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물] 그와 그녀의 비밀 18, 19,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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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데이트.
데이트는 예상외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딱 한가지만 빼고...
광장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그랬지만, 인파가 몰려있는 복잡한 광장에서조차 그녀의 미모는 돋보였기 때문에,
그녀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세키는 그녀를 쳐다본 사람 수만큼의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녀는 가게에서 나오자, 입고 있는 원피스 위에 짧은 반팔의 외투를 걸쳐입고 있었다.
그 덕분에 어깨 라인은 가려졌지만, 여전한 쇠골 라인이 세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만을 본다면 동양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서구적인 얼굴형태 - 외국모델이나 영화배우 같은 - 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몸매를 보면
순수 동양인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었다.
힐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녀는 이런 시선에 익숙한 건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세키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몇몇 인디 밴드팀의 공연을 들은 후,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어떤 이벤트 행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게 뭐지?"
"글쎄.."
"아직 영화가 상영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니 잠깐 구경해볼까?"
"그래.."
가까이가서 보니, 커플들을 대상으로 가벼운 게임을 겨뤄 승리한 커플들에게 사은품을 주는 행사였다.
그 게임이라는 게, 남자가 여자를 두 팔로 안아든 상태로 앉았다 일어나며 누가 더 많은 수를
움직일 수 있는지 겨루는 체력 싸움이었다.
사회자는 즉석에서 한 라운드에 4팀의 커플을 뽑아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여자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미안해하면서도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흠.. 연인들은 이런 식으로도 노는구나."
"응?"
혼잣말을 하듯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세키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해볼까?"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라 세키는 깜짝 놀랐다.
"왜? 싫어?"
"아니.. 단지 니가 이런 걸 하고싶어하는 게 의외라서..."
"난 그저.. 남녀간에 하는 데이트라는 게 궁금할 뿐이야."
".... 좋아. 이번 라운드가 끝나면 우리도 참가해보자."
이렇게해서 그녀의 제안에 따라 다음 라운드에 참가했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
4팀 중 가장 먼저 게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민망스러워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회자의 만류로 최종 승자가 가려질 때까지
우리는 무대 위에서 게임을 관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이던 팀들이 게임에서 탈락하며 최후의 승리 팀이 가려졌다.
승리한 커플 두 사람을 앞세운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자, 승리한 커플에게는 소정의 사은품이 지급되며, 탈락한 커플에게는 벌칙으로 5분간 키스타임이 있겠습니다."
"뭐라고?"
키스타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란 세키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었는데,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퍼지자
탈락한 3팀 중 2팀의 커플들이 마지못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
세키와 버지니아는 서로 민망한 듯 쳐다본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른 커플들의 키스가 끝나가자, 보다못한 사회자가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서 관중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자자.. 여기 젊은 커플은 사귄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자리가 어려운가 봅니다.
5분은 너무 어려운 과제인 것 같고 30초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 함성소리로 이 커플들을 응원해주세요!!"
그 순간 관중들이 호응하여 큰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관중석 어디선가 "키스해! 키스해!"를 외치자, 삽시간에 그 말이 전염되어
여기저기에서 "키스해! 키스해!"를 구호처럼 외쳐대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세키가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도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하더니
세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의 표시를 보였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 세키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쪼옥..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완벽하게 포개지자
관중석쪽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분위기에 힘을 얻은 세키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상태로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키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자, 그녀도 조심스럽게 세키의 허리에 두 손을 감싸 안아왔다.
두 사람이 서로의 가슴을 바짝 밀착시켜 부둥켜 안은 모습이 되자,
우뢰와 같은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되자, 소프트한 입맞춤이 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입맞춤은 점점 농도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분위기(무드)의 힘이었다.
두 사람의 포개진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서로의 혀가 상대의 입안을 침범해가다가
혀끼리 만나 엉켜지며 타액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세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키의 귓가에 버지니아의 얕은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세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그러자, 곧바로 그녀의 신체가 휘청거리며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그녀의 몸을 부여잡아 끌어올렸다. -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껴안고 있는 자세 -
"하아..하아.."
그녀는 세키의 손에 이끌려 그의 몸에 기대게 된 상태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숨 덩어리가 그의 목 있는 부분을 스쳐지나가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온전히 세키에게 기대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세키의 뺨에 닿아 간지럽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세키와 버지니아는 5분을 꽉 채우는 긴 키스타임을 가졌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세키는 기운을 잃은 듯 맥을 못 추리는 그녀의 몸을 안아들고
잠시 쉴만한 곳을 찾아 이동하려는데...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체격이 건장한 30대 초반 정도의 남자가 세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구시죠?"
그녀를 위해 조금이라도 빨리 쉴만한 장소로 이동하고 싶었던 세키는
갑작스런 불청객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가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니 이쯤에서 제가 아가씨를 모셔가겠습니다."
혹시 그녀의 보디가드?
말하는 태도는 점잖았으나 사람을 위압하는 기세가 느껴지는 남자였다.
"실례지만 누구..?"
"아, 제 소개를 잊었군요. 아가씨를 모시는 경호원입니다. 타케루라고 불러주십시요."
아아... 학교에서도 고급차를 타고 등하교를 한다는 말은 들었었지만,
이런 날에도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다닐 정도라니...
왠지 모르게 세키는 그녀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약간이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으음..."
잠결인지 그녀가 세키의 품안에서 몸을 잠깐 뒤척였다.
남자는 그녀를 물끄럼이 바라보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아가씨가 깨어나실 때까지 잠깐 얘기라도 나눴으면 합니다." 하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민하던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표하자,
남자는 정중하게 세키의 품에서 아가씨를 돌려받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맨처음 우리가 모임을 약속했던 이노다 커피가게 앞이었다.
가게 앞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고급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따라왔었던 건가?"
세키는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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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버지니아의 질문.
"아가씨께서 왜 이런 자리에 참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여기는 이노다 커피가게 안.
혼절한 그녀는 밖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편안하게 뉘여져있었고,
세키는 지금 그녀의 경호원이라는 타케루라고 불리는 남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시기상조인 줄은 압니다만,
그녀의 곁을 지켜야하는 경호원으로써 세키님이 꼭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
언뜻 보기에도 타케루라는 그 남자는 세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보이는데도,
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했다.
"그녀에게는 혼인을 약속한 상대가 있습니다."
"네?"
"세키님은 그녀의 배경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그녀가 재벌집 아가씨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뭔가 제법 복잡한 얘기가 될 것 같다는 느낌에 세키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세키님과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뭐..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던 정략결혼 같은 건가요?"
"생각보다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그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집안에서는 벌써부터 그녀의 혼인 상대가 정해진 것 같았다.
재벌집 영양이 숙명이었을까? 그녀는 그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에도 별반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혼인 시기는 대략 3년 후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성인이 되면 곧바로 집안에서 일을 진행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번 소개팅은 어째서...?"
"바로 그것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나선 겁니다."
"........."
다시한번 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이제껏 남자와 어울려본 적도,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다고 한다.
이번 소개팅은 그녀에게 혼인 얘기가 거론되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일탈의 하나로
선택하게 된 행동이라나...?
"세키님께서 그녀의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한번도 사내와 어울려보지 못한 채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3년 후에 결혼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 시기에 공교롭게도 가까운 지인이 찾아와 그녀에게 소개팅에 참석해주길 권한다면요?"
도대체 이런 얘기를 나에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도대체 이런 얘기를 나에게 알려주는 이유가 뭔가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 세키가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물어본다.
"이번 이벤트가 두 사람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네?"
"잠깐! 거기 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
"!?"
갑작스럽게 끼어든 고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으며 가로질러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화가 난 듯, 잔뜩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버지니아-가 있었다.
"타케루. 그에게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이런 일 하라고 내 스케쥴을 알려준 게 아니었다고..."
"저.. 그게 아가씨.."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타케루라는 남자는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기백 같은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요. 계속 눈에 띄면 타케루와의 인연은 오늘까지가 될 줄 아세요."
".... 알겠습니다. 아가씨. 댁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금세 꼬리를 내린 그는 잠시 세키를 바라보더니 그에게도 작별의 인사를 건냈다.
"아무쪼록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
세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 남자는 그렇게 작별인사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
"......"
갑자기 가게 안이 침묵에 감돌았다.
가게 손님들은 방금 전 그녀의 화끈한 모습을 바라보며 꿀먹은 벙어리처럼 그녀와 세키를
번갈아쳐다보며 지금 상황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 우리 데이트는 끝난 게 아니니까... 나갈까?"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그녀가 먼저 세키에게 제안을 했고,
세키 역시 가게를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와 함께 밖을 나서며 물었다.
"예상외로 시간이 지체되어서, 이제 영화를 볼 수는 없을 것 같아"
"...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세키의 푸념어린 말에 그녀는 미리 생각해둔 곳이 있었던 듯 어딘가를 향해 걸어나갔다.
걷는 폼이 뭔가 어색해보여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 세키는
그녀가 멈춰섰을 때에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북적거리는 인파들을 지나쳐 그들이 온 곳은 어느 DVD방이었다.
"영화관은 이미 늦었으니 여기서 영화를 보자."
"음.. 보고 싶은 게 있어?"
"그래.. 같이 봐줄래?"
"물론..."
미인과 함께하는 영화 구경은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영화가 그 어떤 영화든지 상관없었다.
- 장르에 상관없이.. 심지어 망작의 기운이 느껴지는 3류 작품이라 할지라도.. -
왜냐하면 그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즐길테니까...
그녀는 세키에게 먼저 방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 후, 점원에게 어떤 영화를 주문하는 것 같았다.
세키가 방안에 들어오니, 커다란 TV 화면 앞에는 영화를 편히 볼 수 있게 넓직한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커다란 홈시어터 스피커와 에어컨 덕분에 영화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세키가 먼저 소파에 앉자, 그녀도 그의 옆에 마주 앉았다.
두근두근...
영화관과는 다르게 이 공간 안에 그녀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갑자기 방안의 조명이 모두 꺼지며, 삽시간에 방안은 어둠으로 가득차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TV 화면이 환하게 빛을 뿜어내며 화면 속에 낯익은 문구가 보이는데...
"...타이타닉?.."
"본 적 있어?"
그녀는 내가 이 영화를 보지 않았었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전후사정도 모른 채 무턱대고 거짓말을 둘러댈 수는 없었다.
"...음.. 뭐라고 말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까.."
"그래? 다행이야... 그럼 얘기하기가 더 편해지겠는 걸..."
"무엇을?"
지지지직..
갑자기 TV 속 영화가 빠른 속도로 [빨리감기]로 장면을 넘기기 시작했다.
세키는 순간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전혀 당황스러워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까 전 방안에 들어오기 전에 그녀가 점원에게 미리 부탁했었던 것 같다.
영화는 한참동안 [빨리감기]를 통해 장면을 넘겨대다가 마침내 [재생] 되었는데,
어느 장면이냐하면, 잭(배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로즈(배우 : 케이트 윈슬렛)의 알몸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젊은 남녀 두 사람만이 있는 방안에서 아무리 친숙한 영화라해도
여배우의 알몸이 나오는 씬의 등장은 세키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그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TV 화면 옆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방안이었고, TV 영상만이 빛을 뿜어대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 옆으로 걸어가자,
세키의 위치에서는 그녀의 표정을 전혀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 이미 이 영화를 봤다고 하니, 너의 솔직한 생각을 알고 싶어. 내 질문에 답해줄래?"
"... 니가 원한다면... 뭘 알고 싶은데?"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로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로즈?"
"이 장면이 - 잭이 로즈의 알몸을 그림으로 옮기는 장면 - 지나면 두 사람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와.
기억하고 있니?"
"그래.. 분명히 그런 장면이 나왔었지. 분명하게 기억이 나."
"그녀는 약혼할 남자가 있었어. 비록 그 남자가 그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로즈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잭이라는 남자에게서 사랑을 느껴버려."
"........."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원나잇스탠드지!"
"........."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이거야. 그녀가 음탕해보이니?"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궁금했으나, 세키의 시야에서는 그녀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가려진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세키가 생각에 잠겨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약간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와 결혼이 결정된 남자가 있었어.
영화 속에서는 그녀의 사랑을 아름답고 멋진 영상으로 표현해주었고, 빌리(로즈의 결혼상대자)에 비해
잭은 너무도 멋진 남자로 등장하잖아?
만약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넌 로즈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고 싶어."
듣고보니 꽤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남녀관계에 대한 세키의 가치관을 알고 싶은 걸까?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상황임에도 생각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영화 속 로즈와 잭의 사랑은 분명 아름답고 애절했으나, 그것이 실제 상황이고
세키가 제3자의 시점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
그토록 말 많던 내면의 소리조차 숨죽이며 침묵한다.
"이제 니 생각을 알고 싶어."
표정을 볼 수 없는 그녀가 초조함이 가득찬 목소리로 그를 재촉하자,
세키는 생각을 정리한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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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버지니아의 마음.
"나라면 로즈의 사랑을 존중해주고 싶어."
"......"
"제3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사랑을 판단하는 건 주제넘는 짓이라 생각하지만,
버지니아가 궁금해한다면 내 생각을 얘기할께.
나라면, 그녀의 사랑을 응원해줬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 선택했어. 그것은 존중받아야한다고 생각해.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혼약자보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잭과의 사랑이 아름다워보이는 이유 또한
그녀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그러므로 버지니아 너의 첫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자면...
그녀는 아름다워. 결코 음탕해보이지 않아."
"...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니 생각은 변함없었을까?"
"물론.."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에, 영화는 드디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김이 잔뜩 낀 마차 안에서 여주인공 로즈의 손자국만이 두 사람의 섹스를 표현할 뿐이었지만,
지금 방안에 우뚝 서있는 두 남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시키고 있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
".....!!"
스윽.
천이 피부를 스쳐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 저편에서 그녀가 외투를 벗는 듯한 모습이 보이자,
세키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에게로 한걸음 다가오며 어깨끈을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TV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등지고 있어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나 역시, 로즈와 마찬가지야."
"....?!"
"타케루를 통해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고3이 되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된 사람이 있어."
"....."
"불과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어. 난 이제껏 남자하고는 제대로 대화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한 가지가.....
이렇게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진 게 너무 싫었어."
"....."
"난.. 내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누군지 짐작이 가니? 너와 가까운 사람이야.."
"... 짐작이 가..."
"그래.. 내 하나 밖에 없는 진실된 친구... 아오이야.."
"....."
"그녀는 날 위로해주었고, 결혼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결혼 전까지 괜찮은 남자애들을 만나 추억을 가져보라며, 이번 소개팅을 내게 주선해주었어."
"......"
"그리고 오늘 난... 영화 속의 로즈처럼..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
".... 설마?!..."
순간 가슴이 움찔거리며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짜맞춰지지 않았던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나 싶더니,
퍼즐조각들이 한꺼번에 맞춰지며 세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 세키 너야.. 너와 키스를 나눌 때 난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어.
몸이 떨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었지....."
그녀의 이어지는 고백이 세키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다.
"내가 눈을 떠서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누군지도 알겠니?"
두근두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수록 세키의 심장은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정이 깊어져갔다.
"너야.. 세키! 지금 내 머릿 속은 온통 너 밖에 없어....
나도 내가 이렇게 음란한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니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난... 너에게 키스를 하고 싶어."
뜻밖의 고백이였다.
도도한 귀족 아가씨라는 그의 편견과는 다르게,
그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정직함으로 그의 마음을 두드리더니,
그가 잠깐 방심한 사이 마음 속 빗장마저도 열어젖힌 듯한 느낌....!!
"니가 날 음란한 여자로 바라볼까봐 겁이 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데...
이런 내 마음을 니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워.."
"버지니아... 난..으읍!"
세키가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하려할 때 그녀는 몸을 던지듯 그에게 안겨왔다.
그녀의 두 팔이 세키의 목을 껴안으며, 그녀의 입술이 세키의 입술에 맞부딪혔다.
온몸을 다한 육탄공세를 버텨내지 못한 세키의 몸이 뒤로 허물어졌다.
넓은 소파 등걸이에 부딪힌 세키는 그 충격으로 옆으로 비스듬이 기울어져 소파 위로 쓰러졌는데,
그가 정신을 차려보니,그의 몸 위로 올라탄 듯 그를 짓누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TV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감싸여져 눈부시게 빛나보였다.
"버지니아!!"
"하아하아... 세키.. 날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난 원래 이럴 생각으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지금은 이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어."
거칠게 그의 몸을 쓰러뜨린 여파인지, 그녀는 연신 힘겨워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하아...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지금이라면 널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TV 영상에서 나온 빛이 잠시 밝아졌다.
방금 전까지 순수함을 가득담고 있을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눈빛이 색기에 가득찬 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양쪽 손을 뻗어 각각 세키의 양팔을 부여잡더니, 그녀의 가슴을 향해 끌어당겼다.
뭉클 뭉클.
드레스 안에는 브레지어가 없는 듯, 탱탱하고 보드라운 그녀의 젖가슴 감촉이 세키의 손아귀를 통해 전해져왔다.
"히이잇!!"
세키의 두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가볍게 짓눌렀을 뿐인데,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는 것을
(그녀의 몸에 깔려있는) 세키는 알 수 있었다.
"아아..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혼잣말인지 체념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세키의 손을 부여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위치를 이탈해갔다.
그녀는 팔굽혀펴기 동작을 하듯, 두 손으로 세키의 양쪽 어깨를 짓누르더니,
팔꿈치를 굽힘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다가와 세키의 입술이나 뺨, 목덜미 주변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쪽~ 쪽~
그의 몸에 키스마크가 새겨지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지만,
다른 누구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방음장치와 영화 소리가 제 역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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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어젯밤에 친구가 찾아와 집에서 묵고 갔습니다.
일하던 곳에서 회식자리까지 생겨서 머릿 속에 구상해놓은 내용을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서둘러 글로 옮겼는데.. 제대로 표현이 된건지 모르겠네요.
수정작업없이 곧바로 올려진 글들이라 감정표현 같은 게 제대로 묘사된 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네요.
아무튼 이제부터 2부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