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날 2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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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
좁은 길이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길과는 달라서 조명이 그렇게 밝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민이네 원룸으로 가는 그 좁다란 길은 큰 길과는 달라서, 술 먹고 토하거나 헤롱 거리는 대학생 들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한때는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대학에 와서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만, 매번 저것이 대단한 것인양 목숨걸고 술을 퍼마시고, 길에서 정신을 잃은 것을 무용담 처럼 이야기 하는 아이들이 싫고 한심해보였다. 기껏해야 머리속에 있는 것은 청춘사업이요, 걱정 거리라고는 당구점수와 바꾼 학점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부양가족을 끌고 살아가는 가장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분명 저기서 비틀거리는 이들은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어느새 부터인가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한별이 처럼 사랑에 다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도 있을 테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최고로 두는 법이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도...정신이 맑아서 아무 생각도 안들어.”
“거짓말 말아요. 비틀 거리시면서.”
우습게도 남자인 내가 가냘픈 유민이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은 취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스탭이 꼬였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저번에 한별이 앞에서 그런것처럼 우당탕 굴러 넘어지며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을때에 나는 달콤한 향기가 좋았다.
“한별인 집에 있을까요?”
“글쎄...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나갔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그녀라면 가만히 집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게를 나설때에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표정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건물로 들어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릴때까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내 손을, 유민이는 살짝 잡아쥐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닿으니 정신이 번쩍 하고 들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면 유민이의 얼굴이 보였다. 짧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귀여웠다. 한별이와는 달리 옅은 화장을 즐겨하는 그 습관이 그녀를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듯했다. 동그란 눈, 그리고 도톰하지만 앙증맞은 입술을 보면서 예림이를 떠올렸는데, 이제보니 예림이와 너무 다르다. 예림이와 달리 머리도 짧고, 키도 약간 더 작았다. 어른스런 옷차림을 즐겨하는 예림이와는 달리 또래 여자아이들 처럼 발랄하고 귀여운 의상을 선호했다. 유민이는...예림이 대신에 대리만족을 하며, 해서는 안될 일을 시키는 본능에서부터 피할 도피처 따위가 아니었다.
“잠깐만요..”
“괜찮아. 나 혼자 서있을수 있어. 그렇게 안취했다니까?”
“그래두요.”
그녀는 여전히 어깨에 내 팔을 걸치고는 열심히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꺼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애를 쓴 끝에 현관문은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방에 조명이 켜지니, 아기자기한 방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침대 하나..그리고 그 옆에는 책상..책상앞에 있는 걸상에 걸린 몇 개의 옷가지들..내 시선이 차곡차곡 옷들이 포개어진 의자 쪽으로 향하자, 유민이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나를 두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앗! 치우는 걸 깜박해서..”
“어엇!”
유민이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얼른 옷들을 챙기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조금이나마 그녀에게 기대고 있던 내 중심은 유민이가 뛰쳐 나가면서부터 완벽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현관에 털썩 주저 앉았고, 주저 앉는 과정에서 무려 세 번이나 신발장에 머리를 박는 장관을 연출해 주었다.
“괘..괜찮아요 선배?”
“아우...그렇게 갑자기 뛰어가면 어떡해..아우..머리야..”
안그래도 머리가 짧아져서 완충작용을 못받는 내 머리를 싹싹 비비며 끙끙거렸다. 한동안 유민이 쪽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아 고개를 드니, 그녀는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죄..죄송해요..윽!풉!”
“이게 그렇게 웃겨?”
“혼자 서있을수 있다더니...그렇게 재밌게 넘어질..줄은..쿡!..”
누군가를 웃기는 데에 소질이 없는데, 이상하게 내가 넘어지기만 하면 한별이고 유민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사회과학대 앞을 지나가다가 제대로 한 번 미끄러졌을때, 박인재가 내 옆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김예영 넌 몸개그에 소질이 있어.-
“내가 몸개그에 소질이 있나봐.”
“쿡! 훕..”
한참이나 참던 유민이는 내 중얼거림에 본격적으로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아까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아예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치마를 입은 하얀 종아리가 눈가에 아른 거렸지만, 짧은 치마가 아니어서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와인 보다 차는 어때요?”
“차?”
“선배는 몸도 못가눌 정도로 취했으니까...”
“...그게 아니래도. 난 와인 마실거야. 넌 차 마셔.”
“좋아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푹신한 침대에 걸터 앉을 때쯤, 주방의 찬장에서 조그마한 와인병을 꺼내는 유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까치발을 하고서 와인을 꺼내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좁은 원룸으로 향긋한 차향과 와인향이 뒤섞여 가득차기 시작했다.
몸이 더워졌다. 봄이 찾아왔지만 밤공기는 아직 쌀쌀한데, 유민이가 내민 와인을 한모금 마시니 열기가 확 하고 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침대 위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방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제 당장 내일모레네요.”
“음..그러네. “
생각했던 것보다 암담하거나, 혹은 침울함이 밀려오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가까워지니 덤덤해 지는 것 같았다. 내일 모레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건데, 이상하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걸까?
“남은 시간은 뭐하실거에요?”
“글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뭐 남은 시간에 의미 둘 필요는 없는거 같아. 오늘은 너와 있을거고...내일은...뭐라도 하겠지?”
사실은 별 계획이 없었다. 되도록 이면 예림이와 함께 있어야 하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내 말에 늦지 말라는 당부만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찾아온 적막에 어색해 할 때쯤에, 유민이의 머리가 스르르 내 쪽으로 기울며 어깨에 안착했다. 향긋한 냄새는 더욱더 가까워 졌다. 아마도, 유민이는 굉장히 용기를 내어 한 행동일 것이다.
“선배.”
“응.”
“2년후에..어떤 모습일까요?”
“나 말하는 거야?”
“아니..우리 둘 다요.”
그때도 이렇게 어깨에 기댈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못지 않게 유민이에게도 이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덧붙여서, 조용히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도, 그 떨림이 어깨에 전달되며 느껴졌다.
“모르겠어.”
“왜 확답을 주지 않나요?”
“뭐가?”
울먹이는 것을 숨기고 억누르려 해서인지, 희미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 같았다. 손에 들린 와인잔을 비워, 그것을 책상 위로 살며시 올려두었다.
“키스도 했고..손도 잡았잖아요. 그런데 왜 확답을 주지 않나요? 나도...겨우 기다리고 기다려서 여기까지 온건데..”
그녀는 끝내 우는 소리를 내게 들려주고 말았다. 조금 남아있는 양심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사귀자라는 그 흔하고 쉬운 말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일까? 어쩌면 유민이는 내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유민이는 그저 ‘예림이를 대신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서야 겨우 유민이가 예림이와 달라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져 있었다. 예림이는 내 마음속에서 너무나 커져 있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민이의 존재를 지우기도 버거웠다. 애정 결핍증 환자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이제 군대 가는데...그걸 표현하는게 더 나쁜놈이 되는 것 같았어.”
한참을 생각하고 망설인 끝에 해버린 변명이었다. 통할리가 없는 변명일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다만 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말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을 뿐이었다.
“누구와 함께 가나요? 내일 모레.”
“누나랑 갈 것 같아.”
“역시..가족하고 가는게 좋겠죠.”
예림이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 하늘 아래에 나와 예림이, 그리고 한별이 뿐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리가 없는 유민이는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서서히 말라가는 눈물 뒤로 한층 더 반짝이게 된 눈이 예뻤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마음 속에서는 무방비 상태의 유민이를 공격하라는 신호가 내려지고 있었지만, 한별이가 아닌 유민이는 공격하면 다칠 것만 같은 여린 꽃이었다. 내 어깨에 느껴지던 가벼운 그 감촉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엔, 이미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호흡소리가 들릴 만큼 너무나 가까웠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민이에게 나는 우연의 연장선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유민이는 가치를 재발견한 보석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입술에 내 것이 닿았다. 살짝 말라있는 듯한 그녀의 입술을 조금씩 축여주기 시작했다.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르고 침대 시트만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언제부터인가, 키스를 하면서 상대의 동향을 살피는 못된 버릇이 몸에 베어 있었다.
유민이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단맛이 나는 듯한 달콤한 입술위를 쉴새 없이 내 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허리를 끌어 안을 때에 살며시 열린 그 틈으로, 나는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 안으로 침투해 버렸다.
“읍..음..”
실눈을 떴을때 곱게 감겨있는 눈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버릇이 남아있는 이상 아마도 평생 로맨틱한 키스는 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러개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뻔뻔한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로 로맨스라는 단어를 내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껴안고 살며시 무게를 싣자, 무방비 상태의 그 가녀린 몸은 여지없이 침대 위로 넘어가 버렸다. 푹신한 메트릭스가 우리 둘의 무게 때문에 살며시 밑으로 꺼지는게 느껴져왔다. 자세가 무너지면서 입술이 떨어지는 그 잠시간의 틈도 놓치지 않고,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았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이미 과제를 핑계로 그녀와 단둘이 있을때 나는 유민이와 키스라는 걸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슬아슬하게 스킨쉽의 줄타기를 한 것은 예림이가 아니라 유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예림이에게는 강하게 밀어 붙여 놓고서, 유민이 앞에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술을 마셨지만 나는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았다. 급할 수록 즐기고 싶어졌다. 한별이처럼 욕구가 전신을 덮어버리는 그 기분이 아니라, 그 두근거리는 야릇한 기분을 조금더 만끽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키스는 짙어져 갔고,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던 유민이도 적극적으로 내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내 목에 자연스레 둘러졌을 때엔, 내 손은 이미 유민이의 몸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긴팔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을때에 부드럽게 내 손에 감기는 촉촉한 피부 감촉이 좋았다. 이 옷에 감춰진 유민이의 모습은 어떨까? 예림이 처럼 글래머인지, 숙모처럼 마르고 날씬한 타입인지, 한별이처럼 가슴은 크지 않지만 신체 벨런스가 좋아서 몸매가 균형잡힌 타입인지..어떤 스타일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하아..”
입술을 떼었을때 그녀는 나를 보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미세하게 흔들리는 호수의 수면처럼, 파르르 파장이 일어나는 그 눈빛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거부감 따위는 없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군대에 가니까. 모든 것은 이 말 하나로 면죄부가 부여된다. 군대에 가니까 이렇게 여자에 욕심내도 상관없다고 내 몸은 그렇게 편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예림이에게 동생이기를 포기한 그 순간부터 나는 합리화 따윈 필요없는 악당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티셔츠를 위로 잡아 올렸다. 잔뜩 긴장에 물들어 있던 눈빛이 순간적으로 티셔츠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잔뜩 뻣뻣해진 그녀의 몸 에서 티셔츠를 벗겨 내었을 때엔, 연보라색 브래지어에 감춰진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생각했던 것처럼 유민이는 날씬한 타입이었다. 예림이처럼 가슴이 크고 균형잡힌 편은 아니었지만, 한손에 딱 들어오는 적당한 사이즈였다. 남자에게는 찾을수 없는 허리의 곡선도 명확했다. 남자가 여자의 몸에 끌리는 이유는, 곡선이 유려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잠깐..”
유민이는 내 손길에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편승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덜컥 겁이난 모양이었다. 예림이 처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준다면 좋을 텐데..오늘 따라 유달리 밝게 느껴지는 조명을 등지고 나는 그녀의 몸을 끌어 안았다.
“잠깐만요..선배..앗..!”
브레지어 위를 움켜쥐는 내 손을 순간적으로 붙잡은 그녀지만, 쉽사리 힘을 주어 끌어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멈출 수 있는 자제력따윈 없었다.
그녀는 나를 만류하는 대신, 눈을 감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 숙모가 내게 했던 대응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었다. 가늘게 뻗은 다리를 더듬고, 점점 손을 위로 올려 도톰한 허벅지의 깊은 곳 까지 파고들 때도,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두 눈을 뜰 용기는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흑!”
내가 그녀의 치마 안으로 얼굴을 묻었을때, 더이상 참을수 없었는지 유민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행동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황급히 다리를 오무려 내 얼굴을 조여대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었고, 역시 연보라빛 빛깔을 띄고 있는 작은 천조가리위에 입을 맞추었다.
유민이의 다리 사이는 부드러웠다. 연두부처럼 몰캉몰캉한 허벅지의 감촉에 세포 하나하나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손으로 팬티를 살짝 옆으로 젖히니, 그리 많지 않은 털 밑으로 수줍게 포개어져 있는 그 은밀한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흑..아..거긴...선배..샤..샤워하면 안되요 우리?”
하지만 그녀의 말에 내가 멈출리 없었다. 보통의 연인들의 스킨쉽처럼, 분위기라는 큰 바람을 타고 흘러온 것은 한 번 깨지면 바로잡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답대신 옆으로 젖혀진 팬티 사이로 보이는 그 연약한 살덩이를 입안 가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아..앗! 흑...으으..”
유민이의 몸이 몇 번이고 꼬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최후의 반항이었던 허벅지 역시 자연스레 양옆으로 벌어지며 닫아두었던 성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탐닉하는 사람처럼 입을 앙다문 그 보지 위로 부지런히 혀를 놀렸고, 점차 내 침인지 그녀의 애액인지 알수 없는 액체로 팬티가 젖어가고 있었다.
야하고, 또 야릇했다. 연신 끙끙거리는 그녀의 소극적인 신음소리도 귀여웠다. 이 아이가 이렇게 목소리가 예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민이의 속살을 양옆으로 벌려 고정한 내 손가락도 뜨끈한 액체에 미끌미끌해 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외모와 순수해 보이는 눈웃음을 추종하는 우리과 아이들이 본다면 모두 얼어붙을 정도로, 그녀의 신음소리는 조금씩 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흑..흑..흐응..제발..아앗..”
이제는 내가 참기 힘들어 조금씩 팬티를 끌어 당겼다. 한별이라면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나를 도왔을 텐데..유민이는 그 사소한 움직임도 부끄러운지 가만히 있을 뿐이어서 조금 힘이 들었다. 한참을 자그마한 천조각과 씨름한 끝에, 유민이의 하얀 발목에는 끈처럼 둘둘 말린 연보라빛 팬티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그녀의 다리사이로 몸을 파고든 나는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내가 옷을 벗는것을 알고 있을텐데, 유민이는 눈을 감고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손을 가슴쪽으로 모아 드러난 상체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흉측하게 달아오른 내 아랫도리가 바깥바람을 쐴 때까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브래지어마저 벗기고 나니 너무나 야릇한 복장이 되어 있었다. 치마 한장만 남아 있는것이, 전부 알몸이 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팔랑거리는 그 얇은 천조각을 조금만 위로 들춰도 흠뻑 젖어있는 유민이의 보지가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듯,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 덮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으며 그녀의 몸을 건드렸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한별이처럼 남자를 많이 겪어본 아이가 아님은 확실해 보였다.
“흑! 아아..”
잔뜩 성이난 자지의 기둥을 잡고, 붉게 충혈된 귀두를 그녀의 입구에 비비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돌진하기엔 성의 입구가 너무나 좁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질척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분신의 앞부분은 그녀의 젖은 살점속에 묻혀 천천히 길을 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점막이 그 부위를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좋은 느낌이 났다. 엄지 손가락을 살짝 클리토리스에 대니, 그녀의 몸은 더 확실히 반응했다.
“아앗! 으응..흐으응..”
야하지도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의 행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져 뿌듯했다. 쿵쾅 거리는 가슴은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치마를 살짝 위로 올려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게 한 나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흑..아..아파요..”
내 것이 큰게 아니라, 그녀의 입구가 너무 좁았다. 마치 좁다란 병의 입구로 꾸역꾸역 무언가를 억지로 집어 넣는 느낌이었다. 내 귀두를 힘겹게 삼킨 그녀의 보지는 내 분신의 두깨만큼 늘어나며 조금씩 나를 받아 들였다. 질 벽의 오돌토돌한 느낌까지 모두 전해지는 듯한 짜릿한 쾌감이었다.
“흑! 아으으응..”
자지가 반쯤 들어갔을 뿐인데, 벌써부터 황홀한 기분이 들어왔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뿌리까지 깊숙히 몸안으로 침투시켰을 때, 살며시 찡그려진 그 표정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아..아파..흑..흐윽..”
감은 두 눈 사이로 희미하게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움직였지만 마치 누가 손으로 꽉 쥔것 같은 착각이 들어왔다. 무엇보다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도 쉴 새없이 뜨거운 액체를 흘리는 듯한 그 느낌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처..천천히..해주세요..흑...하응..흑”
가느다란 다리가 내 어깨에 걸쳐졌고, 그 때문에 내 자지가 박힌 그 은밀한 부위는 적나라하게 내 시선으로 들어왔다.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의 손이, 어설프게 내 등을 끌어 안았다.
“흑!흐윽!”
내 허리가 조금씩 빠르게 속력을 붙여가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도톰한 예림이 만큼은 아니지만,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 몸이 움직이는 리듬과 맞춰져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아랫도리가 녹을 것만 같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왜..어째서 남자들이 섹스를 할때에 사랑한다는 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경험을 한두번씩 하는지 실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아! 아흑! 하앙..하아아아!”
유민이의 신음소리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내 밑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에 긴장감 대신 쾌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성의 끈이 뚝하고 끊어졌다.
“어..어떻게 하려구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며 뒤로 누워버리자, 졸지에 내 위에 올라타게 된 유민이는 울상을 지으며 당황했다. 밑으로 늘어진 치마를 살짝 들추니 아직 꼭 맞게 결합되어 있는 나와 그녀의 하반신이 보였다. 우리 둘의 몸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움직여줘 유민아.”
내 부탁에 그녀는 어쩔줄 모르며 당황해 했지만, 이윽고 손을 내 가슴으로 뻗어 중심을 잡았다. 어설프지만 눈가를 찡그리며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흑..흑..흐응..”
치마가 다시 덮여져 보이지 않았지만, 유민이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설프기 그지 없는 동작에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꾹 참고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살짝 잡아 주었다. 말랑말랑한 가슴이 손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모..못하겠어요..힘들어요.”
짧은 머리칼이 땀 때문에 이마에 붙어 있는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울상을 짓는 모습에 살짝 미소까지 나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와 마주보고 앉는 자세를 취했고, 유민이는 본능적으로 내 목을 끌어 안아 몸을 지탱했다.
철썩..철썩..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야한 소리가 좁은 원룸을 울려대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내가 유민이의 몸을 상하로 흔들어 대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냘픈 몸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면 할수록,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내 자지에 계속해서 강한 자극이 전달되고 있었다.
“흑! 아아..선배..으으응..흑!흐응..”
내 알몸과 맞닿아진 그녀의 몸은 너무나 뜨거웠다. 좁디 좁은 그녀의 몸속은 내 몸 전체를 포박하고 조이는 것만 같았다. 결합을 한 상태에서는 움직이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땀에 잔뜩 젖은 내 몸이 유민이의 몸과 한치의 오차없이 달라붙었다. 그 연약한 살이 내 몸에 닿아 일그러졌다.
“아앗! 아..안돼!흑!”
쉴새없이 그녀의 몸안에서 움직이던 내 분신에서 부터 짜릿한 느낌이 전달 되기 시작했다. 좁디 좁은 그녀의 통로에서 한참이나 용을 쓰던 내 하반신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유민이 쪽에서 먼저 내 입술을 갈구하며 키스를 해오고 있었다.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몸안에 잔뜩 싸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앗!”
황급히 그녀의 몸을 위로 들어올려 꺼떡거리는 자지를 빼내었을때, 마주보고 앉아 있는 그 자세의 탓인지 그녀의 치마위로 하얀 궤적이 흩뿌려졌다. 마치 용천대처럼 뜨끈한 물이 솟아 나오는 그 광경에 유민이는 황급히 내 목을 끌어 안았다. 그녀의 허벅지 속에 파묻힌 내 중심부 에서는 아직도 사정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하아..하아..”
숨가쁜 호흡 소리만이 방을 매웠다. 땀에 흠뻑 젖은 나와 유민이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끌어 안고 있을 뿐이었다. 쉬이 입을 열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내 팔에 잡히는 부드러운 등의 감촉을 느끼며 그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허무함은 아니었으나,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과 남자애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두 명의 퀸과 잤다라는 성취감 따위도 없었다. 그녀를 가졌다는 뿌듯함 대신에, 주었던 사랑을 되돌려 줄 일에 눈 앞이 막막해질 따름이었다.
“떨어지지 말아요. 창피해요.”
온몸이 젖어, 그것도 앉아 있는 채로 껴안고 있는 것이 어색하여 그녀를 밀어내려는데, 유민이는 조용히 속삭이며 더 강하게 내 몸을 끌어 안았다. 이제는 흠뻑 젖어버린 그녀의 치마위로, 군데 군데 보이는 하얀 얼룩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흑..흑..”
내 품에서 유민이가 또 한번 흐느끼기 시작했다. 달콤한 시간이 끝나고 이별이 존재하는 ‘뜨거운 안녕’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울먹이는 것이었다. 조그만 몸을 안고 있는 내 가슴 속으로 일말의 책임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미 내가 여러개의 사랑을 취한 이상, 예림이에게만 책임감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울지마...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할 수록, 유민이의 흐느낌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녀와 내가 엮어지기 위한 우연은 아마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안 변할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내 품에서 속삭이는 유민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욱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내가 변할 자격 같은게 있을까? 그녀의 말대로, 2년후의 우리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은 그때까지 유민이가 나를 좋아하는 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미 내게 선택권 따윈 없다.
“어서 씻자. 몸이 다 더러워졌잖아. 옷도...”
“으아아앙!”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거세졌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자제하기가 힘든 것일까?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오열하는 그녀를, 품안 가득 끌어안고 한참이나 좁은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예림이에게 늦을 거라고 말했고, 또 그 말을 들은 예림이도 실컷 놀다가 들어오라고 대답해 주었지만, 어쩐지 목소리에 서운함이 베어 있는 것 같아 찝찝했다. 샤워를 마치고 이불로 알몸을 가리는 유민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준 나는, 시원한 것을 사러 옷을 걸쳐입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녀의 집 앞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하도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들어와 추태를 부려서 인지, 알바생의 표정도 많이 지쳐 보였다. 유민이의 몫까지 두 개의 캔 음료를 산 나는. 밖으로 나오다가 그만 깜짝 놀라 멈춰서 버렸다.
“흠...”
편의점 밖에 있는 몇 개의 파라솔 중에서 한 개의 테이블을 잡고, 혼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한별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엠티에서 보았던 것처럼 편한 면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잠시 나오는 것이라 양말을 신지 않은 내 발을 본능적으로 그녀의 앞에서 숨겼다.
“주무시고 가시나요?”
“그럴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를 보며 살짝 웃는 그 미소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봉투속에 손을 넣어 맥주캔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 들고는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여기서 뭐해?”
“제가 물을 말인거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캔을 목으로 넘기니, 아까 내 몸에서 빠져나갔던 수분이 보충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며 상쾌해졌다. 오늘따라 맥주맛이 좋았다.
“의외네요. 선배도 유민이를 많이 좋아하나봐요.”
“무슨 말이 그래?”
“제가 자고 가라고 할 때는 그냥 갔으면서.”
그녀의 말에 주변을 서성거리던 대학생 몇명이 우리 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의 당황한 기색없이 맥주를 마시는 그녀를 보며,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말했지만, 나는 자고 갈 생각이 없어.”
“적어도 늦게 갈 생각인 건 아니구요? 그렇다면 왜 굳이 음료를 사러 편의점까지 오셨어요? 집에 갈때 사서 드셔도 되고, 유민이네도 물은 있을 텐데.”
“됐어. 그런거 다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냐.”
화장기 없는 한별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평소처럼 알 수 없는 미소가 아닌, 뭔가 순수해 보이는 미소였다. 물론 그것이 그녀와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일 모레..어디로 가요?”
“논산. 한 시까지 가면 될 거 같아.”
“따라가진 못하겠네요. 누나랑 가실 테니까.”
“그래야지.”
후드에 반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뽀얀 피부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어?”
“목이 말라서요. 맥주도 먹고 싶고..혹시나 선배 나오면 만날때 재밌겠다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 안좋은 장난 치는 버릇좀 버려.”
“왜요? 유민이도 내 친구고..내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랑 잘 되는지 궁금한건 당연한 건데?”
“별로 안친하다고 하지 않았어 유민이랑?”
“뭐..예전엔 그랬죠. 근데 지금은 달라요. 나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친해져야죠.”
“비슷한 점이라니?”
“선배는 몰라도 되는 여자들의 세계에요.”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홀짝 거리는 캔 맥주가 어느새 반으로 줄어 있었다. 화끈해진 볼에 캔을 가져다 대니 차가운 느낌이 들어 시원했다.
“그래도..섭섭하네요. 유일하게 친한 선배인데.”
“이제 곧 차차 생길거야. 친한 선배가.”
“그렇겠죠. 물론 선배와 내 관계와 같은 절차를 밟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의 말에 이번엔 내가 피식 웃었다. 여우같긴 하지만, 그래서 그녀와의 대화는 더 재미있었다. 알쏭달쏭한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좀처럼 내비추지 않는 속내를 파악하려고 그녀를 관찰하는 것도 은근히 즐거웠다. 2년후의 한별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니, 100일 휴가만 되어도 그녀는 많이 바뀌어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보면 한동안 못보겠지만, 편지 정도는 써드릴수 있어요.”
“면회는?”
“당연히 멀면 안가죠. 저도 바쁜데.”
“잘났다. 그래.”
“먼저 들어갈게요.”
어차피 같은 건물로 들어가겠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나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유민이의 집으로 가지 않고 한별이가 있는 방으로 세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왠지 한별이가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크게 한몫했다.
그녀가 건물의 입구 안으로 사라지고 또 몇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학생들도, 다른 술집으로 떠난 건지 해산을 한건지 거리는 금세 썰렁해졌다.
띵동.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유민이의 집 현관에 가서 나는 이유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게다가 샤워를 하고 나와 아직도 젖어 있는 머리칼. 한별이는 내 차림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빤히 바라보던 눈빛이 왠지 내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오빠에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자, 아직도 이불을 덮고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유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음료수만 사온다는게 너무 늦게 온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선배에서 오빠로 바뀐 유민이의 호칭이 묘하게 계속 되뇌여졌다.
“왜 지금에서야 와요?”
“아..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했어.”
“군대가는거 때문에요?”
“응.”
이불 위로 보이는 하얀 어깨가 예뻐보였다. 샤워를 하고 나서 젖은 머리결이, 그 하얀 어깨와 대조를 이루며 늘어뜨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갈증이 속에서 부터 올라왔다. 침대에 그녀와 나란히 눕자마자, 다시한번 품안으로 유민이를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나에게 힘없이 끌려와 안기는 살결이 부드러웠다.
뒤늦게, 아까 다 깨어버린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유민이의 몸을, 나는 한참이고 껴안은 채 시계를 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좁은 길이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길과는 달라서 조명이 그렇게 밝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민이네 원룸으로 가는 그 좁다란 길은 큰 길과는 달라서, 술 먹고 토하거나 헤롱 거리는 대학생 들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한때는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대학에 와서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만, 매번 저것이 대단한 것인양 목숨걸고 술을 퍼마시고, 길에서 정신을 잃은 것을 무용담 처럼 이야기 하는 아이들이 싫고 한심해보였다. 기껏해야 머리속에 있는 것은 청춘사업이요, 걱정 거리라고는 당구점수와 바꾼 학점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부양가족을 끌고 살아가는 가장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분명 저기서 비틀거리는 이들은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어느새 부터인가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한별이 처럼 사랑에 다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도 있을 테니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최고로 두는 법이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 생각도...정신이 맑아서 아무 생각도 안들어.”
“거짓말 말아요. 비틀 거리시면서.”
우습게도 남자인 내가 가냘픈 유민이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은 취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스탭이 꼬였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저번에 한별이 앞에서 그런것처럼 우당탕 굴러 넘어지며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을때에 나는 달콤한 향기가 좋았다.
“한별인 집에 있을까요?”
“글쎄...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나갔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그녀라면 가만히 집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게를 나설때에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표정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건물로 들어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릴때까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내 손을, 유민이는 살짝 잡아쥐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닿으니 정신이 번쩍 하고 들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면 유민이의 얼굴이 보였다. 짧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귀여웠다. 한별이와는 달리 옅은 화장을 즐겨하는 그 습관이 그녀를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듯했다. 동그란 눈, 그리고 도톰하지만 앙증맞은 입술을 보면서 예림이를 떠올렸는데, 이제보니 예림이와 너무 다르다. 예림이와 달리 머리도 짧고, 키도 약간 더 작았다. 어른스런 옷차림을 즐겨하는 예림이와는 달리 또래 여자아이들 처럼 발랄하고 귀여운 의상을 선호했다. 유민이는...예림이 대신에 대리만족을 하며, 해서는 안될 일을 시키는 본능에서부터 피할 도피처 따위가 아니었다.
“잠깐만요..”
“괜찮아. 나 혼자 서있을수 있어. 그렇게 안취했다니까?”
“그래두요.”
그녀는 여전히 어깨에 내 팔을 걸치고는 열심히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꺼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애를 쓴 끝에 현관문은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방에 조명이 켜지니, 아기자기한 방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침대 하나..그리고 그 옆에는 책상..책상앞에 있는 걸상에 걸린 몇 개의 옷가지들..내 시선이 차곡차곡 옷들이 포개어진 의자 쪽으로 향하자, 유민이는 깜짝 놀라 당황하며 나를 두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앗! 치우는 걸 깜박해서..”
“어엇!”
유민이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얼른 옷들을 챙기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조금이나마 그녀에게 기대고 있던 내 중심은 유민이가 뛰쳐 나가면서부터 완벽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현관에 털썩 주저 앉았고, 주저 앉는 과정에서 무려 세 번이나 신발장에 머리를 박는 장관을 연출해 주었다.
“괘..괜찮아요 선배?”
“아우...그렇게 갑자기 뛰어가면 어떡해..아우..머리야..”
안그래도 머리가 짧아져서 완충작용을 못받는 내 머리를 싹싹 비비며 끙끙거렸다. 한동안 유민이 쪽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아 고개를 드니, 그녀는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죄..죄송해요..윽!풉!”
“이게 그렇게 웃겨?”
“혼자 서있을수 있다더니...그렇게 재밌게 넘어질..줄은..쿡!..”
누군가를 웃기는 데에 소질이 없는데, 이상하게 내가 넘어지기만 하면 한별이고 유민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사회과학대 앞을 지나가다가 제대로 한 번 미끄러졌을때, 박인재가 내 옆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김예영 넌 몸개그에 소질이 있어.-
“내가 몸개그에 소질이 있나봐.”
“쿡! 훕..”
한참이나 참던 유민이는 내 중얼거림에 본격적으로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아까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아예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치마를 입은 하얀 종아리가 눈가에 아른 거렸지만, 짧은 치마가 아니어서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와인 보다 차는 어때요?”
“차?”
“선배는 몸도 못가눌 정도로 취했으니까...”
“...그게 아니래도. 난 와인 마실거야. 넌 차 마셔.”
“좋아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푹신한 침대에 걸터 앉을 때쯤, 주방의 찬장에서 조그마한 와인병을 꺼내는 유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까치발을 하고서 와인을 꺼내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좁은 원룸으로 향긋한 차향과 와인향이 뒤섞여 가득차기 시작했다.
몸이 더워졌다. 봄이 찾아왔지만 밤공기는 아직 쌀쌀한데, 유민이가 내민 와인을 한모금 마시니 열기가 확 하고 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침대 위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방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제 당장 내일모레네요.”
“음..그러네. “
생각했던 것보다 암담하거나, 혹은 침울함이 밀려오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가까워지니 덤덤해 지는 것 같았다. 내일 모레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건데, 이상하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걸까?
“남은 시간은 뭐하실거에요?”
“글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뭐 남은 시간에 의미 둘 필요는 없는거 같아. 오늘은 너와 있을거고...내일은...뭐라도 하겠지?”
사실은 별 계획이 없었다. 되도록 이면 예림이와 함께 있어야 하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내 말에 늦지 말라는 당부만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찾아온 적막에 어색해 할 때쯤에, 유민이의 머리가 스르르 내 쪽으로 기울며 어깨에 안착했다. 향긋한 냄새는 더욱더 가까워 졌다. 아마도, 유민이는 굉장히 용기를 내어 한 행동일 것이다.
“선배.”
“응.”
“2년후에..어떤 모습일까요?”
“나 말하는 거야?”
“아니..우리 둘 다요.”
그때도 이렇게 어깨에 기댈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못지 않게 유민이에게도 이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덧붙여서, 조용히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도, 그 떨림이 어깨에 전달되며 느껴졌다.
“모르겠어.”
“왜 확답을 주지 않나요?”
“뭐가?”
울먹이는 것을 숨기고 억누르려 해서인지, 희미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 같았다. 손에 들린 와인잔을 비워, 그것을 책상 위로 살며시 올려두었다.
“키스도 했고..손도 잡았잖아요. 그런데 왜 확답을 주지 않나요? 나도...겨우 기다리고 기다려서 여기까지 온건데..”
그녀는 끝내 우는 소리를 내게 들려주고 말았다. 조금 남아있는 양심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사귀자라는 그 흔하고 쉬운 말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일까? 어쩌면 유민이는 내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유민이는 그저 ‘예림이를 대신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서야 겨우 유민이가 예림이와 달라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져 있었다. 예림이는 내 마음속에서 너무나 커져 있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민이의 존재를 지우기도 버거웠다. 애정 결핍증 환자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이제 군대 가는데...그걸 표현하는게 더 나쁜놈이 되는 것 같았어.”
한참을 생각하고 망설인 끝에 해버린 변명이었다. 통할리가 없는 변명일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다만 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말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을 뿐이었다.
“누구와 함께 가나요? 내일 모레.”
“누나랑 갈 것 같아.”
“역시..가족하고 가는게 좋겠죠.”
예림이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 하늘 아래에 나와 예림이, 그리고 한별이 뿐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리가 없는 유민이는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서서히 말라가는 눈물 뒤로 한층 더 반짝이게 된 눈이 예뻤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마음 속에서는 무방비 상태의 유민이를 공격하라는 신호가 내려지고 있었지만, 한별이가 아닌 유민이는 공격하면 다칠 것만 같은 여린 꽃이었다. 내 어깨에 느껴지던 가벼운 그 감촉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엔, 이미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호흡소리가 들릴 만큼 너무나 가까웠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민이에게 나는 우연의 연장선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유민이는 가치를 재발견한 보석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입술에 내 것이 닿았다. 살짝 말라있는 듯한 그녀의 입술을 조금씩 축여주기 시작했다.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르고 침대 시트만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언제부터인가, 키스를 하면서 상대의 동향을 살피는 못된 버릇이 몸에 베어 있었다.
유민이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단맛이 나는 듯한 달콤한 입술위를 쉴새 없이 내 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허리를 끌어 안을 때에 살며시 열린 그 틈으로, 나는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 안으로 침투해 버렸다.
“읍..음..”
실눈을 떴을때 곱게 감겨있는 눈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버릇이 남아있는 이상 아마도 평생 로맨틱한 키스는 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러개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뻔뻔한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로 로맨스라는 단어를 내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껴안고 살며시 무게를 싣자, 무방비 상태의 그 가녀린 몸은 여지없이 침대 위로 넘어가 버렸다. 푹신한 메트릭스가 우리 둘의 무게 때문에 살며시 밑으로 꺼지는게 느껴져왔다. 자세가 무너지면서 입술이 떨어지는 그 잠시간의 틈도 놓치지 않고,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았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이미 과제를 핑계로 그녀와 단둘이 있을때 나는 유민이와 키스라는 걸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슬아슬하게 스킨쉽의 줄타기를 한 것은 예림이가 아니라 유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예림이에게는 강하게 밀어 붙여 놓고서, 유민이 앞에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술을 마셨지만 나는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았다. 급할 수록 즐기고 싶어졌다. 한별이처럼 욕구가 전신을 덮어버리는 그 기분이 아니라, 그 두근거리는 야릇한 기분을 조금더 만끽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키스는 짙어져 갔고,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던 유민이도 적극적으로 내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내 목에 자연스레 둘러졌을 때엔, 내 손은 이미 유민이의 몸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긴팔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을때에 부드럽게 내 손에 감기는 촉촉한 피부 감촉이 좋았다. 이 옷에 감춰진 유민이의 모습은 어떨까? 예림이 처럼 글래머인지, 숙모처럼 마르고 날씬한 타입인지, 한별이처럼 가슴은 크지 않지만 신체 벨런스가 좋아서 몸매가 균형잡힌 타입인지..어떤 스타일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하아..”
입술을 떼었을때 그녀는 나를 보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미세하게 흔들리는 호수의 수면처럼, 파르르 파장이 일어나는 그 눈빛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거부감 따위는 없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군대에 가니까. 모든 것은 이 말 하나로 면죄부가 부여된다. 군대에 가니까 이렇게 여자에 욕심내도 상관없다고 내 몸은 그렇게 편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예림이에게 동생이기를 포기한 그 순간부터 나는 합리화 따윈 필요없는 악당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티셔츠를 위로 잡아 올렸다. 잔뜩 긴장에 물들어 있던 눈빛이 순간적으로 티셔츠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잔뜩 뻣뻣해진 그녀의 몸 에서 티셔츠를 벗겨 내었을 때엔, 연보라색 브래지어에 감춰진 뽀얀 가슴이 드러났다.
생각했던 것처럼 유민이는 날씬한 타입이었다. 예림이처럼 가슴이 크고 균형잡힌 편은 아니었지만, 한손에 딱 들어오는 적당한 사이즈였다. 남자에게는 찾을수 없는 허리의 곡선도 명확했다. 남자가 여자의 몸에 끌리는 이유는, 곡선이 유려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잠깐..”
유민이는 내 손길에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편승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덜컥 겁이난 모양이었다. 예림이 처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준다면 좋을 텐데..오늘 따라 유달리 밝게 느껴지는 조명을 등지고 나는 그녀의 몸을 끌어 안았다.
“잠깐만요..선배..앗..!”
브레지어 위를 움켜쥐는 내 손을 순간적으로 붙잡은 그녀지만, 쉽사리 힘을 주어 끌어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멈출 수 있는 자제력따윈 없었다.
그녀는 나를 만류하는 대신, 눈을 감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 숙모가 내게 했던 대응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었다. 가늘게 뻗은 다리를 더듬고, 점점 손을 위로 올려 도톰한 허벅지의 깊은 곳 까지 파고들 때도,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두 눈을 뜰 용기는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흑!”
내가 그녀의 치마 안으로 얼굴을 묻었을때, 더이상 참을수 없었는지 유민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행동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황급히 다리를 오무려 내 얼굴을 조여대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었고, 역시 연보라빛 빛깔을 띄고 있는 작은 천조가리위에 입을 맞추었다.
유민이의 다리 사이는 부드러웠다. 연두부처럼 몰캉몰캉한 허벅지의 감촉에 세포 하나하나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손으로 팬티를 살짝 옆으로 젖히니, 그리 많지 않은 털 밑으로 수줍게 포개어져 있는 그 은밀한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흑..아..거긴...선배..샤..샤워하면 안되요 우리?”
하지만 그녀의 말에 내가 멈출리 없었다. 보통의 연인들의 스킨쉽처럼, 분위기라는 큰 바람을 타고 흘러온 것은 한 번 깨지면 바로잡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답대신 옆으로 젖혀진 팬티 사이로 보이는 그 연약한 살덩이를 입안 가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아..앗! 흑...으으..”
유민이의 몸이 몇 번이고 꼬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최후의 반항이었던 허벅지 역시 자연스레 양옆으로 벌어지며 닫아두었던 성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탐닉하는 사람처럼 입을 앙다문 그 보지 위로 부지런히 혀를 놀렸고, 점차 내 침인지 그녀의 애액인지 알수 없는 액체로 팬티가 젖어가고 있었다.
야하고, 또 야릇했다. 연신 끙끙거리는 그녀의 소극적인 신음소리도 귀여웠다. 이 아이가 이렇게 목소리가 예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민이의 속살을 양옆으로 벌려 고정한 내 손가락도 뜨끈한 액체에 미끌미끌해 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외모와 순수해 보이는 눈웃음을 추종하는 우리과 아이들이 본다면 모두 얼어붙을 정도로, 그녀의 신음소리는 조금씩 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흑..흑..흐응..제발..아앗..”
이제는 내가 참기 힘들어 조금씩 팬티를 끌어 당겼다. 한별이라면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나를 도왔을 텐데..유민이는 그 사소한 움직임도 부끄러운지 가만히 있을 뿐이어서 조금 힘이 들었다. 한참을 자그마한 천조각과 씨름한 끝에, 유민이의 하얀 발목에는 끈처럼 둘둘 말린 연보라빛 팬티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그녀의 다리사이로 몸을 파고든 나는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내가 옷을 벗는것을 알고 있을텐데, 유민이는 눈을 감고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손을 가슴쪽으로 모아 드러난 상체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흉측하게 달아오른 내 아랫도리가 바깥바람을 쐴 때까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브래지어마저 벗기고 나니 너무나 야릇한 복장이 되어 있었다. 치마 한장만 남아 있는것이, 전부 알몸이 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팔랑거리는 그 얇은 천조각을 조금만 위로 들춰도 흠뻑 젖어있는 유민이의 보지가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듯,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 덮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으며 그녀의 몸을 건드렸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한별이처럼 남자를 많이 겪어본 아이가 아님은 확실해 보였다.
“흑! 아아..”
잔뜩 성이난 자지의 기둥을 잡고, 붉게 충혈된 귀두를 그녀의 입구에 비비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돌진하기엔 성의 입구가 너무나 좁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질척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분신의 앞부분은 그녀의 젖은 살점속에 묻혀 천천히 길을 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점막이 그 부위를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좋은 느낌이 났다. 엄지 손가락을 살짝 클리토리스에 대니, 그녀의 몸은 더 확실히 반응했다.
“아앗! 으응..흐으응..”
야하지도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의 행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져 뿌듯했다. 쿵쾅 거리는 가슴은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치마를 살짝 위로 올려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게 한 나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흑..아..아파요..”
내 것이 큰게 아니라, 그녀의 입구가 너무 좁았다. 마치 좁다란 병의 입구로 꾸역꾸역 무언가를 억지로 집어 넣는 느낌이었다. 내 귀두를 힘겹게 삼킨 그녀의 보지는 내 분신의 두깨만큼 늘어나며 조금씩 나를 받아 들였다. 질 벽의 오돌토돌한 느낌까지 모두 전해지는 듯한 짜릿한 쾌감이었다.
“흑! 아으으응..”
자지가 반쯤 들어갔을 뿐인데, 벌써부터 황홀한 기분이 들어왔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뿌리까지 깊숙히 몸안으로 침투시켰을 때, 살며시 찡그려진 그 표정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아..아파..흑..흐윽..”
감은 두 눈 사이로 희미하게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움직였지만 마치 누가 손으로 꽉 쥔것 같은 착각이 들어왔다. 무엇보다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도 쉴 새없이 뜨거운 액체를 흘리는 듯한 그 느낌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처..천천히..해주세요..흑...하응..흑”
가느다란 다리가 내 어깨에 걸쳐졌고, 그 때문에 내 자지가 박힌 그 은밀한 부위는 적나라하게 내 시선으로 들어왔다.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의 손이, 어설프게 내 등을 끌어 안았다.
“흑!흐윽!”
내 허리가 조금씩 빠르게 속력을 붙여가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도톰한 예림이 만큼은 아니지만,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 몸이 움직이는 리듬과 맞춰져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아랫도리가 녹을 것만 같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왜..어째서 남자들이 섹스를 할때에 사랑한다는 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경험을 한두번씩 하는지 실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아! 아흑! 하앙..하아아아!”
유민이의 신음소리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내 밑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에 긴장감 대신 쾌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성의 끈이 뚝하고 끊어졌다.
“어..어떻게 하려구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며 뒤로 누워버리자, 졸지에 내 위에 올라타게 된 유민이는 울상을 지으며 당황했다. 밑으로 늘어진 치마를 살짝 들추니 아직 꼭 맞게 결합되어 있는 나와 그녀의 하반신이 보였다. 우리 둘의 몸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움직여줘 유민아.”
내 부탁에 그녀는 어쩔줄 모르며 당황해 했지만, 이윽고 손을 내 가슴으로 뻗어 중심을 잡았다. 어설프지만 눈가를 찡그리며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흑..흑..흐응..”
치마가 다시 덮여져 보이지 않았지만, 유민이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설프기 그지 없는 동작에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꾹 참고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살짝 잡아 주었다. 말랑말랑한 가슴이 손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모..못하겠어요..힘들어요.”
짧은 머리칼이 땀 때문에 이마에 붙어 있는 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울상을 짓는 모습에 살짝 미소까지 나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와 마주보고 앉는 자세를 취했고, 유민이는 본능적으로 내 목을 끌어 안아 몸을 지탱했다.
철썩..철썩..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야한 소리가 좁은 원룸을 울려대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내가 유민이의 몸을 상하로 흔들어 대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냘픈 몸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면 할수록,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내 자지에 계속해서 강한 자극이 전달되고 있었다.
“흑! 아아..선배..으으응..흑!흐응..”
내 알몸과 맞닿아진 그녀의 몸은 너무나 뜨거웠다. 좁디 좁은 그녀의 몸속은 내 몸 전체를 포박하고 조이는 것만 같았다. 결합을 한 상태에서는 움직이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땀에 잔뜩 젖은 내 몸이 유민이의 몸과 한치의 오차없이 달라붙었다. 그 연약한 살이 내 몸에 닿아 일그러졌다.
“아앗! 아..안돼!흑!”
쉴새없이 그녀의 몸안에서 움직이던 내 분신에서 부터 짜릿한 느낌이 전달 되기 시작했다. 좁디 좁은 그녀의 통로에서 한참이나 용을 쓰던 내 하반신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유민이 쪽에서 먼저 내 입술을 갈구하며 키스를 해오고 있었다.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몸안에 잔뜩 싸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앗!”
황급히 그녀의 몸을 위로 들어올려 꺼떡거리는 자지를 빼내었을때, 마주보고 앉아 있는 그 자세의 탓인지 그녀의 치마위로 하얀 궤적이 흩뿌려졌다. 마치 용천대처럼 뜨끈한 물이 솟아 나오는 그 광경에 유민이는 황급히 내 목을 끌어 안았다. 그녀의 허벅지 속에 파묻힌 내 중심부 에서는 아직도 사정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하아..하아..”
숨가쁜 호흡 소리만이 방을 매웠다. 땀에 흠뻑 젖은 나와 유민이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끌어 안고 있을 뿐이었다. 쉬이 입을 열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내 팔에 잡히는 부드러운 등의 감촉을 느끼며 그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허무함은 아니었으나,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과 남자애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두 명의 퀸과 잤다라는 성취감 따위도 없었다. 그녀를 가졌다는 뿌듯함 대신에, 주었던 사랑을 되돌려 줄 일에 눈 앞이 막막해질 따름이었다.
“떨어지지 말아요. 창피해요.”
온몸이 젖어, 그것도 앉아 있는 채로 껴안고 있는 것이 어색하여 그녀를 밀어내려는데, 유민이는 조용히 속삭이며 더 강하게 내 몸을 끌어 안았다. 이제는 흠뻑 젖어버린 그녀의 치마위로, 군데 군데 보이는 하얀 얼룩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흑..흑..”
내 품에서 유민이가 또 한번 흐느끼기 시작했다. 달콤한 시간이 끝나고 이별이 존재하는 ‘뜨거운 안녕’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울먹이는 것이었다. 조그만 몸을 안고 있는 내 가슴 속으로 일말의 책임감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미 내가 여러개의 사랑을 취한 이상, 예림이에게만 책임감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울지마...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할 수록, 유민이의 흐느낌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녀와 내가 엮어지기 위한 우연은 아마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안 변할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내 품에서 속삭이는 유민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욱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내가 변할 자격 같은게 있을까? 그녀의 말대로, 2년후의 우리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은 그때까지 유민이가 나를 좋아하는 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미 내게 선택권 따윈 없다.
“어서 씻자. 몸이 다 더러워졌잖아. 옷도...”
“으아아앙!”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거세졌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자제하기가 힘든 것일까?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오열하는 그녀를, 품안 가득 끌어안고 한참이나 좁은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예림이에게 늦을 거라고 말했고, 또 그 말을 들은 예림이도 실컷 놀다가 들어오라고 대답해 주었지만, 어쩐지 목소리에 서운함이 베어 있는 것 같아 찝찝했다. 샤워를 마치고 이불로 알몸을 가리는 유민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준 나는, 시원한 것을 사러 옷을 걸쳐입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녀의 집 앞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하도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들어와 추태를 부려서 인지, 알바생의 표정도 많이 지쳐 보였다. 유민이의 몫까지 두 개의 캔 음료를 산 나는. 밖으로 나오다가 그만 깜짝 놀라 멈춰서 버렸다.
“흠...”
편의점 밖에 있는 몇 개의 파라솔 중에서 한 개의 테이블을 잡고, 혼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한별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엠티에서 보았던 것처럼 편한 면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잠시 나오는 것이라 양말을 신지 않은 내 발을 본능적으로 그녀의 앞에서 숨겼다.
“주무시고 가시나요?”
“그럴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를 보며 살짝 웃는 그 미소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봉투속에 손을 넣어 맥주캔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 들고는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여기서 뭐해?”
“제가 물을 말인거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캔을 목으로 넘기니, 아까 내 몸에서 빠져나갔던 수분이 보충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며 상쾌해졌다. 오늘따라 맥주맛이 좋았다.
“의외네요. 선배도 유민이를 많이 좋아하나봐요.”
“무슨 말이 그래?”
“제가 자고 가라고 할 때는 그냥 갔으면서.”
그녀의 말에 주변을 서성거리던 대학생 몇명이 우리 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의 당황한 기색없이 맥주를 마시는 그녀를 보며,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말했지만, 나는 자고 갈 생각이 없어.”
“적어도 늦게 갈 생각인 건 아니구요? 그렇다면 왜 굳이 음료를 사러 편의점까지 오셨어요? 집에 갈때 사서 드셔도 되고, 유민이네도 물은 있을 텐데.”
“됐어. 그런거 다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냐.”
화장기 없는 한별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평소처럼 알 수 없는 미소가 아닌, 뭔가 순수해 보이는 미소였다. 물론 그것이 그녀와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일 모레..어디로 가요?”
“논산. 한 시까지 가면 될 거 같아.”
“따라가진 못하겠네요. 누나랑 가실 테니까.”
“그래야지.”
후드에 반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뽀얀 피부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어?”
“목이 말라서요. 맥주도 먹고 싶고..혹시나 선배 나오면 만날때 재밌겠다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 안좋은 장난 치는 버릇좀 버려.”
“왜요? 유민이도 내 친구고..내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랑 잘 되는지 궁금한건 당연한 건데?”
“별로 안친하다고 하지 않았어 유민이랑?”
“뭐..예전엔 그랬죠. 근데 지금은 달라요. 나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친해져야죠.”
“비슷한 점이라니?”
“선배는 몰라도 되는 여자들의 세계에요.”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홀짝 거리는 캔 맥주가 어느새 반으로 줄어 있었다. 화끈해진 볼에 캔을 가져다 대니 차가운 느낌이 들어 시원했다.
“그래도..섭섭하네요. 유일하게 친한 선배인데.”
“이제 곧 차차 생길거야. 친한 선배가.”
“그렇겠죠. 물론 선배와 내 관계와 같은 절차를 밟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의 말에 이번엔 내가 피식 웃었다. 여우같긴 하지만, 그래서 그녀와의 대화는 더 재미있었다. 알쏭달쏭한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좀처럼 내비추지 않는 속내를 파악하려고 그녀를 관찰하는 것도 은근히 즐거웠다. 2년후의 한별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니, 100일 휴가만 되어도 그녀는 많이 바뀌어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보면 한동안 못보겠지만, 편지 정도는 써드릴수 있어요.”
“면회는?”
“당연히 멀면 안가죠. 저도 바쁜데.”
“잘났다. 그래.”
“먼저 들어갈게요.”
어차피 같은 건물로 들어가겠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나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유민이의 집으로 가지 않고 한별이가 있는 방으로 세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왠지 한별이가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크게 한몫했다.
그녀가 건물의 입구 안으로 사라지고 또 몇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학생들도, 다른 술집으로 떠난 건지 해산을 한건지 거리는 금세 썰렁해졌다.
띵동.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유민이의 집 현관에 가서 나는 이유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게다가 샤워를 하고 나와 아직도 젖어 있는 머리칼. 한별이는 내 차림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빤히 바라보던 눈빛이 왠지 내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오빠에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자, 아직도 이불을 덮고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유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음료수만 사온다는게 너무 늦게 온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선배에서 오빠로 바뀐 유민이의 호칭이 묘하게 계속 되뇌여졌다.
“왜 지금에서야 와요?”
“아..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했어.”
“군대가는거 때문에요?”
“응.”
이불 위로 보이는 하얀 어깨가 예뻐보였다. 샤워를 하고 나서 젖은 머리결이, 그 하얀 어깨와 대조를 이루며 늘어뜨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갈증이 속에서 부터 올라왔다. 침대에 그녀와 나란히 눕자마자, 다시한번 품안으로 유민이를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나에게 힘없이 끌려와 안기는 살결이 부드러웠다.
뒤늦게, 아까 다 깨어버린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지는 유민이의 몸을, 나는 한참이고 껴안은 채 시계를 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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