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V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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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이 작자가 키다.
난 공포로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덩치 큰 흑인건달이겠지, 라고만 상상했지, 지옥에서 방금 걸어나온 것 같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지닌 이런 괴물이 키일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난 그저 그렇고 그런 약쟁이 포주, 최악이래봤자 딱 내 아버지같은 그런 포주를 상상했었다구.
내 두려움을 뻔히 느끼며 키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 하다 갑자기 내 팔을 마치 바이스로 조르는 듯한 악력으로 세게 움켜잡았다. 팔뼈가 으스러지는듯한 괴력이었다. 눈물이 질끔 흘렀지만 너무 무서워서 고통의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잘 들어, 내가 쥐고 있는게 자네 팔이 아니라 모가지였으면 벌써 넌 뒈졌어. 너같은 거 죽이는 건 일도 아냐."
뒤 좀 캐고 다녔다고 이렇게까지 하는건 너무 하잖아 씨팔!, ....물론 마음 속으로만 한 대사다.
잠시 후 내 팔을 놔준 키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벗어둔 외투를 집어드는 그를 보면서 나는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가는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겁대가리도 없이.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서.
"빌어먹을 개새끼. 그렇게 좋은 여자를, 그런 천사같은 여자를. ....씨발"
...물론 입에서 저 말이 튀어나오고 정확히 0.1초만에 난 당장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니가 너무 불쌍해서, 내가 지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게 돼서, 이 무서운 남자가 순간 너무 미웠다. 그래서 잠시 미쳤었나보다.
난 당장이라도 키의 손에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있던 바텐더도 나보다 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힘쓰는 것하고는 100만 광년쯤 거리가 멀어보이는 백인 꼬마가, 얼핏 보기에도 온몸이 강철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욕지거리를 해댔으니. 그래, 솔직히 말하자. 당장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말이 헛나왔다고,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바텐더의 표정도 가게 부숴질 일이 무서워서인지 내게 그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키는 막 일어서려다 그저 다시 자리에 앉고는 말없이 내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날 빤히 바라보던 그가 바텐더에게 저리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바텐더는 재빨리 반대쪽으로 부리나케 몸을 피해버렸다.
키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마시고 있던 술병을 뺏아 한모금 들이켰다. 그러더니 씨익 웃는다.
"그래, 내 구멍동서가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맘에 들었어."
난 영문을 몰라 갑자기 친한 척 구는 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음을 띄고 있었다.
"지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형편없는 놈이면 내가 그 꼴 못 보지. 그래, 맘에 드는 녀석이야. 너."
....아, 지니가 나에 대한 얘기를 좋게 한건가?
....잠깐, 화대도 안 받고 내게 용돈까지 쥐어줬단 얘기까지 해버렸다면 이건 좋은 상황이 아닐수도 있었다. 손님따위에게 정을 주는 창녀를 좋게 봐줄 포주따위 이 세상엔 없다. 그럼 이 자식이 내게 미수금(?)이라도 받으러 온건가? 아니, 그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지니의 얘기를 듣고 이 자식이 지니를 어떻게 한건 아닐까. 화대도 못챙기는 멍청한 창녀에 대한 징계같은 걸로. 키 이 자식이 또 데리고 있을 다른 창녀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니가 요 일주일동안 안보인건가? 일도 못 나갈만큼 심하게 얻어맞거나 해서?
지니에 대한 걱정외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혹시 지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 아닙니까?"
물론 속뜻은 네가 지니를 어떻게 한 거 아니냐는 얘기였다.
"하핫, 내가 지니를 일도 못 나갈만큼 호되게 패기라도 했냐라는 얼굴이군. 자네가 생각하는 것 같은 짓을 만약 내가 했다면 그건 차라리 묻지 않는 편이 좋았겠는걸."
"....그럼 요 며칠간 지니가 안 보인건..."
"재미있는 친구야, 자넨. 꽤나 지니 걱정 뿐이로군. 그래, 지니는 멀쩡하게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네. 됐나?"
살짝 비웃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키가 다시 이제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이 일어서려고 한다. 난 서둘러서 다시 용기를 쥐어짜내 그에게 급히 따져 물었다. 스스로 놀랄만큼 용감한 행동이었다. 난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무서운 괴물을 만나본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목숨이 위험하다는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겁없이 대들어 본적도 없었다.
"지니가 안전하다는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내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자 키가 짜증이 가득한,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순간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오늘 왜 이렇게 지나치게 용감한거지....
"내가 네 녀석이 진짜로 좋아서 이렇게 좋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나? 배짱 좋다고 칭찬해주니까 눈에 뵈는게 없어?"
잔뜩 쫄아서 다시 주저앉은 내 얼굴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키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으르렁댔다. 그 때, 가게 문 밖에 서 있던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코트에서 기관총을 꺼내드는 모습이 나를 윽박지르는 키 너머로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키를 온 힘을 다해 부둥켜 안고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당연히 문 밖에 총을 꺼내든 남자가 키를 노리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같다. 굳이 키를 보호하려고 든 이유는...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든 것도 내 인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아, 지니가 키 없으면 자기도 죽을거라고 말했었던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키는 그 짧은 순간에도 어느새 몸을 뒤집어 내 위로 올라타고 왼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른손 주먹은 치켜올린채 이걸 쥐어박어말어 하는 갈등이라도 하는 것 같았고.
내가 자신에게 덤벼들은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잠깐, 이봐요, 난 당신을 구하려고 한거라구요!
그 때, 가게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며 가게 안으로 총탄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는 믿을 수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급작스런 기관총의 난사에 반응했다. 내 몸위로 바짝 엎드리고는 포복으로 테이블이 자빠진 아수라장 속으로 재빨리 기어갔다. 그것도 한 손엔 내 옷덜미를 움켜쥐고 끌고가면서.
비명소리, 귀를 찢는 것같은 총성, 이리저리 날리는 테이블이며 의자의 파편, 유리조각. 내 몸위로 총알세례를 맞아 순식간에 벌집이 된 누군지 모를 술꾼 하나가 쓰러지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키는 박살이 난 테이블과 의자, 시체의 뒤에 엎드려 숨어 가게 밖을 침착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이 저렇게 침착할수가 있는거지? 이 인간 진짜로 지옥에서 튀어나온 거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키는 총을 난사하는 녀석들의 숫자와 총알을 세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한 자루 꺼냈다가 잠시 후 모자라겠다는 듯이 다시 한 자루를 더 꺼내 양손에 하나씩 총을 들고 기다리던 키는 잠깐 총알세례가 멈추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카운터 쪽으로 뛰어가며 양손에 쥔 권총을 가게 밖으로 난사했다. 아니, 난사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카운터 안으로 몸을 날려 뛰어들기까지 그 짧은 순간 키가 쏜 총알에 밖에서 탄창을 갈던 남자들 몇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으니까.
마음놓고 죽 늘어서 기관총을 난사하던 밖의 괴한들은 순식간에 동료 반 가까이를 잃고 당황해 주차된 차 뒤로 허겁지겁 숨기 시작했다. 탄창을 모조리 다 써버렸는지 응사도 하지 못하고 꽤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가게 주인이 비상시에 쓰려고 카운터에 숨겨놓은 것같은 엽총을 손에 들고 표범처럼 날래게 카운터 밖으로 튀어나온 키가 차 뒤로 도망가는 놈들의 등을 향해 무지막지한 산탄을 날려댔다. 사람이 마치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날아가는 모습이 슬로 비디오처럼 보였다. 남아있던 놈들은 악귀처럼 달려나오며 엽총을 난사, 아니 빠른 속도로 정조준사격하는 키에 의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윽고 키가 엽총을 바닥에 내던지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총성으로 멍해진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기관총으로 난사를 해댔는데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카운터 뒤에서 바텐더가 겁에 잔뜩 질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이 가게 안에서 총에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봐요, 어서 구급차를 불러요!"
내가 두세번 소리를 치자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바텐더가 황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그 순간 또 총소리가 울렸다. 바텐더는 혼비백산해서 카운터 안으로 엎어지고 나도 얼른 몸을 숙였다.
키의 권총에서 나는 총소리였다. 그새 권총에 새로운 탄창을 갈아넣은 키가 쓰러져있는 괴한들의 시체의 머리에 대고 확인사살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시체의 두개골이 박살나며 터져나오는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나가는게 보였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바텐더도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키가 시체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끔찍한 모습을 벌벌 떨면서 훔쳐보고 있었다.
확인사살을 끝낸 키가 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다 내 눈과 마주치더니 갑자기 멈춰선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그가 내게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리고는 뒤돌아서 금새 바깥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와 바텐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불과 1-2분 사이에 일어난 일 치고는 주변은 마치 지옥같은 풍경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가게 안에는 십여구의 시체와 같은 수의 피투성이가 된 총상환자가 비명을 질러대고 밖에는 머리통이 모두 박살나 얼굴이 없어져버린 끔찍한 시체 십여구가 뒹굴고. 도무지 현실감이 전혀 없는 아비규환 속에서 멍하니 서있는 내 귓가에 저멀리서 구급차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 일단 끝났습니다. 조만간 물어볼게 있을지 모르니까 되도록이면 여행은 자제하시고 행선지는 꼭 담당형사에게 통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술을 마치고 담당형사가 내게 악수하며 말을 건냈다. 그의 명함을 받아쥐고 나는 피곤으로 쪄든 몸을 끌고 경찰서를 나섰다.
다친데가 없다는대도 기어이 병원에 실려가 아침까지 지긋지긋한 검사를 받고 이어 한숨도 못 자고 경찰서에서 사건진술을 해야했다. 진술이 가능한 사람이라곤 나와 바텐더 둘뿐이었고, 그나마도 별로 해줄 얘기가 없었다. 굳이 지니 얘기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그걸 빼고 나니 할 얘기는 바텐더나 나나 다를게 없었다. 바텐더가 보기에도 키와 나는 술마시다 시비가 붙은 모르는 사이였고 사실을 따져봐도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기관총을 난사한 괴한들은 얼굴이 날아가버렸지만 지문조회로 금새 신분이 밝혀졌다. 모두 전과가 A4한장은 가볍게 넘기는 악명높은 러시아마피아들이었다. 이들이 키를 노리고 총격을 가한걸로 경찰은 추측하고 있었다. 문제는 경찰도 전혀 키라는 의문의 인물을 알지못한다는 것. 나와 바텐더의 진술로 몽타주는 그릴수 있었지만 전과자 데이터베이스에서도 특징적인 얼굴의 칼자국은 매치되는 인물이 없었다. 입국한지 얼마 안된 중국계 갱단 소속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물론 키의 이름은 내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이 수사에 더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순간 등짝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지난 밤 그 끔찍한 총격사건의 주인공인 키가 내 침대 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 그가 술집에서 떠날때 내게 한 윙크의 의미가 이거였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