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恐皇) 4부 <신들의 황혼> Part 5_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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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이 내부는 무주공산과 같았다. 언데드 대량 발생 사태 때문에 묘지는 파헤쳐져 있었고, 사람이 살던 정착지는 텅 비었으며 아직도 통제를 받지 않고 보이는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공격하는 넋잃은 해골과 좀비들이 드문 드문 돌아다녔다.
" 이건... 너무 심해요. "
폭풍이 그친 후 아침을 맞으러 나온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슈발츠 일행이 유숙한 건물은 그 마을 어귀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마을을 둘러본 후, 마을 한복판에 노예로 보이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 썩어 가고 있는 광경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알루데시아였다. 그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 본 두르나와 플로라는 안색까지 바뀔 정도로 놀라고 슬퍼했다.
" 도망가면서 주인들이 살해한 것인가... 태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은 나라였지. "/슈발츠
" 악마라도 못할 짓이에요... "/두르나
죽은 시체 중에 아직 어린 아이로 있는 것을 발견한 두르나는 쓴 것을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언더다크에서의 노예들의 처지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지만, 소위 [더 나은]사회를 만들었다는 인간들조차 하는 짓은 드로우보다 한 발짝도 나을 것이 없는 것이다.
슈발츠는 근처의 건물들을 뜯어서 장작을 만들고 그것을 시체 더미 위에 차곡차곡 쌓은 후 기름을 부어 불을 붙였다. 한데 화장하기로 한것이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데다 지난 밤의 격렬한 폭우에 흠쩍 젖어 있는 시체를 그냥 땅에 묻을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젖은 시체들은 엄청난 연기와 매케한 냄새를 뿜어 냈다.
슈발츠가 장작을 더 장만하기 위해 좀 더 먼 건물들을 해체하는 동안, 두르나와 알루데시아가 힘을 합쳐 다른 곳에 뒹구는 시체까지 끌어와 불구덩이에 던졌다, 그리고 플로라는 마법을 써서 치솟아오르는 불길과 그에 동반된 연기를 억누르며 멀리서 볼 수 없도록 하면서 연신 불구덩이로 던져지는 시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 인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들 하지만, 이렇게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타나리들이 활개치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지... 아니, 남에겐 태연하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도 선이니 정의니 운운하는것을 듣고 보자면 오히려 노골적인 악마들이 한결 나아 보질 정도지. "
마지막 시체를 불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을 확인한 후, 슈발츠는 쓰게 웃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고 두르나도 인간성에 대한 환상이 없는 냉정한 성격이라 그나마 충격이 덜했지만, 선량한 플로라가 받은 타격은 심했다. 에스갈란트에 도착할 때 까지도 그녀는 풀이 죽어 있었다.
날이 갠 덕에 여행 속도도 빨라져서, 점심 무렵엔 에스갈란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아아, 이제 보이는군. "
바다 쪽으로 면한 높은 성벽과 그 성벽 아래 펼쳐진 텐트와 판자로 이뤄진 난민촌. 그것이 슈발츠 일행이 처음 접한 에스갈란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난민촌이 가까워져 오면서 플로라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본 시체 더미의 충격 때문이다. 에스갈란트 성벽 아래의 피난민들은 노예들을 죽여서 샇아놓고 떠난 바로 바로 그 태이인들이었다.
" 네 마음은 알겠다만,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 하자꾸나. "
슈발츠는 플로라를 옆구리에 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시켰다.
그러나 플로라는 진정했지만, 완전히 문제가 사라진건 아니었다. 평범한 엘프 여행자로 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난민촌에서 슈발츠 일행은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태이는 엘프 인구가 거의 없는 나라였다.
" 아아, 이건 사전 정보 부족이라기보단... 내가 무신경했던거지. "
자신의 태만의 결과로 인한 일종의 망신(?)에, 슈발츠는 약간 좌절했다. 아무튼 그자리에서 변신을 할 수도 없고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난민촌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게 더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이든, 법의 그늘에서 약자를 착취해 먹고 사는 종류의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사회의 법이 그나마 제대로 설 때는 불량배 정도의 선에서 끝나지만, 사회 체제가 약하거나 부패해 있을 때는 바로 이들이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의 정점에서 억무르고 있던 래드 위저드가 없어진 상태인 태이 난민촌에서도 이런 자들이 소위 [치안 유지]를 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 이봐, 거기 엘프. 대체 어디서 굴려먹던 말뼈다귀가 여기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야? 혹시 네놈들 탈주한 노예인가? "/불량배 A
" 계집들은 삼삼해 보이는데? "/불량배 B
안그래도 폭발 직전인 플로라를 말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두르나였지만, 그것으로 플로라의 안전핀이 끊어져 버렸다.
" 언니, 비켜요... "/플로라
" 아, 젠장. "/두르나
플로라가 막 주문을 영창하려는 순간, 홀연히 한 여성이 나타나 일행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 여기까지 도망쳐 와서도 본성을 못버리는 건가, 이러니 태이인이 어딜가나 배척받는게 아닌가! "
" 헛, 너는?... 쳇... 괜한 참견이다. 미샤. "/불량배 C
" 괜한 참견이 아니지, 무고한 여행자들을 털어먹으려는 짓을 가만둔다면 그것이야말로 괜한 짓이겠지. "/여성
슈발츠는 속으로[별로 무고하진 않지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보기 위해 팔짱을 끼고 섰다가, 플로라 쪽에서 풍겨나오는 엄청난 마력에 놀라 그녀의 어께를 붙잡았다. 익숙한 주인의 손길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플로라가 주문 발동을 멈추었고, 한편으로는 일행 앞에선 불량배들이 비실거리며 물러갔다.
" 하마터면 큰일날뻔 했군. "
슈발츠의 혼잣말에, 미샤라 불리운 여성은 자신에게 말한 것인줄 알고 이쪽을 돌아보며 목례를 했다. 슈발츠는 그제사 비로소 그녀의 왼쪽 눈에 걸린 천과 가죽으로 대충 만든듯한 안대와 이마에 새겨진 붉은 문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태이의 래드 위저드의 문양과 비슷했지만, 뭔가 달랐다.
" 개입에 감사하오, 좋은 인간 여자여. 내 이름은 슈발츠라 하외다. "/슈발츠
" 미샤라고 합니다. 엘프 여행자여. 좋지 않을 때 태이를 방문하셨군요. "/미샤
슈발츠는 엘프식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 하지만 당신들은 너무 눈에 뜨이는군요. 노예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은 태이를 방문하다니. "/미샤
" 우린 상인이라오. 태이의 이렇게 사정이 안좋을거라곤 생각지 못했소. 에스갈란트 성에 볼일이 있는데 바닷길도 막혀서 말이지. "/슈발츠
" 성에 볼일이?... 하지만 성문은 굳게 닫혀 있고, 경비병들은 아무도 통과시키지 않고 있어요. "/미샤
미샤의 말대로였다. 성문은 굳게 닫긴 채, 경비병들은 망루 위에서 활과 쇠뇌를 상전한 채로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슈발츠는 미샤에게 사례를 하기 위해 돈주머니를 건네었지만, 미샤는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고 가버렷다.
" 태이인 치고는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네요. "/플로라
이제 완전히 태이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된 플로라가 마지못해 한마디 하는 동안 난민으로 가장하고 있던 스톰이 나타났다.
" 주인님~ "/스톰(엘프어)
스톰은 슈발츠의 품에 뛰어들어 애교를 좀 떤 후, 아직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플로라를 달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 그녀는 자신이 미리 마련해 둔 은신처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 왔기 때문에 그것으로 모두 점심을 때웠다. 구운 오리고기와 검은 빵, 그리고 포도주일 뿐이었지만 아침에 그런 참상을 보고 입맛이 돌지 않아 식사를 거른 채로 한나절을 걸어온 일행에겐 맛있는 식사였다.
" 그럼 자세한 상황 보고를 하겠습니다. "
식사를 마치고 슈발츠를 중심으로 모두 모여 앉은 다음, 스톰은 에스갈란트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슈발츠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에스갈란트는 고대 시절부터 존재하던 결계를 래드 위저드들의 마법으로 강화한 강력한 결계가 쳐저 있고(순간이동과 예지술을 막는) 태이의 정규군도 2000명이나 주둔하고 있는데다, 두드러질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없지만 방위에 협력하는 마법사 분대도 갖추고 있었다(이들은 귀족 가문의 사병이다). 이런 철통같은 수비 태세를 가진 도시가 지금 봉쇄되어 있고, 난민은 물론 평범한 여행자들조차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평상시라면 통했을 뇌물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경비들의 [경계]도 완강해 사실상 평범한 방법으로 도시 내로 들어가기는 글른 상태였다.
도시의 내정 상황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편이었다. 슈발츠는 원래 에스갈란트에도 상회 지부를 두고 운영중이었지만, 스자스 탐과의 통교를 끊은 후에 철수를 시켜버렸다. 그리고 전문적인 첩자를 침투시키기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 저 성벽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길도 막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알기 쉬운 축에 속했다.
원래 에스갈란트는 일곱 가문의 상인 귀족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중 두 가문(트로트, 엔카)은 태이 출신이고 나머지 다섯 가문(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은 원래부터 에스갈란트의 지배해 왔던 가문이다. 거의 100여년 전에 에스갈란트가 태이의 보호국이 된 후, 태이 계열의 두 가문이 에스갈란트를 지금까지 지배해 왔다.
무척 당연한 일이지만 태이 본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지금까지 에스갈란트를 지배해오던 두 가문들이 벌인 몆가지 전횡은 슈발츠의 상단 철수 이전부터 태이에 대한 여론이 안좋게 흘러가도록 만들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 가문들은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느라 일치 단결된 힘을 보이지 못해 에스갈란트의 독립은 요원한 상태였다.
" 원수같은 경쟁자가 권세를 잡느니, 차라리 태이가 지배하는 편이 낫다? "/슈발츠
" 멋진 이간질 정책이지요, 지배자인 태이인보다 경쟁 가문을 더 증오하도록 만들었으니. "/스톰
[분할하여 통치하라]라는 옛 격언을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래드 위저드들의 교활함과, 지배계급의 무능함, 그리고 피지배계급의 무관심이 삼박자를 이루어 지금까지 잘 굴러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갈란트를 태이의 손에서 떼어 놓는 것은 전략상으로 중요했다. 이 도시는 내해에 면한 태이의 두 항구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스자스 탐이 태이의 정권을 잡기 전까지 태이의 수도였던 앰러틀러(Amrutlar)까지 라펜드라 강(River Lapendrar)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도시가 태이에 반기를 든다면 그 강을 통해 태이 남부 전역이 위협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넓은 곡창지대가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국경지대의 해안에 면한 항구도시 답게 요새화도 잘 되어 있는 견고한 방어 거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태이도 여기에 놀 엘리트 병사를 중심으로 한 2천에 이르는 정예병을 배치해 두고 있었고, 태이의 해군중 절반인 7척의 프리깃의 모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자스 탐의 자칭 [혁명]이후, 해군은 지휘부가 숙청당해 해산되고 그 자리는 스자스 탐이 마법으로 만들어 낸 유령선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먹을 필요도 없고 잠들 필요도 없는 언데드 병사로 가득 찬 유령선은 모항따위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늘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지독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겨울의 우기까지도.
또한 성 안에 막사를 짓고 눌러앉은 놀 부대는 그대로였지만 태이 내부와 연락을 위한 시스템이 대혼란에 빠진 상태라 주변의 신속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주변을 관장하는 군 사령관격인 다키온이 스자스 탐의 손에 죽은 후 아직까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탓이었다.
도시의 인구는 적어도 2만 5천, 거기에 성벽 밖에 7천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전면적인 반란이 일어난다면 2천의 놀 부대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주둔군 부대장에 그대로 유임되어 있는(사실상 스자스 탐이 거기까지 아직 손을 쓰지 않았을 뿐인) 놀 엘리트 부대의 대장 크세르세르크(질서 악 놀 남성 레인저 17)는 그 점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있을 것이었다.
"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슈발츠
" 그 방법이라면, 그동안 제가 알아봐둔게 있어요. "/스톰
유능한 스파이 답게 완벽하게 난민 중 하나로 가장한 스톰은 난민 중에서도 그리 떳떳하지 못한 무리에 위화감없이 녹아들어가 있었던 것이었다.
" 두번째 까마귀의 시간(오후 9~11시)에 서쪽 성문의 수문장이 교대하는데, 밀수업자들이 그 수문장에게 뇌물을 줬어요. 그 무리에 섞여서 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스톰
" 밀수업자? "/슈발츠
" 난민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생필품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자들이에요. 질이 좋지 않은 무리들이지만, 쓸만하더군요. "/스톰
까마귀의 시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반나절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동안 슈발츠는 인간으로 변신했고, 두르나와 플로라도 인간으로 가장하기 위해 변장을 고치는 등 나름대로 바빴다. 그리고 저녁까지 잘 챙겨먹은 후, 텐트를 비운 일행은 스톰을 앞세워 밀수업자들의 무리에 끼여 들어가 있었다.
밀수업자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 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성 안으로의 잠입은 순조롭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수문장과 밀수업자 대표가 밀담을 나누는 동안, 슈발츠 는 일행이 어둠 속에서 헤어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챙겼다.
" 뭐야, 그런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자니! "/밀수업자
" 싫으면 그냥 가던가. "/경비병
" 이런 날강도 같은 것들! "/밀수업자
쉬르릉!...
옥신각신 하는 동안 어디선가 칼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기폭제로 해서 경비병들과 밀수업자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렇게되면 싸울 수 밖에 없다. 달빛을 받은 무기의 날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파랗게 빛나며, 서로 격돌해 불꽃을 튀겼다.
차창!... 카캉!...
슈발츠 일행도 어둠 속에서 나와 밀수업자 편에 서서 경비병들을 공격했다. 슈발츠는 스톰과 함께 되도록 힘조절을 하려 애쓰면서 경비들을 둘 베어넘겼고, 두르나는 플로라를 데리고 다른 밀수업자의 무리를 뒤를 따라 성문에서 열린 쪽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서 안쪽의 경비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땡땡땡!!!... 땡땡땡!!...
막 두르나가 플로라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몸을 날리 무렵, 경계용 종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지원군을 부르는 소리일 것이다. 슈발츠는 세번째로 상대하고 있던 경비의 칼을 흘려낸 후 그 얼굴에 철권을 먹여 쓰러뜨리고, 스톰과 함께 쪽문 안쪽으로 달려들어가 벌어지는 난전을 뒤로한 채 가까운 건물 지붕으로 뛰어올라 몸을 숨겼다. 선객인 두르나와 플로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거기서 재회한 셈이었다.
추가의 경비병들에게 압도당한 밀수업자들이 체포되거나 도망치는 동안, 슈발츠는 일행을 이끌고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슬슬 정리가 된 듯 하네요. "/두르나
" 그럼 오늘 밤의 숙소를 잡아야겠군. "/슈발츠
어느새 주변은 조용해져 있었다. 슈발츠를 선두로 해서 두르나, 플로라, 알루데시아 순으로 차례로 조심스럽게 지붕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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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든 여행자를 대상으로 삼는 여관은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도시 전체가 봉쇄된 상태에서, 이런 여관의 [기갈]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너무 고급 시설은 이용할 수 없다. 당장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슈발츠가 점찍은 곳은 [늪지 악어]라는 간판을 내건, 성문으로 통하는 대로변에 있는 수수한 선술집 겸 여관이었다. 슈발츠가 일행과 함게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 너머에서 졸고 있던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깼다. 하지만 그가 놀라기엔 아직 좀 일렀다.
" 2층 전체를 빌리겠소. 그리고 [프라이버시]가 좀 필요한데... "
슈발츠가 건넨 지갑에 가득 찬 금화를 본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
그렇게 에스갈란트에서의 활동 거점을 마련한 슈발츠였다.
플로라가 마법으로 결계를 치는 동안, 두르나와 스톰은 시내의 상황도 파악할 겸 겸사겸사 주변을 돌아보고 왔다.
" 도시 경비가 아니라 놀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더군요.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운것 같았어요. "/스톰
" 병영도 경계가 삼엄하고, 거리에 사람이라곤 안보여요. 도시 전체가 엄중한 감시 아래 있는 것 같아요. "/두르나
귀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도시 전체에 드리운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옴쭉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며칠동안 슈발츠는 시내 여기저기를 정보 수집 차 돌아다녔지만, 신통한 수확을 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확이 완전히 없는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정도로 경계가 삼엄하다면, 경계를 삼엄하게 만든 원인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므로. 슈발츠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계의 틈을 찾거나 반대자들의 세력에 들어갈 [틈]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저쪽에서부터 왔다.
" 당신들, 용병인가? "
낮에 시내를 좀 돌아본 후, 주점 아래층에서 두르나와 대작하고 있을 때 말을 걸어 온 것은 태이인과는 사못 다른 유백색 피부의 여성이었다. 후드를 눌러 써서 얼굴 생김새를 확실하게 알기는 어려웠지만 드러난 부분만 보더라도 상당한 미인 축에 속해 있었다.
" 그렇다고 할 수 있소만, 그런걸 왜 묻는 거요? "/슈발츠
" 당신들에게 일거리를 주려고. "/로브의 여인
슈발츠는 물론이고 두르나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로브의 여인 주변엔 네명이 은신한 채로 숨어서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귀족집안의 여성,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직접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에, 스릴을 즐기는 타입 같았다. 그 외에 슈발츠가 얻은 정보라면, 한눈에 마법을 간파하는 그의 시선에 비친 그녀가 아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아이템들을 다수 착용한 마법사 같았다는 정도다.
" 돈냄새를 맏고 어디선가 잠입해오는 당신같은 자들에게 딱 알맞은 일거리가 있지... "/로브의 여인
" 오호? "/슈발츠
슈발츠가 흥미를 보이자, 후드 아래로 드러난 분홍빛의 입술 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갔다.
[흥미가 생긴다면 해가 진 후에 [실피드]주점으로... ]
마지막은 전음 마법이었다. 여성은 그 말을 끝으로 로브 자락을 걷어서 휙 하고 몸을 돌린 후 주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 낌새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두르나
" 뭐, 감수하는 위험한 만큼 얻을것도 많은 법이니까. 그게 모험자들 아니겠느냐. "/슈발츠
윗층으로 올라오자, 마침 스톰이 플로라가 미스릴 풀 플레이트를 걸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원래 드루이드인 그녀는 금속 무구를 사용할 수 없었지만, 포클루칸 대학에서 문명과 드루이드적인 기예를 [조화]시키는 법을 배워서 그 제한이 다소 느슨해진 덕에 미스릴 정도라면 별 문제 없이 손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최근 젤로나와 사피아는 플로라의 장비를 만들어 입히는데 희열을 느끼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미스릴 갑옷도 젤로나의 신작이었는데, 화염과 전격에 대해 상당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에 덧붙여 에버미트의 달 엘프들 양식으로 제작한 흘림 세공 판금은 일반적인 풀플레이트보다 가벼운 무게인데도 비슷한 방어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검은 숲에서 입어봐야 할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에사 시도해 보는 것이다.
" 아... 이거 정말 아밍 더블릿(갑옷을 입기 위해 걸치는 속옷)을 입어도 쓸려서 엄청 아픈게... "/플로라
" 참아 플로라. 그래도 이건 전에 쓰던 그 무거운 나무 갑옷(철화된 목재 갑옷)보다 훨씬 덜 무겁다고. "/스톰
" 흐앙~... "/플로라
" 뚝!... 주인님이 보시고 계시잖아. "/두르나
울상을 짓는 플로라를 달래면서 두르나가 슈발츠를 언급하자, 그제서야 플로라는 슈발츠가 방에 들어온 것을 알아채고 반색을 했다.
" 주인님~ 이거 안입으면 안돼요?... "/플로라
" 안 돼. "/슈발츠
물론 슈발츠의 노예들이 다 그렇지만, 플로라도 과보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슈발츠가 노예들에게 무언가 하사할 때도 가장 좋은 무기보다 가장 좋은 방어구를 더 우선시했다. 칼라드네이가 죽었던 후로 슈발츠가 노예를 잃는데 민감해져서 그런 것이다.
" 아앙... 하지만 이거 입을때 마다 이렇게 비좁고 불편하다면 정말 끔찍해요. "/플로라
" 아아 그건 아니야. 젤로나가 말하기를... "/두르나
두르나가 그렇게 말하며 막 투구까지 다 걸친 플로라의 어께 부위를 한번 툭 치자, 그때까지 그녀의 전신를 옥죄고 있던 미스릴 판들이 거짓말처럼 딱 알맞게 느슨해지며 그녀의 피부에 달라붙듯이 맞춰졌다. 순식간에 불편함이 가신 플로라는 놀랍다는 눈으로 두르나와 슈발츠를 번갈아 보았다.
" 오오? "/플로라
" 이게 바로 마법 갑옷의 편리한 점이지. 사이즈가 자동으로 맞춰지거든. 이제 팔다리 쪽도 토시처럼 붙었다 뗄 수 있도록 되었을 테니 혼자서도 입을 수 있을거야. "/두르나
물론 두르나가 입고 다니는 미스릴 체인도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마지 못할 경우에만 철목 갑옷을 입었을 정도로 로브 취향이던 플로라는 이제사 마법 (금속)갑옷의 편리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 자 이제 일어서 봐. "/두르나
" 네 언니. "/플로라
찰칵!...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플로라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 아, 이거 소음처리가 필요하겠군. 나중에 젤로나에게 말해야겠군. "/슈발츠
" 제가 말해둘께요. "/두르나
갑자기 편해진 플로라는 싱글거리며 갑옷을 입은 채로 그자리에서 한바퀴 빙글 돌며 춤추는 듯한 포즈를 취했고, 그 귀엽고 우스운 광경을 본 슈발츠와 다른 노예들이 웃은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철컥거리는 소리 때문에 은밀하게 움직이는게 무리라는 판단을 내린 슈발츠는 다시 그녀의 갑옷을 벗도록 했다. 물론 플로라는 이의가 없었다.
그럭저럭 저녁까지 시간을 때운 후, 알루데시아가 따라오려는 것을 스톰이 돌보도록 해 두고 난 후 슈발츠는 두르나와 플로라를 데리고 [실피드]주점으로 향했다. 그 주점은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슈발츠는 주점 인근에 쳐진 엄중한 결계들을 볼 수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
선객이 제법 많았다. 여급이 내준 자리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튜닉(풍성한 외출복 상의)과 브라카(딱 달라붙는 타이즈 같은 중세 바지)를 차려입은 인간 남성 하나가 거대한 체구의 완전무장한 경호원 네명과 함게 등장했다.
" 보컬 가문의 후새드로군. "
옆 테이블에서 흘려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발츠의 예상 대로, 어디서든 용병들이 잠입해 온 것 못지않게 이쪽의 귀족 가문들의 물밑 움직임도 활발한 것이다. 하지만 더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슈발츠와 다른 용병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대로 다섯명의 비슷한 다른 [요인]들이 여관의 안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그들의 옷에는 저마다 다른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고, 그것은 결코 화합하지 못하는 앙숙관계라던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가문의 것이었다.
슈발츠를 유인했던 여인도 그 무리 속에 끼어 있었는데, 아침과 비슷한 후드 달린 로브 차림이었지만 이번엔 그 로브의 재질이 하얀 비단에 금실로 수를 놓은 굉장히 화려한 로브였다는 점이 달랐다. 그 로브의 왼쪽 가슴 언저리에는 베이스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떻게 앙숙이라던 다섯 가문이 한데 손을 잡은 것인가? 슈발츠는 속사정을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 여러분, 잘 오셨소. 이몸은 후새드 보컬이라고 하오. "
한단 높은 연단에 올라선 후새드는 우아하게 인사를 해 보이고는 본격적이고 짧은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 같은건 한귀로 듣고 흘린 슈발츠는 여급이 내 온 에일을 마시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대부분 칼잡이들이고,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도 두어명 보였다.
" 두르나, 뭐가 보이느냐? "/슈발츠
" 천정에 여섯, 단상 아래 넷. 잘 숨어있네요... 게다가 저 남자, 전사처럼 차려입었지만 마법사에요. 저 여자도. "/두르나
두르나의 눈썰미도 슈발츠 못지 않았다. 플로라는 두르나만큼의 눈썰미는 없었지만 대신 두르나보다 능청스럽게 [평범한]용병 일행을 연기하고 있었다.
" 그래서, 이 역사적인 위업에 여러분들의 참가를 원하는 바입니다! "/후새드
연설은 별로였지만, 이어진 보수에 대해서는 다들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1인당 하루 5GP. 전투가 벌어진 날에 추가로 위험수당에 하루 25GP는 시세의 다섯배였다. [상대]의 위험도를 감안하더라도 후한 보수였다.
" 정말 [뭔가 할] 생각이 있나보군. "/슈발츠
" 그러게요, 엄청 쓰는데요? "/두르나
" 그래도 시세의 다섯배라니, 뭐랄까 조금 의심스럽네요. "/플로라
슈발츠는 일행인 두르나와 플로라를 대신해 3인분의 계약을 체결한 후 숙소를 옮길 것을 권유받았다.
" 보컬 가문에서 제공하는 안전가옥이 있습니다. 그리로 옮기시는게 안전면에서도... "/사무원
" 우린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편하오. "/슈발츠
사무원은 조금 더 권유해 보려다가 슈발츠의 확고한 눈빛을 받은 후 입을 다물었다. 다른 용병들 대부분은 좋아라 하며 숙소를 옮기러 나갔다. 수상함이 좀 더 진해지는 것을 느끼며, 슈발츠는 주점을 나섰다.
" 두르나. "/슈발츠
슈발츠가 부르자마자, 두르나는 그의 명령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거처를 옮기는 용병들을 미행하는 동안, 슈발츠는 플로라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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