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틱 시스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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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틱 시스터 2-3
내 옆자리에서 얌전하게 젓가락질을 하고있는 사유키를 보니 꽤나 복잡한 심경이 든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치나와 관계를 가진 그날 이후로 사유키의 괴롭힘이 눈에띄게 줄어들었다. 가끔씩 단 둘이 있게 될때만 가벼운 장난을 걸어올 뿐, 평소에는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변화가 기쁘기도 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갑자기 사유키가 왜 변한걸까?]
잠시도 나를 곁에서 때어놓지 않으려 할 정도로 나에대한 집착 이 심했던 그녀다. 틀림없이 무언가 원인이 있을것이다. 대체 무엇때문일까? 갑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동생이 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부모에게 들켜 호되게 혼이 났다던지..
"밥맛이 없니?"
"아 아니오."
내가 밥은 안먹고 멍하니 있자 어김없이 츳코미가 들어왔다. 아줌마는 겉으로는 나를 친절하게 대하였지만 사실 나에게 아주 무관심한 편이었는데 그런 그녀도 내 식사문제에 만큼은 유독 민감하게 행동해 왔다.
"크흠 많이 먹어야 병을 이겨낼게 아니냐. 먹고 한그릇 더 들거라."
이상한건 아줌마 뿐 아니라 과묵한 아저씨도 내 식사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종류의 관심은 나에게 상당히 불편한 것이었다. 내가 밥을 먹던 말건..
그들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으로 내가 밥을 먹는걸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으으..]
마치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 거북하다. 나는 더 밥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속이 좋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요즘들어 밥을 자주 남기는데 그게 얼마나 예의에 어긋난 일인줄 아니?"
"마저 다 들고 일어나거라. 다 네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다."
[...]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게 되었다. 나는 딱딱한 얼굴로 다시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하아 엄마도 참~ 오빠가 배아프다잖아요. 아플때 먹어서 괜히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
뜻밖에도 사유키가 나를 도와주고 나섰다. 그녀가 끼어들자 양부모는 잠깐 서로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구나. 속이 안좋을때 억지로 뭘 먹을 필요는 없지. 그럼 이만 들어가도 괜찮다."
"네 그럴게요.. 잘먹었습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내 방에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이상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소에는 나에게 관심도 없다가 식사때만 되면 유독 신경을 쓰는 양부모. 나의 식사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 걸까? 혹시 밥에 독약이라도 탄 건가?
[하하 설마.]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양아들을, 아니 친 조카를 독살하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을까? 이 집이 못사는 것도 아니고.. 아마 내 건강이 걱정되어 그러는 거겠지. 무엇보다도 식사는 건강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나는 대충 결론을 짓고 이 문제를 한쪽으로 치워놨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유키"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다.
[사유키..]
아무래도 이상하다. 요즘들어 그녀가 보이는 행동은 아주 착하고 사려깊은 여동생의 그것이 아니던가? 이번에 나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역시 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겉으로는 얌전하게 행동하면서 뒤로는 아주 지독하게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띠르르르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나를 현실로 불러세운건 어제 선물받은 휴대폰의 벨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들어올려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도련님. 저에요~ 치나누나에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누나? 웬일로 전화를.."
"후후 도련님이 뭐하나 궁금해서 전화했죠~ 제가 사드린 폰은 잘 쓰시고 계세요?"
나에게 휴대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선물한건 바로 치나였다. 그녀는 스무살이 다되가는 어른이 휴대폰 하나 없는게 말이나 되냐며 자신의 돈으로 하나를 장만해 주었다.
"음. 잘 모르겠어. 어차피 전화올 사람도 누나밖에 없으니.."
"저런. 사유키양도 휴대폰이 있으니 번호라도 따는게 어때요?"
"마 말도안되는 소리. 그냥 누나 하나로 충분해."
사유키와 번호를 교환한다라.. 30분 간격으로 나를 감시하는 전화가 걸려올게 뻔했다. 같은내용이 반복되는 문자를 한도 끝도없이 보내온다던지. 이런건 지나친 망상일까나? 요즘들어 사유키도 꽤나 얌전해 졌고..
"호호호 기뻐요 도련님. 마치 도련님을 독점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요?"
"으 응."
....
....
치나와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그녀는 통화 내내 나를 배려하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갈 무렵 내가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해왔다.
"그건 그렇고 이번 주 주말에 시간 괜찮으세요?"
"나는 언제나 집에 틀어박혀 있는걸. 남아도는게 시간이지.."
"잘 됬군요~ 그럼 토요일날 저랑 데이트라도 하실래요?"
[데이트?]
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건 마치 연인들 사이에 있을법한 일이 아닌가? 며칠 전 치나와 뜻하지 않게 관계를 가졌고 분위기에 이끌려 좋아한다는 말까지 한 적이 있지만 사실 그녀와 그이상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치나는 아주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나같이 병 때문에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녀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자격지심일 뿐, 만약에라도 내가 치나와 사귀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더할나위없이 기꺼운 일이었다. 나는 치나가 무척 좋았다. 그녀와는 좀 더 가까이 있으면서 여러가지를 해보고 싶었다.
"우웅.. 말씀이 없으시네요. 저같은 여자는 싫은가요?"
내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말이 없자 치나는 짐짓 토라진듯한 모습을 들려주었다.
"그럴리가. 치나랑 데이트라니. 언제라도 환영이야!"
"후훗 고마워요. 마침 다음주 토요일은 집에 단 둘이니 아무 걱정없이 나갈 수 있겠네요."
"단 둘이라니?"
"모르셨어요? 주인님께서 사업상 미팅이 있어서, 그날 어디 펜션에 간다나봐요. 가족 단위의 모임이라 사모님이랑 사유키 아가씨도 같이 데려간다는데.. 아 물론 도련님은 건강 문제로 집에 두고 가신데요. 저한테 도련님좀 부탁한다고 하시던데요."
[사유키도 없다는 말이지?]
나름 꺼름직한 방해물이 자리를 비켜 준다니 아주 바람직하다. 나는 기꺼이 치나의 데이트 요청을 수락해 주었다. 그 뒤에도 치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눈 것 같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음날
또 다음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나는 온통 며칠 뒤에 있을 치나와의 데이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뭐 하는일도 없지만 서도..
그리고 드디어 토요일이 되었다. 잠에서 깬 나는 설레는 가슴을 좀처럼 억누를 수 없었다.
"음 그럼 히로시를 잘 부탁드려요."
"염려마시고 다녀오세요 사모님."
주인 내외는 사유키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아줌마는 양아들인 나를 집에 남겨두고 다른 가족들끼리만 나간다는게 약간 마음에 걸리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사실 나에게 그런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탁
문이 닫히고 모든 방해자들이 사라졌다. 사유키도 얌전히 자신의 부모님을 따라갔으니 이제 남은건 나와 치나 뿐이다.
"도련님. 일단 집안 정리를 해야하니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으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호호 걱정마시고 tv라도 보고 계세요. 금방 끝낼게요."
치나는 밝게 웃으며 나를 거실로 떠밀었다. 나는 쇼파에 앉아 하릴없이 리모콘을 만지작 대었다.
[tv는 재미가 없네.]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간다. 이 집은 왜이리 쓸데없이 넓어서 청소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하는걸까? 빨리 끝나라 빨리.
내가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이 드디어, 치나가 청소를 다 끝냈다.
"도련님? 옷이 그거밖에 없나요?"
내가 여전히 평상복 차림인걸 보고 치나가 깜짝 놀랐다.
"난 이런 종류의 옷밖에 없는데.."
"저런, 이 집에 오신지 한달이 넘어가는데 사모님이 옷 한벌 안해 주셨나요?"
"...."
치나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꽤나 무책임한 양부모다. 내가 옷에 별 신경을 안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출복 한벌도 사주지 않다니..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후줄근한 평상복을 입고 쇼파에 앉아있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치나는 화사한 분홍색 톤의 나들이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
평소의 메이드복 차림의 치나도 예뻤지만, 사복차림의 치나는 제대로 마주보기 힘들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최소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유. 그렇게 제 미모에 넋나가 계시지 말고요. 나름 도련님과 첫 데이트인데 옷차림이 그래서는 영 안어울리잖아요."
"아 그 그렇지."
치나 말대로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잠시 본론을 잊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 옷을 입고 나가야 하나?
"휴우.. 할 수 없죠. 일단 나가면 옷가게 부터 가죠. 그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직장인 누나가 히키코모리 남동생 밥사주러 나온줄 알 것 아니에요?"
"푸흡."
나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치나가 우리 처지를 비유한 말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긋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도..
"고마워 치나."
"넷?"
화제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나의 발언에 치나가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식으로 웃어본게, 웃을 수 있었던게 아주 오랜만인거 같아. 특히 이 집에 온 이후론 처음이야. 그러니까 고마워."
"도 도련님도 참. 갑자기 부끄럽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냥 고마워서. 후후"
나의 미소를 보고 치나도 곧 마주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저도 고마워요. 귀여운 도련님을 만나게 되서."
무언가 목적을 갖고 밖에 나온건 거의 몇년만에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치나가 이끄는 대로 지하철을 타고 시내라는 복잡한 곳으로 향한다.
"으.. 너무 정신사나워."
여기저기 사람이 많고 소음도 시끄럽다. 이런 장소는 나에게 아주 불편하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데..
"도련님. 다른데에 신경쓸 것 없어요. 그냥 옆에있는 저에게만 집중하면 되잖아요."
치나는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고 속삭여줬다. 그 말대로 나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서 복잡한 도심을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었다.
"에? 여긴.."
간신히 도심을 벗어나 나와 치나가 도착한 곳은 여러 옷가지가 진열된 한 매장이었다. 즉 옷가게라는 소린데,
"일단 옷부터 사야지요. 후후 어서 들어가죠."
"하지만 뭔가 잘못 온거 같아. 여긴.."
나는 당황하여 뒷걸음 쳤지만 치나는 막무가내였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결국 나는 그 가게안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
"와 정말 예뻐요. 후후~ 뭐가 도련님한테 잘 어울릴까요?"
치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이런 저런 옷들을 들어올렸다. 나는 뭐라 할 말도 없어 목석처럼 한쪽에 굳어있을 뿐이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 겠어!]
말 그대로였다. 여긴 확실히 옷가게가 맞다. 그리고 일단 데이트에 앞서 옷부터 사야하는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긴 아무리 살펴봐도 여성복밖에 없지 않은가?!
"치나누나. 나는 이런 옷을 입는 취미따윈 없어. 너무 날 곤란하게 하지 마."
"에헷 하지만 전 도련님에게 한번 입혀보고 싶은걸요?"
그녀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건 프릴이 달린 소녀취향의 원피스였다. 내가 저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니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시 싫어. 이러지마 누나."
치나가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약간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건 아니야 누나. 제발 사유키처럼 행동하지 말아줘.
"참 도련님도.. 한번 입어보는것도 안되요?"
내가 명백히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치나는 실망한듯 고개를 떨구었다. 확실히 치나는 사유키와 달랐다. 강압적으로 자기 좋을데로만 행동하는 사유키와는 달리 치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구. 그 옷좀 저리 치워줘."
"정말 안되요? 흑. 제 일생의 소원인데도요?"
"치 치나누나.."
"정말 죽어도 안되는 건가요? 흑흑"
하지만 치나는 다른 의미로 강적이었다. 그녀가 눈물까지 보이며 이런식으로 나오니 나로선 어떻게 해야할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도 첫 데이트인데 서로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저 옷은 정말 입기 싫은데..
"알았어요. 도련님이 흑. 싫으면 어쩔 수 없죠. 흐흑"
치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 터덜 옷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러 간다. 그리고 나는..
"딱 한번만."
"에?"
"딱 한번만이야. 그.. 입어볼게."
결국 치나의 눈물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와아 정말요?! 도련님 최고~"
"헙 읍!"
치나는 어제 낙심했냐는 듯 상큼하게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큰 가슴이 내 얼굴에 부벼와 숨쉬기 곤란하다. 이대로 그녀의 품 안에서 질식해 죽는게 사실은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죽으면 저 옷을 입을 필요도 없고..
나는 치나의 눈물에 넘어간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치나가 고른 원피스를 입고 해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는데 옆에서 치나는 연신 감탄사를 발한다.
"하아 너무 예뻐요~ 질투날 정도~ 아웅 귀여워~"
치나는 연신 내 뺨을 부벼댔다. 거울을 보니 프릴달린 소녀취향의 원피스가 내 가녀린 외모와 끔찍할정도로 잘 어울린다.
"하아 하아. 다 다른것도 입어 보죠."
웬지 숨이 가쁜듯한 모습으로 약간 불명확한 발음을 하는 치나에게 나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이제 그만 벗을레."
"아웅 좀만 더요~ 하응"
[뭐지?]
치나의 기색이 묘하다. 왜 저런 요염한 소리를 내는거지? 얼굴도 열이라도 난듯 빨갛고.. 나는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지만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원피스를 벗어 내렸다.
"아우 웅~"
치나는 무척 실망한 듯 보였지만, 나도 이젠 한계다. 저런 옷을 계속 입고 있다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 안됬지만 이쯤에서 관두는게 좋겠다.
"이거 얼마에요?"
"에 사는거야?"
.
.
.
결국 치나는 나에게 입혔던 그 원피스를 사버렸다. 그리고 선물이라며 강제로 떠넘기는게 아닌가?
"나 이거 필요 없어. 어차피 평생 입을 일도 없을거야."
"하웅 그래도요. 그냥 갖고라도 계세요. 제 선물이라구요."
그렇게 까지 말하니 더 이상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다음 옷가게에선 제대로 된 외출복을 사서 나에게 입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론 아주 즐거웠다. 나는 치나와 수족관도 가보고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도 나눠먹고, 약도날드에서 "햄버거"라는 신기한 음식도 먹어보고.. 연인들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꿈결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데이트 비용의 전부를 치나가 다 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치나는 자신이 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제가 누나잖아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하지만.."
"후후 도련님 용돈도 모자랄텐데 제가 좋아 끌고나온 데이트 비용마저 부담시킬 순 없죠. 전 어차피 평소에 돈 쓸 데도 없어요."
"...."
치나의 말대로 나는 돈이 없었다. 용돈이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돈이 제로였던 것이다. 나는 치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자였지만 내 재산은 전부 양부모가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용돈"을 한 푼도 준 적이 없다.
[좀 화나는데?]
물론 내가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서 주지 않은 것이겠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용돈쯤은 알아서 챙겨줘야 할게 아닌가? 확실히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도련님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으 응?"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치나가 문득 말을 건넸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닌게 오랫만이라."
"그래요? 에휴. 그럼 빨리 집으로 돌아가죠."
치나는 무언가에 상당히 낙담한듯 보였다. 왜 저러는 거지?
"치나누나. 뭐 안좋은 일이라도."
나의 질문에 치나는 직접적으로 대답을 주었다.
"당연하죠. 도련님이 피곤하시니 실망할 수 밖에요."
"그게 무슨말이야?"
"종일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역시 저 곳 아니겠어요?"
치나는 손을 들어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한 건물을 가르켰다.
"hotel?"
"...."
내가 무심코 네온사인의 글자를 읽어내자 치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호텔이라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무심한 나도 두 남녀가 호텔에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도는 안다. 치나와 내가. 그러니까 그..
"저기 치나. 난 괜찮아. 피곤하지 않아."
남자라면 이럴때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약간 생각끝에 나는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하하 도련님. 농담한거에요. 정말 저기 가면 전 잡혀들어간다구요. 요즘 원조교제 단속이, 쿡쿡 얼마나 심한데요."
"에.. 원조교제라니?"
"후후훗"
치나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웃기만 했다. 웬지 바보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대신요~ 오늘 밤엔 제 방에서 같이 자 주시겠어요?"
[아..]
치나가 너무 사랑스럽다. 나는 당연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요~ 도련님."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치나와 함께 있다는게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행복에 끝에는 언제나 그 몇 배나 되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최소한 내 경우에는 늘 그래왔다.
겨우 날 학대하는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 학교에 들어간지 일주일만에 내인생에서 지긋지긋한 병마와 첫 대면을 가졌고, 골수 이식자가 나타나 한시름 놓은 다음날 병원 계단에서 굴러 복합 골절로 6개월간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음이 맞는 병실 친구가 생겼더니 며칠 안되 영안실로 떠나버리기도 했고.. 그리고 오늘도 또
"아하하하~ 기다렸어 오빠~ 왜이리 늦은거야. 기다리다 미쳐 죽는 줄 알았잖아."
"사 사유키? 네가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 펜션에 있어야 할 사유키가 왜 집에 있는거지? 그리고 또 저 모습은 대체..
"정말 반가워. 그리고 치나 너도 반가워. 오늘밤은 너무너무 즐겁겠는걸?"
나와 치나가 사유키의 묘한 광기에 눌려 현관에 못박혀 있는 사이 내 어린 여동생은 쇼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길다란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음 그러니까.. 지하실이 좋을 것 같아~ 거긴 "방음"이 잘 되거든. 이히힛"
의식을 잃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건 사유키의 텅 빈 동공에 비친 치나의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치나도, 그리고 나 역시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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