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MC -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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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령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번서가 새로운 노예가 되기 직전인 예하랑의 피를 증류하는 작업을 어느정도 마쳤을 때 였다. 대략 사시(12~14시) 쯤이었기 때문에, 번서는 간식을 겸한 육포를 먹으며 조교삼아 당여월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양순해진 이 새로운 노예의 귀여움도 그가 먼저 지배하는데 성공한 다른 애완노예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그녀를 조교하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조교라 해도 별것은 아니다. 소변을 보는 것을 허락해 준 다음 당여월의 에쁜 가슴을 써서 자신의 발을 문지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발 뿐 아니라 다른 장소도 비비어 문지르게 하지만, 일단은 발부터다. 그 일을 하는 도중에 국무령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
이즈음 번서는 여러가지 편리한 술법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 전서구도 그중 하나였다. 미리 주문을 써 둔 종이를 접으면 새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종이의 뒷면에는 미리 먹물이 담긴 뚜껑을 가진 휴대용 세필로 용건을 적는다. 도착한 새가 다시 종이로 변하면 주문 글자는 사라지고 후에 적은 글만이 남는 것이다. 이러면 환술을 쓸줄 모르는 번서의 노예들도 빠르고 편리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
" 상가집에 가족이 아닌 수상한 문사가 들어와 이틀째 묵고 있다는군. "
" 환희성교의 잔당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들은 보라색 수실 장식으로 서로를 구분했었습니다. 확인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
전서구를 다시 보내기 보다, 번서는 직접 행동하기로 했다. 당여월의 말대로라면 환희성교는 번서와 비슷하게 환술과 독(그리고 아마도 최음제)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일 것이고, 그의 노예들은 환술에는 저항이 있으나 아직 독이나 춘약(미약)에 대한 대비는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독 된다면 그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저자는 남생(襤生)인데요?... 환희성교가 아니라 쾌락당이었던 자입니다. "
변장(당여월은 남장)을 하고 상가집을 방문한 번서 일행이 마당 한켠의 평상 위에 자리를 잡았을 때, 당여월은 상주 옆에 앉아 있던 문사를 즉시 알아보았다. 그가 좀 더 캐 묻자 원래는 비적짓을 하던 자였지만 쾌락당에 투신했던 자로, 무공 실력은 보잘것 없지만 사람됨이 비열하고 손속이 잔인해서 주로 인근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일을 했다는 정보가 추가로 제공되었다.
" 환희성교랑은 연관이 없고? "
" 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독보다는 고문 전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쾌락당이 망하고 나서 살길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
하지만 번서가 한눈에 알아본 바가 있듯이, 노인을 죽음으로 몬 것은 상당히 강력한 지효성 독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앞뒤 정황을 끼워맞춰 보려는데, 번서에게 제공된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막 국을 들이키려던 당여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 헛!... 맹세코 밑장 빼기 같은건 안했어요, 주인님. "
" 농담은 그쯤해 두고, 먹지 마라. 국물에 독이 들어 있다. "
전음으로 당여월을 멈춘 다음 화장실을 핑계로 일어선 번서는 집의 뒤편을 돌아 부얶 가까이에 몸을 숨기고 안을 엿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촌 아낙들이 지극히 평범한 방식으로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서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음식 재료들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드나드는 음식상에서도 오직 국물이 있는 음식에만 독이 들어 있어 보였기 때문에, 마침내 번서는 물에 독이 들어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물에 독이 들어간 사실을 모르나보군...
" 실례합니다만, 물을 어디서 길어 오시는지요? "
음식을 나눠주고 있던 아낙에게 물으니 그녀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다는 답을 해 주었다. 그길로 번서는 상가집을 나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지로 향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올린 그는 맛가 냄새를 통해 물에 독이 풀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심각한데, 누군가 우물을 오염시켰군. 가열하면 독성이 약해지겠지만 생으로 마시면 위험한 수준이야. 아마도 죽은 사람들은 우물물을 직접 들이켰나 보군. "
"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요?... "
" 알아내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지. "
마을사람들의 급사와 전직 쾌락당 관계자의 연관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둘이 한번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길로 상가집으로 돌아간 번서는 측간을 가려고 자리를 옮긴 남생을 화장실 앞에서 붙잡았다.
" 이보시오, 나좀 봅시다. "
" 무슨... 으헉!... "
팍!...
대사막 인근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당여월이 내공까지 실어 날린 칼자루의 일격이 명치에 박혔는데도 견뎌낸다면, 그자는 호체기공의 신일 것이다. 헛바람을 흘리며 휘청거리는 남생의 뒷덜미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미 졸도해 있었다. 기절한 그자를 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국무령에게 짐짝 던지듯이 넘긴 번서는 곧이어 자신도 당여월과 함께 담을 뛰어넘었다. 그길로 가까운 숲으로 간 세명은 으슥한 바위 아래 자리를 잡고 남생을 깨웠다.
" 헛...당... 당여월?... "
" 그래, 오랜만이다, 남생. "
이제 번서의 애완 노예가 되어 코뚜레를 꿰고 있는 터라 면사 밖으로 눈만 내놓고 있었지만, 쾌락당 출신 답게 남생은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와 검집을 통해 당여월을 한번에 알아 보았다. 그녀는 검술 솜씨 만큼이나 손속도 모질기로 이름났던데다 남생 자신도 당여월이 축출된 사건에도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곧바로 저승사자를 만난 듯이 공포에 질렷다.
" 죽...죽은줄 알았는데. "
"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아 있지. 내게 하고싶은 말이 있을 텐데? "
" 그런건 없... 으헉!... "
옆구리로 날아든 당여월의 오른발 끝이 두치 넘는 깊이로 파고들면서, 남생의 허리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위액을 게워내며 기침을 하는 남생의 어께 위로 다시 옆구리를 후린 오른발을 올려서 쇄골을 제압한 당여월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써서 그의 무릎을 지그시 눌렀다. 그 재빠르고 단호한 손속에는 번서도 놀랐을 정도다.
" 으아아아아!... 그, 그만, 말할께, 말 한다고!... "
" 진작에 그랬으면 필요없는 고통을 당하진 않았겠지? "
" 으으... 실은... "
번서가 [독]이라고 판별했던 것은 광물의 일종이었다. 혈석(血石)이라 불리우는 반투명한 붉은색 광물은 황국의 특산으로, 단단한 결정을 이루는 것은 보석으로써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갈아서 정제하면 이상적인 유약의 재료가 된다. 이 유약이란 도자기를 굽기 전에 발라서 광택을 내고 방수처리를 하는 중요한 약품으로 그 가치가 몹시 높다. 다만 이 혈석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고, 활석을 정제한 물은 독성을 띄게 된다. 섭취하면 호홉곤란이나 심각한 마비 증상을 수반하며, 장기간 섭취하면 심각한 병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자산의 중턱에는 이 혈석 광맥이 있었던 것이다. 군수물자로 중요한 철은 말할것도 없고, 금은을 포함한 모든 광물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관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허가를 받으려면 광물의 종류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하고, 시시콜콜 조사도 받아야 했다. 또한 지금같이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이 있다면 그 지역에 대한 이주나 보상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돈 많이 드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생은 이 광맥을 밀채(謐采)하는 무리에 속한 정탐꾼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상가집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던 까닭은 마을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한 감시겸 협박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환희성교의 무리로 가장한 것도 그런 협박용이었다.
"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수는 없지. "
" 으으으... 제발 살려줍쇼... "
" 죽이진 않겟다. 하지만 너는 지금 네 무리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해라. 내일 아침까지 광산을 비우고 모두 퇴거하지 않으면 먼저 죽은자들을 부러워하게 될것이라고 말이다. "
남생이 불알에서 요령소리가 울릴 정도로 빠른 뜀박질로 도망치는 것을 지켜보며, 번서는 국무령을 시켜 그녀석의 뒤를 밟도록 했다.
" 그들이 내일까지 광산을 비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 두고 보는 것이다. 내 말에 놀라 밀채를 그만두고 도망칠 정도의 무리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마음대로 처분해도 괜팒은 무리라는 뜻이니 손에 인정을 두지 않아도 된다. "
말을 하면서 당여월 옆으로 다가간 번서는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 아아아... "
" 너조차도 기회를 얻었지. 그렇지 않느냐? "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의 주인님의 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쾌감 때문에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입가로 한줄기 군침을 흘리며, 당여월은 정신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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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경의 병세가 호전되어 가는 동안, 내내 그녀의 간호를 맏았던 서봉과의 사이는 꽤 친밀해져 있었다. 서봉을 [언니] 라고 부르며 따르고 의지하는 경운경의 모습은 딱 그 나이 또래의 소녀로 되돌아 가 있었다.
" 이제 괜찮아진것 같군... 어디 좋은데 정착시키기만 하면 되겟어. "
경운경의 상세가 호전된 것을 확인한 번서가 선실로 돌아와 말하는 것을 들은 서봉은 번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녀도... 주인님의 애완 노예로 삼아 주시지 않으시나요? 이미 상공이라고 부르고 잘 따를 정도인데... "
" 그녀도 나도 황국의 권력에 의해 가족이 희생당한 피해자야. 동병상련하는 사이인 셈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직 나이도 차지 않은 소녀를 탐한다면, 그건 짐승 이하의 무언가일 뿐이지. "
그리고 아청법에도 걸릴테고.
마지막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서봉은 번서를 다시봤다는 듯한 눈치였다. 쓸데없는 오해를 했다는 죄목으로 잠깐 혼을 내 줄까 하다가 단념한 번서는, 그녀를 불침번 임무로 보내고 난 다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목록을 정리해 보았다.
일전에 마왕성의 창고를 털어낸 덕분에, 번서의 재정상태는 제법 풍족해져 있었다. 금편 스무개가 든 돈궤는 몹시 무거웠지만 운반하느라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경도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하거나 경도 최고의 기루를 드나들며 호사를 부린다 해도 몆년은 너끈히 지탱할 수 있었고, 평범하게 이대로 한세월 보낸다면 아마 삼대를 써도 다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부수입들. 특히 예하랑이 몸에 걸치고 있던 패물들은 몹시 고급품이라 비싸게 받을 수 있었다.
돈을 버는 만큼이나 쓰는것 역시 중요하다. 경운경을 정착시키는 일도 돈을 값지게 쓰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합포 포구에 머무는 동안 번서는 그녀의 정착지를 고르기 위해 꽤 신경을 썼는데, 이 주변은 온통 산이라 장원이 들어서기에 적절한 땅도 아닌데다 나와 있는 매물도 없어서, 그는 강 건너편에 있는 가포(家浦)까지 가서 대리인을 세워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경운경의 상태를 자주 살펴보려면 되도록 포구에서 가깝고 사람이 자주 드나들어 비교적 안전하며 어떤 종류의 소출만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곳이어야만 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고르는 일이니만큼 그는 몹시 까다로웠다. 대리인이 보내 온 매물들의 상태가 적힌 서류들을 꼼꼼히 훝어보는 동안 해가 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날의 저녁식사 당번은 국무령이었지만, 그녀는 바깥 임무를 맏고 있었기에 당여월이 대신 했다. 경운경까지 데려와서 함게 식사를 하는 동안 번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착 계획에 대해 경운경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저는 상공과 함게 하고 싶어요... "
" 고집을 피우는것은 좋지 않소 경 낭자. 내 여행은 윤숭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이건 위험한 정도가 아닐거요. 그리고 정말로 날 돕고 싶다면 안전한 곳에서 병을 이기고 경 낭자에게 알맞은 무공을 익혀 정순하게 한 다음의 일이지, 지금처럼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상태로 동행하고 싶다고 떼를 쓴다면 나를 돕는게 아니라 방해하는 셈이 되는 게요. "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다. 경운경은 풀이 죽었다. 하지만 번서는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알고 있었다.
" 내가 별일 없는 한 자주 경 낭자를 찾아서 안부를 확인할 것이오. "
" 정말이시죠 상공? "
두번을 더 확인해 오는 경운경에게 거듭 확언해 준 다음, 번서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여자다운 수다를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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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교대를 위해 당여월을 보내고 난 지 반시진도 되지 않악 국무령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하루종일 번서를 거의 보지 못해서 여러가지로 안달나 있던 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로써의 그녀의 일과들을 점검해 주고 난 다음, 약간 아쉬워하는 그녀를 재웠다. 이는 서봉도 마찬가지로, 그날은 종이 인형 허수마비들을 대신 불침번으로 세우고 그녀를 일찍 재웠다. 내일 아침에 남생이 포하된 밀채꾼 무리들과 칼부림을 벌여야 할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경운경을 포함한 여자들이 모두 잠에 든 것을 확인한 다음, 번서도 운기를 하고 석매리와 갈천휘의 저작을 다시 한번 통독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은 눈부시다고 할만큼 날씨가 좋았다. 이른 아침 그를 깨운 것은 당여월이 보낸 전서구로, 거기에는 남생의 무리들이 퇴거할 기미가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간에 대해 그리 높은 기대치를 가지지 않게 된 지가 오래인 번서는 실망하는 일 없이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침 식사의 준비를 위해 당여월을 불러 들였다.
노예들이 배설을 보이고 씻는 등의 일과를 끝마칠 동안 번서도 무장을 갖추었다. 경운경은 얌전히 배를 지키는 일을 맏았다. 또한 경운경에 대해서는, 그녀가 먹을 탕제를 미리 몆첩 달여놓은 다음, 늦어질지도 모르니 때가 되면 데워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노예들과 함께 배에서 내려 산을 향했다.
밀채를 하는 광산은 목책과 망루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경계가 몹시 삼엄했다. 그곳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계곡 맞은편 비탈에 있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망원경으로 광산을 살핀 번서는 무장한 자의 수가 서른명은 족히 되는 것을 확인했다. 사냥꾼인지 총을 들고 있는 자도 두명 있었다. 이정도 인원이면 무공을 모른다 하더라도 위험할 수 있다. 좋은 도구와 효과적인 전술을 채택하고 지형의 이점에 기대면, 아무래도 무공만으로 불리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시간은 많았다. 번서는 그대로 그 언덕에 자그마한 제단을 쌓고 주문을 외우며 하늘에 기원을 시작했다.
번서가 가진 안개의 술법은 두가지다. 시야를 차단할 뿐 아니라 행동을 제약할 정도로 끈적한 안개를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두 술법의 효과가 같지만, 그 지속 시간 부터 차이가 난다. 주문만으로 불러오는 안개는 시전에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데다 기껏해야 반시진 정도만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비는 기원제를 지내 불러오는 안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개를 불러올 때 집중해야 한다는 점은 같지만, 주문을 읇고 제물을 태우는 의식을 치루는 정도에 따라 적게는 몆시진, 길게는 며칠이고 몆달이고 번서가 원하는 만큼 그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발동되면 다시 제를 지내기 전까지 집중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후자의 안개는 그것을 재료로 여러가지 다른 응용도 가능했는데, 그중에서도 번서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안개 속에서 갖가지 이매망량(魑魅魍魎: 도깨비와 요괴들을 총칭하는 말)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환술에서와는 달리, 이 이매망량은 실제의 안개를 재료로 [만든] 것이라 환상이 아니며, 때문에 당연하게도 실제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물론 피해를 받을수도 있지만, 공기나 다름없는 안개로 만들어진 것이니 흩어졌다 다시 뭉치면 그만이다.
" 솰라쏼라... "
번서의 주문이 이어지는 동안 광산의 입구로 안개가 짙게 깔렸고, 그 안개 속에서 반투명한 거대한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 으... 으아아 괴물이다!... "
쿠웅!...
" 히에에에!... "
쿠웅!...
콰지직!...
도깨비들이 광산 입구에 둘러친 목책을 두들겨 부수는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기둥을 이용해 조잡하게 세운 망루가 차례로 안개 속으로 쓰러지는 광경이 번서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쓰러진 목책 사이로 끈적한 안개가 스며들었고, 마침내 광산 내부까지 완전히 안개에 뒤덮였다. 도망치든 도깨비와 맞서든, 밀채꾼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그 안개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는 동안, 번서는 노예들과 편안히 앉아서 기다렸을 뿐이다.
노예들 조차 번서가 그런 대단한 술법을 쓰는것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동안, 상황이 대충 정리되었으리라 판단한 번서는 다시 주문을 외웠고, 안개는 서서히 물러갔다.
번서는 안개가 완전히 걷히기를 기다려 노예들을 데리고 광산으로 갔다. 드러난 폐허 속에 이리저리 흩어진 밀채꾼들의 시체는 모두 스물일곱 구. 치우는 일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시체들을 뒤져 쓸모있는 것들을 수거하고 모두 한데 모아 쌓아놓고 불에 태우는 동안, 피투성이가 된 생존자들이 노예들의 눈에 뜨여 번서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너무 공포에 질린 나머지 광산의 수갱으로 뛰어든 덕에 다리가 부러지는 등 엄중한 부상을 입었지만, 덕분에 번서가 불러일으켰던 죽음의 안개에 덮쳐지는 꼴은 면한 자들이었다. 모두 세명. 그중에는 남생과 밀채꾼들의 장부 관리자도 있었다.
" 밀채를 했다면 물건을 사 주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너희와 거래하는 자가 누구냐? "
" ... "
번서는 두번 묻지 않았다. 먼저 죽은 자들을 부러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여월과 서봉이 나서서 생존자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동안, 광산 내부를 뒤지던 국무령이 거래 장부를 가지고 왔다.
우드드득!...
뿌득!...
" 아아악!..., 말, 말할테니 제발 그만!... "
" 나는 기회를 줬고, 너는 받지 않았어. 두번은 없다. 그리고 나는 산자가 죽은자를 부러워하게 될것이라 미리 경고했었지. "
포로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발가벗겨졌고, 아직 남아있는 방책 밖에 못박혔다. 그들은 태양과 바람에 노출되고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는 형식의 처형을 당하게 될것이다. 번서는 그 실행을 노예들에게 일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을 통해 더러운 일을 그녀들에게만 전담시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몸소 입증해 보였다.
죽어가는 포로들의 신음성을 음악삼아 즐기며, 번서는 장부를 검토했다. 누구와 얼마를 거래했는지를 약자로 표시해 준 터라 당장 거래자들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수완이 좋은 자가 있었는지 꽤 여러곳으로 혈석과 정제한 혈석 가루를 팔고 있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번서가 밀채꾼 일당의 거래 정보를 원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도 거액을 가지고 있지만, 돈줄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보석이 나오는 광산은 누구에게나 쓸만한 돈줄이다. 다만, 번서도 이 밀채꾼들 만큼이나 대놓고 나설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신세가 아니니 밀채 자체는 유지한 채 그 방법만 바꿀 생각이었다.
그가 밀채를 하기로 작심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채굴한 혈석의 판로를 찾는 일이었다. 또한 이제 밀채꾼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광산에서 일할 사람도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번서는 목책에 나무 못으로 손발을 못박힌 채 신음하던 남생을 끌고 약수골로 갔다. 무슨 변고인가 싶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모든것은 이자가 포함된 밀채꾼들이 마을의 우물에 독을 풀어서 생긴 일입니다. "
모든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댓가로 남생에게는 분노한 마을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형태의 [빠른 죽음]이 주어졌다. 그리고 남생을 패죽인 마을사람들에게, 번서는 몆가지 제안을 했다. 밀채꾼이 사라져 광산에서 일할 사람도 없으니, 농한기에 마을 청년들이 광산에서 일해 주면 밀채로 얻은 이득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관아는 내내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관아에 알려 광산을 폐쇄시키는 것 보다 이쪽이 더 매력적인 제안일 것이다. 촌장 이하 마을사람들 모두가 번서의 제안에 응한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로 해서 번서는 그동안 내내 신경쓰이던 존재인 경운경이 정착할 장소도 정할 수 있었다.
약수골 남자 중에 광산에서 일할 수 있을 만한 연배를 가진 자는 모두 열명. 그중에 여섯명이 밀채에 자원했다. 인원수가 부족한 감은 있었지만 사업의 시작은 크게 벌이지 않는 편이 좋은 법이다. 번서는 그들을 데리고 광산을 치우고 목책을 재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부서진 목책에 못박혀 있던 밀채꾼들도 마저 죽여서 태워 버리고, 광석을 정제한 물을 담을 큰 구덩이도 몆개나 파내고 김장할 때 쓰는 아홉말 들이 옹기를 시진에서 사와서 몆개나 묻었다.
이는 인근의 지하수에 독을 푸는 것이나 다름없는, 혈석 가루의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폐수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서가 죽인 밀채꾼들은 광석을 정제한 물을 그대로 광산 수갱에 버렸다. 때문에 약수골의 우물이 오염되었던 것이다. 광석을 정제하고 나오는 폐수를 땅에 묻은 장독에 부어 넣고 해로운 것들을 침전시킨 다음 물만 빼서 버리면, 손이 좀 가기는 해도 마을의 지하수를 오염시킬 일은 없을 것이다. 자원한 장정들에게 그 이치를 설명해 주니 작업속도가 몆배는 빨라졌다.
광산의 준비가 되는 동안 밀채꾼들의 인원수와 숙련도를 감안해 예상 산출량을 계산해 낸 번서는, 그 예상액을 바탕으로 예전에 밀채꾼들과 거래하던 자들을 찾아 다시 계약을 시도했다. 암호로 되어 있었지만 장부에 거래 날짜와 장소가 기입되어 있어서 그들과 접선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종류의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찾아 오는 법이다.
세금이 붙지 않으니 시세보다 싸게 파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번서는 약수골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의미에서, 남아있던 혈석 가루를 판 돈을 인부들과 반분했다. 다만 마을 사람들 전체와 나누어 가진다는 조건을 달아서다(물론 직접 일하는 그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인무들이 은각 꾸러미를 들고 신이나서 마을로 돌아가고 나서, 번서는 경운경을 불렀다.
" 부르셨나요 상공? "
" 그래요 경 낭자, 낭자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소. "
경운경이 지금 병치레를 하고 있다고는 해도,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언행으로 보건데 사리에 맞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영특하다 할만한 구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광산을 경운경에게 맏겨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번서의 계획을 들은 그녀도 기꺼이 동의했다.
이후 경운경이 머무를 곳은 합포 포구에 팔려고 내놓았던 작은 저택이 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2층 구조에 지하실이 딸린 튼튼한 기와집이었다. 편의를 보아 줄 하녀를 구하고 목수와 미장이를 사서 집을 새로운 목적에 알맞게 고치는 동안, 그녀는 번서가 준 광산 장부를 통해 광산을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약수골 주민들, 특히나 밀채에 지원한 장정들과 혈석을 사줄 거래자들과도 안면을 틔웠다. 그들에게 있어 경운경은 번서의 대리인이었지만, 번서는 장차 그녀가 광산 주인이 되어줬으면 하고 바랬다. 나이로 보나 그 신세 내력으로 보나, 더이상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았으면 해서다. 물론 번서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기쁠 뿐인 그녀에게는 그런 의향을 숨겼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경운경도 병증에서 완전히 회복해서, 번서는 드디어 중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셈이 되었다.
" 자주 들러 주셔야 해요! "
" 물른이오 경낭자. 매월 말일에 전서구를 써 보내는 것을 잊지 마시오. "
" 네 상공! "
경운경과 약수골 대표들의 배웅을 받으며, 번서의 배는 합포 포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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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깨어났을 때, 예하랑은 자신이 전혀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사방이 보다 밝았다. 그곳은 번서가 거실겸 식당으로 삼고 있는 선실이었는데, 의자에 앉은 그의 좌우로 국무령과 국무향 자매가 서 있을 뿐 주변에는 그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부주의... 하시군요. "
" 믿음이 강하다고 해 두지. "
잠깐 반항해 볼 생각을 떠올린 예하랑이었지만, 곧 단념했다. 지금까지 당해 온 바로 판단해 보건데 번서는 절대로 무방비한 사내가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하반신에서 뻐근한 존재감을 과시해 오기 시작한 금삭과 항문 마개의 존재가 그녀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빼앗고 있었다.
" 너는 괴롭혀지는 것을 즐기는 변태야. 그렇지? "
" 네... "
순순히 수긍하는 예하랑. 그녀는 어느새 공손히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그리고 너의 사회적인 지위로 보건데, 너를 이렇게 다뤄줄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지. 그말인 즉슨, 너의 그 음탕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나 한명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 옳으신 말씀입니다... "
" 그럼 이제 너의 각오를 들어 볼까? "
예하랑은 잠시 고심한 후에, 번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오체투지(五體投地)라는 최상급의 경의와 복종의 표시다.
" 저 예하랑은... 주인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굳게 맹세합니다. 제발 이 천박한 노예의 간청을 외면치 마시고... 저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번서는 국무령을 턱짓으로 부려 예하랑의 등 뒤로 돌아가게 한 다음, 비단 끈을 그녀의 목에 감도록 시켰다.
" 내가 널더러 죽으라면 어쩧게 하겠느냐? "
" 죽겠습니다. "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이었다. 이미 번서에게 모든것을 속속들이 보이고 변태라는 사실을 자인한 마당에, 그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더 살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답과 동시에 국무령이 비단 끈을 당기기 시작하면서 숨이 막혀 왔지만, 이미 한갑자가 넘는 세월을 무공 수련에 몰입해 어지간한 고수들을 눈아래로 볼 정도의 절정의 경지에 이른 예하랑이다. 죽을 때 까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점차 시야가 까맣게 흐려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죽음을 맞을 각오를 다지며 눈을 감았다.
" 정말인가보군. "
번서가 다시 턱짓으로 국무령을 부려 비단 끈의 조임을 늦추었을 때, 예하랑은 이미 구할 정도 질식당한 참이었다. 까맣게 흐려지던 의식이 돌아오는 동안 몆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예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제 충성은 진심입니다, 주인님. "
" 그러면 더 하고싶은 말은? "
예하랑은 혀를 써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요염한, 쾌감을 갈구하는 성숙한 여인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번서를 올려다보았다.
" 저의 보지의 처녀를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
" 보지만인가? "
"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디라도 범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천박한 노예는 오직 주인님께 사용되기만을, 쓸모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 너의 각오가 그러하다면 너는 이제부터 내 노예이며 애완동물이다. 줄여서 애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 "
" 감사합니다. "
" 너를 위한 코뚜레를 꿰어 주기 전에, 네가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는 일을 해 주겠다. "
국무령의 손에 이끌려 침대 위로 올라간 예하랑은, 국무령 국무향 자매의 애무 세례를 전신으로 받았다. 처음에 그녀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번서가 시킨 일이니 만큼 애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 하아응!... 히아응!... 아응!... "
자매들, 특히나 국무령 자신은 존경하던 전대고인의 몸을 희롱해 떨어뜨린다는 요인 때문인지 엄청난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애무로 쾌락을 느끼게는 해도 결코 절정으로 이끌어서는 안된다고 번서에게 엄명을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하지는 않았고, 단지 애를 태우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일다경(15분) 정도 갔을까, 안그래도 쾌감에 약해 빠진 예하랑의 이성은 저만치 날아갔고, 그녀의 전신은 온통 땀과 애액과 눈물 투성이가 된 채로 번서에게 절정을 갈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 하아아...제발...견딜수가... 히으응!... 없습니다... 하응!... 이 이상하면 정말로...아흥!... 미쳐 버립니다, 주인님... 히아응!... "
예하랑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말하는 동안에도 색에 미친 백치가 되어버린 모습을 과시라도 하듯이 입술 사이로 채 다 수습하지 못한 군침 방울을 흘려내고 있었다. 번서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국무령 자매들은 예하랑의 좌우에서 그녀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좌우로 당겨 가랑이를 크게 벌리도록 했다. 다리를 벌린 자세를 유지하도록 가슴으로 누르면서, 손가락으로 붉은색으로 충혈된 채 젖어 있는 예쁜 음순을 한쪽씩 눌러서 옆으로 잡아당기는 것을 통해 애액이 눅진눅진 흘러나오는 진주빛 속살과 그 안쪽 깊은 곳으로 통하는 어두운 구멍까지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은 모든 남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음탕한 본능에 지배된 여자, 그 자체였다.
진주빚 속살 사이로 처녀막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지독한 자세였지만, 예하랑은 전혀 괘념치 않고 후배들의 손길에 적극적으로 응하며 허리까지 내밀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번서의 시선 앞에 노출한 채 그의 자지에 정복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노예가 되기로 맹세하고 범해 주기만을 바라기까지 타락한 이 아름다운 진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주인으로써는 실격일 것이다. 번서는 옷을 벗어던진 다음, 이미 성을 내고 있는 자신의 자지를 그녀의 보지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 히아아으응!... 히아아악!... "
푸슉!...
살짝 닿는 것 만으로도, 그러니까 번서의 자지가 보지 입구에 닿은 그 순간에, 자궁으로부터 터져 나온 무시무시할 정도의 쾌감이 보통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척추를 거슬러 올라가, 수십 수백의 벼락이 되어 그녀의 뇌를 강타하고 지졌다. 예하랑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절정했고, 곧이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진저리를 치며 전신을 경직시켰다. 하지만 번서는 그 강렬한 첫 절정을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고, 경련하고 있는 예하랑을 꽉 누른 다음, 허리에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푸슉!... 푸슉!.. 푸슈슉!...
예하랑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입을 딱 벌린 채로, 시간이라도 멈춘듯이 꼼짝하지 않았다. 보지에서 일어난 몆차례에 걸친 음액의 강렬한 분사만이 그녀의 시간이 멈춘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애액의 분사는 번서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흠뻑 적실만큼 많은 양에 기세도 대단하기 이를데 없었다.
" 으음... "
번서 역시도 꼼짝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예하랑의 보지 때문이었다. 귀두 부분까지만 삽입되었을 뿐인데 마치 두꺼운 쇠심줄을 여러겹 감고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조임에 붙잡혔던 것이다. 애액으로 윤활되었음에도 그 아찔한 감각 때문에 한동안 전진도 후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정도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보짓살의 강렬한 조임과 꾸물거림이 더 있은 후에, 마치 빨려들어가듯이 보지 안으로 [안내]되었다.
부북...
" 아으악!!... "
처녀막이 찢어지는 순간은 여자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순간이며, 남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양되는 순간이다. 예하랑의 보짓살의 꾸물거리는 움직임에 호응해 허리를 밀어붙인 번서의 자지가 그녀의 처녀막을 찢었을 때, 비로소 예하랑의 시간이 돌아 왔다.
" 주인님... 주인니이임!... "
비명을 지른 후, 눈물을 뿌리며 두 팔로 번서에게 매달리는 예하랑. 그녀는 이제 더이상 포로가 아니라 애완 노예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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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서는 침실에서 여섯 시진 동안 머물렀다. 꼬박 밤을 새면서 예하랑 뿐 아니라 노예들 전원을 차례로 범해 주었다. 감격에 겨워 울면서, 노예들은 각자 몆번씩이나 절정을 맞아 승천하는 기분을 진득하게 맛본 후에야 비로소 번서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 아으으... "
예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번서의 침대에 머물렀다. 아무래도 처녀 상실을 한데다가 가장 오랫동안 번서의 상대를 했기 떄문에, 어지간한 그녀라도 파김치가 되었던 탓이다.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나체를 비단 수건으로 닦아 주는 것도 번서의 즐거움이었다. [주인님]의 손길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면서 몽롱한 눈으로 그 손의 움직임을 쫒아 가는 예하랑의 얼굴에는 그윽한 만족감이 감돌고 있었다.
" 음,... 이제 잠시 눈을 붙여야겠군. "
먼동이 터 오는 것을 본 번서가 잠깐 선잠을 자는 동안, 예하랑은 자신의 배와 가슴을 그에게 베게로 제공했다. 또 한명, 그때까지 번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애완 노예인 국무향은 번서의 이불 역할이었다.
잠들기 전에, 예하랑은 번서로부터 자고 일어나서 코뚜레를 꿰어 주마 하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번서의 노예가 되었다는 가장 드러나는 표식이 코뚜레였던 것을 기억해 낸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떤 지경에 처하게 될 지를 상상하며 아찔한 공포와 굴욕감을 맛보았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처지는 그의 베게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남자에게 사용되는 것을 쾌감으로 받아들이고, 그 쾌감을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갈구하게 되어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했지만, 그 한심하고 비참한 지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런 굴욕조차 쾌감이 되도록 가르쳐진 덕분이다.
이미 그녀는 번서가 주는 쾌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그 쾌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자그마치 70년을 지켜오고 있던)순결을 바친 남자에 대한 여자 본연의 애착까지 더해 지면서, [주인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마치 개에게 첫 주인이 각인되는 것 마냥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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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예하랑의 경우 역시 번서의 [애완 노예]로서의 삶의 시작은 노예다운 장신구를 갖추는데서부터 시작했다.
이미 젖마개와 금삭, 항문 마개를 모두 착용한 상태로, 손을 등 뒤로 돌려서 얇은 비단 끈으로 결박되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다. 그녀즘 되는 고수라면 내공을 쓰지 않고도 얇은 비단 끈의 결박 정도는 우습게 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히 서봉이 이끄는 대로, 굵은 은제 바늘(그것은 거의 비녀처럼 보였다)을 촛불에 달구고 있는 번서 앞에 꿇어 앉았다. 그리고 마치 정말로 코뚜레를 꿰어지는 동물과 같이 등을 눌려져 강하게 제압당한 채로 바닥에 놓인 목침 위에 머리를 모로 한 채로 대어지고, 번서의 손에 그 코를 붙잡혔다.
무서움과 굴욕감으로 눈물짓는 예하랑. 그대로 머리채를 붙잡힌 다음, 그녀의 눈앞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은바늘이 지나갔다.
" 끄아아!... 아아악!!... "
마치 처녀막을 찢기우는 것 같은 극렬한 고통. 그나마 순결을 잃을 당시에는 쾌감에 취했었다. 그리고 살이 타는 냄새가 선실 안을 채웠다. 예하랑이 아무리 단련을 거듭해 인외지경에 이른 고수라지만 성기와 마찬가지로 코라는 기관은 단련할 수 없다. 거기에 후각이라는 감각이 집중된 그지없이 민감한 기관이다. 그런 곳의 생살을 꿰이는 것이니 아무리 그녀라도 강하게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제압이 확실하지 못했다면 번서와 서봉은 튕겨 나가고 그녀의 코는 찢어졌을 것이다. 이때 만큼은 내공을 쓸 수 없도록 제압당한 것이 그녀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예하랑을 달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고 들는 과정을 통해서, 번서는 진인에 대해 그가 몰랐던 사실 여러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 태초에는 어떠했을지 모르나, 지금 황국에서 사는 진인이라는 존재는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씨 집안은 진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고, 몆대에 걸쳐 가끔 진인으로 태어나는 여자아이가 생긴다고 했다. 비슷한 다른 가문이 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지만, 진인의 혈통을 자칭하는 가문은 많다. 그중 얼마쯤은 정말로 진인이 태어나는 집안이 있을지도 몰랐다.
둘째, 예하랑만의 특수한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진인으로써 각성하기 전까지 그녀는 완전히 다른 인간과 똑 같았다는 점이다. 13세에 진인의 피가 처음 깨어났을 때, 그녀는 몆달간을 근육과 골격이 인간에서 진인으로 바뀌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 끔찍한 고통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녀는 그때까지 결코 도전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무공의 경지에 도달할 육체적 그릇이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세째, 분명 진인은 그 장구한 수명 내내 성년에 달한 직후의 젊디 젊은 용모를 계속해서 유지하지만, 엄연히 수명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예하랑보다 앞서 태어난 예씨 집안의 다른 진인인 예영방(英芳)은, 예씨 집안의 수호자로 300년 정도를 살다가 후손들이 모인 앞에서 죽었다고 했다. 향년 319세. 죽었을 당시에도 용모는 젊은시절과 똑 같았다고 했다. 그녀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난 것이 예하랑이다.
네째, 예영방의 특수한 경우일지는 모르나, 그녀는 300년 이상을 살면서 두명의 남편을 맞아 도합 100년에 가까운 결혼생활을 했지만, 한번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진인의 피가 발현되어 버리면 그녀들은 더이상 인간의 씨앗을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번서는 피임을 하고 있었다. 가임확률이 높아지는 날을 피하는 경험법과 수정란의 착상을 방지하는 약을 병용하는 것을 통해서다. 아직 복수가 완료되지 않았는데도 아이를 가지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고, 게다가 방패로 써야 할 노예들을 꺼꾸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테니 본말이 전도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번서에게는 많은 이득이 있었다.
예하랑에게 채화술을 썼을때, 번서는 첫 대주천으로 임독이맥이 뚫렸다. 코피를 콸콸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동석해 있던 서봉이 대경실색을 했으나, 당황하는 그녀를 진정시킨 다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본 번서는 예하랑에게서 전달받은 내공 때문에 자신의 임독이맥이 뚫렸으며, 기혈의 운행이 훨씬 더 풍부하고 원활한 형태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임독이맥의 타통이란 소위 고수자라 불리우는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도 드물고 부러운 일이다. 신체의 대맥이 하나로 합쳐져서 전신의 기혈의 흐름이 막힘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곧 같은 내공을 가지더라도 훨씬 더 그 강약의 조절의 폭이 넓어지고 효과적으로 내공을 유지, 보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하랑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선지 오래이나 대사막을 주름잡던 기존의 3인방은 아직 그 경지에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그와는 별개로, 번서의 설명을 들은 서봉과 예하랑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축하드려요 주인님! "
"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
번서는 서봉의 유방을 한 손으로 붙잡아 끌어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온 다음, 예하랑의 항문을 범하고 있던 자지에 다시 내공을 집어 넣었다. 곧바로 발정하는 노예들에게, 번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너희들이야말로 축하할 만 하지. 이제 보다 더 오래, 그리고 강렬하게 범해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
" 하으아... 으앙... 그, 그러하군요!... 아항!... "
" 아아앙!... 히응!... 감, 감사합니다!... "
그리고 번서는 채화술을 속행했다. 예하랑의 70년 내공은 내공은 정말로 가공할 만한 것이라, 임독이맥을 통하게 만드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총 세번 대주천 하는 동안 번서는 엄청나다 싶을 정도의 내공의 증진을 보았고, 이후로도 예하랑을 범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간간히 채화술에 임한 결과 체질과 근골까지 바뀌었다. 진인의 특성 중 일부를 나눠받은 것이다. 물론 상승무공을 익히는데 적합하지 않은 몸상태야 그대로지만, 독과 병에 저항력이 강해지고 회복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심지어는 일전에 예하랑의 공격에 의해 부러지고 깨졌던 이빨까지 다시 자라났을 정도다(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기쁜 변화였다).
물론 번서가 예고한 대로 잠자리에서의 흉폭함(예하랑이 그렇게 표현했고, 이에 다른 노예들도 동의했다)도 한층 더해졌다. 그때까지 번서의 주 특기라면 노예들을 쾌락에 취하게 만든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체력으로 압도하는 것이었는데, 작정하고 시작하면 세 시진 정도는 기본이고 기분이 좋을 때는 여섯시진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지구력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노예들의 절정은 번서의 압도적인 힘과 테크닉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인인 그에게 범해지고 있다는 정신적인 요인이 더 컸다. 때문에 절정의 끝으로 밀어올려진 후에도 잠시 졸도하고 나면 곧바로 일어나서 무공을 펼치는 일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바뀌었다. 여자들은 이제 허리가 빠져 버릴 정도로 강렬한 육체적인 타격도 함께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내공이 강해진 번서는 지구력 뿐 아니라 힘과 기교까지 늘었고, 안그래도 정신적인 요인으로 쾌감이 증폭되는 마당에 온갖 기교와 체위가 가미되어 그야말로 혹독하기 그지없는 삼연타를 얻어맞게 된 노예들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수련이 깊고 내공이 탄탄한 예하랑조차도 한번 번서에게 범해지면 범해진 적어도 한시진 정도는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을 정도고, 다른 노예들도 기본 두시진 이상 아득한 쾌감의 여운을 만끽하게 되었다.
" 하으아아앙... "
" 아으응... "
번서의 좌우를 차지한 채 꿈결같은 쾌감에 취해 있는 노예들의 게슴츠레한 눈에는 지극히 만족한, 행복감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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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랑의 주 무공은 암영각(巖影脚)이라는 발기술이 주가 된 권각술에 단검을 보조로 쓰는 투로볍이었는데, 그녀는 살생을 피하고자 단검 대신 부채를 사용했다. 이 부채도 은으로 짠 살 위에 붉은색의 천잠사로 짠 비단을 이중으로 붙여 만든 것이라 대단히 귀중한 물품이라는 사실을 한번에 알 수 있었는데, 다름아닌 황국의 십대보물 중의 하나인 풍진(風鎭)이라 했다. 예하랑이 백무련을 만드는 등 무림을 주유하던 시절에 얻은 물건이었다.
이 풍진의 의 한쪽 면은 백년전 황국 제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이두(李杜)가 쓴 유오색가(留五色歌)라는 시가 금 글씨로 새겨져 있었고, 반대편에는 이두와 동시대 인물이자 그의 친우로 황국 제일의 화가라 일컬어지는 백보(白甫)의 몽오색도(夢五色圖)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재질도 재질이지만 이런 거장들의 작품까지 함께 붙어있는 탓에 그 가치로 따지자면 성 하나를 줘도 부족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번서는 전문적인 평론가는 아니었으나 문장과 그림이 모두 걸작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욕심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억지로라도 빼앗고자 할만한 보물이었지만(그리고 예하랑은 이제 번서의 노예가 되었으니 달라면 기꺼이 바쳤을 터이지만), 번서는 예하랑이 노예가 된 기념이라며 그 부채를 그녀가 그대로 지닐 수 있도록 돌려주었다. 이에 예하랑은 지극히 감격했는데, 다른 노예들의 물건도 그것이 금붙이라면 빼앗아서 돈과 장신구로 바꾸었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보유를 인정하고 있었으니 번서의 입장에서는 그저 하던대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 그림으로만 봐도 절경이군. 언젠가 오색림의 경치를 즐기러 가고 싶구나. "
" 주인님께서 오색림으로 가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품안에서 아양을 떠는 진인의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며 조금 가볍게 즐긴 다음, 번서는 갑판으로 나갔다. 마침 바람의 방향이 바뀐 탓에 서봉과 당여월이 돚의 방향을 바꾸는 작업 중이었고, 국무령은 키를 잡고 있었다. 그녀 옆에서 의젓하게 개꼬리(항문 마개에 꼬리 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으로, 국무향 전용의 항문 마개다)를 달고 엎드려 있는 국무향은 번서를 보자마자 잽싸게 기어와서 그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 아앙... 응... "
" 그래그래, 착하구나. "
" 냥!... "
번서는 국무령과 예하랑을 교대시키고, 국무령 자매를 데리고 선실로 내려가서 그녀들을 재웠다. 이제 노예가 다섯, 그중에 넷을 교대로 돌릴 수 있게 되었기에, 노예의 교대 일정을 짜면서도 틈틈히 좀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깨어있는 노예가 둘, 준비하는 노예가 하나, 그리고 자는 노예가 하나. 이런 식으로 네시진(8시간)씩 돌아가며 번을 세웠던 것이다.
당초에는 뱃일이라고는 전혀 경험이 없던 예하랑도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번을 서며 다른 노예들과 어울리면서 빠르게 키를 잡는 법이나 돚줄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금새 제대로 된 하나의 노예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강의 하류로 내려가는 길이다 보니 배의 속도를 어떻게 빠르게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배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느냐(안전 때문에)가 문제가 되어, 번서는 해가 지면 강변 근처에 닺을 내리고 항해를 쉬도록 했다. 그렇게 쉬엄쉬엄 간 탓도 있어서, 중주의 경계에 해당하는 월영(月影)포에 도달했을 때는 처음 예상을 잡았을 때보다 닷새가 더 지난 칠월 초하루가 되었다.
" ... "
월영포에 도착했을 무렵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배의 이물에 서서 항구를 보고 있자니 일꾼들이 등대 역할을 하기 위해 포구 어귀에 세운 높은 장루에 설치한 기름 등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강 위로 지면서도 아직은 새빨갛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석양을 등진 채, 번서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번서가 국무향을 통해 인간을 제압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처음 무림에 출도할 생각으로 자산성에 들어왔던 때부터 계산하면 벌써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동안 네명의 노예를 추가로 얻었고, 윤숭의 앞잡이라는 마영달과 마봉춘 부자를 죽였으며, 진소아라는 여협과 친분을 쌓고, 경운경이라는 재기 넘치는 협력자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윤숭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중주의 경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번서의 눈에 이물에 푸른색 비단을 씌운 초롱을 단 거룻배 하나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푸른 초롱은 관원이 타고 있는 배라는 표식이었고, 이 경우 도강사(導江使; 포구 관리인격인 역주 휘하의 항구 길잡이)가 타고 있을 것이다. 작은 포구였던 합포와는 달리 월영포는 제법 큰 읍이고 중주의 경계이다 보니 많은 선박들이 드나드는지라, 드나드는 배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물 사다리를 내려 도강사가 배에 오르는 것을 도운후, 그의 지시에 따라 포구의 구석에 배를 정박시킨 번서는 인심 좋게 도강사의 허리춤에 은각 하나를 찔러넣어 주었다.
" 날도 저물었는데 따뜻하게 데운 술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
" 인정이 넘치시는 공자시군 그래,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강나루에서 포삼(布三)을 찾으시오. "
"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해 가시길. "
엄격히 절차를 집행하자면 도강사가 안내한 배가 포구에 닿으면 배의 도착 일시를 기록한 후에 승객과 적하를 검사하고 문서로 만들어 남겨야 한다. 하지만 황국 전체에 부정이 만연해 있다 보니 인정(人情; 뇌물)이 쉽게 먹혔다. 번서가 서류의 공란을 채우는 동안(물론 번서는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기다려 준 다음, 도강사는 배다리를 건너 자신의 사무처로 되돌아 갔다.
이미 해가 저물었기에 읍내에 나가는 것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침실로 돌아간 번서는 그날의 불침번인 당여월을 갑판으로 올려보내고 예하랑과 서봉을 데리고 즐기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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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실을 나와 갑판에 오른 번서를 기다리던 것은 자욱한 안개였다. 대사막에서는 자연적인 안개가 드물다. 자신이 펼치지 않은 자연적인 안개를 오랜만에 보는 번서는 마찬가지로 안개가 잦고 비가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