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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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장의 말이었다.
이런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놓은듯 커다란 실내의 바닥에는 결계를 위한 피빛의 진이 그려져있었고 피로 물들인듯한 시뻘건 천들이 어떤 형태를 띄고 공중에 매달려있었다.
역시.. 대군장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듯 싶다. 대군장처럼 이쪽에 무지한 이가 혼자서 이 정도로 준비를 하는건 불가능하다. 세아의 목숨으로 협박을 한 탓이겠지만 어머니를 협박해서 치우에 대한 정보를 어느정도 얻은것은 확실한것 같았다.
실내에는 지아와 대군장뿐만이 아니라 대군장의 심복으로 보이는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세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세아...야.. 』
지아가 낮은 목소리로 세아를 불러보았으나 세아는 지아의 시선을 회피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아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저 계집애.. 누구때문에 이렇게 된... 』
답답한 마음에 화를내는듯 하던 치우가 말을 멈추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진듯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지아의 마음만 더 심란하게 할 뿐이었다.
『준비는 되었겠지? 』
말을 마친 대군장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방의 외진곳에 각자 떨어져있던 병사 세명이서 활을들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지아를 조준하였고 지아의 뒤쪽에서 또다른 병사하나가 지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내가 불로불사가 되는 그 순간을 맞이해 볼까? 시작해.. 』
대군장의 말이 끝나고 잠시동안 정적이 실내를 감싸고 돌았다. 실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숨죽여 지아를 향하고 있었고 대군장의 말을 듣지못하기라도한듯 잠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지아가 천천히 치우가 봉인되어 있는 팔을 들어올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치우야.. 』
치우의 말에 지아는 대답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 헬쓱한 얼굴로 지어보이는 미소였지만 실로 치우에게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것만같은 지아의 미소였다.
이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아이인데...
지아의 미소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이 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아가 사람들 앞에서 웃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잘 웃어보였지만.. 어머니나 특정 몇명의 인물들 이외의 사람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치우도 잘 알고 있었다.
『시작.. 할게... 』
커다랗게 바닥에 그려진 피빛의 문장의 중앙에 서서 한쪽 팔을 들어올린채로 지아가 봉인해제를 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금... 너와 맺은 약속을 끝내려 함이니... 』
지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 소리에 치우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당연히 봉인을 풀기위한 주문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지아가 외우고 있는 주문은 단순히 봉인을 풀기위한 주문이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와나 서로 다른 존재가 되어........ 』
이건 상당히 예상밖의 일이었다. 자신이 계약의 주체가 되는것만 아니라면 몇 명하고도 계약이 가능하다. 지아와 치우의 경우 그 주체가 지아였으므로 구지 계약자체를 해지하지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아는 지금 계약 자체를 무효화 시키고 있었다.
이렇게되면 차후에 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해도 치우는 그걸 알 방법이 전혀 없다. 또한, 그걸 안다고해도 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찿아갈 방법조차도 없어지게 된다. 그 사실은 분명 지아도 알고 있을터인데... 어째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리라.. 이로서 우리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선언하노라 』
치우가 지아와 맺은 계약이 파기되어버렸다. 단순히 봉인을 풀어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계약자체를 파기해버리는 상황이라면 일단 아무리 치우가 싫다고해도 지아의 몸에서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더이상 지아에게 무엇을 물어볼 겨를도 지아의 의중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치우는 지아의 몸 밖으로 스르르 밀려나기 시작했다.
치우가 봉인되어있던 손으로부터 피빛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나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속에서 멀리 보이는 인영처럼 지아의 손주위에 감도는 피빛의 기운 사이에서 서서히 치우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아를 제외한 실내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고 있었고 지아의 뒤에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병사는 그 광경에 그리고 생각보다 거대하고도 무섭게 생긴 치우의 형상에 넋을 잃고 칼을 떨어트리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다 죽여버리고 지아를 데리고 떠나버릴까?"
지아로부터 몸이 해방되고나서 대군장의 모습 그리고 세아의 모습 거기다 활로 지아를 겨누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치우에게 분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봉인의 계약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치우가 그러기도전에 지아가 다시 봉인해버리면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계약자체가 파기되어버리면 지아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물론.. 지아가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일이니 지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1년이고 2년이고 지아를 따라다니며 용서를 구하면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자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가 참기 어려울만큼 치솟아올라왔다.
『죽인다... 다 죽여버린다... 』
치우의 머리속은 죽여버린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올라갔다. 치우가 한걸음 내딛자 그 용맹하다던 대군장도 그 기세가 두려운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군장조차도 그런상황인지라 병사들 역시 잔뜩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여차하면 도망갈듯한 태도를 보이자 대군장이 소리쳤다.
『어차피 결계안이야.. 저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겁먹지마라!! 』
치우의 말에 대군장의 얼굴에는 역력하게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피...!! 백마의 피.. 그.. 그걸 저녀석에게 뿌려!! 저.. 저녀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야!!』
순간.. 치우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어왔다. 너무 흥분했다...
분노에 눈이 멀어 미처 지아의 안위까지 염두해두지 못하고 있었다.
『안돼!!! 』
치우가 다급히 뒤로 돌아서 지아를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은채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아있는 지아의 모습이 치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아의 모습과 함께...
주저앉은 지아의 앞.. 바닥이 피로 물들어가는 것이 치우의 눈에 보였다.
『아..안돼.. 안돼!! 으아아악!!! 이.. 이놈들!! 다 죽여버린다!! 』
치우가 미칠듯한 분노로 이성을 잃어버리기 직전 힘겹게 치우를 부르는 지아의 목소리가 치우에게로 들려왔다. 치우가 지아에게로 황급히 다가가 비스듬히 지아를 안아들며 지아의 상태를 보았다.
지아의 복부에는 칼이 깊숙히 박혀있고 박혀있는 칼 주위의 의복은 이미 새빨갛게 지아의 피로 물들어있었다. 그렇게 칼이 박힌채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듯이 간신히 호흡하면서도 지아는 치우를 향해 웃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아.. 너...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
그제서야 치우는 상황이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지아를 위협하고 있던 병사는 모두 넷.. 그 중 셋은 활을 들고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지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녀석은 이미 치우가 지아에게서 나오는 순간부터 겁을 먹고 칼을 떨어트리고는 저 멀리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지금 지아의 상태는 병사들이 한 짓이 아니었다.
대군장이 지아를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다. 이미 지아 스스로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자신의 복부에 찔러넣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봉인을 파기하는 주문을 외울때부터.. 아니.. 대군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한 순간부터 지아는 이것을 생각했던 것이었다.
『왜.. 왜 그런거야.. 도대체 왜...!! 』
지아의 팔이 바닥을향해 힘없이 스러져 내렸다. 실내의 모든 시선이 지아에게 집중된채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누구하나 어떤 소리도 작은 미동도하지 않고 있었고 그 고요한 정적처럼 이제 더이상 작은 입에서 힘겹게 나오던 지아의 숨결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지아를 끌어안고 한동안 오열하던 치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지아가 마지막까지 당부한 일이라 참는다... 』
치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는듯 한마디씩 꾹꾹 말을 짚어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 지아의 죽음.. 그리고 금방이라도 모든것을 날려버릴듯한 치우의 살기에 실내는 얼어붙은듯 조용했다.
『하지만 너!!! 』
분노가 폭발하려는걸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듯 작은 행동도 자제하려는듯하던 치우가 갑자기 한 손을 치켜들어 대군장을 가르키며 말했다.
『네 놈... 네 놈 하나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
치우가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적빛이 감도는 무형의 기운이 치우의 한 손 주위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 치는듯하더니 지아를 저격하기위해 방의 구석에 위치해있던 병사들의 허리춤에서 일제히 칼이 뽑혀져나와 치우의 손 주위로 모여들었다.
『자... 잠깐...!! 』
마치 스스로가 생명을 가진 양 치우의 손 주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던 칼들이 일제히 그 칼날을 대군장쪽으로 향하자 대군장은 뒤쪽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무리 대군장이라해도 이런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두려움에 도망가려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죽어라..!! 』
치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음을 울리며 치우의 손 주위에 있던 칼들이 일제히 대군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으..으.. 으아악..!!!! 』
죽는다는 생각에 대군장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꼴사나운 비명을 질러대었다. 곧 공중에 춤을 추듯이 떠있던 칼들이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올것이라 생각했지만 잠시의 시간이 지나도록 대군장의 몸에는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네가... 』
대군장은 얼굴을 가리던 팔을 치우고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무엇인가가 대군장 앞에 서있었다. 그 인물이 세아라는 걸 대군장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칼이 대군장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세아가 대군장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째서 네가.. 네 언니가 아닌 이 자를 감싸고 도는것이냔 말이다!! 』
『그..그런것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니까.. 내가 이 분에게 쓸모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거야... 내가 사랑하니까...!! 』
절규하듯이 치우를 향해 소리를 치는 세아였다.
『사랑...이라고?? 』
치우가 무형의 기운으로 세아를 들어올렸다. 세아는 마치 누군가에게 목이라도 잡혀서 들어올려지는듯 자신의 목 부분을 잡고 호흡이 곤란한듯 켁켁대고 있었고 치우는 그런 세아를 한쪽벽에 밀어붙이듯 몰아 세웠다.
『네가.. 사랑이 어떤건지 알기나 해?? 』
쿠우우우웅..!!
공중에 뜬 채로 한쪽벽에 등을 대고 괴로워하던 세아의 옆.. 무엇인가의 엄청난 압력을 받은듯이 벽이 움푹패이는것과 동시에 푸스스 먼지가 떨어져내리며 실내가 크게 울렸다.
『사랑을 안다는 년이.. 지아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모른다는거야!! 』
집이 무너져 내릴정도의 흔들림 이후에 또다시 분노로 가득한 치우의 음성이 실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어.. 지아는 날 위하는 척하고 언제나 내것을 빼앗아갔어.. 어머니도.. 친구들도.. 동료들도... 모두 내게서 빼앗아 가버렸어... 그.. 그게 사랑하는 거야?? 그렇게 빼앗아 가는게 사랑하는 거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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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길에 버려져 있다시피한 지아를 제사장은 부족으로 데려왔고 세아의 일로 제사장과 일전에 안면이 있었던 치우의 도움을 얻어 지아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식을 회복한 지아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쩌다가 그런 곳에 버려지다시피 했는지 지아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하는 것은 서툴렀다. 그 당시 지아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 역시 지아가 자신의 부족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지아를 조금씩 피하거나 경계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지아가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유로 어떤 전염이 되는 병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되어버린 제사장은 그렇지 않았지만 제사장이라는 지위는 여느 여염집 어머니처럼 지아를 돌봐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누구도 지아와 같이 있으려하지 않았고 지아 역시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아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것은 지아를 점점 폐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또다시 다른 사람들이 지아에게 접근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그 당시 지아의 일과는 아침 일찍 부족과 떨어진 숲의 외진곳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항상 외롭고 이렇게 혼자 있는 것도 무서웠지만 사람들틈에 섞여서 불안감에 잔뜩 긴장을하고 두려워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언니~ 』
오늘도 멍하니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지아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니~ 』
세아가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하며 지아쪽으로 다가와 숨이 찬지 헉헉 거리며 지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세아를 바라보던 지아가 다시 세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하늘쪽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내가 싫어? 』
지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매일같이 유일하게 지아가 어디에있던 귀신같이 찿아오는 세아였지만 지금까지 세아와 대화를 나눈적은 없다. 이 정도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도 세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지아를 찿아왔다.
『난 언니가 좋은데 히~ 』
세아는 넉살좋게도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보이지 않는 세아의 팔짱을 끼며 웃어보였다. 그래도 지아는 세아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니.. 오늘은 말이야.. 엄마가~ 』
아무런 대답도.. 호응도 해주지 않는데 세아는 또 혼자서 주절주절 오늘 있었던 일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모두다 꺼내 놓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감시하듯 자신을 찿아오는 세아가 못내 부담스러웠다. 어린 아이라고는 하지만 두렵기도 하고 어쩔때는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익숙해져버린 느낌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어쩌면 세아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 하는 것으로 세상을 그리고 부족에 대해서 알려주고 가르켜준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아는 이 부족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누구나 아는 물건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꽤 있었고 마치 사람사는 세상을 처음 접한듯이 지아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말을 하고 있는 세아도.. 무심결에 듣고 있는 지아도 그 당시에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분명 그것은 이후에 지아가 사회라는 곳에 섞이게 될 때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는 세아의 이야기를 듣는둥 마는둥 지아는 세아에게는 눈길한번 주지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 나 이제 여기 못올거 같아.. 』
평소때와 다름없이 한참을 그렇게 혼자 재잘거리던...
과연 끝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정도로 끝없이 혼자 이야기를 하던 세아가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말을 끊었다.
언제나 세아가 무슨 말을하던 세아쪽에 눈길한번 주지 않던 지아였지만 이번에는 지아도 시선을 돌려 세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할때에도 언제나 헤에~ 거리며 웃었던 세아였지만 지금 세아의 얼굴에는 웃음기는 찿아볼 수 없었다.
『엄마가.. 내일부터 신녀가 되기위한 것들을 배우래.. 』
『 .... 』
지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왠지 조금 허전한듯한 느낌이 들어오는 것도 같았다.
『엄마한테 배우는 게 싫은건 아니지만.. 이렇게 언니랑 같이 있는것도 좋은데.. 』
허전한듯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세아가 무슨 말을하던 대답한번 하는 일 없던 지아가 짧게 말했다. 지아 스스로가 말을 했다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 것같은 느낌이었다.
지아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이 신기해서 일까?
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동안이나 말똥말똥 지아를 쳐다보았다.
『언니~!! 』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세아가 갑자기 환하게 웃는 낯으로 지아의 팔에 안기며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같이 엄마한테 배우자~ 응? 』
세아는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처럼 지아의 팔에 매달리다시피하면서 지아에게 졸라대고 있었다. 지아가 다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세아는 졸라대는 것을 그치지않았다.
『언니~ 같이 가자~ 응? 언니이~~ 』
지아가 귀찮은듯 짧게 싫다고 대답했지만 세아는 오히려 그런 지아의 대답에 더 용기를 얻은듯 쉬지않고 보채기 시작했다. 싫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지금껏 지아는 한번도 세아에게 어떤 대답이나 반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지아가 세아에게 비록 싫다는 말이지만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욱 세아에게 희망을 가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이~ 나 언니랑 같이 하면 무지무지~ 잘할 수 있을거 같은데~ 응? 언니~ 』
세아는 계속해서 보채고 있었지만 지아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조금씩 쉬지않고 계속해서 보채대고 있는 세아가 귀찮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자 지아는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팔에 매달리다시피한 세아를 확 밀쳐내며 말했다.
『싫다고 했잖아!! 』
지아가 자신을 그렇게 떠밀어 버릴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세아였던지라 세아는 몇바퀴를 구르듯 뒤쪽으로 나자빠져 버렸다.
『아... 』
지아 역시도 세아가 그렇게 맥없이 나가 떨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팔을 비비며 아파하는 세아에게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파... 』
미안한 마음에 차마 세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아가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세아가 지아를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냐.. 내가 미안해 언니.. 언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언니가 싫다면 더는 안조를께... 』
세아의 말에 지아가 고개를 들어 다시 세아를 바라보았다. 잘 가꾸어진 길이 아닌 산길에서 구른지라 세아의 팔과 다리에 작은 생채기가 나있었지만 세아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어보이고 있었다.
"아플텐데...."
미안한 마음과 허전한 마음...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지아는 그렇게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언니!!! 뒤... 뒤!!! 』
그런데 그 때...
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웃어보이고 있던 세아의 얼굴표정이 급작스럽게 굳어지며 한 손으로 세아쪽을 가르키며 말까지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세아가 가르키는 방향을 향해 돌아보던 지아는 순간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크르르르르... 』
언제 다가왔는지 그림자와도 같이 생긴 묘하게 생긴 물체가 지아의 뒤쪽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였다. 지아를 향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그 모습에 지아는 뒤로 물러서려했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굳어져버린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지아는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 』
지아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꼼작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치우는 이미 이전부터 귀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귀가 다가온것이 아니었다. 이 귀의 존재는 이미 지아가 이곳에 처음 왔을때부터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고 별 볼일 없는 하급귀인데다 보통 이런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귀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는 드물기때문에 치우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이들을 지켜보던 귀가 이들을 침입자 또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고 쫓아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지 치우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런 귀들의 경우 보통 인간이 접근하는 것을 싫어해 겁을 주어 도망가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기때문에 물러서면 쫓아오면서까지 해를 끼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지아나 세아가 겁을 먹고 도망간다면 그걸로 해결되는 일이었기에 귀찮게 나서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지아 역시 그때에는 치우의 힘을 사용하거나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때였다. 만에하나 이 귀가 지아나 세아를 해치려든다면 그때 나서도 무방했기에 치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방관하고만 있었다.
치우와는 다르게 지아는 귀가 한발씩 다가올때마다 지아의 머리속은 두려움으로 가득 메워져갔고 머리속에는 오직 죽는다.. 라는 하나의 단어만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언니한테 손대지마!! 』
세아가 지아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지아는 그렇게 자신의 앞에 서있는 세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니에게 손대지말라고 소리치는 모습과는 달리 세아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비록 지아의 앞을 막아서고 나섰지만 세아 역시 이렇게 귀를 마주친 경험이 없는지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귀는 멈춰서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오자 세아는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인을맺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사장의 딸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보아왔던 모양이었다. 귀가 거의 닿을만한 거리에 다가오자 세아가 인을 맺은 손을 귀를 향해 뻗어냈다.
『크르르르... 크으으으.. 』
세아의 주술에 귀는 잠시 멈칫하며 주춤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재능은 있는지 방금전 세아의 행동이 효과는 있었던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식으로 배운것도 아닌 어머니의 행동을 흉내내는 수준의 것으로 귀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따끔한 정도였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귀의 성질만 건드려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냥 물러나기만 하면 아무일 없었을 것을 지아를 지켜주려는 세아의 행동으로 인해 귀도 화가난 모양이었다.
『아악.. 』
무엇을 어쩌고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세아의 작은 몸이 귀의 공격에 의해 한쪽으로 날아가 바위에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잠시 바닥에 쓰러진 세아를 바라보던 귀가 다시 지아쪽으로 그 시선을 옮겼다.
"이런...!!"
세아를 향해 공격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치우는 자신의 힘을 끌어올려 귀의 공격으로 받을 지아의 충격을 최소화 하려했다. 그런데 그 때 귀와 지아사이로 작은 돌맹이 하나가 날아왔다.
귀도.. 지아도.. 작은 돌맹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아가 서있었다. 바위에 부딪쳐 기절한 줄 알았던 세아가 머리에 한줄기 선혈을 흘려내며 한 손에 돌을 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우.. 우..리 언니한테 손대지마!! 』
비틀거리며 서있기도 힘겨운듯한 몸을 하고도 세아는 귀를 노려보며 맞아도 하나 아플것 같지 않은 속도로 귀를 향해 돌을 던져내고 있었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세아가 신경이 쓰였는지 지아를 바라보던 귀가 다시 세아쪽으로 그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완전히 죽여버리려는듯 귀가 세아를 향해 커다랗게 공격자세를 취했다.
『람 . 크리샤이 . 움 . 카이 』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는 치우도 알 수 없었다. 인간들은 여러가지 말들을 사용하지만 희안하게도 치우는 그런것들을 배우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자신이 직접 말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상하게도 알아듣는 것은 가능했다.
" 그 아이에게서 물러서라... "
분명..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치우가 아는 어떤 언어에서도 이런 문장은 없었다. 어떻게 치우가 그 뜻을 알고있는지 치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지아라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에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지아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아의 몸은 조금 전과같이 두려움에 떨고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세아를 공격하려하던 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지아를 바라보던 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세아의 행동으로 화나가 지아와 세아를 모두 해치울것처럼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던 귀가 조금씩 주춤거리며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설마... 어떻게...?? "
꼼작도 하지않고 귀를 노려보던 지아의 몸에서 치우는 하나의 기운을 느꼈다.
투기...
분명 투기였다. 지아가 투기를 내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가.. 그것도 얼마전까지만해도 금방이라도 죽을것만 같던 아이가 치우조차도 놀랄정도의 투기를 쏘아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 지금 지아의 몸에서는 엄청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기세에 눌린 귀가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급 잡귀라지만.. 어떻게 이런 아이가 투기로만 귀를 도망치도록.."
지아의 투기에 치우는 자신조차도 모르게 투쟁본능이 끓어오르며 자신의 기를 방출해냈다. 지아의 투기와 치우의 기가 어울어지는 순간 치우는 지아의 등뒤로 순백색의 날개같은 것이 길게 뻗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뭐.. 뭐야 이건..? 더구나 내 기운이 투기와 공명하고..있어..?"
지아의 투기에 치우의 기운까지 느껴지자 귀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귀가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지아가 내뿜던 투기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아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치우는 자신도 모르게 방출해내었던 자신의 기를 갈무리하고 세아와 지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아도 지아도 바닥에 쓰러진채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조금 전 치우가 본 날개같은 것은 지아에게서 찿아볼 수 없었다.
"착각... 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