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결혼식(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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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결혼식(1부)
이 글을 사전에 준비하였고 또 제목을 <아들과의 신혼여행>으로 정하여 두고는 쓰기 시작하였으나 다른 사이트에서<원조 밤바다>님이 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리시는 바람에 저는 제목을 수정하였고 결혼식 전 부분과 결혼식 부분을 조금 추가하여 이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4회에 걸쳐 올릴 것이며 다 쓴 상태이지만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무기력증이 아직 그대로 남은 상태라 다음 분을 언제 올릴지는 약속을 드릴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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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의 사건이 말입니다.
제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런 사건이었답니다.
이학년에 올라가서부터는 대학 입학시험에 매진해야 했기에 대학에 입학을 하기 전까지 피서는커녕 영화도 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부터 전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절약하여 저금을 했습니다.
이유는 대학 진학 전에 마지막으로 피서 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넉넉하게 살지 못 하였기에 한 목에 많은 경비를 달라고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매달 받은 용돈을 절약하여 저금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러 갈 경우에도 잔돈푼이나 남으면 그 잔돈도 어김없이 저의 저금통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전 착실하게 저축을 하였답니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고등학교로 올라간 친구 세 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식을 하던 자리에서 약속을 한 일이었거든요.
여름방학에 시작되면 저를 포함한 넷이서 남해안 바닷가로 피서 여행을 가자고 말입니다.
저나 경숙이 민정이 인숙이 이들 같이 가기로 한 애들 집안도 저처럼 그다지 풍족하질 못 해서 저처럼 저금을 해야 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6월 말에 우리는 모여서 장소도 선정하고 경비도 계산하였습니다.
착실하게 저축을 한 탓에 경비는 조금 부족할 정도였고 그 정도 같으면 부모님도 부족분은 채워 줄 것 같았습니다.
장소도 조용한 곳을 택하기로 하고는 수소문을 해야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으로 찾으면 간단하겠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을 하려면 많은 돈을 들여야 하였기에 가정집이나 학교 같은 곳에는 없었고 대기업 정도 되어도 몇 대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선정된 곳이 남해안의 거제도 해안가의 이름도 없는 해변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곳은 추천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해안 도로 밑에 있는 백사장으로서 크기는 학교 교실 한 개 반 정도 크기의 아담한 곳으로 수심도 깊지 않고 10분 정도면 올라 갈수 있는 해안 도로에 통행하는 차량이 많은 관계로 여학생 넷이 몇 칠 놀다 오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란 것이 추천인이 강조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넷 모두 누구도 그 추천인이 누구인지 몰랐고 알음알음으로 추천은 받은 것이 문제가 될 줄을 당시에는 우리는 알지 못 하였답니다.
물론 우리가 살던 부산에도 유명한 해수욕장이 부지기수로 있었지만 모든 해수욕장이 사람 구경이나 할 라면 몰라도 비싼 물가에 바가지요금이라 우리 같이 가난한 학생들이 놀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선택한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떠났습니다.
거제도까지는 직행을 탔고 거제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시장에서 음식 재료며 쌀과 라면을 구입하고 경숙이가 준비한 아이스박스에 얼음까지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해금강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고서야 진짜로 피서를 왔다는 사실에 실감이 갔고 거의 빈 버스에 가까운 완행버스에서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박수도 쳤지만 기사 아저씨는 웃기만 하고 만류도 안 하였습니다.
추천을 받은 곳은 정말이지 한적하고 좋은 장소였습니다.
민정이가 가지고 온 텐트를 민정이와 인숙이가 치고 저와 경숙이는 점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텐트를 친 민정이와 인숙이는 행여 밤에 추울지 모른다고 바닷가로 떠내려 온 나무들을 모았고 그리고 언덕에 걸쳐진 나무 가지들도 주워 모아 텐트 앞에 쌓았습니다.
야외에서 처음으로 만든 음식이라 코펠 밥은 거의 삼층밥 수준이었지만 찌개 하나만은 일품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부모님의 간섭이 없는 곳이고 선생님들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라 넷은 소주 두 병도 거뜬하게 비웠답니다.
식사가 마치자 경숙이가 설거지를 할 동안 우리 셋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물로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놀았습니다.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녁 6시까지 우리는 물에서 놀기도 하고 백사장에서도 놀았으며 텐트 안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6시가 되자 민정이와 인숙이가 밥과 반찬을 준비하였고 그런 동안 저와 경숙이는 해안 도로로 나와서 인근의(약 15분 거리) 구멍가게에 가서 저녁에 마실 소주 3병을 사가지고 왔고 밥과 꽁치 찌개가 만들어지자 소주를 마시며 맛있게 밥을 먹었답니다.
“아가씨 우리 같이 놀면 어때”8시가 넘어서 한 무리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타나더니 우리에게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싫어요, 가세요.”하고 거부를 하였지만
“처녀 총각들이 함께 노면 좋잖아?”남자 하나가 팔짱을 끼고 나서며 말하였습니다.
“싫대도 그러세요. 그럼 경찰 불러요”경숙이가 말을 하고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해안 도로를 향하여 고함을 지르자
“야 고함 못 치게 입 막아”팔짱을 긴 남자가 말하자마자 남제 넷이 나서더니 우리들의 입을 막았고 그리고 몸을 마구 주무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강간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흐흐흐 이것들 풋풋한 게 맛이 있겠지?”팔짱을 끼고 명령을 하던 남자가 제 턱을 치켜들며 말하였습니다.
“오빠 제발 살려 주세요 흑흑흑”울면서 사정하였으나
“흐흐흐 처음부터 곱게 같이 놀자고 할 때 논다고 했더라면 이렇게는 안 했지 하지만 이제 기차는 떠났어!”그 남자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저의 티를 위로 올렸고 그러자 제 몸을 뒤에서 잡고 있던 남자가 벗겨버렸고 앞에 있던 남자는 제 반바지를 벗기려 들었습니다.
“이게 앙탈을 부려 찰싹! 찰싹!”반항을 하려 하였지만 반항을 한다고 맞고 있던 인숙이를 보고는 반항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 아까 정한 순번대로 해”명령을 하던 남자의 말은 그들이 이미 우리를 낮부터 봤고 노렸다는 사실가지 알게 한 대목이었습니다.
“악! 아파요 아파”아랫도리로 엄습하는 아픔에 전 그놈의 좆이 제 순결을 작살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저에게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고 빨리 끝내고 가 주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막연한 소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경숙이 민정이 인숙이 이들도 저처럼 한 놈씩 올라가 분탕질을 당하고 있었고 그 중에 앙탈을 부리다가 맞았던 인숙이와 경숙이 민정이 입에는 구경하는 놈들의 좆이 물려있었고 두목으로 보이는 제 몸에 올라탄 덕인지는(?) 몰라도 제 입에 만은 구경을 한다고 내려 보고는 있었지만 좆까지는 물리지 않았습니다.
안도의 숨을 쉬면서 아픔을 참았지만 그도 잠시 놈이 제 보지 안에 좆 물을 뿌리고는 좆을 빼자마자 다른 놈이 제 보지를 휴지로 닦더니 올라타고는 좆을 박자 다른 놈이 제 입에 그 더러운 좆을 물려주고는 따귀를 날리더니 인숙이를 가리키며 그렇게 하라고 하는 통에 저는 두 번째 놈에게 좆이 박힌 채 다른 놈의 좆을 입으로 빨면서 용두질까지 쳐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넷은 놈들 9명에게 돌아가면 한 번씩 당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놈들은 우리와 함께 생활을 하며 감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낮에는 텐트 안에서 강간하였고 밤이면 백사장에 눕혀놓고 강간을 하였지만 엄한 감시 탓에 우리는 순순히 당하고만 견뎌야 하였고 우리의 계획서대로 5일간 놈들에게 하루에도 수 십 차례씩 돌려가며 강간을 당해야 하였습니다.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세 놈이 동시에 세 구멍에다가 좆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남자 한 놈이 콘돔을 하고 먼저 눕고는 우리들에게 앉은 대로 후장에다 좆을 넣게 만들고는 밑에 깔린 놈의 좆이 후장에 들어가기 무섭게 저를 끌어안아버리면 다른 놈이 이번에는 제 몸 위에 몸을 포개고는 좆을 박으면 다른 놈이 저에게 와서는 좆을 빨고 흔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때면 한 놈은 텐트 밖에서 망을 보는지 없었고 나머지 5놈은 당하는 저 말고 셋을 텐트 안에 몰아넣고는 당하고 있는 저 주변에 빙 둘러서서는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물론 그런 짓은 저만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넷 모두 돌려가며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5일 만에 놈들은 우리를 텐트 안에서 나오면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였고 인기척이 살아지자 밖으로 나갔더니 놈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아니하였고 그러자 안신을 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지만 사라진 저나 우리 넷의 순결이 다시 정상으로는 오질 아니하였습니다.
그길로 텐트를 정리하고 구멍가게로 가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였지만 이미 놈들은 거제도에서 자취를 감춘 후였고 되레 우리가 강간을 당한 사실이 우리들 부모님은 물론이고 학교까지 전해지는 안 좋은 결과만 생기고 말았답니다.
전 집으로 와서는 외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개학에 되어서도 학교에도 가질 아니하였습니다.
학업까지도 포기하게 만든 사건이었답니다.
소문에 의하면 인숙이와 민정이는 임신까지 되어 그 어린 나이에 중절 수술까지 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다행이 저는 임신을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남자를 경멸하기 시작하였고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는 앉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모님들과 외식을 할 경우에도 전 어느 놈 입에 들어갔다 나왔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제 전용 수저를 들고 다녔을 정도로 전 남자에 대한 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 졌습니다.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언니는 학업을 하여 학비를 부모님이 대었지만 저는 집에서 방구들만 지키며 부모님의 등골을 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고 일 때 학업을 포기 한 년이 해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찾다, 찾다 찾은 곳이 고작 남의 식당에서 설거지며 허드레 일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게 제 나이 23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돈이 몇 푼 모이자 월세 방을 하나 얻어 독립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생고생하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일이 다시 터지는 계기를 만든 것은 제 나이 27살 때부터입니다.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하던 저에게 한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음식솜씨에 감탄한 사장님이 저를 자기 횟집 밑반찬 찬모로 오라며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고 난 거기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그 횟집의 사장님은 저와 10살이나 차이가 나는 40살이었는데 저처럼 독신이었지만 저와는 겨우 17살차이 밖에 나지 않던 13살 먹은 아들을 데리고 횟집 안의 방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독신으로 아빠라고 부르는 아들을 둔 것에 대한 이상한 생각은 몇 칠이 지나지 아니하여 간단하게 풀려버렸습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사장님의 아들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죽은 형님의 아들이었고 형님이 죽자 형수는 그 아이를 당시 횟집 주방장으로 일하는 시동생에게 맡기고는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는 아주 착하였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따뜻한 정은 받지 못 한 탓에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같이 있는 동안에 저도 모르는 연민이 그 애에게 싹텄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사장님은 제가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주의자인 것을 알고 은근하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애 때문에 누구도 자기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 애 엄마로 살아달라는 조로 말입니다.
그 애 엄마로 살아달라는 말이 제 가슴에 와 닿더군요.
거제도의 몸서리치는 사건을 겪은 탓에 남자에 대한 믿음성이 없어진 저였지만 그 애 엄마로 살아달라는 말은 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녹게 만들었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를 하는 조건과 급료는 평소처럼 주는 것을 조건으로 함께 살기로 하였고 살림을 합치게 되자 횟집 안에서 생활하기에는 부적합하여 인근에 다세대 주택을 하나 구입하였습니다.
횟집 사장님 아니 동거남과의 섹스는 저를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동거남의 얼굴에서 고등학교 일학년 때 거제도로 피서여행을 떠나서는 9명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무려 5일 씩이나 그도 친구 셋과 합쳐서 내 명이 거의 백 회는 훨씬 넘고 이 백 회는 조금 안 될 정도로 돌려가며 강간을 하던 그 나쁜 놈들의 얼굴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도리질을 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놈들의 잔상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고 또 남자 한 놈이 콘돔을 하고 먼저 눕고는 우리들에게 앉은 대로 후장에다 좆을 넣게 만들고는 밑에 깔린 놈의 좆이 후장에 들어가기 무섭게 저를 끌어안아버리면 다른 놈이 이번에는 우리 몸 위에 몸을 포개고는 좆을 박으면 다른 놈이 우리에게 와서는 좆을 빨고 흔들라고 하던 것이 머리에서 다시 살아나지 뭡니까.
잊을 방법을 찾아야 하였습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여도 막상 동거남이 제 몸 위에 올라와 좆을 보지에 박는 순간부터 강간을 한 놈들의 잔상이 되살아나는 데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반면 평소에는 동거남의 행동이나 인상 그리고 마음씨 등등에서는 조그만 하자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제 몸에 올라오면 그 순간부터 징그러운 송충이가 제 몸 위에서 기어 다니는 느낌과 함께 강간범들의 잔상이 떠오르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지 못 하고 총각인 동거남의 육욕을 채워주지는 아니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횟집이라는 곳이 이런 곳입니다.
횟집 사장이자 동거남이 수산시장으로 새벽에 나가서 경매가 끝난 활어와 양식한 횟감 고기들을 사 오면 8시가 조금 넘고 그러면 때늦은 아침을 챙겨먹고는 먼저 가게로 갑니다.
그럼 저는 집에 남아서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어 돌렸다가 빨래가 끝나면 널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사이에 집안을 대충 청소하면 11시경이 됩니다.
횟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점심 손님들을 위하여 간단한 밑반찬을(회 덧 밥의 경우 밑반찬은 김치 외에 3가지 정도의 밑반찬이면 충분함)만들고 전날 회를 뜨고 난 고기들의 대가리와 뼈들로 시원한 매운탕을 큰 솥에 듬뿍 끓이면 준비는 끝이고 점심 손님이 들어 닥치면 접시에 반찬을 내고 뚝배기에 매운탕을 덜어서 데워 내면 그만이고 회 국수 주문이 들어오면 국수를 삶아서 사장 겸 주방장인 동거남에게 주면 저의 일을 끝입니다.
점심 장사가 끝이 나면 다시 집으로 잠시 들릅니다.
손님들이야 가금 횟집에서 밥과 술을 먹기에 질리지 않지만 식당을 하는 사람들 식당 밥이라면 물려서 먹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보기도 싫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결론을 말씀 드리면 화학조미료를 엄청 많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식당 음식 드시고 나면 항상 물이 쓰이는 것 있죠?
그 이유가 바로 화학조미료에 있는 것입니다.
화학조미료가 물을 당긴다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시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라면을 삽니다.
한 개는 겉포장에 MSG無첨가 라는 문구가 없는 것을 사고 MSG無첨가 라고 쓰인 것을 산 후 포장에 적힌 대로 물을 사용하여 끓이고 친구나 가족끼리 따로 한 가지씩 드시는 겁니다.
그렇게 드시고 나면 분명한 것은 MSG無첨가 라는 문구가 없는 것을 드신 분은 물을 찾을 것이고 MSG無첨가 라고 쓰인 것을 드신 분은 물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화학조미료는 물을 당기에 하지만 가금 먹을 때는 먹기 좋게 당기는 것이 화학조미료를 첨가한 음식인 것입니다.
각설하고
동거를 시작하며 인근에 다세대주택을 살림집을 옮기고 집에서 아침을 지어 먹였더니 동거남은 물론이고 아들까지도(동거를 시작하자마자 붙임성이 좋은 아이가 저에게 엄마라고 했고 그래서 저도 비록 동거를 하는 형편이었지만 아들이라고 불렀음)집 밥이 훨씬 맛있다는데 적어도 아침 한 끼 정도는 해 먹이기로 작정하였지만 집 밥 몇 칠 만에 동거남은 식당에서 일만하지 다른 종업원들이 식사를 하면 같이 먹던 버릇을 사라지고 퇴근까지 쫄쫄 굶으며 칼질을 하였고 아들도 장사를 하느라 늦게 집으로 가기에 식당으로 와서 먹던 버릇이 없어지고 늦게 나와 동거남이 집으로 올 때까지 밥을 쫄쫄 굶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점심 장사가 끝나면 집으로 들르게 되었습니다.
친아빠도 아닌 작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그런 작은 아빠하고 동거를 하는 저에게 깎듯이 엄마라고 불러주는 우리 아들이 내가 집으로 갈 때까지 쫄쫄 굶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와 잠시 틈을 내어 집에 들러 밥을 앉혀놓고 찌개와 수족관에서 죽기직전에 고기의 피를 빼고는 냉장실에 보관을 한 생선을 구어 놓고 몇 가지 밑반찬은 만들어 놓고 다시 가게로 가는 것은 동거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부터 계속 되었습니다.
동거남이 제 몸 위에 올라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였지만 제가 해 준 음식이 마음에 들어 거의 12시가 넘어서 저녁을 먹어주는 동거남과 엄마 정도 모르고 작은 아빠 밑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아들이 학교와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와 밥통을 열면 따뜻한 밥이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찌개 뚝배기와 프라이팬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이 있으며(아들은 생선 광이라고 할 만큼 생선구이를 좋아함)식탁 위에는 조촐하지만 정성이 담긴 밑반찬이 놓여 있기에 찌개와 생선을 조금만 데우면 훌륭한 저녁이 될 것이고 그것들을 맛있게 먹어준다는 생각만 하면 저는 그저 신바람이 났기에 가제에서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싫지가 아니 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하였습니다.
“아~엄마 아~흑 엄마 아빠만 좋아하지 말고 나도 좀 생각 해줘 아~흑”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점심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는데 아들 방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살금살금 걸어서 아들 방 앞에서 문틈으로 아들 방안을 봤습니다.
“!”아들 방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의 아들이 언제부터 시작을 하였는지는 몰랐지만 그 어린 나이에 자위를 하고 있었고 손에 들려진 것은 제가 빨려고 세탁기 안에 벗어둔 제 팬티였으며 아들은 제 팬티로 자신의 좆을 잡고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엄마 나와! 나와!”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작을 한지 제법이 되었던지 좆 물이 아들 좆에서 튀어 나왔고 아들은 나오기 시작하자 팬티 앞의 제 보지가 닿았던 부분으로 좆으로 겨냥하고 쌌습니다.
아들하고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되고 아들이 제 팬티를 이용하여 자위를 한 사실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들이 좆 물을 제 팬티를 향하여 쏘는 동안 저는 다시 살금살금 현관으로 나가서는 소리도 안 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5분여를 기다렸다가는 들어갔습니다.
“누가 왔나? 기찬이 왔니?”아들이 들리게 크게 말하며 현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응 엄마 오늘 시험 마지막이라 도서관 안 갔어.”아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기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래? 시험은 잘 봤고?”저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때고 물었습니다.
“본다고 봤지만 잡념이 생겨서 그런지 공부가 안 되어 대충 봤어”아들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무슨 잡념?”하고 물으면서도 속이 뜨끔하였습니다.
아들이 말한 잡념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을 하였지만 강간으로 인하여 저는 섹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동거남은 형님의 아들 때문에 시집을 오려는 여자가 없었기에 나이가 40이 되도록 총각으로 지내가다 나란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자 그 동안 못 한 빠구리를 원도 한도 없이 하려고 들었고 밑에 깔린 저의 경우 마치 마루타처럼 아무 반응을 안 보인 반면 동거남은 그런 저에게 흥을 돋우려는 마음인지 아니면 흥분이 그렇게도 격렬하게 나는지는 모르지만 교성을 지르는 통에 평소 행여 아들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였던 것인데 그게 아들에게 잡념의 원인이 되었음은 직접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짐작으로도 알 수가 있는 일이기에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모른 척 하였던 것입니다.
“엄마는 몰라도 돼 참 밥하러 왔어?”아들이 물었습니다.
“응”하고 대답하고는 싱크대 앞으로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아들의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 시켰습니다.
아들은 잠시 후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바지주머니가 조금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자위 때 사용한 제 팬티를 세탁기 안에 원위치 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 오늘은 두부 김치찌개 끓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