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날 2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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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부
뒤돌아보면 참 숨이 막히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큰 일을 겪고, 누나와 재회를 하고, 남다른 두 명의 여자 후배들을 알게 되고, 어렸을 적부터 동경해 오던 숙모를 만나고...
대학이라는 곳에 와서 물만난 고기처럼 술먹고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며 일종의 한심함을 품고 있었으면서,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놀기만 하는 부류들이 적어도 나보다 훨씬 건전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보면, 지금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나에게 하늘이 내리는 정지명령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내가 그것에 순응하는 방법 대신,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도박이었다.
‘음..?’
이런 저런 상념과 몽상, 그리고 꿈을 한참이나 오가고 나서야 나는 스르르 눈을 떴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것을 보니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이미 방안에는 어둠이 찾아와 있었고, 내 팔에 뭔가 따뜻한 것이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어..?’
평소에 내가 잠을 자는 딱딱한 바닥위가 아니었다. 예림이의 향기가 베어 있는 푹신한 침대 위.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옆에는 파자마 차림을 한 예림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거의 내 품에 안겨있다 시피 한 형상이었다. 이미 어둠에 적응된 내 눈에 곤히 감겨있는 그녀의 눈꺼풀이 보였다. 쎄근거리는 숨을 쉬며, 마치 내가 곰인형이라도 되는 양 한껏 껴안고 있는 것이었다.
황급히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야광으로 되어있는 분침과 시침을 열심히 눈으로 찾았다. 새벽이 온걸까? 하고 깜짝 놀랐던 나는 이제야 밤 11시를 가리키는 시간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번에 예림이가 그랬듯이 나도 예림이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대략 저녁 6시부터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으니 졸다가 쓰러질 만도 했겠지. 그리고 조금 지나서 예림이가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내 옆에 누운 모양이었다. 나를 깨워서 밑에서 자게 하거나, 혹은 자신이 밑에서 자거나 하는 일이 없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든 것이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예림이의 볼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아직도 따뜻한 것이,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매번 친구들에게 불려다닐 정도로 한국에 친구가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국에 잡아둔 모든 기반을 버리고 한국에 온 예림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힘들더라도 미국에서 계속 지냈으면 더 나았을 지도 모를일이다. 그럼 나도 군대를 가지 않았을 테고, 부모님의 묘지 앞에서 남매사이의 종결을 알릴 필요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대학교에서 적당한 여자를 찾아서, 적당한 연애를 하고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이 다 밟는 그런 절차를 밟아 일반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왜 한국에 왔니..?”
입을 열어 중얼거렸지만, 곤히 자고 있는 예림이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얼굴을 덮듯이 내려온 머리칼들을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겨주니 조금씩 움직이는 하얀 얼굴이 몹시 귀여웠다.
손을 뻗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좁은 침대에서 이렇게 자다가는, 바깥쪽에서 자는 예림이가 바닥으로 떨어질 까봐서였다. 좁은 공간위로 우리의 몸은 더욱 밀착되었고, 그녀가 천천히 하는 그 호흡의 박자를 맞추어 그 작은 어깨를 끌어 안았다.
째깍째깍 하는,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도 크게 느껴지는 가 싶더니, 이윽고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예림이가 자는 모습만 들여다 보았다.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는 그 파자마 자락 사이로 하얀 손목이 빼꼼히 나와 내 가슴 언저리에 올려져 있었다.
눈물이 울컥 하고 나올 것만 같았다.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예림이는 충분히 미국에서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와서 이제부터 생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게다가 나는 평범한 동생의 역할도 해줄수 없었다.
최악...최악이었다.
그녀를 쓰다듬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예림이가 내 품에서 뒤척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자기전에 샤워를 해서 그런지 아직도 샴푸의 냄새가 베개에 남아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샴푸통을 열어 직접 맡는 냄새보다 예림이의 머리결을 거쳐서 나는 것이 훨씬 더 향기로웠다.
맨들맨들한 이마에 입을 맞춰보았다. 부드러운 천 위로 입술을 데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 팔이 둘러진 그 허리를 살며시 껴안으니, 그녀의 고개가 살짝 흔들리며 내 정면에 예림이의 입술이 놓여졌다.
매일, 이렇게 껴안고 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간 하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겠다는 듯이 그녀를 힘주어 끌어 안았다. 예림이의 입술위로 포게어진 내 입술틈으로, 그녀의 작은 호흡이 세어 들어왔다.
예림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가 싶더니, 아주 조금 실눈이 떠졌다가 감겼다. 눈을 뜨고 똑똑히 보고 있는 내 시선에 그것이 확연하게 보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감은 것이 절대 단순한 자는 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키스는 조용히 계속해서 이어졌다. 갑작스레 깬 예림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아줄 뿐이었다.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열성적으로 키스에 응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편이 훨씬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손이 그녀의 잠옷 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천 위로도 몸의 굴곡은 느껴졌지만 실제 피부의 감촉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좁은 침대위로 예림이가 뒤척이며, 천과 천이 부벼지는 소리가 내 심장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단추가 많이 달린 예림이의 잠옷은 천천히 위로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란색의 잠옷이 올라가며 하얀빛의 피부가 드러나는 것은 내 머리속에 있던 몽상들을 싹 걷어 가기에 충분했다. 빙판위를 미끄러져 가는 스케이트 날 처럼 내 손이 예림이의 허리를 더듬어 나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손안에 가득 잡히는 감촉을 느낄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예림이는 평소에 잠옷 안으로 브레지어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을 다 내게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여자들이 잘 때도 브레지어를 하고 자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을 뿐더러, 예림이가 늘 입는 잠옷 위 가슴 부분쪽에서 브레지어의 실루엣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고 나서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만 긴장한 듯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잠옷을 계속해서 위로 올리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여, 나는 천천히 그녀의 상의 단추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맞물려 있던 두 개의 천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면서 양 옆으로 벌어졌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예림이의 귀에 들릴까봐 초조해졌다.
욕실에서 몇번이고 훔쳐 보았던 그녀의 몸이 상반신을 드러냈다. 누워 있어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 볼륨감과, 그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핑크빛 유두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가녀린 허리를 타고 올라간 내 손이 가슴을 움켜 쥐었을 때엔, 예림이의 쎄근 거리는 소리는 조금 거세어졌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옷을 벗어 던져, 그녀의 몸에 올라타고 싶었다. 가슴을 주무를때마다 조금씩 달아 오르는 예림이의 모습 앞에서 인내를 찾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예림이를 기다리며 편한 반바지로 갈아입었던 나 역시 바지 앞섬이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 입술에 다시 한번 키스를 하면서 내 손안 가득 잡히는 가슴을 번갈아 주물렀다.
계속해서 내 옷자락 만을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내 고무줄 바지를 밑으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팬티끈과 같이 잡아서 끌어 내리니 조금은 버거웠지만, 계속해서 입고 있을 인내심 따윈 없었다. 발목에 걸린 바지를 발로 털어 버리니 그것은 침대밑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내 자지가 그녀의 파자마 바지 천조각 사이에 푹 하고 파묻혔다.
아직 벗지 않은 내 티셔츠 자락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내 자지를 쥐게 하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절대로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한 끝에, 예림이의 손은 천천히 기둥부분을 감싸쥐게 되었다.
“흑...”
집중을 해야만 들릴 정도로 희미한 소리가 그 예쁜 입술에서 세어나왔다. 내 입술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지나 가슴 부분으로 향하여, 살짝 돋아서 있는 젖꼭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내 자지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내 움직임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우리의 몸이 얽히고 섥혔다.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우리는 부드럽게 서로의 몸위에서 미끄러지며 노닐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예림이의 몸에 걸려있던 바지와 팬티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다급해진 숨을 집어 삼키는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예림이의 바지와 팬티가 발목에 걸려버렸을 때 쯔음, 잔뜩 성이난 내 자지가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서로 마주보고 옆으로 누워 있으니 위치가 맞은 까닭이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조갯살 사이를 은근히 꾹꾹 누르며 파묻히는 내 불기둥이 뜨겁긴 한 모양인지 예림이의 몸은 연신 움찔 거렸다.
지금까지 아찔한 선은 몇 번이고 넘었다. 전라의 모습을 보았음은 물론 서로의 은밀한 부분 까지도 만졌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전개는 최초나 다름없었다. 김예영과 김예림이 서로에게 놓인 선을 지우고 남자와 여자의 개념으로 만나는 최초의 자리였다. 옷이라는 허물은 이제 우리의 몸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어느덧 침대위에는 두 개의 살색 인영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흑..흡..”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파묻힌 내 불기둥이 점점 축축해 지는 느낌이 들어왔다. 집요하기 까지한 내 애무에 젖어 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한별이와 숙모를 만나면서 나는 어느덧 나이에 맞지 않는 ‘능숙한 사내’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예림이의 몸 구석구석을 만질 수록, 참지 못한 그녀의 입가에서는 조금씩 신음이 세어나왔다.
“나 못참겠어...”
드디어 내 입에서도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림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뜰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보니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왔다. 살짝 몸을 돌리니, 가냘픈 그녀의 몸이 내 밑으로 깔리는 형상이 쉽게 이루어졌다.
“흑..흑..”
손을 잡아주니 되려 힘을 주어 내 손을 꽉 쥐는 그녀였다. 다리가 천천히 벌어지며 내 상반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때는 일종의 쾌감마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방초 밑으로 촉촉히 젖어든 속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 속살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귀두가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흐응...”
여자의 그곳이 다 그렇겠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때문에 온몸이 간질간질 해졌다. 따뜻한 액체가 조금씩 내 아래부분을 적시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좁은 통로안으로 몸을 밀어넣는 그 순간, 내 앞에서 벗은 몸을 처음 보여주었던 그 날의 예림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흑..아아..”
예림이의 입가에서 나온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조금은 아픈듯 얼굴을 찡그리는 그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내 몸을 방어하 듯 손을 뻗어 내 상체를 밀어 냈지만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은 귀여운 반항이었다. 약간 토실토실해서 더욱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허벅지가 내 허리를 꽉 움켜 쥐었다. 그녀를 품안 가득 껴안은 채로, 내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으응..아아..”
남들보다 비음이 조금 더 섞인 예림이의 신음소리는 무척 귀여웠다. 한별이의 입에서 나오는 나이에 맞지 않는 그 자극적인 비음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전혀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인 그 얌전한 소리가 더욱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아퍼..흑..흑..”
애액에 잔뜩 젖어 있는데도, 내 움직임이 조금 아픈 모양이었다. 침대위로 손을 뻗어 내 몸을 받친 팔을, 예림이는 손잡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밑으로 내려고, 그 완벽한 다리와 허벅지 사이로 움직이는 내 자지가 보여 미칠 지경이었다. 곱고 고운 그 속살이 힘겹게 두터운 몽둥이를 물고 있었다.
내 움직임은 이윽고 거칠어 졌다. 철썩하는 소리가 퍽 하는 소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소극적이던 예림이의 움직임도 조금씩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몸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흑! 흐응..아응..아앗..”
절대로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는 그 상대가 내 밑에서 나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그런 의식조차도 없다. 누가 뭐래도 예림이는 내 연인이었다. 부족한 나를 믿고 세상의 시선과 싸울 각오를 한 착하고 예쁜 아이였다.
“알고 있지? 누나는..”
격렬히 움직이던 허리를 멈추고, 나는 그녀를 한껏 껴안으며 귀에다가 속삭였다. 예림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리를 웅크려 내 상반신을 조일 뿐이었다.
“누군가가...내 입영통지서를 본 것 같았어.”
“흑..흐응..”
그녀는 대답대신 가빠진 호흡소리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왈칵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 슬펐다. 내가..아니 우리가 선택한 길은 너무나 혹독한 댓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규정지은 잣대를 거슬러서 역행하는 것은 생각 이상의 리스크를 동반하고 있었다. 조화를 깨는 댓가를 이미 톡톡히 치르고 있는 한별이의 충고를 보기 좋게 무시한 결과였다.
“예영아..흑...흑..흐응..흑..”
다시한번 내 움직임이 격렬해 지기 시작했다. 예림이의 다리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희미하게 보이는 그 은밀한 부위로 온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성하지 않은 방초 밑으로 곱게 입을 다문 그 성스러운 부위에서는 연신 많은 양의 액체를 방류하며 나를 적시고 있었다. 침대 시트도, 내 몸도, 그녀의 몸도 흠뻑 젖었다.
“아앗! 흑! 흐응!”
야광의 시계핀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한 나와 예림이를 위한 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자주 꺼내어 즐길수 없는 그 시간의 압박이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저 깊은 곳에서 부터 용솟음 쳤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거세어 질때 즈음에 나는 황급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잔뜩 벌게져 있는 내 자지가 허공에서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그녀의 몸위로 하얀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액체가 몸에 닿자 앗! 하고 놀라는 예림이의 고운 입술을 덮쳐 버렸다.
“하아...하아...”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나를 껴안고 있는 예림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부드러운 알몸의 감촉은 몇번이고 느껴도 질리지 않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껴안고 있는 지금의 자세를 풀 용기가 들지 않는다.
“흑..흑...”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예림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지금 내 눈가가 촉촉히 젖은 이유와 비슷할 것이었다.
“나쁜놈...”
“....”
“이 나쁜놈아.흑..흑..”
계속해서 흐느끼는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한차례의 열락이 지나간 침대 위에서, 이미 다 식어버린 서로의 몸을,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보듬고 있었다. 서로의 애액과 타액으로 얼룩진 몸을 티슈로 닦아내고 나서도,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다시금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도망치지마. 군대가는 날 훈련소까지 나랑 같이 가.”
“알았어. 그렇게 할께. 근데 과외는 어떻게 하고?”
“그게 뭐가 중요해. 니가 더 중요해.”
“흠..평소엔 나한테 보여주지도 않는 예쁜 옷을 과외하는 애들한테는 보여주면서..”
“나쁜 놈..그런걸 질투할 때야?”
벌써부터 붉게 변하면서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이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얇은 이불로 우리의 몸을 덮었지만, 우리는 아까의 그 알몸상태 그대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진짜로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늘 지켜줄게. 정말로.”
“안그래도 돼. 내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냐.”
“그럼 뭔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내 팔베개를 하고 누워,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녀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직도 그 향기가 가시지 않는 머리결 사이로 무심코 내 얼굴을 대었을때에,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나중에..엄마 아빠를 만나게 되었을 때...내 대신 변명만 해줘.”
*
“풉! 큭큭!크하하하하!”
내 머리통을 보며 배꼽을 잡는 인재의 모습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놈이야 뭐 원래 남 놀리는 것에 특출난 관심을 보이는 아이니까 넘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한별이와 유민이의 요청에 따라 오늘 있기로 한 내 송별회는 인재없이 진행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라도 감출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재와 헤어져 유민이와 한별이를 만나기 위해 학교 뒷편에 있는, 손님이 별로 없는 그 꼬치구이 집으로 들어갔을 때 한별이가 날 보고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머리를 깎은게 그렇게 웃긴 건가? 유민이는 그저 싱긋 웃어줄 뿐인데 한별이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웃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저 아이가 저렇게 까지 신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림이와 보내던 꿈결같은 시간들 속에서 며칠이 훌쩍 지나 저번에 한별이가 말했던 송별회가 와버린 것이다. 그녀와 매일 같은 침대에서 껴안고 자게 되었는데, 이제는 입대가 코앞까지 다가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같이가서 구경하겠다는 예림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서 나는 한참이나 거울속의 어색해진 김예영을 바라봐야만 했다. 머리가 긴 것은 아니지만 늘 단정하게 자른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 짧은 머리는 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더 어색했다.
왠지 모르게 실감이 되었다. 특히 미용실 의자에 앉아 ‘어떻게 해드릴까요?’라는 미용사의 질문을 들었을때, ‘저 군대가요.’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조차 얼떨떨했다. 머리스타일을 구태여 설명해주지 않아도, 미용사는 그저 내게 유감의 뜻마저 표하며 알아서 머리를 빡빡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때도 이렇게까지 옆머리를 하얗게 파먹은 적이 없었는데...이제는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나에게 있어서는 머리 한올이 너무나 아쉽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도 한별이는 아무런 말 안하고 웃기만 했다. 보다못한 유민이가 쿡쿡 찌르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지만, 아직도 빨개진 얼굴을 숨기진 못하는 눈치였다.
“머리 자른거 보니까 조금 실감이 나네요.”
유민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한별이, 유민이 셋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송별회는 몇 개의 안주들과 소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과 동기들이 해주는 송별회를 거쳐 잔뜩 속이 안좋을때 우리들만의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재선배가 눈치채진 않겠죠?”
“응. 잘 따돌리고 왔어. 좀 미안하긴 하지만.”
“거짓말. 솔직히 인재 선배가 있으면 선배도 불편하잖아요.”
한별이의 능글맞은 말도 이제는 한 귀로 흘려졌다. 그녀들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편하게 입은 강한별과 신경을 써서 치마를 입은 유민이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신기한 자리였다. 학기초에 인재의 소개로 이 두 아이를 알게 되었을때에, 이런 자리가 벌어질 줄은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나와 두세번 섹스를 했던 사이고, 나머지 한 명과는 키스를 한 사이었다. 이러니,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방탕하게 놀아 젖히는 여타의 대학생들을 욕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술이 약한 유민이를 제외하고, 나와 한별이는 그 후로 몇번더 술을 주고 받았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던 유민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참. 한별이 너 좋아한다는 사람 올수도 있다더니 어떻게 되었어?”
“흠...”
유민이의 말에 한별이의 시선이 가만히 나를 향한다. 내 굳어진 표정과, 어색한 내 머리를 보며 또 혼자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짧게 한숨을 쉴 때쯤에 그녀는 다시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는데 돌아갔어.”
“뭐?”
“예영오빠가 웃긴머리를 하고 있어서 돌아갔나봐..풉..”
알쏭달쏭한 그녀의 말에 유민이는 나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별이는 술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따라 과하게 권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말도 안돼..”
“됐어. 어서 술이나 마시자. 유민이 너도 오늘은 빼기 없기야.”
평소와는 달리 밝은 모습의 한별이가 유민이도 적응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늘 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아이인데, 오늘은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갈수록 유민이가 내 눈치를 보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고백을 하고도 나와 많은 시간을 같이 있지 못했던 탓일까? 일종의 원망이 담긴 눈빛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몇 번이고 그녀의 눈빛을 피해야만 했다.
“아 나 잠시 화장실좀.”
소주만 마셨으면 괜찮은데, 목이 탄답시고 맥주를 몇잔 마셨더니 요의가 느껴졌다. 한별이를 중심으로 밝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뚝 하고 대화가 멈춰버리면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리는 것도 한몫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화장실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았다. 늘 눈썹까지 내려오던 앞머리가 싹둑 잘려져 있는 것이 허전하긴 했지만, 그렇게나 박장대소를 하며 웃을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괜히 분했다. 한별이 그 녀석...이젠 뭘 해도 밉상으로 변한것 같았다.
그래도 여자애들을 만난답시고 짧은 머리에 왁스를 발라보긴 했지만 역시나 이렇게 짧게 자른적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이틀전에 있었던, 인재와 경제학과 동기들과의 술자리때에 이 머리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 예비역 선배까지 불러서 지독하게 나를 돌려대었을 테지.
“선배.”
화장실을 나서는데, 입구에 있는 벽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강한별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우려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 머리를 보며 쿡쿡거리지는 않았다. 종래의 그 무표정하지만 진지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냥 갔다면서요?”
“뭐가?”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우같은 그녀의 눈매가 살짝 움직이며 나를 응시했다.
“그때 유민이랑 자리를 만들어 드렸는데...나가셨다면서요?”
“참 내. 니가 멋대로 만든 거잖아.”
“그래도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까불지마.”
“음...유민이는 남달라서 그러시는 건가..”
내가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렸을때에, 그녀의 왼손에 조그마한 가방이 들려져 있는것이 보였다.
“가방은 왜 가져 왔어?”
“들어가려구요.”
“뭐?”
역시나 내 눈이 수상하게 변한 모양이다. 이 녀석 또 무슨 꿍꿍이지? 내 미심쩍은 눈에도 그녀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선배를 좋아하는 아이에요. 선배도 마음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티나게 빠지는 거야? 그런 쪽 까지 니가 신경쓸 필요가 없어.”
“불쾌한가요?”
또 시작이었다. 저렇게 답하기 애매한 질문을 던지니 그녀와의 심리전에서 이길수 있을리가 없었다. 불쾌하다고 하기엔 뭐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니 나도 유민이를 원한다는 뉘앙스로 비춰질 우려가 있었다.
“유민이에게 뭐라고 하려고?”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이야기 했어요. 이때쯤에 약속있다고.”
“그 좋아한다는 사람과 약속이야?”
거짓말인걸 뻔히 알지만, 내 질문에 미묘하게 변하는 강한별의 표정을 보니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한별이의 손가락이 몇번을 까딱 거리며 움직였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아마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거에요. 다른 사람하고 있을때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슨 뜻이야?”
“가볼게요. 오늘은 유민이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왠만하면 저 아이 마음도 좀 받아주고..”
“너 답지 않게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글쎄요.”
한별이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더니 이윽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4~50분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는데도 취한 기색이 없어 보이는 또렷한 걸음걸이였다. 씻은 손이 다 마를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본 나는, 역시나 알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을 하며 유민이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한별이 약속이 있어서 갔어요.”
“응. 입구에서 봤어.”
“저 한잔 주세요.”
“괜찮겠어?”
“네. 조금은요.”
소주잔을 잡은 손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예림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산산히 부숴진 후에도 이렇게 예쁠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조금은 미안해 졌다. 그저 예림이의 대리인으로만 그녀의 마음을 치부했던 게 걸리고 찝찝하다. 군대 갈 때 되니까 악당도 사람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빤히 유민이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내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법한데, 그녀는 미소를 띄운 얼굴로 내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인재를 비롯한 ‘오유민 파’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어째서 나같은 놈을 좋아할까? 숙모가 말한대로 나는 정말 선수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왔다.
“저 물어보고 싶은게 생겼어요.”
“뭔데?”
“진실게임은 아니지만, 진실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해 주셨으면 해요.”
“좋아.”
조금은 겁이 났지만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학교 뒷편의 허술하고 한적한 술집이라 그녀의 작은 목소리도 잘 들려서 좋았다. 만약 시끌 벅적한 큰 호프집이었다면 분명 우릴 아는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며 합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기사,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사람이 많은 술집에서는 나와 한별이, 유민이가 있는 테이블에 시선이 집중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림이나 숙모, 한별이와 다니다 보니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그때...누구 전화받고 가신 거에요?”
유민이가 그런 질문을 하는것이 놀라웠지만 얼굴에 내비추지는 않았다. 내가 미안해 했던 만큼 그녀도 서운함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작은 엄마 전화였어.”
“아...예전에 피씨방에서랑 같네요.”
유민이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괜히 찔끔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나한테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척이라서...미안했어. “
“괜찮아요.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오늘은 중간에 가지 않을게. 누가 불러도.”
금세 미소를 띄우는 유민이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다. 숙모에 밀려, 예림이에 밀려 내 마음속에 한동안 뒷전에 자리잡던 아이지만 결코 그런 찬밥신세를 받을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가 어째서 내 옆에 있으려 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뭔데요?”
“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유민이의 얼굴에 또 한번 미소가 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빤히 보는 눈빛이 묘하게 귀여웠다.
“언제부터 좋아 했냐고 묻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내 표정이 금방 어색해 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별이가 아닌 유민이가 그렇게 정곡을 찔러오니 무방비 상태에 펀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뭐...”
“괜찮아요. 이미 한별이에게 들은 질문이에요.”
“아..그래..”
유민이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것을 아는 이상, 아마도 대학교때 나를 처음 본 것이 첫만남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술로 목을 축이며 진득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등학교때 늘 선배랑 같은 버스를 탔어요.”
“버스?”
“네. 그때는 제가 선배랑 같은 동네에 살았거든요.”
“그랬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러니까 지금 사는 원룸이 아닌 우리 가족이 모여살던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었다.
“맨날 보였어요. 우리 학교 선배인 것은 분명해 보였는데...기억에 남았거든요.”
“내가 왜?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을 텐데.”
“아뇨. 선배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늘 표정이 시크해 보였거든요. 되게..차가워 보였어요. 한별이 첫인상하고 비슷했죠.”
“음..그치만 보통은 다 버스안에서 무표정하지 않아?”
그녀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었다. 짧은 단발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윤기 있어 보였다.
“그냥 무표정한 거랑 달랐어요. 눈빛도 차가웠고...늘 보는 사람이 차가워 보이니까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봐요.”
“단지 그것 때문에?”
사실이라면 이해가 안되는 말이었다. 차갑기 때문에 좋아졌다? 아무 이유없이 첫눈에 반한다 라는 말보다 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유민이는 나를 따라서 잔을 비웠고, 내가 잔을 채워줄 그때에 조금씩 입을 열었다.
“설명하긴 애매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선배가 자주 눈에 보였거든요. 학교 내에서도 보였고, 식당에서도 보였고..근데 늘 그런 표정이었어요. 그러다가 한 번 선배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었죠.”
“어디서?”
“친구들하고 있을 때였던거 같아요. 농구를 하던 때였나? 아무튼 그때 되게 환하게 웃으시더라구요.”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경위를 듣는 것이 이렇게 쑥스러운 일일 줄은 몰랐다. 물론 분위기는 너무나 좋았지만, 내가 이런것에 익숙치 않으니 문제였다.
“그 무렵 여자애들은 다 그런거 같아요. 자주 마주치다 보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또 자주 마주치면 나 저 사람하고 인연인가?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하지만 그게 착각일 수도 있잖아. 물론...날 좋아해 주는 건 좋지만 남자로서는 이해가 안되는데?”
“맞아요. 착각일 수도 있어요. 저도 선배가 졸업하고 나서 착각이었나 보다 하고 지냈고, 남자친구도 사귀었었구요. 근데..대학교 와서도 선배를 만난 거에요.”
달리 맞장구 쳐줄 말이 없어 술만 들이켰다. 기분은 몹시 좋았지만, 나에겐 없는 순수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만약에..선배가 군대를 다녀온 2년후에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그때는 착각이 아니라는 게 더욱 확실해 지겠죠?”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 잠자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유민이의 손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나는 시크하거나 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보잘것 없는 한심한 애정결핍증 환자일 뿐이었다. 예림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주제에 다른 여자들을 딱 잘라 버리지 못하며, 누군가의 관심을 갈구하는 그런 놈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선배. 여자가 우는거 싫죠?”
“그거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겠어. 그런데 그걸 왜 물어?”
“그러면 전 선배 훈련소 가는 길에 따라가지 않을게요.”
말과는 달리, 유민이는 지금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 기분좋고 축복받은 일일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이 미안하거나 가슴아픈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목이 바싹바싹 말라오는 것 같아 손을 뻗어 소주병을 쥐었다. 잔으로 기울이니 쪼르르 몇 방울이 떨어지다가 말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 병을 다 비운 모양이었다.
“하나 더 시킬까?”
“전 소주는 자신 없는데...”
“내가 다 마시면 되잖아.”
“그러다가 취해요.”
하지만 충분히 취해도 될 시간이었다. 이제 겨우 저녁 7시를 조금 지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민이는 아직도 술을 고파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도, 안주도 동이 나 버린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가 나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집으로 가요. 그때 마셨던 와인 그대로 남아있어요.”
뒤돌아보면 참 숨이 막히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큰 일을 겪고, 누나와 재회를 하고, 남다른 두 명의 여자 후배들을 알게 되고, 어렸을 적부터 동경해 오던 숙모를 만나고...
대학이라는 곳에 와서 물만난 고기처럼 술먹고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며 일종의 한심함을 품고 있었으면서,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그들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놀기만 하는 부류들이 적어도 나보다 훨씬 건전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보면, 지금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나에게 하늘이 내리는 정지명령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내가 그것에 순응하는 방법 대신,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도박이었다.
‘음..?’
이런 저런 상념과 몽상, 그리고 꿈을 한참이나 오가고 나서야 나는 스르르 눈을 떴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것을 보니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이미 방안에는 어둠이 찾아와 있었고, 내 팔에 뭔가 따뜻한 것이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어..?’
평소에 내가 잠을 자는 딱딱한 바닥위가 아니었다. 예림이의 향기가 베어 있는 푹신한 침대 위.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옆에는 파자마 차림을 한 예림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거의 내 품에 안겨있다 시피 한 형상이었다. 이미 어둠에 적응된 내 눈에 곤히 감겨있는 그녀의 눈꺼풀이 보였다. 쎄근거리는 숨을 쉬며, 마치 내가 곰인형이라도 되는 양 한껏 껴안고 있는 것이었다.
황급히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야광으로 되어있는 분침과 시침을 열심히 눈으로 찾았다. 새벽이 온걸까? 하고 깜짝 놀랐던 나는 이제야 밤 11시를 가리키는 시간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번에 예림이가 그랬듯이 나도 예림이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대략 저녁 6시부터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으니 졸다가 쓰러질 만도 했겠지. 그리고 조금 지나서 예림이가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내 옆에 누운 모양이었다. 나를 깨워서 밑에서 자게 하거나, 혹은 자신이 밑에서 자거나 하는 일이 없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든 것이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예림이의 볼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아직도 따뜻한 것이,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매번 친구들에게 불려다닐 정도로 한국에 친구가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국에 잡아둔 모든 기반을 버리고 한국에 온 예림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힘들더라도 미국에서 계속 지냈으면 더 나았을 지도 모를일이다. 그럼 나도 군대를 가지 않았을 테고, 부모님의 묘지 앞에서 남매사이의 종결을 알릴 필요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대학교에서 적당한 여자를 찾아서, 적당한 연애를 하고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이 다 밟는 그런 절차를 밟아 일반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왜 한국에 왔니..?”
입을 열어 중얼거렸지만, 곤히 자고 있는 예림이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얼굴을 덮듯이 내려온 머리칼들을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겨주니 조금씩 움직이는 하얀 얼굴이 몹시 귀여웠다.
손을 뻗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좁은 침대에서 이렇게 자다가는, 바깥쪽에서 자는 예림이가 바닥으로 떨어질 까봐서였다. 좁은 공간위로 우리의 몸은 더욱 밀착되었고, 그녀가 천천히 하는 그 호흡의 박자를 맞추어 그 작은 어깨를 끌어 안았다.
째깍째깍 하는,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도 크게 느껴지는 가 싶더니, 이윽고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예림이가 자는 모습만 들여다 보았다.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는 그 파자마 자락 사이로 하얀 손목이 빼꼼히 나와 내 가슴 언저리에 올려져 있었다.
눈물이 울컥 하고 나올 것만 같았다.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예림이는 충분히 미국에서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와서 이제부터 생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게다가 나는 평범한 동생의 역할도 해줄수 없었다.
최악...최악이었다.
그녀를 쓰다듬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예림이가 내 품에서 뒤척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자기전에 샤워를 해서 그런지 아직도 샴푸의 냄새가 베개에 남아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샴푸통을 열어 직접 맡는 냄새보다 예림이의 머리결을 거쳐서 나는 것이 훨씬 더 향기로웠다.
맨들맨들한 이마에 입을 맞춰보았다. 부드러운 천 위로 입술을 데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 팔이 둘러진 그 허리를 살며시 껴안으니, 그녀의 고개가 살짝 흔들리며 내 정면에 예림이의 입술이 놓여졌다.
매일, 이렇게 껴안고 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간 하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겠다는 듯이 그녀를 힘주어 끌어 안았다. 예림이의 입술위로 포게어진 내 입술틈으로, 그녀의 작은 호흡이 세어 들어왔다.
예림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가 싶더니, 아주 조금 실눈이 떠졌다가 감겼다. 눈을 뜨고 똑똑히 보고 있는 내 시선에 그것이 확연하게 보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감은 것이 절대 단순한 자는 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키스는 조용히 계속해서 이어졌다. 갑작스레 깬 예림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아줄 뿐이었다.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열성적으로 키스에 응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편이 훨씬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손이 그녀의 잠옷 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천 위로도 몸의 굴곡은 느껴졌지만 실제 피부의 감촉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좁은 침대위로 예림이가 뒤척이며, 천과 천이 부벼지는 소리가 내 심장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단추가 많이 달린 예림이의 잠옷은 천천히 위로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란색의 잠옷이 올라가며 하얀빛의 피부가 드러나는 것은 내 머리속에 있던 몽상들을 싹 걷어 가기에 충분했다. 빙판위를 미끄러져 가는 스케이트 날 처럼 내 손이 예림이의 허리를 더듬어 나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손안에 가득 잡히는 감촉을 느낄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예림이는 평소에 잠옷 안으로 브레지어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을 다 내게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여자들이 잘 때도 브레지어를 하고 자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을 뿐더러, 예림이가 늘 입는 잠옷 위 가슴 부분쪽에서 브레지어의 실루엣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고 나서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만 긴장한 듯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잠옷을 계속해서 위로 올리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여, 나는 천천히 그녀의 상의 단추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맞물려 있던 두 개의 천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면서 양 옆으로 벌어졌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예림이의 귀에 들릴까봐 초조해졌다.
욕실에서 몇번이고 훔쳐 보았던 그녀의 몸이 상반신을 드러냈다. 누워 있어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 볼륨감과, 그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핑크빛 유두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가녀린 허리를 타고 올라간 내 손이 가슴을 움켜 쥐었을 때엔, 예림이의 쎄근 거리는 소리는 조금 거세어졌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옷을 벗어 던져, 그녀의 몸에 올라타고 싶었다. 가슴을 주무를때마다 조금씩 달아 오르는 예림이의 모습 앞에서 인내를 찾기엔 불가능해 보였다. 예림이를 기다리며 편한 반바지로 갈아입었던 나 역시 바지 앞섬이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 입술에 다시 한번 키스를 하면서 내 손안 가득 잡히는 가슴을 번갈아 주물렀다.
계속해서 내 옷자락 만을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내 고무줄 바지를 밑으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팬티끈과 같이 잡아서 끌어 내리니 조금은 버거웠지만, 계속해서 입고 있을 인내심 따윈 없었다. 발목에 걸린 바지를 발로 털어 버리니 그것은 침대밑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내 자지가 그녀의 파자마 바지 천조각 사이에 푹 하고 파묻혔다.
아직 벗지 않은 내 티셔츠 자락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내 자지를 쥐게 하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절대로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한 끝에, 예림이의 손은 천천히 기둥부분을 감싸쥐게 되었다.
“흑...”
집중을 해야만 들릴 정도로 희미한 소리가 그 예쁜 입술에서 세어나왔다. 내 입술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지나 가슴 부분으로 향하여, 살짝 돋아서 있는 젖꼭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내 자지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내 움직임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우리의 몸이 얽히고 섥혔다.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우리는 부드럽게 서로의 몸위에서 미끄러지며 노닐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예림이의 몸에 걸려있던 바지와 팬티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다급해진 숨을 집어 삼키는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예림이의 바지와 팬티가 발목에 걸려버렸을 때 쯔음, 잔뜩 성이난 내 자지가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서로 마주보고 옆으로 누워 있으니 위치가 맞은 까닭이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조갯살 사이를 은근히 꾹꾹 누르며 파묻히는 내 불기둥이 뜨겁긴 한 모양인지 예림이의 몸은 연신 움찔 거렸다.
지금까지 아찔한 선은 몇 번이고 넘었다. 전라의 모습을 보았음은 물론 서로의 은밀한 부분 까지도 만졌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전개는 최초나 다름없었다. 김예영과 김예림이 서로에게 놓인 선을 지우고 남자와 여자의 개념으로 만나는 최초의 자리였다. 옷이라는 허물은 이제 우리의 몸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어느덧 침대위에는 두 개의 살색 인영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흑..흡..”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파묻힌 내 불기둥이 점점 축축해 지는 느낌이 들어왔다. 집요하기 까지한 내 애무에 젖어 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한별이와 숙모를 만나면서 나는 어느덧 나이에 맞지 않는 ‘능숙한 사내’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예림이의 몸 구석구석을 만질 수록, 참지 못한 그녀의 입가에서는 조금씩 신음이 세어나왔다.
“나 못참겠어...”
드디어 내 입에서도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림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뜰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보니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왔다. 살짝 몸을 돌리니, 가냘픈 그녀의 몸이 내 밑으로 깔리는 형상이 쉽게 이루어졌다.
“흑..흑..”
손을 잡아주니 되려 힘을 주어 내 손을 꽉 쥐는 그녀였다. 다리가 천천히 벌어지며 내 상반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때는 일종의 쾌감마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방초 밑으로 촉촉히 젖어든 속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 속살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귀두가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흐응...”
여자의 그곳이 다 그렇겠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때문에 온몸이 간질간질 해졌다. 따뜻한 액체가 조금씩 내 아래부분을 적시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좁은 통로안으로 몸을 밀어넣는 그 순간, 내 앞에서 벗은 몸을 처음 보여주었던 그 날의 예림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흑..아아..”
예림이의 입가에서 나온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조금은 아픈듯 얼굴을 찡그리는 그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내 몸을 방어하 듯 손을 뻗어 내 상체를 밀어 냈지만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은 귀여운 반항이었다. 약간 토실토실해서 더욱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허벅지가 내 허리를 꽉 움켜 쥐었다. 그녀를 품안 가득 껴안은 채로, 내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으응..아아..”
남들보다 비음이 조금 더 섞인 예림이의 신음소리는 무척 귀여웠다. 한별이의 입에서 나오는 나이에 맞지 않는 그 자극적인 비음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전혀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인 그 얌전한 소리가 더욱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아퍼..흑..흑..”
애액에 잔뜩 젖어 있는데도, 내 움직임이 조금 아픈 모양이었다. 침대위로 손을 뻗어 내 몸을 받친 팔을, 예림이는 손잡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밑으로 내려고, 그 완벽한 다리와 허벅지 사이로 움직이는 내 자지가 보여 미칠 지경이었다. 곱고 고운 그 속살이 힘겹게 두터운 몽둥이를 물고 있었다.
내 움직임은 이윽고 거칠어 졌다. 철썩하는 소리가 퍽 하는 소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소극적이던 예림이의 움직임도 조금씩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몸이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흑! 흐응..아응..아앗..”
절대로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는 그 상대가 내 밑에서 나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그런 의식조차도 없다. 누가 뭐래도 예림이는 내 연인이었다. 부족한 나를 믿고 세상의 시선과 싸울 각오를 한 착하고 예쁜 아이였다.
“알고 있지? 누나는..”
격렬히 움직이던 허리를 멈추고, 나는 그녀를 한껏 껴안으며 귀에다가 속삭였다. 예림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리를 웅크려 내 상반신을 조일 뿐이었다.
“누군가가...내 입영통지서를 본 것 같았어.”
“흑..흐응..”
그녀는 대답대신 가빠진 호흡소리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왈칵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 슬펐다. 내가..아니 우리가 선택한 길은 너무나 혹독한 댓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규정지은 잣대를 거슬러서 역행하는 것은 생각 이상의 리스크를 동반하고 있었다. 조화를 깨는 댓가를 이미 톡톡히 치르고 있는 한별이의 충고를 보기 좋게 무시한 결과였다.
“예영아..흑...흑..흐응..흑..”
다시한번 내 움직임이 격렬해 지기 시작했다. 예림이의 다리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희미하게 보이는 그 은밀한 부위로 온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성하지 않은 방초 밑으로 곱게 입을 다문 그 성스러운 부위에서는 연신 많은 양의 액체를 방류하며 나를 적시고 있었다. 침대 시트도, 내 몸도, 그녀의 몸도 흠뻑 젖었다.
“아앗! 흑! 흐응!”
야광의 시계핀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한 나와 예림이를 위한 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자주 꺼내어 즐길수 없는 그 시간의 압박이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저 깊은 곳에서 부터 용솟음 쳤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거세어 질때 즈음에 나는 황급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잔뜩 벌게져 있는 내 자지가 허공에서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그녀의 몸위로 하얀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액체가 몸에 닿자 앗! 하고 놀라는 예림이의 고운 입술을 덮쳐 버렸다.
“하아...하아...”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나를 껴안고 있는 예림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부드러운 알몸의 감촉은 몇번이고 느껴도 질리지 않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껴안고 있는 지금의 자세를 풀 용기가 들지 않는다.
“흑..흑...”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예림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지금 내 눈가가 촉촉히 젖은 이유와 비슷할 것이었다.
“나쁜놈...”
“....”
“이 나쁜놈아.흑..흑..”
계속해서 흐느끼는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한차례의 열락이 지나간 침대 위에서, 이미 다 식어버린 서로의 몸을,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보듬고 있었다. 서로의 애액과 타액으로 얼룩진 몸을 티슈로 닦아내고 나서도,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다시금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도망치지마. 군대가는 날 훈련소까지 나랑 같이 가.”
“알았어. 그렇게 할께. 근데 과외는 어떻게 하고?”
“그게 뭐가 중요해. 니가 더 중요해.”
“흠..평소엔 나한테 보여주지도 않는 예쁜 옷을 과외하는 애들한테는 보여주면서..”
“나쁜 놈..그런걸 질투할 때야?”
벌써부터 붉게 변하면서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이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얇은 이불로 우리의 몸을 덮었지만, 우리는 아까의 그 알몸상태 그대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진짜로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늘 지켜줄게. 정말로.”
“안그래도 돼. 내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냐.”
“그럼 뭔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내 팔베개를 하고 누워,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녀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직도 그 향기가 가시지 않는 머리결 사이로 무심코 내 얼굴을 대었을때에,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나중에..엄마 아빠를 만나게 되었을 때...내 대신 변명만 해줘.”
*
“풉! 큭큭!크하하하하!”
내 머리통을 보며 배꼽을 잡는 인재의 모습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놈이야 뭐 원래 남 놀리는 것에 특출난 관심을 보이는 아이니까 넘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한별이와 유민이의 요청에 따라 오늘 있기로 한 내 송별회는 인재없이 진행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라도 감출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재와 헤어져 유민이와 한별이를 만나기 위해 학교 뒷편에 있는, 손님이 별로 없는 그 꼬치구이 집으로 들어갔을 때 한별이가 날 보고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머리를 깎은게 그렇게 웃긴 건가? 유민이는 그저 싱긋 웃어줄 뿐인데 한별이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웃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저 아이가 저렇게 까지 신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림이와 보내던 꿈결같은 시간들 속에서 며칠이 훌쩍 지나 저번에 한별이가 말했던 송별회가 와버린 것이다. 그녀와 매일 같은 침대에서 껴안고 자게 되었는데, 이제는 입대가 코앞까지 다가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같이가서 구경하겠다는 예림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서 나는 한참이나 거울속의 어색해진 김예영을 바라봐야만 했다. 머리가 긴 것은 아니지만 늘 단정하게 자른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 짧은 머리는 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더 어색했다.
왠지 모르게 실감이 되었다. 특히 미용실 의자에 앉아 ‘어떻게 해드릴까요?’라는 미용사의 질문을 들었을때, ‘저 군대가요.’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조차 얼떨떨했다. 머리스타일을 구태여 설명해주지 않아도, 미용사는 그저 내게 유감의 뜻마저 표하며 알아서 머리를 빡빡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때도 이렇게까지 옆머리를 하얗게 파먹은 적이 없었는데...이제는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나에게 있어서는 머리 한올이 너무나 아쉽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도 한별이는 아무런 말 안하고 웃기만 했다. 보다못한 유민이가 쿡쿡 찌르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지만, 아직도 빨개진 얼굴을 숨기진 못하는 눈치였다.
“머리 자른거 보니까 조금 실감이 나네요.”
유민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한별이, 유민이 셋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송별회는 몇 개의 안주들과 소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과 동기들이 해주는 송별회를 거쳐 잔뜩 속이 안좋을때 우리들만의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재선배가 눈치채진 않겠죠?”
“응. 잘 따돌리고 왔어. 좀 미안하긴 하지만.”
“거짓말. 솔직히 인재 선배가 있으면 선배도 불편하잖아요.”
한별이의 능글맞은 말도 이제는 한 귀로 흘려졌다. 그녀들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편하게 입은 강한별과 신경을 써서 치마를 입은 유민이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신기한 자리였다. 학기초에 인재의 소개로 이 두 아이를 알게 되었을때에, 이런 자리가 벌어질 줄은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나와 두세번 섹스를 했던 사이고, 나머지 한 명과는 키스를 한 사이었다. 이러니,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방탕하게 놀아 젖히는 여타의 대학생들을 욕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술이 약한 유민이를 제외하고, 나와 한별이는 그 후로 몇번더 술을 주고 받았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던 유민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참. 한별이 너 좋아한다는 사람 올수도 있다더니 어떻게 되었어?”
“흠...”
유민이의 말에 한별이의 시선이 가만히 나를 향한다. 내 굳어진 표정과, 어색한 내 머리를 보며 또 혼자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짧게 한숨을 쉴 때쯤에 그녀는 다시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는데 돌아갔어.”
“뭐?”
“예영오빠가 웃긴머리를 하고 있어서 돌아갔나봐..풉..”
알쏭달쏭한 그녀의 말에 유민이는 나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별이는 술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따라 과하게 권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말도 안돼..”
“됐어. 어서 술이나 마시자. 유민이 너도 오늘은 빼기 없기야.”
평소와는 달리 밝은 모습의 한별이가 유민이도 적응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늘 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아이인데, 오늘은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갈수록 유민이가 내 눈치를 보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고백을 하고도 나와 많은 시간을 같이 있지 못했던 탓일까? 일종의 원망이 담긴 눈빛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몇 번이고 그녀의 눈빛을 피해야만 했다.
“아 나 잠시 화장실좀.”
소주만 마셨으면 괜찮은데, 목이 탄답시고 맥주를 몇잔 마셨더니 요의가 느껴졌다. 한별이를 중심으로 밝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뚝 하고 대화가 멈춰버리면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리는 것도 한몫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화장실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았다. 늘 눈썹까지 내려오던 앞머리가 싹둑 잘려져 있는 것이 허전하긴 했지만, 그렇게나 박장대소를 하며 웃을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괜히 분했다. 한별이 그 녀석...이젠 뭘 해도 밉상으로 변한것 같았다.
그래도 여자애들을 만난답시고 짧은 머리에 왁스를 발라보긴 했지만 역시나 이렇게 짧게 자른적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이틀전에 있었던, 인재와 경제학과 동기들과의 술자리때에 이 머리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 예비역 선배까지 불러서 지독하게 나를 돌려대었을 테지.
“선배.”
화장실을 나서는데, 입구에 있는 벽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강한별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우려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 머리를 보며 쿡쿡거리지는 않았다. 종래의 그 무표정하지만 진지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냥 갔다면서요?”
“뭐가?”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우같은 그녀의 눈매가 살짝 움직이며 나를 응시했다.
“그때 유민이랑 자리를 만들어 드렸는데...나가셨다면서요?”
“참 내. 니가 멋대로 만든 거잖아.”
“그래도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까불지마.”
“음...유민이는 남달라서 그러시는 건가..”
내가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내렸을때에, 그녀의 왼손에 조그마한 가방이 들려져 있는것이 보였다.
“가방은 왜 가져 왔어?”
“들어가려구요.”
“뭐?”
역시나 내 눈이 수상하게 변한 모양이다. 이 녀석 또 무슨 꿍꿍이지? 내 미심쩍은 눈에도 그녀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선배를 좋아하는 아이에요. 선배도 마음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티나게 빠지는 거야? 그런 쪽 까지 니가 신경쓸 필요가 없어.”
“불쾌한가요?”
또 시작이었다. 저렇게 답하기 애매한 질문을 던지니 그녀와의 심리전에서 이길수 있을리가 없었다. 불쾌하다고 하기엔 뭐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니 나도 유민이를 원한다는 뉘앙스로 비춰질 우려가 있었다.
“유민이에게 뭐라고 하려고?”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이야기 했어요. 이때쯤에 약속있다고.”
“그 좋아한다는 사람과 약속이야?”
거짓말인걸 뻔히 알지만, 내 질문에 미묘하게 변하는 강한별의 표정을 보니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한별이의 손가락이 몇번을 까딱 거리며 움직였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아마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거에요. 다른 사람하고 있을때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슨 뜻이야?”
“가볼게요. 오늘은 유민이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왠만하면 저 아이 마음도 좀 받아주고..”
“너 답지 않게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글쎄요.”
한별이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더니 이윽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4~50분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는데도 취한 기색이 없어 보이는 또렷한 걸음걸이였다. 씻은 손이 다 마를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본 나는, 역시나 알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을 하며 유민이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한별이 약속이 있어서 갔어요.”
“응. 입구에서 봤어.”
“저 한잔 주세요.”
“괜찮겠어?”
“네. 조금은요.”
소주잔을 잡은 손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예림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산산히 부숴진 후에도 이렇게 예쁠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조금은 미안해 졌다. 그저 예림이의 대리인으로만 그녀의 마음을 치부했던 게 걸리고 찝찝하다. 군대 갈 때 되니까 악당도 사람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빤히 유민이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내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법한데, 그녀는 미소를 띄운 얼굴로 내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인재를 비롯한 ‘오유민 파’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어째서 나같은 놈을 좋아할까? 숙모가 말한대로 나는 정말 선수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왔다.
“저 물어보고 싶은게 생겼어요.”
“뭔데?”
“진실게임은 아니지만, 진실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해 주셨으면 해요.”
“좋아.”
조금은 겁이 났지만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학교 뒷편의 허술하고 한적한 술집이라 그녀의 작은 목소리도 잘 들려서 좋았다. 만약 시끌 벅적한 큰 호프집이었다면 분명 우릴 아는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며 합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기사,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사람이 많은 술집에서는 나와 한별이, 유민이가 있는 테이블에 시선이 집중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림이나 숙모, 한별이와 다니다 보니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그때...누구 전화받고 가신 거에요?”
유민이가 그런 질문을 하는것이 놀라웠지만 얼굴에 내비추지는 않았다. 내가 미안해 했던 만큼 그녀도 서운함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작은 엄마 전화였어.”
“아...예전에 피씨방에서랑 같네요.”
유민이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괜히 찔끔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나한테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척이라서...미안했어. “
“괜찮아요.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오늘은 중간에 가지 않을게. 누가 불러도.”
금세 미소를 띄우는 유민이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다. 숙모에 밀려, 예림이에 밀려 내 마음속에 한동안 뒷전에 자리잡던 아이지만 결코 그런 찬밥신세를 받을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가 어째서 내 옆에 있으려 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뭔데요?”
“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유민이의 얼굴에 또 한번 미소가 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빤히 보는 눈빛이 묘하게 귀여웠다.
“언제부터 좋아 했냐고 묻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내 표정이 금방 어색해 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별이가 아닌 유민이가 그렇게 정곡을 찔러오니 무방비 상태에 펀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뭐...”
“괜찮아요. 이미 한별이에게 들은 질문이에요.”
“아..그래..”
유민이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것을 아는 이상, 아마도 대학교때 나를 처음 본 것이 첫만남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술로 목을 축이며 진득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등학교때 늘 선배랑 같은 버스를 탔어요.”
“버스?”
“네. 그때는 제가 선배랑 같은 동네에 살았거든요.”
“그랬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러니까 지금 사는 원룸이 아닌 우리 가족이 모여살던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었다.
“맨날 보였어요. 우리 학교 선배인 것은 분명해 보였는데...기억에 남았거든요.”
“내가 왜?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을 텐데.”
“아뇨. 선배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늘 표정이 시크해 보였거든요. 되게..차가워 보였어요. 한별이 첫인상하고 비슷했죠.”
“음..그치만 보통은 다 버스안에서 무표정하지 않아?”
그녀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었다. 짧은 단발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윤기 있어 보였다.
“그냥 무표정한 거랑 달랐어요. 눈빛도 차가웠고...늘 보는 사람이 차가워 보이니까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봐요.”
“단지 그것 때문에?”
사실이라면 이해가 안되는 말이었다. 차갑기 때문에 좋아졌다? 아무 이유없이 첫눈에 반한다 라는 말보다 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유민이는 나를 따라서 잔을 비웠고, 내가 잔을 채워줄 그때에 조금씩 입을 열었다.
“설명하긴 애매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선배가 자주 눈에 보였거든요. 학교 내에서도 보였고, 식당에서도 보였고..근데 늘 그런 표정이었어요. 그러다가 한 번 선배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었죠.”
“어디서?”
“친구들하고 있을 때였던거 같아요. 농구를 하던 때였나? 아무튼 그때 되게 환하게 웃으시더라구요.”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경위를 듣는 것이 이렇게 쑥스러운 일일 줄은 몰랐다. 물론 분위기는 너무나 좋았지만, 내가 이런것에 익숙치 않으니 문제였다.
“그 무렵 여자애들은 다 그런거 같아요. 자주 마주치다 보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또 자주 마주치면 나 저 사람하고 인연인가?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하지만 그게 착각일 수도 있잖아. 물론...날 좋아해 주는 건 좋지만 남자로서는 이해가 안되는데?”
“맞아요. 착각일 수도 있어요. 저도 선배가 졸업하고 나서 착각이었나 보다 하고 지냈고, 남자친구도 사귀었었구요. 근데..대학교 와서도 선배를 만난 거에요.”
달리 맞장구 쳐줄 말이 없어 술만 들이켰다. 기분은 몹시 좋았지만, 나에겐 없는 순수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만약에..선배가 군대를 다녀온 2년후에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그때는 착각이 아니라는 게 더욱 확실해 지겠죠?”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 잠자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유민이의 손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나는 시크하거나 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보잘것 없는 한심한 애정결핍증 환자일 뿐이었다. 예림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주제에 다른 여자들을 딱 잘라 버리지 못하며, 누군가의 관심을 갈구하는 그런 놈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선배. 여자가 우는거 싫죠?”
“그거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겠어. 그런데 그걸 왜 물어?”
“그러면 전 선배 훈련소 가는 길에 따라가지 않을게요.”
말과는 달리, 유민이는 지금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 기분좋고 축복받은 일일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이 미안하거나 가슴아픈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목이 바싹바싹 말라오는 것 같아 손을 뻗어 소주병을 쥐었다. 잔으로 기울이니 쪼르르 몇 방울이 떨어지다가 말았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 병을 다 비운 모양이었다.
“하나 더 시킬까?”
“전 소주는 자신 없는데...”
“내가 다 마시면 되잖아.”
“그러다가 취해요.”
하지만 충분히 취해도 될 시간이었다. 이제 겨우 저녁 7시를 조금 지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민이는 아직도 술을 고파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도, 안주도 동이 나 버린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가 나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집으로 가요. 그때 마셨던 와인 그대로 남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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