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02 [피로 물들인 드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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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피로 물들인 드레스 >
옛날 그리스 아테네에 가난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의 스승에게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동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
다. 청년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제자들의 눈을 피해 스승의 딸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
니다. 청년은 이론을 늘어 놓는다든지 논쟁을 하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스승의 수제자였지만, 시인처럼 사랑의 밀어로 꽃다발을 만들어 바치
는 일에는 완전히 쑥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갖고 싶
은 것이 있으면 생일날 바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
며 말했습니다.
"저는 새빨간 드레스가 갖고 싶어요.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의 피로 물들
인 것 같은 색깔의 드레스를...... 생일날 그런 선물을 주신다면 답례로 당
신이 바라는 것을 바칠께요."
청년은 희망에 들떠 눈까지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나 곧 절망감에 휩싸여
눈 앞에 캄캄해졌습니다. 가난한 처지로 그렇게 비싼 드레스를 살 수도 없
었고, 또 그녀가 바라는 색깔의 드레스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습니다. 게
다가 선물을 해야 하는 생일은 삼일 후였습니다.
청년이 눈물을 머금은 채 멍하니 있는 것을 마침 옆집에 살고 있는 벙어리
소녀가 보았습니다. 소녀는 남몰래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스
런 눈빛으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응, 너로구나?"
청년은 겨우 알아차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꿈같은 행운의 약속을 했지만 동시에 사형선고도 받았어. 하지만 이
런 일을 너에게 말해도 소용없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청년은 벙어리 소녀에게 모든 얘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스스의 딸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
고 있는가를.
벙어리 소녀에게는 심장의 바늘을 찌르는 듯한 이야기였지만, 청년은 소녀
의 고통스런 표정을 자신에 대한 동정이라고 해석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도 못하는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말했나 보구나. 아, 만일 네가 불쌍한 벙어리 소녀로 변
신한 아테나 여신이라면...... 그러며 내 소원을 들어 줄지도 모를텐데, 아
니야. 이건 농담이야. 이제는 철학자답게 자실에 대해서나 생각해 봐야겠
어."
소녀는 어려운 철학이론을 늘어놓는 청년을 남겨 놓고 신전쪽으로 올라갔
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
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사랑이 청년에게 전해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피로
물들인 드레스를 짜서 주고 싶었습니다.
나테나가 소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신은 듣던대로 위엄과 총명으로 빛나
고 있었지만 별로 정이 없어 보였고, 소녀를 동정하는 표정도 보이지 않았
습니다. 그래도 여신은 아테네의 수호신답게 소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면
서 소리없는 소녀의 호소를 참을성있게 들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너의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아프로디
테의 아들 에로스에게 부탁해서 그 청년이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일은 간단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최상의 해결책은 아닌 것 같구
나. 너도 에로스의 화살을 빌려서 청년의 사랑을 얻고 싶지는 않겠지. 충고
를 하자면 자신에게 적당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제일 좋단다. 원한다면 그
청년에 대한 사랑을 너의 마음에서 깨끗이 없애주마."
소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제발 그렇게는 하지마세요. 그 사람을 향한 저의 사랑은 버릴 수 없습니
다. 저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바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나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해도 네가 그 청년에게 받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을."
소녀는 외쳤습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버리겠습니다. 부디 저의 피로 물들인 실
로 옷감을 짜서 새빨간 드레스를 만들어 주세요."
"네가 믿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 같지만......"
아테나 여신이 말했습니다.
"그게 원이라면 들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일은 네가 지옥에 가는 것보
다도 무섭고 고통스런 일이며, 내가 저 교만한 아라크네와 싸울 때 만큼이
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벙어리 소녀는 여신에게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여
신은 조금씩 불쾌해졌습니다. 이간이란 작자들은 어째서 자신의 사정만 말
하며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건지 그것도 칭찬할 가치도 없는, 대개 쓸모없
는 시간들을 위해서 신에게 매달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테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것도 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성
가신 일에 착수했습니다.
"소원에 따르면 그 드레스는 살아있는 익나의 피로 물들인 듯한 색깔이어
야 한다고 했는데, 선명한 색을 내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지."
"아테나 여신이여! 저는 어차피 생명을 버릴 몸입니다. 어떤 도움이나 괴
로움도 참겠습니다."
"이 일을 하는데는 시간이 걸리지. 그 동안 너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
으면 않되고, 더 더욱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해서는 않된다. 계속해서 신선한
피를 흘리기 위해서 살아있어야만 한다."
여신은 다짐을 받고 실 끝을 벙어리 소녀의 심장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리
고는 재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습니다. 실은 심장을 통과해서 새빨갛게 물
들어 나왔습니다.
여신은 그 실로 옷감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고동치는 소녀의 심장에
빨려 들어가 선명하게 물들어 나왔습니다. 실이 심장을 통과해서 빠져나가
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소녀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몸으로 신음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가득찬 눈을 부릅뜨고, 온몸에 진땀을 흘리며 고통
을 참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잃으려 하면 여신의 질책이 멀리서 들려왔습니
다.
아테나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고통을 이기지 못한 소녀가 사랑도 선물도
필요없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소리없는 비명이 들리기를 기다리며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소녀의
마음은 단단히 닫혀 있었습니다. 소녀는 여신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
니다.
소녀의 심장은 작은 물레처럼 계속 움직였고 실은 심장에서 빨갛게 물들어
풀려나왔습니다. 물레는 점점 돌아가는 힘이 약해져 덜그럭 덜그럭 미덥지
않은 소리를 냈습니다. 밤새도록 계속 실을 물들였기 때문에 소녀의 피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테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소녀를 격려하면
서 마침내 피로 물들인 옷감을 다 짰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심장은 이미 바
람없는 풍차처럼 멎어버렸습니다. 아테나는 서둘러 그 옷감으로 새빨간 드
레스를 만들었습니다.
벙어리 소녀로 변신한 아테나는 드레스를 청년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지긋이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신의 힘으
로 청년의 마음에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벙어리
소녀의 커다란 눈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운 눈을 하고 있지?"
청년이 물었습니다.
"게다가 얼굴색도 창백하잖아. 마치 흡혈귀한테 피를 빨린 것 같아."
벙어리 소녀로 변신한 아테나는 청년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
꽁무니를 물고있는 개처럼 단지 절망을 상대로 덧없이 시간을 보낸 것을 알
고는 화도 나지 않을 만큼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벙어리 소녀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피로 물들인 드레스를 청년에게
바쳤습니다. 청년은 미칠듯이 기뻐하며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리고 스승
의 딸은 자신의 것이 된거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 치고나서, 슬픈 표정을
하고 서있는 벙어리 소녀를 보고는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드레스를 손에 넣었지?"
소녀로 변신한 아테나를 한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은 심장을 가리켰습니
다.
"그랬군. 이것은 너의 호의로구나. 나를 향한 사랑의 선물이구나. 고맙게
받을께."
청년은 벙어리 소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겼으며, 공
짜로 받은 사랑의 선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래
도 흥분한 나머지 소녀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는 살짝 바져나와 그대로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생일날, 청년이 새빨간 드레스를 득의양양하게 바치자 스승의 딸은 눈살을
찌푸리며 드레스를 던져버렸습니다.
"싫어요, 이렇게 기분 나쁜색은. 마치 피로 물들인 것 같잖아요."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이런 빛깔의 새빨간 드레스를 갖고 싶다고."
"내가 말한 것은 이렇게 기분 나쁜 색이 아니에요. 어쨌든 싫어요. 이런
색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청년도 역시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쳤습니다.
"교만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이건 진짜 피로 물들인 드레스란 말이야!"
청년은 화를 내며 뛰쳐나와 바닥에 드레스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면서 말했습니다.
"선생을 바꿀테다. 훨씬 마음씨 고운 딸이 있는 선생을 찾아봐야지."
길거리에 내팽겨진 피로 물들인 드레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채이고
흙이 묻어 넝마조각처럼 되었고, 어느 날 개 한마리가 어딘가로 물고 가버
렸습니다.
↕ 교훈 -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꼭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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