녀는 몸매 관리를 위해 음식을 가려 먹는다고 얘기했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갸르송이 식탁을 차리고, 요리가 실린 수레를 식탁 가까이에 끌어다 놓은 다음, 방을 나갔다. 니콜라가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자연스럽게 모방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은으로 된 식기 뚜껑을 열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는 그의 세련된 손놀림은 황홀하기만 할 뿐, 따라하기가 힘들었다. 상류 사회의 식사 예절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식사는 거의 형벌에 가까웠다. 니콜라가 능란한 화술로 내내 즐겁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녀는 적어도 이 분야에서 만은 그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귓전을 맴
도는 그의 속삭임을 그녀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지나친 알콜과 긴장이 그녀를 기진맥진하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침대로 가,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사랑놀이에 있어서도 자신이 아직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용하게 웃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짙은 안개 속처럼 흐릿한 의식 속에서였다.
그녀는 열시쯤 일어났다. 매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맨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곧바로 지난 밤의 일이 기억나, 이제 향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베개 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사랑스러운 미리암, 술이 깰 때까지 푹 자요. 얘기해 두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요. 당신에게 키스를 드립니다, 니콜라."
어쩜 이렇게 멋있을 수가! 실망하게 행동하진 않았겠지. 그녀가 혼자 말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식기들이 눈에 띄었다. 지난밤의 포근한 기억이 되살아나 눈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식기를 수레에 차곡차곡 쌓은 후에 수레를 욕실로 끌고 갔다.
세면대에 식기를 올려놓고 설거지를 하려 했으나 세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욕조 위의 거품 비누밖에 없었다. 그녀는 특급 호텔의 설비가 이렇게 형편없을 수 있나 하고 의아해했다. 무거운 은식기가 태반이라 수도꼭지 아래 옮겨 놓기도 힘들었고, 두꺼운 목욕 수건으로 닦다보니 유리잔에는 보풀이 묻었다. 대충 씻은 식기는 수레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가 뭐라 그러면 어떡하나!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여자의
마음을 그토록 세심하게 읽어내는 그가 잔소리야 하겠냐만,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가사 일에 있어서 만큼은 항상 칭찬 받기를 원하는 그녀였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 어질러진 곳이 없는지 방안을 꼼꼼히 살펴본 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매장에 가야 하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새롭고 찬란한 미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거리를 쏘다녔다. 공원 벤치에 앉아 공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허기가 져 속이 쓰렸다. 피자를 사먹고 커피를 달게 마셨다. 핸드백에서 간밤의 애인이 남긴 쪽지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가야 했던 그가 경황이 없어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분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 그래!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면 되겠지.
죠르주 생크 호텔 로비에서 두 시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프런트로 가서 혹시 자기에게 남겨진 메모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카운터의 남자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 몇 시쯤 니콜라씨가 들어오시는지 아세요?"
"니콜라씨요?"
"그래요, 547호실 손님." 니콜라라는 이름이 프런트 직원의 귀에 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직원이 투숙객 명단을 조회한 뒤, 대답했다.
"오! 아지노타스씨의 예약은 어젯밤으로 끝났는데요."
클레르몽페랑에서 하루, 리용에서 이틀, 그르노블에서 이틀, 그러고나서 파리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서 남서부 지방으로 내려간다. 타르브에서 하루, 포에서 이틀, 툴루즈에서 이틀 일을 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또 지방으로 내려간다... 정말 지겹다.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다. 견딜 수가 없다.
힘들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릴까? 아니면 노조에 가서 하소연을 할까? 하지만 고용 계약서 상에 합의 서명한 일 아닌가, 그러면 잠자코 있어야지.
난 피로해지면 피로해질수록 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플리퍼라 불리는 전자구슬 게임은 보고만 있어도 어지럽고, 하루종일 쌓인 피로를 풀며 밤시간을 즐겁게 보낼만한 프로그램이 딱히 없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를 보는 게 고작이다.
가을의 어느 화요일날 몽뤼송에 갔다. 날씨가 다른 곳 보다 훨씬 더 싸늘했다.
호텔 로비에서 서커스 광고를 보았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류의 공연은 이젠 시골에서밖에 즐길 수가 없다.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빨려들 듯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은 계란 속처럼 꽉 차 있었다. 한없이 계속되던 공굴리기, 줄타기, 곡예, 마술이 마침내 끝나고, 장내방송에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시작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이 힌두 터반을 둘러 위장을 하고 최면술을 펴는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길게 늘어지는 독특한 억양의 말투는 기억에 생생했다.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최면술사의 등장에 신비감을 더했고, 모든 조명이 결막염이 걸리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로 지쳐있는 최면술사의 눈으로 집중되었다. 잠시 후, 우스꽝스런 모습의 최면술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최면에 걸려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간청했다.
관객들은 주저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난데없이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자, 모두들 환호를 터뜨리며 무대 위로 올라간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목을 길게 뽑았다.
최면술이 전혀 위험한 요법이 아님을 역설한 후, 최면술사는 용기있는 지원자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는 사전 의례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물이 될 지원자의 불안해하는 눈 속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최면을 걸기 위해 내뱉은 주문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최면술사는 목청을 돋구어 최면에 걸리는 역을 맡은 사람에게 날씨가 몹시 덥다고 말했다.
피최면자는 곧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고, 더 이상 넘지 말아야 할 선에서 멈췄다. 그러자 극장 안은 관객들이 터뜨린 웃음으로 가득찼다. 최면술사는 자신의 제물을 옷걸이로 만들어 넥타이와 웃옷을 벗어 걸어두고 두번째 경솔한 제물을 찾아 나섰다. 두번째 제물 또한 어김없이 최면의 늪에 빠져들었다.
늘상 해오던 인기 레퍼토리가 계속 이어졌다. 작은 개 한 마리가 무대로 나와 조금 전에 옷걸이로 변한 사람을 가로등으로 여기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고, 새장 속의 새는 새장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상상의 술 시음회도 벌어지고... 관객들은 객석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법석을 떨었다.
최면술사가 동물들의 재롱을 그만두게 하자 달아오르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최면술사는 두 명의 불쌍한 제물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고 부탁하고 프로그램을 끝냈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두 사람의 최면이 풀렸고, 최면에서 깨어난 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늙은 최면술사는 관중들의 박수 갈채에 답하기 위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점심때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최면술사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무대화장을 지운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맙소사, 저렇게 추할 수가! 정말 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술을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는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테이블을 향해 갔다. 그의 출현에 감동한 종업원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어젯밤의 불쾌했던 심사가 다시 되살아났다. 형편없는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그런 어정쩡한 나의 태도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최면술사는 십분쯤 전부터 내 테이블 쪽으로 불손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실 때, 그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내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다시 화가 치밀었고, 나는 그에게 쌀쌀맞게 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웬일인가! 한동안 쌀쌀맞게 굴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우선 그가 이 죽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그러고나서 어젯밤 공연에 갔다고 고백하고, 그의 프로그램이 이젠 너무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넌즈시 얘기했다. 그가 사용한 가는 철선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에는 너무 굵었음을 지적하고, 공모자들과 어떤 식으로 짜 맞추는지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기극에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도 표시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최면술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가 말을 마치고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음이 흘리며, 더 조리있게 평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을 삼켰다.
나는 그를 화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독설을 교묘하게 견뎌내었고, 그것이 나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의 도발을 받아들이는 그의 침착함에 흥분이 극도에 달한 나는 체계적으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조롭고 즐기는 기색의 목소리로 말을 받았을 때, 나의 신경들은 비참하게 허물어졌다. 그의 주름살 잡힌 입의 움직임만 눈에 들어 올 뿐, 그가 뱉어 내는 단어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피로하기 때문일 거야.
낮잠을 다 자다니! 저녁나절까지 나른해지기 때문에 좀처럼 낮잠을 자지 않던 내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침대 꼬락서니는 또 무어람! 엉망진창이잖아!
옷은 또 어떻게 벗어 두었나! 여기저기 땅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쳐 놓지 않았나!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장님께 말씀드려야지.
진정으로 내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28. 소파 위의 비둘기
나이 서른에, 그녀는 두 번 이혼했고, 세 명의 애인을 갈아치웠으며, 직장을 네 번 옮겼다. 그녀의 청순하고 귀여운 얼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남자들도 그녀가 자기 주장을 펴기 시작하면 도망 가버리거나 차버리기가 일쑤였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주로 영감을 얻은 그녀의 인생경험은 자신의 닫힌 세계 속에서 사랑의 달콤함을 찾아보다 절망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녀는 다가오는 현실에 자신의 허황한 꿈을 접목시켜 보려고 안달만 하다가, 그 긴 세월을 다 허비했다.
같이 살았던 남자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순진함에 어떤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매사에 과격하고 단호한 의사를 제시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가 멍청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때때로 교활한 여우로 표변하여 재주를 부릴 줄도 알았다. 남자의 관심이 약해지면,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행동을 조심했다. 지각없는 언사까지 고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소와 애교로 다정함의 강도를 높여 파국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계략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또다른 꾀를 부렸다. 보헤미안 처녀에서 빈틈없는 살림꾼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설거지 걸이를 싱크대에 나뒹굴게 내버려 두는 일이 없고, 마른 빨래는 즉각 다림질을 했다. 얼마나 씻고, 닦고, 문지르고, 광내고 하던지 집안 구석구석 어느 한 곳 번쩍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 저녁, 기분이 울적해져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멀어져가는 배은망덕한 남자에게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결별의 순간이 와, 이혼 중재 판사 앞에 설 때면, 그녀는 나무랄데 없는 주부였고, 착실한 아내였다. 그런 여자를 버리고 가는 남자만 죽일 놈이 되었다.
직장에서의 행동도 별 차이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상사들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다가 급기야
독단으로 특권을 행사하고 전혀 거리낌없이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녀는 해고를 당해도 도대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뼈빠지게 일을 하고도 버림만 받았다고 화를 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직업 재교육 덕택으로, 경리일을 미련없이 그만두고 향수 판매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녀는 새 직장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자신했다. 우선 좋은 것은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등뒤에서 감시하고 명령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선전 실기 사원으로 고용된 그녀는 향수에 절은 가방을 들고 프랑스 전역을 순례하면서 냄새로 남자를 사로잡기 원하는 여자들에게 향수 사용법을 가르쳤다.
물론 일은 힘들었다.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했고, 하루 여덟 시간씩 서 있어야 했으며, 실비 식사에, 불편한 싸구려 호텔 이용 등등, 피곤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서른 다섯이라는 나이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한 올씩 생기기 시작하는 흰머리가 신호였다. 백마를 탄 왕자를 찾아헤메다,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세 번 애인에게 버림을 받았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될 수 없었다.
온갖 기묘한 일이 다 벌어지는 수도 파리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그녀는 큰일을 한 번 저질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월요일인 어느 봄날이었다. 파리의 카페들은 길가에 의자와 테이블을 내놓고 있었다. 그녀는 번화가의 한 노천 카페에서, 버드나무로 짠 의자에 다리를 꼬고 깊숙히 눌러 앉아 젖은 입술로 커피를 마셨다.
십오분쯤 지났을까, 비둘기가 한 마리 나타났다. 물들인 듯한 짙은 갈색 머리에 오십대의 일그러진 체형을 한 외국 남자였다. 그녀는 옆 테이블에 앉은 그 남자를 몰래 훔쳐 보았다. 근사한 캐시미어 양복을 입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무게가 꽤 나가 보이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결혼 반지는 아니었다.
그가 갸르송을 불러
차를 주문했다. 그 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는 무심결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떨구고 빈잔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마드무와젤께서도 커피를 한 잔 더 하실 의향이 있으신 거죠?"
"그래, 두 잔."
그가 돌아서 가고 있는 갸르송의 뒤꼭지에다 대고 외쳤다.
일은 참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남자가 좋은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과 함께 시작한 대화 속에 그녀가 부담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계속 서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미리암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일이 있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운명이 바뀌고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려는 순간에!
그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미리암은 이십초 정도 뜸을 들이다, 바로 그날 저녁으로 약속을 정하고 보도 위로 활기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속으로는 일이 빨리 결정된 것을 한없이 기뻐하면서.
그는 최고급 레스토랑 푸케츠를 약속장소로 정했다. 만남의 장소로는 그저 그만 아닌가?
오후 내내, 미리암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국인처럼 보이는 그 남자를 영화에서처럼 멋지게 유혹할 계략만 머리 속에 가득했다.
향수 매장을 빠져 나오기 전에, 그녀는 검푸른 색조로 야하게 화장을 했다. 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짙은 향수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튼, 화장은 그녀의 전문분야였다. 보통 남자라면 녹아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입맞춤을 하며 우아하게 그녀를 맞았다.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진한 향수 냄새 때문에 그가 재채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변덕스런 날씨 때문이라고 둘러댔고, 그 덕분에
대화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아페리티프를 마시는 동안 니콜라가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녀는 실망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대사관의 무슨 무슨 참사관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직명이었다.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녀야 하는 고달픈 외교관 생활에 대해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지방을 돌아 다니는 게 고작인 그녀로서는 내세울 것이 없었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니콜라는 능란한 말솜씨로 쉬임없이 이야기했다. 위스키를 두 잔째 비웠을 때, 시간은 이미 한 시간 반이 흘러가 있었고, 그제서야 그는 그녀의 배고픔을 걱정했다. 그녀는 패션모델들처럼 각선미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는 먹지 않는다고 교태를 부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미리암의 직업에 대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걸까? 혹시 무슨 오해라도...? 다행히도 그가 그녀의 직업을 물어왔다. 그녀가 대답 중에 외로움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그가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외로움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 보아하니 마드무와젤도 외로움과 무관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말이 틀리는가? 그녀가 동의를 하듯 눈을 깜빡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렸다.
"감히 여쭙습니다. 이곳은 너무 침울한 느낌이 듭니다. 좀더 안락한 장소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는지요. 예를 들면... 철갑상어 알젖에 곁들여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곳, 그래요... 물론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억지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죠르주 생크가에 제 숙소가 있습니다. 넓은 방에 없는 게 없습니다. 단지 여인의 향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요. 제 의도를 곡해하진 마세요. 그냥 잠시 들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파리라는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감미로운 우정을 꿈속에서나마 그려보고 싶어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승낙해
주세요, 제발, 저의 제안이 그랬던 것처럼 간단명료하게."
이렇게 빨리! 바로 승낙을 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그가 참을성 없이 제안을 거두어 들인다면?
"니콜라,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당신의 제안, 받아 들이겠어요. 하지만 저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진 마세요... 내일 아침, 초췌한 모습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야간 경비원이 그를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니콜라는 특급호텔에 빈번히 드나드는 사람답게 정중한 말투로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그녀에게 권했다. 니콜라가 고국, 그리스에 자신 소유의 배가 몇 척 있다고 얘기하자, 그의 재력에 매혹된 그녀는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입 속에 안주로 내놓은 땅콩을 기계적으로 계속 쑤셔 넣었다. 그녀는 몸매 관리를 위해 음식을 가려 먹는다고 얘기했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갸르송이 식탁을 차리고, 요리가 실린 수레를 식탁 가까이에 끌어다 놓은 다음, 방을 나갔다. 니콜라가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자연스럽게 모방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은으로 된 식기 뚜껑을 열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는 그의 세련된 손놀림은 황홀하기만 할 뿐, 따라하기가 힘들었다. 상류 사회의 식사 예절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식사는 거의 형벌에 가까웠다. 니콜라가 능란한 화술로 내내 즐겁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녀는 적어도 이 분야에서 만은 그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귓전을 맴
도는 그의 속삭임을 그녀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지나친 알콜과 긴장이 그녀를 기진맥진하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침대로 가,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사랑놀이에 있어서도 자신이 아직 많은 것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용하게 웃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짙은 안개 속처럼 흐릿한 의식 속에서였다.
그녀는 열시쯤 일어났다. 매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맨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곧바로 지난 밤의 일이 기억나, 이제 향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베개 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사랑스러운 미리암, 술이 깰 때까지 푹 자요. 얘기해 두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요. 당신에게 키스를 드립니다, 니콜라."
어쩜 이렇게 멋있을 수가! 실망하게 행동하진 않았겠지. 그녀가 혼자 말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식기들이 눈에 띄었다. 지난밤의 포근한 기억이 되살아나 눈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식기를 수레에 차곡차곡 쌓은 후에 수레를 욕실로 끌고 갔다.
세면대에 식기를 올려놓고 설거지를 하려 했으나 세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욕조 위의 거품 비누밖에 없었다. 그녀는 특급 호텔의 설비가 이렇게 형편없을 수 있나 하고 의아해했다. 무거운 은식기가 태반이라 수도꼭지 아래 옮겨 놓기도 힘들었고, 두꺼운 목욕 수건으로 닦다보니 유리잔에는 보풀이 묻었다. 대충 씻은 식기는 수레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가 뭐라 그러면 어떡하나!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여자의
마음을 그토록 세심하게 읽어내는 그가 잔소리야 하겠냐만,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가사 일에 있어서 만큼은 항상 칭찬 받기를 원하는 그녀였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 어질러진 곳이 없는지 방안을 꼼꼼히 살펴본 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매장에 가야 하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새롭고 찬란한 미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거리를 쏘다녔다. 공원 벤치에 앉아 공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허기가 져 속이 쓰렸다. 피자를 사먹고 커피를 달게 마셨다. 핸드백에서 간밤의 애인이 남긴 쪽지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가야 했던 그가 경황이 없어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분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 그래!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면 되겠지.
죠르주 생크 호텔 로비에서 두 시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프런트로 가서 혹시 자기에게 남겨진 메모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카운터의 남자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 몇 시쯤 니콜라씨가 들어오시는지 아세요?"
"니콜라씨요?"
"그래요, 547호실 손님." 니콜라라는 이름이 프런트 직원의 귀에 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직원이 투숙객 명단을 조회한 뒤, 대답했다.
"오! 아지노타스씨의 예약은 어젯밤으로 끝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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