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하우스14, 15
페이지 정보
본문
14. 협박
왜 난데 없이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고 야단이지? 내가 언제 그런 부탁을 했던가? 그리고 카섹스는 뭐야? 내가 언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너와 섹스를 했어? 내가 변태야? 그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보겠어?"
오동시는 박유미의 쓸데없이 나서는 건방진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질대로 한다면 당장에 해고해 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사실 박유미가 없으면 당장에 곤란을 겪는 것은 그였다. 그녀와의 섹스 문제 따위는 치워두고라도 박유미는 이제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자이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녀가 꼭 필요했다.
"사장님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도움을 주려다가 그만...... 저는 다만 사장님을 생각해서......."
"다음부터는 쓸데없이 내 일에 끼여들지 말아. 한 번 더 그런 수작을 부리면 혼을 내줄 줄 알아."
"아... 알았어요."
눈물을 글썽이는 박유미를 보자 오동시는 마음이 조금은 약해져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도 내가 일본인을 죽인 것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장님이 그럴 리가 있나요? 사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살인같은 걸 하겠어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도 안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아. 가서 일 봐."
오동시는 유미를 자리로 보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형사들 때문에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익명 메일을 열었다.
미스트맨(mystman)님께
미스트맨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세번째의 메일을 드리는군요. 제가 이렇게 메일을 드리는 건 미스트맨님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수지 때문이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저 역시 몹시 사랑스런 수지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메일을 드리고 있습니다. 수지의 불행은 바로 미스트맨님과 저의 불행이 아닐런지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수지의 불행이 점차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습니다. 수지의 불행은 곧 저의 슬픔이기 때문에 저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미스트맨님, 아무래도 우리의 사랑스런 수지를 불행에서 건져내려면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미스트맨님께는 그리 큰 돈이 안되겠지만 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어서 수지의 불행을 막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미스트맨님, 또 메일을 드리겠습니다.
익명인 드림
역시 영문으로 온 익명 메일에는 돈을 주지 않으면 수지를 해치겠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누군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쓰다 히사오? 그놈이?
호다리 세이이찌인가 하는 놈을 내세웠던 마쓰다 히사오 그놈의 목적이 결국은 돈이란 말인가?
오동시는 천천히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지난 번의 그래픽을 포함한 익명 메일을 보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우선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인터넷 등의 통신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오동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자는 마쓰다 히사오 라는 알 수 없는 녀석 같다. 녀석은 속옷 수집을 핑계로 나에게 접근을 한 것이고 어떠한 이유에선지 호다리 세이이찌를 앞세워 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나를 협박한다?
그런데 마쓰다 히사오란 자는 정말 존재하는 녀석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쓰다 히사오, 난 네 놈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죽여버리고 말 거야. 그 누구도 사랑스런 나의 천사는 절대 건드릴 수 없어!
15. 스타로드에서 이별
김포공항에 도착한 오동시와 수지는 입을 다문 채 청사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공항으로 오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이별의 슬픔 때문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허름한 청바지에 물이 빠진 청갈색 티셔츠를 입은 수지는 롱코트의 오동시와 보행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한 템포는 늦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차양이 넓은 하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갈색으로 그을린 아름답고도 지적인 얼굴을 절반쯤은 가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큰 키에 늘씬한 그녀를 사람들은 한 번씩은 뒤돌아보았지만 그녀가 수퍼모델 수지 모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3시 30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기를 탑승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했다.
여종업원이 커피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가자 오동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는 이별이군요...."
"그래요......."
수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나직한 한숨처럼 말했다. 그녀는 차라리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으리라는 유행가 가사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불쌍한 남자를 이대로 두고 떠나갈 생각을 하자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동시 씨, 제가 떠나더라도 잘 살아가셔야 해요. 아니 동시 씨는 그럴 자신이 있죠? 제게 약속을 해주세요. 열심히 씩씩하게 살아가겠다고요."
오동시는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지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내 걱정은 조금도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동시 씨. 저는 동시 씨가 씩씩하게 살아가셔야만 외국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보다 수지 씨는 외국에서도 몸조심하십시오. 가급적이면 항상 보디가드를 채용해서 자신을 지키세요."
"보디가드라구요? 꼭 필요한 때에는 보디가드를 쓰기는 하지만 항상 보디가드를 쓴다는 건 낭비예요."
"아닙니다. 수지 씨는 이제 신디 클로포드와 클라우디아 쉬퍼 같은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특급 수퍼모델입니다. 이제 지나친 열성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요즘의 광적인 팬들 중에서는 공격성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거든요. 그런 팬들은 무모하고 단순하고 또 집요해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무서워요, 동시 씨.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수지는 정말 겁이 나는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내 말대로 보디가드를 채용하세요."
오동시는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저는 주변에서 간섭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거든요. 게다가 경호원들은 대부분 남자잖아요. 그런 사람 서넛이 늘 주위에 붙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답답해져요."
오동시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이 수지를 위해서 그가 직접 경호원을 채용해야 할 것 같았다.
수지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만약 수지에게 익명인이 보낸 메일에서처럼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동시 씨가 저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잊지 못할 거예요......."
수지는 오동시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그러자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남자와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전해졌다. 이 불쌍한 남자를 이대로 이 땅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간다면 짧은 다리의 이 남자는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너무나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팔목에 은색으로 감겨 있는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2시면 충분해...!
그녀는 오동시의 손을 덥썩 잡고 말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동시 씨."
"왜 그러죠?"
영문을 모르면서도 오동시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했다.
"우리 지금 다시 차로 돌아가요."
"왜요? 잊은 거라도 있습니까?"
"네, 잊은 게 있어요. 저는 잊은 걸 꼭 가져가야 하거든요. 어서 나를 따라오세요."
두 사람은 다시 레스토랑을 나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러자 그들을 따라가던 한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는 무슨 일인가 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병태 형사와 노미 형사였다. 두 사람은 오동시가 오피스텔을 떠날 때부터 미행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걸까요?"
"글쎄......그나저나 노형사는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아직 못알아 낸 거야?"
"모자를 워낙 깊게 눌러쓰고 있으니까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어야죠. 분명히 모델이나 뭐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유명한 사람 같기는 한데 잘 알 수가 없어요."
노미는 오동시와 동행한 여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선뜻 머리속으로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얼굴 윤곽으로 볼 때는 눈에 익은 얼굴인데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분명히 출국을 할 게 뻔한데 출국금지를 시켜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이형사는 답답해서인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오동시가 유력한 용의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행한 여자까지 용의자 취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잔인한 여자 살인범도 엄청나게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돼. 얼마 전에도 정부를 시켜서 남편을 잔인하게 토막살인한 여자 사건도 있었잖아?"
"알았어요, 알았어. 잔인한 여자도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여자는 아닌 것 같아요."
"흠, 자신 있게 말하는군."
이형사는 주차장 쪽으로 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오동시의 스타로드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오동시는 차문을 열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여자는 모자를 벗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올렸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참으로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게다가 단순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부족한 단아한 기품까지 있었다. 그러자 왠지 노미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노미는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알아냈어요, 선배님, 저 여자는 수퍼모델 수지 모예요."
"수지 모라면 신디나 클라우디아 같은 수퍼모델?"
이형사도 남자라서 들은 풍월은 있으며 늘씬한 초특급 수퍼모델이 누구인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수퍼모델을 보고 있는 거라구요."
"그 말 정말이야? 아니 제대로 본 거야?"
"틀림없어요. 아까부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틀림없이 수지 모예요."
그녀는 수지 모가 틀림이 없다고 단정을 내렸다.
오동시와 수지는 이윽고 스타로드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호다리 세이이찌가 죽은 날 그 시간에 차 안에서 섹스를 했다는 박유미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박유미가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차문은 열리지도 않으면서 창문의 커텐이 쳐졌다. 그런데 커텐을 친 사람은 수지 모였다.
"카섹스잖아요?"
노미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왜 해보고 싶어?"
"뭐라구요?"
노미는 이형사의 어깨를 후려치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인이 생기면 고려해 볼 거라구요."
왜 난데 없이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고 야단이지? 내가 언제 그런 부탁을 했던가? 그리고 카섹스는 뭐야? 내가 언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너와 섹스를 했어? 내가 변태야? 그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보겠어?"
오동시는 박유미의 쓸데없이 나서는 건방진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질대로 한다면 당장에 해고해 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사실 박유미가 없으면 당장에 곤란을 겪는 것은 그였다. 그녀와의 섹스 문제 따위는 치워두고라도 박유미는 이제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자이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녀가 꼭 필요했다.
"사장님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도움을 주려다가 그만...... 저는 다만 사장님을 생각해서......."
"다음부터는 쓸데없이 내 일에 끼여들지 말아. 한 번 더 그런 수작을 부리면 혼을 내줄 줄 알아."
"아... 알았어요."
눈물을 글썽이는 박유미를 보자 오동시는 마음이 조금은 약해져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도 내가 일본인을 죽인 것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장님이 그럴 리가 있나요? 사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살인같은 걸 하겠어요?"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도 안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아. 가서 일 봐."
오동시는 유미를 자리로 보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형사들 때문에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익명 메일을 열었다.
미스트맨(mystman)님께
미스트맨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세번째의 메일을 드리는군요. 제가 이렇게 메일을 드리는 건 미스트맨님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수지 때문이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저 역시 몹시 사랑스런 수지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메일을 드리고 있습니다. 수지의 불행은 바로 미스트맨님과 저의 불행이 아닐런지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수지의 불행이 점차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습니다. 수지의 불행은 곧 저의 슬픔이기 때문에 저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미스트맨님, 아무래도 우리의 사랑스런 수지를 불행에서 건져내려면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미스트맨님께는 그리 큰 돈이 안되겠지만 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어서 수지의 불행을 막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미스트맨님, 또 메일을 드리겠습니다.
익명인 드림
역시 영문으로 온 익명 메일에는 돈을 주지 않으면 수지를 해치겠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누군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쓰다 히사오? 그놈이?
호다리 세이이찌인가 하는 놈을 내세웠던 마쓰다 히사오 그놈의 목적이 결국은 돈이란 말인가?
오동시는 천천히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지난 번의 그래픽을 포함한 익명 메일을 보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우선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인터넷 등의 통신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오동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자는 마쓰다 히사오 라는 알 수 없는 녀석 같다. 녀석은 속옷 수집을 핑계로 나에게 접근을 한 것이고 어떠한 이유에선지 호다리 세이이찌를 앞세워 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나를 협박한다?
그런데 마쓰다 히사오란 자는 정말 존재하는 녀석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쓰다 히사오, 난 네 놈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죽여버리고 말 거야. 그 누구도 사랑스런 나의 천사는 절대 건드릴 수 없어!
15. 스타로드에서 이별
김포공항에 도착한 오동시와 수지는 입을 다문 채 청사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공항으로 오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이별의 슬픔 때문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허름한 청바지에 물이 빠진 청갈색 티셔츠를 입은 수지는 롱코트의 오동시와 보행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한 템포는 늦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차양이 넓은 하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갈색으로 그을린 아름답고도 지적인 얼굴을 절반쯤은 가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큰 키에 늘씬한 그녀를 사람들은 한 번씩은 뒤돌아보았지만 그녀가 수퍼모델 수지 모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3시 30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기를 탑승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했다.
여종업원이 커피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가자 오동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는 이별이군요...."
"그래요......."
수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나직한 한숨처럼 말했다. 그녀는 차라리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으리라는 유행가 가사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불쌍한 남자를 이대로 두고 떠나갈 생각을 하자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동시 씨, 제가 떠나더라도 잘 살아가셔야 해요. 아니 동시 씨는 그럴 자신이 있죠? 제게 약속을 해주세요. 열심히 씩씩하게 살아가겠다고요."
오동시는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지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내 걱정은 조금도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동시 씨. 저는 동시 씨가 씩씩하게 살아가셔야만 외국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보다 수지 씨는 외국에서도 몸조심하십시오. 가급적이면 항상 보디가드를 채용해서 자신을 지키세요."
"보디가드라구요? 꼭 필요한 때에는 보디가드를 쓰기는 하지만 항상 보디가드를 쓴다는 건 낭비예요."
"아닙니다. 수지 씨는 이제 신디 클로포드와 클라우디아 쉬퍼 같은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특급 수퍼모델입니다. 이제 지나친 열성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요즘의 광적인 팬들 중에서는 공격성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거든요. 그런 팬들은 무모하고 단순하고 또 집요해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무서워요, 동시 씨.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수지는 정말 겁이 나는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내 말대로 보디가드를 채용하세요."
오동시는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저는 주변에서 간섭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거든요. 게다가 경호원들은 대부분 남자잖아요. 그런 사람 서넛이 늘 주위에 붙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답답해져요."
오동시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이 수지를 위해서 그가 직접 경호원을 채용해야 할 것 같았다.
수지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만약 수지에게 익명인이 보낸 메일에서처럼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동시 씨가 저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잊지 못할 거예요......."
수지는 오동시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었다. 그러자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남자와 이렇게 헤어져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전해졌다. 이 불쌍한 남자를 이대로 이 땅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간다면 짧은 다리의 이 남자는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너무나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팔목에 은색으로 감겨 있는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2시면 충분해...!
그녀는 오동시의 손을 덥썩 잡고 말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동시 씨."
"왜 그러죠?"
영문을 모르면서도 오동시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했다.
"우리 지금 다시 차로 돌아가요."
"왜요? 잊은 거라도 있습니까?"
"네, 잊은 게 있어요. 저는 잊은 걸 꼭 가져가야 하거든요. 어서 나를 따라오세요."
두 사람은 다시 레스토랑을 나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러자 그들을 따라가던 한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는 무슨 일인가 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병태 형사와 노미 형사였다. 두 사람은 오동시가 오피스텔을 떠날 때부터 미행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걸까요?"
"글쎄......그나저나 노형사는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아직 못알아 낸 거야?"
"모자를 워낙 깊게 눌러쓰고 있으니까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어야죠. 분명히 모델이나 뭐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유명한 사람 같기는 한데 잘 알 수가 없어요."
노미는 오동시와 동행한 여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선뜻 머리속으로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얼굴 윤곽으로 볼 때는 눈에 익은 얼굴인데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분명히 출국을 할 게 뻔한데 출국금지를 시켜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이형사는 답답해서인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오동시가 유력한 용의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행한 여자까지 용의자 취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잔인한 여자 살인범도 엄청나게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돼. 얼마 전에도 정부를 시켜서 남편을 잔인하게 토막살인한 여자 사건도 있었잖아?"
"알았어요, 알았어. 잔인한 여자도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여자는 아닌 것 같아요."
"흠, 자신 있게 말하는군."
이형사는 주차장 쪽으로 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오동시의 스타로드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오동시는 차문을 열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여자는 모자를 벗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올렸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참으로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게다가 단순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부족한 단아한 기품까지 있었다. 그러자 왠지 노미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았다.
노미는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알아냈어요, 선배님, 저 여자는 수퍼모델 수지 모예요."
"수지 모라면 신디나 클라우디아 같은 수퍼모델?"
이형사도 남자라서 들은 풍월은 있으며 늘씬한 초특급 수퍼모델이 누구인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수퍼모델을 보고 있는 거라구요."
"그 말 정말이야? 아니 제대로 본 거야?"
"틀림없어요. 아까부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틀림없이 수지 모예요."
그녀는 수지 모가 틀림이 없다고 단정을 내렸다.
오동시와 수지는 이윽고 스타로드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호다리 세이이찌가 죽은 날 그 시간에 차 안에서 섹스를 했다는 박유미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박유미가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차문은 열리지도 않으면서 창문의 커텐이 쳐졌다. 그런데 커텐을 친 사람은 수지 모였다.
"카섹스잖아요?"
노미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왜 해보고 싶어?"
"뭐라구요?"
노미는 이형사의 어깨를 후려치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인이 생기면 고려해 볼 거라구요."
추천91 비추천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