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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어느 멋진날 2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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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355 회 작성일 24-02-06 15: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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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


“안가면 안돼? 응?”

그녀는 완전히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내 목에 매달려있는 반짝거리는 눈빛이 몇번이고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았다. 10년전에, 자신을 괴롭히는 만수를 혼내 달라면서 내게 종알대던 그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

우리사이에서 누나와 동생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스킨쉽의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가는 연인처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것이 익숙해지자 그녀는 종종 내게 안겨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 안가. 다 간다고 말을 했는데 뭐..”

“치..”

엠티 당일날이 되니 예림이가 가지 말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커다란 백팩을 메고는 내 허리를 꽉 끌어안는 예림이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어미새의 품에서 안정을 찾은 조그마한 새처럼, 내 가슴에 볼을 부비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금방 올게. 바로 다음날 올건데 뭘.”

“정말? 2박 3일 아니었어?”

“원래 일정은 그랬는데...나도 모르지. 그런거야 집행부 애들이 하니까..”

“음..정말 내일 오는거 맞지?”

내일 온다는 말에 금세 눈을 반짝거리는 그녀가 귀여워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베시시 웃는 하얀 볼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우리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한껏 까치발을 하고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녀의 모습에서, 흡사 오유민의 자취방에서 있었던 기억이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살짝 그녀의 아랫입술을 포개어 잡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그녀의 입술과 맞닿은 채로 내 고개가 옆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단순한 입맞춤이 아닌 키스로 가는 단계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는지, 내 몸위로 올려져 있는 손이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오직 예림이에게서만 느낄수 있는 그 향기가, 내 입안가득 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번에는 충동적으로 내가 입술을 덮친 것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약간은 서툰 솜씨로 내 입술을 살짝 빨아주고 있었다. 그 작은 틈바구니 사이로 들어간 내 혀가 촉촉한 그녀의 혀와 매듭을 짓고 있었다. 내 호흡이 예림이의 부드러운 입술사이로 흐르는 것은 짜릿한 쾌감이었다.

이상하게도, 예전에는 잘도 예림이의 몸을 더듬던 내가 막상 둘 사이의 선이 지워지고 나니 쉽사리 그녀의 몸을 만지지 못하고 있었다. 은연중에 나도 조금씩 발전되어 나가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예림이와의 키스는 너무나 오랜시간 이어졌고, 나는 풍만한 가슴과는 달리 가냘프게 뻗은 그녀의 허리선에 한참이나 손을 대며 부드러운 입술을 몇번이고 보듬었다.

마치 원래 한 셋트인것처럼 꼭 달라붙어 있던 우리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내가 출발하려고 했던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어진 후였다. 예림이의 발그레해진 볼이 내 가슴에 부벼졌다. 오늘따라 더욱더 윤기나 보이는 머릿결을 살짝 쓰다듬었다.

“잘 다녀와. 앙탈 안부릴게.”

“금방올게. 걱정하지마.”

“응.”

마지막으로 쪽 소리가 나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나는 미련없이 현관을 나섰다.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불룩해져 있는 바지 앞섬때문에, 나는 현관문을 닫고도 한참이나 계단 난간을 쥐고는 허리를 뒤로 뺀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은 것 같았다.

빨리오라고 독촉하는 인재의 문자 메세지와, 지금 어디냐고 묻는 유민이의 메세지가 게속해서 휴대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엠티라는 것을 처음 가보는 나니, 아무래도 1학년애들 앞에서 능숙한 선배행세를 하기엔 애초에 글러먹은 듯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왜 엠티를 간다고 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어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엠티였다.

시간이 점점 빨리가는 듯했다. 오늘 아침에는 반드시 예림이에게 군대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먹었건만, 갑자기 그녀가 안기는 바람에 또 입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가기 전날에 해버리는 것 아닐까?하는 초조함마저 밀려 들었다.

어차피 내 입대를 아는 사람은 유민과 한별 뿐이었다. 물론 숙모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정작 나와 항상 가까이 있는 예림이에게 말하려고 하면 왠일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두려워서였다. 마음속에 있는 벽을 겨우겨우 허물어낸 그녀에게, 이제와 나 떠난다 라고 말할 용기가 서지 않았다. 너무나 내 일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내 무책임함에 대한 벌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캠퍼스가 보였고,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벚꽃나무들이 보였다. 사회과학대 앞에 있는 몇 대의 관광버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이것저것 준비하기 바쁜 경제학과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래봐야, 준비하는 것은 술 뿐이다. 엠티라는 것이 아무리 맴버쉽 트레이닝이니, 친목도모니 하는 허울을 붙여도, 결국 목적은 지들끼리 취하러 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선배!”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발랄한 복장을 한 유민이의 모습이었다. 깜찍한 치마위로 입은 노란색 후드티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유민이의 모습때문에 한껏 표정이 언짢아 진 인재의 모습도 보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을때, 오늘따라 더 짧아진 듯한 치마를 입고 있는 강한별이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그제서야, 나는 2학년 늑대들이 왜 강한별 파와 오유민 파로 나뉘어 영양가 없는 싸움과 열광을 하는지 감이 잡혀왔다. 흡사 물과 불, 여름과 겨울처럼 판이하게 다른 듯한 외모와 매력 때문이었다. 물론 두 경우다 ‘미인이어야 한다’라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하여튼 그 둘은 외모에서부터 상반된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즉, 귀엽고 앙증맞은 것을 좋아하는 녀석들은 오유민 쪽에, 그리고 섹시하고 도도한 매력에 끌리는 녀석들은 강한별 쪽에 잔뜩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동기녀석이 건낸 생수통을 받아 들어 목으로 물을 넘기며, 무표정한 얼굴의 강한별을 살짝 바라보았다. 저번의 일 따윈 아예 잊어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서 버스를 응시하는 그녀의 속눈썹은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강한별을 따르는 2학년 머슴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짐을 대신해서 날라 실어주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미를 알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자자자. 번호 뽑아!”

난생처음 선배 자격으로 엠티를 가는 2학년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조그마한 박스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게 뭐야? 하는 듯한 내 표정에, 동기녀석이 큭큭 거리며 내게 입을 열었다.

“한별이랑 유민이 때문에 저런게 생긴거지.”

“무슨 말이야 그게? 저게 뭔데?”

“버스 좌석표. 남녀 따로 뽑아서 같은 번호가 나오면 같이 앉아서 가는거야. 뭐 성비율이 맞지 않으니까 운없으면 남자새끼들끼리 앉아서 가는거지.”

“그딴걸 왜 해? 그냥 앉아서 가면 되는데..”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내 표정에도, 녀석은 설레는 표정으로 자기가 뽑을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녀석은 ‘오유민 파’였다.

“말했잖아. 한별이랑 유민이 옆에 앉겠다고 하는 새끼들이 많아서..저런 생쇼하는 거라니까. 야 니 차례잖아. 얼른 뽑아.”

어차피 버스 한 대로 수용되는 인원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별이와 유민이를 추종하는 녀석들은 몇 대의 버스들 중에서 같은 버스에 걸리고, 거기에 덧붙여 같은 번호를 뽑아야 하는 그 희박한 확률에 목을 메고 있는 것이었다.

“참내..”

나는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박스에서 번호표를 뽑아들었다. B-19라고 쓰여진 쪽지가 내 손에 펼쳐졌다.

“이런것도 할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내 옆으로 온 강한별이 쪽지를 만지작 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엠티라고 편한 복장이랍시고 티셔츠에 치마를 입고 왔지만, 그것이 다른 늑대들을 더 표효하게 만드는 것임을 모르는 모양이다. 아아, 저 아이라면 알고 일부러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몇 번이에요?”

“B에 19. 무슨 의미야?”

“두번째 버스 19번 좌석인가 보죠.”

“그럼 넌 몇버..”

아무생각없이 한별이의 번호를 물으려는데, 그녀는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사뿐사뿐 다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을때에, 강한별은 오유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인재는 연신 오유민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녀의 쪽지를 확인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고, 반대로 오유민의 얼굴은 나를 향해 있었다. 유민이에게 다가간 강한별이 넌지시 하는 소리가, 몇 발자욱 떨어진 내 쪽에서도 또렷히 들려왔다.

“나랑 쪽지 바꾸자.”




사람이라는게 역시나 간사한 모양인지, 이제와서야 뒤늦게 그 날 한별이와 있었던 일이 걸려서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딴에는 숙모에게 그런 상실감을 안겨줬다는 이유로 삼촌을 무너뜨리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강한별에게 쩔쩔맬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는 삼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카에게 여자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들었을때 어떻게 행동하려나 하는 겁이 덜컥 들어왔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최악으로 갈 상황은 없어 보였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다시 가정에 충실해 질 수도 있을지 몰랐고, 하다못해 그 자존심에 강한별에게 또 만나달라고 돈봉투를 내밀진 않을 테니까. 다만 내가 걱정되는 것은 그 상실감을 숙모에게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에서는 ‘그렇게 까지 망가진 인간은 아니겠지’하는, 의미없는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

“아..응?”

“무슨 생각해요? 아까부터 고개 푹 숙이고.”

“아..뭐..별거 아냐.”

내 옆자리에 앉은 오유민이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강한별 이 자식. 무슨 생각으로 유민이와 쪽지를 바꾼 걸까? 그렇다면 원래 내 옆자리는 한별이었다는 말이겠지?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다.

한 번 입을 맞춘적이 있는 오유민의 입술이 몇 번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무언가 내게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한 그 뉘앙스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유민과 나란히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기 저기서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대 때문이죠?”

오유민이 소리를 죽여 내게 물어왔다. 아..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군대때문에 착잡해 하는 것으로 비춰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선배 이미지와 안맞게 군대 무서워 하는 거에요?”

장난스러운 얼굴한 그녀의 눈웃음이 나를 향했다.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에? 정말 무서워요?”

“응. 좀 무섭네. 다들 가는 건데..”

“뭐가 무서운데요?”

“내가 잊혀질까 봐서.”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내 말에 그녀의 고개가 갸웃했다. 어떤 뉘앙스로 들렸을지는 모르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 왠지 모르게 예림이에게, 숙모에게 잊혀질까봐 겁이 났다. 덧붙여서, 강한별과 내 옆에 있는 이 아이에게도 말이다.

“설마요. 2년이 길긴 해도..사람을 잊을 정도는 아닌데..”

“아니 뭐. 갑작스레 가니까 이러나봐. 군대 가기전에 요란하게 놀아 젖히는 애들 보면서 어차피 다 가는거 뭐 저리 유난떠나..했는데..내 입장이 되어보니 또 다르네.”

버스의 흔들림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떠들다 지친 몇몇은 잠이 들어 버린 걸까. 실내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유민이 가만히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는 느낌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 언저리를 간지럽히며, 향긋한 샴푸냄새가 얼굴로 뿌려지는 듯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더 빨리 용기를 내는건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반사적으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아이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하는 지금의 내 상황이 조금 답답해져 왔다. 맞는 말이었다. 모든것은 타이밍으로 돌아간다. 내가 오유민의 마음을 예전에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전개는 펼쳐지지 않았을 지 모른다. 설령, 이 뒤에 있는 미래의 내모습이 희극일지, 비극일지 모른다 할지라도.

오유민의 하얀 손을 힘을 주어 잡았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고, 누가 본다 한들 상관없었다. 남자 동기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긴 하겠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오유민은 섣불리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속상한 기색하나 내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다가갈 기회를 만들어 주고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강한별이 오유민과 자리를 바꾼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강한별은 내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라도 유민이를 통해 도망치라고. 누나를 사랑하는 것에 더이상 깊게 발을 들였다가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만들 것이라며 내게 무언의 충고를 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건내는 충고는 오늘 아침 예림이가 보여줬던 그 미소 속으로 천천히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오유민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를 설레게 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림이를 다시 누나의 위치로 돌려놓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엔, 모두를 사랑하는 나쁜놈이 되버릴 거라고 철없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 될거에요. 적어도 저는..군대 갔다고 해서 잊지 않을게요.”

그녀의 속삭임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멀리 우리학교가 엠티때마다 가는 콘도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처음 참가하는 것이니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생각보다 시설이 꽤나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자고 있는 녀석들이 하나둘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기대고 있던 우리는 자연스레 떨어졌고, 2학년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짐을 내리고 있었다.

“자자자. 일단 조별로 움직이고 배정받은 방으로 가자. 조에 편성된 2학년들이 인솔해서 가는거야. 어?”

무심한 내 시선에 1학년들을 통제하는 녀석들의 바쁜 움직임이 보였다. 오유민과 같은 좌석에 앉아 오지 못해서 푹 자고 일어난 것인지, 졸린 눈을 부비면서 물만난 고기마냥 활개를 치고 다니는 인재의 모습에 한숨이 푹 하고 나왔다.

역시...엠티는 오는게 아니었어.




아이러니 하게도 나 역시 첫경험이었다. 1학년 때에 아웃사이더 소리를 들어가면서 엠티며 체육대회를 참가하지 않아서 그런지, 엠티에 관한 지식은 1학년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콘도는 산 속에 틀어박힌 공기 좋은 곳이었지만, 사실 술을 퍼마시기 위해 굳이 돈을 들여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필요성을 나는 아직도 느끼고 있지 못했다. 강한별 파와 오유민 파의 미움을 골고루 섭취하고 있는 나는 두 아이 다 속하지 않은 조에 편성되어 적성에 안맞는 선배행세를 해야만 했다.

“여보세요?”

뚱한 표정으로 내가 아닌 다른 2학년들에게 의지하며 장소를 옮기던 나는 주머니에서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예림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화를 건 사람은 숙모였다.

-지금 어디에요?-

“엠티 왔어요. 무슨일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물론 천둥 공포증을 겪을 그 때처럼 겁에질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온 숙모의 연락이 밝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삼촌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사이의 연락은 늘 숙모쪽에서 부터 걸려오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삼촌이 조금 이상해서요.-

“네?”

나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가고 말았다. 식사를 하고, 장기자랑을 준비하던 아이들은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고개를 돌려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콘도에 위치한 대강당을 빠져나왔다. 나가는 그 순간에 입구에 서있던 강한별과 살짝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전화기를 붙잡았다.

“무슨 말이에요? 삼촌이 숙모를 어떻게 했나요?”

-아뇨. 그 반대에요. 갑자기 집 안에서 너무 살가와 져서...나랑 예영이 관계를 눈치챈 게 아닐까 하는 겁이 나서요.-

“살가와 졌다고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물론 나쁘지 않은 결과였지만, 삼촌이 다시 쪼르르 가정으로 돌아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별이와 내가 있었던 그 장면이 그렇게 충격이었던 것일까?

“자세히 말해 주실래요?”

-그냥..갑자기 집에 일찍 들어오고, 술도 마시지 않고..나한테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고 있어서요. 그게 싫은건 아닌데..왠지 내가 예영이 만나는거 눈치채고 저러는거 아닐까 싶어서..-

“아뇨 숙모. 그건 아닐거에요.”

삼촌과 나, 강한별의 관계에 대해 숙모에게 설명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숙모가 저런 불안함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기사, 숙모는 바람같은 걸 한번도 생각하고 살았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카와 입에 올릴수 없는 일을 벌였으니 저런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삼촌의 행동이었다. 정말로...젊은 여자에게 데여서 다시 가정에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뒤늦게 숙모의 소중함을 깨닫고?

“삼촌은 뭐하고 있는데요?”

-지금 골아떨어져 있어요.-

“아직 초저녁인데?”

-아니..그게..-

머뭇머뭇 거리는 숙모의 태도에서, 나는 대충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숙모와 삼촌사이의 섹스리스가 깨진 것이겠지. 그래서 더더욱 숙모는 불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삼촌이 숙모에게 강한별의 대리 만족을 한 것임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나중에 올라가면 이야기해요 숙모.”

-알았어요. 불안해서 그랬나봐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괜찮으니까 안심해요. 그리고..올라가면 우리 만나요. 알았죠?”

-알겠어요.-

전화를 끊으니 왠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삼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파악하고 다시 숙모를 울리지 않게 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은 분명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숙모의 목소리에서 불안감과 아쉬움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다시금 한창 장기자랑이 펼쳐지고 있을 강당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때, 나는 흠칫 놀라며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아주 가까이 있는 벤치에, 강한별이 살짝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가에서부터 뽀얀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뿌려졌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도망칠 길이 두개가 필요하겠네요.”

“시끄러워.”

“미안요. 훔쳐들을 생각은 없었어요.”

강한별의 태연한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아서, 나는 그만 얼굴을 실룩 거리며 화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한별이의 얼굴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됐어. 들어갈래.”

“술마시고 싶어졌죠?”

왠지 모르게, 강한별과의 대화는 딱 하고 자를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 정말 스무살이 맞는 걸까? 누군가의 마음을 꿰뚫어 보거나, 혹은 눈치로 보자면 나보다 수십년은 더 산 아이같았다. 요술로 젊은 여자의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마녀의 느낌마저 들었다.

“어차피 이따가 실컷 마실텐데 뭐.”

“같이 마셔요 저랑.”

“넌 나와 같은조가 아니잖아. 니 추종자들이 너랑 같은 조를 만들려고 한 쌩쇼를 보면 그런말이 안나올거다.”

내 말에 그녀는, 바깥에 설치된 간이 재털이에 아직도 길게 남아있는 담배를 살며시 비벼서 껐다. 앉아있는 바람에 더욱더 짧아진 치마가,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은근슬쩍 보여주고 있었다.

“별로, 나중에 가면 그런 조 편성같은건 아마 소용없어 질거에요.”





-잘다녀와.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알았지?-

예림이의 문자메세지에 답을 해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기분이 찜찜해지고 있었다. 부부인 삼촌과 숙모가 부부관계를 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원래의 내 목적이 삼촌에게서 강한별을 떨어뜨려 놓아, 그에게 상실감을 안겨주는 것임에도, 그 목표를 달성했을때의 뿌듯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한테 들어오는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쉴새없이 술을 넘겼을때엔, 이미 내 주변에 녀석들은 술로 넉다운이 되어있는 후였다.

“아이..자슥들이..끅! 벌써 다 뻗어가지고 말이야..”

그나마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기 녀석도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남자애들을 분장시켜 예쁜 남자 뽑기 등등의 재미없는 행사마저 종료되었으며, 술판이 벌어진 후 정확히 세시간만에 생겨난 상황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콘도가 뒤흔들릴 정도로 떠들어 대던 녀석들이, 이제는 고요함 속에서 간헐적인 웃음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져 있었다. 조별로 입실된 방에서는 아마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졌을 것이고, 대다수 지금 내가 속한 조처럼 골아 떨어지거나 사경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직까지 웃고 떠드는 녀석들은, 특출나게 술을 잘마시는 부류거나 혹은 여태까지 기를 쓰며 술을 안먹겠다고 거부하던 아이들일 것이다.

“야아아아! 김예여어어엉!”

혼자 마시려면 뭐하러 왔을까? 시간도 아까운데..라며 중얼거리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내 앞에 남아있던 마지막 그 녀석까지도 방바닥에 머리를 뉘이며 골아 떨이지고 있었다. 근데 저건 박인재 목소리인가?

“인재오빠 방은 여기군요. 어차피 방문에 다 조원들 붙어 있는데 소리지를 필요까지야.”

이번엔 강한별의 목소리였다.

“와! 예영오빠 저기있다!”

마지막으로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업되어 있는 오유민의 목소리가 들리며, 도합 세명의 인원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인재는 얼마나 마셨는지 비틀거리기 시작했으며, 술을 못하는 유민이도 몇 잔 마셨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독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강한별 뿐이었다.

“얌마! 너 거기서 혼자 뭐하냐?”

“보다시피 다들 뻗어서 이러고 있지.”

“역쉬! 경제학과 최고 주당 답구만. 너 찾아 다니느라고 혼났다.”

“날 왜?”

내 의아한 표정에, 인재는 온갖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너가 뭐가 그리 좋다고 여기 있는 퀸카 두 분이 같이 술먹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새꺄. 유민이는 나랑 같은 조였고, 한별이는 다른 조인데 얘 혼자 생존해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존자들만 싹싹 모아온거지.”

두서없는 녀석의 말이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오늘 유민이와 섬씽을 만들어야 할 인재는 절대 취해선 안될 테지. 게다가 술이 약한 오유민이 취해버려서 다른 오유민파 늑대들에게 노출되어도 인재에겐 곤란한 것이다. 즉, 녀석은 오유민에게 건내어지는 술잔을 최대한 방어해주고, 그녀의 흑기사를 자청하며 다량의 술을 마시면서도 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내와 끈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참...장한..아니 징한 놈이다.

“내 말이 맞죠?”

어느새 유민이와 함께 편한 면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강한별이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몸에 살짝 달라붙어 굴곡을 보여주는 옷차림에, 평소와는 달리 머리도 살짝 묶은 모습이었다.

“그래. 니 말대로 조편성은 의미가 없네. 우리끼리 마시자.”

“네엡!”

큰 소리로 명랑하게 대답하며 까르르 웃는 유민의 모습은, 그녀가 약간 취해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녀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았으며, 인재는 엉거주춤 유민이의 옆에 붙어 앉았다. 변변한 안주는 이미 동나있는 상 위로, 인재와 한별이가 자기 방에서 가져온 술들이 펼쳐졌다.

“역시 안취해 있을줄 알았어요.”

모두가 뻗어버려 고요해진 방에서, 강한별이 하는 말이 묘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술에취한 유민이는 자꾸만 내 어깨에 기대려 했고, 인재는 그것이 못마땅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술기운이 올라오니 어쩔줄 몰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취할 틈이 없지 않을까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정신력이..”

“야. 강한별. 그만해.”

나를 놀리는게 그렇게 재밌을까? 쿡쿡 거리면서 웃는 이마를 살짝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자, 건배!”

오늘만 해도 몇 번을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소주잔을 부딪혔다. 인재의 살벌한 시선에도 자꾸만 내 쪽에 붙는 유민이의 발그레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너 많이 마셨어?”

“흠..조금요..아주 조금.”

“얼굴은 조금 마신게 아니..”

그녀에게 뭐라고 하려는 찰나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오유민의 손이 내 손을 살짝 감싸쥐었기 때문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약간은 차가워져 있었으며, 아주 다행히도 인재의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야..김예영.”

“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갑자기 볼멘소리로 내게 말을 하는 인재의 목소리에 흠칫 하며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표정이 연신 베시시 웃는 유민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내쪽으로 돌아왔다.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 있냐? 엉?”

사람을 경직시키는 질문이었다. 설마 유민이의 집에서 키스를 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일까? 유민이가 술에 취해 그런걸 다 이야기 한건가? 하는 생각에 암울해져 왔다. 인재의 집착은 그 어떤 조리있는 변명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뭐가?”

“난 그래도 인마...대학에서 딱 1년봤어도 너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한별이의 표정도 기묘하게 바뀌었다. 정신이 없는 유민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그러니까 뭐 때문에 그러는데?”

이왕 이렇게 된거, 당당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인재는 억울하다는 듯 소주잔을 비우고는 내게 입을 열었다.

“너..어떻게 군대 가는거 나한테 이야기 안할수가 있냐? 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물론 마음속으로 혼자 쉰 것이지만, 아마도 강한별은 내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었을 것이다. 역시나 내가 꿀리는 것이 있을때 가장 마주치기 싫은 아이가 저 아이였다.

“말을 안한게 아냐. 나도 신청해놓고 잊어버렸을 뿐이야. 그러다가 우편함에서 거의 썩어가고 있는 입영통지서 본 거고...”

“얌마! 그게 말이 돼? 입대신청 해놓고 까먹는 새끼가 어딨어..엉? 빤쓰 입는건 안까먹냐?”

“부모님 돌아가셔서 까먹었다 인마.”

무표정함과 동반된 내 말에 녀석은 심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기사, 내 부모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간에, 어쩌다 내 입에서 이런말이 나오면 다들 저렇게 당황한다. 철면피 박인재도 그 부분은 예외가 아니었다.

“아..암튼 술마시자.”

“유민이 넌 마시지 마. 취하겠다 그러다.”

내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정신차리고 보니 우리 셋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인재는 뭔가 욕망이 꿈틀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고, 강한별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메이크업을 지운 뽀얀 피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색의 면트레이닝 복은, 한별이와 비슷한 복장이지만 그것보다는 헐렁해서 몸매를 드러내진 않고 있었다. 저번에 돌발적인 키스로 인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을때, 생각보다 가슴이 컸었지..하는 회상에 잠겨 있었다. 그 와중에 한별이의 가슴과 비교를 하는 나는 아마도 속물일 것이다. 취할랑 말랑 하는 그 모습이, 위험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귀엽다.

생존자 4인의 술자리는 은근히 어색해져 있었다. 지금 각자가 품고 있는 감정을 도식화 한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그림이 탄생할 것이다. 경제학도 들이라면 치를 떠는, 무차별 곡선과 맞먹는 그래프로 표현될 것이었다.

“게임할까요?”

“게임?”

그 적막을 깬 것은 한별이었다. 인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고, 내게 거의 기대어 있다 시피했던 유민이도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진실게임이라면 사절.”

내 말에 강한별이 쿡쿡하고 웃었다. 왜 웃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돌아온 그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게 맞는지 시험하려고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저게 진짜! 라면서 화를 내고 싶었는데, 다른 두사람이 있으니 그리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인재와 유민이는 강한별의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이 엉아가 쥑이는 게임을 소개해도 될까?”

“뭔데?”

인재는 대단한 것을 말할 것처럼 길게 운을 떼었다. 오랜만에, 강한별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응. 왕게임. 고전이지만 클래식. 구관이 명관이지.”

“왕게임?”

“그래 인마. 이렇게 남녀 성비가 정확할 수록 그 효력을 십분 발휘하는 게 바로 왕게임이다.”

“어떻게 하는 건데?”

“간단해. 종이에 왕 하나랑 숫자 세개를 적어. 그리고 제비뽑기를 하는 거지. 그리고 왕을 뽑은 사람이 명령할 수 있어. 가령 1번하고 2번 뽀뽀해라 뭐 이런거.”

“재밌겠네요.”

뭐가 그 따위야..라는 말을 하려는데 강한별이 잽싸게 인재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유민이 역시 술기운이 올라와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지 찬성의 뜻을 표해 왔다. 인재는 벌떡 일어나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왔고, 그는 각각 ‘왕’이라는 글자와 1번부터 3번까지의 숫자를 적어 메모지를 두번 접어보였다.

“대신, 시킨것은 제대로 해야 해. 왕의 판단하에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했다 싶으면 맘에 들때까지 다시하는 거야. 내 말 알아?”

“명령을 거부하면?”

“소주 한 병 원샷이다.”

“알았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조금은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예림이와도 단둘이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하는 요상한 아쉬움마저 가진 채로.

“자 그럼 시작한다.”

인재는 곱게 접은 종이들을 손에 넣고 그것들을 섞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크기, 같은 색깔의 메모지에 적혀 있으니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과자 봉지나, 혹은 육포같은 자질구레한 안주들이 강한별의 손에 의해 치워졌고, 깨끗해진 테이블 위로 인재가 적은 쪽지들이 투하되었다.

“자. 하나씩 들어.”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버스에서 어느 자리를 앉을 것인가를 놓고 하는 제비뽑기 따위보다, 4지선다형인 지금의 뽑기가 훨씬 스릴있게 느껴졌다. 술기운 탓에 말을 하지 않고 방실거리기만 하던 오유민의 표정도 진지해 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러했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내가 뽑은 쪽지가 보이지 않게 손으로 살짝 가리며 안에 적혀있는 글자를 확인했다. 십자 모양으로 접힌선이 드러나는 쪽지 안에는 3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왕이 누구죠?”

강한별이 살짝 나와 인재의 눈치를 보았다. 인재 녀석이 쪽지를 테이블 위로 펼쳐보였고, 그 종이의 한 가운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인재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백성이 되어버린 우리 셋은 긴장된 표정으로 인재를 응시했다. 근데..어째 왕이라서 좋아해야 할 인재의 표정이 껄끄러운 표정이었다.

“명령 내린다.”

인재를 제외한 나머지들에게서 긴장감이 감도는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재라면 분명 평범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뻗어버린 방 한 구석에서, 유독 우리 네 명만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며 흩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지목한 사람 둘은 저기 안에 5분간 들어가 있기.”

인재가 지목한 곳은 콘도 안에있는 붙박이 장이었다. 수납공간이 풍부한 편이었지만, 성인 둘이 들어가면 완전 밀착할수 밖에 없는 좁디 좁은 공간이었다.

“그냥 들어가는게 아니고, 안에서 속옷 하나씩 벗고 나오기야.”

“에에?”

유민이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나 역시 긴장했으며, 강한별 만이 재밌겠다는 듯 쿡쿡 거리며 웃고 있었다. 박인재 저 녀석..적당히 취한게 아니라 아주 거나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명령을 시행할 사람은...2번과 3번.”

옆에서 오유민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덧붙여서, 강한별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미 반응만으로도, 누가 걸렸으며 누가 생존자인지 파악이 가능해진 순간이었다.

“자자. 김예영하고 강한별. 내가 오케이 할때까지 나오지 말기야. 물론 나올때는..알지?”

인재 입장에서는 유민이와 같이 오붓하게 보낼 수 있는 5분이 부여된 것이겠지만, 졸지에 붙박이 장안에서 속옷을 벗어야 하는 나와 강한별의 표정은 굳어지고 말았다.

“자자! 뭐해! 빨리 들어가!”

혀까지 꼬여있는 인재가 우리 둘의 몸을 계속해서 밀치는 탓에,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붙박이 장의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대충 머리만 살짝 굽히면 서 있을수도 있는 자리이긴 한데, 문제는 폭이 좁았다. 내가 몸을 움츠려 들어가 서니, 강한별이 들어올 자리는 턱없이 부족해 지는 것이다.

“그럼, 나올때 전리품들 잘 챙겨 나오고..즐거운 시간되셔!”

“야..야!”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인재의 손에 의해 강한별이 장 속으로 밀어져 들어왔다. 체구가 작은 여자인 한별이가 들어왔음에도, 나와 그녀의 몸은 딱 하고 밀착되어져 버렸다. 그리고 인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붙박이 장의 문이 닫히며 어둠이 찾아왔고, 밖에서는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좁네요. 여기.”

최대한 뒤로 붙었지만, 마주보고 선 나와 강한별 사이에는 주먹하나가 들어갈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문이 닫혔지만 아주 미세한 틈 사이로 빛에 세어들어 오는 장 속에서, 나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재녀석. 하필 이딴 벌칙을..”

“그래도, 나랑 선배여서 다행인거죠.”

“뭐가?”

“만약 내가 왕이 되어서, 인재선배와 유민이에게 이 벌칙을 지시했다면 최악이겠죠.”

좁은 공간에서 우리가 내뿜는 호흡때문에, 주변은 자욱하게 술냄새가 들어찼다. 생각해보니, 강한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을 하며 물었다.

“뭐가 최악인데?”

“유민이가 인재선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나저나 속옷을 어떻게 벗어야 하지?”

“저야 브라를 벗으면 되는데..선배가 문제군요. 이렇게 좁은 곳에선..”

조금만 앞으로 가면 강한별의 입술과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와 그녀가 섹스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지금은 상황자체가 조금 달랐다.

“옷벗기에는 공간이 너무 협소해. 그렇다고 소주 한병 원샷할 자신도 없고.”

“음..일단 이렇게 해봐요.”

강한별이 내 몸을 끌어 당겼다. 그녀의 몸과 내 몸이 완벽하게 밀착했고, 나는 살짝 바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쩌려고?”

“각자 벗을수 있는 공간이 없잖아요. 선배는 바지를 벗어야 하니 엉덩이를 뒤로 빼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없고..반대로 제가 브라를 벗을려면 손을 뒤로 돌리던가 해야하는데 그럴 공간도 없고요.”

“그래서?”

“서로가 벗겨 주어야죠.”

묘하게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분명, 옷을 벗기는 것 이상의 스킨쉽을 그녀와 나누었음에도 분명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우선 선배가 제 옷안으로 손을 넣어서 후크를 풀어 주세요.”

“좋아. 알았어.”

나는 조금씩 꼼지락 거리며 강한별의 트레이닝 복의 지퍼를 내렸다. 주르륵 하는 그 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을때엔, 보드러운 그녀의 허리와 등이 내 손에 어루만져졌다. 손을 조금 올리니,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강한별의 등 뒤에 채워져 있는 브레지어의 후크였다.

“그거..풀러 봐요.”

이상하게 강한별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이 게임..별거 아닌데 굉장히 묘하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손으로 몇번이고 더듬어 브라의 후크를 풀어버렸다. 톡! 하는 그 작은 소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이제..어떡해?”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붙박이 장의 문 부분을 몸으로 밀어서 열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트레이닝 복 지퍼를 완전히 내린 강한별이 그 상태 그대로 밖으로 노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잠깐 만요.”

내 목에 한쪽 손을 둘러 내게 지탱한 채로, 강한별이 이리저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그녀의 몸위로 어설프게 위치해 있는 내 손에 강한별의 몸이 이리저리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한별이 역시 흠..하는 콧소리를 내었고, 아랫도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무언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남을 느꼈을 때엔, 강한별은 트레이닝 복 상의와 브레지어를 동시에 벗어 바닥에 떨군 후였다. 매끈한 상반신을 드러낸 그녀가, 내 귓가로 조용히 속삭였다.

“다..다됐어요. 이제 선배 차례에요.”

이 게임...왠지 위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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