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4-3 완결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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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 유카... 이봐... 유카..."
"아..냐... 아냐... 그런거, 거짓말... 안돼, 아냐, 아니야... 안돼!..."
"유카... 괜찮아?... 유카..."
"...카,카즈야!?"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 아마노의 얼굴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냐, 카즈야, 미안해요, 미안해요... 용서해줘, 용서해줘..."
유카가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의 배신을 몇번이나 "미안해요"라고 하며 계속 사과하는 유카에게, 아마노는 상냥하게 "괜찮아, 유카. 나쁜 꿈을 꾸었구나. 괜찮아, 안심해. 자, 천천히 심호흡하고, 진정해"라며 차분하게 다독였다.
꿈!? 그랬구나... 또 그 꿈을 꾸었구나...
잠에 들 때마다, 류지에게 당한 능욕이 생생하게 떠올라 매번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잠이 들면 반드시 악몽을 꾸었다. 점점 깊이 잠들기가 어려워져서, 겨우 대여섯 시간 남짓 자면서도, 심하면 십여 분 간격으로 깨어나곤 했다. 아무리 누워있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까 점점 피로만 쌓여갔다. 악몽이 두렵고, 이젠 잔다고 하는 행위마저 두려워하게 되어, 지금은 수면제없이는 한숨도 잘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괜찮으니까, 진정해. 이거 봐, 차가운 거 사 왔어. 차, 괜찮아?"
렌트카의 조수석에서 살짝 내다 본 창밖의 경치는 토호쿠도 어딘가의 조그만 주차구역이었다. 북쪽을 향해 달리던 차 안에서, 극도의 긴장과 피로로 인해 어느새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또 악몽을 꾸고 말았다.
"...고마워"
아마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고개를 뒤로 제꼈다. 파우치에서 꺼낸 흰 알약을 자연스럽게 손 안에 숨겨 가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마노는 토호쿠도를 달리던 중에 깊이 잠든 유카가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가까운 주차구역에 차를 세운 것이었다.
몇 주만에 만난 유카는, 머리색깔은 예전처럼 검게 돌아왔지만 트레이드마크였던 포니테일은 더이상 하지 않고 있었다. 피부에 윤기는 사라지고, 예전과 같은 명랑함도 쾌활함도 없고, 늘 뭔가 두려워하는 모습.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마리에의 말에 의하면 "많이 회복된 거에요". 일 주일 남짓, 그 동안 유카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휴양중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어제서야 간신히 마리에에게 유카를 만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그 즉시, 마리에에게는 "기분전환"같은 적당한 이유를 대고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유카도 거부하지 않았다. 운전하는 내내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건 아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렇게 빨리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두번다시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몰랐다.그렇지만, 다른 형태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니,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자신에게 타일렀다.
"쭉 타카쿠라선생님 별장에 있었다면서? 별장, 어땠어?"
유카의 눈에 악몽의 흔적인지 옅게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마리에로부터, 가능한 한 류지에 관한 말은 피하도록 주의받고 있었다. 그리고, 유카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도. 어떤 계기로 끔찍했던 능욕의 기억이 갑자기 플래시백 될지 모른다면서. 만일 유카가 패닉상태에 빠져도 당황하지 말고, 다정하게 다독여주라고 지시받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질까... 안돼, 그런 생각 하면... 마음 약해지지 마.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에... 아, 별로..., 아무것도... 아냐..., 진짜, 이젠... 만나지 않을거니까..., 거짓말 아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신중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가고 있는 장소는 자신과 류지와의 관계, 그 핵심. 아마노에게 있어서 "도박"이나 다름없는 승부수였다. 최악의 경우, 유카를 자극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지 않으면...
"선생님네 별장말야, 분명 엄청 크고 훌륭할 거 같은데.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응... 깜짝 놀랐어. 끝이 안 보였어. 전부, 해안까지 전부, 별장 부지였거든..."
"와~, 그래? 다음에, 나도 꼭 가보고 싶다. 근데, 그렇게 큰 별장에서 지루하거나 하진 않았어?"
별 것 아닌 대화조차도, 서로 상대와의 거리,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묻고 답하는, 어색한 신경전과도 같은 이야기의 교환. 이제와서 두 사람 사이에 패인 도랑의 깊이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거..없었어. 마리에선생님이라든지, 미키씨라든지, 료지씨라든지..., 번갈아 가면서 옆에 있어줬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고..."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유카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청바지 무릎 위에 양손 주먹을 꼭 쥔 채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노는, 별장에 그 밖에도 마리에가 준비한 정신과 의사나 임상 심리사가 상주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계속 옆에 붙어 유카를 진찰하고 있었다고 했다. 바로 조금 전에 유카가 삼킨 흰 알약도 아마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는 약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저 멀리 산의 능선이 주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유카도, 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거듭해서 계속 생각만 반복했다. 결과를 두려워했다... 나는 유카가 꼭 다시 회복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때는, 그 때야말로, 내가 반드시, 이번에는 꼭 지켜내고 말리라...
"이제, 출발해도 될까?"
"응... 하지만"
"응? 뭐?"
"저기... 카,카즈야, 어디 가는거야?"
"...유카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
"나에게?"
"그래...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난 장소를, 유카에게 보여주고 싶어. 알려주고 싶어"
아마노가 시동을 켜고 천천히 악셀페달을 밟았다. 유카는 곁눈질로 살피고, 아마노의 표정으로부터 뭔가 베일듯한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한 시간도 채 안 남았어. 아마,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거야"
한편 그 무렵-.
마리에는 교수실에서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첨삭지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빨간 펜으로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 백의의 등으로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어느새 방에 들어왔는지, 쭈볏거리며 사츠키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나, 사츠키, 무슨 일? 잠깐만 기다려요, 그동안 하도 여러가지 일이 많아서 리포트 채점이 밀려버렸네". 식은 커피를 손에 들고, 데스크 체어를 휙 돌려서 사츠키쪽을 다시 바라 보았다.
"정말이지 큰일났다니까. 에휴~, 힘들어라. 어시스턴트라도 한 명 둬야 할까봐". 총명한 눈동자는 여전하다. 빙빙 어깨를 돌리면서 푸념을 늘어놓던 마리에가 "자, 사츠키, 오늘은 무슨 일로?"라고 물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사츠키 앞에, "괜찮아요". 커피를 내려 놓았다.
"선생님께는, 너무나 많이 폐를 끼쳤습니다. 저, 아직 제대로 사과하지 못해서, 선생님께 제대로 사과드리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모리사키선배에게도, 할 수만 있다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래서..."
"그래요, 알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와 주었군요. 고맙네요. 하지만, 유카씨를 만나는 건 조금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오늘부터, 아마노군과 숙박예정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어디랬지, 토호쿠쪽에 갔다 온다고 했지 아마. 유카씨 기분전환 시켜준다면서"
"네!? 선배하고, 그렇습니까? 이제... 괜찮아진 건가요?"
"흐~음... 애매하긴 하지만, 글쎄, 어떨까나. 의사선생님은, 조금 걱정했지만"
"잠깐, 선생님, 어떨까나라니, 그런"
"언젠가는, 두사람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게다가 사츠키도 알고 있잖아, 아마노군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 유카씨한테 안 좋은 일은 안 할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그렇지, 사츠키, 그 증거로, 이 리포트 보여줄께요"
마리에가 책상 서랍에서 리포트 용지 한 다발을 꺼냈다.
"이건!?"
리포트 타이틀은 "유카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과학적 고찰". 아마노의 자필서명과 함께, 그렇게 손글씨로 써져 있었다.
"지난 주에 말이죠, 아마노군에게 숙제를 냈어요. 그 리포트 보고 내가 합격점 줄 때까지는 유카씨 못 만나다고. 그랬더니, 어제서야 겨우 제출한 거야. 읽어 볼래요?"
"아..."
표지를 넘기더니, 사츠키가 가만히 시선을 떨군 채로 굳어졌다.
"이해력이 지나치게 좋은 것이 아마노군의 뜻밖의 취약점이었지만, 약간 변한 것 같은 느낌 안 들어요? 그치? 아마노군 치고는 꽤 잘 썼지 뭐야. 85점 정도 줄까나"
마리에가 기쁜듯이, 전혀 때묻지 않은 소녀와도 같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유카를 좋아하고, 그리고, 유카를 좋아하는 마음에 이유같은 건 없습니다. 단지, 좋아. 그것뿐입니다. 따라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불과 두 줄만 쓰여져 있었다. 나머지 29장은, 농브르(*주, ノンブル, nombre, 프랑스어, 인쇄물의 페이지 넘버)만 있는 백지, 호치키스로 철해져 있었다.
길고 긴 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이 간신히 다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일몰 직전이었다. 토리이(*주, 鳥居, 신사 입구에 서 있는 기둥 두 개로 된 문)를 지나 돌층계 끝에, 울창한 거목으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신전이 서 있었다.결코 크지는 않지만 역사와 위엄을 느끼게 하는 중후한 신사의 본전이었다.
"...여기는 신사?"
"그래. 어두워졌으니까 발밑에 조심해"
자갈길을 지나 아마노는 익숙한 걸음으로 본전의 뒷쪽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바짝 쫓아 유카가 따라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이번에는, 50개 남짓한 좁은 계단이 있었다. 석등과 토리이가 늘어선 급경사의 계단을 한걸음씩 천천히 올라갔다. 빛도 없고 꽤 어두컴컴했지만 유카는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왠지 신성한, 마음이 깨끗이 씻겨지는 것처럼 맑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곳에 사당이 있네..."
"이 사당이 여기 신사의 진짜 신전이야. 아래쪽의 큰 신전은 단순히 공물을 올리는 곳에 불과해. ...여긴 말이지, 이루지 못한 마음을 기리는, 사람들의 슬픈 마음을 기리는 신사.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지지 못한 영혼을 계속해서 위로해 온 신사였대. 그리고, 그 전승을 조사하기 위해서, 민속학자였던 아버지가 옛날에 이 마을을 방문하셨다가 어머니를 만나셨대. 유카, 여기. 유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기..."
"거짓말..이지"
유카는 아마노의 아버지가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회사에 다니셨던 것 같았고, 회사생활 중에 겪은 고생담을 들은 적도 있었다. 출판사의 영업관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민속학자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유카, 여기야"
헛간 정도 크기의 조그만 사당 옆으로 풀숲을 지나 10여 미터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잡초가 자라나지 않은 공간이 나타났다. 생울타리처럼 심어져있는 자그마한 나무에 둘러싸여 아무런 특색도 없는 네모난 돌이 달랑 하나 놓여 있었다. 어라? 이 주위의 나무, 이 잎은...? 설마 이 싹은!? 유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저기"
"유카, 이것이, 아버지 어머니 무덤이야"
아마노가 돌을 가리켰다. 예상외의 말에, 사소한 의문이 순식간에 잊혀졌다.
"아! 이게? 그럼, 늘 성묘하러 갔던 타마추모원에 있던 건?"
"지금은 묘석만 있어. 안은 텅 비었고... 뼈는 재작년 여름에 몰래 옮겨 여기 묻었으니까. 여기가 원래 계셔야 될 장소이기도 하고. 여기라면 나도... 평생, 잊지 않고 두 분을 모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여기로 묘를 옮겼어. 언젠가 유카랑도 한 번, 오고싶다고 생각했고"
늘 함께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느끼지 못 했다.
어느새... 그랬었구나... 아저씨 아주머니를 위해서... 슬픔도 다정함도 잊지 않으려고...
무릎꿇고 앉아 합장을 하는 아마노를 따라 유카도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아저씨, 아주머니, 오랜만이네요, 모리사키 유카에요...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랜만의 재회, 그리운 추억을 되돌아 보면서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나,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물어보며 살짝 눈을 뜨면, "카,카즈야!?". 그것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둠 속에서 피 색깔의 꽃이 겹겹이 피어 있었다. 묘석을 둘러싸고 있던 생울타리, 바로 조금 전까지 싹만 나 있던 여덟 겹의 꽃이 일제히 만발해 있었다.
"꽃이, 꽃이 피었어!"
유카의 목소리에 눈을 뜬 아마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이 꽃, 언제 필지 모른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이런 일이..."
"...오니츠바키가, 피어 있네"
유카의 말에 멍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믿기지가 않아..."
유카도, 아마노도, 아무 말 없이 오니츠바키를 바라 보았다. 때때로 차가운 바람이 숲 안으로 불어 들어와 잎이 스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에 잠긴 세계에서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부정(不貞)의 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단아한 분위기의 오니츠바키가 주위에 활짝 피어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예쁘다... 오니츠바키는 이렇게나 예쁜 꽃이었네...".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시간이었다.
응어리도, 죄책감도, 시기도, 의심도, 불안도, 후회도, 한심함도, 열등감도, 슬픔도, 괴로움도, 아픔도, 두려움도, 질투도, 무서움도, 외로움도, 조바심도, 망설임도, 추악함도, 모두 다, 아마노와 유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정화하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창백한 달빛에 떠오른 환상적인 오니츠바키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졌다.
"있잖아, 카즈야..."
"뭐?"
유카의 마음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로 전해지고 있었다.
"정말 많이 좋아해..."
"나도, 유카가 좋아"
"기뻐..."
유카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또 30분 정도를 더, 아무 말 없이 오니츠바키를 바라보고는 "이제 그만, 갈까? 유카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완전히 어두워졌을 무렵, 아마노가 일어섰다.
유카는 그러나, "먼저 숙소에 돌아가 있을래? 잠깐 혼자서 생각할 게 있어. 가능한 빨리 들어갈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 깜깜하고, 위험한데"
"아, 그래? 근데 괜찮을거야, 혼자 마을을 좀 산책하고 싶어서 그래.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아마노는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유카도 이미, 알고 있는거지?"
유카도 일어나 똑바로 아마노의 눈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내 동생이라는 거"
아마노의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유카는 확신했다. 틀림없어... 이제서야 겨우 모든게 들어맞아...
"응"
"그렇다면, 역전에서 왼쪽으로 100미터 정도 가면 "베니아야"라고 하는 선술집이 있을거야. 뭐든 궁금한게 있으면 그 가게 여주인에게 물어봐. 굉장히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고마워. 가 볼께"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을 두 사람 모두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혼자?"
"네"
"마실 것은, 어떤 걸로 하실래요?"
"우롱차로 할께요"
손님은 그 외 단 한 사람뿐. 안쪽의 카운터에 앉은 체격이 좋은 초로의 남자가 잔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가끔 거리낌없이 시선을 던지는가 하면, 유카와 시선이 마주쳐도 전혀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타지 사람이 꽤 드문 곳인지, 마을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나쳤던 가게나 가정집, 곳곳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물며 유카처럼 늘씬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라면 더욱 더 조그만 마을에 금새 소문이 날 것이다. 험한 산을 등지고 있는 한가한 시골마을. 야토(*주, 谷戸, 구릉지가 침식되어 형성된 골짜기 모양의 지형)로 둘러싸인 논밭 사이로, 납색 바다를 가로막는 제방에 흰 파도가 이는 작은 어항이 있었다. 좀 전에 아마노와 함께 찾았던 신사는 그 야토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부터 한참이나 계단을 올라간 곳에 있었다. 산 중턱 언저리에 자리잡은 사당이었다.
"내일도 날씨가 계속 이 모양 이 꼴일거라구?"
남자는 쭈글쭈글한 작업바지에 타올을 목에 걸고 있었다. 아무 특색없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찬장 위에 놓인 TV에서 나오는 일기예보에 남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무리 난방이 따뜻하다고 해도 T셔츠 하나만 걸치고 춥지도 않나? 기모노를 입은 중년여성이 칼질을 하며,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가 꽤 친밀해 보이는걸?...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렇게 파도가 거칠어서야 내일도 나가긴 틀렸구만"
쉰 목소리에 굵은 팔뚝. 베테랑 어부같았다.
"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안주요. 파도가 거칠어서, 오늘은 안주거리가 신통치가 않네요"
온화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신선한 산채무침에 조개 초절임. 척 보기에도 양심적인 가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즈야가 말한 대로 여기라면 편히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몰라... 하루 서너번도 채 기차가 서지 않을 것같은 무인역, 역앞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잡화상에서도, 술집에서도, 길가에서 만난 농부도, 모두들, "사카키사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금기라도 범하는 것처럼 무서워하며 굳어진 얼굴로 "몰라요" "몰라요", 입을 모았다. 심지어 어떤 가게에서는 억지로 등을 떠밀어 쫓아내고서는 바로 뒤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기도 했다.
"아니요, 굉장히 맛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저기"
"왜요?"
"...이 마을에 사카키사와라고 하는 사람이 살지 않았었나요?"
상냥한 미소 위로 의아해하는 기색이 스쳐갔다.
"사카키사와라는 이름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 이름을"
역시, 역시 여기가 류지군이 태어난 마을... 그리고, 카즈야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만난 마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여성을 대신해, "아가씨도 역시 도쿄에서 온 건가? 전에 왔던 친구들하고 아는 사이?". 그렇게 남자가 대답했다.
"전에 누군가 왔었나요?"
"여보, 그거, 무슨 말이에요?"
"2주 전이었던가? 연말 즈음에 도쿄에서 흥신소 직원인지 뭔지 하는 친구가 와서, 사카키사와 댁 이야기를 이것저것 조사하고 갔었다구. 아가씨도 그쪽 사람 아닌가 해서"
"아니요, 전 아니에요"
누구였을까? 누가 류지군 일을...? 유카는 마리에의 부탁을 받은 남자들이 앞서 여기에 왔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 뭐 아무튼, 그건 아무래도 좋고, 그런데, 그 친구들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구. 분명히 "그거"야, "그거""
뺨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비스듬하게 움직여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전혀 몰랐네"
"유키에가 연말에 감기걸려서 가게 닫았었으니까. 그 친구들, 어협 사무실에도 왔었는데 바로 쫓아버렸지. 그 집이 남긴 임야도 그렇고, 혹시 돈을 노리는 그런거 아닐까 싶었는데, 아가씨는 느낌이 다르네. ...그렇다곤 해도, 꽤나 그리운 이름, 별안간 몇번이나 듣게 되고 말이지. 도쿄에서 뭔 일이라도 있는건가?"
밥공기를 깨끗이 비우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전 그저, 류지군 과거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 뿐이에요"
"아가씨, 류지 알고있어!? 그 아이, 그 아이는 건강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
와장창,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이번엔 여성이 카운터 안에서 몸을 내밀며 물었다.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대학생이 됐구나, 그래요. 잘 됐네. 그 때,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정말 걱정했어요. 아, 혹시 아가씨, 류지 애인이에요?"
"...치,친구... 입니다"
"어머나 아쉽기도 해라. 하지만, 류지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래요? 여보?"
"그래, 사카키사와댁 장남, 살아 있었구만..."
"잘 알고 계셨나봐요, 류지군..."
좁은 점내에 TV에서 나오는 잡음섞인 엔카만 흐르고 있었다. 류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왠지 무척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싱크대에 틀어놓은 물을 잠그는 것도 잊은 채 천정만 쳐다보고, 남자는 술잔에 시선을 떨어트린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기, 가르쳐주세요, 류지군 이야기! 대체, 도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부탁드릴께요, 꼭 알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유카에게, "아가씨, 일단 앉지"라고 말하며,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그렇게 사카키사와댁 일을, 그 집 장남 일을 알고 싶은 건지, 그 이유 먼저 들어볼까?"
"...류지군, 쭉, ...과거에, ...등의 상처에, 사로잡혀 있어서. ...지금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어서"
"그런가..."
남자의 눈짓에, 여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마을은 말이지요, 아주 옛날부터 두 집안이 중심이 되어서 지내왔답니다. 하나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를 지키는 집안. 매 계절마다 있는 축제, 수십 년에 한번 있는 대축제, 이 마을의 제사를 맡고있는 집. 아가씨가 오늘 밤 묵을 그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집. 그리고, 또 하나는 대지주로, 집안 장남이 대대로 촌장을 맡아 온 집. 마을 행정을 주관하는 집안. 지금에 와서는 몰락하고 말았지만. 벌써,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났네"
"...그 집이, 류지군의!?"
"그래요, 사카키사와 가문. 그 모든게 20년쯤 전에, 젊은 학자 하나가 마을에 나타나고부터 시작되었답니다, 그 모든 비극이..."
카즈야 아버지...? 아저씨께서...?
"그 학자 양반은 마을에 남아있는 옛 전승과 그걸 계승하고 있는 신사, 그리고 수십 년에 한번 행해지는 대축제 "코오루이키(紅涙忌)"를 연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어요. 도쿄의 유명한 대학 강사라고 그러더라고요. 굉장히 열심히, 제사를 주관하는 집안은 물론, 마을 곳곳을 돌며 여러가지 문헌을 조사했죠. 당연히 사카키사와 가문의 창고도... 거기서 만난 거에요.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사카키사와 댁의 젊은 부인하고... 당시 그 집안 장남은 질투도 많고 찌질하기 짝이 없는데다 술버릇도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 부인이 잠시 외출만 해도 그걸 의심해서 손찌검을 하곤 했대요. 도시에서 온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와 지긋지긋한 남편의 속박에 지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사랑에 빠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지만, 광분한 그 장남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2년 넘게 전국을 이잡듯 뒤져 간신히 부인을 찾아내서는 억지로 끌고 와 집에 가두어 버렸지요. 그 때 태어난 아이가 류지였고"
"...그런 일이"
그렇다는 말은, 카즈야는 처음 도망쳤던 2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 아주머니, 밝게 웃는 얼굴이 참 잘 어울리시고, 부모님이 출장가고 안 계실 때면 언제나 친자식 대하듯이 날 다정하게 돌봐 주셨는데... 카즈야의 어머니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거라고는... 솔직히, 전혀 믿기지 않았다.
"결국, 부인은 그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간신히 도망갈 수 있었지만..."
"그럼, 류지군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류지도 같이 안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도중에 그 집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아이는 빼앗겼다고 해요. 그 남편이라는 사람, 분명히 아이만 수중에 두고 있으면, 언젠가 부인이 되찾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게다가 류지 역시, 나중에 크면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테고. 그리고..."
여성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글라스에 남아 있던 마시다 만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남겨진 류지가 어떤 짓을 당해왔는지, 아가씨도 봤겠죠? 등의 상처. 그 상처를 알고 있다면, 더 이상은 아무 얘기도 필요 없겠죠"
유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들, 알고 있었나요?"
"끔찍한 이야기죠.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도, 뻑하면 알몸으로 밖에 쫓겨나곤 했으니까. 저택 문 앞에서, 꼭 닫힌 문 앞에서,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 상처를 다들 봤을걸요. 세상에나, 끔찍하게도"
슬픈 표정으로 눈을 내리까는 술집여주인. 남자는 술잔을 비우고 카운터 위에 거칠게 잔을 내려 놓았다.
"하지만 말이죠, 가장 잔인했던 건, 우리들이었어요"
피를 토하듯 말하며, 됫병 술을 잔에 쏟아붇듯 따랐다.
"우리들, 보고도 못 본 척 하고, 아무도 그 아이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사카키사와 댁에 거역하거나 하면 마을이 돌아가지 않는다면서 다들 미적댔죠. 그 아이, 그런 우리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히 원망하고 있었겠죠..."
또, 술을 들이켰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년 전까지, 류지가 14세가 되던 해의 겨울까지, 류지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길에서 얼어죽을 때까지, 그 처참한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했다. 류지가 이렇게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온천 숙소에서 밥을 먹으며 유카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별반 차이는 없었다. 류지군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텨 왔을까... 아니, 그게 아니야, 참 용케도 버텨냈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희망으로, 뭘 의지해 버텨냈을까. 어쩌면, 그런 것 따위 없었을 지도 몰라. 도무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단단히 조여 왔다.
"...류지는 어떤 남자로 성장했을까"
여주인이 누구에게 묻는 것도 아닌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부인하고 꼭 닮은 예쁜 얼굴이었으니까, 분명히 미남으로 컸을 거에요. 류지는 말이죠, 참 심성이 곱고 상냥한 아이였어요. 집에서 밥도 못 먹고 쫓겨날 때면, 종종 가게에서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류지가 어쨌는지 알아요? 자기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면서도, 남은 음식을... 도둑고양이한테 먹여주곤 했답니다. 그런 아이였어요. ...그랬죠? 여보?"
유카가 고개를 들고 바라본 여주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류지 참 상냥하죠? 훌륭하게 자라주었나요?"
"...네"
유카도 눈물이 넘쳐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애써 눈물을 감추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고 여주인은 가게 안쪽 방에 들어가더니 한 통의 봉투를 손에 들고 나왔다.
"이거 류지한테 전해 줄래요?"
"이... 편지는!?"
그리운 필적으로 가게 주소가 수신인 란에 쓰여져 있었다. 봉투 안에는 또 하나의 봉투. 겉에 "류지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류지가 사라지기 2년 반쯤 전 여름에, 난데없이 이 편지가 여기 왔어요. 근데 도통 건네줄 기회가 없어서. 류지 아버지가 죽고, 이제 겨우 전해줄 수 있겠다 싶었더니 이번엔 류지가 "어머니를 찾으러 갈께요"라는 말만 남기고 마을을 떠나 버리고. 결국 전해주지도 못하고 여태까지 이렇게 갖고만 있었네요"
편지에 찍힌 소인 일자는 그 사고 당일. 하네다 공항내 우체국에서 속달로 부친 것이었다.
고개를 숙여 정중히 감사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서는 유카의 등 뒤로, 남자가 "류지에게 전해줘, 너무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을 던졌다.
신사 기슭에 자리잡은 숙소로 돌아오자 아마노가 혼자서 멀리 바다가 보이는 방 창가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며 유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돌아온 유카를 탓하기는 커녕, "어서 와. 추웠지? 목욕탕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와.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겠어"라며 반갑게 맞았다. 따뜻하고 상냥한, 예전 그대로의 아마노였다.
"다녀왔습니다. 늦어서 미안... 그것보다, 카즈야, 아까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도, 이미 내가 하려고 했던 말, 다 듣고 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냐?"
"...응"
"목욕 먼저 하고 와"
"그럼, 그렇게 할까"
똑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맑게 메아리쳤다. 건물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그렇지만 꼼꼼히 관리된 커다란 목욕탕이었다. 욕조에 잠겨 다시 머리속에 떠올렸다. 지금 신사 뒤에 피어있을 오니츠바키를. 그리고 또 다시 떠올렸다. 그 날, 그 밤에 주고 받았던 약속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간신히 연결된 기억을, 욕조에 잠겨 다시 한번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래, 이 눈동자였어... 그 눈동자였어... 오늘도, 그 날도, 똑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어...
그 날 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밤,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날 밤. 유카는 열대야때문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평소에는 라디오 FM방송을 음량을 작게 줄여놓고 BGM삼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지만, 그 날은 공교롭게도 건전지가 떨어져 버렸었다.
그 날...
정적을 뚫고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무슨 소리야? 뭐야? 신음소리? 흐느껴 우는 소리?... 설마, 카즈야?
깜짝 놀라 황급히 벽에 귀를 대면, 그 알 수 없는 소리는 분명 옆 집으로부터, 아마노의 방으로부터 들려 왔다. 같은 맨션 바로 옆 집, 두 사람의 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었다.
카즈야, 그 동안 한번도 울지 않았는데... 부모님 장례식 때도 내내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슬픔을 견디는 모습이 오히려 참석한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을 정도. 부모님 두 분 모두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같은 맨션에 사는 사람들만 몇몇 들렸을 뿐, 시작되고 10분쯤 지나자 아무도 없었다. 독경만 쓸쓸히 울리는 맨션 주민회관에서 카즈야는 가만히 앞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유카에게도, 유카의 부모님에게도, 결국 끝까지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고 이후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유카 부모님의 도움 덕에 지금까지처럼 맨션에서 살 수 있게 되자 기뻐서 활짝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분명 카즈야는 나같은 아이는 흉내도 낼 수 없을만큼 강하다고, 사내 아이니까 울지 않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카즈야가 울고 있었다...
베란다를 통해 옆 집으로 넘어가 유리창 너머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오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등이 떨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낡은 일기장 하나가 펼쳐져 있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카즈군!"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외치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유카를 보고 카즈야는 "우왕!", 울음을 터트렸다. 가슴속을 파고들며 통곡하는 카즈야를 그저 껴안아 줄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렇게 팔에 힘을 꼭 주고, 힘껏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까지 쭉, 그렇게 달래주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만 진짜 마음을, 약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기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카즈야는 나에게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워, 너무 무서워. 유짱..., 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엄마 아빠, 어디 간다는 말 같은거 전혀 안 했는데... 여느때처럼, 조심해서 학교 다녀와, 그렇게 인사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왜 그러신거지?... 나, 어떻게 하지?... 혼자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유짱, 무서워... 나, 이제부터, 어쩌지?..."
쉰 목소리로 연약하게 중얼거리는 카즈야에게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다정했던 아저씨 아줌마가 카즈야를 남겨두고 떠나셨을 리 없어. 난 그런 말 안 믿어. 절대 안 믿어. 분명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날 믿어..."
마음이 전해지도록, 카즈야를 힘껏 안아 주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카즈군한테는, 내가 있잖아,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카즈군은 혼자가 아니니까"
"진짜? 진짜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어 줄거야?"
"약속할께. 무슨 일이 있어도, 카즈군 옆에 있을께. 쭉 쭉, 카즈군과 함께 있을거야"
쭉 카즈야 옆에 있을께..., 그렇게 약속했다...
"절대, 절대로. 약속한거야, 유짱, 아무데도 가지 마... 약속...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어쨌든 쭉, 옆에 있어만 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처음으로 카즈야가 꼭 껴안아 주었다.
"응, 쭉 옆에 있을께. 아무데도 안 가. 카즈군만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할께"
"...고마워"
7년 전,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 보는 카즈야는 깊고 깊은 슬픔을 간직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오늘, 부모님의 진짜 무덤 앞에서, 만개한 오니츠바키 앞에서 보인 눈동자와 같았다. 작년 가을, 류지군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했던 그 날, 마쿠하리의 호텔에서 류지군이 보여주었던 눈동자하고 똑같았다.
남아 있던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그것을 간신히 찾아냈다. 지금, 손 안에 있었다.
지금까지 카즈야 이외의 남자에게 수도 없이, 그 어떤 구애를 받아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어째서 류지군에게만은 마음이 끌렸는지, 간신히 깨달았다. 류지군이, 카즈야와 똑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류지군 안에서, 나는 카즈야하고 똑같은 빛을 보았기 때문에. 류지군과 카즈야가, 같은 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피로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받을 수는 없지요"
필요로 한다라든가 그렇지 않다라든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김이 잔뜩 서려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목욕탕에, 유카 한 명만 있었다. 천정으로부터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소리만 들렸다.
"약속해놓고선..."
어째서 지키지 않은거야... 어째서 그런 소중한 기억을 잊고 있었던 거야...
벌써 불이 꺼진 방으로 돌아오면, 유카는 아마노가 덮고 있던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
"유카가 사과할 것, 아무것도 없어.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오히려 내쪽이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유카를 괴롭히기만 하고"
"있잖아, 카즈야..."
유카가 말을 잘랐다.
"정말 따뜻해... 왠지 나... 갑자기... 졸려..., 잘... 자..., 카즈... 야..."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몸을 감싸듯 팔을 돌려, 조용히 서로 껴안았다. 아마노의 온기를 느끼면서, 유카는 정말 오랜만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 느낀 마지막 따스함이었다.
"일부러 수고스럽게 행차하셨다. 냉큼 유카나 내놔"
교수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유카의 뒷모습을 발견한 류지가 "야, 유카, 돌아가자", 거칠게 내뱉았다.
"잠깐 기다려요.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유카씨잖아. 그런 룰 아니었던가?"
"룰? 이제와서 그게 뭔 상관이야? 유카는 내 물건이야. 안 그래? 바보카즈야, 내 물건 맞지?"
1월 하순. 후기시험을 앞두고 캠퍼스 안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게임 시한이었던 1개월은 이미 훌쩍 지나고 있었지만, 유카의 선택을 받지 못한 쪽이 사라진다, 그런 게임의 룰을 들은 마리에가 그랬단 말이지, 라고 하면서 사츠키를 통해 류지를 호출한 것이었다. 교수실 입구쪽에 가죽점퍼 차림의 류지가, 대치하듯 창가쪽에 아마노가, 그렇게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쏘아보는 류지를 아마노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바보카즈야, 건방진 표정 하고선. 어리버리한 녀석 주제에"
중앙에 놓인 소파에 류지에게 등을 돌리고 유카가 앉아있고, 마리에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자, 유카씨"
마리에의 재촉을 받고 유카가 천천히 일어났다. 스키니 진에 블라우스. 예전과 같은 옷차림. 포니테일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지만, 긴 머리카락은 검게 윤기를 띠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류지의 앞으로 다가갔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머리카락을 다시 염색한 거야? 야, 목걸이는 어쨌어? 유카, 나한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벌써 잊었어?"
"시... 이... 안... 더... 보... 시..."
"아아, 뭐라는거야, 안 들려"
짜증이 가득 섞인 류지의 말에, 유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싫어... 이제... 안 봐... 더는... 보기... 싫어..."
"뭐!?"
조그만 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거절의 말에 류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이게 까불어!?"
유카의 팔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아마노가 끼어들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싫어!".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짝! 류지의 뺨을 유카가 세게 후려쳤다.
"당신같은 사람, 정말 싫어. 이제 두번다시는 내 앞에 꼴도 보이지 마!"
그렇게 말하며 눈을 치켜뜨고 째려보는 유카에게, 류지는 차마 주먹을 날릴 수도 없어 당황하고 말았다. 본래의 "자신"을 되찾은 유카의 표정에는, 확실한 거절과 혐오의 기색이 완연했다.
"유카, 너..."
유카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류지의 눈 앞에 쑥 내밀었다.
"이거, 전해 받았어. 당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뭐,뭐야... 이게, 대체 뭔데...?"
"어머니께서 보낸 편지..."
"뭐,뭐라구!? ...없어. 나한테 어머니같은게 어딨어"
"읽어 봐, 류지군. 어머니 마음을 외면하지 마"
유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편지를 빼앗아 봉투를 거칠게 찢고는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꺼내든 편지를 잡아 먹을듯이 노려보던 류지의 눈에,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제와서... 이런... 엄마... 나를 찾으러... 그런... 뭐하러...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이런 짓... 엄마..."
"류지군은, 어머니한테 버려지거나 하지 않았어. 7년 전, 카즈야의 부모님은 류지군을 되찾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거야. 카즈야에게 비밀로 한 건, 혹시라도 너무 놀랄까봐 그러셨을지도.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류지군을 되찾고 나면 도쿄를 떠나 어딘가에서 가족 네 명이서 살 생각이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맨션을 내놓고, 이사 준비까지 다 하신거야. 그 사고만 없었으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그만 그 비행기 사고로...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카즈야까지, 그만 그런 슬픔을 안게 되어 버리고... 하지만 류지군, 이걸로 이제 알았죠? 아버지 어머니, 두분 다 류지군을 사랑하고 계셨어. 류지군의 부모님도, 류지군하고 떨어져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
"기다려 봐... 잠깐 기다려, 웃기지 마. 부모님이라니, 무슨 소리야... 내 아버지는 그... 그... 그 남자가, 날 소중히 생각했다니, 그게 무슨..."
"류지군 아버지는 아마, 그 마을의 그 남자가 아니고, 카즈야 아버지일거야"
"뭐!?"
유카의 너무나 뜻밖의 말에, 류지만이 아니라 아마노와 마리에까지도 무심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슨,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내가 바보카즈야하고 아버지가 같다니, 그런 말을 내가 믿을거 같애?"
"하지만, 어머니가 그 마을로 다시 끌려 오시고 열 달이 채 안 되서 류지군이 태어났으니까, 두 사람이 태어난 시기를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얘기도 아냐. 게다가... 카즈야 아버지 이름, 타츠야인걸"
장남이 카즈야(一也), 차남이 류지(龍次).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치면, 분명 "타츠야(竜也)"가 된다.(*주, 竜과 龍은 같은 "용")
"류지군은 분명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라고, 아줌마, 분명 그래서 류지군의 이름에 그런 의미를 담으셨던 거라고 생각해. 류지군에게 직접 말씀하시진 못 했지만"
"...내가 ...그런"
그럼, 내가 여태까지 해 온 짓은... 난 도대체...
편지를 꽉 움켜쥐고 눈을 감으면, 거기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언젠가 아마노의 방에 놓여있던 사진으로만 보았던 어머니의 얼굴. 그 때는 분노와 미움으로 마음속이 가득 차 있어서 어머니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사진 속, 새 교복을 입은 아마노와 유카의 뒤로, 따뜻하고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던 어머니의 시선이 지금 눈 앞에서 곧장 자신에게로 향했다.
"류지... 너무 늦어버려서 미안..."
그 사람이 어머니다라고 직감했다. 모두를 감싸안고 달래주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지금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엄마..."
"꺄악..."
류지가 갑자기 유카를 껴안았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유카의 귓가에 대고 류지가 뭐라고 한마디 속삭이더니 훽 몸을 돌려, 편지를 꼭 움켜쥔 채 교수실을 뛰쳐나갔다.
"류지군..."
교수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유카가 천천히 아마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리에의 표정이 여전히 걱정으로 가득했다.
"카즈야, 지금까지 고마웠어"
"나야말로, 유카가 있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정말로, 고마웠어"
유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아냐, 내가 카즈야에게 의지했지. 내가 의지가 되어주기로 했던 걸 잊어버릴 정도로. 카즈야에게 응석부리고, 의지하고, 매달리고... 카즈야하고 있으면, 폭신폭신하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정말 즐거웠어. 너무나 행복했어...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이제와서야 겨우 깨닫다니... 나 너무 한심하지? 그러니까, 이제부턴 그러지 않을거야. 정말 소중한 것, 잃어버리거나 떠나보내거나 하지 않게, 나 스스로 똑바로 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께. 나 더이상은 카즈야에게 기대지 않을거야. 이제부터 혼자 스스로 힘으로 걸어갈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이제부터는 혼자 힘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지금까지 유카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서로 마주보고 킥킥 웃는다.
"그런데말야, 아까 이야기말인데, 정말로 나하고 류지, 아버지가 같은 거야?"
"응. 틀림없다고 생각해. 난 알 수 있거든. 둘이 친형제라는거.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똑같았거든"
"똑같아!?"
"그래, 카즈야. 그것보다도, 우리들, 다음에 만났을 때, 또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문제없어. 분명 그럴거야"
"어째서?"
"왜냐면, 그 때는 유카가 첫 눈에 반해버릴 정도로 멋진 남자가 되어 있을테니까. 나한테 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바~보. 나도 지지 않을거야. 그래, 그럼, 약속해. 다음에 만나면, 또 연인이 되겠다고"
"알았어. 약속할께"
"그럼, 카즈야, 연구 열심히 해"
"유카도, 건강해"
"또 보자"
"응"
유카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을 전송하고, 아마노는 "선생님, 이런저런 걱정에 잔뜩 폐만 끼쳐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아직 이사 뒷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화학 연구소에서 있을 협의때 뵙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섰다.
마리에 혼자 남은 교수실과 연구실을 연결하는 다른 문이 열리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사츠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왜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거죠? 선생님, 왜 말리지 않은거에요?"
사츠키는 두 사람이 찾은 "답"에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리에가 "사람의 마음이란 건 말이지, 기적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라고 짧게 답했다.
"...그런"
"마음의 상처는 하루아침에 치유되거나 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파인 도랑은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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