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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무협야설 MC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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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86 회 작성일 24-01-21 09: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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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번서가 무공과 환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제공해 준 [환마]갈천휘는 모종의 이유로 대왕실의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다. 백무련의 련주인 유리부인 마옥령(瑪玉玲)까지 나서는 체포조가 결성되어 자산성 인근까지 쫒아간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 별명처럼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통에 그를 붙잡는 것은 상당히 요원한 일이 되어 있어서, 몆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도망 중이었다.

 

번서는 자신의 [조직]의 자리가 어느정도 잡히자 그가 거처인 해운곡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번 찾아오라는 그의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양주에 있는 해운곡은 번서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가 그대로였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얼굴을 비롯한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두명의 노예와 함게 옛 집을 찾은 그는 말끔하게 허물어진 집터만 남은 것을 발견하고 잠시 옛 기억을 되살렸다.

 

실로 귀양길에 오른지 거의 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책 밖에 모르던 약관의 청년이던 번서는 이제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나이와는 걸맞지 않는 경험과 관록을 지닌 악당이 되었다.

 

[아들아, 무슨 일이냐?]

 

기억하는 그의 부친의 모습은 언제나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시선을 돌리면 그의 모친은 마루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곤 했다. 높은 관직에 오르면 한재산 모으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기에, 혼자 청렴하기 그지없었던 부친은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나라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한 나라는 그를 죽였고, 그의 가족을 파괴했다.

 

" 잊지 않겠습니다. "

 

" 네? "

 

" 아니다, 혼잣말이다. "

 

번서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궁금해 하는 서봉과 예하랑을 데리고 집터를 뒤로 했다.

 

해운곡은 앞으로는 바다가 있었고, 뒤로는 만산(蔓山)과 날산(捺山) 이라는 두 산이 서 있어 그 사이의 계곡에 세워진 고을이다. 풍광이 수려하기 그지없지만, 동시에 지형이 난해하기 그지없다. 갈천휘의 암자는 만산에 있었는데, 그가 남긴 약도를 보고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실제로라면 한시진 정도면 닿을 거리에 있는 그 작은 암자를 반나절을 넘게 고생한 끝에야 찾아냈을 정도다. 환술 같은 것은 쳐져 있지 않았다. 부지의 밖에 노예들을 세워 경계를 하도록 한 후, 그는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 음,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나 보군. "

 

암자라고는 해도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위에 세워진 조그마한 오두막 비슷한 것이었다. 살림살이가 간소하기 그지없어서 번서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확인을 마치고 가려는 그때 마당에서 인기척이 났다.

 

" 오랜만에 보는구만. "

 

마치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 처럼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갈천휘는 번서 쪽을 향해 지긋이 웃어 보였다.

 

" 어르신! "

 

황급히 예를 취한 번서를 보며 갈천휘는 껄껄 웃었다.

 

" 건강하신것 같아 다행입니다. "

 

번서의 인사를 받고 나서 갈천휘는 그를 아래위로 한번 쓰윽 훝어 보았다.

 

" 자네는 아직 그 지병을 고치지 못하였나 보군. "

 

" 네. 조금 개선되긴 했지만... "

 

" 음 여기서 이야기하기도 그러니까 안으로 들어가지. "

 

경계를 서던 노예들은 기척을 숨겼다. 예하랑이 포함된 노예들을 보여서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니 당연한 일이라, 미리 귀뜸을 해 놓고 있었다. 갈천휘의 암자에 들어간 번서는 탁주와 산나물 안주를 놓고 그와 마주 앉게 되었다. 한동안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갈천휘는 옛날 일을 잠깐 언급했다.

 

" 유가촌의 사람들과 석매리의 원수를 갚은 것은 잘한 일이야. 그 다음 벌어진 일들에도 물론 연관이 있겠지? 듣자니 꽤 화려하게 해치웠던 모양이던데. "

 

" 하하하... 네 조금. "

 

" 겸손하기까지 하군. 좋은 일이야. 요즘 젊은이들에겐 부족한 것이지. 어떤가, 본격적으로 내 제자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는가? "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번서는 갈천휘가 어떤 인물인지 안다. 무림 4대 고수로써 무공보다는 환술로 세상을 우롱할 수 있는 인물인 환마의 제자가 된다니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번서는 그자리에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 많이 부족합니다만, 제자로 받아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

 

" 과한 예절은 그만두게, 닭살 돋으니까. 난 제자를 들이려는 거지 노예를 들이려는게 아니야. "

 

[노예]라는 단어에 뜨끔하는 번서였다.

 

그날부터 번서는 [환마]갈천휘의 정식 제자로써 그에게 보다 더 깊고 넓은 환술의 경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노예 중에 갈천휘의 이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예하랑 하나 뿐이기에(그나마도 멀찍이 떨어져서 경호했다), 당분간 그녀가 번서의 전담 경호원이 되었다. 물론 교대도 없이 24시간 내내 그런 격무를 시킬 수는 없으므로, 그녀가 잘 때는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노예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이를 위해 작은 무예 경연을 열어야 했다) 당여월과 교대를 해야 했다.

 

이미 번서가 환술의 기초를 알고 능숙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갈천휘는 보름동안 보다 더 고급의, 정말로 [환마]로 자처할 수 있을 정도의 영역에 달하는 환술을 사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제공했다. 그 가르침은 꽤나 엄격했지만, 그만큼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단계의 기초에 안정적으로 진입했을 즈음, [그 일]이 터졌다.

 

날이 좋은 아침이었다. 번서는 갈천휘가 가르쳐 준 축지술을 연습하느라 산봉우리와 오두막을 반복해서 오가는 중이었는데, 축지술은 이론상 황국의 남단에서 북단까지도 한번에 이동할 수 있지만(가진 도력에 따라 최대 거리가 제한된다), 한번에 모든 도력(道力)을 소모하기에 사용하고 나면 도력이 회복될 때 까지 쉬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가 산봉우리에서 쉬고 있는데 멀리 아랫쪽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두막이 검붉고 불길한 기운에 뒤덮였다. 축지술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번서는 경공술을 써서 어렵사리 절벽을 내려왔다.

 

붉은 안개와 같은 기운은 실제로도 강렬한 독성을 가진 일종의 안개였다. 마침 예하랑이 당여월과 교대해 쉬러 간 시점이었기 때문에 부지의 경계를 지키던 당여월부터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번서가 시키는 대로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기에 무사했다. 하지만 갈천휘는 아니었다.

 

" 스승님! "

 

번서가 당여월과 함께 갈천휘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명의 젊은 여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지나치게 창백한 하얀 피부 위에 걸치고 있는 옷조차 검은색이었고, 무기도 날이 새카만 검이었다. 그녀는 번서와 당여월 일행읗 흘끗 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한번 흔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여기저기서 붉은 안개가 뭉쳐서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 [마혈시(魔血屍)]라는 요물이다!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해라! "

 

번서가 은색의 막으로 자신을 감싸며 물러서는 동안, 당여월이 양손에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카카캉!... 카가가가각!...

 

번서의 노예가 되기 전에, 당여월은 창천교 내에서도 짝을 찾기 힘든 검사였다. 그리고 그 실력은 그때보다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퇴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노예가 되기 전보다 훨씬 더 고강한 내공을 가지게 된 지금은 오히려 훨씬 강해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는 어지간한 바위 정도는 그대로 가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이 실려 있다.

 

게다가 당여월은 토끼를 잡을때도 전력을 다하는 호랑이 타입이다. 그말인 즉슨, 첫 일격부터 전력을 다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전력을 다한 첫 일격이 화려한 불꽃과 함께 튕겨 나갔다. 물론 당여월의 검에 실린 힘에 그것 역시 멀찍이 튕겨나갔지만, 그런 것이 수십마리가 달려드는 것이다. 번서의 등골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그는 다른 노예들을 부르기 위해 영서를 날리려 했지만,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붉은 안개가 영서를 집어삼켰다. 그것 역시 환술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술법 전투는 번서로써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수수께기의 여인과 갈천휘의 전투는 그로써도 새로이 보는 경지였다. 게다가 그것이 술법과 무공을 혼합한 전투라는 것도 그에게는 엄청난 공부가 되는 사실이었다. 사실, 갈천휘는 그의 노예인 예하랑의 [후배]에 해당하고 게다가 그가 가르쳐 준 술법이 그녀를 속이기 전까지는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번서는 그의 실력에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천하 사대 고수]라는 것이 허명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었다.

 

갈천휘는 환술은 물론이고 무공 실력도 예하랑에 비해 전혀 뒤쳐지지 않는 실력이었다. 물론 그런 갈천휘를 밀어붙이고 있는 검은 옷의 여인의 실력도 번서를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두명의 실력은 백중세에 가까웠다. 다만 실력은 백중세였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나 환술은 성격이 완전 정반대였다. 갈천휘가 빛이라면, 그녀는 어둠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술법으로 불러들인 괴상한 강시까지 부려서 번서 일행을 물러서게 만들고 있었으니, 전력을 갈천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도 싫어지는 일이 될것이다.

 

솔직하게 번서는 아직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신 강시를 물리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환술은 이 괴상한 붉은 안개 속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일은 그와 지금 동행하고 있는 당여월의 몫이 되었다. 재미있는 일은, 당여월이 아무리 전력을 다해서 베어도 그저 금속성 섬광과 함게 물러날 뿐이던 강시가, 번서가 자신의 도력을 그녀의 칼에 불어넣자 마자 베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불타는 종이 인형처럼 허공에서 불타며 사라졌다.

 

" 좋아, 이대로만 하면... "

 

그러나 번서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강시 하나가 반쪽이 나자, 갈천휘를 상대하던 여인이 이쪽으로 시선을 한번 돌리더니 손짓 한번으로 똑같은 강시 한무리를 허공에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당여월조차 안색이 바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번서는 해결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응용할 줄도 아는 남자였다.

 

" 여월, 넌 격검을 쓴다고 했었지? "

 

" 네 주인님. "

 

" 그럼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검이 있겠군. "

 

" 타핫!... 허리에 두개, 다리에 짧은걸로 두개 있습니다. "

 

" 하나 하나 쓰기엔 이놈들이 좀 많지? "

 

" 네?... 네!... "

 

충분한 내공이 있다면, 물체를 어느정도까지 컨트롤 할 수 있다. 격검이나 비검술, 심지어 검강까지, 기가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방법은 많다. 그리고 그 방법 중에는 물체를 폭발시키는 방법도 포함된다.

 

모든 그릇에는 거기 담길 수 있는 한계량이 있듯이, 모든 물질에는 거기에 기가 담길 수 있는 한계량이 있다. 그리고 그 입계점을 넘으면, 보통은 망가지거나, 휘거나, 심지어 녹을수도 있다. 그러나 내공량과 그것을 다루는 기량이 충분하다면, 기로 가득찬 물체를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처럼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당여월은 그러기에 충분한 내공과 기량, 그리고 실전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다. 번서의 짧은 질문에 담긴 내용을 깨닫자 마자, 그녀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행동을 개시했다.

 

폭발하도록 기가 가득 담긴채 당여월의 손에서 던져진 단검 두자루가 강시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는 동안, 번서는 거기에 자신의 도력을 실었다. 그리고 도력까지 담긴 단검은 그가 원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콰콰쾅!!!....

 

" !!!... !!!... "

 

인간의 귀로 들리지 않는 영역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열대여섯 정도 되는 강시가 한순간에 화려한 누더기가 되어 붉은색 불꽃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거기에는 검은 옷의 정체불명의 여자도 의외라는듯이 눈꼬리를 치켜올렸고, 마치 귀찮은 벌레를 쫒듯이 다시 손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번에는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수세에 몰리는 듯이 보였던 갈천휘가 그 짧은 순간을 좋치지 않았던 것이다.

 

" 이 [환마]를 상대하는데 한눈을 팔아서야 쓰나! "

 

촤아악!!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며, 선명한 붉은 피가 치솟아 올랐다. 상당한 양이었고 여자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지만, 그뿐이었다. 핏방울을 허공에 흩날린 다음 곧바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환술과 검을 써서 갈천휘를 몰아붙였다. 아니 방금전보다 훨씬 더 사나운 기세로 몰아쳤기 때문에 갈천휘의 손발이 잠시 어지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건 공격하는 쪽이다. 어떤 괴물이라도 출혈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 움직이면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하물며 전투 같은 격렬한 행동을 한다면 출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처음 얼마간은 태연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시간의 문제다, 그리고 수적인 우세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부상까지 당하고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리 천하 제일의 고수라도 자살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자살행위는 하지 않는다.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살아 남아야 천하 제일인 것이다.

 

휘이이이잉!!!...

 

그녀는 몆초식을 더 날렸지만, 급격히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초식을 한번 더 날린 후에, 독기가 포함된 강렬한 폭풍이 몰아쳤다. 어찌나 강했던지 독기에 면역에 가까운 번서조차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람이 사라졌을 때, 번서는 마당에 주저앉아 있는 갈천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비로운 여자는 도망치고 없었다.

 

" 스승님! "

 

번서가 급히 달려가 부축하려는 것을, 갈천휘는 손을 들어 막았다.

 

" 그만, 더이상 다가오지 마라. "

 

" 네?... "

 

잠시 숨을 몰아쉬고 침을 삼킨 후, 갈천휘는 번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후 번서는 불현듯 갈천휘 주변에 희미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환술을 집어삼키는 괴상한 붉은 안개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래, 네가 본 대로다. "

 

"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갈천휘는 씁쓸하게 웃었다.

 

"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은 잊지 않고 있겠지? "

 

" 네... "

 

" 초막의 중간 기둥... 주춧돌 사이에 네게 남기는 물건들이 있다. 그리고 내 신발도 너에게 남기마. 방금 그 계집아이... 진서연(辰瑞淵)이 원하는게 내 신발이었거든. "

 

갈천휘는 쇠로 된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그것을 발을 써서 하나씩 번서 쪽으로 날렸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드는 번서 앞에서, 갈천휘는 다시 한번 자세를 흐트러트리더니 검붉은 피를 왈칵 토했다.

 

" 스승님! "

 

" 그만, 누구든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지 않느냐... 오늘은 그 계집아이가 속아서 도망갔지만, 그녀석도 천문을 볼 줄 아니까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를 노릴게야. 그리고 너는 아직 그녀의 상대가 아니다. 실력이 될 때 까지는 숨어 지내야 할게야. "

 

번서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갈천휘는 씨익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 이제 네가 환마(幻魔)다.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

 

" 난 제자복이 없었지만, 마지막 제자는 제대로 고른 것 같아 안심이다. 잘 있거라, 제자야... "

 

순간 갈천휘의 몸에서부터 하얀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를 중독시킨 붉은 안개에는 전염성이 있다. 그것을 자신이 가진 최후의 도력을 짜내어 소멸시킨 것이다. 섬광이 사라진 후, 그의 자리에는 그가 걸치고 있던 소박한 무명 옷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스승님... "

 

번서는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절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갈천휘는 환마라 불리우는 환술의 대가이며, 별자리까지 잠시 붙들어 둘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갈천휘를 죽인 고수다. 직접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주변에 눈과 귀를 남기고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몸을 숨기 전에 갈천휘가 죽었다는 사실을 누설한다면 그의 유언을 어기는 셈이 될것이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그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갈천휘가 지목해 준 장소에서 감색 비단에 싸인 꾸러미 하나를 파 냈다.

 

그 꾸러미를 당여월에게 들린 후, 번서는 경공을 발휘하여 자리를 벗어났다.

 

.

.

.

 

진서연...

 

진서연이라는 이름은 낮설지 않았다. 번서는 자신의 배로 돌아가는 내내 그것이 어디서 보았던 이름인가를 기억해 내려 애썼고, 마침내 배에 도착해 진소아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왕이자 무림 사대고수 중 일원인 권황 진천권의 행방불명되었다던 장녀였다.

 

다른 사대 고수인 검후 궁비월(역시나 행방이 묘연하다)의 제자로 들어갔다지만, 갈천휘와의 전투를 보건데 진서연은 사대 고수 모두에게 사사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환술은 갈천휘의 그것의 정 반대판이었으며, 간간히 검과 함께 강력한 내가 중수법이 포함된 권각술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각술이라면 그녀의 부친의 특기고, 내가 중수법은 이미 작고한 고인인 역신 홍대곤의 특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그 모든것을 절정에 가까운 솜씨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완전체에 가까운 능력을 바로 눈 앞에서 보았다.

 

분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번서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환술이면 모를까, 무공 실력으로 그녀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몹시 희박할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메꾸어 줄 수 있는 전대의 절정고수인 예하랑을 포함한 노예 군단이 있으며, 당분간은 생각할 시간도 있다. 그리고 예하랑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열세가 곧 패배인 것은 아니다.

 

갈천휘가 벌어준 시간은 도망치는 시간이 아니라 반격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번서는 맨 먼저 갈천휘가 남긴 유산들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부터 시작했다. 쇠로 된 나막신 바닥에 새겨진 것은 신행법(神行法)이라는 이름의 경공이었다. 보통의 경공은 보다 더 적은 내공으로 보다 더 멀리,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인 반면, 신행법은 짧은 순간에 최대의 속도와 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완전한 전투 경공이었다. 근접거리에서 적의 공세를 무력화시키는 목적으로 만들어 진 그 효과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내공의 소모가 격심해 번서나 예하랑 정도나 되어야 간신히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행법에 대한 파악을 마친 후 풀어본 비단 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낡은 책자였다. 번서는 그것이 오래된 악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음, 설마?... "

 

갈천휘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옥적(玉笛)이었다. 그리고 황국에서 선비의 교양 중 하나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다. 번서도 어릴적부터 음악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선실의 보물함에서 옥적을 꺼내온 번서는 악보를 펼치고 처음 나오는 곡을 연주해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옥적의 바람구멍 안을 들여다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나무 마개 비슷한 것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마개 끝에는 실낱같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로 아주 미세하지만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악기라면 오락당이었던 당여월도 일가견이 있다. 번서의 허락을 얻어 옥적을 살피던 그녀는 옥적을 내려놓고 다시 악보를 펼쳤다.

 

" 주인님, 이것은 혹시? ... "

 

"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

 

" 아주 약간은 바람이 통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알맞은 곡을 연주한다면 이 피리의 신비가 풀리지 않을까요? "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기에, 번서는 시험삼아 모든 곡을 차례대로 연주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번서는 그 악보가 그대로 연주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모든 음악에는 격식이 있다. 이를테면 아악(雅樂)과 향악(鄕樂)의 음조의 차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문장도 그러하듯이, 음악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어떤 일관된 주제와 형식을 따르며 반복되는 구간이 반드시 존재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불문율과 같다. 그런데 번서 앞에 놓인 악보는 그것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 암호인 걸까요? "

 

서봉의 의견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던 번서는 다시 한번 악보를 찬찬히 훝어 보았다. 그리고 곧 전혀 뜻밖의 부분에서 반복되는 일관성을 발견했다.

 

" 과연...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서봉. 필요한건 음조가 아니야. 비어 있는 부분이지. "

 

어떤 형식과 마찬가지로, 연주자를 죽일 의도로 작성된 것이 아닌 이상 악보에는 쉼표가 반드시 있다. 번서는 악보의 음표에서는 규칙성을 찾지 못했지만, 각 장의 쉼표의 배치에서 반복되는 부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책 한권을 통채로 써서 또 다른 하나의 악보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번서가 그 악보대로 연주하자,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음에도 옥적의 속을 채우고 있던 나무 마개가 소리도 없이 뽑혀 나왔다.

 

피이이~

 

마개가 빠지자 마자, 피리 특유의 구슬픈 음색이 흘러나왔다. 번서는 빠져나온 나무 마개를 살펴 보았다. 굵은 젓가락을 연상케 하는 그것의 끝은 비틀어 열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것을 열자, 그 안에는 둘둘 말린 동이 한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기름을 먹인 청단지(淸檀紙)였는데, 금색 글씨가 써져 있었다. 번서는 그 글씨의 재료가 금을 갈아서 만든 가루라고 추측했다.

 

" 이것도 악보군... "

 

그것은 다 연주해도 일다경을 채우기도 전에 끝나는 짧은 곡이었다. 하지만 번서는 금으로 써진 곡의 제목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하황은(河滉恩)!... "

 

일찌기 황국이 들어서기 전에 풍국(風國)이 있었고, 풍국이 들어서기 전에 하국(河國)이 있었다. 이제와서는 거의 전설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국은 대왕(大王)이 아니라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하황은은 그 하국의 전설적인 궁중 음악이다. 그 연주 한번으로 천후(天候)를 바꾸고, 인간의 감정을 뜻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단순한 전설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것이 번서의 손 안에, 그것을 연주하기에 알맞을(지도 모르는) 악기와 함게 들어온 것이다.

 

무림의 세계에서 음공(音功)은 드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류인 것도 아니다. 몆가지 강력한 장점과, 또 몆가지 강력한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당한 전제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거의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장점에 대해 논하자면, 음공은 내공의 경지에 따라 다르지만, 한번에 다수를 제압하기에 최적화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소리가 들리는 범위 전체에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나 귀는 달려 있고, 음공은 바로 그 귀를 통해 대상의 정신에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정순한 내공과 철저한 정신적인 수련이 없이는 저항하기도 쉽지 않다. 광역기로 친다면 상당히 효과가 넘치는 광역기인 셈이다.

 

그러나 음공은 또한 단점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거의 대부분의 음공의 경우 악기가 필요하다는 점이 첫번째 제약이다. 또한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 두 손과(추가로 입도)을 쓸 수 없다. 또한 아주 특별하게 제작된 악기라면 모르지만, 보통의 악기는 무기로 적합한 종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손쉽게 파괴하거나 고장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고도의 집중을 요하기에 사소한 방해 만으로도 금방 효과가 무산된다. 게다가 음공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효과를 발휘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비슷한 종류인 사자후는 효과가 즉시적이고 악기가 필요없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인 파괴력으로 따지자면 음공과는 비교가 불가능할정도로 효과가 약한데다 그마저도 시전하기 위해 대단히 고강한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력이 몹시 떨어지는 다수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극히 비효율적이다.

 

이런 단점이 있는 만큼, (본격적인)음공은 공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불가능에 가깝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악기를 준비하는 손쉬운 적을 내버려 두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상대와 거리를 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외로 무림인들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상황에서 자주 대적하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한 대비도 많다. 번서는 활과 화살을 쓰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암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유엽비도 같은 것들은 작고, 빠르며,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제작과 보관이 용이한 편이다. 그리고 유엽비도 몆개만 날려도, 음공의 준비는 순식간에 와해된다.

 

광역기에다 방어도 어렵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명한 단점들 때문에 음공은 주로 수세적인 상황, 그것도 주로 기습 효과를 볼 수 있는 상황에 쓰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함정이다. 전술적인 관점에서 따지자면 번서는 공세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음공을 배워서 써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음공이 전설에나 등장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피~필릴리~피이이~

 

하황은의 전설은 진짜였다. 그의 손에 들린 옥적의 선율에 따라 구름과 안개가 모였다 흩어지고, 동물을 물론 초목조차 그 선율에 감정을 번농당했다. 번서의 무공 실력은 평범할지 모르나 그의 내공은 이미 당대 최고의 반열에 있었으므로, 영향이 미치는 범위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연습을 위해 틀어박힌 죽림에서 그가 슬픔의 선율을 연주할 때면, 강 건너에서 대기하고 있던 배 안의 노예들까지 지극한 슬픔에 젖곤 했다. 물론 그는 곡의 영향이 미치는 대상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끔 연습을 반복해서 금새 그런 일은 없어졌지만.

 

마침내 번서가 완전하게 한 곡을 끝마쳤을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예하랑은 엎드려 이마를 땅바닥에 대었다.

 

" 대공의 완성을 경하드리옵니다. 이제 그 진가 계집아이를... "

 

번서는 예하랑이 고개를 드는 것을 기다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직은 부족하다.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히 준비되기 전까지 진서연과 맞서지 않을 것이다. "

 

그날 번서의 배는 합포 포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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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진서연이 갈천휘에게 입은 부상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족히 반년은 정양을 요하는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그녀는 중주의 모처에 있는 음산한 계곡으로 향했다.

 

" 돌아오셨습니까. "

 

문지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곡의 입구에 걸쳐진 현수교 위를 미끄러지듯이 건넌 진서연의 눈 앞에 안개에 싸여 있던 계곡의 본격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장엄한 고대 양식으로 지어진 전각이 즐비한 풍경은 보는이를 위압하는 바가 있었다. 진서연은 그 중간에 지어진 가장 크고 장엄한 전각을 찾아 들어갔다.

 

높이가 두 척에 이르는 문이 열린 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진서연은, 전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계단을 몆개나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거대한 태사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사의 앞에는 발이 드리워져서 거기 앉아 잇는 자의 모습은 알 수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

 

" 돌아왔느냐. 갈천휘의 일은 처리했겠지? "

 

"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 됐다. 다음 임무가 있을 때 까지 편히 쉬거라. "

 

" 네 아버님. "

 

진서연이 다시 고개를 공손히 숙인 후 뒷걸음으로 물러서 나가자, 태사의에 앉아 있는 자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황금색의 용포를 걸친 중년의 남자였다. 그 인상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눈꼬리가 사납고 입술이 얇은 모양새가 전형적인 악역이었다. 물론 그는 진서연의 [아버님]인 권황 진천권이 아니었을 뿐더러, 심지어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옆에는 푸른 문사의를 걸친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하나 서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휜자위가 없었다.

 

" 크...보면 볼수록 천하절색이야... 하루바삐 저 계집의 도도한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싶군... "

 

"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주군... 우리가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저 계집이 필요합니다. 천하를 얻으신 후에 취하셔도 늦지 않을 일입니다. "

 

" 그래... 그렇겠지. 조금만 더 인내해야겠지... "

 

" 대신 오늘은 좋은 진상품이 들어왔습니다. "

 

" 무엇이냐? "

 

곧이어 그늘 속에서 미끄러지듯이 등불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매끄러운 하얀 비단에 싸인채 반듯이 누워있는 한명의 여자였다. 피부가 건강하게 그슬려 가무잡잡했고, 군살이 거의 붙지 않은 늘씬한 체격을 가진, 전신으로부터 건강미를 풍겨 내는 미인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긴 검은 생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하얗고 가지런했다. 곱게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는 촛점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양유견(楊柔絹)이라고 합니다. 경도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여고수로 철엽비화(鐵葉飛花)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요. "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사실 양유견은 경도에 위치한 백무련 산하의 방파인 [청량문(淸良門)]의 소문주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는 비도로도 쓸 수 있는 단도의 이도류. 실력도 발군이라서 백무련의 장래를 떠받칠 후기지수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 미모로도 당상히 유명했다. 그런 여고수가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의식을 잃은 채 실려온 것이다.

 

" 흐음...나쁘지 않군. 내 방에 가져다 두도록. 그럼 뒷일를 맏기겠네. "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일어났고, 청색 문사의를 입은 중년인 역시 깊숙히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그가 자신의 침실로 향하는 복도로 접어들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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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처인 전각으로 돌아온 진서연은 침실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주르륵...

 

욕실에 들어서기 위해 옷을 벗자 마자, 마른 피와 끈적해진 피가 엉켜 진득하고 끈적한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진서연은 비로소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아직... 아직은 안된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은 진서연은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진 욕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물로 피를 낚아낸 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갈천휘의 마지막 일격은 그녀의 왼쪽 늑골 끝에서 허리 어림에 걸쳐 길고 깊숙한 자상을 남기고 있었다. 위치가 조금 더 안좋았거나 그녀의 호체기공이 조금 더 약했다거나, 혹은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내장을 건드리는 치명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명상이 아니다 뿐이지 상처 자체는 충분히 심각했다. 얼마나 심했는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순수히 내공의 힘만으로 지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서연이 신경을 집중해 운공요상을 시작하자, 그때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던 상처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서서히 봉합되어 갔다.

 

압도적인 내공을 집중해 상처를 지져서 맞붙인 것이다. 마침내 봉합이 끝난 상처에는 길고 가는 흔적만이 남았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치료법에, 살이 타는 고통까지도 견디는 실로 무시무시한 정신력이었다.

 

치료가 끝난 후, 진서연은 비로소 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씻기 시작했다. 그 차가운 미모는 김이 오르는 탕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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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포의 중년인이 침실을 나선 후, 침실을 치우러 들어론 시종들을 잠깐이지만 침실어귀에서 멈추어 섰다. 방 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고, 피골이 상접한 채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여자의 시신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백무련의 후기지수 중 하나이던 철엽비화 양유견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매번 보는 광경이었지만, 시종들은 그 참혹한 모습에 결코 적응할 수 없었다. 양유견의 시신을 더러워진 침대보에 싸서 침대에서 끌어내린 다음, 그대로 밖으로 내 보내고 나서야 그들은 평상심을 되찾고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시 진서연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 보자면, 목욕에 앞서 겉의 상처를 치료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목욕을 끝내고 갈천휘가 남긴 내상을 치료하느라 운공요상을 하는 그녀의 감각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운공을 중단하고 일어나서 뒤를 보았을 때, 그녀의 방 앞에서 누군가 멈춰 서 있었다.

 

" 소인 이만승(李慢蠅) 삼가 공녀님을 뵙기를 청하옵니다. "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드러난 것은 아까 금포 중년인 옆에 서 있던 특이한 눈을 가진 문사였다.

 

" 너무 자주 찾아오는것 아니오, 중수사(中數仕)? "

 

" 기밀엄수를 위해서는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

 

손을 흔들어 주변에 단음결계(斷音結界)를 펼친 후, 이만승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서연이 내 준 자리에 앉았다.

 

" 천문을 보아 하니... 아직 갈천휘는 죽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

 

" 아마도... 놈의 제자로 보이는 놈이 방해를 했소. 하지만 마염(魔炎)에 당했으니 놈의 목숨은 시간 문제일 뿐이지. "

 

이만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발본색원... 그자의 제자도 찾아서 정리해 주셔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

 

" 아버님께서 실망하시겠지. 곧 그렇게 할것이오. "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만승은 품속에서 하나의 목갑을 꺼내었다. 그것을 본 진서연의 시선이 잠깐이지만 욕망으로 번득이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뛰어난 년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 ]

 

" 이번달 분의 공삼단(空蔘團)입니다. "

 

그것은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상당한 중독성을 지닌 미약이었다. 물론 그 미약효과는 특수한 향을 써야만 드러나고, 그런 조건이 성립하기 전에는 그저 (미약한)내공 증진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약일 뿐이다. 진서연은 벌써 몆해동안 이 약을 복용해 오고 있었으니, 이제 완전히 중독되어 있을 것이다. 향을 피우기만 하면 제정신을 잃고 음탕한 색녀가 되어 뒹굴 그녀를 상상하며 이만승은 속으로 웃었다.

 

" 그럼 소인은 이제 가 보겠습니다. "

 

" 나가 보지는 않겠소. 살펴 가시오."

 

이만승이 누각에서 나가는 모습을 자신의 침실의 창문 너머로 확인한 후, 진서연은 품에 넣고 있던 공삼단이 든 목갑을 꺼냈다.

 

" 이따위 것으로 날 지배하려는것은... 한 일억년쯤 이르지. "

 

진서연의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 오르며 순식간에 목갑을 소멸시켜 버렸다. 수법 자체는 삼매진화였지만, 일반적인 삼매진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그녀의 그것은 목함을 태우지 않고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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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궁과 해운곡을 다녀온 후, 번서는 자산성과 합포와 월영포를 교대로 오르내리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구문궁과 진서연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 있던 탓도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실력을, 특히나 세력을 구축 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자산성에는 금여화의 금탑삼상 지부가 있었고, 합포에는 경운경이 광산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월영포에는 역시 금여화의 입김이 미치는 상설시장과 함께 포구와 머지않은 곳에서 유준이 이끄는 몽룡당이 새로운 산채를 세우고 있었다.

 

이무렵 대왕실의 토벌 순위에서 제 1순위를 차지하게 된 몽룡당의 세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산채의 숫자는 셋이 되었고 각각의 산채의 인원수도 늘었다. 중주와 상주 일대에 걸친 많은 반 윤숭파에 속하는 인물들도 뜻을 같이 해 은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덕분에 정보력과 기동성도 한층 나아져 있었다.

 

이제 유준은 번서 없이도 어느 정도는 해나갈 수 있을만큼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사업을 번서와 상의해 결정했다. 번서가 그에게 제공하는 정보도 비할 데 없이 정확했을 뿐더러, 개인적으로도 그를 어느 정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서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그의 몽룡당을 자기 세력처럼 생각해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해를 넘겨 생일을 맞아 18세가 된 경운경이 성년식을 치렀을 때, 유준은 축하 선물을 가지고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 유준과 경운경은 처음 만나게 되었다.

 

" 어머, 이 공자님은 누구신가요? "

 

" 이분이 유준 공자시오. 유공자, 이쪽이 오늘의 주인공이신 경운경 낭자요. "

 

두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준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해 보였다.

 

" 처음 뵙겠소이다. 유준이라고 합니다. 번공과 함게 작은 사업을 하고 있지요. "

 

" 처음 뵙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

 

두명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 하면서도 몆마디를 더 나누텄고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번서의 옆에 서 있던 서봉이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한마디 했다.

 

" 좋을 때군요. "

 

" 아아... 그렇군. "

 

그제사 번서도 눈치를 채고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중키에 평균적인 체구라 신체적으로도 두드러지지 않는데다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번서와는 달리, 유준은 키도 크고 당당한 체격에, 호남형으로 생겼다. 게다가 영웅적인 기개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경운경이 그를 보고 반한 것은 어찌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준 역시도 경운경에게 한눈에 반해서 성년식을 치른 그 다음주의 첫날에 예물을 가지고 와서 번서에게 청탁을 넣었을 정도다. 일단은 번서가 경운경의 보호자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 진도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 그 마음은 잘 알겠소만,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

 

번서의 지적에 깨닫는 바가 있었던 유준은 예물과는 별도로 선물을 마련해 이번에는 경운경에게 직접 가지고 갔다. 석달을 넘게 공을 들인 끝에 결국 결혼 승락을 받아 낸 유준이 다시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는, 그도 반대하지 않았다. 상당히 보기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이었다.

 

결혼 축하연 만큼은 국무향과 진소아를 제외한 노예들 전원도 코뚜레를 벗고 참석했다(심지어 주자영까지도). 번서나 경운경 쪽의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유준쪽의 손님은 그렇지 않았던 덕에 아무래도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의 접대를 도울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손님 접대를 도맏는 동안, 누구에게나 귀여움 받는 막내인 악산라는 계속 번서 옆에 붙어서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황국말이 점점 유창해져 가긴 했지만 어투와 어순은 아직 이상했고, 게다가 생긴것도 황국인과 완전히 달라서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 주인님, 아깝다? "

 

" 음? "

 

" 이쁘다, 운경낭자. 주인님 잘 따른다. 나는 동생이라 생각했다. "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악산라의 보석같은 푸른 눈을 보며, 번서는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 ...그녀는 내게 있어 여동생 같은 존재다. "

 

" 나쁜 남자들, 여동생 많이 좋아 한다. [오니짱, 야메떼]한다. 아청아청 한다. "

 

"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운거냐... 당여월이냐? "

 

물어보자 악산라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여월언니 재미있는거 많이 가르쳐 준다. 좋다. "

 

범인의 정체는 알아냈다. 아마 악산라는 자기가 말하는 단어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번서는 당여월의 엉덩이를 때려 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 당언니, 왜 그래요? "

 

" 아냐, 갑자기 오한이... "

 

국무령의 질문을 받은 당여월은 얼버무렸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에 잠깐 몸서리쳤다.

 

물론 결혼한 이후에도 경운경이 번서의 광산을 관리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고, 번서가 유준에게 조언자로써 정보와 금전을 제공하는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은 이제 경운경을 중간에 두고 한 식구가 되었다는 점 정도다. 유준은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번서를 [빙장어른]이라고 불렀고, 번서는 [사위]라고 대꾸해 주는 관계랄까.

 

술시가 되자, 왁자지껄하던 잔치 분위기도 슬슬 정리되었다. 신부를 공주안기로 안아 들고 신방으로 들어가는 신랑의 등 뒤를 휘파람 소리가 쫒았지만, 예하랑에 의해 신방을 엿보는 것은 엄금되었다. 신방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자 아직 술잔을 더 기울일 여력이 남아있는 몆몆 손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 마련된 임시 숙소를 안내받았고, 바쁜 사람들은 덕담을 남기고 헤어지게 되었다.

 

" 좋은 날이군요. "

 

" 그래. 나도 모처럼 마셨더니 기분이 좋군 그래. "

 

그동안 옆을 지키고 있던 악산라는 이미 잠자러 가고 없었다.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의 시선에 취해, 예하랑은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진인 특유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유방이 스치는 감각에 번서의 마음도 동해서, 그는 예하랑의 허리를 끌어 안고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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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서의 노예들을 나이 순대로 줄을 세우자면, 당연히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예하랑이 1등이다. 그 다음이 당여월(올해로 서른, 위기다!), 국무령&서봉(동갑이다), 금여화, 진소아(번서와 동갑), 국무향, 주자영&악산라 순이다. 다만 당여월 이하로는 나이차이가 고만고만해서 한두살씩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모두 번서의 의향도 있고 해서 나이 순대로 언니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번서는 원래는 동갑인 경우에도 생일이 앞선 쪽을 언니라고 부르게 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속세 시절의 경쟁자이던(그리고 지금도 경쟁자인) 서봉과 국무령이 동갑(서봉의 생일이 두달 앞선다)인 터라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언니동생 하긴 하지만 사실상 번서 아래서는 모두 입장이 동등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예하랑인데, 그녀는 나이도 많고 배분도 높고(현존하는 모든 백무련과 일부 창천교 문파 장문인들의 사조뻘) 무공 실력도 넘사벽으로 높은 터라 번서가 다른 노예들을 통솔하도록 [권위]를 부여해 주고 있었다. 그 권위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물론 노예가 번서의 호위를 서는 순번을 결정하는 일이다.

 

물론 모든 노예들은 언제나 번서에게 범해지는 것을 갈망하지만, 하루종일 침대 위에만 머물 수 없는 그는 외유가 잦다. 그때 같이 외출하는 것이 바로 호위 노예들인 것이다(그동안 희롱을 당할수도 있고, 야외에서 할수도 있다). 그러니 한순간이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어하는 노예들에게 있어, 이 순번을 결정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된다. 무공 실력으로도 압도당하고 이런 권력도 있는 만큼, 당여월을 비롯한 다른 노예들은 두말없이 예하랑에게도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예하랑은 번서가 자신에게 부여한 권위의 중요성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칫하면 질투 등으로 얼룩질 수 있는 노예들 사이를 큰언니로써 원만하게 중재하며, 호위 순번 역시도 불평의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번서와 함께 무공 연구를 한다던가, 그의 의술 실험에 자원한다던가, 너무 돈을 쓰는데만 열중하고 있는 번서를 대신해서 구멍이 나기 직전인 살림을 챙긴다던가, 이래저래 사실상의 안주인으로써 바쁜 그녀였다.

 

또한 예하랑의 체액은 다른 노예들의 체액보다 훨씬 더 번서의 병증에 대한 진정 효과가 높았기 때문에, 이래저래 번서로써는 그녀를 노예중 필두로 삼을 이유가 충분했다. 번서는 처음에는 노예들의 피를 뽑아 마셨으나, 곧 음액이나 젖에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이후로는 모은 노예들이 그 유방의 크기와 상관없이 젖을 분비할 수 있도록 처치가 베풀어져 있었다.

 

상주에서 소백강이 크게 휘며 유속이 느려지는 지점에 위치한 작은 어촌인 제물포(濟勿浦)는 다른 큰 포구들과 달리 번서의 배가 정박할 만한 선착장도 없어서, 보통은 지나치는 곳이다. 번서도 이미 몆번이나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평상시는 어떤 마을이건 저녁무렵에는 밥을 짓는 연기가 오르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정상이고, 농사든 고기잡이든 간에 일을 정리하는 해질 무렵이 가장 번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번서가 지나치는 제물포의 저녁은 너무 조용했다. 밥짓는 연기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개나 닭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기에 오히려 너무 눈에 뜨이는 터라, 번서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로 하고 제물포에 최대한 가깝게 배를 대고 경공을 써서 선착장까지 날아 갔다.

 

" 진짜 너무 조용하네요. "

 

" 인기척도 없어요. "

 

번서의 좌우를 담당한 당여월과 서봉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단련된 감각 만으로도 마을이 텅 비어 있음을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환술로 감각을 확장하고 있는 번서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예들은 불안감 정도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지만, 번서에게는 분명하게도 사악한 힘의 악취가 느껴졌다.

 

이 작은 마을을, 무엇인가 몹시 사악한 것이 쓸고 지나간 것이다.

 

" 무언가 안좋은 것이 숨어있다. 조심하거라. "

 

" 네 주인님. "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사라진 마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개와 닭과 소도. 그들은 모두 마을의 우물가에 모여 있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의 시선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번서는 곧 그들에게서 전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시체였던 것이다.

 

번서는 상대가 시술사(屍術使)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시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술은 그리 큰 도력을 요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수하를 만들어 부릴 수 있기에, 비용대비 효율이라는 점에서는 몹시 괜찮은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은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사악한 수법이라는 이유로 술자들 사이에서도 금기시 되어 왔고, 황국에서는 아예 그 강시술 자체가 불법이다. 그 강시의 종류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용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지며, 알려진 시술사들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악당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갈천휘의 제자인 만큼, 번서는 강시술에 호감을 가지지 않는 쪽이었다. 무고한 민간인을 죽여서 강시로 만들어 전력에 보태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 이런이런... 손님이 오셨군. "

 

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정자 양식의 건물의 지붕 위였다. 번서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중년 초입의 색국인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번서가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온통 빛을 반사하는 새카만 재질로 이뤄진 그것은 마치 해녀들이 입는 물옷 같아 보였다. 그가 시술사라는 사실은 불문가지였다.

 

" 약간 이른 감은 있지만... 뭐 어때. 그나저나 괜찮은 계집들이로군. 그리고 배까지... 이렇게 고마울데가. "

 

시술사가 번서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전신으로부터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번서는 상대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막 뛰쳐 나가려던 당여월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난번 처럼, 격검부터다.]

 

" 네, 주인님! "

 

[서봉, 너는 방어 담당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근처에 오는 놈부터 처리해라]

 

" 네, 주인님! "

 

시체들이 움직여서 번서 일행을 포위해 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시술사의 손으로부터 시커먼 요력의 덩어리가 날아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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