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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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2)
내 자지와 관련 해 아주 어릴 적 기억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너댓살 때였다. 낮잠을 자고 나온 나는 징징 울고 있었다.
"어무이, 빨리 온나! 영도 또 피 난다."
밭일을 하다 막 싸릿문을 들어서는 엄마를 향해 누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에그, 이 문디 자슥. 또 사달 냈구나."
엄마는 내 머리를 한번 쥐어 박고 얼른 약상자를 꺼내 왔다. 탈지면과 빨간약이라고 불렀던 머큐롬, 다이아찐 연고, 지혈제로 쓰는 오징어 뼈가루, 가제와 붕대 등등이 들어 있었다. 내 자지와 불알 주변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엄마는 농사 짓는 시골 여자 치고는 능숙한 솜씨로 처리 한다. 이미 이런 일들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급 조치를 끝낸 엄마는 우선 두 누나에게 화를 냈다.
"숙제 하다 우는 소리 나서 나와 보이 이래 됐더라. 지 혼자 사루마다 벗고 후집어 터뜨렸는데 낼더러 우짜락꼬 ... ?"
영미 누나가 반발 했다. 어릴 적 부터 성질이 못 돼 어른이 꾸중을 다소곳이 듣는 법이 없다.
"이 가시나가 뭘 잘 했다고 말 대답이고?"
엄마는 방 빗자루를 들어 막내딸을 후려 쳤다.
"이 애물 단지야. 니 죽고 나 죽자!"
어린애의 저항이란 그저 우는 일 뿐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울부짖었다. 한참을 울어 대다 아직 훌쩍거리는 나를 엄마는 달래기 시작했다.
"하기사 어린 니가 무슨 잘못이고? ...... 다 에미 잘못이다. 내가 죽일 년인기라."
엄마가 나를 폭 끌어 안자 나는 늘 그래 왔듯 엄마의 앞섶을 제치며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래, 젖 묵고 자그라."
엄마의 따독거림 중에 나는 빈젖을 빨려 또 한손으로는 남은 젖통을 주므르며 잠이 들었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들의 하반신은 피투성이었다. 아들을 안고 나와 울부짖는 소동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 노인네의 말에 따라 우선 상처 부위에 간장을 부었다. 아기는 이제 울지도 못하고 눈을 까 뒤집은 채 숨만 깔딱거릴 뿐이었다. 일단 40리나 떨어진 읍내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 보면 그때까지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산들 뭐 하누 ---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창댁으로 불리는 그 아기 엄마는 대청에서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빨래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응가할 낌새를 보이자 늘 하던 대로 마루 끝에 안고 나와 가랭이를 벌려 주고는 "워리, 워리!"하고 불렀다.
아들이 똥을 누는 중에 거창댁은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고 있는 아들이 갑자기 묵직해 지고, 밑에서 무언가 세차게 당기는 것을 느끼고 내려다 본 순간 경악했다.
늘 아들의 똥을 받아 먹던 누렁이가 아니라 송아지만한 검정개가 보였기 때문이다. 비명을 질러 대자 그 검정개는 곧바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 개의 입에는 몽땅 뜯겨 나간 아들의 자지와 불알이 물려 있었다.
그날 마을의 한 암캐가 암내를 풍기자 이웃 마을 개까지 10여마리가 몰려 들었다. 숫놈들은 한동안 으르렁 거리며 힘겨루기를 했고, 결국 그 암캐를 올라 탄 것은 거창댁 네의 워리였다. 그래서 주인이 새참을 준다고 부르는데도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웃 마을에서 원정까지 왔으나 제 씨를 뿌리는데는 실패한 검둥이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 연적의 주인 집에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럴 때면 금촌리의 청년들은 질시 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마, 불알 깐 돼지와 다를 께 뭐꼬. 뽀얗게 살이 올라 먹음직 해 보이지만 사내 구실을 못하이 말짱 헛꺼 아이가."
마을의 같은 또래 처녀 총각들이 시집 장가들을 가면서 그 말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판명 되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누구나 짝을 찾았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혼사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훤칠한 청년과 누가 봐도 지독히 못 생겼거나 모자란 처녀가 짝을 맺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또 겉으로 보기에 그 청년보다 훨씬 심한 불구자나 팔푼이도 다 시집 장가를 갔다. 그럴 때 한쪽이 치우치면 그만큼 돈이나 땅이 대신해 주기도 하고 비슷한 처지 끼리 어울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팔푼이 총각과 절름발이 처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식으로.
"어디 내가 한번 봅시다"
그는 앞을 막으며 포대기를 들추었다. 갖난 아기 몸에도 그렇게 피가 많이 있을까 놀랄 정도로 피가 벌써 흥건히 괴어 있었다.
그는 아기의 가랭이와 두덩을 압박하며 알코올을 찾았다. 그러나 누구 집에도 소독용 알코올은 없었고, 소주도 도수가 약하다고 하자 누군가 40도짜리 백알로 담그었다는 뱀술을 가져 왔다. 그 술을 상처에 붓자 아기는 비명도 못 지른 채 다리만 잠시 파닥거렸다.
"이 애가 죽을지 살지는 지금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응급처치를 해 놓았으니 한두시간 병원에 늦게 갔기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제몸도 가누지 못할만큼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오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생식기가 다 으깨져 조직도 꽤 손상이 갔지만 여기서 빨리 수술하면 어느 정도 봉합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몇시간 걸려 병원에 가면 어떤 명의도 손 쓸 수 없게 시기를 놓지게 되죠. 나중에 남자 구실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짜라꼬요? ..."
엄마는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내가 해 볼께요."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한시라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채근과 "광수 말대로 해야 한다"는 찬반 양론으로 갈라 졌기 때문이다.
두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닭싸움 하듯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상대의 눈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포대기를 건네 주며 나직히 말했다.
"해 주소!"
엄마가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손이 귀한 우리집의 내력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마을에서는 첫손 꼽을만큼 뼈대가 굵고 키가 큰 장골이었다. 그런데도 손이 귀해 내가 5대 독자다. 아버지도 원래 3형제분이었는데 미처 성장도 못하고 돌림병으로 두아들이 죽었다. 내 위로도 2살 많은 형이 있었다는데 돌을 갓 넘기고 홍역을 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냥감은 여전히 처참했다. 번데기만한 고추와 겨우 완두콩 만한 고환,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 싼 피부가 마치 실컷 씹다 버린 고기점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광수씨는 당시 외과병원에서 쓰는 기초 의료 기구는 갖고 있었지만 마침 봉합사, 즉 수술용실이 떨어 져 명주실로 대체해야 했다.
이런 일 때문에 사고가 나고서도 대여섯시간이나 지나서 아기는 겨우 읍내 정식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도 아닌 사람이 손을 댔으니 우리는 책임 못져요. 상처에는 다시 손을 안 댈테니 주사 맞고 약이나 받아 가도록 하시오."
그러나 그 의사가 당시 간호원에게 했다는 말을 엄마는 뒤에 줏어 듣게 되었다.
"거칠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맞춰 놓기는 했더군. 안 그랬으면 그 애는 살아 나더라도 성불구를 면치 못했을텐데 ... 그런데 그만한 솜씨를 가진 놈이 어째 바느질실로 마감을 했을까?"
그는 한 때 "사방 3백리에 명성을 떨쳤다"는 우리 마을의 수재였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약간 절지만, 15리 쯤 떨어 진 내리 국민학교와 읍내의 중학교에서 그는 항상 전교 1등을 했다.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하기에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수석을 놓지지 않았다. 선생들은 그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그도 의대나 법대를 가고 싶은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고학을 하고 장학금을 타서 혼자 힘으로 해 내겠다"며 사정을 해 봤지만, "동생이 여섯이나 되는데 네가 빨리 취직해서 한푼이라도 벌어야 되지 않느냐"는 부모의 주장에 그는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개인병원인데도 수술실은 3개나 있었고 젊은 의사들도 항상 3~4명이 고용되어 있었다. 숙식을 하면서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소사라는 직책의 광수씨는 그 병원에서 최하급의 종사원이었다. 그러나 타고 난 총명과 눈썰미로 그는 몇년만에 원장의 가장 총애하는 직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는 때로 복잡하거나 거추장스런 심부름도 잘 처리 했다. 차츰 병원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 부려 먹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척척 잘 해 냈다. 이를테면 장부기장이나 차트 정리나 심지어 약사 보조를 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항상 뛰어 났다.
지켜 보던 원장은 혀를 찼다. 10년 안팎을 공부와 실습으로 지새워 온 젊은 의사보다, 아니 자신이 팔팔했던 시절보다 그의 솜씨가 한결 나은 것이다. 그는 원장의 입회 하에 간단한 수술의 전 과정을 혼자 처리 했다. 얼마 후에는 젊은 정식의사들을 다 내보내고 그 병원의 대부분 수술을 그가 도맡아 했다. 상황이 이렇게 까지 된 것은 이 병원만의 특별한 내막도 작용했다.
의사, 특히 외과 의사중에서 가끔 보게 되듯 원장은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자기 병원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마약도 주사하면서 심신을 스스로 파괴시켰다.
원장이 왜 그런 지경이 됐는지를 임상학적으로 규명하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유능하고 존경받는 의사였다. 가정적이나 유전적으로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술과 마약으로 허물어 져 갔다.
원장은 당시 대학 3학년인 막내딸이 졸업하면 결혼을 시키고, 뒤늦었지만 의과대학도 보내 정식 의사면허를 따도록 하고, 이 병원도 물려 주겠다고 했다. 원장의 말이 꼭 사기라거나 감언이설이 아닐 수도 있다. 원장은 실제로 그를 총애했고, 그 보석같은 자질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이 억지로 데이트도 시키고 결혼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아무 어려움 없이 공주처럼 자란 그녀는 이 절름발이에다 촌놈 무지랭이한테 자신의 장래를 맡길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딸은 연애하던 한 부잣집 청년과 결혼했다. 광수씨는 다시 병원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원장의 제의에 다시 눌러 앉았다.
원장은 그의 월급을 크게 올려 주었다. 그것은 10여년 경력의 전문의가 받을 만한 액수였다. 은밀한 거래였지만 광수씨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는 타고 난 총명과 눈썰미로 남들보다, 그것도 최고의 직업인 의사로서 10년이상을 앞서 가는 셈이었다. 그도 결혼하고 첫딸도 낳으며 경제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했다.
그는 원장의 의료 기술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인간적 약점도 닮아 갔다. 그 역시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이다. 인성이 파괴된 그는 생활도 무절제 해 졌다.
하루는 밤늦게 응급환자가 왔는데 그는 원장에게 보고도 않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다, 공교롭게도 그 환자가 죽었다.
꼭 광수씨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전에도 그는 음주상태에서 더러 수술을 했고, 확률적으로 그 환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올가미는 그를 피할 수 없도록 옭아 맸다. 그는 음주 상태의 무면허 의료행위로 살인죄로 기소 되어 징역 3년형을 고스란히 채워야 했다.
어떻든 그는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매끄럽고, 때로는 고등고시를 패스하고 검사 생활을 10여년이나 한 변호사보다 더 논리적인 변론문을 그가 작성하면 변호사는 그저 법정에서 읽어 대기만 하는 일도 흔해 졌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점점 더 허물어져 갔다. 꼭 돈이 탐나서도 아닌데 그는 사건 브로커 노릇을 하게 됐고, 이것이 문제가 되자 전과도 참작 돼 다시 징역 1년형을 복역 해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며 노동판도 기웃거리고 고향에 돌아 와 농사도 지어 봤지만 결코 그전처럼 광채 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끝 없이 추락해 가기만 하는 인생이었다.
어떤 일도 오래 지속을 못했고, 인간성은 더욱 음침하게 괴퍅스럽게 변해 갔다. 음주량만큼 술주정도 심해지고 끝내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가출해 벼렸으며, 그는 몇년 전 완전히 망가진 폐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와 왔다.
그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채근했던 부모는 이제 오히려 근심거리며 무거운 짐더미를 맡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새로은 고통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우선 내 자지 주변은 끊임 없이 덧이 났다. 갖난 아기의 생리현상은 하루에 4~5번 똥을 싸고 20번쯤 오줌을 싸는데, 농사와 다른 식구 뒷바라지도 바쁜 엄마가 일일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기저귀를 채워도, 안채워도 결과는 비슷했다.
똥.오줌이 묻으면서 상처에 고름이 잡히고 그것을 소독하고 치료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초기에는 광수씨가 소독법과 치료제등을 구해주어 그나마 대처할 수가 있었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똥.오줌의 문제는 엄마가 시간을 맞추어 누이는 것으로 어느정도 해결되었다.
엄마가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치고 매질까지 해도 나의 이런 버릇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감촉을 기억한다. 처음은 가려워서 손끝을 조금씩 대다보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기분은 어쩌면 감미롭기도 하며 사람을 조바심 나게 할만큼 새롭고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결국 피부나 딱쟁이가 벗겨지고 짓물이나 피가 나올 때까지 긁고 할퀴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또 그렇게 긁고 할퀴다 보면 근처의 다른 상처들도 해달라고 졸라 오는 것이다.
당시 우리 동네는 여름철이면 네댓살까지의 어린애들은 사내나 계집애나 거의 아래는 벗고 다녔다.
나는 특히 땀이 나면 더 덧나기 쉬워 거의 아래를 내놓고 살았다.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사고를 알고 있있다. 그래서 내 자지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오줌은 똑바로 잘 나오나?"
"저레 흉칙하고 배뚤어져서 나중에 크마 사내 구실이나 하긋나?"
어른들은 내 자지를 유심히 보고 더러 주물럭거리며 질문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미안하다, 꼬마야. 내가 보기에도 너무 손이 거칠었구나. 더구나 고환 하나는 끝내 못살렸네."
"아재요. 야가 사내 구실은 하겠능교?"
엄마의 간절한 표정에 그는 한동안 대답 대신 내 자지를 주무르고 만져댔다. 그러나 특별한 반응이 없었던 것 같다.
"글쎄요? ...... 좀 더 지켜봐야겠네. 음경은 이제 흉하지만 거의 아물었으니까 문제는 고환이고 남성 호르몬의 생성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거든요. 내가 자주 살펴보죠."
광수씨는 그러나 그 말을 못 지켰다. 그로부터 한달도 안되어 그는 논두럭에 머리를 처박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내 또래뿐 아니라 훨씬 큰 동네 아이들조차 나를 손가락질하며 "멍게좆", 혹은 "개밥좆" 이라고 놀려댔다. 나는 당시 멍게를 먹어보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그래서 멍게가 무슨 개 종류인줄 알았다. 개한테 물렸기에 어떤 흉하게 생긴 개좆이라고 부르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놀림에 대들거나 싸울 처지가 못되었다. 특히 다른 애들처럼 형이 있었다면 나도 배경을 믿고 좀 들이댈 수도 있었겠지만 누나들뿐이라 그런 면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놀림을 받게되면 어떨 때는 그저 히죽 웃기도 했고, 좀 슬퍼지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특별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자지병신이다. 다른 많은 병신들처럼 나도 병신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나는 적당히 체념할줄 알았다.
그런데 영양문제인지, 의료혜택을 못 받아서인지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는 병신들이 참 많았다. 그후 나도 도시생활을 하게되었고 몇차례 거주지도 옮겼지만 금촌리에서 살 때 훨씬 많은 병신을 보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장님과 벙어리가 각각 5~6명, 절름발이는 아예 두다리를 못쓰는 앉은뱅이와 팔을 못쓰는 곰배팔이를 포함하면 30명도 넘든다. 그밖에 언청이, 애꾸, 혹부리, 꼽추, 팔푼이등이 어린애고 노인 구분없이 다 몇명씩은 꼽을만큼 있었다.
우리집에도 큰누나가 장님에다 곰보, 나는 멍게좆, 뒷날 아버지도 다리 하나를 잘라내고 의족을 달아 고무다리로 불리는등 6명 가족중 3명이 병신이었다.
"봉사 봉사 떼봉사, 아가리 딱딱 벌려라. 열무김치 들어간다."
"찜발아 찜발아. 요 고개 넘으마 콩떡 한개 줄께. 요 고개 넘으마 팥떡 하나 줄께."
"째보야 째보야. 입 닺고 웃지 마라. 헛짐 샌다. 국물 샌다."
"곰보 곰보 깨곰보. 콩밭에 넘어졌나, 자갈밭에 뒹글었나, 참새가 쪼아 뭇나."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면서도 병신을 보면 개구장이들은 동요를 부르듯 곡조까지 넣어 딸아다니며 놀려 댔다. 당시 우리 마을에 문둥이는 없었지만 가끔 걸식을 하러 그들이 오면 "문디, 문디, 콧구멍에 마늘 빼무라."라며 놀리다 문등이에게 붇잡혀 혼이 난 아이들도 있었다.
3학년 때는 행자라고 꽤 친한 여자애가 있었다. 우리는 가끔 호젓한 곳에서 단둘이 어울리기도 했는데 나는 불쑥 그애하고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행자도 아무 반발이 없어 우리는 한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좀 얼굴이 붉어진 그애는 또 한가지 제의를 했다.
"광철이캉 민자는 고추도 보지도 서로 비주고 맨짔다 카드라. 우리도 한번 해볼까?"
나는 그 자리를 어떻게 얼버무리고 결국 그애와 친했던 관계를 끝냈다. 행자가 내 자지를 봤다면 놀라서 도망쳤을 것은 뻔하고 오히려 소문만 날 것 아닌가.
어릴적 같이 발가벗고 놀았던 나보다 2~3살 많은 여자애들이 요즘 부쩍 새침을 떨고 젖이 봉긋 솟은 것을 보면 나는 가끔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의 성장이나 이른바 섹스와 결부시킬 줄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섹스에 관한 한 완전히 백치와 다름 없었다. 뒷날 생각해보니 내 나이가 되도록 보지에 자지를 꼽는 씹, 혹은 빠구리라는 것을 모르는 놈은 우리 마을을 통틀어 나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도 남성의 성장이라는 것과 연관시키지 못했다. 특히 최근에는 아침에 오줌보가 차면 자지가 탱탱하게 서는데 그때는 손 안에 다 안들어 올 정도로 굵어져 스스로도 놀라며 급히 손을 빼곤 했다.
뒷날 들은 것인데 서양에서는 사춘기 사내애들이 자위를 못하게 잘 때 침대에 손을 묶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는 스스로 가급적 자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이 가면 긁게 될 것이고 그래서 또 상처나 덧이 나면 이제 엄마에게 약발러 달라기도 어렵다. 벌써 몇년 째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어느새 내 손놀림은 빨라 졌다. 한참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나는 막바지에 온 것을 알았다. 오줌, 아니 정액이 곧 터져 나올 것이다. 나는 이부자리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놓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덮은 채 찍찍 물총을 싸댔다.
황홀했다. 또 혼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제 병은 다 낳은 것 같지만 엄마도 없는터라 하루 더 결석을 하기로 했다. 그런 결정에는 서울띠기 아줌마에 대한 기다림이 사실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제로 아줌마는 얼마후 탕약을 들고 방문을 열었다. 나를 보며 활짝 웃어 보여 내 기분도 한껏 좋았지만 웬지 부끄러운 기분도 들어 나는 얼굴을 붉혔다.
"이제 병이 다 낳았다."고 해도 그녀가 "다려온 것은 먹어야지."라고 해 어쩔 수 없이 약사발을 받았다. 약을 마시는 중 아줌마의 손이 이불속으로 들어와 거침없이 내 자지를 움켜 쥔다.
"어머나! 벌써 이렇게 빳빳해!"
사실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 마자 내 자지는 이불 속에서 인사하듯 성을 내기 시작했다. 나도 약사발을 내려놓고 그녀의 앞섶으로 손길을 옮겼다. 어젯밤 같은 환희가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영자로구나. 밥 먹었지?"
아줌마가 먼저 알은 체를 했다.
"서울띠기 아지매 오셨능교?"
"응, 영도 약 다려 주느라고 ......"
누나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데도 아줌마 말투는 상냥했다.
"니 약 뭇나?"라고 누나가 보이지 않는 눈을 내게 돌리며 묻자 나는 "뭇다."라고 대답했다.
"그라마 아지매는 가시도 되겠네요?"
"뭐?"
아줌마는 금방 화난 표정이었다. 그럴만 했다. 이거야말로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커녕 등을 밀어 쫓는 것 아닌가.
아줌마는 애써 화를 참으며 말투도 상냥해 졌다.
"안그래도 되니더. 그냥 가이소!"
"아니, 얘가 무슨 말을 이따위로 해? 내 발로 내가 가고싶으면 가지, 네가 뭔데 오라 가라 ......"
아줌마도 더는 못참겠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아지매!"
누나는 전혀 눌리는 기색없이 오히려 어른이 어린애 타이르듯 말했다.
"영도는 아직 알라지만 우리집 5대 종손이라예. 누구도 함부로 갖고 놀마 안되는기라예. 별 탈 없이 잘 크게 그냥 놔둬 주이소."
아줌마는 화를 못참는듯 씩씩거리며 말도 더듬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장님에 곰보라 맨날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고 집에서 동생들한테까지 기가 죽어 지내던 누나가 어른한테 이렇게 당돌하게 말을 하다니 ...... 더구나 말을 빗대어 하지만 어젯밤 아줌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꼬집는 것이다. 나도 뜻밖에 당당한 누나에게 주눅이 들어 말한마디 못하고 두여자 얼굴만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간다! 이런 대접받으며 있을게 뭐야."
화는 나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 아줌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신발을 신으며 우리도 들리게 투덜거렸다.
"병신 육갑하고 있네."
"누부야. 와 그리 버릇없이 구노?"
"여 앉아 봐라!"
누나는 조용히 말했지만 역시 무게가 있었다.
"니도 그라마 안된다. 조심하그라."
"뭐라꼬? 뭘 조심하라꼬 ......?"
"니 ......어제 밤에 빠구리했제?"
"뭐? ...... 니가 봤나?"
나는 누나에게 꿀리는 기분이면서도 반발을 해봤다. 그러나 속으로 쓴 웃음이 나올뻔 했다. 누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큰 물체나 강한 빛도 누나의 망막에 영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뭐? 아부지, 어무이도 빠구리하나?"
"하모! 그래서 니도 나도 태어난 것 아이가. 하지만 그건 그렇게 부부끼리 해야지, 아무나하고 해서는 안되는기라."
나는 그때 머리를 무엇으로 땅!하고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누나의 훈계도 들리지 않았다.
아, 그게 바로 빠구리로구나! 어제밤 아줌마 보지에 내 자지를 꼽고 그렇게 황홀했던 것이 바로 빠구리야! ...... 아버지 엄마도 그런 식으로 빠구리를 해왔고, 그래서 우리도 태어났고 ...... 아하! ...... 그게 바로 빠구리야. 그리고 나도 그걸 해봤어.
아이들의 대화에서도 "빠구리 잘하게 생겼다."느니, "어제 우리 아버지 어머니 빠구리했다." 같은 말들을 들었다. 나는 그게 자지와 보지, 그것도 어른들에 해당되는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대충이나마 언제, 어떻게, 왜 하는가 같은 쪽으로 의문이 생기면 더 이상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남자의 자지와 관련되었다는 것 때문에 내가 묻거나 대화에 끼게되면 곧바로 내 멍게좆에 눈길이 쏠릴 것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에게 들켰다는 것이 좀 창피했다. 빠구리란 어디 "놀러 갔었다."든지, "공을 찼다."는 것처럼 들어내 놓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기석 아재나 다른 사람이 알아봐라. 우찌 되겠노? 다시는 그라지 마라."
누나가 가장 걱정되는 점은 그것이다. 그래서 아까 서울띠기한테도 침을 놓았고. 내게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문제가 나오자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보다 더 거세게 갑자기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나는 어젯밤 그 황홀했던 순간들을 떠 올리며 몸을 떨었고, 서울띠기가 찾아 오면서 다시 그 감격이 이어지려 했는데 누나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으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화는 점점 차 올라 나는 어깨까지 들먹이며 씩씩거렸다. 결국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 화를 분출하려 했다.
나는 어른들이 싸울 때 하는 말을 욕설까지 붙여 흉내내며 앉아 있는 누나 엉덩이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
"와 이카노? 야가 와 이카노?"
누나는 팔꿈치를 올려 방어태세를 취했지만 공격이 어디서 올지 몰라 허둥대며 좀 겁이 난 표정이었다.
아, 나는 정말 비열하고 못된 놈이었다. 이 세상 누구에게 내가 행패를 부리더라도 최소한 나의 큰누나, 영자 누나에게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뒷날도 이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저린다.
엄마는 물론 내 의식주를 모두 책임질 뿐 아니라 외아들에다 막내인 나를 귀여워 해주고 지금도 허전하면 엄마의 젖을 만지고 잘만큼 나의 의지였다.
그리고 또 한사람, 영자 누나도 나를 끔찍히 아껴주고 또 항상 내 편이었다.
그런데 소중한 내 편인 두여인에게 차이점이 있었다. 가령 내가 밖에서 얻어맞고 울며 들어오면 엄마도 역시 처음에는 묻는다.
"명철이가 때맀다."
"글마가 니를 와 때맀노?"
"즈그 닭을 발로 찼다고 ......?"
"닭은 와 찾는데 ...... ?"
"고 새끼가 계속 나를 째려본다 아이가."
"에그, 이 문디 자슥아. 말도 몬하는 닭이 니를 본다꼬 발길질을 하나? 그건 니가 잘못 했네. 맞아도 싸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더 이상 역성을 받을 수 없다.
"아니, 우리 꼬마도령이 울고 있나? 일로 와봐라. 누가 때맀나?"
훌쩍거리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으며 묻는다.
"명철이 새끼가 ......"
"아니, 그런 못된 놈이 있나? 우리 영도를 때리다니 ...... 옘병에 땀도 못내고 죽어삐라. 아이다. 누부야가 만나마 때찌때찌해 줄끼다. 우선 누부야가 쎄쎄해 줄께. 어디로 맞았노?"
이처럼 누나는 내가 저질렀거다 당한 짓에 어떤 비판이나 판정도 없이 항상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 누나를, 더구나 앞을 못보아 남에게 놀림감이 되고, 집안에서도 아버지한테 제일 매를 잘 맞으며 동생들한테도 구박만 받는 그 불쌍한 누나에게 내가 그런 못된 행패를 부린 것이다.
누나가 아무 반항을 못하자 나는 점점 몸속에 있던 잔인성이 들어난 모양이다. 누나에게 더 거센 행패를 부리고 싶다는 충동이 당시 내 감정의 실체였고, 누나 때문에 서울띠기와 두번 째 빠구리를 못했다는 아쉬움은 어쩌면 그 행동의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이 씨팔년으 가시나야! 그라마 니가 대라! 남의 일에 니가 뭔데 파토를 놓노? 그라마 니락도 대신 대야 할끼 아이가? 이 씨팔년으 가시나야!"
나는 누나를 밀어 넘어 뜨리고 치마는 걷어 올리고 팬티를 내려 버렸다. 내 행동이 너무 발작적이라 누나도 대응을 못했고 무명의 헐렁한 사각팬티는 너무나 쉽게 벗겨져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와 이카노? 이카지 마라!"
누나는 허우적거리며 공포의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누나의 보지를 ...... 나는 흑! 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바깥 출입을 거의 못해 유난히 하얀 살결에다 서울띠기의 무성함과든 또 달리 아담하다고 할만큼 적당히 돋아난 보지털, 보지가 살짝 벌어지면서 보이는 속살은 빨강이었나, 연분홍인가? 잘 구분이 안되지만 하여튼 너무나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나는 어젯밤에야 어른 여자의 보지가 거의 똥구멍까지 길게 이어지고 속이 그렇게 깊고 뜨겁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누나도 그렇게 길쭉한 보지를 갖고 있었다. 누나의 옷을 벗길 때 "대신 네가 대라!"라고 했지만 정말 누나와 빠구리하고 싶다는 식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누나가 가장 창피해 할짓을 함으로써 누나를 심하게 괴롭히고 싶다는 잔인성이 이런 행동까지 진전된 것이다.
그래서 보게된 누나의 보지는, 그 새하야면서도 윤기나는 허벅지 사이에 돋아난 적당한 검은색과 더불어 눈부시다고 할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여전히 새하얀 살결의 허벅지 하나는 드러나 있지만 이제 나에게 자극적이지는 않았다. 누나가 너무 측은해 보이고 내가 바로 누나를 울렸다는 것이 미안하면서 내 가슴도 아팠다.
"자, 이거 입그라."
아직 내 손에 들려있는 누나의 팬티를 던져주며 나는 말했다.
"누부야. 미안타! 내가 잘몬했다."
누나는 내가 건네준 팬티를 아직 입지 않고 두손에 쥔 채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영도야. 니가 정 하고자브마 내한테는 해도 좋다."
그 말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누나는 내가 서울띠기와 또 잘못을 저지를까봐 자기가 대신 매를 맞겠다는 식인 것이다.
나는 부끄럽고도 울적한 기분에 방을 나서는데 누나가 내뒤에 대고 말했다.
"영도야.내한테는 언제나 니가 제일 소중한 동생이다. 니밖에 없능기라."
눈을 뜨자마자 자지를 휘둘러 정액울 한번 뽑아내면서 기분이 한껏 좋았었고, 서울띠기 아줌마를 만나면서 곧 나는 황홀함 속에 다시 들어갈줄 알았다. 그런데 영자 누나가 훼방을 놓아서 모든게 깨져 버렸다.
그러나 오늘 나는 빠구리가 뭔지 알았고, 내가 바로 그것을 해냈으며 아버지 엄마도 그런 짓을 해온 것을 알았다. 누나 말대로 그래서 누나도 나도 태어난 것이고 ......
더구나 누나의 보지도 보았다. 이제 18살로 몸은 다 어른이 되었는데 그 새하얀 살결 속에 속살이 살짝 보였던 깨끗하고 아름다운 보지 .,,,,, 하지만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화딱지가 난고 심심하다.
여전히 울적한 기분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사립문 쪽에 누군가 보였다. 얼굴을 들어낸 것은 아까 화를 내며 떠났던 서울띠기 아줌마였다. 그녀는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