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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레드라인(REDLINE) 2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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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32 회 작성일 24-01-31 23: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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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쁜 녀석.

다음 날 엄마와 난 늦잠을 잤다.
그리고, 그로 인해 꽤 식은땀을 흘려야 했는데, 엄마와 내가 잠에서 깨어난 이유는 엄마와 내가 벌거벗고서 껴안고 자고 있는데 지수가 안방 문을 두드리며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말할 때였다. 지수의 칭얼거림에 엄마와 난 동시에 눈을 떴는데, 그때의 황당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째건, 다행히도 엄마와 난 연기를 해서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꺼림직한 것은 급한 마음에 잠옷을 입고서 막 운동하고 온 냥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지수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그날 이후,
결론부터 말하면 내 기대와는 달랐다.
남녀간의 섹스란 과연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혜정선배와 내가 사귀게 된 것은 관계를 가져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전까지 선배와 난 사실 거의 안면만 있는 단순한 선후배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두 번 살을 섞고서부터 우린 달라졌다. 뭔지 모를 친밀감이 선배와 나 사이에 형성이 되었고, 그건 나와 선배를 하나로 묶는 마법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엄마와 나는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엄마의 변화가 내가 기대했던 것에 훨신 못 미쳤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엄마는 나와 관계를 가지기 이전의 변화속도로만 변화했는데 그건 내 여자로서의 변화가 아닌 내 엄마로서의 변화였다. 엄마는 나에게 예전의 밝은 미소를 많이 보였고, 내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았는데, 그런 변화는 옛날에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엄마와 가길 때마다 엄마에 대한 친밀감을 보다는 죄책감이 내 속에서 자라났다.
한때, 친밀감보다 더 강열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나를 낳아준 내 친엄마를 정식으로 가졌다는 정복감 혹은 쟁취감, 그리고 엄마와 섹스를 한다는 타부적 쾌감 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죄책감에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혜정선배와는 달리 지극히 수동적인 엄마의 몸 위에서 어떻게 하든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헐떡거리는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내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어째건 엄마는 나와의 잠자리를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난 그저 엄마에게 ‘오늘 여기서 잘래요’라고만 하면 엄마는 알아서 준비했다. 첫날 이후에는 내 잠옷 위에 콘돔을 놓아 두었고, 지수를 억지로라도 재웠으며, 전화 벨소리는 아예 소리가 안 나게 낮추었다. 단지 엄마가 나와 관계를 가지면서 거부한 것이 있다면 엄마의 몸 속에 내 성기를 삽입할 때, 오직 정상체위 하나만을 고집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처음 한 달을 제외하고 엄마와 난 주로 주말에만 관계를 가졌다. 그건 혜정선배의 요구이기도 했다. 선배는 내가 엄마와 처음 관계를 가진 날, 내가 엄마 집에서 자고 오자 내가 엄마와 화해를 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고서 수시로 내가 엄마 집을 방문하거나 종종 그 곳에서 등하교 하길 권유했고, 주말엔 아예 선배 집에서 나를 내쫓았다. 물론 처음에는 선배의 말을 못이기는 척하며 나는 엄마 집을 수시로 방문했지만, 너무 자주 가면 식상할까 싶어 3~4일에 한번이나 2~3일에 한번 그런 식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일방적으로 통보하고서 그날 엄마를 침대에서 가졌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가졌다. 모든 신경을 엄마의 몸에만 집중을 하고서 애무만으로 엄마가 절정을 느끼게 하고, 삽입을 한 후에는 내 느낌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2번 더 엄마가 절정을 느끼게도 만들었다. 난 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빠의 친구들, 회사 동료들 등 수 없는 남자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엄마를 원 없이 만지고, 그들이 상상했을 엄마의 음부에 나의 성기를 넣고서 엄마가 몇 번이나 짜릿한 절정을 느끼게 만들어 마침내 침대가 흥건이 젖도록 음액을 쏟아내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정복한 듯한 느낌이 들게 했었다.
외할아버지가 종종 ‘얼굴보고 결혼하면 3년이 즐겁고, 마음보고 결혼하면 30년이 즐겁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3년은커녕 한 달을 고비로 엄마에게서 점점 멀어졌고, 선배가 자신의 집에 금족령을 내리는 주말에만 엄마를 찾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안 갈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주말에만 엄마와 관계를 가지더라도 난 아주 열정적으로 엄마의 몸을 탐했다. 관계 후에 뭔지 모를 죄책감과 비참함에 시달리게 되더라도 당장 내 몸에 깔린 엄마의 몸은 남자라면 당연히 눈이 뒤집힐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말이다. 아마, 어떤 남자든 엄마의 옷을 모두 벗긴 몸을 품게 되면 사마귀처럼 관계 후에 죽는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한 달 후부터는 엄마의 쾌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망을 위해서 엄마의 몸을 탐했었다.
그러면서, 난 혜정선배가 외려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와 관계를 가질 때 빼고는난 엄마가 점점 불편해져만 갔고, 그럴수록 난 혜정선배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선배가 사는 집에는 아무 때고 들어가 당연한 듯 내 자리를 찾아 잠자고, 밥을 먹었으며, 선배와 난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다소 변태 같은 열정적인 관계도 가지곤 했지만, 엄마와는 그러치 못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오히려 엄마에게서 멀어지던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단풍이 절정을 이루어 온 나라를 가을 축제 속으로 몰고 가던 시기였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실제 축제를 열었다. 물론, 축제라고 해봐야 참여율은 엄청나게 떨어져서 축제를 주도하는 몇몇 사람만 분주할 뿐, 대부분의 학생들은 축제를 하거나 말거나 그냥 자신들이 계획했던 대로 생활했다. 몇몇은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기고, 나와 과동기 몇몇은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맞는 축제를 자축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야.. 너 혜정선배와 무슨 사이냐”
술을 마시던 한 녀석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순간, 나는 뜨끔했지만 혜정선배와의 일은 언제고 밝혀질 일이었다.
“왜..?”
일단, 반문부터 했다. 혜정선배는 나와의 관계를 가능하면 숨기고 싶어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내가 내입으로 떠들 필요는 없었다.
“혜정선배가 과외하는 애중에 내 친척녀석도 있거든.. 그 애가 그러는데 너가 여름방학때 선배대신 과외를 해주었다며?”
녀석의 눈은 빛났다. 그 녀석의 이름은 김석훈으로, 지금까지 내가 만난 녀석들 중에 가장 재수없는 녀석이다.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녀석이라 잡기에 능하고 말발도 꽤 세어서 재미있기는 했지만 상당히 비열하고 욕심이 많아 내가 어울리던 패거리에서 그 녀석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애는 없었다. 그냥 그 녀석의 역할은 우리 패거리의 분위기를 업시켜 주는 정도였다.
“무슨 말이야..?”
난 그 녀석이 뭘 확실히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님 넘겨 집기 하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발뺌하는 거냐?”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 해. 나 머리 나빠서 그렇게 이야기 하면 몰라…”
“우리과 차석으로 입학한 녀석이 머리가 나쁘면 난 뭐냐?”
“그렇게 입학하면 뭐해? 1학기에 간신히 낙제 면했는데.. 그리고 넌 과 톱이잖아.”
“키키.. 그건 그래.. 아무래도 대학공부는 뭔가 차원이 다른 게 이제야 내가 때를 만난 거 같아.”
녀석의 자화자찬에 속이 메슥거렸고, 다른 녀석들도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건 그거고.. 진짜 어떤 관계야?”
“아 진짜..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하라니까..”
“발뺌 하겠다? 선배가 과외하는 애 중에 내 친척이 있어..”
녀석은 무슨 취조를 자백을 얻어내려는 하는 형사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라니?”
“선배 과외 학생 중에 네 친척이 있는 것과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너 여름방학때 선배 대신 그 애를 가르쳤다면서?”
“누군지 몰라도 선배대신 과외를 해준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런데..?”
순간 녀석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녀석의 친척이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 그 녀석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지금은 그것을 근거로 지멋대로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서 지금 나에게 그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
“네가 왜 선배가 과외하는 애들을 가르쳐?”
녀석은 자신의 생각대로 내가 술술 불지 않자 따지듯 물었다.
“선배가 아파서 몇 일 대신 해준 것뿐이야.”
“혜정선배가 네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 했다고?”
“아니 내가 한다고 했다.”
“네가 어떻게 알고?”
녀석의 질문은 복합적인 것이다.
“뭐를? 구체적으로 말해라.. 알고 싶은게 뭐냐?”
“네가 어떻게 선배가 아픈 걸 알았고, 선배가 과외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궁금한 것도 많다. 선배가 아픈 건 우연히 알았다. 애들 주소는 선배에게 물었다. 됬냐?”
“어떻게 우연히 알아?”
녀석은 집요했다. 순간, 녀석이 선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에 따라서는 관심의 표현을 괴롭힘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녀석이 그거에 해당될지 몰랐다. 내가 혜정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녀석을 통해서였고, 녀석은 거의 매일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들과 만나면 혜정선배에 대한 험담을 꼭 하나씩은 했으니까 말이다.
“너 혜정선배 좋아하냐”
이번엔 내가 공격을 했다.
“왜 그렇게 혜정선배에 대해 관심이 많아?”
“뭐…? 무슨 말이야!!”
녀석은 정색을 했다.
“내가 왜 그런 또라이 같은 여자를 좋아해?”
“야 또라이는 심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민수였다.
“그리고, 혜정선배 그렇게 나쁘지 않던데 뭐..”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석훈이 녀석은 팩하니 민수의 말을 받아 쳤고, 민수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너 왜 그러냐?”
“내가 뭐?”
“왜 그렇게 혜정선배 일이라면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술이 올라서인지 아니 진짜 화나서인지 민수 녀석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잠시나마 긴장했던 나는 긴장을 풀고서 석훈과 민수의 말싸움을 관망했는데, 석훈과 민수가 붙은 이상 나에게 화살이 돌아 올 일은 없었기에 말이다. 석훈과 민수는 아주 대조되는 타입으로, 석훈이 타인의 말을 잘하는 편이라면, 민수는 자신이 격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도덕책에 나온 대로만 판단했다. 그랬기에 우리 패거리 내에서 둘은 서로 앙숙과 같은 사이였고, 일단 둘이 붙은 이상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라 난 다른 녀석들과 술잔을 비우면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야.. 니 말대로라면 혜정선배를 전부다 싫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좋아는 사람들 많아. 게다가 4학년 선배들은 대부분 그렇더라”
“누가 그래?”
“선배들과 술자리 하면서 들었어. 우리 귀가 없는 줄 아냐?”
“누구에게?”
“거의 다 그러더라. 그리고 2학년 그 선배 이야기는 알고 보니까 그 2학년 선배가 나쁜 놈이던데 뭐. 그 놈 정혜선배를 임신중절 시키고는 일방적으로 헤어진 후 다른 여자 사귄 거라며? 너 그거 알고 있었지? 그것도 모르고 이야기 했다가 내가 얼마나 바보되었는 줄 아냐?”
“그래 그 이야기는 나도 얼마 전에 들었어.”
다른 녀석이 민수를 거들었다.
“그..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 인데…”
석훈이 녀석은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기현선배한테 들은 거 아냐? 그 선배가 너한테 다 이야기 해주었다던데 뭘 처음 들어? 너 왜 그래 도대체…?”
싸움은 민수 쪽으로 거의 기울어졌다. 민수 녀석은 곧은 성격 그대로 석훈이를 완전하게 코너로 몰아 넣고서 옴짝 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간 석훈이 녀석이 거짓말한 거나, 잘못한 것을 죄다 풀어내었던 것이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결국 석훈이는 술자리를 먼저 떠났다.
“굳이 그럴꺼 뭐 있냐?”
석훈이 녀석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아냐.. 한번 당해야 되.. 저 녀석… 에이 재수없는 녀석…”
민수는 분이 덜 풀린 듯 술잔을 비우고서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 혜정선배에게 딴 마음이 있어. 아까 네가 한 말이 맞아. 1학기 때 혜정선배에게 대쉬를 했다가 퇴짜를 맞았어.”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 였다. 난 선배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 좀 야멸차게 무시를 당한 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게다가 나도 혜정선배에 대하여 잘 모르고 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 녀석이 없는 말까지 만들어 냈다는 걸 알고는 사실 벼르고 있었다..”
민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술잔을 비웠지만, 그래도 자신이 너무 심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표정도 스쳤다.
“그래 잘 했다. 나도 사실 조금 벼르고 있었는데…”
내 옆에 있던 현세녀석이 끼어들었다.
“석훈이 녀석 보경이랑 잔 거 니들 아냐?”
“뭐..?”
우린 일제히 현세를 바라보았다. 보경이는 같은 동기이기도 했지만, 우리 패거리에서 가장 먼저 군대에 간 우혁이의 애인이기도 했다. 우혁이는 우리보다 1살이 많았는데 재수를 해서 학교를 들어오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보경이와 같이 입학을 한 녀석이었다.
“우혁이가 군대에 간 뒤에 여름방학 내내 보경이를 위로한답시고 만났나봐. 2학기 개강을 하고 얼마 안되어서 밤새 게임을 한 탓에 강의실 뒷 편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내가 있는 줄 모르고 들어온 보경이와 경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진짜야..?”
“아마 그런 거 같아. 보경이를 술을 먹여서 해치웠나봐. 그리고 그걸 핑계로 계속 보경이에게 그걸 요구하는 지 보경이가 나중에는 울더라고…”
“진짜 나쁜 놈이네… 그 녀석 도대체 몇 명이나 건드린 거야?”
이번에 상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녀석은 우리 패거리에서도 가장 말이 없고 침착한 녀석이라 다들 상수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런 탓에 가장 발이 넓은 친구였다. 뭐 생긴 것부터가 그 녀석은 상당히 호감이 가고 신뢰가 가게끔 생기기도 했다. 석훈이 녀석이 나이트클럽 이미지이고, 민수가 도서관 이미지라면 상수는 신부나 스님 같은 분위기였다.
“또 있어?’
우린 상수를 바라보았다.
“한 명이 아니라 몇 명 더 있어… 석훈이 이 놈 보경이까지 건드리다니..”
“누군데..?”
현세가 물었다.
“우리 과에서는 수영이 누나고, 다른 과에 2명 더..”
“수영이 누나?”
우리 모두는 보경이 때보다 더 놀랬다. 수영이 누나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탓에 나이가 우리보다 3살이 많았다. 더구나 이미 결혼설까지 나돌 정도로 확실한 애인이 있던 여자이기도 했고, 그 누나의 애인이 사주는 저녁까지 먹은 적이 있던 우리였다. 누나의 애인은 나이가 좀 많기는 했지만 서글서글하니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붙임성이 좋던 석훈이 녀석은 ‘항열로 따지면 제 형님쯤 되네요? 이야… 수영이 누나는 형수님이네… 형님! 수영이 형수님 제가 확실히 지켜드릴게요. 저만 믿으세요!’라며 같잖지도 않은 동성 항렬을 따져가겨 그 남자에게 살살거렸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수영이 누나와 관계를 가졌다니 우리로선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뭐냐.. 그 녀석.. 형수님이라며 맨날 꼴사납게 굴더니.. 형수님을 따먹은 거야?”
“그러게.. 맨날 도서관 자리잡아 주고,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도대체 언제 그런 거야?”
민수가 상수에게 수영이 누나와 석훈이 그렇게 된 때를 물었다.
“오래 되었어.. 수영이 누나 애인이 우리 저녁 사준 뒤 한달 쯤 되었을 때니까.”
“뭐야 그럼? 올해 5월쯤에 그런거야?”
“하하하…. 어이 없는 놈이네. 그럼 혜정선배에게 대쉬를 하면서 동시에 수영이 누나도 꼬셨다는 말이야?”
“아까 니 말 들으니까 그런 거 같다. 수영이 누나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어쩌고 저쩌고 떠들더니만…….”
상수도 어이없는지 술잔을 비웠다.
그날 술자리는 완전히 석훈이의 비리 성토대회 같았다. 나로서는 혜정선배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내지 않아서 좋았지만, 때론 석훈이를 두고 심한 말이 오갈 때면 조금은 석훈이가 안쓰럽기도 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석훈이가 따돌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그런데, 석훈이 녀석은 정말 재주가 좋았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이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는 한결같이 애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다행히 우리들 모두가 좋아하는 수영이 누나와는 1번만 같이 잤을 뿐이고 그 이후로 그녀를 괴롭히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문제라면 보경이었는데, 한세 녀석의 말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보경이는 석훈이 녀석에게 잠자리 요구를 받는 거 같았고, 몇 번은 그 요구를 들어준 거 같았다. 아무튼 이야기로만 본다면 석훈이는 거의 사회적 매장이 되어야 할 놈이었다. 실제로 어떻게 조치가 취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석훈이는 적어도 우리가 먹던 술집에 손님이 별로 없는 것에 절이라도 해야할 판이었다.

그날 술자리는 10시가 되어 끝이 났다.
평소에 비하면 상당히 일찍 파한 것인데, 뭐 아직 해가 남아있을 때 시작한 술자리였으니 시간상으로만 본다면 한자리에서 상당히 오래 마신 거였다. 어째든 석훈이 때문에 다들 기분이 상한 탓인지 우린 2차 없이 각자 집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한참을 걸어가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습관대로라면 옆에 친구들이 없으니 선배 집이든 자취방이든 어디든 가도 되었다. 더욱이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오전수업에 지각할 우려도 있지만 엄마 집으로 가도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난 갑자기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뭔지 모를 난감함에 빠졌다.
갈 곳이 없다는 느낌이랄까?
아님 어디든 내가 갈 곳이 아니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술 취한 탓인지 기분이 묘했다. 때늦은 사춘기 방황도 아니고 두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다니 그건 꽤나 당황스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참을 걸었다. 내 옆 도로에서는 버스와 승용차 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렸고, 더러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길 바닥만 보면서 한참을 걸어 내가 도착한 곳은 생판 첨 보는 동네의 도로 옆 놀이터였다. 멀리 있는 이정표로 보아 엄마 집으로 가는 길 어디쯤 같기도 했다. 난 놀이터로 들어가 벤치에 털석 주저앉으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았다.
11시 40분…
자리에 앉자 가을 밤의 차가움에 비로서 한기를 느꼈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곳이 맞다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내 자취방이었고, 여기까지 걸린 시간으로 보아 족히 2시간 이상을 걸어가야 될 듯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술값을 치르면서 모자란 돈은 민수가 내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젠장…-
그제야 나의 미친 짓이 느껴졌다. 난 핸드폰을 열어 저장해 둔 엄마의 전화번호와 혜정선배의 전화번호를 번갈아 선택을 하며 어디에 전화를 걸까 고민에 빠졌다. 핸드폰은 엄마가 사준 것이다. 엄마와 두 번째로 성관계를 갖은 날 엄마는 내게 자취방을 몇 시가 되어야 들어가냐고 물었었다.

“늦게 들어가거나…. 술 많이 마신 날은 친구 자취방에서 자기도 해..”
난 그렇게 둘러댔다.
“왜? 자취방으로 전화했어?”
“응… 11시가 되어서도 전화를 했는데도 안받고, 아침에도 안받고....”
“그래..?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데?”
난 모로 누워 엄마의 한차례의 관계로 땀이 베어있는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빠의 전화는 종종 받아 보았어도 엄마의 전화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였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지만, 난 혹시나 엄마가 내가 바람필까 걱정이 되어 전화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제가 네 증조할아버지 제사였잖아..”
“제사?”
“그제 네 아빠가 너가 여기 있냐고 밤 10시쯤에 전화를 했었어.”
“아빠가 10시에?”
순간, 나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약한 조명등에 비친 엄마는 태연했다.
“네 아빠도 알아..”
“아빠가?”
“내가 말 했으니까…”
“언…. 제…?”
“지난 월요일 아침에 네 아빠와 통화할 일이 있어서 그때 네가 여기서 잤다고 했어.”
엄마의 얼굴에 뭔지 모를 체념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반응과 상관없이 내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다. 미처 아빠의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그제야 아빠에 대한 죄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날 난 그렇게 아빠를 생각하며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그 다음날 엄마는 내게 핸드폰을 선물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핸드폰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난 여전히 전화기의 두 번호 중 어느 것에 전화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무 곳이나 전화를 하면 어느 여자든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찾아 올 텐데… 그냥 멍하니 두 번호만 번갈아 선택만 할 뿐이었다.
그때 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지혁이 너 맞네…”
공원 옆 도로에서 어떤 여자 목소리가 나를 아는 척 했지만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누군지는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누구…..”
“나야…너 여기서 뭐하니?”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왔지만,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임에도 난 누군지 여전히 몰랐다. 그러다 여자가 공원 안으로 들어온 뒤에야 알아보았다.
“어.. 수영이 누나?”
“응….”
수영이 누나는 나를 보며 특유의 보조개가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내 머리 속에 아까의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라 얼굴이 확하니 붉어졌다.
“너 술 마셨구나..?”
내가 앉은 벤치에 앉으며 수영이 누나가 말했다.
“얼마나 마셨길래.. 술 냄새가 여기서도 나니?”
“응… 조금…”
“조금이 아니라 많이인 것 같은데…?”
나는 대꾸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어쩐 일이야? 여기 학교에서 상당히 먼데.. 여기도 친구들이 있어?”
“아.. 아뇨.. 그냥 조금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걷다 보니까?”
“예…”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거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한번 걸어 봤어요..”
“그냥? 그냥 걸어서 이렇게 멀리 온 거야?”
“예…”
“한참 걸렸을 텐데…”
“근데 누나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응… 자다가 깨었는데 목이 말라서…”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자신의 옆에 있던 봉지를 들어 보였다. 물병 하나와 과자가 들어있는 듯했다.
“수돗물을 마시려니까 좀 그래서…”
그리곤 싱긋 미소 지었다. 수영이 누나는 뭐랄까.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엄마나 혜정선배처럼 계군일학 같은 범상치 않은 탁월한 미모를 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수하면서도 뭔지 모를 신비한 매력을 가졌다. 옷도 언제나 세련되게 입었고, 공부도 무척이나 열심히 했으며, 성격도 모나지 않아 은근히 인기가 좋았다. 특히 교수님들이 무척이나 총애를 했다.
“그랬군요… 이제 가야겠어요.”
난 자리에서 힘있게 일어났다.
“벌써…?”
수영이 누나는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접대용 멘트가 아니던가.
“예.. 가야죠..”
나와 수영이 누나는 공원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
“이 쪽으로요..”
나는 왔던 길을 가리켰다.
“응.. 나랑 같은 방향이네… 그런데 이 쪽으로 가면 택시잡기 힘든데..”
“그냥 걸어갈 거에요..”
“걸어서?”
“예… 오늘은 좀 많이 걷고 싶어요.”
그 말에 수영이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말없이 그냥 걸었지만, 내 머리 속은 엄마와 혜정선배 중 누구에게 전화 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술 한잔 할래?”
수영이 누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말했다.
“예…?”
“나랑 한잔 할래? 내가 살게…”
그렇게 말하는 수영이 누나 뒤로 포장차마 무리들이 보였다. 12시가 넘었건만 그 곳은 마치 초저녁 같은 분위기였다.
“뭐.. 괜찮죠.. 그것도…”
“그래… 그럼 가자..”
수영이 누나는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포장마차가 즐비한 골목으로 앞장서서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포장마차로 가려는지 누나는 포장마차 안에 사람이 있건, 없건 다 지나쳐 버리고는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서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야… 내가 사는 곳 후지지?”
“저…..”
미처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누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 뜻은 그냥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거였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난 다시 누나를 불어내어서 다음에 술을 하자고 하고 그냥 갈까 망설이다 묘한 이끌림에 그 집으로 들어섰다. 수영이 누나는 그 집의 지하방을 쓰고 있었다. 실내가 깔끔하기는 했지만 지하라 그런지 약간 눅눅한 냄새가 났고, 크기는 내 원룸보다 작았다.
“내가 담은 술이야…”
작은 상에 안주를 먼저 내어온 후 수영이 누나가 가져온 것은 벌꿀 담는 병에 직접 담근 과일주였다.
“몇 일 전에 내가 맛을 봤는데 맛있게 익었더라..”
“그냥 소주면 되는데…”
“소주? 소주 먹고 싶니?”
"아니.. 정성스럽게 담근거 같아서..”
“이젠 상관없어…그러니까 걱정마”
“예….?”
묘한 뜻을 가진 수영이 누나 말에 내가 반문했다.
“원래는 그 사람이랑 먹으려 했던 건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어..”
“그 사람이라면…?”
“응.. 맞아. 우리 헤어졌어…”
“왜..? 결혼한다고 했지 않나요..?”
“그러게.. 그런데 살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수영이 누나는 슬프거나, 착찹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야기를 하 듯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을 했다. 그렇게 수영이 누나와 술을 한잔, 두잔 마시면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니 누나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수영이 누나와 그 남자는 누나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만난 사이였고, 이별한지 그 날로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면서도 수영이 누나는 끊임없이 그 남자의 장점과 멋진 점, 남자다움 이런 것만 이야기했다.
“그렇게 멋진 사람을 왜 떠나 보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된 거잖아요.”
소주에다 다시 과일주를 먹어서 그런지 나는 취기에 혀가 꼬였고, 나보다 더 자주 마신 수영이 누나도 상당히 취해있었다.
“그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 같아…”
“그럼 또 뭐가 필요한데요?”
“그 사람 집에서 반대해.. 고아인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작년까지만 해도 나이차이와 고졸인 것만 가지고 반대하시더니… 이제 본심이 나오는 거지. 뭐 그래도 난 서운하지 않아 난 미련 없이 그 사람 사랑했으니까..”
“누나.. 고아에요…?”
“응… 그래도 내 형제들은 많아.. 같이 자란 애들이 전부 내 형제자매니까..”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영이 누나가 고아일 줄은… 난 술이 확 깨었다. 그러면서 석훈이 녀석이 떠오르며 화가 치밀었다.
“난 부끄럽지 않아.. 내가 고아인게 내 잘못인가?”
“……”
“고아도 사람이야..”
“……”
“나 세상에 해를 끼치며 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세상은 왜 이러니?”
누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어느 사이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양 무릎을 구부려 끌어 않고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니 한없이 측은해 보였다.
“너도 알지….?”
눈물을 닦으며 말하던 수영이 누나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뭐를요?”
“석훈이…”
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는구나…”
그러면서 누나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석훈이에게 전해줄래… 나 피하지 말라고… 그게 더 나를 힘들게 하니까..”
“……”
“그 사람… 나와 석훈이의 일을 알아. 아침에 딱 걸렸거든.. 풋~~~”
수영이 누나는 가볍게 실소했다.
“그땐,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 사람이 내는 기척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는데, 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볼 때 난 사실 왜 그러나 했어. 그러다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난 흔히 여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 그 사람에게 나가라고 했어. 이미 서로 볼 것 다 보고 알 것 다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여자란 원래 그래.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거든.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픈 것도, 온 몸이 쑤시는 것처럼 아픈 것도 몰랐어. 그냥 여자로서 수치스러웠지.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 남자 그냥 나갔어. ‘밖에서 기다릴께’라고만 하고 말이야. 그땐 그런 그 남자의 말이 난 당연한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푸풋~~~~~~”
수영이 누나는 말을 끊고서 다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혁아 너 그런 거 아니? 너무 황당해서 하늘이 하얗게 변하는 거…… 난 내 옆에 나처럼 발가벗고 있는 석훈이를 보고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았어. 난 내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나. 그냥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앰블런스 안이더라. 그리고 내 옆에서 한없이 걱정스런 눈으로 그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난 응급실 입구에서 뛰쳐나와서 무조건 석훈이만 찾았어. 그 녀석만이 진실을 말해 줄 거니까. 그런데 그 남자가 말리더라. 일단은 좀 쉬라고 말이야. 그 사람… 너무 멋지지 않니? ㅎㅎㅎㅎ”
수영이 누나는 그 후로 한 참을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서 한참을 웃던 누나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멈출 때쯤, 누나는 웃음을 멈추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후로도 계속, 그 사람은 오히려 나를 걱정했어. 내가 충격 먹을까. 내가 혹여 어떻게 잘 못 될까. 보약을 지어오고, 내가 괜찮다는데도 내가 잠잘 때까지 이방에서 나가지 않았어. 그리고 새벽같이 내가 잘 있나 찾아와서 아침도 해주고… 죄는 내가 지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더 미안해 했어. 우끼지?”
수정이 누나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에 내가 화답을 하기에는 석훈이에 대한 내 분노가 너무 컸다.
“석훈이는 녀석은 뭐래요? 그 녀석이 뭐라 변병하던가요?”
“석훈이… 풋~~ 자기도 모르겠데…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그 사람 앞에서 오히려 나에게 설명을 해달라는 듯한 애원의 눈빛을 보내더라.. 이미 병원에서 검사해 내 몸에서 수면제 성분이 나왔는데도 말이야. 수면제 이길래 다행이지 만약 마약이었으면… 그날 석훈이 정말 많이 맞았어 그 사람한테.. 정말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나는 예전 석훈이 녀석이 깡패 3명과 싸웠다며 영광의 상처 어떻고 저떻고 하며 실실거리던 모습이 떠오르며 속에서 피가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수정이 누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녀석은 아마도 보경이나 다른 과의 두 명의 여학생과 그런 식으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술을 마시자고 하고는 술에 약을 타버리는… 아마 그 녀석이 혜정선배를 욕하는 것은 혜정선배를 그렇게 가지고 싶은데 혜정선배가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았기게 그럴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딴 녀석 죽여버리지 그랬어요!!!”
“뭐…?”
“그런 녀석은 살 가치도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 나와 그 사람에게 찾아와 용서를 빌었어.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랬다고 말이야.”
“그걸 믿어요?”
“아니.. 믿지는 않아. 그렇지만, 그날 우리에게 용서를 구할 때는 진심 같았어. 그러면서 자기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면 자기도 죽을 거라면서 약까지 보여주던걸..”
“전부 쇼에요..”
“알아.. 그래도 그렇게라도 용서를 구하니까. 난 그 애에게 앞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 학교에서도 나를 아는 척 말고… 그리고 지금까지 잘 지켜주고 있고…”
“믿지 마세요. 그 녀석을 믿지 마세요.”
“………”
“이런 말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지 모르겠지만, 누나 애인과 헤어진 거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석훈이 녀석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무슨 말이니?”
“아까 저녁에……”
나는 수정이 누나에게 석훈이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았다. 순진하게 석훈이를 용서하고서 뒤통수 맞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정이 누나의 눈에 점점 증오의 불길이 일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석훈이와의 일을 아무리 자신의 애인이 이해를 하고 오히려 폭력에 당한 그녀를 위로해준다고 해도 그건 엄연히 그녀 자신에게는 하나의 약점이고, 결과적으로는 끝까지 자신의 남자를 잡지 못하고 놓아버린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되었다. 석훈이 녀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정이 선배를 위해서 그런 이야기는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였다. 그러나 이미 물은 쏟아져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 이후, 나와 수정이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다음 날,
나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한 아줌마의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음색의 거친 말 때문이었다. 목구멍에 부서진 유리조각을 집어 넣고 이야기를 하는지 듣는 것 자체가 짜증나는 소리였다. 어째든 잠에서 깨어나니 완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것도 벽에 기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였고, 그런 자세 탓인지 목과 등이 뻐근하니 통증이 몰려왔다.
여전히 밖에서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니 아가씨 난 땅파먹고 사는 줄 알아요? 도대체 기다리라고 한 게 몇 달째인지 알아요? 벌써 3달이에요…"
“저 죄송합니다..”
“죄송할거 없어요. 당장 방 빼요.”
“죄송합니다..”
“아.. 아가씨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죄송할 필요 없이 방 빼라니까.”
아줌마의 목소리는 그 곳에서 끝이 났고, 귀에 익은 젊은 여자의 음성은 그 뒤로도 몇번이나 ‘죄송하다’고 하고는 조용해졌다. 난 직감적으로 수정이 누나와 이 집의 주인 아줌마와의 대화란 것을 알았다.
잠시 후, 수정이 누나가 들어왔다.
“일어났니?”
깨어난 나를 보고 수정이 누나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방빼라는 거 같던데…”
“응… 그러라고 하네.. 신경 쓰지마.. 맨날 그러니까..”
수정이 누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전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3개월 째 그러는 거면 이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 같은데요?”
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듯 말했다.
“그런가..? 배고프지? 기다려 밥 차려 줄게..”
“…….”
난 말을 하려다 삼켰다.
수정이 누나도 혜정선배만큼이나 빠르게 음식을 만들어 내왔는데, 뭔가 부시럭 부시럭 하고, 도마 두드리는 소리 조금 내더니 금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을 차려왔다. 나와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두 여자였다. 난 내 원룸에 있을 때면 나 혼자 있건, 친구가 오건 이제는 무조건 라면만 끓이는데.. 그러다 순간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난 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여기 전세에요?”
“내가 무슨 돈으로… 전세를…”
“지하인데도 그렇게 비싸요?”
“…….”
수정이 누나의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누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쓰지마…”
나와 눈이 마주친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왠지 그 미소는 무척이나 고생한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같았다.
“신경 안써요… 그냥 궁금해서요…”
“응….”
“그냥… 빈집이 하나 있거든요.””
“빈집?”
“예.. 늘 텅 비어 있어요. 학교랑도 가까워요..”
“학교랑?”
“예…”
“응…”
학교랑 가깝다는 말에 수정이 누나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수저로 밥을 펐다. 아마도 학교랑 가깝다는 말에 당연히 돈이 비쌀거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살기만 하면 돼요.. 관리비정도만 내구요.”
“무슨 말이야..?”
“어때요? 생각 있어요? 방도 여기보다 큰데…”
“그런 집이 어떻게 있어?”
수정이 누나는 관심은 가지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 원룸이요.”
“뭐..?”
“원룸을 전세로 얻어서 살기는 하는데, 제가 사실 그 방을 거의 안 써요. 부모님이 같은 서울에 살기 때문에 사실 그 곳에서 거의 통학하거든요. 처음엔 공부한답시고 얻은건데, 혼자서는 못 살겠더라구요.”
“………”
수정이 누나는 말없이 내 눈만 빤히 쳐다보았다. 난 그런 누나에게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아니야… 마음은 고마워..”
“괜찮다니까요.”
“나도 괜찮아..”
“흠…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대신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되요.”
“무슨….?”
“비밀을 지켜준다고 약속할 수 있죠?”
“…….?”
“저 사실, 혜정선배랑 사귀어요. 단순하게 사귀는 정도가 아니라 혜정선배 집에서 잠도 자요. 아마 제가 부모님 집에서 자는 것보다 더 많을 정도로요. 당연히 부모님은 제가 자취방에서 자는 걸로 알지만….”
“네가 혜정선배랑?”
수정이 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를 혜정선배 집으로 초대할게요. 그럼 믿을 수 있겠어요?”
“…….”
“대신 이거 진짜 비밀이에요. 혜정선배는 나와 사귀는 것을 학교에 별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저 역시도 별로 그러고픈 마음 없구요.”
그렇게 나는 다짐 받듯이 말을 했지만, 여전히 수정이 누나의 얼굴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긴 쉽게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6살이나 차이 나는 4학년과 1학년이 사귄다니, 그것도 소문이야 어떠하든 혜정선배는 외모적으로는 학교 최고의 퀸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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