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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5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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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671 회 작성일 24-02-07 23: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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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54부



오늘은 여름방학을 시작한 첫날과 일정이 똑같았다.
영자 누나를 점자 선생인 박금순네 집으로 데려다 주고 읍내의 영숙 누나에게 물건을 전해주는 것이다. 영숙 누나에게는 반찬거리 외에도 지난 일요일 가져온 옷가지를 빨고 다림질한 것 까지 추가되었다.
금순의 집에는 그녀 혼자였다. 지난번에 봤던 창호나 금지는 집에 없었다.
나는 그 집에서 늘 그렇게 하는 차 대접도 사양하고 바로 나왔다. 금순 혼자만 있는데 내가 또 욕정이 발동하면 서로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대신 이번에는 영숙 누나가 나를 대접해 주었다.
“월말 결산이 끝나가 지금은 좀 한가하다. 뭐 빵이라도 좀 묵고 가라.”
누나가 일어서는데 윗자리에 있던 한 여인이 말을 걸었다.
“영숙아, 쟈가 그 맛있는 반찬 갖다 준 동생이가? 오늘도 또 가왔는 가베.”
“아, 니 인사해라. 같이 자취하는 언니다.”
내가 절을 꾸벅하자 그녀는 빙긋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 내는 민경자다. 남자답게 잘 생겼네.”


“뭐 물래?”
지난번 읍내에 왔을 때 달자와 들렸던 제과점에 앉자 누나가 물었을 때 나는 빙수를 청했다. 날씨도 더웠지만 처음 먹어본 빙수가 너무 맛있었다.
“니가 이번에 반에서 3등 했다며? 참 잘했다. 니 본색이 드러난 기다. 나도 니가 언젠가는 그래 잘 할 줄 알았다.”
“누부야가 사준 책상에서 공부하이 공부가 잘 돼 그런 기다. 다 누부야 덕택이지.”
나는 겸손한 척 누나에게 공을 돌렸다.


“그런데 누부야는 우째 맨날 반에서 1~2등만 하노? 내나 막내 누나는 중간 밑으로 빌빌하는데 ...... ”
솔직히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러나 누나는 되물었다.
“니는 그전의 석차가 맨날 30등 밑으로 돌다 우째가 5학년 때는 3등을 했노?”
“글쎄, 나도 설명은 몬 한다. 하여튼 5학년 올라와가는 그저 공부가 재미있더라.”
이원주 선생에게 학년 초부터 매를 맞았다거나, 그래서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예습 복습을 열심히 했고, 그러다보니 공부시간이 좋아졌다는 말은 생략했다.


“바로 그기다! 내는 늘 공부시간이 좋았고 교과서를 보는 것도 그리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남보다 잘 풀고, 내가 전혀 몰랐던 세상의 많은 일들을 공부시간에 알게 된다는 것도 너무 좋은 기라. 우리집 형편에 학비를 대기 어려워 고등학교 못 가게 했을 때도 나는 그기 제일 아쉬웠다. 물론 고등학교 나오마 내가 시집갈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더 좋을 수 있겠제.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당장 그 재미있고 신비로 가득한 공부를 더 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 공부시간을 잃는다는 기 내게는 너무 서러웠던 기라.”


그저 약간은 예쁘고 때로 우리 가족 중에도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던 누나가 이 말을 할 때는 갑자기 싸움이라도 걸듯이 눈이 초롱초롱하고 표정은 진지했다.
“공부를 재미있다 카이 니는 일단 한고비를 넘어가 모범생에 포함된 기다. 니는 예습이나 복습도 하나?”
“하모! 나도 그걸 몰랐었는데 해보이 재밌더라. 또 선생님이 질문하는데 막힐 기 없고 그날 배운 기 머릿속에 꽉 박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기라.”


“아니, 우리 동생이 언제 이리 철이 다 들었노? 그라마 니는 다 된 기다. ...... 아, 그런데 3등하고 1등은 또 다르데이. 올림픽에서도 금 은 동. 세가지 메달이 있는데 금메달과 동메달은 하늘과 땅 차이다. 니도 이왕 올라간 거 쪼매 더 용을 써가 한번 1등을 해봐라. 아니, 지금 니 하는 것 보마 언젠가 할끼다.”
누나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니 일단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내가 1등을 할 수 있을까? 5년 째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어째 구름을 잡으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영숙 누나와 헤어져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기면서 갑자기 마음이 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나도 안다. 오늘은 다른 어떤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번 읍내에 왔을 때는 황달자를 만나 배은숙의 집에까지 가서 서양놈들 나오는 음란영화를 보고 우리도 셋이 신나게 빠구리판을 벌리지 않았는가.
달자네 집에 전화라도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마저 포기했다. 우선 그집의 전화번호를 모르는데다 영숙 누나에게 물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이렇게 허탕을 칠 때도 있는 것이다.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가다 경찰서 앞에서 무심코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참, 내 눈썰미 하나는 알아준다.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은색 지프차 옆에 서있는 남자를 보며 나는 그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냈다. 그는 지난번 읍내에 왔다가 배은숙의 집에서 사진으로 본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은숙 아버지는 상반신의 사진으로 볼 때보다 풍채가 좋아 보였다. 배도 꽤 튀어 나왔고 키도 컸고 어깨도 넓어 보였다. 그 어깨에 달린 무궁화 계급장이 그가 은숙 아버지임을 더욱 확실히 증명해준다.

은숙 아버지 앞에는 마주 서서 나에게는 뒷모습만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있었다. 남자는 양복차림에 그저 호리호리해 보이는데 옆의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남자와 대조가 되어서인지 좀 뚱뚱했고 다리도 굵어 보였다.
“그럼 영감님, 안녕히 다녀가십시오.”

은숙 아버지가 두 남녀에게 거의 90도 각도로 절을 하며 말했다.
“수고했소. 언제 인연이 되면 또 만날 수도 있겠죠.”
“물론입니다, 영감님.”
젊은 남자가 손을 내밀자 은숙 아버지는 두손으로 악수하며 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은숙 아버지가 경찰서 건물 쪽으로 가자 남자가 돌아서서 ‘서울’ 번호판이 달린 지프차의 문을 열었다.

돌아선 그 남자를 보며 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안경을 끼고 넥타이를 맨 그 남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줘도 30대 중반 정도다.
그런데 50대에 체구도 듬직하고 우리 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경찰간부라는 은숙 아버지가 깍듯이 절을 하며 ‘영감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다. 젊어도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짐작이 갔다.


“자, 타!”
“싫어! 나 혼자 갈 거야.”
“그러지 말고 타라니까. 너한테 전할 선물도 있으니까 집까지 태워줄게.”
젊은 남자는 옆에 함께 서 있던 여인의 팔을 잡고 끌었다. 그의 팔을 뿌리치면서 잠깐 옆모습이 보이는데 아는 얼굴 같기도 했다.
“싫다니까 왜 이래! 선물? 흥, 네가 내 앞에서 빨리 사라져 주는 게 나한테는 선물이야.”
다시 뒷모습을 보이는 여인의 말투는 무척 쌀쌀맞았다.


“제발 좀 이러지 마! 내 진심을 전하게 좀 차분한 대화를 하자. 우선 차를 타.”
“진심? ...... 흥, 네 진심은 이미 3년 전에 내게 알렸는데 또 숨겨둔 진심이 있니?”
“그래서 내가 설명을 하겠다잖아. 네 심정도 알지만 우선 내 말을 좀 들어줘. 자, 이 차를 타고 ...... ”
그는 다시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한 팔을 잡은 채 등을 밀었고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다.
그 와중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이원주 선생이었다. 체격을 보면 눈에 익은데 학교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원피스 차림이라 바로 못 알아 본 것 같다.


“너 정말 왜 이래? 사람들 오가는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창피 줄래?”
언성이 높아진 그의 말투는 화가 나 있었다.
“너야말로 왜 이래? 싫다는 사람한테 왜 자꾸 강요하냐구? ...... 나도 범죄자로 보이니?”
“정말 자꾸 이럴래? 자, 우선 타자고 ...... ”
그는 아까보다 더 우격다짐으로 그녀를 밀어 넣으려 했고 그녀의 저항도 완강했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새임, 안녕하십니까?”
“어머나, 문영도! 여긴 웬 일이냐?”
“읍내에 심부름 왔다가 새임이 보여가 ...... ”
두사람 모두 당황한 표정에 다툼을 멈추었으니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얘는 누구요?”
“우리반 학생이예요.”


내가 잠시 엿듣기에 둘은 다 반말을 했었는데 내가 끼어들자 약간의 예의를 찾는 모양이다.
“잘 됐네. 너 담임선생님 댁 알지?”
“네.”
“그럼 같이 가자. 자, 먼저 타!”
그는 열려있는 지프차 안으로 나를 밀었다.
참, 뒤에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은숙 아버지가 쩔쩔 맬 만큼 대단한 사람의 명령이라는 것과, 처음 타보게 될 검은색 지프차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든 나는 냉큼 차에 올라가 뒷좌석에 앉았다.


“어머, 쟤가 ...... !”
이원주 선생의 난처한 표정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입술을 한번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그럼 집 앞까지야!”
“최군, 출발해!”
“네.”
시동을 걸고 있던 지프차는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운전수에게도 반말을 하고 그의 공손한 대답을 볼 때 역시 그는 지위가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잔은 줄 수 있잖아?”
“그래서 내가 혼자 오겠다고 한거야.”
그녀의 집 앞에 모두 내렸고 그가 웃음을 띠우며 사정하는 투로 말하는데 그녀는 여전히 쌀쌀맞게 대했다. 내가 그 남자한테 좀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위도 높은 사람이 저렇게 굽히고 나오는데 ......
그녀도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대문을 열쇠로 따면서 말했다.
“정 그러면 차 한잔만 하고 가는 거야.”


“자, 그럼 너는 집에 가고, ...... 참, 내 차를 타고 갈래? 집이 어디지?”
높은 사람이 나를 자기 차로 집까지 태워준다는데 나는 황송할 지경이었다.
“안돼! 영도는 오늘 내 보호자야! 내 옆에 꼭 붙어 있도록 해.”
그녀의 약간은 앙칼지게도 들리는 말에 그는 좀 머쓱한 표정이었다. 나도 아무리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이 자리에서는 내 담임 선생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인간적 스페이스로구만.”
집 안에 들어선 그가 한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나는 그의 말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집이 너무 옹색하게 보인다는 말이냐? 그래도 나는 아무 불편이 없고 만족한 공간이야.”
지난 날 이미영 선생과 옴라이스, 돈가스, 비프스테이크를 먹었던 식탁은 그대로 있었다. 의자가 4개 놓여있는 식탁이었다. 그 남자와 나는 마주보며 앉았고 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차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 집에는 커피밖에 없어. 영도, 너도 커피 마실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고 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고 나만 혼자 외톨이가 되는 기분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3개의 커피 잔이 3명 앞에 놓이고 모두 한모금씩 마신 뒤에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였다. 30대 중반인 두사람이 모두 반말을 하는 것을 보면 꽤 친한 사이였을 것인데 그녀는 계속 쌀쌀맞다. 더구나 그 사이에 낀 나는 물에 뜬 기름 같이 더 어울리지 않는다.


“자, 너는 자리를 좀 비켜줄래?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 ”
그가 나를 보며 말할 때 나는 좀 반가운 기분이었다. 이 분위기에서 피하는 것이 나도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그럴 것 없어. 영도는 오늘 내 보호자라니까. 그냥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그래, 네가 지금 와서 나한테 하겠다는 말이 뭐니?”
“후우 ...... !”
그는 한숨을 쉬며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채병욱은 이원주와 오랜만에 대면하면서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이나 반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컸지만 그래도 그는 이 갈등을 극복하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이 너무나 절실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당장 보이지 않는다.
이원주라는 여인과 결별한 것은 분명 자신의 실수였다. 그리고 그 혹독한 대가를 지금껏 치루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그는 아무리 힘이 들고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3년여의 지난 시절이 그에게는 악몽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그것도 그가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검사 임용, 미모의 여인과 결혼, 부유한 생활 등 항상 꿈꾸어 왔던 모든 소망이 한꺼번에 이루어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성취가 악몽 같은 지난날로 기억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봐도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병욱은 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집안의 5남매중 맏이었다.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중학교 때 사망했고 어머니가 남의 집 식모, 과일행상, 생선장사 등을 하면서 5남매를 키워 왔는데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그는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고 착실했으며 서울법대에 합격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하면서 가족들은 그의 성공만을 애타게 기다렸고 그 희망은 점점 현실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결국 7년의 각고 끝에 그는 목표를 성취했고 그와 함께 마치 마법의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변했다. 주위의 아는 사람들로부터 축하와 부러운 눈초리를 받는 데도 우쭐했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그는 재벌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돈을 펑펑 써도 남을만한 부잣집의 사위가 되었다.
신부 임정란은 그보다 7살 아래로 빼어난 미모에다 도시여인의 세련됨과 발랄함을 갖추고 있었다. 4년 넘게 사귀어 온 동갑내기 전 애인과는 동화나 사극 속의 공주와 시녀만큼 차이가 났다.


더구나 그는 결혼과 함께 너무 넓어서 처음에는 마치 운동장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큼직한 아파트에 고급 외제 가구로 장식된 궁궐의 주인이 되었다.
번쩍이는 외제 자동차에다 명품시계를 차고 난생 처음으로 맞춤 양복을 입은 그는 당장 그것만으로도 이 나라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도 가난에서 벗어났다. 주인공만큼 대단한 변신은 아니지만 처갓집에서 새로 살 집을 마련해 주었고 생활비도 보조해 주기로 했다.


하와이에서 보낸 4박5일의 신혼여행도 그는 꿈결처럼 환상적으로 보냈다.
젊고 싱싱한데다 풍만한 몸매를 가진 신부는 그 자태부터가 매혹적이지만 침대에서는 더욱 황홀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몸에 자지를 꼽을 때만 해도 수줍음을 타며 다소곳한 자세더니 방아질이 계속되자 신음과 비명을 터뜨리고 체위도 바꾸어 가면서 능동적으로 신랑을 리드했다.
남자 경험이 꽤 있었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창녀에게 동정을 바친 이래 이미 법조계에 진출한 선배나 동기들에 이끌려 고급 술집에서 호스티스와 동침한 적도 몇 번 있었고 4년을 사귄 전애인과도 수시로 육체관계를 가져 왔다.
그러나 그런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쾌감과 희열을 맛보면서 이것 역시 별세계의 진수로구나 하고 감동했다.
그는 이 새로운 생활이 너무 흡족해서 제발 꿈이 아니기를, 꿈이라면 차라리 깨어나지 말기를 바랄 정도였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는 말처럼 꿈결 같은 생활에도 그림자는 있었다.


우선 그는 격무에 시달렸다.
첫 부임지로 광주지검 목포지청에 발령받은 그는 초임검사로서 어쩔 수 없이 산적한 일거리에 매달려야 했다. 경찰의 수사를 지휘해야 하고, 직접 담당하는 수사에다, 기소장 작성, 공판 참석 등 그의 하루 일과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이 이어졌다.
7년동안 웅크리고 시험준비에만 몰두했던 그는 일단 체력이 격무에 버티기 힘들었다. 전 애인이 ‘창백한 인텔리겐챠’라고 불렀듯 그는 원래 허약한데다 꽤 오래 결핵을 앓았었다.


헉헉대며 일을 대충 마무리 지으면 그는 또 술자리에 끌려 가야했다. 지청의 상사 중에는 그의 합격이 늦은 탓에 대학 동기나 후배도 있었는데 ‘검사 동일체’라는 관행으로 술자리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술자리는 룸살롱이든 방석집이든 항상 양주에 그 지역에서 제일 잘빠졌다는 여인들이 배석한 호화판이지만 선배 검사들이 술값을 내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고기도 먹던 놈이 잘 먹는다.”고 그는 이런 호화판 술자리가 지겨웠다.
그렇지만 격무나 이런 동료들끼리의 어울림은 검사생활의 한과정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는 늘 피로에 젖어 있으면서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또 하나 그를 피로하게 하는 것은 신혼의 아내였다.
젊은 검사들 중에는 벽지에 근무하면서도 부부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란은 남편을 따라 시골생활을 한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주말이 되면 그는 처갓집에서 마련해 준 번쩍거리는 외제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홈 스위트 홈’에 도착한 그는 일단 쉬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에게 봉사를 요구했다.
“일주일이나 독수공방했으니까 모두 채워줘야 해요.”
아내가 생긋 웃으며 말할 때는 그도 욕정이 솟구쳤다. 그러나 하룻밤에 그가 일주일분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자 주말에 집에 간다는 것이 월요일 아침의 출근보다 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일터에서의 격무나 재미없는 술자리, 또 아내에 대한 봉사는 그에게 모두 힘든 일이지만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이만큼 누린다면 또 어느 정도의 대가는 당연히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사라는 직분은 직접 경험해 보니 참 대단한 자리였다. 그는 직속상관 외에는 사회생활에서 아무에게도 꿀릴 것이 없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경찰관이나 지청 내의 수사관이나 서기들은 그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지방의 유지나 토호(土豪)들도 그를 ‘영감님’, 혹은 ‘검사님’이라며 굽실거렸다.


그는 6개월 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전보되었다. 검사로서는 가장 막강하고 노른자위인 부서였다.
“자네가 일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마음에 들었어. 앞으로도 잘 팀웍을 만들어 보세.”
차장검사가 첫 면담에서 그렇게 말할 때 그는 한편으로 우쭐했고 또 감격했다. 그런데 뒤에 알고보니 그것은 거의 장인의 로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력기업인 철강회사를 비롯해 몇 개의 자회사를 갖고 있는 장인의 그룹은 연매출 수백억원대를 넘어 있었고 그래서 정, 관계를 비롯해 법조계에도 떡값을 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처갓집의 후광으로 빛을 내는 존재였다.


한달쯤 전 그는 뜻밖의 사태를 맞았다.
아내가 간통죄로 피소된 것이다.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장모의 전화였다. 그리고는 아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의 수영강사와 일을 저질렀고 그 수영강사 아내의 고소로 어느 경찰서에 연행되어 있다는 것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떻게든 합의를 보아 해결하겠네. 자네도 속상하겠지만 참아주게.”


그는 당연히 화가 났고 갈등했지만 결국 현실과 타협했다.
어차피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에도 남자가 거쳐 간 여인이다. 수영강사 같은 놈의 자지가 박혔다고 내가 누리는 이 생활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다, 또 그런 그녀를 받아줌으로써 처갓집에도 빚을 하나 지운 셈이다..
3일 후 아내는 석방되었다. 간통죄라는 친고죄는 고소인이 취하하면 법이 더 이상 제재를 할 수 없다. 아내는 장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자, 이렇게 각서까지 쓰게 했으니 자네가 용서해 주게.”
각서는 “본인이 잘못을 저질렀으며 앞으로 이같은 일이 재발할 시는 이혼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상투적인 내용이었고 아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찔끔찔끔 울고 있었다.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의 저자세에 힘을 얻었는지 장모는 그 자리에서 훈계까지 했다.
“나도 염치가 없어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 했지만 자네가 가장, 또 남편으로서 좀 등한히 했던 것도 많았던 것 같더군. 나랏일이나 검사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예로부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이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정에도 좀 더 충실하기를 바라네.”
장모는 눈을 찡긋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보낸 약들이 별로 효험이 없었나? 다른 보약을 찾아볼까?”


그로부터 3일 후 그는 아내와 동침했다.
그 행위는 가화만사성을 이루려는 그의 의지며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아내를 용서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아내는 첫날밤의 신부처럼 부끄러운 듯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비틀며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그는 이미 끝나 버렸다. 실제로 그는 그 행위가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든 상황은 다 끝나고 아내의 뒤처리까지 해주는 중 그는 아내의 불평을 들었다.
“아이, 짜증 나.”


그 말은 가화만사성이라는 의지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 같은 것이었다.
다음날 그는 전날의 미흡함을 만회하려는 기분으로 아내와 섹스를 하려했으나 불발로 그쳤다. 자지가 서지 않는 것이다. 발가벗고 아내를 애무하면서 이렇기는 처음이었다. 그 뒤에 몇 번을 더 시도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위할 때처럼 제 손으로 자지를 세워 보기도 했다. 그래서 빳빳해진 것을 그녀의 보지에 들이밀려는데 “아이, 짜증 나.”라는 아내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더니 입구에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도 남편의 임포텐스 증세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손으로, 입으로 정성을 쏟으며 해보았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자기 손으로 매만지면 그나마 피가 몰리는 기분이 있는데 아내의 손이나 입으로는 아예 감각조차 없는 것이다.
“당신 병원에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어요?”
“글세, 요즘 좀 바빠서 ...... ”
그는 그렇게 말을 흐렸지만 실제로 그는 며칠 전 비뇨기과를 찾아 갔었다.
의사는 몇가지 검사에 아무 이상이 없자 의사는 ‘심인성’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스스로 마음을 풀어보거나 그게 안되면 심리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나름대로 자가 임상실험을 했다. 단골 술집의 낯익은 호스티스를 호텔로 데려갔다. 평소에도 그는 늘 손만 뻗으면 씹을 할 상대가 널려 있었지만 아내 하나만을 감당하기에도 벅차 외면해왔던 터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자지는 벌떡거렸고 직업여성의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헉헉거리다 비명을 질러댔고 그도 오랜만에 흡족한 기분으로 끝마쳤다.
그러나 집에서는 여전히 발기불능이었다. 아내를 안았을 때 그 호스티스와의 장면을 상상해 봐도 역시 안 되었다. 그의 가화만사성을 이루겠다는 의지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웠다.


일요일 아침, 모처럼 늦잠을 즐기던 그는 청소기 소음에 잠이 깼다. 아내는 이미 외출한 모양이다.
“아줌마, 그 청소 좀 있다가 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아내가 그렇게 시켰는지 가정부는 그를 꼭 사장님이라고 호칭했다.
다시 적막해진 집안의 푹신한 소파에서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 주제는 자꾸 불행 쪽으로 쏠렸다.


“인간에게는 두가지 불행이 있으니 하나는 원함을 얻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원함을 얻은 것이라.” --- 어디선가 읽은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바로 그 원함을 얻었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어. ...... 사색의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자 점점 그 명확한 실체들이, 불행의 조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지금 사는 집만 해도 궁궐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60여평의 아파트에는 그의 서재나 아내의 의상실도 번듯하게 마련돼 있고 아직까지 전혀 사용을 안한 아기방과 손님방도 있었다. 그래도 공간은 남아돈다. 가정부를 포함해도 세사람이 사는 집으로는 너무 넓었다.
가정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안을 청소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린다.
그는 이 넓고 호화로운 집에서 무엇을 누렸던가. 하루에 한두번 식탁에 앉고, 소파에도 가끔 앉을 때가 있지만 매킨토시 전축의 음악이나 TV도 거의 켜지 않는다. 집에 와봤자 늘 피로에 지쳤고 술취한 날이 많은 그는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서재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 웃음이 난다.
그의 서재에는 서울지검장의 집무실보다 더 큰 책상과 등받이가 높은 의자가 있다. 책상에는 한글타자기와 애플컴퓨터가 자리 잡고 결혼사진과 아내의 방긋 웃는 사진이 액자에 담겨 놓여 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렸고 벽에 걸린 그림이나 휘호, 고급스런 조명기구들이 거의 아내가 꾸민 것인데 정말 멋진 서재였다.
그런데 서가(書架)를 채우는 것이 문제였다.
그에게는 장서랄 것이 거의 없었다. 7년이나 고시공부를 하면서 닳고 닳은 법전 및 수험서적과 소설, 에세이집 몇 권이 고작인데 그것을 모두 꽂아도 서가의 10분의 1도 채울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를 이끌고 대형서점으로 갔다. 그가 읽고 싶은 책을 부지런히 골라보아도 30권이 넘지 못했다.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아내는 점원을 불렀다.
“저기 세계문학전집 30권, 왼쪽의 한국고전총서 12권, 백과사전 24권, 저 둘째 선반 것은 모두, ...... 그리고 신간코너는 여기서 여기까지 ...... ”
그녀는 팔을 벌려 구입할 책의 범위를 알려주었다.
“책도 서재의 가구나 장식품과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실제 가구나 장식품보다 오히려 싸게 먹혀요.”
어이없어 하는 그에게 아내는 말했다.


“영혼이 없는 집이야.”
그는 집안을 둘러보면서 속으로 이 말을 뇌까렸다. 그는 서재를 두세번 들려 봤지만 그 높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거나 집필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서재뿐만이 아니었다. 이 넒은 집은 화려한 가구나 집기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에 들거나 자신이 누린 것은 거의 없었다.


영혼이 없는 집을 더욱 삭막하게 하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인 두사람, 바로 아내와의 관계였다.
마담뚜의 접촉에 그가 쉽게 넘어간 것은 상대의 재력도 그렇지만 임정란을 직접 만나면서였다. 빼어난 미모에다 젊고 발랄하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그에게 어필해왔다.
그녀의 등장으로 그는 4년 동안이나 사귀어 온 여인과의 관계를 마음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솔직히 그는 이원주에게 퍽 오랫동안 일종의 중압감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도 안다. 그것은 자격지심이었다. 사랑의 고백을 그녀가 받아들이고 몸까지 섞으며 그 사랑은 더욱 두터워 지는 것 같았지만 마음의 한구석에는 멍 같은 아픔도 자라고 있었다.
우선 그는 남자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녀만 보면 늘 자지는 빳빳해지지만 자지를 휘두르는 것만이 남자의 구실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돈 한푼 못 버는 백수였고 어느새 부터인가 어머니 대신 그녀의 뒷바라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그 치료비를 댔고 가족의 생활비까지 일부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그런 이원주에게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현실이 창피하고 부담이 되어왔었는데 문정란이라는 여인이 나타나며 그는 두여인을 마음의 저울에 달아 보았다. 저울은 문정란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은혜는 은혜고 사랑은 사랑이야. 그에게 활짝 열려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정란이 꼭 어울리는 반려라고 그는 단안을 내렸다.
그 선택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동반외출을 하거나 파티에 참석할 때 언제나 그들 한쌍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는 우쭐했다. 잠자리에서는 더욱 황홀했다. 이원주에게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자극과 열정에 그의 몸은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는 지금 널찍한 감옥으로 느껴지는 텅 빈집에 홀로 웅크린 채 그 화려함의 그림자에 갇혀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있다.
아내의 간통, 아니 그보다 더 최근에 일어난 그의 임포텐스 현상에서부터 과거를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아내는 애초에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쾌락의 상대였을 뿐이다. 남편이 검사라는 괜찮은 모자를 쓴 채 그녀는 그 남편의 정기를 빼먹으면서도 그전이나 그후에도 여전히 이놈 저놈의 자지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 역시 아내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딸려 들어온 돈과 여러놈들을 거치며 더욱 발전한 그녀의 보지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그는 불쑥 이원주가 떠올랐다. 지난날 문정란을 선택했던 마음의 저울에 다시 두여인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울어진 이원주를 자신의 아내로 대입해 보았다.
아!, ...... 그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아니, 감탄이라기보다는 회한과 뉘우침의 비명 같기도 했다. 그 가상의 세계는 너무나 현실과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로군. ...... 그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실과 가상의 중간에서 몸을 떨었다.


이원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해도 그들은 주위의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축하와 축복을 받았으리라.
그런데도 그가 문정란을 선택한 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돈과 미모의 젊은 여인에 굴복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결정이었나는 현재의 불행한 처지가 확실한 증명이 된다.   
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찔러 오는 것은 이원주를 선택했어도 그들은 돈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검사로 임용된 후 격무와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 시달리면서도 또 하나 그 직책에 만족한 것은 그의 수입 때문이었다.
검사는 공무원으로서 직급이 높기도 하지만 그는 정부에서 주는 월급의 몇 배를 수입으로 올리고 있었다. 그는 특별한 악덕검사도, 피의자나 고소인에게 뇌물을 요구하지도, 또 설사 뇌물을 받았다 해도 그것이 법률적 판단을 다르게 하는데 적용되지는 않게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그의 주머니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 지검 지청이라는 벽지의 임지에 갔을 때도 부임축하금. 그곳을 떠날 때는 전별금, 그리고 지방의 유지나 토호들은 명절이나 평시에도 수시로 촌지봉투나 선물을 보내왔다. 그들은 법적으로 따지자면 꼬투리가 잡힐 일이 많기 때문에 보험을 드는 것 같은 타산으로 푼돈을 내놓는 것이다.
서울지검으로 옮기자 그 단위는 더 컸다. 여전히 그는 새내기검사로서 수사팀의 말단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관으로부터 배당금처럼 받는 것이나 취조 대상 쪽에서 찔러주는 돈이 지청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미 그의 수입만으로도 그의 가족은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 이원주까지 한 가족이 되었다면 그들은 훨씬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수입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의 뒷바라지나 가족에게까지 도움을 주는 것을 보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 둘이 가정을 이뤘다면 처음에는 가진 돈이 없어 방한칸에 세를 들었어도 차츰 집을 늘려가며 가구나 생활집기도 점점 좋은 것으로 장만했을 테고 그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또 얼마나 행복했었을까.


그는 지금도 헐벗었던 지난날의 감격을 가끔씩 되살려 낸다.
헤진 운동화를 꿰메어 신고도 몇 달, 설날인가 추석인가 새 운동화를 받았을 때의 감격, ...... 그는 깡충 뛰어봤지만 그러면 운동화가 빨리 닳을까봐 살금살금 걸어보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맛있는 음식은 중학교 졸업식 날의 짜장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에는 거기에 탕수육도 겻들였다. 그때의 신비로운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내를 포함한 처갓집 가족들이 자신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산해진미가 앞에 쌓여 있는데 그들이 음식의 감칠맛을 알까. 옷이며 구두며 가방을 모두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으면서도 새 상품이 나왔다면 서슴치 않고 사버리는 그들이 그 물건의 귀함이나 소유했을 때의 환희를 알까. ...... 그들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경험으로는 아니다 였다.
상류사회에 진입하고 주머니가 넉넉해지면서 그도 그런 짓을 해보았지만 옛날 같은 감동은 전혀 없었다.


그의 결혼은 가족관계에도 파탄이 왔다. 
결혼 첫해에 다가온 아버지의 제사는 어머니의 주재로 치렀다. 지금도 존경이나 애정이 가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나름의 출세를 하고보니 제사상이라도 잘 올리고 싶었고 아내와 함께 어머니 집을 찾았다.
“아이, 그 좁은 집에 사람들이 북적대니 정말 숨이 막혀. 그리고 왜 사람들은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 집에 딸들도 있는데 ...... ”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불평부터 했다. 물론 설거지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아버지의 제사는 이듬해부터 그의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가 음식은 주도했고 설거지는 가정부가 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불평이 많았다.
“아줌마!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 좀 해! 음식도 사람들도 모두 이상한 냄새가 나.”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때 그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도 모두 아내의 멸시를 느끼고 있었다. 그 반작용처럼 어머니나 누이들은 가끔 그리움처럼 이원주를 들먹였다. 그에게는 또 하나 짜증나는 일이었다.
  
섹스 쪽으로 상념이 옮겨가자 그는 갑자기 자지가 벌떡거리는 반면 가슴은 뻥 뚤린 것처럼 아려왔다.
“아이, 내가 할게.”
이원주의 자취방에서 키스와 애무를 하다 결국 불이 붙어 그녀의 옷을 벗길 때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팬티를 제 손으로 벗고 가랑이를 벌렸다.
자지를 꼽았을 때 그녀는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를 힘주어 껴안았다.


사정이 끝나고 보니 침대 시트에는 그녀가 흘린 몇방울의 핏자국이 있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미안해!”
28살의 여인이 아직 숫처녀라니, ...... 그는 감격하면서도 엉겁결에 그 말부터 나왔다.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순결을 주었다는 게 고맙고도 기뻐. 그래서 눈물도 나왔나봐.”
그녀는 여전히 부끄러운 듯 살짝 미소를 띠우며 그를 다시 힘껏 껴안았다.


보채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녀는 그를 한적한 절로 이끌었다. 그에 앞서 그들은 산사 앞의 여관에서 한몸이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겠지만 그래도 이별이 아쉬운 그는 다시 그녀를 올라타려 했다.
“나의 착한 학생! 학업에 정진해야 할 사람이 벌써 기운을 다 빼면 어떡해요? 일단 공부에 몰두하세요. 그래도 참기 어려우면 한달 안에 꼭 내가 다시 올게. 하지만 그동안은 자위도 하지 말고 날 기다려야 해.”
그 속삭임이 감미로운 추억 속에서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둘이 함께였다면 그가 벽지에서 격무에 시달릴 때도 그들은 번갈아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상봉의 기쁨을 누렸으리라.
그녀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맞으면 기꺼이 벽지의 남편과 함께 생활 했을 것이다. 지금 아내와의 초창기처럼 그렇게 열광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녀와의 섹스는 어릴 적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정겨웠을 것이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4년을 함께 한 세월 속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할지는 지금으 아내보다 더 잘 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몇 년 동안 상류사회에 몸담고 살아오면서도 오히려 상처만 가득 입은데 대한 회한인지, 사라져 버린 지난날의 그리움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는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하고 슬펐다.
그래. 나는 새로 시작할 거야. 잃어버린 세월을 만회할 거야. 허황된 신기루가 아니라 그냥 옛날의 나로 돌아가 그렇게 살아갈 거야. ...... 넓어서 더욱 공허한 집안에서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원주를 다시 만나는 데는 곡절이 많았다.
퍽 오랜만에 사대부국에 전화를 해보니 그녀는 없었다. 우선 가슴이 철렁했다. 사직을 했다는데 그후 그녀의 행방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교장에게 전화를 했다. 여자 교장은 그가 신분을 밝히자 더욱 냉담하게 나왔다.
“이원주 선생님이 누군가 자기를 찾으면, 특히 남자라면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어요. 저는 아무 것도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부리는 수사관을 시켜 본적지 조회까지 한 끝에 그녀가 경상북도 한 시골의 초등학교에 근무 중인 것을 알아냈다.
시외전화를 했더니 그녀와 연결이 되었지만 그라는 것을 알고는 곧 끊어 버렸다. 심금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그는 결국 그녀를 만나러 직접 시골구석에 내려가기로 했다.


마침 방학 중인데 당직교사는 그녀의 집을 모른다고 했다. 이원주가 이미 동료교사들에게 누구든 자기 집을 물으면 모른다고 하라고 당부해 놓았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현지의 경찰서를 찾아갔다. 서울지검 검사의 방문에 경찰들은 긴장했다. 물론 그녀의 집을 경찰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아는 사이라면 직접 연락할 수도 있을 텐데 집을 알려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서울에서 채병욱이라는 검사님이 선생님을 찾으시는데요?”
역시 전화걸기를 잘 했다.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으니 집도 알려주지 말고 그냥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경찰관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입장은 알겠습니다만 저희들 입장으로서는 검사님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 댁을 알려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말했다.
“정 그렇다면 제가 경찰서로 갈께요.”


마침 서장은 출타중이라 경무과장이 그들을 접대했고 서장실에서 둘만이 대좌했다.
그는 지난날을 사과하고, 그 때문에 그가 얼마나 후회하고 가슴아팠었는지를 눈물까지 글성이며 역설하고, 다시 결합하자고 애원했다.
그러나 처음 볼 때부터 냉담했던 그녀는 전혀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근 한시간을 끈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장소를 옮겨서라도 그는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경찰서 마당에서까지 티격태격했지만 마침 그녀의 제자가 나타나면서 일단 그녀의 집에 입성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원주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정말 내 진심이야. 내 과오를 용서해 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다시 한번만 나를 받아줘! 진정 참회하는 심정으로 내 잘못을 모두 씻고 너한테 갚을게.”  
“아까도 라는 말을 자꾸 되풀이 하지 마. 그보다 더 오랜 지난날에 우리는 다 청산을 보지 않았니? ......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어.”
두사람의 대화를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면서 나는 그들이 연인관계였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남자가 저토록 사정을 하면서 매달리는데 왜 그녀는 매정하기만 할까.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괜찮게 생긴 남자고 더구나 지위도 높은 사람인데 ......


대화라기 보다는 언쟁이 더 맞을 것 같은 두사람의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 그래! 나는 이혼한다니까! 너를 다시 내 품안에 안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어!”
“이혼 ...... ? 너 미쳤구나! 나를 그렇게 내차더니 이제는 그 여자를 ...... ? 너한테는 여전히 배신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배신 ...... ? 그 말이 내게는 충격처럼 다가왔다. 남자한테 배신이라니 ......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정말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도 남자긴 남자였나보다.
“이게, 말이면 다냐?”
그가 뺨을 후려쳤고 그녀의 얼굴이 돌아갔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그 다음은 얼어 붙은 듯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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