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무협]호곡애사號哭哀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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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느 초가집, 검을 장비한 사람들이 찾은 곳은 그러한 곳이었다. 이곳의 풍경을 본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바보같은 놈.”
“가주…….”
무엇인가를 짓씹을 듯 이야기하는 푸른 두건의 남자에게 복면을 한 남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들로서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저 죄인인 그들이었다.
“녀석은……안에 있는가?”
“네, 가주.”
허술하게 만들어진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남자는 증오일지 그리움일지 모를 감정을 느끼면서 문을 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는 싸늘하게 식은 여자의 머리가. 무엇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바보 같은 놈. 바보 같은 놈.
“오셨습니까. 도련님.”
“가주다.”
“그랬군요……경하드립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나눈 대화는 그저 심상할 뿐인 대화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머리를 풀어헤친 광인 같은 형상의 남자는 빙긋 웃었다. 푸른 두건에 푸른 장삼을 입은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
“늦으셨습니다. 주군의 여인을 빼앗은 남자가 돌아갈 수 있을만큼 창천일문의 명예가 낮은 것은 아니니까요.”
약간의 아쉬움으로 말을 걸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것들이었다. 남자, 남궁현은 허탈한 웃음을 웃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따스하게, 광인과도 같은 모습의 남자가 바라보았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형의 여자를 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죄는 사면할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인 것이다.”
“제가 할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녀가 당신의 여자라고 확실히 인식받는 순간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말이 끊어졌다. 남궁현은 눈을 감고 그랬던가하고 한탄한다. 잠시의 침묵 끝에 광인과도 같은 남자가 다시 말을 꺼낼 때까지 그는 미망에 사로잡혀 갈등했다. 불쌍한 녀석. 못난 녀석. 바보 같은 여자. 불쌍한 여자.
“제가 죽는다면 그녀의 묘가 보이는 곳에 묻어주시겠습니까.”
나직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목소리였다. 말꼬리가 약간 흔들린 그런 목소리. 슬픔을 느끼며 남궁현은 광인의 이름을 부른다.
“석아, 정말로 안되겠느냐?”
“제가 감히 집안의 대소사에 참견할 수는 없습니다만, 집안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죽어야 할 때입니다.”
“남궁석!”
“전 남궁석이 아닙니다! 다만 석이라는 이름을 받은 필부일 뿐. 창천일문에서 기르고 먹여 키운 사냥개일 따름입니다!”
처음으로 광인의, 남궁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겠다는 의지. 어쩔 수 없었다. 남궁현은 마음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검을 들었다. 그의 동생이었다. 해준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해왔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추억이 식어가기 전에 함께 죽어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히는 것. 흐르지 않는 눈물이 흐른다. 눈 주위가 눅눅해졌다.
“주인의 발을 문 개는 팽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웃는다. 어찌하여 너는 웃는 것인가. 남궁현은 소리가 되지 않은 절규를 지르며 동생의 가슴에 검을 박았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남궁석은 소리가 되지 않는 고마움을 표한다. 고개를 떨군다. 아직은 숨이 붙어있다. 그 잠깐의 시간. 남궁석은 과거를 반추한다. 죽기 전까지 그녀와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식이 암전한다.
1.
남궁석은 창천일문 남궁세가의 핏줄이었다. 하지만 드러낼 수 없는 핏줄. 즉 부정에 의해 태어난 수치였다. 다만 그것이 가주의 핏줄이었다는 것과 그 어머니가 가주의 여동생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여동생은 몸을 던져 자결하고 가주는 말을 잃었다.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함구했다.
“검을 들어라.”
그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풍경은 어딘가의 자그마한 뒤뜰이었다. 그곳에서 낑낑대며 목검을 들어올리는 소년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남궁석이다. 아니, 그때까지는 석이라는 이름만을 알고 있었을 뿐, 자신이 남궁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시키니까 무공을 연마했고 주니 먹고 쉬어라고 말을 해서야 겨우 잘 수 있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재미없는 나날이었다.
“아얏!”
그런 재미없는 일상이 변화한 것은 한 소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붉고 푸른 당혜를 신은 소녀였다. 짚단을 꼬아 삼은 새끼로 짚신을 만들어 신던 소년이 보지 못한 예쁜 물건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가 일찍이 보지 못한 예쁜 소녀였다. 다른 어른들이 예쁘다고 말하는 밥데기 소불이보다 더 예뻤다. 그런 소녀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가지기 일보직전인 목검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검을 배우는 거야?”
“…….”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소녀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소년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년에게 소녀는 무사가 될 자가 자신의 병기를 소홀하게 다루면 안된다고 잔뜩 꾸짖었다. 그 꾸짖음은 다른 소녀 하나가 찾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아앗! 나 여기에 있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경공을 펼쳐 도망가기 시작하는 소녀의 모습에 멍해진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만남은 그것으로 끝났다.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았던 소녀의 이름은 알지 못한 채. 소녀의 붉고 푸른 당혜와 꽃같은 얼굴만을 가슴에 품은 소년은 처음으로 가슴이 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한 해마다 한 번씩, 소녀는 산새처럼 소년이 수련을 하고 있는 곳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소년의 가슴에서 크게 각인되어 하나의 꽃으로 활짝 개화했다. 소년의 첫사랑은 그녀였다.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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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 남궁가의 수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길러준 이 남궁가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지. 그리고 너의 죄를 씻을 기회를 주는 것에도!”
열두 살이 되던 해,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처참한 마음이었다. 노력하여, 무공을 닦아 남궁가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어 소녀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었던 마음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자리는 원망이 채웠다. 희망이라는 것을,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계획하게 한 소녀에 대한 원망이.
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날아 들어온 아름다운 새를 보는 순간 소년은 소녀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눈물을 그녀가 보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원망이 사라진 가슴을 채운 것을 절망이었다.
“왜 울어?”
이 눈물을 그녀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기원마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와 맺어질 수 없는 것이 슬펐다고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년의 말없는 눈물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녀는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내 이름은 백소혜. 나중에라도 말하고 싶으면 찾아와. 양양에 살고 있으니까.”
그녀를 포기하자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던 상황에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인연이라는 것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의 가슴에 소녀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새겼다. 자신에게 살아가는 보람이 그래도 하나라도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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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은 없고 석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형을 만났다. 무림에서는 이미 기대주로 손꼽히고 있다는 형이었다. 그리고 이 집안을 물려받을 소가주이기도 했다.
“호위라……잘 부탁한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무림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린 소가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 그런 생각으로 남궁현를 지키기 위해 남궁세가에서는 호위들을 붙였다.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것은 그였다. 왜 그렇게 어린 그를 동원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호위들 중에서 그의 무공은 단연 돋보였다. 남궁현과 대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배워온 무공은 허술하지는 않았던 셈이었다.
“넌 나의 형제와 다름없다.”
그렇게 2년, 남궁현은 그에게 각별한 호감을 표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서서 서글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슬픈 것은 그가 살아가는 보람이라고 생각했던 백소혜가 그의 형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골치 아파. 나에게는 혼약한 사람이 있는데.”
“석아, 남궁공자님은 뭘 좋아하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그는 공무와 사감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무를 위한 것이라면 백소혜가 남궁현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사감으로 움직인다면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며칠을 홀로 끙끙 앓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백소혜가 있는 곳에 남궁현을 데려간 것이었다. 남궁현의 시선이 자신에게 쏘아져왔지만 그는 태연했다. 이것으로 그녀가 행복하다면……. 다행히도 그 일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정말이지 매번……보답받지도 못할 일을 하려고 하다니.”
질책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렸다. 능글능글하게 웃는 남궁현의 놀림에 당황한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백소혜가 꽃을 따러 먼저 출발했을 때 나눈 대화였다.
“어라? 석이가 얼굴을 붉히는 건 처음 봤는데…….”
“…….”
“역시 석이도 인간이었구나. 귀신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끄러웠지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백소혜를 도와주려는 계획이 파탄났을 뿐이다.
“소저, 함께 나가보지 않으시겠소?”
“네? 네에, 네엣!”
“음? 어디 불편하시오?”
“아,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뒤에서 바라보는 그에게는 남궁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배려였다. 자신이 형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호의였던 것이다. 말하기도 부끄러워하니 이렇게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그 마음에 감사하면서도 남궁석은 계획을 따로 세웠다. 슬쩍 소문이 퍼질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곳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전으로, 명승지로, 후기지수들의 모임까지도. 이내 소문은 퍼졌다. 그리고 남궁현은 곤란해했다.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주가 그를 불러 엄하게 질책하자 그가 내놓은 답변이었다. 그리고 혼약을 맺은 집안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혼인할 것을 요청해왔다. 소문을 잡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한 번 퍼진 소문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이 소문을 잡기 위해 남궁세가는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소가주의 혼례를 성대히 열어야 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총관은 울상을 지었다. 그보다 더 울상을 지을 사람은 없어보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우아아앙!”
백소혜였다. 첫사랑을 잃은 소녀는 혼례식장에 나가지 않았다. 석이 바라보는 곳에서 그저 울기만 했다. 그는 무력했다. 더 이상 그녀를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석이라는 사람이군요.”
남궁현의 아내가 될 여자가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냉정한 눈을 한 여자였다. 멀고 먼 사천 땅의, 암기와 독을 주로 쓴다는 사천당문의 여자였다.
“쓸데없는 행동을 하셨더군요. 하긴 영웅은 삼처사첩이라고 하지만 주인에게 그런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안사람이 될 저로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지키지 않으면 여자를 해치겠다. 그런 말을 하고 여자는 뒤돌아섰었다. 울컥했지만 해칠 수는 없었다. 자신은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지키는 호위. 그는 한계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
두 번의 여름과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냉정한 눈빛을 하고 있던 사천당문의 여자는 귀여운 아이를 출산했고 백소혜는 찾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료하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의 기색을 알아챈 남궁현이 걱정해주었지만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궁현이 외유를 떠난 것은.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남궁현은 백소혜를 만났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에서 기다려, 난 갈 데가 있으니까.”
남궁현의 강압에 못 이겨 그는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불이 꺼진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진 기척에 긴장했다. 하지만 그 기척의 정체는 백소혜였다. 말없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두운 방안이라 사람을 착각했던지 백소혜는 옷을 벗었다. 정염이 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전음이 들려왔다.
――내가 안은 것으로 할 테니 안아.
남궁현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품에 안기는 그녀의 체향에 취한 그는 본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날, 일행에는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행복한 표정을 한 백소혜였다. 착각이었지만 행복하다는 표정을 한 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궁세가에 돌아오고 그녀에게 시녀가 주어지고 후원을 하나 받을 때까지 그는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세상에는 아직 남궁현이 그녀를 취한 것이라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상공은……오늘도 안오시나요?”
“……네.”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남궁현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다만 석에게 그녀가 불편해하지 않게 해주라는 분부만 내렸을 뿐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잃었다. 그녀가 웃음을 잃은만큼 그는 불행해졌다. 그녀에게 웃음이 돌아온 것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그 흔적이라도 남아서 다행이에요.”
“…….”
하룻밤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석의 아이였지만 남궁현의 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리는 없었다. 아이라도 태어난다면 그녀가 남궁현의 여자라는 소문이 퍼질 것이고, 중간에 아이가 죽는다면 핏줄이 얽혀버리는 일은 없으리라. 그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태어났다. 그녀보다 그를 닮아버린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도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조용했다.
“…….”
외롭게 아이를 키우는 그녀를 본 그는 결심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알게 해주겠다고. 그는 백소혜를 납치했다.
2.
아니나 다를까.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남궁가의 소가주의 여자가 호위에게 납치되었다는 소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쯤되면 남궁세가에서 조용히 있으려고 해도 소문은 가라앉힐 수는 없다. 남궁세가에서 추적대가 조직되어 파견되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그는 백소혜를 넘겨주고 자결할 생각을 했다.
“둘 모두 죽이라는 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추적대와 싸우면서 백소혜를 데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호남, 호북, 사천, 귀주, 섬서……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자책하면서 돌아가겠다고 울부짖는 백소혜를 어르고 달래며 기나긴 도망의 길을 떠났다. 그 와중에 그녀의 이름이 백소혜라는 것과 그의 이름이 석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성읍에는 그들의 얼굴이 나붙었고 현상금이 걸렸다. 그때부터 그들은 외진 곳만 밟아야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책했다. 그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
“…….”
한군데에 정착할 수 없어 사냥으로 연명하고 도둑질로 연명하며 살아갔다. 쾌활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어 시체같았다. 오랜 도주로 발이 아픈 그녀를 위해 그는 그녀를 안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
그녀에게 사과를 해보았지만 그녀는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저주의 말도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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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다시 사천에 들어서서였다.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그는 기쁨을 느꼈다.
“배고파.”
그는 신이 나서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다. 그리고 큼직한 노루 한 마리를 잡아들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돌로 손목을 짓찢은 것이었다. 그는 울부짖으며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바로 옆에 있던 문파인 아미파에 뛰어든 것이다.
“제발 이 여인을 살려주시오!”
목에 겨누어진 검의 차가운 감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울부짖었다. 진심이 느껴진 것인지 아미파에서는 그의 과거도, 그의 진실도 묻지 않고 그녀를 치료해주었다. 아마도 몇 달. 그에게 주어진 평화의 나날이었다. 열이 나고 의식이 돌아왔다가 흐려졌다는 소식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는 나날이었다.
“여기에 있었나.”
“경내에서는 살육을 멈추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몇 달 사이에 독이 바짝 오른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아미파에 들이닥쳤다. 그는 초연하게 이 기회를 잡아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다.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그녀가 남궁세가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죽어야겠다고. 하지만,
“둘 다 죽여야 한다.”
기계처럼 대답하는 그들의 말에 절망을 느낀 그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여인을 아미파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아미파에서도 그의 진심을 믿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던지 응해주었다. 남궁세가가 아미파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 그녀를 죽이려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행복하지는 못하겠지만 목숨만은 살릴 수 있다. 다시없는 기회였다.
“남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백소혜는 이런 기회를 거부했다. 그가 윽박지르고 애원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유리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절망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고통없이 보내주겠다. 투항해라.”
“불가不可!”
다시 추격이 시작되었다. 산과 산을 따라 도망다니며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따르는 백소혜가 자해하지 못하게 지키는 것은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약해질 수는 없었다.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그녀의 말이 가슴을 찔렀지만.
몇 달을 더 피하고 나서야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천에서 호북으로, 다시 호남으로, 안휘를 지나 절강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움막을 짓고 잠시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여전히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석은 나를 좋아했었어?”
몇 달이 다시 지났을까. 그녀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를 이런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은 자신에게 그런 자격은 없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에게 먹을 것을 권하고는 땅에 쟁기를 박아넣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먹을 것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그래, 그렇네.”
그런 그의 무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다시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오랜 도피생활과 자해로 몸이 약해진 그녀에게 병마가 덮치고 그녀의 마지막 숨을 끊어놓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도 나를 좋아해?”
그는 울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따스한 눈빛에.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처음으로 그를 봐주었다. 그리고 때마다 뛰어들던 아름다운 새처럼 웃으면서 그의 입에 입술을 맞추어주었다.
“처음부터 널 좋아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리고 그런 말을 해주었다. 그는 체면도 잊고 펑펑 울었다.
.
.
“안돼. 죽지마. 제발!”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크게 앓았다. 그리고 다시 의식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처음으로 입술을 맞춘 날, 그의 품에 안겨 파리한 안색으로 평온함을 노래하던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지금, 가주가 된 그의 이복형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일 없이 산골에 묻혔다.
3.
“아버지!”
남궁세가의 어느 후원. 남궁현은 후원을 거닐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뛰어오는 여자아이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사내처럼 생긴 녀석이라서 그런지 더 활발하구만.”
“우우웃! 그렇게 놀리시면 소혜는 삐질 거예요!”
“으하하하! 그러면 이 아비가 슬프지. 우리 아가씨는 어찌해야 이 아비를 용서해주겠나?”
“으음……놀아주세요!”
“오냐.”
남궁현은 눈앞에서 쾌활한 웃음을 웃는 소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얼굴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으니까.
“상공, 소혜를 너무 아끼시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정부인인 당소령이었다. 그녀의 냉담하던 눈빛도 십수년을 아이를 키우다보니 어머니의 눈이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녀를 보는 눈도 따스했다.
과거라면 있을 수도 없을 일이었겠지.
남궁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폴짝대면서 까부는 남궁소혜에게 꿀밤을 안겼다. 그리고 울상이 된 소녀의 손을 잡고는 후원을 거닌다. 자신에게 별다른 기억은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들’에게는 기억이 남아있을 추억의 장소였다. 그리고 그녀가 묻혀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늘도 어머니에게 인사는 잘 했니?”
“네. 소령 어머니에게 받은 꽃이 고맙다고 인사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렇니……받아주니 기쁘구나.”
남궁현과 당소령은 남궁소혜의 양손을 잡고 ‘그녀’가 묻힌 곳까지 걸어간다. 자그마한 무덤이었다. 하지만 관리를 잘해 때마다 주변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장소였다. 남궁현도, 당소령도. 마음이 심난할 때면 찾아오곤 하는 곳. 그들은 무덤의 주인을 향해 묵도한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든 그들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난다.
“네 어머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단다.”
“우우……엄마를 닮았으면 좋았을텐데……아버지 미워!”
“그게 문제가 아니잖니…….”
당소령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남궁현은 맞은 편 산을 바라본다. 그 중턱에는 ‘그’가 묻혀있다. 자신의 아내의 마음을 일부 가져가버린 괘씸한 녀석의 무덤이. 그 덕분에 소혜가 친딸처럼 대접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군요. 그런 사랑이라면…….’
세가에서 가장 그에게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였다. 심지어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자고 말한 것도 그녀였으니까. 그 치열한 도주와 목숨을 아끼지 않는 태도에 감동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빼앗기지는 않아. 생각하면서 쓰게 웃는다. 자신은 그럴 수 있었을까 하고.
“엄마를 납치한 사람은 정말로 나빠요!”
“그렇지. 하지만 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사람도 있단다. 저 맞은편에 묻혀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지.”
“에에. 감동적이다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와 딸의 대화가 들려왔다. 약간의 왜곡이 있지만 어떤가. 그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기억된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겠지?’
문득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아내와 딸이 화목하게 나누는 대화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는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후원의 한 켠. 자그마한 봉분 위에 두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한 사람이 앉아있고 다른 사람은 그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
“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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