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4-3 완결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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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듣고 싶지 않은 말만 더 또렷하게 들리는 건 무슨 영문일까? 그 무렵엔 늘 무신경한 어른들 덕에 잠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저기, 히데오 엄마, 저 남자애 있죠?"
"아아, 그... 부모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그 아이말이죠? 가엾게시리..."
"있잖아요, 그쪽한테만 하는 얘긴데, 저 아일 버리고 도망치던 길이었데요, 글쎄"
올려다보면 아직 여름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몹시도 더운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곤 했던, 간신히 얼굴만 아는, 같은 맨션에 사는 주부가 소근소근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카즈야에게도 당연히 그 말이 들렸을 테지만,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심지가 강하다라기보다 마음을 닫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뭔가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주위 모든 것과 마음을 차단해 버린 것 같은 표정. 나 역시도 그런 카즈야의 닫힌 마음 바깥에 있었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런 소외감을 카즈야로부터 느꼈던 적이 없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버리다니 정말이지 못된 부모 아니에요?..."
"분명 천벌을 받은게지요"
"아! 저기, 카즈군! 잠깐, 잠깐만!"
무책임한 어른들의 험담을 더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어서 무심코 카즈야를 부르고 말았다.
"...왜?"
얼음장 같애... 차가운 목소리였다. 카즈야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눈썹 하나 꿈쩍도 않는다. 낯가림하는 타입으로 처음엔 좀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성격으로 잘 웃는 카즈야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오,오늘 숙제, 모르는 게 있어서, 있다가 같이 해도 돼?"
"그래..."
우리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여름, 한 달 조금 더 전에, 대참사로 끝난 비행기 사고로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탑승객 중에 카즈야의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가명으로 탑승하셨던 덕분에, 신원 판명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난 걸 전혀 모르고 있던 시내의 대형 부동산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매물로 내놓았던 카즈야의 집에 구매자가 나타났다고 하는 연락이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사 업자한테서도, 어딘가 지방의 부동산 회사에서도, 연이어 전화가 걸려 왔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도중에 사고를 당했다-, 라고.
카즈야는 그런 험담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괴로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단단히 마음을 닫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 처럼... 그게 오히려 나에겐 더 안쓰럽게 보였다. 누구에게도 의지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혼자 힘들게 슬픔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고, 카즈야가 의지할 만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난 카즈야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난 그 때 이미 카즈야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좀 있다 놀러 갈께"
"유쨩. 지금..., 올래?"
맨션 복도, 집 앞에서 갑자기 카즈야가 "...아이스크림 2개 있는데"라고 말했다.
"으,응! 그럼, 그럴까?"
"다녀왔습니다..."
현관 문을 열며, 아무도 없는, 더이상 아무도 맞아줄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집 안을 향해 "다녀왔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마음이 너무 아팠다.
"카즈군, 카즈군 빙수, 쫌만 줘. 내 바닐라도 맛있거든. 한 입만 먹어 봐"
"...그래. 여기"
"으으으---, 차가와라---. 하지만 이거, 딸기 밀크랑 녹차, 블루 하와이가 섞여서는, 대체 이런 희한한 빙수는 어디서 산거야? 이걸 어떻게 먹나 싶었는데, 뭐 의외로 맛은 있네"
"...고마워"
"응!? 뭐야, 왜 그러는데, 갑자기. 놀랐잖아"
"신경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 괜찮아"
테이블 위의 컵 아이스에 시선을 떨어트린 채로 카즈야는 그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러니까, 신경쓸 필요 없어... 마치 날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별로 신경쓰고 그런 거 아닌데. 웃겨, 대체, 뭐하러 그런 수고를 내가"
"오늘, 숙제같은 거 없잖아"
"...카즈야는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어른들이 말했어.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다정하신 아저씨 아주머니가 그런 짓 할 리 없다고, 난 그렇게 믿는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카즈야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아까부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류지가 그렇게 말하며 커피 컵을 내려 놓았다. 좌식탁자 맞은 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카는 류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매일 매일, 너무 힘들어 하는데... 그런데도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거야... 힘이 되어 주질 못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그 날 밤... 그 날 밤에, 약속했어...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어째서,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류지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서렸다. 유카에게는, 자신과 아마노의 관계를 조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칼로 그으려고 하는 유카를 간신히 말리고 목욕탕에서 데리고 나와, 차갑게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고 전기 스토브를 켜고 잠옷만 걸친 어깨 위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넋을 잃은 유카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유카가 갑자기 아마노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당시의 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류지와 아마노의 관계같은 것, 유카는 전혀 모른다. 유카가 알 리가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렸을 적부터 일이 바빠 늘 출장이었어. 언제나 난 집에서 혼자 외톨이었어. 그런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 준 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옆집에 이사온 카즈야네 아저씨하고 아줌마였어. 왠지 이웃사람들하고 마주치길 꺼려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유난히 내게만은 친자식처럼 소중히 대해 주시고, 귀여워해 주셨어... 그러다 그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던 건 혼자 남겨진 카즈야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거였어. 알 수가 없었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우리 엄마 아빠는 아무리 집에 거의 안 계신다고 해도, 어쨌든 살아계시니까, 만날 수 있는 걸. 하지만 카즈야 엄마 아빠는... 이제 두번다시는... 말을 걸어도 괜찮을까, 그것조차도 알 수가 없었어...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고, 괴롭고 슬퍼하는데,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힘이 되어줄 수가 없었어... 마치 카즈야는 나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애서..."
"작작 좀 해! 녀석이 버려졌다고!? 웃기지 마! 녀석이 겪은 일 따위, 내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내가 얼마나... 줄곧..."
그녀석은 혼자만 편히 살아왔다. 버림받은 건 나였다... 내가 훨씬 괴롭고 힘들었다... 격렬한 감정을 터트린 류지. 하지만 유카는 조금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류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걸까... 카즈야는 강하다고, 굉장히 강한 사람이니까, 슬픈 일도 혼자 꿋꿋이 견딜 수 있을거라고, 자신의 장래, 나아갈 길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잘 알고 있었으면서... 멋대로 카즈야는 강하다고 생각해버리고... 카즈야는 내 옆에 쭉 있어 주었는데... 그래놓구선, 카즈야는 강하니까... 난 항상 의지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서는 멋대로 쓸쓸해 하면서... 하지만, 외로웠어. 정말 외로웠어. 난 카즈야가 없으면 안 되는데, 카즈야는 내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항상 외롭고 무서웠어. 언젠가 나를 카즈야가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고, 혹시 더이상 날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로웠어. 그렇게 되는게 너무 무서웠어..."
유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류지는 당황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응? 류지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뭐,뭐라고!?"
"류지군은, 그런 나를 필요로 한다고, 나한테 함께 있어달라고, 그렇게 말해 줬어. 내가 필요하다고, 내가 의지가 된다고 말해 주었어. 기뻤어...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처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류지군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다고, 나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카즈야가 아니라 류지군을... 가르쳐 줄래?... 그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일이었던거야?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해도 쌀 만큼... 이런 일 당해도 쌀 만큼..."
"..."
"응? 대답해 줘, 어째서 이런, 왜 이런 짓을... 이런 짓을... 한거야?..."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류지는 아무 말 없이 유카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하,하지 마! 손대지 마!"
바르르 몸을 떨면서, 무릎 위에 놓인 유카의 차가운 손을 잡으려고 하는 류지의 손을 뿌리쳤다.
뒤로 후다닥 물러나 류지로부터 멀어지는 유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겨우 생각해 냈어. 전부, 전부 다 생각났어. 간신히 알았어... 필요로 한다던가 하지 않는다던가, 그런 거,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걸.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카즈야는 날 줄곧... 항상... 정말, 나, 바보같애,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다니. 잊어버릴게 따로 있지... 나, 구제불능이야... 이제와서 깨달아봐도, 이미 늦었는데... 전부 내 탓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제대로 말해 봐"
류지가 다시 유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유카가 그만큼 뒤로 물러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용서를 빌거야..., 용서받기 위해서, 그러려면 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미 난... 차라리...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줘..."
작게 떨리는 유카의 목소리가, 류지를 바라보는 유카의 커다란 눈이, "말려봐야 소용없어". 기어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놈을 못 잊겠다...?"
"잊을 수 있을 리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복받쳐 오르는 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이 넘쳐 흘러 여윈 뺨을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왜, 어째서, 뭣 때문에 그딴 자식을"
"몰라, 모르겠어, 어떻게 해 그럼,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런 형편없는 개자식을, 그딴 자식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그런, 그따위..."
"이유같은 게 어딨어? 이유가 없음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설명할 수 없지만, 카즈야를 왜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좋아하는데, 좋고 또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 어쩔 수가 없는데"
크윽..., 류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항상 그녀석이야, 왜 내가 아니고. 뭐 때문에... 제기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순간, 류지와 서로 마주보던 유카의 몸에 공포가 되살아났다. 능욕당할 때마다 항상 보았던, 그 비뚤어진 미소가 류지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마음과는 정반대로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생생히 되살아나는 끔찍한 기억들. 시,싫어... 이젠 그런거 싫어... 또 그런 심한 짓 당할 바에는, 차라리... 여기서...
"녀석이 좋다구? 녀석을 배신했던 거, 잊으면 안 되지.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는거야. 너한텐 이제 나밖에 없어. 잘 알고 있잖아"
류지가 다가왔다. 공포에 사로잡힌 유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광기어린 류지의 눈동자에, 말이나 행동하고는 달리, 처절한 슬픔이 떠올라 있는 것도 지금의 유카로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그딴 자식, 네 안에서 몽땅 지워주마. 네가 누구 소유인지, 깨닫게 해주마"
"시,싫어어!"
다가오는 류지를 향해 유카가 좌식탁자 위에 놓여있던 커피 컵을 집어던졌다. 컵이 이마를 스쳐, 머리에 온통 커피를 뒤집어 쓴 류지가 잠시 꾸물거리는 틈을 타 잠옷차림의 유카가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꽁꽁 얼 정도로 추운 심야, 아파트의 녹슨 철계단을 맨발로 구르듯이 뛰어내려 도망쳤다.
"기다려! 어디 가!"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뒤돌아 보면, 계단 위에 선 류지가 복도등을 등진 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실루엣만 보여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안돼, 도망가야 돼. 여기 있으면 안돼... 유카는 잠시도 쉬지 않고 미친듯이 내달렸다. 살을 에는 차가운 북풍도, 날카로운 자갈이 발바닥을 찌르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멀리...
"꺄악!"
사거리까지 다다른 유카 앞에 갑자기 검은 색의 고급 외제차가 멈춰 섰다.
"뭐,뭐에요!?"
짙게 선팅된 조수석 창문이 스윽 내려와, 한눈에 "그쪽 세계"사람인 걸 알 수 있는 삭막한 인상의 백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무서움에 벌벌 떠는 유카에게 남자가 뭐라고 몇마디 말을 했다. 유카는 힐끗 뒤를 돌아보고, 뒤쫒아오던 류지가 거의 따라잡은 걸 보고 재빨리 남자 말대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차는 엄청난 타이어 소리를 내며 급발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는 류지를 뒤로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이제 괜찮아요..."
"사츠키!?"
맞은 편 좌석(*주, 리무진이라는 얘기죠)에, 입가에 반창고를 붙인 사츠키가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츠키는 "괜찮아요". 그 말만 한번 더 하고, 유카를 외면한 채 창 밖으로 흐르는 심야의 거리를 멍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라면 24시간 연속으로 가동되고 있을 컴퓨터도 연말연시를 맞아 전원이 꺼져 이 방의 BGM격이던 낮은 기기 가동음도 없이 심야의 연구실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실의 소파에 유카를 앉히고 검은 수트의 남자는 입구쪽으로 가 이 방을 경호하는 것처럼 거기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사츠키는 마리에가 아끼는 콜렉션에서 원두를 꺼내 커피를 내리더니 하나는 쭈볏거리며 남자에게 건네고, 또 하나는 유카 앞에 놓아 두었다. 유카는 영 불편한 듯 소파에 앉은 뒤로 쭉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연구실에 들어갈 때, 누군가 있는 건 아닐까 벌벌 떨며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무서워하던 유카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사츠키는 마음이 아팠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문했던 이 장소도 지금의 유카에겐 고통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몰랐다.
유카는 마치 숨조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꼼짝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조용한 방, 시간만 천천히 지나갔다. 살벌한 인상의 건장한 남자도 팔짱을 낀 채로 아무말없이 방 한쪽 구석에 장식물처럼 서 있었다.
사츠키가 뭔가 결심한 것처럼 식어버린 커피를 한 입에 털어넣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마주 앉은 유카를 응시했다. 커피가 찢어진 입술을 자극해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선배..., 모리사키선배...", 말을 걸어보지만, 유카는 사츠키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선배!". 초조함이 서린 커다란 목소리에 유카의 몸이 흠칫 떨렸다.
"류지한테서 도망쳐 어디로 갈 작정이었습니까?"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유카만 바라 보았다. 마치 심문하듯. 이윽고 유카는 "나같은 여자... 어디에도... 갈 곳, 없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츠키가 알고 있던 유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심약한 목소리였다.
"그래요? 뭐, 나한텐,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고개를 떨구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유카를 자극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나, 전부 다 얘기했어요, 내가 당신을 싫어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 류지를 도운 것도, 전부 다.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류지가 무슨 심한 짓을 했는지, 당신이 얼마나 음란 짓을 했는지, 모두 다. 그에게, 카즈야에게 털어 놨어요..."
움찔, 유카의 어깨가 흔들렸다.
"카즈야...,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전부 내 탓이라며. 때리고, 걷어 차고, 아무리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었어요... 정말 무서운 얼굴로... 날 절대 용서 못 한다고, 벌을 준다고, 그리고는... 강간했어요"
헉,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카가 고개를 들었다. 여윈 뺨, 갈라진 입술, 화사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으로 괴로워하며.
"당신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만들어 줄거랬어요. 몇번이나 몇번이나 저항하면 또 때렸어요. 그런데도... 나, 싫지가 않았어요. 왜냐면, 그게, 내가 원한 거였으니까.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 좋았어요, 당신이 당한 것처럼 다루어져도 좋았어요, 난 그의 것이 될 수 있어서 기뻤으니까..."
"...그럴..리..없어..."
"뭐라구요? 안 들려요"
사츠키의 날카로운 어조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면서도 "그런거... 거짓말이야...". 잠옷 옷자락을 꼬옥 움켜쥐며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츠키는 유카의 말 따위 깨끗이 무시하고 약올리듯 "고백"을 계속했다.
"카즈야, 날 부숴버린다고 그랬어요.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예전의 상냥했던 카즈야가 아니었어요. 이젠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려서는, 날 괴롭히는 게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좋은걸요. 카즈야에게라면,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버려도 상관없으니까"
왜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은, 그이는, 카..카즈야는...
"카즈야는 날 격렬하게"
"카즈야라고 부르지 마". 유카가 똑바로 사츠키를 노려봤다.
"카즈야는, 카즈야는 그런 짓 안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거나 하지 않아"
"당신이 카즈야에 대해서 뭘 알아요? 카즈야는 변했어요. 날 학대하고 희롱하고, 맘껏 가지고 노는 걸 선택했는 걸요"
발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을 일으켜 사츠키의 뺨을 손바닥으로 내려 친 뒤였다.
"카즈야를 깎아내리는 소리 하지 마. 절대로, 카즈야는 그런 짓 안 해"
유카의 지나치게 험악한 기세에, 검은 수트의 남자가 말리려는 듯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믿는다구요? 아직도, 좋아해요?"
"좋아해, 카즈야를 좋아해. 모두들 날 손가락질 해도, 카즈야에게... 미움받아도, 좋아해. 난 카즈야를 알아. 당신이 하는 말 따위 안 믿어"
"그러면서, 왜..."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목소리. 왠지 슬퍼보이는 목소리였다.
"아마노선배한테 가지 않는거에요? 아마노선배도 같은 마음인데, 모리사키선배, 변함없이 줄곧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알면서"
사츠키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강한 척하며 유카를 도발하던 표정에서 싹 돌변해, 쓸쓸해 보이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츠키... 설마... 일부러...
"그래요, 아마노선배가 그럴 리 없죠. 내가 알고 있는 아마노선배는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에요.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모리사카선배도..., 내가 알고 있는 모리사키선배라면, 반드시 만나러 갈 거에요. 모리사키선배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선배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노선배도 모리사키선배를 생각하고 있어요. "나같은 여자"라느니, "어디에도 갈 곳 없어"라느니, 그런 말 하지 마요..., 제발 용기를 내요..., 선배..., 선배가 갈 곳, 있잖아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카, 굵은 눈물을 뚝뚝 쏟아내는 사츠키, 두 사람의 모습을 교대로 바라보며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잠자코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츠키... 나는 카즈야를 좋아해, 그래요,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이제, 틀렸어, 늦어버렸어... 예전의 나로 이젠 돌아갈 수 없는걸... 그런데도, 이렇게 더렵혀진 주제에, 난 여전히 카즈야에게 응석만 부리고 있을 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어. 더는 견딜 수가 없어...이제, 이런 나... 필요 없어...
사츠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열심히 유카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때, "만날 수 없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왜..."
"미안해요, 늦어져서". 갑자기, 거의 새벽이 다 된 어슴푸레한 교수실에 이 방의 주인인 마리에가 긴 흑발을 휘날리며 시원스러운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마중나갔던 젊은 남자가 같이 들어와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남자 옆에 합류했다.
유카는 소파에 걸터앉아 어깨를 움추리고 있고, 옆에 사츠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앉아 있었다. 마리에는 두 사람의 모습을 슬쩍 곁눈질로 살펴 보더니 입구에 서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아저씨께서 살펴보러 가 주신 덕에 살았어요. 갑작스럽게 힘든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정말 아슬아슬했네요"
"천만에요, 마리에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쯤, 일도 아닙니다"
건장한 체구에 검은 수트라고 하는 전형적인 옷차림. 수도 없이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사나이답게 날카로운 눈매가 마리에의 "아저씨, 이번엔, 제대로 답례할께요"라는 한 마디에 풀어져 싱글벙글했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크게 소리를 높여 웃었다.
마리에가 한번 더, "고마와요". 그렇게 말하고 유카의 맞은 편에 앉았다.
"...유카씨"
다정한 마리에의 목소리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유카씨, 듣고 있어요?"
역시, 반응이 없다. 발목에 긴 갈색머리가 흘러내릴 정도로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맨발은 더러워진 채 그대로. 마리에가 주의깊게 상태를 살피면서 마땅한 말을 찾고 있는데, 사츠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선배... 네? 만나러 가요, 아마노선배한테... 사실은 보고 싶죠? 같이, 만나러 가요. 괜찮죠? 그쵸?"
"...카즈야를 만나?"
쉰 목소리로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즈야를..."
어쩜... 피부는 까칠까칠하고, 뺨은 잔뜩 야위고, 눈동자엔 빛이 사라져, 마리에가 알고 있던 유카의 밝고 화사한 미모가 몰라 볼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얼마나 가혹한 짓을 당해왔는지, 지금 유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리에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잔혹한 짓을...
"히익!?"
유카가 조그만 비명을 질렀다. 마리에 어깨너머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시,싫어..."
거칠게 갈색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싫어---!!". 갑자기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서,선배!?"
"싫어, 안돼, 만나고 싶지 않아, 만나기 싫어, 카즈야 만나기 싫어"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고 뜯어낼 것처럼 마구 잡아당겼다.
"이런 머리카락으로, 이런 몸으로, 카즈야를 어떻게 봐? 이렇게 더럽혀져서, 더러운 내가, 어떻게 만나? 이젠, 이젠, 카즈야 못 만나,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져 버렸어, 이제 카즈야 만날 수 없어!"
반쯤 정신이 나가 바닥에 무너져내려 웅크리고 앉아 흐느껴 우는 유카의 떨리는 몸을 마리에가 감싸듯 껴안았다.
"당신은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어..."
살며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예뻐..."
"거짓말 하지 마..., 카즈야를 배신하고, 셀 수도 없을만큼..., 온갖 짓을 다 당하고..., 음란한 짓도 잔뜩 하고... 더럽혀졌어..., 예쁘긴 뭐가 예뻐...,"
"당신은 도망치지 않았잖아. 아마노군을 배신해버린 사실로부터도, 아마노군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았잖아. 아무리 괴로워도 도망치지 않았잖아. 만약 당신이 도망쳐 버리면, 그 남자가 분명 아마노군을...,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래서 참은 거잖아. 그렇게 하는 걸로, 아마노군에게 빚을 갚으려고 했잖아. 전부 다 알려지고 난 뒤에도, 두 사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도, 자기 혼자 희생하는 걸로 모두 끝내려고 했잖아요..."
한바탕 오열을 터트리고 간신히 침착을 되찾고 있던 유카에게 마리에가 말했다.
"그 마음은 더없이 고상한 거에요"
"나..., 나..., 어쩌면 좋지?..., 모르겠어..."
"괜찮아, 아마노군이라면 분명, 당신을 받아들여 줄 거에요"
"그럴 리 없어. 그렇게 심한 짓 하고, 몇번이나 배신하고..., 얼마나 상처를 줬는데..., 그런 나를..."
"유카씨라면, 아마노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잖아. 그라면, 지금의 그라면 분명, 정말 소중한 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
죄책감에 짓눌려 마음이 산산조각나 부숴지기 직전의 유카에게 그 말은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즈야에게, 용서받았으면 좋겠어. 한번 더, 카즈야와.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지, 내 죄를 갚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좋아요, 하지만 적어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뭐라고 사과하면... 차라리, 그럴바엔, 나, 이제... 모르겠어요, 카즈야에게 뭐라고 하죠?..., 무슨 얼굴로... 이제 틀렸어요... 누가 좀 가르쳐줘요... 나, 어떻게 해야 되요?"
눈물이 쉬지않고 흘러내렸다.
"유카씨..."
부드럽고 따뜻한,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일찌기, 미키와 료지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는 온화한 봄의 햇살과 같은 시선이었다.
"아마노군을 만나면, 당신의 마음, 그것만 전하면 되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내, 마음!?"
"그래요... 당신은 충분히 애썼어. 더는 참을 필요 없어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이제 그만 쉬어요... 힘들이지 말고... 이제 느긋하게 쉬어요..."
마리에는 유카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에게, "아저씨, 저기 뒤에 선반에, 브랜디가 있으니까 좀 가져다 줄래요?"라고 했다. 멍하니 있던 사츠키가 "아, 제가 할께요"라며 끼어들었지만, "괜찮아. 아저씨, 브랜디에, 그것 좀 넣어줘요". 무슨 얘기인지 눈치챈 남자가 능숙하게 준비했다.
그간 계속 쌓인 피로와 수면제의 효과로 유카는 금새 골아 떨어졌다. 소파에 유카를 가로눕히고 사츠키가 모포를 그 위에 덮어주었다. 여윈 얼굴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 맞다, 파일 고마워요, 대충 읽어볼까요"
마리에가 들고 온 가방에서 루스 리프(*주, ルーズリーフ, 용지를 마음대로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노트)를 꺼내 남자 옆에 앉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곤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여기까지 조사해 주셨네요"
남자가 손에 든 브랜디 글라스에 마리에도 글라스를 가볍게 부딪히고 입에 가져갔다.
"마리에선생님, 이제 제법 마시게 되었군요. 그 무렵엔, 맥주 한 모금에도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아저씨도 참..., 다 미키 덕분이죠, 그 아이 덕분에 단련되었답니다. 어때? 사츠키도 한 잔 할래?"
"...아니요, 저는 됐습니다"
"뭐, 예상외로 간단했습니다. 우리쪽의 뒷조사로, 삭제된 미성년기록을 뒤져보니까, 그 친구, 전에 한 차례 마약류 소지혐의로 입건된 적이 있더군요. 그 길로 신원이나 출신지를 파악해서 현지로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게지요"
"그랬군요... 그렇다곤 해도, 이건... 정말이지...".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만한 슬픔이 아니네요... 마리에는 녹초가 되서 잠든 유카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이 정도로 아마노군을 원망하는 마음, 이해는 되지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저씨. 부탁하는 김에 하나 더, 괜찮을까요?"
파일을 덮었다.
"뭐든지, 사양하지 마시고"
"이 아가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니까, 당분간, 안전한 장소에서 제대로 진찰받게 하고 보살펴 주고 싶은데. 료지나 이 아가씨 가족한테는 제가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까, 바로 이즈의 별장으로 데려다 주셨으면 해요"
"맡겨 주십시오. 눈을 떴을 땐 푸른 바다가 보일 겁니다. 어이, 너희들, 가자. 바로 준비해라"
부하에게 명령하고 일어서는 남자에게 마리에가 말했다.
"그리고 이 목걸이, 유카씨가 깨기 전에 없애버려요"
"넷!"
"이런 건, 주인님께 허락받고 풀어야 하는건데. 안 그래? 사츠키"
"에!? 선생님!?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사츠키는 "엉뚱깽뚱"한 대사의 의미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릴 뿐. 마리에는 개구장이처럼 씩 웃으며 "우리집 양반, 모르고 있을텐데. 하필이면 정초부터 왜 자꾸 이렇게 큰 일만 벌어지누". 그렇게 말하고는 아침해가 비쳐 들어오는 창가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요?"
"뭔데?"
"저기, 모리사키선배가 류지한테서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 정말로... 선생님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입니까?"
"글쎄, 어쨌을까나. 내가 말한 대로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닐 수도 있지.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것 뿐일지도 모르고, 아님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예를 들면, 사실은 유카씨, 그 사카키사와라는 아이를 좋아했다라든가"
"그,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럼, 그 반대는 어떨까? 혹시라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어쩌면 처음의 상냥한 모습으로 돌아올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으면서... 만약 사츠키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애?"
"어떻게라고 하셔도... 어쨌든, 그럴지도, ...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어느 쪽이든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런 것보다, 정작 중요한 건 아마노군과 유카씨, 두 사람, 이제부터인걸"
"...그렇네요"
사츠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마리에에게 인사하고 교수실의 문 손잡이를 잡았다.
"사츠키..., 이제 더 이상 무모한 짓 하지 말아요. 아저씨들이 아파트를 치지 않았으면, 혼자서 사카키사와라는 아이네 집에 쳐들어 갈 작정이었던거야? 그거,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어"
마리에가 등너머로 말을 던졌다.
"집에 들어가면, 연락 줘요"
아무 대답없이 조용히 문을 닫는 사츠키의 뒷모습을 눈으로 전송하고, 마리에는 "다들 서투르기는...". 창 밖을 내다보며 햇살이 눈부신듯 눈을 찌푸리며 "정말, 뒤치닥거리에 손이 얼마나 가는지...",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마리에는 맨션으로 돌아가서는, 갑자기 아마노를 두들겨 깨워 "당신이 유카씨를 좋아하는 이유를 고찰해서 리포트로 정리하세요"라고 명령했다. 30매 이내로 기한은 1주일. "유카씨는 당분간 내가 맡아서 보살펴 줄테니까, 이제 더 이상 심한 짓 당하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건 안심해도 좋아... 하지만, 리포트 합격할 때까지는 만나게 해 주지 않을거야". 엄격한 어조로 아마노를 꾸짖는 마리에를 보고, 시트를 뒤집어 쓰고 있던 미키가 잠이 덜 깨 멍한 눈으로 "어서 와, 마리에... 이리 와, 꼬옥 안아주께...". 양 팔을 크게 벌리고 웅얼거렸다.
해가 떨어져 가로등이 켜진 길을 아파트를 향해 터벅터벅 걷는다. 유카가 자취를 감춘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생각나는 곳은 전부 뒤져봤지만 유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나는 곳이라곤, 집, 대학, 그리고... 병원, 고작 그 정도였지만. 자신이 유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어디 갈 곳도 없잖아,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야... 그렇게 애써 자위해 보지만,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집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제길, 뭘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거야, 나...
문득, 눈에 익은 실루엣의 여자가 걸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으로 캐미솔이 들여다 보이는 니트 가디건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 스커트, 부츠를 신고, 뭔가 고민이 있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저 여자는..., 사츠키잖아? 왜 여기 있는거지!?
"어이, 사츠키. 뭐 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류지. 어,어디 갔다 온거야?". 찾고 있던 사람이 거꾸로 말을 걸어오자 사츠키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그런 것보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잠깐 보자"
"나도..., 할 말이 있어"
공원 안쪽, 산책로 중간에 놓인 벤치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이미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져 몇 개 안되는 가로등만 벤치 주변을 비추고 있을 뿐. 한겨울 밤에 공원을 찾는 사람은 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
"저기, 류지. 언제까지 이런 짓 계속할거야?... 모리사키선배, 찾고 있었던 거지?". 고개를 떨군 채로 사츠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추위가 더욱 심해져 내뿜는 숨이 바로 얼어붙을 듯이 하얗게 변해갔다.
"암캐가 한 마리, 도망갔을 뿐이야. 녀석은 이미 조교가 끝난 암캐야. 나한테서 못 벗어나. 금새 돌아올거야, 걱정같은 거 안 해"
"거짓말, 걱정되니까 찾아다닌 거잖아"
"거 되게, 시끄럽네. 그러고 보니까, 너... 유카가 있는 곳, 알고 있는 거지? 또 쥐어터지기 싫으면 어디 숨어있는지 얼른 불어"
"...안다고 해도... 안 알려줘"
"뭐야?"
귀신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류지에게 "류지가 잘못된 일 계속하는 한 돕지 않을 거야". 무서움에 떨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건장한 남자라도 저절로 뒷걸음질치게 만들만큼 무섭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류지가... 더 이상은 아무도 상처입히지 말았으면 해"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고 했다"
"그만두지 않으면, 대체 언제 끝낼건데? 모리사키선배를, 아마노선배를, 언제까지 괴롭혀야 직성이 풀릴건데?"
"내 마음이 내킬 때까지다"
"...류지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류지가 하고 있는 짓은 저 두 사람만이 아니라, 류지 자신도 괴롭히는 거야"
류지가 사츠키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만하라고 했지. 이번엔 똑똑히 깨닫게 해 주마. 두번다시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는 얼굴로 만들어 주지"
"류지도... 그런 짓, 하고싶은 거 아니잖아"
"쳇, 내가 어떤 놈인지, 너한테도 가르쳐 주마"
"아,아파"
거칠게 쇼트헤어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벤치 뒤쪽 숲 안으로 사츠키를 질질 끌고 들어갔다.
"잘난 척 남한테 훈계하는 것도 지금뿐이야. 이제 곧 네 년을 너덜너덜하게 범해 줄테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류지의 힘을 당해낼 리 없고, 류지의 한 손에 양 팔이 꽉 붙들려 사츠키는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류지가 캐미솔을 간단하게 찢어발기자, 어둠 속에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하지 마, 이런 짓 하지 마. 아,아파!"
류지가 브래지어를 늦추고, 자그마한 유방을 힘껏 움켜잡았다.
"헤헷, 별로 경험이 없는 것 같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신선한 감촉을 즐기며, 이번엔 유두를 마음껏 비벼댔다.
"히익... 하아악..."
사츠키가 사람의 목소리같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류지가 가학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 극심한 통증에 저항이 약해진 사츠키의 손을 떼어 놓고, 새틴(*주, satin, 옷감의 한 종류. 공단) 스커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떨리는 허벅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손가락이 사타구니에 이르러, 연한 블루의 팬티가 나타났다. 류지의 손가락이 가랭이 사이로 파고 들어가, 떨고 있는 사츠키의 반응을 즐겼다.
"젖지도 않고 되게 빡빡하네, 이대로 그냥 쑤셔박아주지"
힘없이 감겨있는 사츠키의 눈에 어렴풋이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옆으로 돌린 얼굴에는 공포도, 분함도 아닌, 표현할 길 없는 슬픔이 떠올라 있었다. 좋을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듯이 양손을 내던진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을 뺀 것이 류지에게도 느껴졌다.
"미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조그만, 가녀린 목소리였다.
뭐야 너... 자제력을 잃게 만들었던 격렬한 감정이 단숨에 식어갔다...
"뭐야? 왜 저항도 안 해?"
"...지금까지 내가 한 짓을 후회하고 있어, 바보처럼...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류지도 깨달았으면 좋겠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류지, 사실은... 모리사키선배가 구원해 줬으면 하고 바란거 아냐?"
"이 년이"
화가 치밀어 올라 높이 치켜 든 주먹. 하지만 내려 칠 수가 없었다. 유카의, 미소를 잃기 전의, 상냥한 미소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까지다"
서슬퍼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와, 주먹을 치켜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류지가 뒤를 돌아 보았다. 살벌한 인상의 남자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당황해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왜, 나도 한 번 쳐 보지?"
"뭐?"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는 류지였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 그 남자의 박력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미간의 깊은 주름, 뺨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흉터자욱, 무엇보다도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행동거지가, 뒷 세계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을 법한 남자라고, 류지로서는 한 때 그 세계의 사람들과 엮였던 경험이 있는만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기같은 피래미하고는 격이 다른 남자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엉뚱하게도,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여자, 마리에에게로 향했다.
"...쳇, 역시 당신이 돈이라도 뿌린 모양이군. 이봐, 유카 어디로 빼돌렸어? 어디다 숨겨둔 거야?"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거야? 마치 내가 인신매매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마리에의 여유만만인 태도가 류지를 한층 더 자극했다.
"까불지 마! 유카는 내 여자다. 내놔, 당장 유카 안 내놔!?"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면, 힘으로라도 뺏아주마"
"애들처럼 막무가내로 떼쓰면 곤란하죠"
평소와는 다르게 위압적인 어조로, 마리에가 보디가드역할의 남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유카씨는 당신하고 만나고 싶어하지 않아요. 알았어요?"
"크윽..."
얼굴이 새빨개진 가죽점퍼 차림의 류지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황급히 달려온 탓에 청바지에 츄리닝이라고 하는 남 앞에선 어지간하면 보여주지 않는 편한 복장의 마리에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냉정하게 류지와 마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미터 남짓. 긴박한 분위기에 사츠키도 찢어진 옷을 손으로 누르며 눈 앞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한번만 더 말할께요, 유카씨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눈초리가 길게 찢어진 매서운 눈매로 째려보는 류지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시끄러, 유카는 내 소유야. 내 여자라구. 유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상관없어, 그 년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딴거 관심도 없어, 그 년은 내 거야. 아무한테도 못 줘. 지금 당장, 여기 가져다 놔. 안 그러면, 네 년도 너덜너덜하게 범해 주지"
노골적인 협박에 반응해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남자를 눈으로 말리고, 마리에가 말했다.
"여자를 그렇게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긴 속눈썹으로 덮인 커다란 눈동자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갑고 냉정하게 류지를 꿰뚫었다.
"그 어떤 능욕을 받아도,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바꿀 수 없어. 아무리 몸을 빼앗아도, 아무리 혹독하게 범한다 해도, 절대로 마음까지 빼앗을 수는 없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걸? 유카씨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걸, 당신에게 가르쳐줬을 테니까. 언제까지고 죽을 때까지 남의 탓만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그리고, 이제 끝내요. 유카씨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당신 스스로 그만 끝내요"
"빼앗았다고!? 이봐 아가씨, 다 아는 것처럼 고 주둥이로 나불대지 말아줄래? 빼앗은게 아니라, 되찾은거야. 유카는 원래, 바보카즈야가 아니라, 내 여자가 될 거였어. 그런 바보와 나, 둘 중 하나라면, 유카는 분명히 날 선택했을 거라고. 내 물건, 내가 되찾겠다는데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아?"
장난감이 갖고 싶어 땡깡을 부리는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처럼, 마리에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당신 처지, 동정은 가요". 한 차례 한숨을 쉬고 말을 계속했다. 류지는 얼굴을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당신, 참 어두운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누군가를 상처입혀도 되는 권리가 주어지지는 않아. 하물며 전혀 상관도 없는 유카씨를 괴롭히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짓이 어딨어? 알아들어요? 당신이 유카씨를 원한다면, 더욱 더, 아무리 괴로워도 혼자 감당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아무리 괴로워도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죠"
"싫어... 왜 나만... 나만... 언제나 나만... 녀석에게도, 카즈야에게도, 나와 똑같은 생지옥을 맛보게 해줄거야...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낼 수 없다구. 용서 못해, 카즈야만은 절대 용서 못해, 혼자만 편히 살다니. 복수할거야, 카즈야에게 복수할거야, 카즈야에게서 빼앗아 줄거야, 모조리 빼앗을거야"
"적당히 하세요!"
일갈하며, 마리에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유카씨의 몸과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 지금부터 평생이 걸려도 치유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줬어요. 아무리 슬픈 과거라고 해도, 누군가를 괴롭혀도 괜찮은 면죄부같은 거, 될 리가 없잖아!", 호되게 쏘아붙였다.
"그럼 난? 내 상처는 누가 달래주는 거야?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그저 혼자서, 어떤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지, 당신은, 당신은 알아? 아냐구?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거야!"
"알고 있을 턱이 없잖아요. 응석부리지 말아요..."
"뭐!? 누,누가..., 누가 응석을 부린다는거야?"
"당신말이에요, 당신. 가혹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제 아무리 슬픈 과거라고 해도, 극복하는 건 당신 몫이야.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어. 겨우 지켜봐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게 없어. 당신이 스스로 혼자 극복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슬픔을, 괴로움을, 연쇄시킬건지, 끊어낼건지, 어느 쪽을 선택할 건지 결단할 수 있는 건, 오직 당신 뿐이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언제나 항상 나 혼자만 괴로워하라는 거야!?
"겨우 하나, 딱 하나,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 그걸 바란 것이, 뭐가 나빠? 뭐가 나쁘냐구!?"
하소연할 곳 없는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류지가 치켜 든 주먹에, 남자가 마리에 앞을 막아서는 것보다도 빨리, 류지의 팔에 사츠키가 달려들었다.
"이제 그만해, 류지, 그만!"
너무 세게 달려드는 바람에 밸런스가 무너져, 두 사람이 뒤엉키듯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츠키는 류지의 팔을 부둥켜 안고, "제발, 이제 그만해". 열심히 매달리고 있었다.
"놔, 사츠키, 이거 안 놔"
"류지, 이제 그만두자, 이런 짓, 그만두자..., 류지도 힘들기만 할 뿐이잖아..., 그러면서...,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당신도 혼자가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당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려다보는 마리에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유카씨는, 조만간 만나게 해 줄께요. 그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려요"
이제, 안돼... 녹아버려, 녹아버릴 것 같애...
손목에, 발목에, 파고 드는 줄의 아픔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유카는 늘씬하게 뻗은 미각을 크게 벌리고 팔은 만세를 부르는 듯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X자로 묶여 있었다.
"슬슬 부탁할 마음이 든거야? 이제 편해지고 싶어?"
씨익 쪼개며 경박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류지의 얼굴이 멍하니 시야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러브호텔로 붙들려 들어와 벌써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계속해서 알몸으로 속박된 채로 류지의 애무만 집요하게 받고 있었다. 한계까지 곤두서 파열되기 직전인 유두도, 둑이 터져버린 것처럼 대홍수가 난 보지도, 류지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손가락과 혀가 절묘하고도 교묘한 움직임으로 맨살을 미끄러져 간다.
"아아... 아... 아아... 아아... 그런... 또.. 또..."
위로 봉긋 솟아오른 아름다운 젖가슴 전체에 류지의 혀가 꿈틀거리며 침을 발라대고 있었다. 기슭으로부터 슬금슬금 올라가 핑크색 유륜 직전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갔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차라리 고문에 가까운 젖가슴애무로 탱탱하게 부어오른 유방 안에서 갈 곳을 잃은 쾌락의 탁류가 소용돌이치며 열이 올라 화상이라도 입은 것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카즈야, 제발, 도와줘... 참으려고 하는데..., 몸이, 자꾸자꾸 뜨거워져..., 기,기분이 좋아져서... 참아야..., 참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서, 이상해져버릴 것 같애...
"헤헤, 참고 또 참은만큼, 미쳐버릴 것 같지? 지금 쑤셔 박아주면, 느낌 죽여주겠지? 상상해봐...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지도 몰라. 가고 싶지? 사실은, 가고 싶어 죽겠잖아". 류지가 귓가에 대고 악마의 속삭임을 반복했다.
류지에게 꿰뚫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유카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가고 싶어, 가고 싶어, 가고 싶어..., 더이상 못 참겠어, 더이상 참았다간 죽을거 같애..., 가,가고 싶어...
창이 없는 실내는 발그스름한 조명만 비추고 있어서, 땀과 타액으로 흠뻑 젖은 육체가 요염하게 달아올라 음란한 실루엣으로 떠올라 있었다. 지릿지릿 온몸을 내달리는 유열의 미세한 전류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소름마저 돋게 하고 있었다.
지금, 가게 해준다면..., 류지군의 그걸로... 가게 해준다면, 뭐든지..., 얼마든지... 아, 아아아..., 가고 싶어..., 제발, 이제...
류지에 의해, 어제도, 지금까지도, 이루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절정에 올라, 의식을 잃어버린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아직, 몸이 유린당할 때, 그 때마다, 그 이상의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진다. 오늘도 또 새로운, 경험한 적 없는 어마어마한 쾌락의 예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아아... 앗!? 아... 거,거기, 좋아!"
갑자기 류지가 허벅지 끝에서부터, 허벅지 안쪽을 무릎 근처까지 집게손가락으로 닿을듯 말듯, 달아오른 피부 위를 섬세한 터치로 쓰다듬었다. 그 순간, 유카의 등이 활처럼 젖혀져 위로 튀어올라, 땀이 흩날리고, 입술 사이로 환희의 탄성이 터져나오고, 침대가 삐걱거렸다.
유카의 성감대를 샅샅이 알아내 원래부터 민감한 몸을 한계까지 개발한 결과,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애태우는 애무만으로 몰아세워, 오랜 시간동안 느긋한 애무만으로 절정 직전까지 몰아넣고 절정의 순간, 그 직전에 딱 멈췄다. 그렇게 수도 없이 반복되어진 애무는 이미 고문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뭐라고 해도, 유카에게는 그저 고문일 뿐이었다.
갈 수 있었으면..., 가게 해줬으면... 가고 싶어... 하지만, 그러려면...
"아하앙... 하윽"
유두에, 류지가 입김을 불었다. 실룩실룩, 애타게 뭔가 갖고 싶은 것처럼 유두가 꿈틀거렸다.
가, 갈 것같애,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런데... 미치겠어... 이상해져버려...
"하아아악.. 흐으윽.. 아아"
이번엔 반대쪽 유두에, 똑같이 입술을 대고, 하지만 절대 닿지 않고, 살짝 숨을 내쉬었다.
"하으윽!... 아아.. 제,제... 제발..."
하지만, 하지만, 안돼... 카즈야... 도와줘... 카즈야... 제발...
"하아아악!"
세 번째는 클리토리스. 이미 표피가 완전히 벗겨져 한계까지 발기된 음핵에 내뿜는 숨이 닿았다. 자궁에 불벼락이 떨어져 거절할 의지를 산산조각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다. 유열의 충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육체가 이미 더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이제, 안돼... 카즈야, 나 말해버려..., 말해버릴 것 같애. 카즈야..., 미안..해... 용서해줘...
"...키 ...스 ...마,마크..."
"뭐라고? 안 들려. 마지막 기회야, 다시 한 번 말해봐"
"키스마크, 유카 몸에 잔뜩 만들어 줘!"
결국 유카는 울부짖듯이 애원하고 말았다.
"류지군의 표시, 가득 남겨주세요. 해줘요, 빨리, 잔뜩, 키스마크 해버려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가게 해줘요, 제발, 가게 해줘, 가고 싶어, 가고 싶어요!"
류지의 입술이 목덜미에 달라붙는 순간, 지금부터 주어질 유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미친듯이 떨려왔다. 마음속으로부터 유열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쪼오옥,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며 류지가 살을 빨아 올리는 것을 따라 이성도 같이 빨려 나와 사라져갔다. 대신해서 들어오는 것은 잊을 수도 없는 쾌락. 피부를 강하게 빨아들여 키스마크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하아아아아아..."
류지가 떨어져 나가자, 독살스러울 정도로 붉고 커다란 섹스의 흔적이 아로새겨졌다.
"어때? 기분 좋아?"
"...네. 굉장히... 류지군의, 키스마크... 기분 좋았습니다..."
"더 해줬으면 좋겠어?"
"네... 잔뜩,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녹아내려 텅 빈 눈동자가 류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착한 아이구나. 솔직히 말했으니까 상을 줄께"
"아아... 고맙습니...하으윽! 아흐으윽... 가... 가요... 가버려요...!!!"
그저 류지는 유카의 유두를 입에 물고 이빨로 깨물었을 뿐. 유카는 꽁꽁 묶인 채, 유두를 깨물린 것만으로 이 날 최상의 쾌락, 여자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엉덩이가 허공으로 높이 떠오르고, 부자유스러운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신음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술 사이로 군침까지 흘리면서,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깊은 죄책감과 맞바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상해지고 있어..., 나..., 이상해져 가... 이런 거, 처음... 이런 거 알면, 돌아올 수 없어, 미쳐버려... 이대로는... 이상해져... 이상해져... 버리면...
모든 게 새하얗게 튀어 날아갔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고 나서는, 양심하고 맞바꾼 쾌락을 손에 넣었다. 일단 한번 무너진 둑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뜨겁고 단단해, 류지군의 자지, 엄청나게 커---"
며칠을 굶주린 들개처럼 할짝할짝 류지의 자지에 달라붙어 놓지 않았다. 고환을 입에 넣고 굴리고, 혀로 뿌리에서부터 첨단까지 핥아 올리며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지를 위아래로 훑어대면서 요도구로 새어나오는 겉물을 게걸스럽게 빨아 먹었다.
"어이, 유카, 네가 제일로 좋아하는 정액, 싸줄테니까 모조리 삼켜"
"싫어, 아직 싸면 안돼, 좀더 이렇게 핥고 싶은걸"
찢기워진 마음과 육체 틈새에서 나타난 것은, 또다른 한 명의 자신. 음란하고 단정치 못한 또 하나의 인격이 밖으로 드러났다. 네발로 엎드려 자지를 빠는 모습은, 내려다 보는 류지에게는 발정난 암캐가 꼬리를 흔들면서 아양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 좀 더, 만들어 줘, 류지군, 키스마크 만들어 줘"
유방에도, 배꼽 주위에도, 옆구리에도, 허벅지 안쪽에도, 겨드랑이 아래에도, 류지의 소유물이라는 걸 과시하기 위한 각인이 새겨져 갔다. 유카는 류지가 키스마크를 남기기 쉽게, 시키는 대로 다리를 벌리거나 엉덩이를 내밀거나 하면서 침대 위에서 온갖 다양한 포즈를 만들어 보였다. 거기에, 이지적이고 쾌활했던, 수개월전까지의 유카의 모습은 없었다.
"커, 자지가 너무 커, 더, 좀 더 세게 해줘"
전신에 키스마크를 새기는 작업을 끝낸 유카는 정상위로 류지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살덩어리가 몸 속을 헤집어 댈 때마다, 쾌락의 연옥으로 타락해 떨어져 갔다. 이렇게 육욕에 흠뻑 빠져있는 동안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스스로 앞장서서 바닥없는 쾌락의 늪에 몸을 던져 갔다. 하반신이 깊숙히 연결된 채로 서로의 혀를 서로 얽는 격렬한 키스가 끝없이 계속 되어, 등줄기를 타고 지릿지릿 저리는 듯한 전류가 흘러 갔다. 입 안이 몽땅 성감대가 된 것처럼 류지의 혀가 볼 안쪽을, 입천정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코에서 달콤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류지의 격렬한 혀 애무에 화답이라도 하듯, 유카의 혀도 호흡을 맞춰 류지의 잇몸 뒷쪽까지 정성껏 핥아댔다. 대량으로 흘러들어오는 류지의 침을 너무나 맛있다는듯이 소리를 내어 꿀꺽꿀꺽 삼켰다.
"좋아, 가.. 가요.. 아앙.. 가버려.. 가.. 가.. 류지군, 제발.. 더 쑤셔줘.. 더 깊게!"
류지는 이번에는 유카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다리를 들어올려 몸을 반으로 접은 과격한 굴곡위 자세로, 자지를 단단히 조이는 뜨거운 보지에, 온 체중을 실어 가차없이 쑤셔 박기 시작했다. 불편한 자세를 강요당하는 아픔도, 남자의 육중한 몸에 깔려 난폭하게 짓눌리는 굴욕도, 지금에 와서는 오직 피학의 즐거움일 뿐. 거듭된 조교로 몸 속 깊히 각인된 한 마리 암캐로서의 즐거움을, 그저, 오로지 갈구할 뿐이었다. 유방을 류지의 가슴에 대고 부벼대는 행위까지 보여주며 진한 키스 사이사이에 류지의 목덜미나 귀에도 침을 듬뿍 바른 혀를 낼름대는 유카의 남자를 미칠듯이 흥분시키는 음란한 요부의 몸짓은 이미, 유카를 아는 써클 동료들조차도 이 여자가 유카 맞는지 의심스러워 할 지경이었다. 써클 사람들 누구나 동경하는 청순한 연상의 여대생을 범하고 유린해 음란한 암컷의 색깔로 물들이는 조교를 거듭해 온 류지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이미 아마노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 목적은 둘째치고, 남자로서 견딜 수 없는 정복감과 만족감이었다.
"하앙.. 아아.. 하으윽.. 좋아.. 너무 좋아! 아앙.. 하아아.. 더.. 좀 더 유카를 미치게 해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줘!"
두 남녀의 욕망이 서로 뒤엉켜, 점점 더 격렬하게 뒤엉켜, 육체의 쾌락으로 흠뻑 젖어간다.
"아아.. 가.. 가.. 이제 안돼.. 굉장해.. 안돼.. 미치겠어.. 아아아.. 가,간다!!"
"가고 싶으면, 알지? 평소의 대사 잊지 마"
"하아아앙.. 가,가요... 류지군 자지로.. 가.. 가요... 하으윽.. 류지군.. 류지군 자지 최고!!!"
류지의 허리 움직임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있던 늘씬한 다리가 순간 꿈틀 경련하더니 허공에서 쫙 펴졌다.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쾌락이라는 이름의 지옥 가장 깊은 곳으로 의식이 날아간다.
"아... 류.. 류지군의.. 뜨거운.. 정액..., 하아아.. 가,가득.. 자궁으로.. 들어오고.. 있어..."
자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데일 것처럼 뜨거운 정액 덩어리를 느끼면서, 유카는 기분좋은 여운을 만끽했다. 그러나 류지는 쉬는 시간따위를 주거나 하지 않는다. 곧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섹스의 후끈한 열기와 냄새로 가득 찬 방 안에서, 침대에 드러누운 류지가 팔베개를 하고 침대 옆에 놓인 TV를 보고 있었다. 한편 유카는 그런 류지 위에 올라탄 승마위 자세로,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탐스러운 유방을 출렁이고,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이며 섹스를 계속하고 있었다. 류지의 성긴 음모에 클리토리스를 미칠듯이 부벼대며 허리를 돌리고, 보지를 힘껏 조여 류지의 정액을 짜내려고 애써보지만, 수도 없이 절정을 느껴버린 몸은 극도로 피로해져 마치 잔뜩 물을 머금은 솜뭉치처럼 묵직하고 둔한 움직임만 보일 뿐,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제,제발.. 조금만 쉬게 해줘"
"아아, 뭐라고?"
"쉬고 싶어..."
"내가 쌀 때까지 계속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나?"
류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히익, 아아.. 미안해요"
류지가 화가 나면 무슨 짓을 또 강요할 지 몰랐다. 당황해서 황급히 사죄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파, 아파!"
류지가 손에 쥐고 있던 비닐끈을 휙 잡아당겼다. 2개의 비닐끈은 각각 유카의 양쪽 유두에 물려 있는 빨래집게와 연결되어 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 아프긴 뭐가 아파? 사실대로 똑바로 말 안해?"
"죄,죄송합니다, 기분 좋습니다"
"어디가?"
"가,가슴이요.. 흐.. 아윽.. 아,아파.. 아,아니.. 조,좋아... 기분 좋.. 히이익!"
"정확히 어디가 느껴지는지 자세히 말해보란 말이야"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카의 모습을 보며 류지가 조소했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유방은 한계까지 잡아 당겨져 부자연스럽게 날카로운 삼각뿔같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유두에 먹혀든 빨래집게의 날카로운 이빨때문에 유륜까지 길게 늘어져, 참혹한 격통을 견디지 못한 유카의 몸이 류지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딸려 나왔다.
"끊어질 것 같애... 아,아니.. 저,젖꼭지입니다. 유두를 괴롭혀 주셔서 기분 좋습니다, ...아파!!... 유두가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