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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厚の野望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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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0 회 작성일 24-01-09 07: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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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타지에 고된 야근을 뒤로 한 기러기 남편이 된 부용이 자신의 처소에 돌아왔을 때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야 했다. 등만 붙일 수 있다면 아무데나 상관없는 주의라서 무관심했다. 그래서 그녀의 방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드나드는 하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심심하면 권각술을 시전하거나 칼을 휘두르곤 해서 살풍경했다. 군주가 냉대를 받는다고 볼 수 있겠으나, 어차피 이름뿐이고, 당장 덕후 본인부터 집사로 신분을 꾸며서 있는 형편이다.


그 온기라고는 일 미리도 없는 자기 처소가 리모델링(?) 되었다. 천장에는 장식등이 달려있고, 휘장은 새로 바뀌고 회색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탁자 위에는 관상용 꽃병과 싱싱한 향기를 뿜어내는 과일이 접시에 보기 좋게 담겨 있다. 어딜 보나 귀빈을 맞이하는 데 적합한 응접실이었다.


실제 들어선 부용도 내문內門을 반쯤 열고 공손히 시립해 있는 서향이 아니었으면 잘못 왔나 싶어서 도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단아한 비취의를 입은 서향은 이곳 식솔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차림이었다.


“이거 네가 다 한 거야?”
“세휘 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임시라고는 하나 부용님의 처소가 이렇게 무미건조하면 정서 에 좋지 않으니까요.”
“흐응~”


부용은 신기한 듯 사방을 기웃거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살벌하다고 하는데, 밀실에서 백 년 가까이 지내온 기억이 있는 그녀로서는 이 곳 정도면 충분히 극락이었다. 하늘 위에 하늘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부용은 의자에 앉은 채 시립해 있는 서향에게 돌연 물었다.


“내 전속인이 된다고?”
“네, 영존의 명命이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가랑이 한 번 벌리는 게 싫었나? 정조대라도 채워야 안심할 모양인가.”


멍하니 있던 서향의 몸이 의미를 깨닫고 분노로 떨렸다. 부용은 아무렇지 않는 표정이었다.


“송구하오나, 남들 앞에서는 그런 말은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건방지네. 날 네 취향에 맞게 재단하려고 드니, 내가 누군지 잊은 모양인데. 그날 꼴이 되고 싶어?”


붉은 눈동자가 직시하자 뱀 앞에 눌린 개구리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 날의 무참한 풍경이 환시가 되어 서향의 뇌리를 덮쳤다.


“흑....!”
“비벼줄 언덕을 찾는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덕후가 한 편으로 만들라고 언질을 줬지만, 아직 아빠처럼 사탕발림에 익숙하지 못하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극적으로 겪어왔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은 아직이다. 단도직입 적어도 얻을 만하면 아빠 말대로 하고, 아님 즉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이면에는 다시 한 번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성魔性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향은 격동을 누르기 위해 의식적으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담담한 신색으로 고했다.


“노자老子께서는 부쟁不爭의 덕德을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이를 이용하는 자는 하급이라고요. 소녀가 비록 군자는 아니오나, 화합을 새길지언정 뇌동雷同은 삼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부용이 멍하니 있었다. 뒤의 말을 어디선가 들은 대사인데 한참 후에 그것이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요는 자신은 줏대가 있으며 지금 복종하는 것도 협력의 연장선이라는 의미였다. 원래 학문과 인연이 없는 부용/마라이었으나 명색이 공주가 되자 안 배울 수 없었다. 세휘가 담당으로 그녀의 주관적 판단으로 논어를 습득하는 중이었다.


“인의仁義로 얽으려드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인간이 아니라니까? 네가 본 대로 나는 괴물이라고. 굳이 부정할 생각도 없는걸.”


부용은 천진한 얼굴로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벗어.”
“네?”
“옷을 벗으라고 했어. 얼마나 비싼 몸이기에 흥정을 하려는 건지, 이 둔 눈으로 확인해보게.”


서향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부용을 본다면 당장 목을 조를 지도 몰랐다. 새엄마로부터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이건 시험이다. 잠시 망설인 서향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탈의하였다.


약간 숙인 어깨의 쇄골을 가리듯 늘어진 가지런한 검은 머리카락, 그 밑에 흔들거리는 풍만한 유방과 대조적으로 가는 허리, 그리고 다시 내려가 풍요롭게 솟은 엉덩이와 늘씬한 종아리와 발목이 여성의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다른 한손은 방초를 가린 서향은 결심과 달리 부용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외면했다.


-먹고 싶어.


부용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말 그대로 저 부러운 피부를 절개하고 그 속을 원없이 먹길 원했다. 맑고 신선한 내장을 헤집고 뜨거운 김을 뿜을 피로 목을 축이고 싶었다. 부용은 발정기와 같은 충동이 죽이라고 외치는 것을 애써 눌렀다. 


그와 같은 부용의 시선을 서향을 모를 리가 없었다. 뚫어져라 노려보는 데 은근히 후회가 되었다. 부용의 살육을 라이브로 본 서향이다. 자신의 행동은 알아서 제물로 바쳐진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행이 눈 앞의 은공은 자제력이 있는 듯 했다. 몇 번 불길한 침을 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냈다.


“하란다고 바로 벗다니....부끄럽지 않아?”


서향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천만의 일이라도 보은을 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야수한테 은혜니 갚는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소리지. 넌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하오나, 금수는 보호할지 언정 배려를 모릅니다. 은공은 당장 구명이 아니라 소녀에게 계속 살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설사 변덕이라 하셔도 제 2의 인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은공에게 쓰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당시 부용이 그냥 갔더라면 서향으로선 다시 몸을 파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을 외면한 후처와 지긋지긋한 가정 싸움을 해야 한다. 서향이 어태 껏 악착같이 후처와 싸우고 살림을 꾸린 것은 죽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 도리였다. 그러나 이번에 자신이 팔린 것은 아버지가 외면했기 때문이다. 즉, 도리를 저버린 셈이니 서향은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릎 꿇은 상태에서 조아린다. 하얀 목덜미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등을 보면서 부용의 회가 동하는 마음에 여러 갈래의 이질적인 감정들이 찾아왔다. 그것은 귀찮음, 미안함, 안쓰러움 죄책감 등이 혼합된 것이었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신세지고 있던 금보옥으로부터 마검령이었던 자신을 폐기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당장 옷을 벗고는 맨 몸으로 물러나려고 했었다. 당시 금보옥이 크게 놀라서 철회했었지. 마라는 나신으로 절하는 서향을 내려다보며 엄마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살인 충동도 가신 상태였다.


사락사락 옷을 뒤적이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린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의문을 가지면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고개 들어.”


서향은 고개를 들고는 놀랐다. 부용은 실한 오라기 걸치지 않는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향처럼 성숙하진 않지만, 이제 여아에서 소녀로 탈바꿈하는 미묘한 색향이 감도는 몸매였다.


“이걸로 쌤쌤이지?”


쌤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처지를 표명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입매를 꽉 다무는 모습이 어린 동생이 고집을 피우는 것 같아 서향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 했다.


그 온화한 미소를 접한 부용은 마음에 들지 않아 쳇, 하고 불량스럽게 내뱉더니 첫 번 째 명으로 옷을 입으라 하였다. 서향과 부용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심가장의 구석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도 관계를 재조정하고 있었다.


전자가 조용하게 둘만 이루어졌다면 후자는 대대적으로 떠들썩하게 벌어졌다. 날이 밝아오자 덕왕부의 집사가 괴인의 난입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 위한 것이라며 설레발을 쳤기 때문이었다.


"요즘 내가 심가장에 머물러 있는데 느낀 게, 존나 열심히 호위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애. 근데 대상련이 열심히 안 해주잖아. 내 목숨은 얼마 안 남았을 거야, 아마."


주 집사 모드인 덕후는 유지들을 불러서는 자조적인 어조로 푸념하고 있었다. 벌써 두 시진 째 넘어가는 한탄에 모인 이들은 짜증이 무럭무럭 끓었다. 간밤에 괴한이 난입하였다는 소문에 잘 보일까 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이들이다. 특히 심우량은 자신이 임의로 분류한 파벌, 즉 이매가, 고소영, 강부자, 장보질 등등을 불러 선도하듯이 방문했다. 무너진 담벼락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하고, 주 집사가 무사하다는 말에 찾아가 위로의 말을 했다. 처음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독여줄까 했지만, 끊기지도 않고 이어지는 수다에 학 떼고 말았다. 중간에 고소영이 말을 끊어보려 끼어들었다가, 주 집사가 근처에 있는 연적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귀 밑을 스치는 바람에 상처는 없었지만, 모인 이들은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라고 말한 주 집사의 발언으로, 그가 생각보다 막나가는 꼴통임을 깨우쳤다.


다행히 덕후의 네버 엔딩 장광설은 금보옥의 방문으로 끊겼다. 금보옥은 정익훈을 대동하고 왔다. 대외적으로 둘은 면식만 있는 문외한이므로 겉치레 티가 팍팍 나는 인사를 나누고, 지극히 냉랭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대화를 교환했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괜찮아 보이오? 범인은 잡았소?”
“아문과 근처 문파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신출귀몰하여 아직은 기별이 없습니다. 경비 인원을 늘리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놀라게 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크흠, 거 말인데, 경비만 늘려가지고 가지고 되겠나? 보아하니 산을 부수고 강을 가르는 수준의 고수가 아니면 무용할 것 같은데...”


삐딱하게 말하자 금보옥은 옆의 정익훈을 소개하였다.


“본련의 최고수를 붙여드리겠나이다.”
“정익훈이라고 합니다. 집사님의 안전을 최선을 다해 보위해드리겠습니다.”
“에잉, 최선 따위는 패자가 즐겨하는 말이지. 절대적으로 안전해야하오.”


정익훈의 주름파인 눈썹이 모욕감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예” 라고 확답하진 못했다. 고도의 은신술로 심처까지 잠입하고, 나갈 때는 수 개의 담벼락을 부순 침입자는 심가장의 방위를 책임진 그들로서는 치욕이었다. 더 큰 치욕은 범인의 무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강호의 판단에 괴인를 상대하려면 련주 금보옥이나 단혼도 형욱의 레벨은 되어야 우열을 점칠 수 있을 터이다.


-아니, 그보다 놈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


처음부터 대상련에 등장했을 때부터 불쾌했다. 흑룡방 점거라는 괴상한 내기로 상공 소리를 듣게 만들더니, 금보옥이 상관세가를 정리하여 위세를 떨치자, 시기하듯이 대상련 해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여 대상련의 입지를 흔들었다. 금보옥이 덕후에 대해 정리한 듯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익훈으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 관계라는 것을 정익훈조차 몰랐으니, 대상련 출신들 대다수는 덕후를 변절자 대하듯이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금보옥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는 입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네까짓 게 어딜 가면 어딜 가겠느냐는 뉘앙스다. 덕후도 그걸 알고는 발끈하는 티를 냈다.


“손님 접대가 엉망이군! 이런 조막만한 별장이 누가 좋아서 있는 줄 아는가!”


덕후가 노여워하자 이 틈을 타 심우량이 동의 하듯 은밀히 간했다.


“주 대인, 기분 전환을 위해서라도 잠깐 거처를 옮기심은 어떤지요?”
“흠, 적당한 곳이라도 있소?”


심우량의 눈길이 장보질을 향했다. 덕후도 자연히 따라 주시했다. 문득 불안감을 느끼는 장보질의 귀에 심우량의 잔잔한 목소리가 창처럼 귓가를 찔러댔다.


“여기 장 대인은 지부까지 오른 현인賢人으로 은퇴하여 풍광이 좋고 아늑한 곳에 장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호걸을 좋아하여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 빈객이 되고 싶어 하지요. 장 대인이 허락하신다면 주 대인이 편히 유하실 수 있을 겁니다.”


덕후가 그런가, 하고 쳐다보자 장보질은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둘의 알력에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서 안전을 꾀하려는데, 심우량은 자신을 개미지옥에 몰아넣고 있었다. 심우량과 그의 파벌들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그간 명쾌한 답 없이 어영부영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심우량에게 깊은 분노가 치솟았지만, 고소영이 자신의 말 좀 끊었다고 대뜸 연적을 날린 덕후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으므로 참고는 얼마든지, 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네!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어야지! 당장 가세!”


이전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내실은 떠들썩한 상태가 되었다. 금보옥은 냉소를 머금을 뿐 딱히 나서서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새로운 추종자를 거느리고 우르르 물러나가자 정익훈이 가까이 다가와 소리를 죽였다.


“잘 참으셨습니다.”
“참고 자시고 할 것 없는 일인걸요.”


담담한 대답에 정익훈은 그녀의 평정심에 감탄했다. 그러나 금보옥은 참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연기였으니까. 다만, 연기임에도 자신에 대해 삐딱한 태도로 구는 덕후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다 끝나면 잔뜩 쥐어짜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까. 어머, 내가 무슨 망상을....


자신도 모르게 내부에 꿈틀거리는 감각에 금보옥은 표 나지 않도록 안색을 단단히 굳혔다. 정익훈을 비롯한 이들은 그녀가 이번 일로 모욕감을 느끼는 중이라고 판단하고는, 평소보다 빠릿하게 일처리를 하게 된다.


주 집사의 이전으로 심가장이 다소 한산해졌다면, 반대로 장가장은 난리가 났다. 보통 귀인의 행차가 있으면 맞이할 준비도 해야 하므로 미리 기별을 보내 며칠 간 여유를 주는 것이 통례인데, 주 집사가 당장 가겠다고 강짜를 부렸기 때문이다. 장보질은 급히 사람을 보내 가능한 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 했다.


다행히 집안의 대소사를 꿰고 있던 양녀들, 추소연, 반옥령, 장미미가 급전을 받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시중인들을 진두지휘한 덕분에, 장원을 정리하고 조촐한 주연을 베풀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주 집사 일행이 당도했을 때는 부산떨지 않고 각자 위치에서 귀빈을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장가장에 어서 오십시오.”


안사람이 없고, 집사 역할을 양녀들에게 맡긴 고로, 추소연이 대표로 인사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읍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는 흠칫 놀랐다. 무망루에서 삼공자와 내기르 할 때 동행으로 있던 이였다.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거만한 태도로 자매들을 훑어보고 있지 않는가.


“가희歌姬들이오?”


툭 내뱉는 무례한 발언에 세 자매는 물론이요, 장보질의 안색까지 싹 변했다. 장보질은 불쾌함을 억누르고 낯을 억지로 폈다.


“제 딸들입니다. 안 사람이 없기에, 대신 바느질과 비질이라도 시킬까하고 집안일을 맡겨 오던 차였습니다.”
“난 또! 전에 어디 주루에서 본 듯하더이다. 그래서 가희로 알았소만. 흠, 그때 한량들과는 잘 되어 가는가?”
“염려해주신 덕에....”
“잘 안 되면 내게 오시오. 첩 정도는 고려해 주리다.”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덕후. 세 자매는 쓸개를 한 번에 입에 문 것처럼 쓴 표정이었고, 장보질도 다를 것 없었다. 심우량은 험, 하고 제 딴에는 위로라고 다음처럼 말한다.


“거, 자식들 단속 좀 잘하는 게 어떤가. 자네의 치부는 곧 우리들의 망신이라네.”


소매 아래 장보질의 주먹이 핏기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물렸다.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정신이 다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끼며 쥐어짜듯 내뱉었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내 명이 있을 때까지는 근신 하여라.”
“아빠...”
“미미야!”


미미가 투정부리려하자, 옆에 있던 반옥령이 급히 팔을 잡아 제지하였다. 셋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장보질은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고는 몇 번의 심호흡과 함께, 귀빈이 찾아올 때 주연을 베푸는 후당後堂으로 덕후 일행을 안내했다. 덕후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활개를 쳤고, 심우량과 일행들도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장보질이 사라지자 셋은 서로 머리를 맞댔다. 장미미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아빠가 저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첨 봤어.”
“저 치, 무망루에 봤던 참관했던 인간 아니야?”
“맞아.”


반옥령의 물음에 일단 긍정한 추소연은 생각에 잠겼다. 삼공자들은 덕후와 그저 일면식만 있는 사이라고만 밝혔다. 그가 월하노인이 된 것을 비밀로 하기로 했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소월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아. 한 번 물어봐야겠어.”
“언니! 아버지께서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장미미가 겁에 질린 소리를 내자 추소연이 안심하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내일부터지. 아직 운신의 자유는 있어. 누가 공자님들께 좀 갔다 왔으면 해. 나는 호출이 있을지도 모르니 남아있어야 해. 장미미는 차근차근 설명할 계제가 아니고. 옥령아, 네가 가야겠어.”
“응, 알았어. 조심해.”


반옥령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 길로 보표를 불러서는 심가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삼공자들은 괴인 잠입 사건으로 경비의 강화 문제로 딴 데 못가고 붙박이 하는 신세였다. 쪽문에 서 있는 호위무사한테 이름을 밝히며 연통을 넣자 일 각도 되기 전에 초제학이 나왔다.


“아니,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이오?”


초제학은 반옥령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설마 했지만 직접 보게 되자 놀랐다. 그 와중에도 쪽문 안에 난 곁채로 자리를 옮겼다. 반옥령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분들은요?”
“다들 여기 있소. 업무가 폭주하는 바람에 바빠서 말이오. 연락하면 오긴 할 거지만...”
“그럼 불러주세요. 시급을 다투는 일이에요.”


초제학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읽고는 하인을 불러 둘을 오도록 했다. 다시 일각이 흘러 반옥령이 미지근한 차를 마실 동안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윤식은 경호 체계 점호를 위해, 황철웅은 무너진 담벼락 복구 현장 감독으로 아침부터 뛰어다녔으니 땀내가 훅 풍겼다.


반옥령은 침을 삼키고는 오게 된 사연을 풀어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맺음하는 동안 셋의 안색은 시시각각 심각하게 변했다.


“분명 첩으로 오라고 했소?”


성정이 거친 황철웅이 벼락치듯 외쳤다. 부릅뜬 눈에 문득 겁을 먹은 반옥령이 어깨를 움츠리자 초제학이 주의를 주었다.


“그 도깨비 면상 치우게. 아가씨께서 놀라잖나.”
“이런 제길, 차별하기는. 우리 미미는 안 그런다고.”
“여기서 그 소리는 왜 나오나. 아무튼, 심각해”
“안 그런 줄 알았는데....이제 보니 순 도둑놈이었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 하나는 모른다니 딱 그 짝이야.”


초제학의 중얼거림에 황철웅이 흥분한 듯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떠돌던 자신들을 대상련과 연줄을 놓아주고 중매도 서주었다. 그런데 도로 물리라니? 지금까지 호의가 자신들을 낚으려는 수작질 같아 혐오감이 치밀었다. 열받은 황철웅과 달리 강윤식과 초제학은 침착했다.


“그것도 있겠네만....작당의 냄새가 풍긴단 말일세. 자네들 기억나나? 주군이랑 주 집사랑 언제부터인가 틀어진 것 말이야. 자세한 정황은 확인하지 못해서 기만가 했지만....”
“일단 주군을 뵙고 사정을 알리는 게 어떤가?”
“그건 너무 성급하네. 안 그래도 주 집사가 심가장을 나간 일로 심사가 편치 못하시네. 보고는 잠깐 미루고...그 분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건 어떤가?”


에둘렀지만 강윤식은 초제학의 말을 알아들었다. 천하문의 소월하를 두고 말함이리라.


“그 분께는 내가 가보겠네. 자네는 반 소저를 배웅해주게.”
“저는 괜찮아요. 보표랑 함께 있으니까요.”
“아오. 하지만 내가 안심이 되질 않소.”


초제학이 자신을 주시하며 힘주어 말하자, 반옥령은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살짝 고개를 떨궜다. 이를 지켜보던 황철웅이 훼방을 놓듯 퉁을 놓는다.


“나는?”
“자넨 가서 무슨 일이 있으면 주먹부터 휘두를 것이니 안 돼. 일하는 중인데 셋 다 자리를 비우면 정 어르신한테 한바탕 경을 치게 될 걸세.”
“그 딴 영감이 뭐가 무섭다고.”


투덜거렸지만 그 뿐, 황철웅은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초제학이 반옥령을 데리고 나가자 강윤식은 현장으로 돌아와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급히 소월하의 거처로 향했다. 남녀 사이가 유별한데다가 행장을 꾸리는 법부터 차이가 나므로, 강윤식은 오래 기다릴 것을 각오했지만 일주향이 되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소월하는 잠시나마 생과부 신세가 된 염미홍이 주변에 티내도록 매가리 없는 모습에 수하 나름의 위로-한바탕 갈구기-를 하던 차였다.


잔뜩 설교를 듣고 있다가 손님이 왔다는 말에 만세를 부르는 염미홍을 억지로 붙잡아, 소월하는 강윤식을 전당前堂에서 함께 맞이했다. 강윤식은 염미홍의 등장에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소월하의 두 번 보고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란 답변과 함께 한 채근에,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소월하는 무언가 추론하는 듯 하다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강윤식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뜻대로 안 움직여 주니 새로 대항마를 세울 심산인 것 같군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모르죠, 확실한 건 왕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으니까. 관의 개입이 있으면....”


우희선이 있으므로 있다손 쳐도 하나마나지만 강윤식이 거기까지 알 리가 없다. 곧 의미를 깨닫고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저들은 재력도 넘치고 인맥도 광대하니 적당한 거래처만 있으면 출자해서 상단을 만드는 것 쯤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대항마를 내세우게 된면...부족한 것은 무력 일 테니 가급적 여러분들을 회유하려 들지 도요.”
“우리는 은원을 분명히 합니다. 그게 무림인이니까요.”
“그 길이 삼선녀와 헤어지더라도 요?”


소월하의 지적은 강윤식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대답을 못하는 그를 두고 소월하는  그녀답지 않게 온화한 음색을 냈다.


“너무 섣부른 예단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대들의 주군과 후회는 없도록 하세요.”
“방법이 없겠습니까?”


강윤식은 저도 모르게 매달리는 투가 되었다.


“저로 인해 성사된 사이니 끊으면 도리가 아니겠죠. 최선을 다해보겠어요.”


마지막 말투는 낮의 금보옥과 똑같이 닮았지만, 강윤식에게는 그마저 한 줄기의 서광이었다. 감사함을 표하자 소월하는 되었다는 듯 살짝 비켜서고는 조용히 일렀다.


“당장은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보다 내일 낮이 되면 련주님께 분명히 알려두세요. 이런 일은 오해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강윤식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그가 남기고 간 무게를 지게 된 소월하는 무덤덤하게 차의 연녹색 물빛을 응시하였다. 손은 탁자 끝에 올린 채 검지로 톡톡 두들긴다. 염미홍은 눈치를 보다가 하품을 삼키며 물었다.


“응~ 상공이 삼선녀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소월하는 염미홍을 따스한 눈으로 취급했다. 눈칫밥으로 먹고 산 염미홍은 그것이 구제불능의 열등생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볼을 긁적였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 으음, 그래도 남자란 그런 거잖아.”
“잠꼬대를 해도, 귀 긁는 동작 하나도 계산할 인간이 문주님네 상공이랍니다. 장가장의 삼 선녀 아무리 재원이라 해도 련주님 하나보다는 못하니까요.”
“으...그거 욕인가?”
“당연히 욕이죠. 살을 그렇게 맞대고도 상공에 대해서 너무 모르시는 것 같군요.”
“웅...좋기만 한데.”


혀를 날름 내밀며 무언가 빠는 듯한 제스처에 소월하의 단정한 얼굴이 가벼운 혐오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불결하게!”
“자자, 소 군사.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그 추잡한 짓 때문에 인간이 생을 부여받는 거니까.”
“우리 문주님도 유식한 소리를 다하시네요. 그 인간이 그렇게 말했나요?”
“아주 아니라곤 못해...하지만 말이야. 치마만 둘렀다고, 무책임하게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로 속삭이고는 뒷일은 몰라라하는 허리하학적인 남자들 보다는 그래도 낫잖아? 분명히 선을 긋고, 미녀가 좋다고는 해도, 기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진 않잖아.”
“문주님의 사고방식은 참 긍정적이기도 하시지. 제가 사랑을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요, 포상으로 길들이기 하는 것 같아서 언짢다고요.”
“몰랐어? 운우지락은 서로 길들이기를 하는 거라고? 날 가지고 싶다고 헐떡이는 상공을 대하면....”


염미홍은 씩 웃었다. 소월하가 아닌 척 귀를 쫑긋하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귀여워. 징그럽고 유치한 구석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애정을 가지면 감당할 수준은 되고, 침대에서는 내 말을 순순히 들어주거든. 그때만큼은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고마울 지경이야.”


두 손을 모으며 도취된 듯 눈을 반짝인다. 무형의 아우라에 소월하는 눈이 부신 것 같은 기세에 압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우라는 금새 꺼졌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염미홍의 기세가 팍 죽고는 음울하게 변했다.


“뭐어....이래도 자기변명 밖에 안 되지. 독차지 하고 싶어. 무능해서 나눠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분해죽겠어. 아아, 다른 여자들처럼 콧대 세우지 못하고 비위 맞추는 것 밖에 못하는 내가 너무너무 한심해. 미홍아 왜 사니?”


들떠 있는 것은 보기 싫지만 그렇다고 침울한 쪽도 달갑지 않으므로, 소월하는 화두를 돌렸다.


“자아, 내일이면 엄청 바빠질 테니 일찍 들어가 주무세요. 이 기회에 대상련만 아니라 천하문의 입지를 늘릴 만큼 늘려야죠.”
“.....너라면 괜찮아.”
"그 문제가 아니라니까욧!“


소월하는 무너진 염미홍의 컨디션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강윤식이 방문하기 전까지 갈군 시간만큼, 기운을 북돋아주는 말로 소비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보름 뒤, 장가장에서 화려한 발족식이 거행 되었다. 심우량, 이매가, 고소영, 강부자 등등 양주의 유지들이 대표로, 출범한 상회의 이름은 “실용상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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