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1-10 (1부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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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믿기지 않는다.
분명히, 연인이 아닌 남자와 잤다.
하룻밤이 지난 뒤에도 아직, 몸 속 깊숙이 어젯밤의 격렬한 행위의 여운이 남아 있다.
두 번째로 절정에 오른 뒤에, "몸, 깨끗이 씻어야죠"라는 류지의 말에,
마치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흔들 욕실로 이끌려 가...
류지의 손이 온 몸을 씻어주는 대로 그대로 몸을 맡겼다...
아침이 밝고, 어느정도 냉정함을 되찾은 유카의 뇌리에 깜빡거리듯 아마노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욕조 안에서도, 뒤에서 부둥켜안아오는 류지의 욕망에 몸을 맡기고,
동물처럼 뒤로부터 삽입당해 격렬한 피스톤운동끝에 순식간에 세번째 절정을 맞이했다.
여자답지 못한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거친 몸짓을 받아 들였다.
전부 다, 모든 걸 류지에게 맡겼다.
그가 어떤걸 요구해와도, 그걸 거절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자신이 허락한 행위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연인 이외의 남자에 의해, 절정에 올랐다.
자신이 바람기라고 하는, 그런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
게다가 연인과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잠자리를 하면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느껴버린 자신의 육체에 당황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연인하고보다 훨씬 더 느껴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신체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던 애무.
길고 격렬한 섹스에 정신없이 취해버렸다.
처음하는 경험이었다.
사카키사와...싫지 않다...하지만...
짐승처럼 격렬하게 요구해오던 류지의 손, 손가락, 혀,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온몸에 달라붙듯 남아있다.
굽이 높은 구두의 스트랩을 발등을 가로질러 채운다.
침대에 걸터앉아 얇은 가디건을 몸에 걸친다.
평상시에는 색이 바랜 면 셔츠나 니트에 청바지, 펌프스나 로퍼같은 심플한 차림의 유카.
말 없이, 하이힐에 스커트, 가볍고 산뜻한 블라우스라는, 데이트용의 옷을 입는다. 어젯밤과 같은 옷을.
카즈야를...나는, 카즈야를...
눈을 감아도, 연인의 상냥한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버린건 아닌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창가에 서 있는 류지의 얼굴을 쳐다 볼수가 없다.
나는, 카즈야를, 또, 배신했다....
술에 취해서도 아니었다. 억지로 당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하는 걸까.
머리카락을 정돈하려고 리본을 손에 쥐고는 꼼짝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슬퍼 보이는 얼굴, 그만 해요"
류지가 입을 열었다.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류지의 실루엣 속 표정이 울 것만 같다.
"나, 몹시 기뻤어요. 모리사키 선배와, 서로의 기분, 주고 받아 확인할수 있어서..."
"...사카키사와..."
"그런데, 선배...그런 얼굴을 하고..."
"미안...미안해"
"사과하지 마세요"
류지가 세게 손을 잡아쥔다.
"미안해하면, 나, 마치....나, 선배를 슬프게 하는 일, 생각도 하기 싫어요"
들려줄 말이 없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선배, 나하고 사귀어 주세요"
류지가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유카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마치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자세로 유카의 눈을 응시한다.
"나하고 교제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사카키사와..."
"선배에게 애인이 있는것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탁합니다. 나에게도 찬스를 주세요"
"그런..."
"좀 더 날 알았으면 합니다.
선배, 애인이 싫어지게 된 건 아니니까, 애인과 헤어지라는 말은 안합니다.
단지 아주 조금만, 나에게도 시간을, 선배의 시간을 나누어 주세요.
어차피 선배와 사귀는 거 들키면, 나, 모두에게 미움받고 동아리에 못 있게 될테니까,
공식적으로는 친구같은 관계로 만족합니다.
어디까지나, 그이는 그이대로.
하지만 나와도 교제해 주세요."
"그런 짓을...어떻게...?"
"불...불공평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다.
"만난 차례가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다니, 불공평해요..."
"하지만, 사카키사와군, 부탁해,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곤란하게 하는건 선배 아닙니까"
"어..."
"확인했잖아요, 자신의 마음, 나를 거절하지 않았죠"
"그건..."
"한 달이라도, 아니 일 주일만이라도 좋습니다.
나하고도 만나 주세요. 좀 더 나를 알릴 기회를 주세요.
그래서 만약, 선배가 날 선택해 주지 않는다면,
다시는, 두번 다시 선배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을께요.
약속해요,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카의 손을 꼭 잡아 포개었다.
"부탁합니다...나 어제 데이트, 진짜 즐거웠어요.
날 그렇게 많이 느껴주고...기뻤어요. ....이런 기분이 된건, 처음입니다"
부드러운 온기와 함께, 단단하게 긴장된 손가락끝으로부터,
류지의 씩씩한 "남자"의 부분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몸 안의 남은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카키사와가 싫지 않다....
그 손을 바라보며 얼마나 있었을까.
유카의 입에서 "응...알았어"라는 조그만 승낙이 떨어진다.
방을 나오면서 류지는 살짝 뺨에 입을 맞추고, "나, 선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전원을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아마노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몇 번이나, 유카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오늘 몇 시쯤 돌아오는 거야?"
"회식인가? 늦네. 과음하지 마"
"괜찮은거야? 시간이 나면 전화해 줘"
"이야기하고 싶은게 있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라고.
그런데, 그 동안, 쭉, 나는....
평소처럼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복잡한 생각에 잠긴 채로, 아마노의 집 문에 열쇠를 꽂는다.
문을 여는 소리에 아마노가 현관으로 달려나온다.
"어서 와"
평소와 같은 상냥한 얼굴. 눈이 빨갛다. 아마 한숨도 못자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마노는 "피곤할텐데 미안, 와달라고 해서"라며 오히려 이 쪽을 걱정해준다.
연락도 없이 새벽에 귀가한 것은 처음인데도 유카를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되려 웃어 보인다.
카즈야....
애써 마음을 다 잡는다. 지난 밤의 일은 마음 속 깊이 묻어놓기로.
"좀 과음했나봐"
최대한 노력해 밝게 대답했다.
"아직도 컨디션이 안좋아 보여. 너무 무리하면 안돼"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차마 연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지만 애써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응, 아직 술이 좀 덜 깼나봐.
있잖아, 지난 대회 준우승한거, 그 뒤풀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전화할 틈이 없었어.
이제 올해로 은퇴니까, 분위기도 오르고 해서 그만 과음해 버렸네.
후배 집에서 쉬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나봐."
"...시합, 아까웠지"
그렇게 말하는 아마노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그렇다, 대회 날, 그 때, 나는 사카키사와와...그리고 그걸 카즈야한테...
말문이 막혀, 괜시리 아마노가 끓여준 엽차를 입에 대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본 채로 거북한 침묵이 흐른다.
"그..."
두 명이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
"아, 미안, 유카, 말해"
"아니, 카즈야 먼저 얘기해"
아마노의 음색으로부터, 헤어지자는 이야기나 어젯밤 일을 탓하는 건 아니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대회 때 일 말인데..."
아마노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괜히 손가락으로 찻잔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한다.
"미안해, 카즈야. 나...."
서둘러 유카의 말을 끊는 카즈야.
"미안, 유카가 연락하는거 계속 피해서"
"그런...나야말로...미안"
테이블 위로 이마를 떨구는 유카를 향해 상냥하게 말을 잇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됐어, 내가 본 거"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끄덕이듯 다시 머리를 숙였다.
"사실, 충격이었어. 유카가 그런 일을...믿을수가 없었어.
하지만 사츠키로부터 전부 듣고 알게됐어"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와 이번엔 물끄러미 아마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 남자의 다리부상이 걱정돼서 대기실에 갔던거라고.
안절부절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달려들었고.
그래서 안정시키려고...그 뒤에 앉혀놓고 제대로 설교해줬다고.
소중한 시합 직전이어서 그렇게 신중하게. 역시 유카다워"
"사츠키가, 그렇게...얘기한거야?"
"응, 나하고 유카, 많이 걱정해주는것 같아.
유카를 왜 확실히 믿지 못하냐고 나한테 오히려 야단까지 치더라구.
좋아하는 사람을 의심하면 안된다고, 선배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사츠키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는지, 연인을 의심했던 스스로를 탓하며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러니까 유카에게 내 마음을 확실히 전하려고. 믿고 있다고. 앞으로도 쭉 그럴거라고."
너무나 예상외의 전개에 하고싶은 말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츠키와 어제 데이트는..."
"그런 것까지 말한거야, 그녀석. 곤란하게시리...
그런 얘기가 있긴 했는데, 그건 미안해, 나도 처음엔 OK했어.
하지만 일요일 아침에 사츠키에게 전화해서 거절해버렸어. 나를 속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녀석이 전부 털어놔 준거야."
그런...그런 일은...그럼, 나는...내가, 한 일은...
"그래, 이번에 디즈니랜드에 가자, 유카가 항상 가고싶다고 얘기해왔잖아.
타카쿠라 선생님께 부탁드리면, 연구, 하루정도 어떻게든 쉴 수 있을거야"
터져나오려고 하는 말을 꾹 삼킨다.
이제 와서 고백은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거운 죄책감으로 인해 현기증까지 나려고 한다.
말없이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가 아마노를 뒤에서 껴안았다.
지키기 위해서라면, 상처내지 않으려면, 이젠 거짓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고마워, 카즈야...기쁘네...즐거울거야..."
그러나 말과는 반대로, 아마노에게 보이지 않는 유카의 표정은 어둡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카즈야...날 꼭 잡아줘..."
"알아, 절대 놓지 않을께. 미안, 유카 의심해서"
지금 유카에겐 대답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힘껏, 연인을 안는 팔에 힘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