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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무협야설 MC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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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813 회 작성일 24-01-21 09: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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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공이란 시간을 들여 가며 쌓아올리는 것이다. 몆년이니, 몆갑자니 하는 것이 기준인 이유도 전통적인 수련 방법인 토납법으로 어떤 경지 까지의 내공을 쌓기 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니 내공에 관한 시간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들이는 만큼 확실하게 보답해 주는 것 또한 내공이다. 같은 무공을 사용한다면 내공 수위의 고하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평범한 무공이라 해도 내가고수가 펼친다면 그 위력과 기세의 차이가 분명했다. 물론 이 경우엔 그만한 효과를 보기 위해 무공 전반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수반되지만, 대체로 내가 고수의 경지에 달할 정도의 수련을 거치면 초식의 운용의 묘는 자연히 깨닫게 되는 법이다.

 

게다가 큰 문제가 없는 한 수련을 하면 할수록, 내공은 나이와 무관하게 강해진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신체 능력이 떨어지고 약해지는데, 내공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것을 벌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 이상의 내공 수위를 쌓게 된다면,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다.

 

때문에 무림인들은 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한다. 영약이든 내공심법이든 이 과정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곧 더 강해지는 길이기에, 내공에 대한 욕구는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본능적인 것이다.

 

번서는 처음부터 무림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공을 시작한 것도 성인이 된 다음의 일이라, 이런 무림인들의 무조건적인 내공 욕심에 물들지 않았다. 아무리 내공을 쌓아 봐야 자신의 근골로는 상승무공을 펼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구암도에서의 탈출과 의술을 배우면서 깨우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 방식은 그에게 무공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깨닫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번서는 부족한 무공 실력을 메꾸어 줄 방법도 많았다.

 

우선 환술(幻術)이다. 환마라고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갈천휘의 진전을 전부는 아니지만 제대로 배웠고, 번서 자신이 가진 다른 능력(특히나 의술)로 그것을 강화시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구사하는 진법은 실제같은 환각을 보여줄 정도고, 술법으로 불러오는 안개에 독을 풀면 군대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술의 경지는 황국 제일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타고난 지력과 좋은 스승, 그리고 도덕의 굴레 따위는 벗어던진 생체실험의 반복으로 번서는 의술의 경지에 있어서만은 황국 제일, 아니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앞서의 환술까지 더해진 그의 독특한 의술은 환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의 기억(정확히는 꿈)에 자유롭게 파고들 수 있고, 감정과 감각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의 손에 떨어진 여자들의 철저한 복종과 충성은 그의 이런 재주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도구가 있었다. 금삭이나 젖마개 같은 도구를 고안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번서는 이런 쪽에 무척 재능이 있었다. 사실은 구암도를 탈출하기 위한 궁리에서부터 비롯된 이야기지만, 기존의 자원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수련한 번서에게 있어서는 손에 잡히는 모든것이 비밀무기나 다름없었다. 당장 그의 회색 장포만 해도 온갖 암기와 비밀 도구가 들어찬 병기고나 다름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고안과 발명의 경지는 더더욱 정교해져 갔다.

 

이와 연계된 무기의 선택에 있어서, 특히나 그는 활을 선호했는데, 이는 내공을 쓰지 않으면서도 멀리 있는 적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거리 문제와, 철포와는 달리 커다란 소음을 내지 않는다는 은밀성을 고려한 결과였다. 태엽과 용수철을 적용한 접이식 활(활대에 철판을 이용해 장력이 크다. 장거리용)과 깃까지 모두 강철로 만들어진 강전을 옷 안에 숨기고 다녔는데, 장포에서 꺼내서 한번 탁 치는 것으로 활이 펼쳐지면, 다음 순간 화살이 장전되고 조준까지 끝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오십 보(약 30m) 거리에서도 목표를 맞히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지만, 재미를 붙이고 손에 익들 정도로 연습을 거듭한 결과 백보(70m 정도) 거리에서도 특정 부위를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한 궁사가 되었다.

 

근접전에 대비해서는 작은 암기들이 있었다. 유엽비도를 던지는 수법은 서봉에게 배웠고, 수전(짧은 화살을 용수철의 힘으로 쏘아낼 수 있는 장치)도 구했다. 수전에 대해서는 이미 여섯 발까지 연발로 발사되는 매화수전(梅花袖箭)이라는 장치가 있었지만, 번서는 많이 쏘기 보다는 치명적인 일격을 주는 쪽을 더 선호하였으므로 단발수전의 발사력을 강화시켜 사용하였다.

 

그 밖에 호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고안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비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무림인들은 호체공, 혹은 호체신공이라는 것을 익혀 도검이나 작은 암기, 심지어는 탄환까지 막아 왔지만 이 방법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대비하고 있을 때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호체신공을 익히면서 그점을 절감한 번서는 자신의 장포에 여러가지 비밀 주머니 이외에도 심맥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슴과 등 부위의 안감 속에 철판을 덧대었는데, 이는 역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결국 보다 더 확실하게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

.

.

 

원래 번서는 국무령의 조교를 끝마치는 대로 경도로 갈 예정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옛 격언에 따라 경도 내부에서부터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무령의 조교를 끝내고 무기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의 고안과 제작도 그럭저럭 끝나 경도로의 여행 준비를 마쳤을 무렵, 번서는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번서는 하루 3교대로 노예들과 함게 행동했다. 우선 자시(子時; 23~01시)부터 축시(丑時)와 인시(寅時)를 거쳐 묘시(卯時 05~07시)까지는 침실에서 쉬는 시간이다. 서봉과 국무령 중 한명이 불침번을 섰다. 진시(辰時; 07 ~ 09시)부터 사시(巳時), 오시(午時)를 거쳐 미시(未時; 13 ~ 15시)동안에는 밤에 불침번을 서지 않은 노예와 국무향의 시간이다. 그리고 신시(申時; 15 ~ 17시)부터 유시(酉時)와 술시(戌時)를 거쳐 해시(亥時; 21시 ~ 23시)까지는 다시 낮에 번서를 수행하던 노예가 빠지고 낮에 잠을 자던 노예가 번서를 수행한다. 어제 국무령이 밤 불침번을 서면 오늘은 서봉이 밤의 불침번을 서게 되는 구조다. 물론 불침번 겸 수행하는 노예는 항상 번서의 곁에 붙어 있게 된다. 이 수행노예는 번서의 유흥을 돕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그를 지키는 일이었다.

 

낮에 외출할 수도 있지만, 해가 느즈막히 넘어가는 시점부터 활동하기를 선호하는 번서는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무역시에 들렀다. 여행 준비란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부족한 법이다. 식량, 옷, 침구, 배의 수리를 위한 도구들 등등. 사막 여행자들의 출발지이기도 한 무역시에는 여행용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고 물품도 다양했다.

 

한 포목점에 들린 번서가 색목인들이 쓰는 올이 굵은 모직과 털가죽으로 이뤄진 두꺼운 망토를 구매하던 중에(밤 날씨는 쌀쌀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필요했었다), 그녀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길 건너편 소면같은 간단한 음식을 파는 노점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두명의 여자들은 그런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차림새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매지간처럼 보이는 여자 두명,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주변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남루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움직임, 주변을 경계하는 빈틈없는 시선은 무림인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치렁치렁한 피풍의(避風衣) 아래 숨겨진 단검이 번서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확신하긴 어려워도 허리춤에 차고 있는 요대도 옷에 어울리지 않는 재질인 것으로 보아 연검 같았다.

 

흠...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단단히 무장을 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지?...

 

번서의 생각이 끝난 그때였다. 주변을 물리치는 길앞잡이의 외침소리가 그를 현실세계로 되돌려 놓았다.

 

" 물렀거라!~ 모용휘(模用麾) 대인의 행차시다~ "

 

번서는 이미 그 이름을 들어본 바가 있었다. 모용휘는 마영달의 부장이었다. 실질적으로 마영달의 탐관오리 행각을 보좌하는 최측근이자 군사격인 자로, 두뇌 회전이 빠른 이상으로 사납고 모진 성정에 재물을 좋아해 돈을 받고 죄인을 풀어주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저자를 노리는 모양이군.

 

문득, 번서는 밤귀신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영달을 노리는 두명의 자객들. 마영달과 함게 탐관오리 행각을 벌이는 측근이라면, 그들의 목표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모용휘를 태운 교자(뚜껑없는 가마 비스므레한 의자, 일반적으로는 네명의 교자꾼이 메고 움직인다. 원래는 신분이 높은 고관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의 행렬이 가까와 졌을 때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 타핫! "

 

" 죽어라아앗!... "

 

" 크아악!..."

 

" 으억!... "

 

연검을 뽑아들고 교자를 향해 달려든 두명의 여자들의 기합성이 시끌벅적하던 시장통을 뒤흔들었고, 삽시간에 그녀들 앞을 막아서던 네명의 호위병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피를 본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 팔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반대편에 서 있던 병사들이 급히 모용휘의 앞을 가로막아 섰으나 그들의 실력도 앞서 쓰러진 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탐관오리의 책사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것인가.

 

" 타핫, 물러서라!... "

 

카카캉! 채챙!...

 

번서가 나서야 할까 저울질하고 있던 그때, 그가 서 있던 점포의 지붕으로부터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며 하나의 붉은 그림자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연검의 검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검광과 금속성의 파열음, 그리고 적당한 불꽃이 튀긴 끝에, 그 붉은 그림자는 마침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오호...

 

붉은 비단 경장을 입은 여자는 척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생김새로 따져보자면 눈매가 날카로운 점이 국무령과 비슷했지만,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서봉과 분위기가 비슷해, 타고난 요염함을 풍겼다. 그녀는 왼손으로 쥔 칼을 하단으로 늘어뜨린채 천천히 원을 그리듯이 휘둘렀는데, 방금의 습격자 두명은 큰 낭패를 본 기색으로 몆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 너는 당여월!... 창천교 쾌락당의 당주가 언제부터 관부의 개가 되었더냐? "

 

습격자 중 나이가 많은 쪽의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자, 당여월이라 불린 여자의 눈가로 살짝 웃음이 스쳤다. 그리고 번서는 [쾌락당]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 그 잡놈들이 세상에서 사리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쾌락당 타령... 지금의 나는 그런 잡졸들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선량한 백성일 뿐이야. "

 

" 하, 네가 선량한 백성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다가 허리가 부러지겠구나! 쾌락당 놈들의 패악질이 하늘에 미쳐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함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줄 알았거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

 

점잖지 못한 언사가 오가는 동안 저 멀리서 병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자들은 분통하다는듯이 입술을 깨문 다음 당여월을 향해 일갈했다.

 

" 비통하구나!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닐 터, 언젠가는 탐관오리 마영달과 그 주구들의 목을 베어 세상의 정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릴 것이다! "

 

퍼엉!!...

 

젊은 쪽의 여자가 품 안에서 꺼내서 바닥에 던진 검은 구체는 폭음을 내며 주변을 매케한 연기로 뒤덮었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었을 때 그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들이 [밤귀신] 들인가 보군... 그리고 쾌락당의 당주였던 계집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경도로 출발할 계획을 미루며, 번서는 앞으로 어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

.

.

 

어떤 일을 하자면 계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계획을 짜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수다. 번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해가 지기 전에 모용휘가 머무는 관사로 갔다.

 

" 웬놈이냐? "

 

" 밤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사람을 모은다는 방을 보고 왔소이다. "

 

호패를 보이자 문지기격인 병사는 문 안으로 방문자가 온다는 신호를 했고, 곧이어 예쁘장하게 생긴 시동 한명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 일행이 두분이십니까?... 절 따라 오시지요, 대인. "

 

시동이 앞장서자 비로소 문이 열렸다.

 

모용휘의 저택은 규모가 상당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돌을 깔아 바닥을 만든 연무장을 겸한 넓은 마당이 나왔는데, 번서가 알기로는 모용휘는 무용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필시 예전의 집주인이 사용하던 연무장이리라. 이름높은 탐관오리(?)니 만큼 남의 집을 빼앗았을 것이라 생각하던 와중에 자신이 살던 해운곡의 집이 생각났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 작은 집도 이제 필시 주인이 바뀌었으리라. 복수를 마치고 나면 기필코 돌아갈 것이라 맹세하면서, 번서는 고향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콰콰쾅!...

 

폭음이 들리는 곳을 돌아보자 연무장 한켠에서 병사들이 과녁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색목인 무역상인들이 전래한 무기인 총은 무서운 병기다. 화약의 힘으로 추진되는 납 탄환은 가벼운 갑옷 따위는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 어지간한 호체신공도 뚫는다. 은밀성을 더 중시해 활을 연습하고 있었던 번서였지만 새삼 그 광경을 보니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끌리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방금의 습격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용휘는 직접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집사가 번서의 맞아 이름과 유파를 물어왔다.

 

" 가전의 무술을 약간 하고 있소이다. "

 

수행하는 서봉도 떳떳하지 못한 신분임에는 틀림없고, 무공의 스승격인 환마도 백무련에 쫒기는 사람이니 유파을 댈 만한 상황은 아니다. 번서의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는지, 집사는 시동에게 나머지를 맏긴 채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 죄송합니다, 아까 시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집안분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 계세요. "

 

" 괜찮네.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것 같군. "

 

시동을 따라 도착한 곳은 허름한 단칸방이었다. 세평이나 될까싶은 좁은 방 안에 대충만든듯한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보니 그 주인의 사람됨을 익히 짐작할 만한 것이라, 번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권세를 잡아야 황국이 빨리 멸망할 것이다.

 

" 필요하신게 있으시다면 이 줄을 당기십시오. 제가 달려오겠습니다. "

 

" 바쁠텐데 얼른 가 보게나. "

 

시동을 보내 놓고 나서 번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척 봐도 [나 별것 아니요]라는 칭호를 이마에다 써붙여 놓은 것 같은 무뢰한들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번서는 산책을 겸해서 저택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병사를 두면 지키기 수월할텐데...

 

저택은 보기에는 경비가 삼엄했지만, 번서의 눈에 뜨이는 헛점만 해도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비에 구멍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이곳저곳 둘러 보는데 갑자기 서봉이 경계반응을 보였다.

 

" 이봐 당신, 이런데서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구. 거기는 화탄이 묻힌 자리야. "

 

낭랑한 목소리에 돌아 보니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미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색목인 특유의 금발 사이로 드러나 있는 환한 인상을 주는 이마 아래로 일직선으로 시원스레 뻗은 코와 서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이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의 근원인 눈동자는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푸른 색이라, 보는이로 하여금 상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 여자의 무기는 총이었다. 등에는 장총이 한정, 허리춤의 요대에는 단총이 두정. 피풍의 곳곳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는 필시 탄환과 화약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 아, 그러했구려, 감사하오. "

 

" 척봐도 무림인같아 보이지 않는데 이런곳엔 왜 온거죠? "

 

확실히, 번서의 지금 차림은 무림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헐렁해 보이는 장포 하나를 걸쳤을 분 무기고 뭐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장포 아래는 완전무장이지만, 투시력이 없는 한 옷 위로 접이식 활을 본다 해도 그게 무기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 무예보다는 잡기에 능해서 말이지요. 싸움을 하는건 이쪽입니다. "

 

번서는 서봉의 존재감을 잠시 어필해 보였다. 확실히 서봉은 그때까지 자신이 쓰던 두자루의 철편 대신에 강철을 제련해 만든 묵직한 사슬 두개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걸치고 있는 헐렁한 차림의 장포에 요대삼아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척 봐도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 장식이 아닌 무기라는것을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 그렇군요. 실례지만 공자의 존함이?... "

 

" 심강이라고 합니다. 삼대째 여기서 살아온 토박이지요. "

 

" 저는 ㅈ... 아니 신소아(新昭娥)라고 해요. "

 

뭔가 약간 수상쩍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나서, 번서와 신소아는 몆마디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일상적인 대화에 불과했지만 번서는 그녀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낌새를 받았다.

 

총은 소리가 큰 무기다. 그리고 어느정도 거리 내에서는 활보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이지만, 사거리 자체는 활보다 짧다. 연속으로 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씨의 영향을 너무 직접적으로 받는다. 비라도 내리면 화약이 눅눅해져 불이 붙지 않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화약도 총도 모두 몹시 비싸다.

 

능숙하게 쓰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 비용과 장소를 구하는 일 자체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앞서의 결정적인 단점 때문에 언제 어디서 싸워야 할지 모르는 무림인의 병기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림인들 중에서 총을 쓰는 이가 몹시 드눈 것은 이에 기인한다.

 

이 신소아라는 여자의 자세를 보아 하니, 날림으로 사격을 배운 것 같지는 않았다. 총도 고급품이었다. 그렇다면 어린시절부터 총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인데, 적어도 총이 무림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만큼 무림에 속한 집안은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시점에서 다시 번서의 귓전으로 폭음이 들려 왓다.

 

타타탕!...

 

병사들이 안뜰에서 사격 훈련을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번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신소아는 무장의 집안에서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반 백성으로 취급되는 무림인의 부류는 아니고, 좀 더 지체높은 집안의 자식일 것이다. 그런데 현상금을 노리는 일을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물론 한방의 수입이야 현상금 사냥꾼이 더 쏠쏠할지는 모르겟지만, 집안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된다. 거기에 자기소개를 할때 약간 머뭇거리던 것을 기억해 낸 번서는 무릎을 쳤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그녀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또다른 자객일까?... 자객이라면, 이미 모용휘의 집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거사를 치르지 않는 것을 보면 목표는 그가 아니다. 모용휘가 목표가 아니라면...

 

남는것은 모용휘의 위에 앉아 있는 자, 마영달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밤귀신]을 잡고 나서 포상을 받기 위해 마영달과 대면한 순간을 노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번서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채 담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섬칫한 살기가 느껴져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 ... "

 

살기는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저만치 앞에 서서 멀리 자산성의 내성(마왕이 머무르는 궁전)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소아가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번서의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외부의 자객과 내부의 자객이 있었다. 그리고 내부의 자객의 목표는 당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전망이었고, 이렇게 되면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다만 내부의 자객 쪽의 움직임 역시도 계속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완전히 어둠이 깔렸을 때, 번서는 안개를 풀어 몸을 숨기고 저택의 안채까지 숨어들었다. 어떤 건물이 어디에 있으며, 거기에는 누가 있는지도 확실히 알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번서가 당여월을 발견했을 때는 저택의 탐색도 거의 마쳐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자시가 가까와 왔기 때문에 서봉이 배로 돌아가고 대신해서 그를 수행할 국무령이 오는 동안 안채의 출구 옆에 세워진 전각의 지붕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나와서 선 것이다. 그리고 번서가 뭘 어떻게 해 보기 전에 안개 속에서 신소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늦었군. "

 

" 흥... 용건만 간단히 맗해. 너와 같은 집안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으려고 하니까! "

 

신소아의 가시돋친 반응에 당여월은 어께를 으쓱해 보였다.

 

" 이런이런, 권황이자 마왕으로 이름 높으신 진천권 공의 따님께서 그런 거친 언사를 쓰시다니, 저승에 계신 진공이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와... "

 

당여월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소아의 눈앞에서 금속성의 섬광이 번쩍였다. 재빨리 당여월이 받아낸 것은 새하얗게 빛나는 날카로운 날을 가진 유엽비도였다.

 

" 난 한번도 그가 내 아버지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닥치지 않으면 지금 이자리에서 네년의 뼈와 살을 분리해 주지. "

 

오호, 진(辰)씨였다는 이야기인가...

 

권황에 대해서는 무림으로 출도하기 이전의 번서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었다. 본시 무림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대사막을 통해 쳐들어온 타골족의 무리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선대왕이 발탁을 받아 일개 무림인에서 마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윤숭의 무리가 권세를 잡은 후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그 대신으로 부임해 온 것이 지금의 마영달이었던 것이다. 그 진천권의 딸이라면 총을 어린시절부터 배웠을 것이라는 짐작도 들어맞고, 마영달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 진정하라고. 네가 마영달을 죽이든 말든 내가 알바 아니니까. 나는 다만 그의 돈에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걸 가지고 있지. "

 

" 그렇지, 너같은 사교의 주구가 생각하는건 그정도겠지... 네가 원하는건 마왕성 내부로 통하는 비밀통로의 위치에 관한 정보겠지? "

 

곧이어 두명은 번서에게 들리지 않도록 전음으로 몆마디 나누었다. 그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전음입밀의 수법을 도청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번서는 진소아와 당여월의 목적을 대충이나마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옆으로 날아와 앉은 국무령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숙소로 돌아온 번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가늠해 보았다.

 

당여월은 현상금보다는 마영달의 보물창고에 침입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한 최고의 기회는 누구든 밤귀신을 붙잡아서 그가 성을 나오게 만드는 때가 될것이고, 마영달의 목을 노리는 진소아 역시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당여월과 같았다. 한편 번서의 경우, 만약 당여월이든 진소아든(물론 둘을 모두 손에 넣는다면야 더 바랄것이 없겠지만) 납치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이 약해져 있어야 했다. 한눈에 봐도 그녀들의 무공 수위가 그가 방패로 삼고 있는 서봉이나 국무령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이 길어져서 쓸데없는 이목을 끄는 것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았다.

 

결국 밤귀신들은... 죽어야 할 필요가 있겠군.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일의 열쇠가 될 마영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들이 확실히 끝장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몹시도, 마영달을 끝장내고 싶어할 그녀들 역시 모용휘를 잡아서 마영달이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할것이다.

 

물고 물리는게 꼭 지 꼬리를 쫒아서 뱅뱅 도는 강아지를 보고 있는듯한 형국이구만...

 

모용휘가 죽느냐, 밤귀신들이 죽느냐의 싸움이다. 제삼자인 번서는 굿을 보고 떡만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떡을 먹기가 쉽지만은 않을 예정이다. 떡을 먹다 급체로 죽고싶지 않다면 준비를 확실히 해야 했다.

 

갈천휘가 쓰는 진법들의 대부분은 기력을 빼앗거나 환상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두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것이었지만, 독특한 수법도 몆개인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종이를 잘라 만든 모형을 실제의 그것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술법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 시간제한이 있고 과격한 행동들(특히나 전투)은 수행할 수 없지만, 술법에 능통하지 못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뿐 아니라 이 가짜 인형을 통해 감각을 공유해 자신이 그 장소에 있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번서는 이 술법을 사용해 종이로 작은 새를 만들어 저택의 곳곳에 배치했다. 종이인형은 그 크기가 클수록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고 집중력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감시역으로 쓰기에는 작은 동물, 특히나 자유롭게 날아 위치를 바꿀 수 있는데다 대부분의 경우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새를 쓰는것이 적절했다.

 

계절이 건기에서 우기로 전환하는 시점이라, 이튿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다. 창 밖으로 천둥번개를 동반한 채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번서는 땅에 묻어둔 화탄은 무용지물이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경비도 느슨해지게 만든다. 그리고 밤귀신들, 확실히 그들이 저택 내에 정보원을 두고 있다면 필경 화탄이 묻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날은 그들에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 준비해라. "

 

" 네 주인님. "

 

무릎을 꿇은 채 유방 사이로 그의 발을 끼워넣은 채 문지르고 있던 서봉은,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일어나서 옷을 갖춰 입었다. 번서는 그녀의 봉사를 좀 더 받았으면 했지만, 이미 노예가 된 서봉을 희롱하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포로를 잡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신발을 신고 일어나서 장포를 입고 자신의 무장을 점검했다. 서봉이 귀신같은 솜씨로 천정을 타고 오르는 동안, 번서는 거적을 이어 만든 우의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나 노예들이 입는 비단 장포는 방수처리가 된 제품이었지만 일부러 적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 공자님? "

 

뒤돌아본 자리에는 진소아가 서 있었다. 그녀 역시 우의로 완전무장을 한 차림새였는데, 화약이 젖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는 모양새가 확연했다. 저 아름다운 미모를 범해 흐트러뜨리고 마침내 노예로 삼는다면 그 자신의 유흥으로도 좋을 것이고, 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만큼 자신의 복수행에도 도움이 될것이다.

 

" 비가오면 총을 쓰기가 어렵지 않소이까? "

 

" 보통은 그렇지요. "

 

진소아는 꿍꿍이가 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문득 그 웃음을 보자 그녀와 자신의 처지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복수를 위해 암약하고 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 복수의 목표가 다를 뿐. 그녀는 번서와는 달리 황국 자체에 죄를 물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녀가 옳은가, 내가 옳은가?

 

다시 한번 번서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목표를 되짚어 보았다. 윤숭의 일족을 섬멸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정의는 구현되어야만 비로소 정의이다. 그 정의를 위해, 용기있게 옳은 말을 하던 사람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했던 비겁한 자들, 그리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신하를 알아보지 못하는 황국의 대왕가. 그 모두가, 그의 입장에서는 원수였고 적이었다. 황국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도,그런 불의한 통치는 사라지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다시한번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곱씹으며, 번서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보여 주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해가 질 시간이 되자 기름을 먹인 횃불을 밝혀도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다른 무사들도 각자 자기 맏은 곳을 지키며 돌아다니느라 분주한 가운데, 다시 국무령이 서봉과 교대를 하기 위해 왔다. 그동안 진소아와는 몆번 더 마주쳤지만, 당여월은 안채를 경비하는 중인지 영 눈에 뜨이지 않았다.

 

문득 번서는 당여월의 자신감 넘치는 미모를 떠올렸다. 쾌락당은 그에게 있어서는 쓰레기들의 집단이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쾌락당의 당주까지 지낸 여자이니만큼 그녀라면 진소아와는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잡아서 시원하게 범해준 다음 노예로 삼을 것이다.

 

번서가 속으로 그렇게 꿍꿍이를 진행시켜 가는 동안 저택의 후문 인근에서 소란이 있었다. 지나가던 인력거꾼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경비들에게 붙잡혀 치도곤을 당한 모양이었다. 모시는 주인의 인품에 따라 부리는 개들의 행동도 영향을 받는 것인지, 모용휘나 마영달의 부하치고 변변한 자들은 본적이 없었다. 그것만이면 그냥 지나가는 작은 일화에 불과한 일이 되었겠지만,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와중에 그의 경계망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 후문의 담장을 지나 번서 등이 머물고 있는 건물인 객사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았던 것이다.

 

" 왔군. "

 

즉시 국무령을 객사의 지붕 위로 올려보낸 번서는 자신도 가세하기 위해 객사 맞은편, 안채로 통하는 통로의 지붕 위로 올라가 활을 꺼내 들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재빨리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협공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국무령이 저지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벌써 벌써 번서가 있는 곳 까지 날아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밤귀신 중의 한명이다. 번쩍이는 연검의 날이 날아드는 것을 활대를 써서 받아낸 후, 번서는 상대의 다리를 노려 서 한발의 강전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는 않아서, 번서가 활을 쏘아내는 것을 피하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 어딜 감히!... "

 

큰일났다 싶은 순간, 국무령이 번서와 밤귀신 사이에 끼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이미 노예가 되기 전부터 국무령의 검술 솜씨는 자산성 인근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고, 번서에게 안기는 동안 채화술을 통해 내공까지 증진된 상태인 그녀의 검술 솜씨는 실로 놀라울 정도여서, 단 일합에 적을 떨쳐냈을 뿐 아니라 두번째부터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챙!.. 챙!...

 

한번 검이 부딛칠 때 마다 밤귀신은 크게 낭패하며 뒤로 물러서는 형국이엇다. 국무령의 검은 빠를 뿐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힘도 무지막지하기 이를데 없어서 검을 부딛칠 때 마다 쥐고 있는 연검을 통해 팔 전체가 시큰할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밤귀신의 내력이 좀 덜 정순했고 국무령의 내공이 좀 더 강했다면, 검술로 격파되기 전에 내장이 진탕되어 피를 토해냈을 것이다.

 

" 타핫!... 끝이다! "

 

" 커흑!... "

 

번서가 국무령에게 미리 상대를 생포하라고 언질을 넣어놓지 않았다면, 첫 일격으로 상대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그만큼 두명의 실력 차이는 컸다. 게다가 비가 오는 밤이라 발디딤이 나쁜것도 밤귀신에게는 불리했다. 수련의 경지가 높을수록, 내공이 강할수록 이런 상황에서도 더욱 안정된 자세를 취할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무령의 수련의 경지와 내공에 관해서라면, 번서의 노예로 재탄생되기 이전부터 일가를 이룰만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명치를 칼등으로 강하게 얻어맞은 밤귀신은 뒤로 나동그라졌고, 그대로 다시 뛰어들어간 국무령에 의해 혈도를 제압당했다. 그동안 번서는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 때문에 방금의 소음이 차단되어 눈치챈 자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밤귀신은 둘인데 어찌 하나만 나타났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이제 하나를 잡았으니 그 사정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번서는 자신을 대신하는 인형을 만들어 숙소에 두고, 국무령과 함께 배로 돌아갔다. 국무령의 옆구리에는 붙들린 밤귀신 포로가 축 늘어진채 매달려 있었다.

 

.

.

.

 

국무령이 공을 세운 것에 서봉이 약간 질투를 하기는 했지만, 손가락으로 엉덩이의 구멍을 한번 찔러주자 이내 얌전해졌다. 포로를 감금실에 데리고 온 번서는 그녀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들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착수해야 했는데, 피풍의에 우의까지 걸쳐 입은 덕분에 정말로 벗기는데 고생을 했다.

 

" 보기보다는 나쁘지 않군. "

 

전에 무역시에서 보았을 때는 변장을 위해 얼굴에 검은칠을 했었기 떄문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결국 데려와서 발가벗겨 놓고 보니 제법 괜찮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약간 앳된 인상을 주는 얼굴은 선이 곱고 참한 인상을 주고 있었고, 화장기가 없음에도 입술이 예쁜 붉은 색이었다. 황국 여인 특유의 검고 윤기나는 흑발을 단정하게 땋아 내려 어께까지 드리우고 있었고, 피부가 드러난 곳은 건강한 갈색으로 그슬려 있었지만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여느 미인들과 같은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유방은 아직 덜 여문듯한 모양새였지만 탄력이 좋았고, 깨끗한 붉은색을 띈 채 꽉 다물려 있는 보지를 검사해 보니 처녀였다. 연갈색의 항문 역시도 앙증맞게 보일 정도로,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몸이었다.

 

번서는 쉬운 취조를 위해 머리에 금침을 박아넣은 후, 단전에 내공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그녀를 깨웠다.

 

" 아으윽... "

 

괴로운듯한 낮은 신음성과 함게 깨어난 여자의 시선은 흐리멍텅했다. 번서가 그리 햇으니 당연한 일이다. 검은 눈동자가 촛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번서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질문을 시작했다.

 

" 이름은? "

 

" 경...운경... "

 

" 나이는? "

 

" 십육... 세... "

 

번서는 무릎을 쳤다. 이제 열여섯 밖에 되지 않았으니 소녀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소녀가 검을 들고 마영달을 노려야만 하는 사연이 무엇이란 말인가. 동정심까지 들 정도였지만, 일은 일이다. 그는 질문을 계속해서 그녀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경운경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부친은 경유외(經柳嵬) 윤씨들에 의해 숙청당한 마왕 진천권의 부장이었다. 진천권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진천권의 경도행(그가 숙청된 사건)에 동행했고, 경도에 도착하자 마자 체포당해 죽임을 당했다. 반역죄인의 가족은 연좌하는 법에 따라 그 부인인 유춘연과 딸인 경운경은 관노가 되어야 할 예정이었으나, 원래 무림의 여걸이던 유춘연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탁월한 검술 솜씨를 발휘하여 도착한 사자와 병사들을 죽이고 딸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일년동안 마영달의 악몽이 되었다. 경도에 가서 윤숭의 일족에게 복수하는 대신, 윤숭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마영달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수인 윤숭의 오른팔이라면 그냥 둘 수 없다. 그때까지도 마영달을 살려둘 생각이었던 번서는 경운경이 제공한 정보 덕분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하지만 마영달을 머물고 있는 거성에서 꾀어내려면 역시나 [밤귀신들]의 목이 필요하다. 번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 너의 모친은 어디에 있지? "

 

" 어머니는... 당여월에게 부상을... "

 

시장에서 당여월과 나눈 일합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경운경의 스승이기도 한 유춘연의 검술 실력은 당연하지만 경운경 이상일 것이다. 이 두명을 한꺼번에 상대한데다 그 짧은 순간에 상대에게 요상을 요구할 정도의 부상을 입혔다면, 당여월도 보통 고수는 아니었다. 문득 서봉과 당여월은 같은 창천교 출신이라는 점이 생각난 번서는 그녀를 불러 물었다.

 

" 서봉, 당여월에 대해 아느냐? "

 

" 네 주인님. 그녀는 쾌락당의 창시자로, 검술 실력만큼은 창천교 내에서도 세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입니다. 검술 솜씨 만으로는 국무령과 호각 이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

 

" 그런 여자가 어째서 떠돌이가 된거지? "

 

" 아랫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당원들의 반란이 있었고, 축출됐습니다. "

 

번서는 쾌락당 무리들의 무공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합지졸들이 절정고수의 대열에 끼이는 그녀를 어떻게 쫒아냈을까가 궁금해졌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건지 서봉이 말을 덧붙였다.

 

" 부당주인 기달두(己獺頭)가 총으로 암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빈사의 중상을 입고 도망쳤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

 

확실한 호체기공으로 대비하지 않는 한 맨몸으로 총알을 막을 방법이라고는 없는 것이 당연지사, 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경운경의 수혈을 짚어서 재운 다음 그녀의 모친인 유춘연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하고, 서봉을 데리고 배를 나섰다.

 

번서가 잘못 판단했던 점은, 부상을 당했다는 말만 들었던 것이다. 서봉과 함게한 그가 경운경이 말해 준 은신처를 찾아갔을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춘연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암살자였고, 이런 류의 암살자가 가장 신경쓰는 일은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가 입은 부상은 보기보다는 중하지 않았고, 복수를 위해 딸인 경운경을 미끼삼아 먼저 보내어 경비를 느슨하게 만든 다음 그녀가 몸을 뺄 때(경운경은 경공 솜씨가 검술보다 우수했다) 자신이 경비하는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작전을 딸에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적을 속이기 위해 먼저 아군을 속여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운경은 소란을 일으키기도 전에 번서의 손에 붙잡혔고, 유춘연은 저택에 숨어들 수가 없었음은 물론 딸의 안위도 확인할수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저택 주변을 감시하던 감시꾼들에게 들켜서 칼부림을 펼친 끝에 도망쳤지만, 부상이 악화되었다. 은신처로 돌아갈 기력도 남지 않은 유춘연은 어느 허름한 폐옥 아래 숨어들어 최후를 준비했다.

 

아마 추적에 능한 서봉이 아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드문드문 떨어진, 비에 희석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간 폐옥의 한켠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유춘연을 발견했을 때는 번서의 솜씨로도 손을 쓰는 것이 늦은 상태였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손에 쥔 검을 놓치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본 번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 너는... 마영달의 무리인가?... "

 

" 운경을 만났고, 그를 죽일 거요. "

 

딸의 이름을 듣자 유춘연의 꺼저가던 눈빛이 되살아났다.

 

" 소협... 그 아이는 무사한가?... "

 

번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춘연의 얼굴에 잠깐 안도의 웃음이 걸렸다.

 

" 그 아이에게 도망치라고... 전해... "

 

말을 끝맺지 못하고, 유춘연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 딸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잠드시오. "

 

번서는 유춘연의 시체를 끌어다 바닥에 눕힌 다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소지품을 챙겼다. 마영달을 꾀어내려면 아직 그녀가 필요했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단순한 고깃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싫을 정도로 경험한 번서는,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에는 공감하지만 그녀의 시체를 훼손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알몸이 된 유춘연의 몸을 철저하게 검안한 번서는 그녀의 사인을 확인했다. 다른 작은 상처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왼쪽 젖가슴 아래에 나 있는, 찔러서 난 검상이 치명적이었다. 그것도 아물려던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다. 당여월이 남긴 흔적일 것이라, 그 상처를 살피는 것으로 번서는 당여월의 수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봉과 국무령에게 가르치면 당여월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것이다.

 

알몸이 된 유춘연의 시신을 거적에 싸서 서봉에게 들린 번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시신만을 모용휘에게 가져가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시체가 하나 더 필요했다. 그것도 유춘연을 알아볼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럴듯한 가짜를 준비해야 했다. 가장 좋은건 그냥 경운경을 죽여서 가져가는 거지만, 그녀 역시 번서와 같은 원한을 공유하는 처지다. 게다가 아직 어린티를 다 벗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아무리 복수에 물불 가리지 않으리라 작심한 처지라도 못할 짓이다. 그런저런 고민을 하던 그의 뇌리에 한가지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 하긴, 꼭 죽여야 할 필요는 없지. "

 

.

.

.

 

그날 밤 자시가 가까와 왔을 무렵, 진소아는 번서의 방문을 받았다. 안개를 깔고 몰래 숨어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창문을 두드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녀가 옷매무새를 수습할 시간은 주는 신사적인(?) 방문이엇다.

 

"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지요? "

 

" 제안할 것이 하나 있소이다. "

 

단총을 등 뒤에 숨긴 진소아가 문을 반쯤 열고 무슨 제안인지 물으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번서의 등 뒤, 서봉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거적에 싸인 사람의 발이었다. 한눈에 봐도 시체임이 분명한지라,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좋은 일은 아닌것 같군요. "

 

" 아니, 소저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오. "

 

진소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번서에게 방문을 열어 주었다. 거적에 싸인 시신을 방 안에 들인 다음 서봉이 지붕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번서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 이 사람은?... "

 

거적안에 들어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유춘연의 시신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시신이다. 그녀는 눈을 찌푸렸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 시신의 몸에 난 상처자욱을 알아보았다.

 

" 설마 이 여자가 밤귀신? "

 

" 두명 중의 한명이지요. 그리고 다른 한명도 여기에... "

 

곧이어 번서의 등 뒤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원래 입고 있던 피풍의 차림의 경운경이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돌려 묶인 채로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하는 기색은 없었다.

 

" 진 소저. "

 

번서가 자신의 진짜 성씨를 부르자, 진소아는 화들짝 놀라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번서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도 상관하지 않고 거적으로 유춘연의 시신을 덮은 다음, 경운경의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었다. 그녀가 자신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푸는 동안, 번서는 다시 돌아서서 진소아를 마주보았다.

 

" 당신도 이들처럼 마영달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이다. "

 

" ... 데체 그걸 어떻게?... "

 

" 이곳저곳에서 보고 듣는 것이 많다 보니... "

 

그는 붙임성있게 웃어 보인 다음 경운경을 불렀다. 그녀는 선선히 그의 옆에 와서 섰는데, 소녀다운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경 소저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소. 그리고 진 소저의 목표 역시 마영달의 목. 그렇다면 두분이 협력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소이까? "

 

이미 경운경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번서는 그녀에게 모친의 죽음을 알렸고, 자신의 계획 또한 말해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담한 계획이었고 진소아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기 힘든 것이었다.

 

" 내가 뭘 하기를 원하시죠? "

 

" 마영달을 불러내는 역할을 맏아 주시길 바랍니다. "

 

번서의 계획은 이러했다. 진소아가 유춘연과 경운경 모녀를 추격하여 치명상을 입은 그녀를 발견하고 경운경을 제압해 붙잡은 것으로 하고, 포상금을 주기 위해 나온 마영달을 저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계획이군요. 마영달의 앞에 가면 무장을 해제당할 것이 분명할진데 무슨 수로 그를 저격하라는 거죠? "

 

" 그걸 고인께서 담당할 것이오. "

 

산 자는 신체검사를 할지언정 죽은자를 검사할 리는 없다. 유춘연의 뱃속에 단총을 숨겨 들어가라는 것이다. 경운경을 위해서는 입에 물린 재갈 안에 암기로 쓸 수 있는 단검을(접어서 펼치는 것으로 극히 짧은 것이었지만, 알맞은 부위에 사용한다면 치명적인) 준비해 두고 있었다. 대담하기도 했지만 사자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런데도 낮빛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계획을 도면까지 그려 가며 설명하는 번서를 보며, 진소아는 벌린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 퇴로는 소생이 확보해 드릴 것입니다. 보다시피 눈속임을 하는 하찮은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말이지요. "

 

" ...안개를 일으키는 술법을 구사할 줄 아시는 분이 겸손하시기도 하시군요. "

 

그리 오래 고민할것도 없이, 진소아는 동의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번서의 제안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유춘연의 시신을 욕보이는 일이 걸끄럽기는 했지만, 복수를 이룰 수 있다면 그녀도 용서해 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석해서 제공한 단총 두자루를 죽은 유춘연의 보지와 항문 안에 숨기는 일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 이제 내일이면 여러분의 복수가 이뤄질 것입니다. "

 

" 그러길 바래 보죠. "

 

" 그리고 그 전에 소생이 필요한 정보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

 

" 무엇이죠? "

 

[당여월에 관한 겁니다]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당여월의 일을 묻자, 진소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진 소저의 정체를 함구하는 대신 요구한 정보가 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래요.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요? ]

 

[소생은 남이 꾸미는 일을 망치는데도 약간의 재능... 이 있어서 말입니다. 특히나 당여월 같은 악인의 꿍꿍이를 망칠 수 있다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

 

[알았어요.]

 

번서가 짐작한 대로, 진소아가 당여월에게 제공한 정보는 마왕성의 비밀통로의 위치였다. 하지만 그녀가 당여월에게 제공해 주지 않은 정보도 있었다. 그 통로는 탈출 전용이라 안쪽에서는 성내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없다는 점 말이다. 당여월이 성내로 통하는 문을 여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틈에, 그녀는 밤귀신의 시체를 확인하고 현상금을 수여하러 나타난 마영달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고 멀리 가 있을 계획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번서는 모처럼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진소아 역시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닌 것이다.

 

[훌륭하시군요.]

 

[과찬이세요.]

 

서로 웃음을 교환한 다음, 번서는 진소아의 숙소를 나왔다. 지붕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서봉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이튿날 새벽, 진소아가 가져온 하나의 시체와 한명의 포로는 평소 늦잠을 자는 것이 취미던 모용휘의 새벽잠을 날려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에는 마영달까지 그의 저택에 와 있었다.

 

" 훌륭하다, 잘 해 주었다! "

 

" 황국의 백성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장소는 모용휘의 집 안마당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엎드려서 마영달에게 예를 취해 보이고 있는 진소아의 좌우로 유춘연과 경운경 모녀가 있었다. 알몸 위에 거적 하나만 덮여 있는 유춘연의 시신은 그녀의 오른쪽에, 번서의 조작이 가해진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재갈이 물려져서 꿇어앉혀져 있는 경운경은 그녀의 왼쪽이었다.

 

그런 그녀들에게서 여섯간 정도 떨어져서 한단 높은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모용휘의 정원을 내려다보던 마영달의 비대한 몸이 출렁였다. 자기딴에는 호쾌하게 웃는 모양새를 연출한 모양이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비계의 출렁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단총의 유효 사거리는 약  다섯간(間; 1間 = 2m 정도), 진소아의 위치는 마영달이 시체를 직접 확인하거나, 적어도 계단 아래까지는 와야 확실하게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 바로옆에 가로놓인 유춘연의 시신에서 총을 꺼내는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가까울 수록 좋았다.

 

멀리서는 번서가 안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운경이 가지고 다니던 연막탄을 터트리면 군중들이 그곳에 시선이 집중될 것이고, 그때 연막탄에 섞어서 안개를 퍼트리면 순식간에 장내를 전부 뒤덮을 것이다. 물론 지금 그를 수행하고 있는 서봉은 일이 벌어지면 즉각 그를 보호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여월은 이미 행동에 들어갔는지 군중의 무리 속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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