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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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양판소(……야)이므로 개념이 없고 명랑소설이므로 어이없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막장입니다^^;;; 양판소의 깽판이 싫으신 분은 조용히 백스페이스로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인물, 사건, 지명 등은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묘한 것이 보여도 신경쓰지 마세요. 깊게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이 글은 양판소이니까요.
*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을지도 모르나 행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판소니까요.
*이 글은 명랑소설을 지향하고 있으나……양판소이므로 깽판입니다.
[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15話 프리그 왕국
39.
세상을 이루는 요소 중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신비해서 질투, 공포, 질시, 분노 등의 마이너스 감정과 함께 즐거움, 기쁨 등의 플러스 감정을 연결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두 가지의 감정 사이에서 그 두 가지 감정을 언제든지 바꾸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감정.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을 본다면 사랑이란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꼭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극단적이 되겠는가.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변환시킬 수 있는 신비한 감정.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두 감정을 섞어버리는 멋진 감정. 이러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든 가정의 안정을 위해서든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든지 간에.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차가운 가슴을 가진 마왕과 사람으로서의 사랑을 잃어버린 슬픈 국왕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에는 실패해버렸고 결국 나는 박애주의의 사도이신 아베씨와 란스를 불러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주인님.”
내가 두 사람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마왕과 폐왕은 그 몸이 삐걱거리도록, 헐도록 조교를 받아버렸다. 다시 말하면 마왕의 몸은 정신체이기 때문에 제 몸을 형상화하는 힘을 일부 잃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폐왕의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할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몸을 따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녀석들을 조교하면서부터 만든 몸이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이, 이건 뭔가요오!”
“들어가.”
“싫어요오오!”
“부른다.”
――휘잉. 털썩.
“하지 않겠는가.”
“우와아아앗! 가,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그래, 잘 들어갔다. 봉인! 역소환!”
“나의 이것을 봐…….”
――키잉.
“아, 부를 때마다 이젠 내가 위협을 느끼네. 다시는 부르지 말아야지.”
크흠. 등골이 써늘하구나. 뭐, 위협은 사라졌으니 일단 당장 코 앞에 닥친 것이나 생각하도록 하자.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었냐면……몸을 만들고 그 몸에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으며 결론적으로 마왕을 인간과 닮은 몸에 집어넣고 봉인해버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니 그 몸의 성별이 여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여자라는 사실에 내가 마련해준 몸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마왕이 발버둥을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결법은 간단했다. 내가 불렀던, 허리를 흔들흔들 흔드는 Mr. Ya.의 위협에 마왕은 즉시 내가 만들어준 몸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짧은 반항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내가 만든 것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로리가 있었다. 그것도 고스로리. 어딘가 모르게 ‘마왕이라면 고스로리’라고 하는 세계의 법칙이랄지 독자의 요청이랄지 모를 것 때문에 여성으로, 그것도 조그마한 미소녀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내가 만든 마왕의 몸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고 있다.
절대로 ‘계획대로’라는 생각으로 썩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덮치실 건가요?”
“아니. 마왕을 메이드로 쓰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 빼고는 별로…….”
그 썩소 때문인지 의심받았다. 그리고 세상이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현재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마왕은 그런 말을 했다. 슬프구나.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왜곡하다니. 아니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박복한 나날을 지내온 것이로구나. 마왕은. 새삼 마왕이 지내왔을 추악하고도 박복했을 과거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는다. 물론 마왕이 참으로 편하게 마왕 자리에 오르고 쉽게 힘을 얻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잊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 녀석이 쉽게 마왕에 올랐으면 이 녀석을 괴롭히고 싶을테니까.
“지, 지금까지 나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게다가 그 살기와 사악한 생각들은 모두 어떻게……. 쿨쩍.”
“아, 잘못했어. 대신에 이런 좋은 몸도 가지게 되었잖아. 항상 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싶어했다면서? 이렇게 다른 신들에게 들키지도 않고 평범하지만 강력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은 감사해준다면 고마울 것도 같은데.”
뭐, 그 뒤로도 급거 우울해지는 마왕을 달래고 하면서 차를 따르게 한다. 보통 메이드는 집안일을 잘 하면 된다고 하지만 왜곡된 이미지에서는 차만 잘 끓이면 되지 않던가. 다시 말하자면 볼 때만 잘 하면 된다는 이야기. 교육을 시작했다.
“마왕이 그냥 차나 따르는 일이나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내 의도대로 교육을 받는데 성공한 마왕은 그렇게 말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귀엽고도 귀여운 메이드가 되어버린 마왕이었다. 그 속마음까지 메이드로서 칭찬받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으니 이 마왕은 충분히 교육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다음은…….”
“하악하악하악하악.”
“붕괴직전이네.”
다음은 폐왕의 영혼이었다. 마왕과는 달리 이 녀석은 쉽지 않았다. 조교를 시작한지 며칠 만에 몸이 망가진 폐왕의 영혼은 실패작의 몸에 우겨넣어야 했다. 만들다가 좀 실수했던 실패작이었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몸은 그 뿐이었다. 물론 실패작이라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괜찮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재활용해도 상관없겠다는 마음으로 벌인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녀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황. 제어를 쉽게 하려면 일단 실패작에 집어넣고 추이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라? 딱 맞네?”
내 실패작인 이 몸과 신의 실패작으로 보이는 폐왕의 영혼은 딱 맞는 영과 육을 발견한 듯 결합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자동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하악하악하악하악.”
“저리 떨어져! 난 로리콘이 아냐!”
하지만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녀석이었고, 내 명령대로 하는 건 단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이 녀석의 머릿속을 만지기로 결심했다.
“자, 잠깐만. 내게 왜 이런 기억을!”
만지기 전에 서류처럼 정리된 미치기 전의 데이터를 폐왕의 몸에 기생해있는 녀석의 영혼에 백업해두고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억을 완전히 포맷해버리고 다시 ‘정상인 윈도우즈’를 세팅한다. 보안시스템으로 ‘여왕에 대한 충성’이라거나 응용프로그램으로 상시 기동하고 있어야 할 프로그램으로 호위에 대한 마음가짐이라거나……기타등등. 꽤 많은 것에 신경을 쓴다. 실패작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꽤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대충 만들어주었다고는 하지만 주목적은 마왕이 되찾은 마기를 제어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몸이 상당히 튼튼한 편이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도 세 번까지는 막아낼 수 있을 정도? 이렇게 모든 것을 제대로 조정하고 나서는 만든 아이들의 이름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제 이름은?”
“예니체리라고 해두지. 네 이름. 최후의 마왕, 리휘빌긴 투엠비라는 이름은 너무 유명하니까 말이지.”
“이 녀석은요?”
“지수라고 하고 싶지만 좀 그러니까 수지라고 바꾸도록 하지.”
왠지 모르게 술탄이라는 사람이 마왕이라면 이런 모습이라고 요청한 것 같으니 이런 이름으로 짓고 싶다고 할까. 그런 애매모호한 느낌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음, 왠지 모르게 또 기억이 지워질 것 같은 기분이……. 음?
“주인님, 예니체리라는 이름…….”
“그 말은 어떻게 알았냐?”
“주인님이 중얼거리셨던 것 같기도……어디서 들었지?”
“이상한 일일세.”
이 녀석이 예니체리라는 이름을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원하는 이름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해두자. 하지만 여자 아이의(마왕이지만) 이름을 예니체리라고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줄여서 체리라고 부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주인님.”
“뭐, 이 녀석은 이름이 그럭저럭 여자애 이름이니까 애칭은 별로 상관없을지도 모르지. 삶이 익숙해질 때까지 체리 네가 잘 돌봐줘.”
“네.”
아내들이 허용한 1년간의 유예기간의 시작이자, 그리고 프리그 왕국에서 할 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때의 마지막과 마왕이었던 녀석을 그럭저럭 쓸만한 메이드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한 때. 나는 처음으로 내 힘으로 만든 수하를 거느려보았다. 수하라기보다는 메이드가 더 정확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 녀석들 때문에 신들이라거나 악마들에게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다소 듣기는 했지만 눈 한 번 부릅뜨고 나자 모든 것이 다 알아서 해결되었다.
역시 힘은 가지고 볼 일이다.
40.
슬슬 움직이기로 생각했다.
“촉수괴물은 어떨까요?”
“기각.”
나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은 체리의 말을 기각하고는 일단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지방 영주 녀석들의 집을 찾아가 이런저런 작업을 했다. 주변을 둘러다니면서 풍수적으로 음기가 모이는 곳으로 만들고 진법으로 여러 가지 환상을 더하여 그 곳의 구성원들이 헛것을 보기 쉽게 만드는 작업이다.
“귀신이야!”
“살아있다면 오고 죽었다면 부디 천국으로 가라!”
그 다음부터는 내가 손을 댈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음기가 모인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까, 그 집에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의 성격들이 급해져서 알아서들 반란을 일으키려는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반란을 획책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야. 우후후후.”
“마치 악당같군요. 주인님.”
“아, 그런가.”
어쨌든 말하자면 그 사람들은 여왕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깎아먹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실망하고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단 사흘 동안 여왕을 도운 강대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 간이 슬슬 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밤새 귀신들이 자신들의 곁으로 오라고 속삭이게 벌인 내 노력의 결과다.
“일단은 뒷공작이 활발한 건가.”
하지만 직접 군대를 움직여서 쳐들어올 생각은 없는 것인지 독살 시도, 암살 시도, 강제 추행 시도 등등 온갖 방법으로 여왕의 권위를 떨어뜨리거나 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강제 추행의 경우에는 왕궁에서 할 수 있을리는 없었고 수도의 거리에 시찰을 나온 여왕을 납치해서 추행하려고 했다나 뭐라나. 그래봐야 내가 준 아이템들이 여왕을 보호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이런 일들은 모두 실패했다. 당연히 여왕을 노리고 있거나, 눈엣가시 같이 미워하고 있었던 귀족들로서는 이 실패들이 안타까울 따름이겠지.
“그런 고로 이번 주부터는 잉큐버스들을 한 번 출동시켜볼까.”
그래서 그런 짓을 한 녀석들의 부인들에게는 유전적인 기형아의 정액을 가지고 있는 잉큐버스들을 보내주었다. 이를 위해 노력한 서큐버스들에게는 자연의 마력을 정제하여 선물로 주었다. 일단 맛난 식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별미라고 할 수 있는 힘이니까 서큐버스들도 꽤나 좋아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지루해.”
일단 내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고 해서 뒹굴대다가 이 나라에 머문지 약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나는 드디어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마왕이었던 체리, 그러니까 예니체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그 애를 여왕의 곁으로 보내어 밤이고 낮이고 목욕탕이건 화장실이건 식사를 하든 잠을 자든 모두 안전하게 지켜내게 한 다음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나도 마왕과 폐왕, 이제는 수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 아이를 그렇게 처참하게 괴롭히기는 했지만 이 녀석들은 나보다 더 했다. 여왕의 정부가 수백에 달한다느니 정기를 쪽쪽 빼먹는 마녀라느니 하는 소문을 내는 것은 약과인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필시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피해를 입고 있거나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으니 꺼려하는 무리들이겠지.
“사람의 입이 셋 모이면 호랑이도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말이지…….”
하지만 방법이 너무 치졸하다. 당당하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 자신들의 정당함을 보이기는커녕 그저 정략에만 의존하는 짓거리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호랑이가 너희들을 물어뜯게 될 가능성을 생각했어야지.”
슬슬 복귀해볼까. 남은 기간은 앞으로 11개월.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반란군은 가볍게 부숴버리고 재도약의 기반을 기획하는 단계까지는 어떻게든 될 시간이다. 그나저나 무슨 핑계를 대고 복귀를 한다?
‘잠이 오지 않아서 돌아왔다고 하면 미친 놈 취급 받겠지?’
읽을 때는 굉장히 반가웠던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에서 모든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을 만나러온 여주인공의 말을 듣고 처음 느꼈을 감정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황당했을 그 장면. 그렇다면 대체 복귀했을 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냥 솔직하게 부인들이 봐줘서 올 수 있었다. 한 일 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마음껏 이용하라. 대신 후일 우리나라와 잘 지내보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주인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별 개성도 없는 맛을 한 차를 타온 수지가 나를 불렀다. 그런 개성이 없는, 변함이 없는 특유의 차 맛을 다시 맛보아야 한다. 기분에 따라 차맛이 달라지는 일상을 살다보니 입이 고급이 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메이드는 실패작이다. 하지만 내가 어찌 불평할 수 있을까. 내가 불평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도한 맛이 있던 메이드였던 체리가 여왕에게 파견근무를 나가고 나자 내 곁에 남은 것은 수지뿐이었기 때문이다. 뭐, 기억이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내가 기억을 완전히 포맷해버렸으니 뭐라고 말할 수도 없기도 하니까, 불평을 하는 건 사치다. 그리고 순수한 아이에게 별 문제가 없는데 꾸중을 하면 상처를 입는다.
“수지, 너도 슬슬 세상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한 번 나가볼까?”
기억이 완전히 포맷되어 버린 이 아이는 퇴마록에서 승희를 닮은 인도인 여자아이에게 빙의된 마스터의 새하얗게 정화된 영혼 마냥 순수하기 그지없다. 물론 내가 미리 인스톨해둔 지식을 기반으로 해야 할 일을 실수하나 없이 처리해버리니까 그 순수함이라는 것이 유능함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말 그대로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매뉴얼이 너무 지나치게 치밀하여 당황하거나 아이같이 우왕좌왕하며 눈물짓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랄까. 시커먼 사내, 이등병이 그러면 굉장히 열받았는데 여자애가 그러면 허허 웃게 되는 바로 그런 상황같은 것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재미없다는 이야기.
“그럼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도록 하자. 이곳도 폐쇄하도록 하고 말이지.”
“그렇다면 짐을 챙겨두겠습니다.”
“응, 그렇게 해. 되도록 가벼운 짐으로 해. 멀리 갈 것도 아니니까 말이지.”
그렇게 결정을 하고나자 행동은 빨랐다. 도성 근처까지 뻗어있던 험준한 산맥에 있던 은신처에서 나서 도성에 들어가기까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약 2주일 걸릴 정도 거리였던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쓸 것은 아니다. 일단 외모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두었고 위조한 신분패도 잘 가지고 있고……오케이. 준비 완료.
41.
“신분패를 주십시오.”
“여기에 있습니다. 수고들 많으시군요.”
도성문을 수비하는 병력을 지휘하는 기사 하나가 눈을 싸늘하게 빛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보는 순간 적의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뭐랄까, 나로서는 그저 억울하다고 외쳐야만 할 것 같은 적의라고 할까. 어머니가 낳아주신 얼굴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 당사비 삼분의 일로 줄인 꽃같은 외모인 것을!
……아니, 이러면 저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가 납득이 되어버리잖아. 자제하자. 쿨럭.
“오래간만이군요. 한 달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쨌거나 왕성으로 가서, 나는 체리에게 연락을 넣었고 여왕과는 몰래 만날 수 있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여왕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얼굴 가득 드리워있던 그림자가 확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내가 빠지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어진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방 영주들은 영 말을 들어주질 않고 말이지. 나는 그녀에게 11개월의 유예가 더 있노라고 고했다.
“그렇군요. 11개월이면 충분하겠네요.”
그 ‘충분’은 지방 영주들을 때려잡는데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꽤나 말을 안 들었는지 여왕이 체면도 잃고 이를 갈 정도였다.
“대강 큰 물길은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되겠지요. 나머진 알아서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겉보기에는 화기애애하고도 속으로는 냉담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대화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말이지. 어쨌거나 여왕이 지방 영주들을 보고 이를 가는 정도로 나도 이를 갈고 있으니까 지금 이 대화로도 충분하다.
‘이 나라를 구한 소드마스터는 여왕에게 정혈을 빨려 죽었다.’
오늘 왕궁에 들어오기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들은 소문으로 미루어볼 때, 이것들은 나를 로리콘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리 소드마스터가 망국의 공주를 도울 이유가 없다고는 하지만 협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대의大義를 가슴에 품고 있는 열혈 청년이라거나.
“감히 저를 요녀로 만든 지방 영주들을 영원히 괴롭힐 생각입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여왕으로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지요.”
고작해봐야 열서넛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꽤나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신분에 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랄까. 하긴 다른 귀족이라거나 왕족이라거나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아이가 권리도 없는데 의무만 가득 짊어져야 한다는 상황이 안타깝다. 그런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시선을 나에게 돌리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린다.
“예의범절같은 건 다 던져버리고 말입니다. 솔직히 여왕께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처럼 되실 겁니다. 저보다는 쉽게 적응하실 것 같지만요.”
슬쩍, 위로도 할 겸, 장난삼아 불쌍하다고 놀리듯 이야기하자 그녀는 ‘Wellcome to the hell"이라고 말했다. 만만치 않은 아가씨다.
“……그렇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참으로 고생했지요.”
게다가 힘들지?라는 내 물음에 도와줘라고 직접 말해버렸다.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고는 있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딱 그 정도 발언으로 해석되기 충분한 말이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돕기로 결정한다. 참고로 당장 눈에 띄게 돕겠다는 건 아니고 내가 지금 데려온 수지를 여왕의 곁에 두겠다는 이야기다. 이 아이와 내가 먼저 침투시켜 둔 체리가 여왕을 돕게 될 것이다. 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선이라는 이야기다.
“그런가요. 어쩐지…….”
체리야 아이치고는 굉장히 유능했겠지. 일단은 그 마기를 봉인하고 중간계에, 더불어 내 가족들과 미시어스 제국과 이 프리그 왕국과 여왕에게 나쁜 일을 할 수 없다고 제한을 걸어두었다고 하더라도 마왕이니까. 그렇다면 비슷하게 생긴 내 옆의 수지의 능력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겠지.
“아마도 아는 것 많은 아이같은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수지는.”
하지만 겉보기에는 여왕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일 것이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로 보이겠지.
“잘 받을게요.”
“대여하는 겁니다만.”
“반드시 빼앗아드릴테니까 말이죠.”
“뭐, 능력이 되신다면 그러세요.”
곁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도울 사람이 늘었다는 기쁨인지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계속되는 과중한 업무에 인재욕이 마구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그녀는 수지를 ‘포섭, 회유’할 마음을 가진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선다는건 애초에 ‘많이 가진 사람’에게 적선을 달라고 하는 것이랑 비슷한 것이겠지? 물론 적선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융자라거나 대출이라는 좋은 말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여왕님을 지키고 보좌하는 역할을 맡길 참이었으니까요. 대륙 동부에 있는 우리 미시어스 제국과 대륙 최남단의 프리그 왕국간에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면야 두 사람을 맡기는 건 좋은 방법이겠군요.”
잠시 쉬고.
“바나나랑 코코아도 수출 부탁드려요. 제가 제법 좋아하는 녀석들이라서.”
탁상 위에 놓인 바나나를 벗겨먹으며 느물느물하게 이야기한다. 그 좋은 관계를 나는 깰 생각이 없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다음 대의 제국 황제가 될 인물이 직접 한 이야기이니 나름대로 안심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거기에 정말로 바나나 없으면 못 살아요라는 듯 바나나 한 송이를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버리게 되면, 필사적으로 이 왕국과 제국과의 교린관계를 수립하고 싶다는 의지표출이 되는 셈이다. 뭐, 내가 열대과일 중에서는 바나나를 제일 좋아하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내 모습에 안심이 되는 듯 여왕은 배시시 웃으면서,
“저희들은 제국의 그릇과 약초, 그리고 서적을 원합니다. 그리고 황제폐하의 친서도 원하지요.”
라고 맞받아쳤다. 여왕도 제국과의 친선을 거부할 의지가 없으며 되도록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친서일까.
“되도록이면 남들이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적이고도 비밀스러운 친서였으면 하는군요.”
“아직은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왕권을 안정화시키게 되면 이번엔 다른 나라의 침입이 두려워지니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권을 안정화시키려는 순간 다른 나라가 침입하면 판이 깨지는 것이 두렵다고 할까요.”
즉 말하자면 미시어스 제국에서 ‘감히 누굴 건드려?’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친서를 보내달라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하면 외국에서 왕권의 변동과 그 이후의 혼란으로 약해진 프리그 왕국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친하다’라고 이야기할 것 같은 친서를 보내주면 고맙겠다는 이야기다.
“황태자와 불륜관계에 있는……아얏!”
“어머나, 여기에 파리가.”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 법한 핑계거리는 남녀간의 불륜이겠지. 이왕이면 목격자도 필요하려나? 아니, 목격자보다는 그냥 밀서 형식의 친서를 보내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어쨌거나, 지방 영주들의 반란부터 막고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일이군요.”
“그렇네요.”
뭐, 111명의 황태자비를 두고 있는 나라면 수백명의 정부를 두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어? 상황도 비슷할 거고 말야.
그리고 그 날 이후, 소문이 퍼졌다. 기존의 참으로 악독하도고 치사한 내용이었던 소문, 여왕에게는 수백의 정부가 있으며 그 남자들의 정기가 다 하면 시체 안치소에 버려진다라는 내용의 소문이 미시어스 제국의 황태자가 여왕과 잠시 연이 있었으며 자주 편지를 주고 받는다라는 내용으로 바뀌어서 퍼진 소문이었다. 정신을 좀 만져서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처럼 생각하게 만든 ‘프리그 왕국 수도 최고의 수다쟁이’들이 퍼트린 소문이니 금방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내 계획을 알고 있었던 누이들과 아버지, 그리고 제국의 정부에서는 이 소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 미묘한 상황이 불편했던 프리그 왕국 주변의 나라들은 알아서들 평화조약을 갱신하자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허세와 뻥의 승리다.
“이제는 반대로 뒤집을 때로군요.”
“그렇네요.”
허세와 뻥만으로 주변국가들의 침입에 대한 걱정을 던 여왕은 이번엔 다른 소문을 퍼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미시어스 제국의 황태자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허니문 기간을 즐기고 있다.’
‘여왕께서는 지난 2년 간 여관의 종업원으로만 일하고 계셨다.’
즉 말하자면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며 서신으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국의 판단일 뿐이지 두 사람 개인의 친교관계 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이 나라, 프리그 왕국과의 거래일뿐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돌려 말하자면 여왕이 실각해도 제국에서 참견할 가능성은 5할대 이하로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집권한 세력이 제국과의 계약을 이어나가겠다고 한다면 제국에서 참견할 가능성은 1할대 이하로 뚝 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외국의 침입도 견제할 수 있게 되었고, 여왕에게 칼을 들이밀더라도 외부의 요소에 의해 방해받을 일이 없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상황. 야망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보고 넘길 리가 없겠지.
말하자면 ‘어서 반란 좀 일으켜주세요.’라고 함정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말로 각개격파는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저들이 들고 일어나 한군데에 뭉쳐있을 때, 전력으로 수뇌부만 들이칠 생각입니다. 거기에 가담한 국민들은 일정 기간의 노역을 치른 후에야 자유로 풀어준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지요. 이왕이면 노역을 시키려면 국도를 닦는 쪽으로 해서……”
그리고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몰고 온다면 그 사후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영주들은 신이 나서 왕이 될 자를 고르고 그의 깃발 아래에 뭉쳤다. 이 사태를 직감하고 재빨리 수도로 몸을 피한 영주들과 바보처럼 제 영지를, 사람들을 지키려고 남으려고 했던 영주들 모두를 수도로 납치(?)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보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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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이야기가 길어지기는 하는데 짧게 끝날 겁니다.
복선깔기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