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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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으로 글을 올려 봅니다.
주제 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감히 작가님들의 글속에 염치없이 한자리를
낑겨 넣어 봅니다.
5부 정도로 몇가지 소재를 엮어 나가려고 하는데....
처음 글 조차 제한하고 있는 최소 바이트를 넘기기도 버겁군요.
끝까지 갈 수 있을지...ㅠ.ㅠ
프롤로그
그해 여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봄부터 난무하던 최류 가스와 사람들의 아우성은
초여름이 다가오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투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해가 질 늦은 저녁이면 도로와 인도의 경계선에는
그날의 격렬했던 모습을 간직한 최류 분말들이 하얗게 쌓여 있곤 했다.
그리고 유월 어느 날 거짓말처럼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길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군중들과 전경들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텅 빈 거리의 모습은
솟아오르는 지열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내게도 그날 아침은 혼란스런 유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런 날이었다.
난 그날의 아침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난 세상을 마주하기 힘든 자괴감으로 잠자리를 쉽게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한동안을 정처 없이 도시를 헤메고 다녔다.
그 동안 시위로 더러워진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긍심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민주화라는 값진 결과물에
사람들은 한껏 어깨를 펴고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난 내 자신이 만들어 낸 어둠의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고 더욱 더 혼란스럽고 암담한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고 있었다.
회상 1
바다가 보였다.
탁한 회색을 머금은 밀물은 파도랄 것도 없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한가운데서 작렬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는 것 같았다.
갯바위에 걸터앉아 소주를 털어 넣었다.
목 줄기를 타고 느껴지는 알콜의 쓴 맛이 점점 무뎌질 때 쯤
검은 바다의 끝은 먹구름과 교접하며 너울거리고 있었다.
어미의 자궁 같은 검은 바다.
난 점점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헛된 용을 써봤지만
이내 갯바위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스물이 넘어 내 내부를 지배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염세주의였다.
모든 것이 시니컬하게 느껴졌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아마 이런 나의 성향은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난 이것을 나쁜피라고 부른다.
백부들의 요절은 질풍노도의 시대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이었다.
자살과 사고사들은 시골의 향반으로 자처하던
집안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할머니는 잇단 아들들의 죽음으로
오십이 채 안돼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칠십년대 후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돌아 가셨다.
그분들의 죽음은 나름대로 평온했지만 그래도 앞장세운 자식들을
잊지 못하셨다 한다.
그래도 근근히 면서기로 공직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와 D시로 시집가
살고 있던 아버지 보다 다섯 살 어린 고모가 임종을 지켰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불효는 면한 것을 아버지는 크게 위안 삼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두 분을 합장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과 전답을
처분 하므로써 그 시골동네와 인연을 끊으셨다.
이 학년을 마치자 미련 없이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다.
당시 난 군대는 시덥잖은 세상을 떠나 도피할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란 생각을 했다.
삼년 푹 썩다 나오자...아님 말뚝을 박아 버리던지....
그러나 군대는 내게 피난처를 제공할 만큼 녹녹한 곳은 아니었다.
다행히 난 대대전령으로 외출할 기회가 많았고,
부대는 고모가 살고 있는 D시의 외곽에 있었다.
어머니는 여린 외아들이 그나마 고모 집 근처에서 군 생활을 한다는
것에 얼마간 위안을 받으셨고, 고모에게 내 근황을 자주 살펴줄 것을
당부하곤 하셨다고 한다.
입대 후 칠 개월쯤 지난 가을 날이었다.
D시를 둘러싼 산과 들이 색깔들을 바꿀 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를 왔다.
그날 외박계를 받아들고 우리는 D시로 들어갔다.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지만
당시 팔십년대 초 D시는 전방에 인접한 기지촌으로 건물들은
회색 빛 일색이었고 도로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는 딴 데 갈 것 없이 고모 네로 가자고 하셨다.
고모는 갑자기 찾아온 올케와 조카를 대접하느라
그날 저녁 부엌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분주해 했다.
그런 고모의 모습은 어쩜 바로 옆에 둔 조카를 찾아가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아들을 키우며 홀로 사는 팍팍한 고모의 실상을
어머니도 모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객지에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당시 난 잘 알지 못했으나, 고모의 살림살이나 세간을 보면서
궁색한 생활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모의 집은 D시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방 두개와 부엌이 일자로 위치한 형태였다.
두 방은 쪽마루로 연결되어 있고, 쪽마루는 하늘색 플라스틱
차양이 있어 비와 햇볕을 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미 햇볕에
바란 차양은 거의 흰색에 가까워 퇴락한 삶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 집이나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골 땅을 처분해
마련한 것라고 했다.
고모의 말로 웬수(남편을 그렇게 표현했다)가 살아 있으면
그나마 방 한칸 마련할 돈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참 신산한 삶들이었다.
두 분은 그날 저녁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잔씩
하던 술이 과했던 것 같다.
밤이 깊어갈 무렵 어머니가 연신 하품을 하는 것을 보며,
고모는 자기는 건넌방으로 가서 잘테니 오랫만에
모자지간에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라며 나를 향해
주먹떡을 먹이곤 싱긋 웃으며 나갔다.
난 그때 고모의 그런 행동을 무척 의아하게 생각 했는데
나중에 고모는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마침 사촌동생은 공장에서 야간조라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당에 있는 수돗간에서 간단히 세면을 하고 들어왔다.
술로 발그레해진 얼굴이 찬물로 더 홍조를 띠고 있었다.
요의를 느껴 깨어보니 사방이 깜깜했다.
밖에서는 귀뚜라미가 귀뚤거리며 깊어가는 가을밤을 희롱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뜨고 있으니 어두웠던 방이 차츰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고른 숨소리로 잠이 들어 있었다.
요의를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다.
한번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밀려나간 요의 대신 뜨거움이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발기하는 나의 물건을 주체하지 못해 팬티속으로
손을 넣어 불기둥을 쓰다듬었다.
귀두에 스치는 깔끄러운 옷의 촉감은 단전쪽을 저릿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해결을 해야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터였다.
서서히 손놀림을 빠르게 하자, 나의 불기둥은 굵은 정맥줄을
툭툭 거리며 커지고 있었다.
입대 전에 경험해 봤던 역전 갈보의 비소가 머릿속에서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상상속 그녀의 비소는 이미 검붉게 충혈되고 있었고
그 속에서는 미끈거리는 애액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용두질을 하다가 옆을 쳐다 보았다.
밀려내려간 이불밖으로는 치마가 위로 말려져 어머니의
허벅지가 박속 같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천정을 향해 용두질하는 내 등줄기에 꿉꿉한 땀이 배어났다.
어머니쪽으로 모로 몸을 누이는 순간 생각 보다 이른
사정감이 밀려들고 한주먹 만큼의 정액이 어머니 허벅지를 더렵혔다.
사정이 끝나자 죄의식과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는데 그때의 감정은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으로 누워 있다가...
정액이 튄 어머니의 허벅지로 손을 더듬 거렸다.
어떻게든 그 정액을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이었다.
한웅큼이나 쏟은 정액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날 난 어머니가 내가 한 짓을 알아 버렸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으로 밤을 하얗게 새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가 버스를 타기전 내게 고모집에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 보라고 찾아보라고 하셨다.
주제 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감히 작가님들의 글속에 염치없이 한자리를
낑겨 넣어 봅니다.
5부 정도로 몇가지 소재를 엮어 나가려고 하는데....
처음 글 조차 제한하고 있는 최소 바이트를 넘기기도 버겁군요.
끝까지 갈 수 있을지...ㅠ.ㅠ
프롤로그
그해 여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봄부터 난무하던 최류 가스와 사람들의 아우성은
초여름이 다가오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투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해가 질 늦은 저녁이면 도로와 인도의 경계선에는
그날의 격렬했던 모습을 간직한 최류 분말들이 하얗게 쌓여 있곤 했다.
그리고 유월 어느 날 거짓말처럼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길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군중들과 전경들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텅 빈 거리의 모습은
솟아오르는 지열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내게도 그날 아침은 혼란스런 유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런 날이었다.
난 그날의 아침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난 세상을 마주하기 힘든 자괴감으로 잠자리를 쉽게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한동안을 정처 없이 도시를 헤메고 다녔다.
그 동안 시위로 더러워진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긍심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민주화라는 값진 결과물에
사람들은 한껏 어깨를 펴고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난 내 자신이 만들어 낸 어둠의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고 더욱 더 혼란스럽고 암담한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고 있었다.
회상 1
바다가 보였다.
탁한 회색을 머금은 밀물은 파도랄 것도 없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한가운데서 작렬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는 것 같았다.
갯바위에 걸터앉아 소주를 털어 넣었다.
목 줄기를 타고 느껴지는 알콜의 쓴 맛이 점점 무뎌질 때 쯤
검은 바다의 끝은 먹구름과 교접하며 너울거리고 있었다.
어미의 자궁 같은 검은 바다.
난 점점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헛된 용을 써봤지만
이내 갯바위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스물이 넘어 내 내부를 지배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염세주의였다.
모든 것이 시니컬하게 느껴졌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아마 이런 나의 성향은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난 이것을 나쁜피라고 부른다.
백부들의 요절은 질풍노도의 시대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이었다.
자살과 사고사들은 시골의 향반으로 자처하던
집안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할머니는 잇단 아들들의 죽음으로
오십이 채 안돼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칠십년대 후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거의 동시에 돌아 가셨다.
그분들의 죽음은 나름대로 평온했지만 그래도 앞장세운 자식들을
잊지 못하셨다 한다.
그래도 근근히 면서기로 공직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와 D시로 시집가
살고 있던 아버지 보다 다섯 살 어린 고모가 임종을 지켰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불효는 면한 것을 아버지는 크게 위안 삼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두 분을 합장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과 전답을
처분 하므로써 그 시골동네와 인연을 끊으셨다.
이 학년을 마치자 미련 없이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다.
당시 난 군대는 시덥잖은 세상을 떠나 도피할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란 생각을 했다.
삼년 푹 썩다 나오자...아님 말뚝을 박아 버리던지....
그러나 군대는 내게 피난처를 제공할 만큼 녹녹한 곳은 아니었다.
다행히 난 대대전령으로 외출할 기회가 많았고,
부대는 고모가 살고 있는 D시의 외곽에 있었다.
어머니는 여린 외아들이 그나마 고모 집 근처에서 군 생활을 한다는
것에 얼마간 위안을 받으셨고, 고모에게 내 근황을 자주 살펴줄 것을
당부하곤 하셨다고 한다.
입대 후 칠 개월쯤 지난 가을 날이었다.
D시를 둘러싼 산과 들이 색깔들을 바꿀 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를 왔다.
그날 외박계를 받아들고 우리는 D시로 들어갔다.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지만
당시 팔십년대 초 D시는 전방에 인접한 기지촌으로 건물들은
회색 빛 일색이었고 도로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는 딴 데 갈 것 없이 고모 네로 가자고 하셨다.
고모는 갑자기 찾아온 올케와 조카를 대접하느라
그날 저녁 부엌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분주해 했다.
그런 고모의 모습은 어쩜 바로 옆에 둔 조카를 찾아가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아들을 키우며 홀로 사는 팍팍한 고모의 실상을
어머니도 모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객지에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당시 난 잘 알지 못했으나, 고모의 살림살이나 세간을 보면서
궁색한 생활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모의 집은 D시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방 두개와 부엌이 일자로 위치한 형태였다.
두 방은 쪽마루로 연결되어 있고, 쪽마루는 하늘색 플라스틱
차양이 있어 비와 햇볕을 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미 햇볕에
바란 차양은 거의 흰색에 가까워 퇴락한 삶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 집이나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골 땅을 처분해
마련한 것라고 했다.
고모의 말로 웬수(남편을 그렇게 표현했다)가 살아 있으면
그나마 방 한칸 마련할 돈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참 신산한 삶들이었다.
두 분은 그날 저녁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잔씩
하던 술이 과했던 것 같다.
밤이 깊어갈 무렵 어머니가 연신 하품을 하는 것을 보며,
고모는 자기는 건넌방으로 가서 잘테니 오랫만에
모자지간에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라며 나를 향해
주먹떡을 먹이곤 싱긋 웃으며 나갔다.
난 그때 고모의 그런 행동을 무척 의아하게 생각 했는데
나중에 고모는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마침 사촌동생은 공장에서 야간조라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당에 있는 수돗간에서 간단히 세면을 하고 들어왔다.
술로 발그레해진 얼굴이 찬물로 더 홍조를 띠고 있었다.
요의를 느껴 깨어보니 사방이 깜깜했다.
밖에서는 귀뚜라미가 귀뚤거리며 깊어가는 가을밤을 희롱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뜨고 있으니 어두웠던 방이 차츰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고른 숨소리로 잠이 들어 있었다.
요의를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다.
한번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밀려나간 요의 대신 뜨거움이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발기하는 나의 물건을 주체하지 못해 팬티속으로
손을 넣어 불기둥을 쓰다듬었다.
귀두에 스치는 깔끄러운 옷의 촉감은 단전쪽을 저릿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해결을 해야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터였다.
서서히 손놀림을 빠르게 하자, 나의 불기둥은 굵은 정맥줄을
툭툭 거리며 커지고 있었다.
입대 전에 경험해 봤던 역전 갈보의 비소가 머릿속에서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상상속 그녀의 비소는 이미 검붉게 충혈되고 있었고
그 속에서는 미끈거리는 애액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용두질을 하다가 옆을 쳐다 보았다.
밀려내려간 이불밖으로는 치마가 위로 말려져 어머니의
허벅지가 박속 같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천정을 향해 용두질하는 내 등줄기에 꿉꿉한 땀이 배어났다.
어머니쪽으로 모로 몸을 누이는 순간 생각 보다 이른
사정감이 밀려들고 한주먹 만큼의 정액이 어머니 허벅지를 더렵혔다.
사정이 끝나자 죄의식과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는데 그때의 감정은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으로 누워 있다가...
정액이 튄 어머니의 허벅지로 손을 더듬 거렸다.
어떻게든 그 정액을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이었다.
한웅큼이나 쏟은 정액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날 난 어머니가 내가 한 짓을 알아 버렸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으로 밤을 하얗게 새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가 버스를 타기전 내게 고모집에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 보라고 찾아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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