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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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더러워진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 입은 유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마노와 마주 앉았다.
"물, 뜨겁지는 않았어?"
"아니, 괜찮았어"
아마노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유카가 컵을 양손으로 감싸들고, "고마워..."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마노와 시선을 마주치려고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가 지금은 핏기가 싹 사라져 여위어 보인다. 그걸 보는 아마노의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유카, 저기 말야..."
"...뭐?"
고개를 숙인채로, 목소리가 쉬어버린 유카가 대답했다. 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출장따위 가는게 아니었어... 어제, 어쩌자고 유카를 혼자 남겨두고... 안이한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류지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내 책임이다. 내가 유카 곁에만 있었어도 이런 일은.. 뇌리에 자꾸 떠오르는 연인의 치태를 열심히 지웠다. 환희에 겨운 신음소리, 요염하게 몸부림치던 지체를 눈 앞에서 목도한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아마노의 마음이 자꾸만 삐걱거린다. 확실히 그 순간, 유카는 다른 남자에게, 류지에게 안기고 싶어 했었다. 나에게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치태를 보이며 유혹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유카는 그런 여자가... 아닌데... 그녀석은 도대체 유카를 얼마나... 내가 류지의 원한을 산 탓에, 자신의 잘못으로 연인의 몸에 닥친 이 악몽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그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젠 다시는 유카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내가 똑바로 하지 않으면... 유카를 지키지 않으면...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그녀석하고의 일 말이야..."
유카의 어깨가 파르르 덜렸다.
"그녀석..."
"제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쨌든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털어놓자. 류지와의 일을 모두 털어놓고, 그 다음은 함께 생각할 수 밖에... 결심을 굳힌 아마노의 말을 유카가 막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치켜 뜬 눈은 분명한 공포를 머금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제발, 지금은... 아무 말도..."
"유카!"
"언제는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갑자기 듣기 싫다고 그러고, 제멋대로인건 알아.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유카의 가녀린 어깨가, 가늘고 긴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게 보였다.
"무서워, 무서워 죽겠어... 만약 또 약속을 어긴게 들키면, 나 이번엔 어떤 짓을... 무슨 심한 짓을.. 더 이상은..."
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무서워..."라는 말만 반복한다.
"싫어.. 이제 싫어... 이제.. 그런 건 싫어... 나, 이상해져버려..."
늘 씩씩하고 당당했던 유카가 몸을 움츠리며 무서움에 떠는 모습같은 것, 처음이다. 밝고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오기 있고, 어떤 일에도 늘 적극적이었던 유카의 급작스런 변모에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얼마나 가혹한 짓을 당한 거야.. 지금까지 무슨 짓을 어떻게 당해온 거야.. 언제나 유카를 보고 있었는데, 어째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제일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사람의 무게를 새삼 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 "미안"이라고 했다. "미안"이외의 다른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카가 잠깐 사이를 두고, "왜 카즈야가 사과를 해?..." 라고 중얼거렸다.
"어..."
"카즈야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아마노에게는 뜻밖의 말이었다.
"그.. 내가 똑바로 했으면, 제대로... 그.. 유카를 내가 더 소중히 지켜주지 못해서... 유카가 그런 지경에 빠져버려서..."
"해줬어, 카즈야는, 충분히... 나를. 그러니까 카즈야가 잘못한 건 없어..."
"유카..."
"내가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당황한 아마노가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었다. 잠옷 소매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손목에 남은 묶인 흔적을 유카가 살그머니 손바닥으로 가려 숨겼다.
"내가, 카즈야를 배신했어... 내가..."
계속 류지에게 신경이 쓰였던 것, 아마노와 사이가 거북해졌을 때 류지와 데이트를 하고 몸을 허락했던 것,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거절하려고는 했지만 딱 자르지 못하고 계속 관계를 가졌던 것, 어느 날 갑자기 류지의 태도가 표변해 "복수를 위해 접근했다"라고 전해들은 것, 그제서야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걸 깨달았던 것까지... 그렇게 담담하게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아마노가 모르고 있었던 류지와의 관계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지? 카즈야. 카즈야가 사과할 일 하나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 유카가 일어섰다. 흐려진 시야로 슬쩍 훔쳐 본 아마노는 말을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카즈야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쁜 건 나니까..."
유카 스스로도 왜 모조리 털어놓은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 밝혀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노가 자책하고 있는 모습을 더이상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 천사같은 여자로 여겨지는 것 같아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라도 되는 양 그런 모습을 강요당하는 것만 같아서, 그 위화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연인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진짜 자기자신의 모습은 인정받지 못하는 거 아닌지, 오롯이 자신의 모든 면을 연인이 받아 들여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그 생각은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형태로 전해지고 말았다.
"싫어졌어? 이런 나"
"...싫어졌다니, 그런 거, ...없어"
아마노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유카가 등을 돌린 채로 자신의 방 문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나, 이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유카..."
방으로 사라진 유카에게서, "정말로 미안해... 카즈야, 미안해..." 그 말만 들려왔다.
"그... 유카, 유카 너 정말...!?"
왜... 유카가 그녀석을 선택했었다구!? 나 몰래 사귀고 있었어!? 그런 어처구니없는...
"여보세요, 유카? 연락 좀 줘... 이야기하고 싶어, 힘이 되고 싶다구...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거야..."
이걸로 몇번째인지... 같은 메시지를 또 자동응답에 남기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충격이었다.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협의를 하고 있어도, 뭘 하고 있어도, 문득 정신이 들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유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털어 놓은 이야기도,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태도도, 모두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유카가 숨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리고 자신 이외의 남자에게... 믿을 수가 없었다.
유카가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이야... 그런거 사실일 리가 없어... 유카의 마음을 모르겠어... 어쩌면 좋지? 난 어떻게 해야 되는거야?
"왜..."
아침 일찍 유카의 집에 들려봤지만, 현관문 너머로 "오늘 학교, 쉴께... 미안해... 잠시 혼자 있고싶어..." 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계속 전화도 받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의 정도, 끊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디스플레이를 흐르고 있던 숫자의 나열이 멈추고, 입력한 수치가 에러라고 뜬다. 키보드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놓고 책상 위에 머리를 움켜쥔채 엎드렸다. 도저히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유카..."
도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 거지?... 계속 똑같은 생각만 반복한다. 류지를 향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후회, 유카를 향한 초조함이 서로 뒤섞여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어떻게든 류지를 유카에게서 떨어트려놓을 방법은 없는건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섣부른 짓이라도 벌였다가 또 유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냐?...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마져 치밀어 오른다. 안 돼, 고민만 하고 있어서는... 언제 또 류지가 유카에게 접근할 지 몰라.. 다시 한 번 더 류지를 만나볼까?... 이건 녀석과 내 문제야.. 유카만 괜찮다면 나야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어떻게 되도... 그래, 그렇게 류지한테 말하자, 더 이상 유카는 끌어들이지 말라고. 뇌리에 떠오른 류지의 얼굴. 그 옆에 또, 그 팔에 안긴 연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만다.
"제기랄..."
혼란에 빠진 아마노는 오직 그 날의 약속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유카를 류지로부터 구하고 싶다. 이번엔 내가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그 것만 생각하자. 그 외의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아마노에겐 유카의 존재가 전부였기 때문에... 유카밖에 없었다. 싫어지긴 무슨.. 그럴리가 없잖아. ...유카가 진심으로 날 피할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어. 그녀석 때문이야.
휴대폰 스트랩에 달린 아기너구리 인형을 매달리듯 양손으로 꽉 쥐고있는 아마노의 등 뒤로, "선배, 아마노선배...", 언제 왔는지 사츠키가 조그만 목소리로 불렀다.
"저, 선배...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괜찮을까요?"
아마노는 아무 대답이 없다.
"중요한 이야기에요. 부탁해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더 이상 일이 잘못되기 전에, 아무래도 선배가 듣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선배!"
아무 반응이 없는 아마노에게 당황한 사츠키가 살며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기...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이야기할래?..."
엎드린 채로 웅얼거리듯 대답하는 아마노의 표정을 살피려고 사츠키가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에!? 서,선배.. 그 상처. ...어떻게 된거에요? ...설마, 류지가?..."
류지... 증오하는 남자의 이름에 아마노가 처음으로 반응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아직 낫지 않은 얼굴의 상처 이상으로 처음 보는 초췌한 표정에 사츠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혹시 선배, 벌써?...
"류지라니.. 사츠키, 뭔가..?..."
모리사키선배가 농락당한다. 그게 내가 바란 것. 연인하고 대면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연인 옆에 남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주고 싶었다. 그래서 류지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선배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사츠키..."
언제부터일까.. 선배의 웃는 얼굴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 것이. 마음을 열고 자신을 대하는 선배를 속이며 협잡질을 해대는 자신이 싫어지게 된 것이... 이제 알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움받더라도, 경멸당하더라도, 두 번 다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더라도... 사실을 털어놓고 조금이라도 빨리 모리사키선배를 류지와 떨어트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아직은 분명히...
"나... 나, 선배한테 거짓말하고 있었어요. 류지는 모리사키선배를 노리고 있었고. 나.. 나는.. 그녀석한테 부탁받아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선배에게 접근했어요. 모리사키선배의 마음이 흔들리게 만들려고, 그래서... 게다가, 나... 류지와 함께 모리사키선배를 괴롭힌 적도... 있어요"
사츠키의 말에 놀란 아마노가 숨을 집어삼켰다.
"왜, 어째서 그런 짓을..."
"선배를... 모리사키선배한테서 빼앗고 싶었어요. 좋아하니까... 나만 봐줬으면 해서..."
"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노는 순간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뜨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사츠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것을 알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사츠키가... 류지와 짜고 유카를... 사츠키까지, 나를...
"...녀석한테서 유카와의 관계, 들었어. 유카한테서도... 들었어. 날 배신했던거"
"그게 아니에요. 그건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러니까 내 잘못이에요. 내가 한 짓,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 안 해요. 무슨 수를 써도 보상해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이대로 류지하고 엮이면, 모리사키선배가 잘못된다구요. 그녀석, 모리사키선배한테... 온갖 짓을 다 해요. 진짜 목적이 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녀석,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제발이요, 모리사키선배를 도와서..."
"이제 그만해!"
아마노의 노성에 사츠키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지금 아마노에게 사츠키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도, 유카를 구하고 싶어.. 유카와는 어떤 거라도 전부 서로 잘 안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도 믿는다. 하지만... 마음을 닫고 자신을 피하는 유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초조해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사츠키가 털어놓은, 또 하나의 배신.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뒤얽힌 감정이 분노가 되고, 마침내 폭발했다.
"돌아 가! 당장!"
충동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사츠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자신에게 놀란다. 뭐 하는 녀석이냐, 나란 놈은. 대체 난... 확실히 하지 않으면,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유카는.. 또 다시 휴대폰에 달린 아기너구리 인형을 꽉 쥐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선배..."
사츠키의 걱정하는 말도, 아마노의 터져버린 분노를 거스르기만 할 뿐이었다. 한 번 터져버린 감정이 쉽사리 진정될 턱이 없다.
"나, 선배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지금부터라도 선배에게..."
애원하듯 열심히 말을 잇는 사츠키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아마노가 사츠키의 스웨터를 움켜잡았다.
"나가라고 했잖아. 네 얼굴 보기 싫다구. 나가!"
"제발, 부탁할께요. 이제와서 용서받을 수 없는 건 알지만, 하지만, 선배 편에서..."
"시끄럽다구!!!"
아마노는 사츠키를 질질 끌고 가, 조그만 몸을 복도에 내던졌다.
"너하고는 관계없어!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쾅, 연구실 문을 세게 닫았다.
"서,선배!"
사츠키의 눈에 아마노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 배.."
문 앞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내 떠나지 못하는 사츠키 옆으로, "잠깐 볼까? 당신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백의 차림의 마리에가 스윽 나타나,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의 편이 되고 싶다고 했죠?..."
그 날 이후로 3일 간, 유카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계속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현관문 너머로 짧은 대화만 주고 받을 뿐. 걱정되서 이것저것 물어오는 아마노에게, "미안.. 오늘도 학교 쉴께..." 라고 판에 박은 듯한 똑같은 대답만 들려주었다.
오후, 그런 유카한테서 메일이 도착했다. "카즈야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녁 6시에 늘 만나던 스타벅스에서 기다릴께요"라고. 3일 동안, 수도 없이 자동응답에 메세지를 남기고 계속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카는 딱 한 번, "걱정해줘서 고마워"라고 짧게 답했을 뿐, 계속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유카가 쉬면서 지친 몸을 추스리고 있을거라고 받아들였다. 조금이라도 연인의 얼굴을 빨리 보고싶어서 마리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몰래 연구실을 빠져나와 한걸음에 약속장소로 달려나왔다.
그러나... "어이, 카즈야. 기다렸잖아". 약속장소에는 유카와 나란히 앉은 류지도 있었다.
"어,어째서... 네가..."
"어여 앉아. 할 말이 있으니까"
허물없는 태도로 류지가 대답했다. 게다가 자신이 유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과시라도 하듯,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둘러 껴안으며 붉은 리본으로 묶은 포니테일의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유카한테서 떨어져"
분개하는 아마노를 도발하듯, 류지는 팔을 떼기는 커녕 오히려 유카의 목덜미를 손으로 주무르기까지 했다.
"아~시끄럽게 굴긴. 닥치고 앉으라고. 여기서 이녀석한테 창피주고 싶은거 아니면"
두 명 사이에 낀 유카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로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유카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는게 아니었어? 왜 여기에 저녀석이? 류지의 명령으로 유카가 연인을 호출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아마노. 유카 옆에 류지가 있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채 아마노는 류지를 째려보며 두 사람 맞은 편에 앉았다.
류지가 말문을 열었다.
"너말야, 사흘동안이나 유카를 혼자 내버려 뒀더라. 꽤나 여유셔. 하지만 그럼 게임이 안 되잖어. 그래서 유카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끝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지"
"서로 이야기를!? 유카, 이게 무슨 말이야?"
유카는 쭉 혼자 집에 있었던 게 아니었어? 아마노의 추궁에도 유카는 전혀 미동조차 않는다.
"내일부터 유카는 너하고 나, 하루씩 교대로 상대하기로 했어. 자기 차례때는 유카한테 뭘 해도 괜찮은 걸로, 그렇게 정했으니까, 바보카즈야, 잘 부탁해"
"교대로?... 유카를... 웃기지 마, 그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유카도, 그렇게 하자고 말했는데?"
류지가 스타디움 점퍼(*주, スタジャン-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입는 방한용 점퍼. MLB야구점퍼같은 거) 안주머니에서 네 번 접은 종이조각을 하나 꺼냈다.
"뭐야 이건?"
"게임을 한다고 하는 계약서. 규칙에 이의는 없지? 없으면 거기 사인해. 너만 사인하면 돼"
"무슨 바보같은..."
류지의 이름 밑에 틀림없는 유카의 필적으로 "모리사키 유카"라고 쓰여져 있었다. 꼼꼼하게 지장까지 찍혀 있었다.
"유카, 아무래도 네가 부탁하는 게 낫겠다"
"...해 ...제발..."
"그런 모기같은 소리로 해선 안 들려. 야, 제대로 부탁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그이하고 담판짓는다?"
"...한 달, 한 달만... 이니까... 제발... 그렇게 해요..."
스러질 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유카가 승낙을 구했다.
"어째서?..."
아마노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유카를 바라보았다. 류지 말대로 따르는 유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유카한테, 설마... 뭔가, 했지?"
"그이에게 사흘동안이나 버림받고 쓸쓸해서 다 죽어가더라구. 그-래-서-, 너 대신 내가 귀여워 해 준거뿐이야"
류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귀를 의심했다. 유카는 쭉 자신하고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뒤로 류지하고 만나서... 믿을 수 없었다.
"알고 싶나봐. 가르쳐 줘라"
이것이, 류지가 아마노를 호출한 진짜 목적이었다. 아마노가 목숨보다도 더 아끼는 유카를 농락해서, 아마노를 야금야금 몰아붙여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다. 오늘도 그걸 위해서 부른 것이다.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아마노의 눈 앞에 내밀었다.
"야, 유카, 어제 찍은 사진이야. 뭘 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똑바로 설명해 줘라"
"...네"
거기에는, 러브호텔 소파에 거들먹거리며 앉아있는 류지의 다리사이에 무릎 꿇고 얼굴을 묻고 있는 유카가 찍혀 있었다. 포니테일의 익숙한 붉은 리본이 페라봉사에 한창인 그 여성이 틀림없이 유카라고 말하고 있었다. 류지 자신이 내려다보며 쵤영하고 있었다. 옷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는지 새하얀 등과 조그만 엉덩이가 훤히 보였다.
"큿...!"
"류지군에게 안기기 전에... 류지군에게... 그..."
"그렇게 말해서 그이 귀에 들리겠냐? ...아니면 또?"
"아, 미안해요. 류지군이 안아주기 전에, 류지군의 것을 열심히 빨아서 봉사했습니다. 아, 그리고.. 입 안에 싸줘서, 전부, 류지군 것을, 삼켰습니다. ...매우, 마..맛있었..습니다"
연인의 입에서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추잡한 말에 아마노는 몸 속 깊이 소스라쳤다. 쇠사슬에 감긴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 다음은 이거"
류지가 꺼낸 두 번째 사진에서 유카는 선 채로 화장대 앞에 엎드려 후배위로 꿰뚫리고 있었다. 포니테일을 잡아당겨져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카의 초점 잃은 눈, 반쯤 열려 군침을 흘리는 입술, 상기되어 땀에 젖은 뺨, 그 얼굴이 거울에 비쳐 보여졌다.
"처음은 뒤로, 했습니다... 류지군, 깊숙한 곳까지, 격렬하게 찔러 줘서, ...아, 너무 기분이 좋아서,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느꼈습니다. 내 거기도, 아주 많이... 부끄러울 정도로 젖어 버려서"
쉬지않고 범해지는 동안 계속해서 류지는 유카에게 지금 자신이 어떤 체위로 안기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항상 말로 전부 설명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로 자신의 마음을 향해, 자신은 음란한 노예라고 자인하게끔 하는 조교였다. 그렇게 수도 없이 복창하며 기억해버린 대사를, 유카는 연인 앞에서 술술 늘어놓는다. 아연실색해서 바라보는 아마노의 얼굴을 보고 류지가 좋아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조소를 흘렸다.
아무 말 없이 3번째 사진을 꺼냈다. 유카는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위에 올라타서 하는 건... 스스로 기분좋은 곳을 잘 알기도 하고, 스스로 움직이거나 할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하지만 역시.. 류지군이 해주는 쪽이.. 좋습니다. 안기는 쪽이 좋습니다. 위보다.. 아래에 깔려서.. 류지군이 마구마구 격렬하게 찔러주는 게..."
사진 속에서 기승위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유카는 격렬하게 머리카락과 리본을 흔들며 스스로 자신의 유방을 움켜쥐고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비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음란함의 극치인, 동물적인 섹스에 몰입하고 있는 연인의 치태였다. 손이 흔들려 핀트가 나간 사진이 그 격렬한 섹스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에, "이,이건...". 순간 유카의 말이 멈춘다. 그 4번째 사진을 보고 아마노의 입에서 "무슨 짓을.."이라는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류지는 "뭘 떨고 그래? 괜찮잖아. 야, 유카. 시킨대로 제대로 피임약, 먹고 있잖아?". 유카는 한층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긍정했다.
"그-러-니-까-, 바보카즈야, 너도 사양할 거 없이 유카한테 질내사정해도 돼. 몇 발을 싸도 임신같은 거 걱정할 필요없다구"
침대 위에서, 크게 M자로 다리를 벌린 유카의 보지로부터 주르륵 흰 정액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사진 속의 유카는 아직 절정의 여운에 잠겨있는지 황홀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예쁜 손가락으로 보지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이녀석, 안에 싸주는 거 엄청 좋아한다니까. 얼레? 설마 모르고 있었어? 너 정말 그이"였던" 거 맞아? 그랬구나~ 유카, 너, 질내사정 좋아하는 거.. 너무 했다, ...그이한테 말 안해줬구나"
한 순간 마음을 허락하고, 몸도 허락하고, 그렇게 섣불리 믿은 결과, 함정에 빠졌다. 종속의 사슬에 묶여서... 육욕의 감옥에서 각인당한 공포. 열락의 고문으로 주입당한 치욕. 거역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절망.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느덧 마음과 몸이 산산히 찢기워져 버렸다. 가혹한 능욕을 언제까지나 버틸 리 없었고, 변해가는 몸에 마음도 물들어 가고, 그 마음은 가루처럼 산산히 부서져갔다.
"...류지군이..."
유카의 목소리에서 이미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은 담담하고 단조로운 말투가 되어 있었다.
"유카 안에, 잔뜩, 잔뜩, 싸줬습니다.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류지군의... 저,정액, 엄청 뜨거워서, 안에 싸주면,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져서... 그것만으로도, 유카는, 항상, 몇번씩이나, ...그것만으로도, 가버립니다..."
테이블 건너에 앉아있는 것은, 연인이 아니라, 악마의 손에 저속해진 꼭둑각시였다. 류지가 정성들여 가르치고 빚어 낸 인형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한 장"
류지의 말에 유카의 몸이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자~"
"무..! 유,유카!?"
그 사진을 본 아마노가 자기도 모르게 유카를 원망하는 소리를 흘렸다.
"유카, 똑바로 이녀석한테 말하라구. 야, 말해. 말하라니까"
류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인에 대한 죄책감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유카가 "미안해요" 라고 짧게 외치며 류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류지는 "뭐야, 제대로 설명 못하겠다 이거냐? 그러면 안될텐데" 라며 혀를 차고, 조용히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흐, 하으윽!"
갑자기 유카의 상반신이 들썩였다.
"하윽! 시,싫어어어, 아아아아.. 하으윽!"
테이블 위에 세운 손톱이 끼이익--하는,귀를 거스르는 소음을 낸다. 포니테일이 이리저리 춤췄다. 브브브브브... 둔탁한 소리가 테이블 밑에서 들려온다. 눈썹을 찌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싫어, 그,그만.. 제발.. 아아..하앙.. 그만둬주세요.. 이,이런데서.. 아앙.. 부,부탁이..에..요... 아아앙.. 하으윽!",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교성을 흘렸다. 몸을 경련하면서 주위 손님들의 눈도, 연인의 시선도 못 느끼는지 류지의 어깨에 매달려 붙는다.
"그럼, 제대로 말하던가"
하아하아,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 유카가 이 날 처음으로 아마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본래의 영리해 보이는 커다란 눈이 딴 사람같이, 몰라볼 정도로 초췌했다. 빛이 사라진 텅 빈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심장이 도려내지는 듯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아마노의 온몸을 꿰뚫었다.
"...유카"
"아아... 그,그 사진은"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멈춰, 멈춰줘.. 참지 못하고 아마노가 유카의 시선을 외면했다.
소파에 기대 앉은 류지 위에서 크게 가랑이를 벌리고 후좌위로 범해지고 있는 유카가 한 장의 종이를 양손으로 내밀어 보여주고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류지군의 자지가 유카 안에 들어가 있는 거 보세요. 유카는 연인에게서는 만족할 수 없는 음란녀입니다"라고 쓰여진 종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유카의 필적이었다. 연인이 쓴 것이었다. 류지의 자지가 뿌리 끝까지 유카의 보지 안에 글자 그대로 박혀 있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허벅지가, 애액이 흥건한 결합부위가, 땀으로 젖은 유방이, 전부, 확실하게 사진에 찍혀 있었다. 미쳐버린 것처럼 흐트러진, 요염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허덕이며 몸부림치는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류지군이 짖궂게도 초조하게, 가게 해주지 않아서... 참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가게 해주지 않아서.. 말하는대로 하면, 제대로, 그... 으,음란하다는 거 인정하면, 더 기분 좋게 해준다고... 가,가게 해준다고, 그래서, 그 사진, ...증거로, 찍어주었습니다"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너 이 자식!!!"
아마노가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 너머에 앉아있던 류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흥, 겨우 계집하나 빼앗긴 게, 그렇게 분하냐?"
류지에게 동요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태연스레 웃음까지 짓는다.
"그런데말야, 내 지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구..."
"크윽..."
류지의, 둘 사이의 잔뜩 꼬여있는 원한관계를 일갈하는 말에 아마노는 그저 신음만 흘렸다. 창가 테이블의 이상한 분위기에 점내의 손님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너한테도 내가 겪은 지옥을 맛보게 해줄께. 너도 그 정돈 당해봐야지 않겠냐?"
류지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는 아마노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이 계집, 머리속으로는 아직 네녀석한테 미련이 남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몸은 벌써 나 아니면 만족 못하거든. 나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됐다구. 그건 이 계집이 더 잘 알고 있을걸. 어쨌든 요 두 달동안 충분히 귀여워해 주고, 뭐 제대로 몸에다 가르쳐 줬으니까. 방금도 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녀석, 쉴새없이 흠뻑 적시고 있었을 정도라구. 알았어? 이녀석 이미 네놈 여자가 아냐. 내 계집, 아니 장난감이지. 유카는 이제 나한테 거스르지 못해. 이제부터는 바보카즈야가 아니라,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른다고 맹세했어... 수도 없이 맹세했지..."
유카는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류지의 말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분하면 다시 뺏아 보든가, 나한테서, 이 계집을. 네들 둘이 나란히 지옥으로 떨어지던가, 다시 빼앗던가, 둘 중 하나야. ...뭐, 네놈이 날, 발 뒷꿈치만큼이라도 따라와야 말이지만. 여자 하나도 못 지키고 얼레벌레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 자식이 무슨"
하하하핫... 이거 제대론데, 이렇게 유쾌할 줄이야...
내내 우두커니 서 있는 아마노를 올려다 보면서 류지가 유카에게 명령했다.
"야, 오늘은 계획변경이다. 유카, 얼른 저녀석한테 안기고 와. 알았어?"
그대로 5분 가까이 계속 된 거북한 침묵을 깨 것은 유카였다.
"...가요"
휘익, 말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가게를 나서는 유카를 아마노가 당황해하며 뒤쫒아 나갔다.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류지가 손도 대지 않은 유카의 캬라멜마끼야또를 집어들었다.
"존나 달어... 대체 이런걸 어떻게 마시는거야?"
립스틱이 묻어있지 않은 빨대를 꺾어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으며 냉혹한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